[바다로 연결된 인도 세계와 동남아]
1. 대륙에서 따로 떨어진 ‘인도’라는 독립세계
(히말라야 산맥이 장벽이 되어 독자적인 세계가 탄생했다. 기원전 2300년경-)
가. 다양하고 복잡한 인도사회
인도의 국토면적은 남한의 약 32배이다. 인구 역시 10억 2700백만 명으로 남한의 약 21배이며, 중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많다.
그마저 오는2025년 경에는 추월 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인더스 강에서 유래한 이름인 ‘인도’의 정식 명칭은 힌디어로 ‘바라트’이다. 바라트는 고대 서사시 [바하바라티]에 등장하는 바라다 왕에서 유래했다. 인도는 현재 인구 1억 6천만 명인 파키스탄(우르두어로 맑은 나라)과 더불어 인도양으로 돌출된 인도 반도를 무대로 독자적인 역사를 전개해왔다. 인도는 인구의 70%가 농촌에 사는 농업국이다.
인도의 공용어는 힌디어(Hindi language)이다. 하지만 이 밖에도 10만 명 이상이 사용하는 언어가 무려 59개나 되며, 전체적으로 1600개 이상의 언어가 있다. 또한 북부의 아리아계 언어와 남부의 드라비다(Dravida)계 언어로 크게 구별되는데, 이 두 언어는 영어와 한글만큼이나 다르다고 한다. 인도는 중국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독립적인 ‘세계’라고 해도 좋을 만큼 복합적인 사회이다.
나. 히말라야 산맥 때문에 대륙에서 멀어진 세계
동서로 평행하게 자리한 복합적인 산맥 여러 개와 해발 7600m 이상 되는 고봉 30여 개로 이루어진 히말라야 산맥 때문에 대륙에서 격리된 인도반도는 흑인인 드라비다인(주로 남부에 거주)과 백인인 아리아인(Aryan), 카이바르 고개(Khaibar Pass)를 넘어 아프가니스탄에서 침입한 여러 민족(주로 북부에 거주)의 손에 의해 고유한 역사가 전개되었다.
히말라야 산맥 남쪽에는 동서로 약 2400km, 남북으로 약 280km-400 km에 이르는 광대한 힌두스탄 평야(Hindustan:페르시아어로 힌두교도의 땅)가 있다. 이곳은 인더스 강(주요 작물은 밀)과 갠지스 강(주요 작물은 쌀)이 만들어낸 충적평야로 이후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로 마우리아 왕조를 비롯해 여러 왕조가 흥망성쇠 하는 무대가 되었다.
특히 갠지스 강 유역은 세계 유수의 비옥한 토지로, 방대한 인구를 부양하고 있다. 이 평야에는 12세기 이후부터 이슬람교도가 침입했고, 16세기에 이르러서는 무굴제국(1526~1858)이 성립되어 평원 전체를 지배하기도 했다.
다. 두 개의 산맥 사이에 위치한 광대한 데칸 고원
힌두스탄 평원 남쪽에 위치한 용암으로 형성된 고지대가 바로 데칸(Deccan) 고원이다. 이 고원과 북인도 상이에는 나르마다(Narmada) 강이 흐르는데, 이 강은 기쁨을 준다는 의미이며 시바신의 화신으로 여겨진다.
동쪽으로 경사져있는 데칸 고원은 해발 600m 정도의 고원으로 주요 하천은 모두 동쪽의 뱅골 만으로 흐른다. 게다가 인도양에서 부는 계절풍(몬순)이 서고츠 산맥(Western Ghats)으로 인해 차단되기 때문에 우량이 매우 적고, 1년 가운데 6개월~9개월은 비가 내리지 않는 건기이다. ‘고츠’라는 말은 계단 모양의 경사면을 뜻한다.
인도 반도의 동서 해안선을 따라 각각 동고츠 산맥과 서고츠 산맥이 자리 잡고 있다. 동고츠 산맥은 평균 높이가 약 450m로 완만한 편이며, 뱅골 만의 해안선을 따라 약 80~240km의 폭으로 펼쳐진 평야는 ‘코로만델(Coromandel) 지방’이라고 불린다. 이 지방은 해안선이 단조로워 항구가 많지 않다. ‘코로만델’이라는 이름은 과거 번영했던 초라만다람 국의 ‘초라 지방’ 에서 유래되었다.
험준한 서고츠 산맥과 아라비아 해 사이에 위치한 약 50~110km의 폭일 가늘고 긴 해안 평야가 ‘마라발 지방’인데 ‘마라발’이라는 이름은 드라비다어의 ‘마라(산)’와 아랍어의 ‘발(지방)’의 합성어로 ‘산이 있는 지방’이라는 뜻이다. 고온 다습한 열대 몬순 기후인 이 지방은 후추 등과 같은 향신료 산지로 유명하며, 이런 배경으로 인도양 교역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다.
한편 반도 최남단에 위치한 코모린 곶(Cape Comorin:힌두교의 시바신의 부인인 두르가(쿠마리)에서 유래)은 아라비아 해와 인도양, 벵골 만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으로, 이곳은 여신 쿠마리가 목욕한 장소라고 하여 힌두교의 성지가 되었다.
2. 인도에 두 개의 인종군이 있는 이유
(흑인 드라비다인을 쫓아낸 백인 아리아인. 기원전 2300년경-)
가. 드라비다인의 인더스 문명이 사라진 이유
기원전 2300년경 인도 북서부(오늘날 파키스탄)를 흐르는 인더스 강 유역에 ‘인더스 문명’이 일어났다. 인더스 강은 길이가 3180km이고, ‘인더스’라는 명칭은 산스크리트어로 ‘강’을 의미하는 ‘신도프’에서 유래했다.
