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시(輓詩)에 나타난 삶과 죽음
박도균(충렬고 교사)
만시(輓詩) = 죽음을 애도하거나 탄식하는 시문
Ⅰ. 서론
사람과 헤어짐은 누구라도 겪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더구나 그 헤어짐이 잠깐 동안이 아니라 다시는 재회가 불가능한 사별이라면 그래서 망자를 속절없이 떠나보내야 한다면 그 애통함을 필설로는 이루 다 형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별을 인간사의 가장 절절한 슬픔이라고 했을 터이다.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고, 짝을 찾아 일가를 이루고, 죽어 떠나고 떠나보내고, 죽은 사람 산 사람들이 소통하는 -그 각각을 유교식으로 의식화하는 단위를 관혼상제라 할 수 있다. 삶이란 딱 반이 죽음인 것이다.
죽은 이와의 마지막 수인사, 되살아오는 기억과 비탄 그것을 유교식으로 의례화한 문학적 형식이 만시고 제문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간에는 輓詩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만시는 대체로 挽詩, 輓詞, 輓章으로도 불리지만 의미는 다 같다.
만시는 대상 인물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될 수 있다. 하나는 아내의 죽음을 애도한 ‘悼亡’이나 자식의 죽음을 애도한 ‘哭子’ 그리고 동기의 죽음을 애도한 ‘哭兄弟’와 같이 피붙이를 대상으로 하는 작품들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 제 관계에서 비롯된 지인을 대상으로 하는 이른바 ‘悼朋’이 그것이다.
우리 문학사에서 만시가 쓰여진 효시로는 月明師의 〈祭亡妹歌〉를 꼽을 수 있고, 한시의 경우 고려 명종이 內壁 明春의 죽음을 슬퍼한 悼亡詩를 찾아볼 수 있다. 이후 고려시대의 문인들에게서 만시를 종종 찾아볼 수 있으나 그 수효는 그리 많지 않다. 아무래도 만시가 대량 창작되는 것은 조선조에 이르러서이다.
이는 상례의 보편화와 관련이 있다. 즉, 상례에서 만시를 적은 만장의 사용이 보편화되어 사대부에서 서민들에게까지 확대되면서 만시의 제작이 늘어가게 된 것이다. 이러한 만시의 성행으로 인해 폐단에 직면하게 되는데 丁若鏞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사를 짓게 된 것은 경전과 예법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근세에 친소를 살피지 않고 널리 청하고 힘써 구하니 이로 인해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던 자가 은밀히 망자에게 누가 되는 헐뜯는 말을 지어내어 시구에 기탁함으로써 서로 틈이 지고 원수가 되는 일이 생기어 한 시대의 웃음거리가 되는 일이 있으니 만시의 폐단이 극에 달했다고 할 수 있다.
간혹 평소에 친우가 청하지도 않았지만 스스로 지은 만시를 영궤 앞에 펼쳐서 고하고 난 다음 자기 글상자에 거두어 두는 자가 있으니 이것이 좋다. 영구차의 앞에 만장으로 세우는 것은 예가 아니다.
만시는 죽은 사람 편에서 자청해서는 안 되고 남이 자발적으로 애도하는 마음이 생겨 써야 하며 또 이를 만장으로 세우는 것은 예가 아니라는 것이다. 만시가 죽음의 의식에 필요한 상투적인 것이 되어 극단적인 폐해까지 발생하였으나 기본적인 속성이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앞에 두고 느끼게 되는 슬픔과 애도의 정감을 충실하게 담은 문학이라는 점은 변질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속성을 잃지 않은 많은 우수한 작품이 우리 한시문학, 특히 조선후기 한시문학에서 창작되었다. 다음은 당대에 뛰어나다고 일컬어지는 작품을 중심으로 감상하도록 하자.
1. 悼亡詩
도망시는 아내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이다. 조선 중엽 대표적 시인의 李達의 悼亡詩를 살펴보자
경대에는 거미줄 거울에는 먼지만 껴 / 粧匳蟲網鏡生塵
문 닫힌 채 복사꽃만 쓸쓸히 봄을 맞네 / 門掩桃花寂寞春
옛날대로 다락 위엔 달빛만 환한데 / 依舊小樓明月在
모르겠네 그 누가 주렴 걷을 사람인지 / 不知誰是捲簾人
죽은 아내를 애도하는 작품인데 표면적으로는 슬픔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이 감정을 극도로 절제하고 있다. 다만 주변 경물의 묘사만 되어있는데 그것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작자의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감동적으로 느끼게 한다. 이시에서 경대, 거울, 복사꽃, 다락, 밝은 달, 주렴과 같은 소재는 모두 죽고 없는 아내를 그립게 만드는 소재이다.