문명이 일어난 중심지는 인더스 강에서 700km나 떨어진 지점에 있는 모헨조다로(신도어로 ‘죽은 자의 언덕’이라는 뜻)와 하라파였다. 이 두 도시에 사용된 벽돌이 동일 규격인 것으로 미루어 인더스 문명을 대표하는 이 두 도시는 모두 같은 문화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편 인더스 문명의 여러 도시는 페르시아 만을 경유해 메소포타미아와 교역을 했다. 이 사실은 화물의 봉니(문서의 귀중품을 봉함을 할 때 사용한 진흙덩이0를 누르기 위한 인더스 문명의 고유한 활석제 인장이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유역, 페르시아 만 서안의 교역 중심인 바레인(Bahrain) 섬에서 발굴된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바레인 섬은 아라비아 반도의 페르시아 만 쪽에 위치해 있는데, 이 섬은 오지의 담수층과 페르시아 만 바깥쪽의 염분이 짙은 바다가 연결되어 출입구에 위치해있어서 아랍어의 ‘바르(바다)’와 레인(두 개)’ 이 합성되어 섬 이름이 되었다. 이곳은 예로부터 인도와 교역을 하는 거점으로서 16세기에는 포르투갈에 점령당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1986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와의 사이에 길이 24km의 다리가 건설되어 현재는 아라비아 반도와 육지로 연결되어 있다.
활석제 인장에 새겨진 250~400종류의 글자를 통해 인더스 문자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확인되었지만, 인장에 새겨진 글자 수가 너무 적어서 아직 글자의 의미를 해독하지 못해 인더스 문명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많다.
전성기 때 인구가 3만 명이었다는 사방 1.6km의 도시 모헨조다르는 폭이 각가 10m와 3m인 ‘바둑판’ 모양으로 정연하게 시가지를 정비했고, 각 집에는 오수대가 설치되어 있어 오수가 오수대의 4분의 3에 달하면 자연히 폭이 30cm인 하수구로 배출되는 시스템도 마련되어 있었다.
이들은 면직물을 왕성하게 생산했고, 소와 보리수를 신성시했다. 또 도시에는 큰 목욕탕을 만들었고 ‘물의 정화력’이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현재의 인도 문화의 토대는 인더스 문명에 의해 구축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문명을 담당한 사람들은 흑인인 드라비다인(드라바다어는 현재 남인도에 거주하는 타밀(Tamil)인이 계승하여 현지 약 1억 7천만 명이 드라비다어를 사용하고 있다)이었다. 하지만 도시 건설에 필요한 벽돌을 대량으로 만들기 위해 인더스 강 유역의 많은 주목을 함부로 베어내는 바람에 여러 차례 홍수가 발생했고, 강의 수로가 변경되어 기원전 1700년경 인더스 문명은 붕괴하고 말았다. 환경이 이변이 문명의 기반을 무너뜨린 것이다.
나. 카이바르 고개로 들어온 아리아인이 인도의 주역으로
대륙에서 인도로 들어오는 입구에 위치한 나라가 바로 아프가니스탄이다. 이 아프가니스탄에 인접한 파키스탄 북서부에는 ‘카이바르 고개’가 있는데, 이곳은 중앙아시아에서 인도로 파상적으로 침입하는 여러 민족의 침입경로였다.
고대에도 아리아인이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을 연결하는 카이바르 고개(해발 1000m 정도이며 고갯길이 40km 정도 이어진다. 가장 높은 지점은 해발 1029m)를 넘어 인도에 침입하여, 기원전 1500년경에 충적평야가 펼쳐진 ‘펀자브 지방(Punjab: 페르시아어로 ‘5개의 강’)에 정착했다.
펀자브 지방은 의미 그대로 인더스 강 본류와 상류의 지류 5개가 합류하는 지역인데, 1947년에 동서로 분할되어 동쪽은 인도령, 서쪽은 파키스탄령이 되었다.
한편 인도에 침입한 아리아인은 이 지격의 원주민이며 흑인인 드라비다인을 평균 고도가 600m 정도인 데칸 고원을로 쫓아냈다. 데칸 고원은 산스크리트어의 다크시나(오른손)와 파토하(나라)의 합성어로 ‘오른손의 나라’ 즉 ‘남쪽 나라’라는 뜻인데, 당시 인도사회에서는 정면을 향해서 볼 때 오른쪽이 남쪽이고, 왼쪽이 북쪽을 가리켰다. 산스크리트어는 인도.아리아계이므로 아리안인의 침입경로에서 본 위치를 나타낸 말인 듯하다.
다. 인도 문화의 중심이 인더스 강에서 갠지스 강으로
기원전 1000년경 아리아인 가운데 일부는 원주민을 정복하면서 습하고 풍요로운 갠지스 강 유역으로 진출했다.
길이가 2500km인 갠지스 강의 ‘갠지스’는 산스크리트어의 ‘강가를 영역한 것이다. ‘강가’는 신성한 설산인 히마바드(히말라야:눈의 집)의 말을 의미한다.
갠지스 강이 힌두스탄 평원에 접어들면 하구까지 약 1000km를 가는데, 이 1000km의 해발 차이가 불과 100m 밖에 안 된다. 이 강은 히말라야를 수원으로 하여 유유하게 흐르며 세계에서 가장 많은 비가 내리는 지대인 아삼(Assam)을 흘러, 갠지스 델타에서 브라마푸트라(Brahmaputra) 강 (힌두교의 3대신 가운데 하나인 ‘브라만의 아들’)과 합류한다.
평탄한 평야를 흐르는 갠지스 강은 2~3년에 한 번씩 대홍수를 일으켰지만, 유역은 곡창지대로써 인도 문명의 중심이 되었다.
7억 명 이상의 힌두교도에게 갠지스 강은 신 그 자체이며, 사후에 이곳으로 유골을 흘러 보내면 극락왕생할 수 있는 ‘성스러운 강’이었다.
라. 고대인도의 중심도시 파트나
기원전 6세기에는 갠지스 강 중류지역에 위치한 도시인 파탈리푸트라(산스크리트어로 ‘파탈리라는 나무의 아들’)가 인도의 중심이 되었으며, 마가다국 등 16개 나라들이 서로 싸우게 된다.
파탈리푸트라는 마가다국, 마우리아 왕조, 굽타 왕조 등이 수도로 정했던 도시로, 오늘날 비하르 주의 주도이며 쌀의 집산지인 파트산(산스크리트어로 마을)를 말한다.
카트만두(Katmandu) 관광지 입구에 위치한 파트나는 인구 90만 명 이상이 거주하는 대도시인데, 이곳도 고대 인도를 대표하는 역사적인 도시이다.
오늘날에도 갠지스 강 중류에 위치한 바라나시(영어이름은 베나레스, 지류인 바라 강과 아시 강 중간에 위치해 있으며 두 강의 이름을 합성한 것이다)는 힌두교도의 최대 성지로써 세계적으로 유명하며, 강가를 따라 5km나 이어지는 고츠(Ghat:목욕장)는 기도와 목욕, 장례식에 이용된다.