다음으로는 아내를 잃은 슬픔을 절제된 미학으로 승화시킨 申緯의 〈悼亡〉시를 보자
나는 그저 보내며 잠깐 머물겠지만 我自支離且小留
부인은 세상 싫어하니 온갖 근심 하나 없겠소. 婦人厭世百無憂
치정어린 백발의 교전비는 癡情白髮轎前婢
상식하러 와서 오랜 동안 곡을 그치지 않는 구려. 上食移時哭未休
영화가 날마다 새로 더해진다 한들 縱復榮觀日日新
생각해 보아도 쓸쓸한 신세 될 것만 같소. 思量判作踽凉身
늘그막에 즐길 권속이 없지야 않지만 非無眷屬堪娛老
그 옛날 혼인했던 사람 보이지 않으니. 不見當年結髮人
때로는 부인에게 말하듯 또는 자문자답하듯 내뱉는 말이 비창한 서정을 보이고 있다. 도망시의 경우에는 늘 쓰이는 소재와 감상이라는 관습적인 표현이 많이 등장하는데 신위의 시는 그러한 점에서 발군의 시라 할 수 있다. 눈 앞에 보이는 구체적인 사실의 단편을 제시함으로써 그 내면의 깊은 슬픔을 담담하게 묘사하고 그 수사나 표현이 작가의 개성을 잘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金正喜의 명작으로 알려진 시를 보자. 이 시는 제주도로 귀양간 김정희가 그 부인의 죽음을 전해 듣고 곁에서 죽음을 보지도 못한 슬픔을 적은 시이다.
어쩌면 저승에 가 월로에게 애원하여 / 那將月姥訟冥司
내세에는 그대와 나 처지를 바꿔 태어나리. / 來世夫妻易地爲
나 죽고 그대 살아 천리 밖에 남는다면 / 我死君生千里外
이 마음 이 슬픔을 그대가 알리마는 / 使君知我此心悲
자기가 대신 죽어서 아내로 하여금 자기가 얼마나 슬퍼하고 있는지를 알게 하고 싶다는 것이다. 『於于野談』에서 이시가 매우 逼切 하다 평하였는데 허다한 사연을 다 접어두고 처지나 바꿔달라는 하소연의 집약된 표현이 애절하다. 이 시 역시 신위의 시와 비슷하게 직접적 감정의 토로보다는 처지를 바꾸어 달라는 하소연으로 극도의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심상은 동시대인인 趙秀三이 객지에서 부인의 사망소식을 듣고 쓴 도망시에서도
“언젠가는 나 또한 당신 곁에 묻히겠지만/ 他年我亦同歸穴,
처지를 바꿔보소 당신인들 어찌 혼자 살아가겠소? 易地君何忍獨生)
라는 표현으로 쓰고 있다.
2. 哭子詩
만시에서 비탄의 정서를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자식 잃은 슬픔을 시화한 시에서는 감정의 분출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토로되고 있어 절제된 정서는 찾기가 어렵다. 그러한 중에서 어머니가 죽은 자식을 위해 지은 만시인 허난설헌의〈哭子詩〉가 그 처절한 정상으로 유명하다.
지난 해에는 사랑하는 딸을 잃었고 去年喪愛女
올해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네. 今年喪愛子
슬프고 슬픈 광릉 땅에 哀哀廣陵上
무덤 둘이 마주 보고 솟았네. 雙墳相對起
스산히 백양나무에 바람 불고 肅肅白楊風
귓불은 솔 숲에서 깜빡이네. 鬼火明松楸
지전으로 네 넋을 부르고 紙錢招汝魂
네 무덤에 술을 따른다. 玄酒奠汝丘
나는 아네, 남매의 넋이 應知弟兄魂
밤마다 서로 따르며 노님을. 夜夜相追遊
뱃속에 아이가 있다 한들 縱有腹中孩
장성하기를 어떻게 바라리? 安可翼長成
황대의 노래를 하염없이 읊고, 浪吟黃臺詞
피눈물 흘리며 소리삼켜 우노라. 血泣悲呑聲
이태에 딸과 아들을 연이어 잃고서 무덤 둘이 마주하고 있다 하였고, 남매의 넋이 밤마다 서로 따르면서 노닐고 있겠지 상상하는 대목은 가위 자식잃은 어머니의 처절한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고 하겠다.