아리아인은 [베다(지식)]라는 성전에 뿌리를 두며 복잡한 의식을 중시하는 브라만교(바라문교:Brahmanism)를 발달시켰고, 드라비다인 등의 원주민과 자신들을 피부색으로 차별하는 4가지 계층의 신분제도(카스트)를 만들었다.
카스트는 나중에 다양한 직업을 가진 집단이 편입되면서 세분화되고 복잡해졌다. 직업과 신분은 세습되었고, 서로 다른 카스트간의 결혼을 금지시겼다.
3. 불교가 융합되면서 힌두교 세계로 통합된 인도
(여러 왕조가 교체되는 가운데 침투한 힌두교. 기원전 4세기~기원후 4세기)
가. 7억 명 이상의 신자를 보유한 힌두교의 세계
힌두교의 ‘힌두’란 인더스 강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의 ‘신두’에서 유래했으며, 기원전 5세기경에 페르시아인이 인더스 강 유역에 사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했다가 이윽고 ‘인도 사람들’을 가리키게 되었다.
7억 명 이상의 신자를 보유한 힌두교는 인도 풍토에 뿌리를 내린 다양한 신앙과 풍속이 모여 만들어진 것이었으므로 특별히 창시자는 없다.
힌두교도는 브라만(신관)과 소를 중요하게 생각하고(쇠고기를 먹지 않는다), 카스트 집단 안에서만 결혼하며, 해가 뜰 때 태양신을 찬양하는 찬가를 부른다. 또 파괴와 부활의 신인 시바와 유지의 신인 비슈누로 이어지는 다양한 신들과 마을, 집, 종교집단 고유의 작은 신들을 믿고 있다.
나. 알렉산더의 원정을 계기로 성립된 마우리아 왕조
인도 최초의 대 제국인 마우리아 왕조가 성립된 계기는 알렉산더 대왕이 이끄는 대군의 서북 인도 침입이었다.
알렉산더 대왕이 인도 원정에 실패하고 철수한 뒤, 대군을 조직했던 마가다국 찬드라굽타(Chandragupta)가 기원전 317년경에 마우리아 왕조를 일으켜 힌두스탄 평야를 정복했다. 또 제3대인 아소카 왕은 남인도의 드라비다인 정복에 나서 비참한 전쟁을 펼친 끝에 남단 지역을 제외한 전 인도반도 대부분을 지배했다.
아소카 왕은 지방의 자립성을 인정하면서, ‘불교’라는 이데올로기로 인도 세계를 통합하려고 했지만 제대로 되지 않아, 결국 아소카 왕이 죽은 뒤 반세기만에 마우리아 왕조는 멸망하고 만다.
마우리아 왕조가 멸망한 뒤, 아프가니스탄에서 인도로 진출한 크샤나 왕조가 간다라 지방의 프루샤프라(산스크리트어로 ‘인류의 마을’에서 유래, 무굴 제국의 악바르 황제가 오늘날의 페샤와르로 개명)와 중부에 위치한 자무나 강(브라마푸트라 강: Brahmaputra), 우안의 마투라(‘신에 속하는 것’이라는 뜻, 오늘날에는 힌두교의 크리슈나 신의 성지)를 중심으로 하여 갠지스 강 유역까지 지배 지역을 넓혔다. 이 왕조의 전성기는 카니시카 왕 시절이었다.
동서교역이 요충지를 지배한 크샤나 왕조에서는 간다라 미술로 알려진 불교 예술과 대승 불교가 번성했는데, 오늘날 인도에서는 이 왕조를 정복 왕조라고 부른다.
다. 힌두교가 통일한 인도세계
크샤나 왕조가 서아아시아의 사산 왕조의 공격을 받고 쇠퇴하면서, 320년에 갠지스 강 중류 지역을 중심으로 찬드라굽타 1세가 굽타 왕조를 건설했다.]
이 왕조의 왕들은 자신들을 ‘왕 중의 왕’이라고 칭했고, 힌두교의 비슈누신(태양신)을 숭배했으며 산스크리트어를 공용어로 삼았다.
또 왕의 비호 하에 각지에 힌두사원이 건립되면서 불교는 갈수록 힌두교에 눌리게 되었다.
힌두교도들의 생활에 기준이 된 [마누 법전]과 민족서사시 [마하바라타], [라마야냐]도 이 시기에 완성되었으며, 아라비아 숫자의 기원이 되는 인도 숫자와 제로 관념도 이 시기에 태어났다.
4. 중앙아시아에서 온 무굴 제국
(힌두교를 잘 이용해 지배했지만……16세기)
가. 터키인의 무굴 제국이 인도를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
티무르 제국(1370~1507)은 중앙아시아에서 몽골 제국의 부흥을 꾀했지만 이를 이룩하지 못했다. 결국 이 제국의 최후의 왕인 바부르는 터키계 유목인 우즈베크족에게 서 투르키스탄을 빼앗겨,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수도인 카블(페르시아어로 ‘창고)로 도망쳤다.
민첩한 아프가니스탄의 왕 ‘바부르’는 북인도사회가 혼란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고서 뛰어난 화포를 보유한 군대를 동원해 10배나 되는 병력을 갖춘 북인도의 지방정권군을 물리치고, 자무나 강부터 갠지스 강 유역의 입구에 위치한 요해의 땅 델리(Delhi:입구. 현관)를 점령했다. 이어서 갠지스 강 유역을 평정한 뒤 자신의 부하에게 통치를 맡긴다. 이로써 1526년 인도에서 ‘무굴제국’이 탄생하게 되었다.
‘무굴’은 ‘몽골’의 사투리다. 무굴 제국은 페르시아어를 공용어로 삼은 국가로 지배층은 이곳을 침입한 터어키계 민족(이슬람인)인 전형적인 정복 왕조였다.
아프가니스탄의 조종을 받았던 무굴 제국이 인도사회에 뿌리를 내린 것은 3대 황제인 악바르 황제(제위 1566-1605) 시대였다. 13살 9개월이 나이로 즉위한 악바르 황제는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는 힌두교도를 회유하지 못한다면 무굴 제국을 인도 제국으로 만들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유력한 힌두교도 부족에서 왕비를 맞이하는 한편으로 힌두교도에 대한 차별적인 세금을 철폐했으며 유력자를 정부의 고위관리로 맞이했다. 그는 또 ‘위대한 정복자’로서 힌두스탄 평야를 평정해 아프가니스탄과 통합된 대 제국을 실현했다.