손녀딸의 죽음을 간명하고도 처절하게 읊은, 同知府使 李必運의 부인 南氏의 시가 이러한 부류의 만시 중에서 압권이라고 할 수 있다.
여덟해 동안 일곱해를 병으로 지냈으니 八年七歲病
돌아가 누움이 네게는 편안하겠지. 歸臥爾應安
다만 애처롭구나! 오늘밤 이 눈 속에 只憐今夜雪
어미 떠나 있어도 추운 줄을 모르니 離母不知寒
임천상(任天常 : 1754(영조 30)∼?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현도(玄道), 호는 궁오(窮悟). 화성출신. 희익(希翼)의 아들이다. 1777년(정조 1)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795년 식년문과에, 1796년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806년(순조 6) 홍문관교리에 이르렀다.
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다.)은 이 시를 두고 “시는 정에서 생겨나고 정은 또 시에서 일어나니, 시와 정이 그 지극한 정경에 함께 이르렀기에 글자 글자마다 눈물을 흘릴만하다. 이는 참으로 죽은 이를 애도하는 작품 중에서 빼어나다.
평일에 친척조차도 부인이 시를 잘하는 줄 아지 못하였으니 또한 가정에 모범이 될 만하다.”라고 평하였다. 시어는 참으로 담박하지만 그 안에 담긴 사랑과 슬픔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있다 하겠다. 더욱 감동적인 것은 애도의 정이 조작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3. 가족 의 대상으로 한 만시
가족을 대상으로 한 만시는 형제 와 친척들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退溪가 자신의 형수를 추모한 「貞夫人金氏挽詞」를 보자
연안김씨 계보는 역사 있는 벼슬 집안 延安金譜舊簪纓
더더구나 시집가서 큰영화를 얻었구려 今復移天得顯榮
반 세상에 하마 많이 길한 꿈을 이뤘는데 半世已多徵吉夢
중도에 왜 갑자기 슬픈 고독이 되었을까? 中途何遽作哀惸
십 팔 해가 지나가서 황천에 은혜젖고 恩霑夜隧年雙九
아들 벼슬 경사 나자 한 달만에 돌아갔네 慶到兒官月缺盈
약한 풀 나는 티끌 뉜들 아니 서러우리 弱草驚塵誰不痛
한 영역에 의지한 것 도리어 다행일레 歸依還幸是同塋
퇴계 당시까지만 해도 부인의 만시는 작시하는 것 자체를 기피해왔다. 그러나 퇴계는 아무렇게나 과장해 짓지만 않는다면 부인의 상에도 작시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시의 격조를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면, 그 대상에 차이를 두지 않았다. 위의 정부인 김씨는 퇴계에게 가르침을 받은 漫浪 李寗의 母堂이다.
4. 명사들을 대상으로 한 만시
명사를 대상으로 한 만시 중에 먼저 제왕에 대한 것부터 살펴보자. 역대 임금에 대한 만시는 그 수효가 많기 때문에 명작 또한 많을 수 밖에 없다. 임금을 애도한 만시 중 명작으로 손꼽히는 이광려(1720∼1783, 李匡呂 : 조선 후기 실학자. 자는 성재(聖載), 호는 월암(月巖)·칠탄(七灘). 본관은 전주(全州).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고 학행이 높아 천거에 의해 참봉이 되었다.) 이만수(李晩秀)는 그의 문집에서 <국조(國朝) 300년의 문교(文敎)를 받아 이광려선생을 낳았다>고 높이 평가하였다)의 〈英宗大王挽詞〉를 살펴보자
장례 어가는 의장과 호위가 화려하건만 宵駕紛儀衛
만백성들 곡성만 요란하네 萬人惟哭聲
여염에 자녀만을 남겨놓은 채 閭閻遺子女
대궐은 평소 살아 계신 때와 똑같구나 城闕若平生
종묘를 지나시며 머뭇거리는 상여 過廟遲遲蹕
문에 이르니 명정이 축 늘어졌네 臨門冉冉旌
붉은 초롱에 쌓인 천자루 촛불도 縫紗千柄燭
드러내 놓고 마구 흐르며 날을 지새네 風淚曙縱橫
이시는 남의 부탁에 의해 대작한 것인데 궁궐에서 영조의 장례행렬이 나가는 모습을 묘사했다. 이만수(李晩秀 1752(영조 28)∼1820(순조 2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성중(成仲), 호는 극옹(屐翁))가 쓴〈李參奉集序〉에 따르면, 정조가 위의 만사를 보고 한참동안 찬탄하다가 “이 시는 누가 지은 것인가? 근세에 이만한 작품이 없다.”고 하였다고 전할만큼 명작으로 알려져있다. 만시 중 빼어난 격조를 지닌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각고의 노력으로 시를 단련함으로써 결코 경솔하거나 천근한 시어를 쓰지 않는” 작자의 창작정신을 그대로 볼 수가 있다.