악바르 황제는 인도 지배의 효충지로 자무나 강 오른편에 새도시 아그라(아리아인의 집)를 건설했으며, 성새와 화려한 건축물을 제국의 상징으로 삼았다. 또 자무나 강과 갠지스 강의 합류지점에 위치한 성지에 아그라성을 구축한 뒤, 이슬람교의 신 알라에서 따와 알라하바드(알라의 도시) 명명했다.
또 페르시아어의 지명 접미사인 ‘아바드’를 붙인 이슬람 식민 도시를 인도 각지에 건설했다. 예를 들어 남인도의 대도시 하이데라바드는 페르시아어의 ‘사자(라이언)의 도시’에서 유래한 것이다. 파키스탄에도 같은 이름의 도시가 있다.
나. 이슬람교의 지배로 혼란스러워지는 무굴제국
무굴 제국의 전성기를 맞이한 제5대 황제 샤자한은 페르시아계의 절세미인 뭄타즈 마할(왕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과 결혼하여 19년 동안 살면서 모두 14명의 자녀를 뒀다. 그리고 몸타즈 마할이 14번 째 자녀를 출산하다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그녀에 대한 사랑의 증거로 2만 명의 장인과 노동자를 동원하여 22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묘를 건조했다.
이 묘가 바로 사방 57m의 건물로, 높이 약 58m의 돔 지붕을 가진 타지마할(타지는 몸타즈의 애칭)이다.
이탈리아에서 수입한 흰색 대리석에 새긴 섬세한 조각과 격자 세공을 갖춘 이 건물은 ‘환상의 대리석’이라고 불리고 있는데, 이는 전성기 시절의 무굴 제국의 부를 나타내는 증거이기도 했다. 현재 타지마할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있다.
샤자한의 뒤를 이은 아우랑제브 황제는 이슬람교도라는 사명감이 매우 투철한 왕이었다. 그는 군사 활동을 반복하여 데칸 고원 이남으로 영토를 확대해, 제국의 영토를 가장 크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전 인도의 이슬람 화를 추진하면서, 힌두교도에 대한 차별적인 세를 부과하는 등의 정책을 펼친 탓에 각지에서는 힌두교도들의 반란이 일어났고, 결국 제국은 혼란과 분열이 일어나 ‘전국 시대’와 같은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세포이(Sepoy: 페르시아어로 병사를 의미하는 ‘시파시’에서 유래)’라는 인도인 용병을 고용한 영국과 프랑스의 동인도회사가 세력을 확장해나간다.
5. 종교 대립으로 나라가 대분열되다
(뿌리 깊은 힌두와 이슬람 문제. 19세기~20세기)
가. 영국에 의해 완전히 식민지화된 인도
영국은 인도인 용병 ‘세포이’를 이용해 인도 각지의 번왕(마하라자)를 잇따라 무찔러 19세기경까지 인도의 주요 지역을 지배하에 넣었다. 이로써 인도는 영국의 실질적인 식민지가 되었다.
영국이 인도를 자국의 공업제품 시장으로 바꾸어 놓자, 인도의 전통산업인 면직물 산업은 쇠퇴하고 말았다. 그러자 1957년 그때까지만 해도 영국의 세력 확대를 도와온 ‘세포이’가 일제히 붕귀했다(세포이 항쟁)
봉기군은 영국의 세력을 인도에서 쫓아냈지만 영국 동인도회사는 네팔의 그루카 병(그루카는 산스크리트어의 목동을 의미하는 고라크샤에서 유래)과 본국에서 온 원군을 이용해 반격을 가했고, 옛 지배층의 분열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1859년에 승리를 거두었다. 영국은 그렇게 무굴제국을 무너뜨리고 동인도회사를 해산시킨 다음 1877년 빅투리아 여왕을 황제로 하는 ‘영국령 인도제국’을 성립시켜, 인도를 완전히 식민지로 만들었다.
이 때 영국은 인도 전체 면적 45%를 차지하는 지역에 있는 크고 작은 562개의 번왕국(번왕은 힌두교도인 경우에는 ‘마하라자’이고, 이슬람교도인 경우에는 ‘나와브’라고 불렀다)이 반독립국가 상태로 존속하는 것을 허용했다. 하지만 이 때 맺어진 조약에 따라 번왕국은 영국 주둔관의 감시를 받아야 했고, 전시에는 식민지 정부에 협조하게 되었다.
나.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의 대립이 낳은 대혼란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7년 70년에 걸친 영국의 지배가 끝난다. 이로써 이슬람교도의 동서 파키스탄과 힌두교도의 인도 연방도 분리 독립하게 된다.
인도의 국명은 인더스 강 유역을 의미하지만, 인더스 강 유역은 파키스탄 령이 되었다. 파키스탄은 1958년에 새 수도를 건설해 ‘이스라마바드(Islamabad:이슬람의 도시)라고 명명했다.
인도와 파키스탄이 서로 분리 독립할 때, 1500만 명의 주민 가운데 힌두교도는 인도로 , 이슬람교도는 파키스탄으로 대거 이동했는데, 이 때 큰 혼란이 생겨 20만 명에서 5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두 교도의 융화를 주장한 비폭력 불복종의 독립운동 지도자 간디도 이 소동 속에서 암살당했다.
다. 진흙탕 싸움으로 변한 카슈미르 문제도 모두 종교 대립 때문에 발생
독립을 하면서 큰 문제가 된 것이 자로 식민지 시대에 영구의 보호국이었던 562개의 번왕국을 처리하는 문제였다.
이런 번왕국이 처리는 1951년까지 거의 해결되었지만, 번왕이 힌두교도이면서 주민 대다수는 이슬람교도였던 카슈미르 지방의 귀속과 관련해 인도와 파키스탄이 서로 양보하지 않자, 제1차 인도-파키스탄 전쟁(1947-1949)이 일어난다.
1949년 유엔 결의로 정전 라인이 결정되어 남쪽의 인도 지배지역과 북쪽의 파키스탄 지배지역으로 나뉘었지만 양측 모두 이에 납득하지 않고 1965년과 1971년 두 차례에 걸쳐 전쟁을 벌였다. 1972년에 잠정적으로 경계선이 결정되긴 했지만 지금도 여전히 문제점을 안고 있는 이것이 바로 ‘카슈미르 문제’이다.
인도와 파키스탄, 중국에 둘러싸인 인구 약 1100만 명의 산악지대이다. 카슈야파 왕(원서에는 왕이라고 되어 있어나 ‘카슈야파’라는 한 수도승이 광대한 호수를 간척하여 육지를 만들었다고 한다. 카슈미르 라는 지명은 이 왕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이 지방의 특산품은 캐시미어 염소의 어린 털을 원료로 만든 직물 ‘캐시미어’이다. 1971년에 일어난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은 파키스탄의 일부였던 동파키스탄이 독립을 선언하면서 발생했다. 즉 동파키스탄의 독립을 진압하기 이해 파키스탄이 군사행동을 일으키자 인도군이 동파키스탄을 지원함으로써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이 전쟁은 인도의 압승으로 끝났고, 그 결과 방글라데시가 독립을 선언했다.
한편 1998년이 되자 두 나라는 잇따라 핵실험을 실시, 지역 분쟁이 핵전쟁으로 확대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6. 교통의 요충지였던 동남아시아
(인도의 변경에서 교통의 요충지로. 1세기-)
가. 생긴지 얼마 되지 않는 동남아라는 명칭
면적이 남한의 약 45배나 되는 동남아는 하나의 거대한 세계다. 하지만 ‘동남아’라는 말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이 작전 용어로 사용한 ‘사우스 이스트 아시아(South-east Asia)’를 번역한 것으로 이 말을 사용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19세기에 이 땅에 진출한 유럽인은 인도차이나(Indochina:인도차이나(중국)의 중간에 위치한 땅)와 인도네시아(Indonesia:인도의 섬들) 등으로 불렀다. 즉 이곳을 힌두 세력의 변경지역으로 보았던 것이다.
확실히 중국 문명의 영향을 받은 베트남(Vietman) 북부를 제외하고, 13세가까지 동남아는 인도 문명의 영향 하에 있었다. 예를 들어 말레이(Malay) 반도와 자바(Java) 섬, 수마트라(Sumatra) 섬 등의 지명과 미얀마(Mayanmar) 등의 국명, 싱가포르(Singapore), 자카르타(Jakarta) 등은 모두 인도어에서 유래한 것이다.
다양한 환경의 동남아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농업 발달이 늦고 인구가 적으며, 북에서 남쪽을 향해 파상적으로 민족 이동이 반복된 지역이었다. 19세기 초반에도 총인구가 1000만 명 정도였으며, 여기에 화교와 인교(인도인 이민자)가 이주하면서 인구가 급격히 증가했다.
고대부터 ‘바닷길’의 요충지였던 말리카 해협
동남아는 말레이 반도 수마트라 섬 사이에 있는 길이 800km에 폭 약 50km~320km의 마라카(Malacca: 멜라카라는 방향을 내는 나무에서 유래) 해협을 중심으로 인도양과 벵골 만, 남중국해가 교차하는 ‘바닷길’의 요충지에 위치해있다.
동쪽이 좁은 말라카 해협은 북쪽 인도양의 내해인 안다만(Andaman) 해와 남쪽의 남중국(South China)해를 연결하는 해협으로, 이곳에는 빈탄 섬(Pulau Bintan: 보크사이트의 산지, ‘별’이라는 뜻)과 바탐 섬 등이 리아우 제도(Riau Archipelago)가 있다.
이 두 개의 섬과 싱가포르 옆에 위치한 말레이시아의 조흐르 주(Johore: 카시아 계피 나무)는 싱가포르의 자본투자 덕분에 ‘발전하는 삼각지대’라고 불리고 있다.
말라카 해협은 양쪽 해안이 산맥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바람에 의지해 항해하는 범선이 나아가기에는 어려운 곳이었다. 또 종종 해적의 습격에다 얕은 곳이 많아 항해하기 힘든 곳이었으며, 남북으로 풍향이 다른 계절풍(몬순)을 기다려야만 했다.
영국이 구축한 피낭(Pinang: 빈랑나무) 섬의 조지타운(George Town:영국 국왕 조지 3세에서 유래)과 싱가포르(산스크리트어로 ‘사자의 마을’), 전통적인 무역항 말라카가 이 해협이 중요한 항구가 되었다.
동남아는 열대산 향신료와 향목, 금 등의 특산품이 풍부해서 인도 상인과 이슬람 상인, 중국 상인이 동남아로 진출했고, 그 뒤를 이어 유럽 상인이 진출했기 때문에 다양한 문명이 섞인 국제성이 짙은 지역이 되었다. 오늘날에는 하루에 평균 300척의 대형 유조선이 왕래하는 ‘오일 로드’가 되었다.
7. 힌두교와 불교… 옮겨가는 인도 문명
(다양한 종교가 뒤섞인 섬 세계. 1세기~9세기 초반)
가. 거대 하천 메콩 강이 기른 동남아 문화
동남아에서 가장 오래된 나라는 메콩(Mekong) 강 하류에 건설된 ‘부남’인데, 이 나라는 인도인 이주자와 크메르인에 의해 1세기~2세기에 건국되었다.
부남의 외항 오케오(Oc.Ao:캄보디아어로 ‘아름다운 수로’)에서는 로마의 금화와 중국의 청동 거울 파편도 발견되었는데, 이로써 이 나라가 넓은 교역권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메콩 강은 티베트 고원에서 시작되어 중국과 라오스(Laos), 타이(Thaland),캄보디아(Cambodia), 베트남(Vietman)의 5개국을 흐르는 동남아에서 가장 큰 대하로 길이가 4180km이다.
동남아 최대 담수호인 캄보디아의 톤레사프(Tonle Sape)호는 우기부터 건기에 걸쳐 수량이 3분의 1로 감소하는 메콩 강 하류 델타 지역의 수량을 조절하는 역할을 했다.
메콩 강은 오늘날의 프놈펜(Phnom Penh) 부근에서 크게 둘로 나뉘고, 캄보디아와 베트남으로 다시 나뉘어 비옥한 델타 지역을 만들어냈다. 이 거대한 델타 지대에서 동남아 국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베트남 델타의 최대 도시는 사이공(크메르어의 ‘도시의 숲’에서 유래)으로 이곳은 외양선이 그대로 역행할 수 있는 항구이다. 오늘날에는 베트남의 독립운동 지도자인 호치민의 이름을 따와 ‘호치민(Ho Chi Minh)’이라고 부른다.