李珥(1536~1584)가 죽었을 때에도 많은 만시가 지어졌으나 洪履祥(1549∼1615)이 지은 시가 뛰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사문의 종장이요, 나라의 기구시니 斯文宗匠國蓍龜
혁혁한 명성은 종들조차 안다네 赫赫名聲走卒知
낙하에서 처음 사마를 만났더니 洛下初逢司馬日
촉땅에서 새로이 공명선생 잃었구나! 蜀中新喪臥龍時
선비들은 대들보 무너진 아픔 견디지 못하고 靑衿不耐摧樑痛
임금님은 거울 잃은 슬픔이 유독 깊으시네 丹扆偏深失鑑悲
무슨 뜻으로 빼어나게 낳아놓고, 무슨 뜻으로 빼앗아 가는지 何意挺生何意奪
하늘은 무심하게도 막막하기만 하니 그 누구에게 물어보나? 蒼天漠漠問憑誰
이시는 명사를 애도하는 만시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알만한 전고와 착상을 사용하여 돌아간 분에 대한 안타까움을 절절히 표현하고 있다.
5. 당대인의 호평을 받은 만사
조선후기 만시 중에서 민간의 상여소리를 연상시키는 내용과 형식으로 지어진 것도 간혹 보인다. 민요의 한 갈래인 상두가는 단순한 사설에 구성진 음조를 특색으로 하는데 이러한 특징을 살려 망자에 대한 슬픔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어디갔나, 어디갔나 何處去 何處去
호호백발 부모님과, 어린자식을 鶴髮親 髫齡兒
모두 버리고 어디를 갔나 都棄了 何處去
언제 오나, 언제 오나 何時來 何時來
칠흙같이 어둡고 긴긴 밤에 黑漆漆 長夜中
이제 가면 언제오나 今日去 何時來
뉘 알리 뉘 알리 有誰知 有誰知
첩첩산중 저녁달에 萬疊山 黃昏月
홀로 슬피 울제 뉘 알리 獨啾啾 有誰知
위 시는 李亮淵의 〈挽溪朋〉이다.
李農人은 이 시를 두고 “마땅히 귀신도 울게 할”(宜乎泣鬼神)작품이라고 평했다. 李羲準( 1775(영조 51)∼1842(헌종 8). 조선 후기의 문인.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평여(平汝). 호는 계서(溪西)로 알려져왔으나, 형인 희평(羲平)의 호가 잘못 전하여진 것이라는 설도 있다)은『夢遊野談』에서 이 만시를 소개하고 “만사는 정을 펼쳐내고 슬픔을 토로해내면 그만이다. 3첩으로 이루어진 이 만시는 극히 처절한데 긴 사설을 장황하게 늘어놓은 것과 비교하면 거리가 매우 멀다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3번의 반복구는 완연하게 민요의 형식을 채용한 것이고 그 내용 또한 민요의 상두가의 특색을 살리고 있다.