메콩은 타이어로 ‘아주 큰 강’이라는 뜻이다. 이 강을 중국에서는 타이어의 ‘란상(100만 마리의 코끼리)’에서 따와 란탕(Lancang) 강이라고 부른다. 특히 메콩 강은 베트남에서 뱀처럼 구불구불 나아가면서 몇 갈래로 나뉘는데, 이 강을 머리가 아홉 개 달린 용에 비유해 ‘구룡강’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메콩 강 하류에서 활약했던 사람들은 크메르(Khmer)인과 참인이었다. 참인이 세운 베트남 남부의 참파(Chjampa)도 인도 문명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오늘날 소수민족으로 전략한 참인은 어업과 교역에 종사하고 있으며 이슬람교도가 많다.
나. 수미산에 비유한 앙코르와트
6세기 크메르인(크메르인의 태조 ‘독립한 캄푸 왕’이라는 뜻으로 캄보디아라고 함ㅂ)은 메콩 델타에 ‘앙크르(힌디어로 나가라(도시)가 변한 것)’를 수도로 하는 대 농업국을 건국했고, 전성기인 12세기에는 힌두교의 우주 중심에 있는 수메르(Sumer)산을 본떠 앙코르와트(Angkor Wat)를 건립했다.
수메르 산은 수미산, 마하메루(위대한 메루)라는 별칭이 있으며, ‘묘고산’이라고도 번역한다. 이 말은 장대한 천극이라는 뜻이며, 시바신이 사는 곳이라는 해발 4560m의 티베트 남서부에 위치한 카일라스(Kailas)산을 가리킨다.
약 850m와 1000m 사방 광대한 지역에 세워진 대규모 건조물인 앙코르와트는 대해를 상징하는 폭 190m와 길이 5.45km의 연못에 둘러싸여 있는데, 이곳은 왕의 영묘이기도 하기 때문에 서쪽의 사후 세계와 마주보는 형태로 지어졌다. 참고로 ‘와트’는 사원이라는 뜻이다.
캄보디아의 신전 건설 양식은 앙코를 왕조를 정복한 타이인 문명에도 영향을 주었다. 와트 프라케오, 와트 포 등으 사원이 드문드문 위치해있으며, 많은 관광객들이 몰리는 방콕도 캄보디아의 수메르 산을 본뜬 건축양식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한편 자바 섬 동부에 위치한 최고봉(3376m)인 활화산은 ‘세메루(Semeru) 산’이라고 명명했다.
다. 해협을 통과하는 선박에 대한 과세로 번영한 두 왕조
7세기 되면서 여러 도시가 연합해, 말라카 해협을 지배하는 해양왕국 슈리비자야를 건국했다. 이들은 해협 동쪽 입구에 위치한 수마트라 섬의 무시(Musi) 강 하구에서 팔렘방(강이 모이는곳)을 수도로 13세기까지 번창했다.
이 왕국은 말라카 해협을 통과하는 상선을 대상으로 세금을 징수해 거대한 부를 획득했다. 당나라 승려 의징은 파렘방에서 1000명 이상의 승려를 부양했다며 팔렘방의 번영을 기록했는데, 현재 이 부근은 대규모 유전지대다.
동남아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자바 섬에서는 9세기에 사일랜드라 왕조(Sailendra dynasty)가 번영했고, 인도에서 전해진 대승불교를 믿었다.
이들은 8세기 말부터 9세기 초반에 걸쳐 중부 자바의 족자카르타(전 술탄 ‘족자 가의 도시’) 북서 30km 지점에 한 변이 115m인 정방형태에다 6층 방형과 3층 단을 겹쳐 놓은 정상에 종 모양의 수투파(불탑)를 배치한 보로부두르(Bordbudur)를 건설했다. 보로부두르는 높이가 42m이며 정상에 이르는 회랑의 총 길이가 10km나 되는데, 보로부두르는 산스크리트어로 ‘언덕 위의 불교 사원’이라는 뜻이다.
8. 타이를 제외하고 영국과 프랑스의 지배하에 들어간 메콩 강 유역
(열강이 진출해 인도차이나 반도의 원형. 13세기~19세기)
가. 타이 상업으로 번영한 아유타야 왕조
13세기 운남에 있던 대리국을 몽골인에게 뺏긴 타이인은 샴 만으로 흐르는 대하 메남 강(큰 강이라는 뜻, 타이인은 ‘왕실이 관리하는 강’이라는 뜻으로 차오프라야(Chao phraya) 강이라고 부름)을 따라 남하했으며, 메남 강 지류에 크메르인에게서 빼앗은 수코타이(Sukhothai:행복한 땅, 낙원)를 수도로 하는 수코타이 왕조(현재의 타이 문자를 만들었다)를 세웠다.
그 뒤를 이어 중류 지역의 아유타야(Ayutthaya)를 중심으로 한 데 교역국가인 아유타야 왕조가 번영했다.
수도 아유타야는 요새가 17개인 성벽에 둘러싸여 있었다. 이곳에는 550개의 건조물이 들어섰고 140km에 이르는 운하가 종횡으로 달렸으며 상업도시로 번영했다. 이들은 캄보디아를 공격해 앙코르돔(Angkor Thom)을 함락시키겼고, 포르투갈인 용병을 이용해 버마를 공격했다.
하지만 나주에 버마인은 1767년에 아유타야 왕조를 멸망시킨다. 아유타야라는 이름은 인도의 서사시 [라마야나]에 나오는 고대 도시 아토디야에서 유래한 것이다.
18세기 중반에 타이인 장군 탁신(Thaksin)이 버마군을 격파했는데, 이 때 옛 수도 아유타야가 페허로 변해버렸기 때문에 메남 강 하구 서쪽에 위치한 톤부리(Thon Buri: 제물과 보석의 마을)에 왕조를 세웠다.
하지만 이 왕조는 일대에 끊겨버리렸고, 18세기말에는 맞은 편 강가에 위치한 방콕을 수도로 하는 차크리 왕조(현재의 타이)가 성립되었다.
방콕은 타이 만 하구에서 약 30km 거슬러온 메남 강 동쪽에 위치해 있다. ‘방콕’이라는 명칭은 속칭이며, 정식 명칭은 ‘신의 대도시’에서 시작해 ‘에메랄드 불타가 살며, 화신의 신이 통치하는 힌두교의 인드라신과 신과 비슈누신이 만든 도시’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최초의 ‘에머랄드’는 왕실의 수호사원인 와트 프라케오의 본존이 에메랄드 빛의 벽옥 석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방콕은 과거에 존재했던 아유타야 왕조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타이 정부는 폐허가 된 상류의 아유타야에서 많은 벽돌을 메남 강을 이용해 운반해서 왕궁과 사원을 건축했고, 왕궁 주변에 대운하를 팠으며 베트남인과 미얀마인 등의 거주 지역을 마련했다.
19세기 중반 이후에는 화교가 대규모로 이주하기 시작해 현재는 전체 도시 주민의 3분의 2를 차지할 정도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타이 경제가 성장하면서 방콕은 급격히 국제도시로 변모했다.
나. 미얀마…… 영국에 지배당한 버마
미얀마는 서부의 아라칸(Arakan: 아라칸족에서 유래) 산맥으로 인도반도와 구분되고, 동부의 중국 운남 고원과 연결되는 해발 900m의 산 고지대(타이인인 산족에서 유래)와 북부의 카틴산지(야만인)에 둘려싸여 있으며, 이라와디(Irrawaddy: 산스크리트어로 활동적인) 강이 흐르는 광대한 평야지대로 구성되어 있다.
미얀마는 콘바운 왕조(175-1885) 시대에 타이의 아유타야 왕조를 무너뜨리면서 대두했는데, 영국과의 싸움에서 패한 뒤 1885년에 영국령 인도제국의 1개 주로 병합되었다. 영국 점령 하에서 버마는 세계 최대의 쌀 수출국이 되었다.
이라와디 강 중류지역에 위치한 만달레아(둥굴게 건축한 제단)는 옛 왕조의 수도이며, 인구의 85% 이상을 차지하는 소승불교의 원추형 차고다(불탑)가 늘어선 종교도시이기도 하다.
현재 수도인 양곤(Yangon: 싸움의 끝이라는 뜻은 이라와디 강 하류지역에 위치한 항구로 미얀마 제1의 대도시이다.
다. 베트남……프랑스의 보호국으로
베트남에서는 북부의 훈강(붉은 강이라는 뜻, 강물이 철분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 델타에서 농경사회가 성장했고, 기원 전후에는 동선문화(Dong son Culture)라는 청동기 문화가 꽃을 피웠다.
베트남은 전한의 무제가 기원전 2세기 북베트남을 정복한 이후, 약 1000년 동안 중국 여러 왕조의 지배하에 놓였다. 이의 지배 거점이 된 곳이 오늘날의 하노이(Hanoi)였다. 하노이는 ‘강과 강 사이에 위치한 땅’이라는 뜻이며, 한때 ‘승룡’이라고도 불렸다. 그 수 찬파 왕조(1225-1400)시기에 베트남은 동남아이 강대국이 되었다.
북부의 베트남인은 1470년에 현재의 다낭(Da Nang:탁한 강) 남쪽에 수도를 두었던 찬파 왕국을 멸망시켰고, 17세기 말에는 과거의 대국 크메르에게서 메콩 강 델타 지대를 빼앗았다.
메콩 델타의 중심도시는 크메르인의 호칭인 ‘숲의 도시’를 베트남어로 번역하여 사이공이라고 불렸다. 이 지역은 본래는 크메르인과 참인이 거주했던 지역이었다. 이후 사이공은 베트남 전쟁으로 통일된 뒤 지도자인 호치민의 이름에서 따와 ‘호치민’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1802년에 성립된 구엔 왕조의 안남 왕국은 중부의 후에(순화)를 수도도 정하고, 중국의 자금성을 모방해 왕궁을 지었다. 1884년에 프랑스가 안남 왕국을 보호국으로 삼자, 후에는 1946년까지 수도가 되었고 프랑스 식민지 정부의 관청과 프랑스인 거주지역이 만들어졌다.
9. 동남아 섬들이 이슬람권인 이유는 무엇인가?
(상인들이 확산시킨 이슬람 세계. 14세기-)
가. 동남아가 불교에서 이슬람으로 바뀐 이유
14세기경 자바 섬 마지파히트(Majapahit) 군의 공격으로 수마트라 섬의 팔램방에서 쫓겨난 왕족 가운데 한 명이 말라카 해협이 가장 좁아지는 해역의 한 촌으로 이주해 개척한 항국하 바로 말라카다, 말라카는 명나라 정화 함대의 종계거점이 된 이후, 풍부한 중국 상품 교역과 명의 비호를 받아 급성장했으며 동남아 교역의 중심이 되었다.
하지만 정화의 원정이 중단 이후로는 이슬람 상인이 말라카 항에 모이도록 만들기 위해 말라카 왕 스스로가 이람교에 귀의했다.
이런 사정으로 말라카는 교역과 더불어 동남아 도서지역에 이슬람교를 확산시켰다. 식량과 면직물을 무역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도서지역 사람들은 이슬람 상인과 반드시 거래를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1511년에 19척의 군선과 1400명의 병사로 구성된 포르투갈 군이 말라카를 공격했고, 9일간의 공방 끝에 결국 말라카는 함락되고 말았다. 말라카 왕은 그 뒤 조호르바투(Johor Baharu:’새로운 조호르(카시아 계피나무)’라는 뜻)로 본거지를 옮겨 포르투갈과 싸웠지만 갈수록 힘이 약해졌다. 그렇지만 말라가 왕국의 왕 ‘술탄’의 후예는 오늘날에도 말레이시아(말레이인의 나라)의 술탄으로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한편 말레이시아의 수도 쿠알라룸푸르(Kuala Lumpur:진흙의 하구)는 19세기 중반에 주석 광맥을 발견한 중국인이 건설한 도시로, 19세기 말에 영국령인 말라이 연합의 수도가 되었다.
나. 다양한 섬들이 통합된 인도네시아
동남아 도시지역을 칼라만탄(Kalimantan:원주민이 불던 ‘하얗고 긴 깃발’에서 유래) 섬을 중심으로 서남쪽의 수마트라와 자바 섬, 티모르(Timor:동쪽) 섬, 말루쿠 군도(‘원주민 마르코인’에서 유래), 세계 제2위의 섬 뉴기니(New Guinea: 주민이 아프리카의 기니 주민과 비슷해서 스페인이 ‘새로운 기니’라고 불렀던 데서 유래), 북쪽의 필리핀 군도, 남으로는 오스트레일리아가 펼쳐져 있어 ‘아시아 다도해’라고 불린다.
오늘날 동서 5100km에 이르는 이 광대하고 다양한 해역에 산재하는 크고 작은 1만 3700여 개의 섬들은 세계 최대의 도시국가인 인도네시아 공화국으로 통합되었다. 전체 면적은 남한의 19배, 인구는 약 2억 1500만 명으로 세계 4위이다. 이곳도 인구의 90%가 이슬람교도인데, 경제의 실권은 약 650만 명의 화교들이 쥐고 있다. 수도는 인구의 60%가 집중된 자바 섬의 국제무역항 자카르트(Jakarta:산스크리트어로 승리의 마을)이다.
10. 동남아와 ASEAN의 성장
(1967년에 결성된 ASEAN은 1999년에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20세기)
가. 무역으로 번영했지만 19세기 식민지로 전락
인도차이나 반도는 19세기 후반 이후 세계적인 농경지대가 되었다. 몬순의 풍향이 바뀌는 말라카 해협은 유라시아 남연부 ‘바닷길’의 요충지이며, 이 지역은 열대산 향신료와 금을 산출해 해상무역으로 번영했다.
동남아의 역사는 ㉠ 인도 상인이 교역거점을 만들어 해상교역을 지배한 시대였으며 13세기까지는 동남아 국가들의 문자와 언어는 인도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 8세기 중반이후 이슬람 상인의 진출기 ㉢ 10세기 이후 중국 상인의 진출기 ㉣ 16세기 이후의 유럽인의 진출기로 나뉘는데, 19세기 전반의 인구는 1000만 명이 채 되지 않았다.
이 지역의 인구가 급증한 것은 19세기 들어 영국과 프랑스가 식민지를 확대해, 농원과 광산 노동력으로 다수의 인도인과 중국인을 이용하게 되면서부터다.
동티모를 식민지화한 포르투갈과 필리핀을 식민지화한 스페인, 인도네시아를 식민지화한 네덜란드가 이곳을 지배한 옛 세력이었다. 19세기 들어 신흥 세력인 영국이 브루나이(Brunei)와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버마(현재의 미얀마)를 식민지화 했고, 프랑스가 베트남과 라오스, 캄보디아를 식민지화했으며, 1898년에 일어난 미국과 스페인 전쟁에서 필리핀 지배권이 미국으로 넘어갔다. 결국 독립을 유지했던 국가는 타이뿐이었다.
나. 서울보다 조금 큰 면적을 가진 싱가포르의 번영
서쪽으로 넓어지며 동쪽으로는 좁아지는 말라카 해협의 동쪽 출구에 위치한 말레이 반도 남단부의 섬나라가 바로 싱가포르다. 이 나라 면적은 서울보다 조금 넓으며 인구는 400만 명이다.
싱가포르의 어원은 사스크리트어로 ‘사자의 마을’이라는 듯인데, 이 이름은 이 섬이 군사적인 요충지였다는 사실에서 유래한 듯하다.
이처럼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했던 싱가포르였지만 이 섬은 오랫동안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1826년 영국이 중국에 이르는 항로의 거점으로 삼기 위해 싱가포르를 식민지로 삼았고, 이를 계기로 싱가포르는 발전하게 되었다. 이 때 싱가포르에는 중국인 노동자가 대량으로 유입되어 인구가 두 배로 증가했다. 그 후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일본에 점령당하기도 했지만, 전후 독립하여 1963년에 성립된 말레이시아 연방의 1개 주가 되었다.
하지만 인구의 75%가 중국인이었기 때문에 1965년에 말레이시아에서 분리하는 길을 선택해, 영국 연방에 속하는 싱가포르 공화국으로 독립했다. 그 뒤 싱가포르는 다시 선적하는 화물에 대해 관세를 부과하지 않는 자유무역항이 되었고, 가공무역 산업이 진흥하면서 ‘싱가포르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1981년에는 아시아 최대 규모인 창이 국제공항을 건설해, 하늘 네트워크의 일대 거점이 되었다.
다. 5개국에서 10개국으로 늘어난 ASEAN
동남아의 식민지는 1945년부터 1954년에 걸쳐 각각 독립했고, 베트남 전쟁(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1960-1975), 베트남 군의 캄보디아 침공(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 1979-1989), 말레이시아에서의 싱가포르 분리(1965),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병합(1976) 등을 거쳐 오늘날의 국경을 확정되었다.
1차 산업에 의존하는 동남아 경제는 식민지 시절의 경제 네트워크가 붕괴되면서 자본이 격감했고 생산이 정체되었으며, 급격히 인구가 증가해 한계에 부딪혔다. 결국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독재적인 강권정치로 사회질서를 유지했고, 대량으로 외자를 도입해 수출산업을 진흥시키는 ‘개발 독재’로 이행했다.
1967년에는 각 국가들(타이,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필리핀, 인도네시아 이상 5개국)이 연합해 ASEAN(Association of South-East Asian Nations:동남아 국가 연합)을 결성하였다. ASEAN 국가들은 베트남 전쟁에 따른 원조와 외자 투입, 일본 자본 진출 등으로 기반을 굳혔고, 1970년대에는 석유가격 상승으로 1차 산업의 가격이 상승했으며, 저렴한 노동력을 찾는 외자 도입으로 두 자리에 가까운 경제성장을 이룩해 1990년대에는 ‘세계 성장의 중심지’라고 불리는 높은 경제성장률을 보였다. 하지만 1997년 타이 바트화 폭락을 계기로 통화위기 확산되면서 경제 성장에 급제동이 걸렸다.
1962년이래 네윈(Ne Win)의 군사독재 하에서 폐쇄적인 경제체제를 취해온 미얀마에서는 1988년 학생들이 민주혁명을 일으키지만 군이 쿠데타로 진압해, 결국 1당 독재 하에서 경제 자유화와 개방화를 추진하고 있다. 즉 옛 ASEAN 국가들이 했던 ‘개발 독재’를 그대로 뒤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 뒤 브루나이와 베트남, 라오스, 미얀마, 캄보디아가 가입해 1999년에는 10개국의 동남아 국가가 모두 가입하면서 ASEAN 10이 성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