다음은 당대에 만사를 가장 잘 지은 사람으로 꼽히는 강박((姜樸 ; 1690~1742, 본관은 진주이며 자는 자순(子淳)이다. 그리고 호는 국포(菊圃)이며 1714년(숙종 40) 절일제(節日製)에 장원하였고, 이듬해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正字)가 되었다)의 만시를 보자
성남엔 키 큰 버들 저녁 까마귀 高柳城南有暮鴉
나직한 섬돌 가 아직 붉은 작약 小階紅藥尙如花
상엔 흩어진 푸른 시축, 커튼도 말쑥한데 綠軸滿床簾帷淨
옥 같은 사람은 어인 일로 집에 없는가? 玉人何事不在家
사물에 접할 때마다 아비마음 어떠랴 阿翁觸物思如何
동창 밖의 감나무 예전 처럼 잎을 펼지니 依舊東窓柿葉舒
취하여 이미 죽은 것 까마득히 잊곤 酒後茫茫忘已死
감잎 따들고 글씨 쓰라 그를 부른다 摘來還欲喚渠書
친한 벗이던 오광운(吳光運 : 1689(숙종 15)∼1745(영조 2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동복(同福). 자는 영백(永伯), 호는 약산(藥山))의 長子를 위해 지은 만사인데, 첫째시의 그 어디에도 ‘죽음’이라든가 ‘슬픔’이란 단어가 하나도 없다.
아무런 움직임도 감지되지 않은 정지된 화면 같은 인상을 준다. 이는 모두 옥같은 사람의 부재로 집중 되는데, 옥같은 사람도 처절한 부재감으로 느껴지지 않고 그저 심상한 어느날 외출처럼, 책상 위에 읽던 시축들도 그대로 펼쳐둔채 잠시 어딘가로 외출한 느낌이든다.
두 번째 연은 참으로 가슴 아프다. 술에 취해 아들이 죽은 것도 잊고서 감잎을 따들고 글씨 쓰라고 부르는 아비의 허망한 심정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참으로 미어지게 슬프다는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겠다.
흔히들 만시에는 아름다운 시구가 매우 드물다고 하지만 강박의 만시만은 매우 아름다워서 천고에 대적할 자가 드물다(李敬儒, 『滄海詩眼』上)는 평가를 받았다.
6. 선현들의 만시평
익재(益齋)의 장인은 곧 국재공(菊齋公 국재는 권보(權溥)의 호)인데 부부가 함께 94세까지 살았으나 부인이 공보다 먼저 죽었다. 익재공이 장인을 애도한 만시(挽詩) 한 연(聯)에,
항아(姮娥)는 광한전(廣寒殿)에 님 오시길 기다리나/姮娥相待廣寒殿
거사(居士)는 다만 홀로 도솔천(兜率天)에 돌아가네/居士獨歸兜率天
라고 했다. 권공(權公)이 부처를 좋아했기에 낙천도솔(樂天兜率)에 비유한 것은 무방하겠으나, 항아가 약을 훔친 것은 자고로 시인들이 속세로부터 선계(仙界)로 올라간 것을 비유함이 상례였는데, 이를 장모에게 쓴 것은 온당치 못할 듯하다.《성소부부고, 성수시화(惺叟詩話)》
일백 길 심하에 만 길의 높은 산 / 百丈深河萬仞山
사적에는 피 자국이 아롱졌구려 / 至今沙磧血痕班
강상에서 영혼을 부르질 마소 / 英魂且莫招江上
오랑캐를 없애잖고선 결코 돌아오질 않으리 / 不滅凶奴定不還
이 시는 박정길(朴鼎吉詩 조선조 광해군 때 병조참판을 지냈고, 인조반정 후에 죽음을 당했음. 《類選》 卷十下 詩文篇 論詩)이, 장군 김응하(金應河)를 두고 지은 만시(挽詩)이다.
정길은 이이첨(李爾瞻)의 당(黨)으로서 계해반정(癸亥反正:인조반정)에 사형을 받았으니, 그 사람됨은 족히 말할 것 없지만, 이 시만은 만 사람의 입에서 송전되고 있으니, 사람이 보잘것없다고 해서 글까지 없앨 수는 없는 것이다.《성호사설, 제28권, 시문문(詩文門) 》
백사 이항복(李恒福)이 정률(鄭慄)에 대해 지은 만시(挽詩).
기축옥사(己丑獄事)에 정승 정언신(鄭彦信)이 조정에서 매를 맞고 갑산(甲山)으로 귀양을 가게 되니, 그 아들 율(慄)이 단식(斷食) 끝에 피를 토하고 죽었다. 이때에 자칫하면 연루죄(連累罪)가 파급되므로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하였고, 심지어 집안사람들이 장사조차 예(禮)대로 하지 못하였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은 당시에 문사랑(文事郞)이 되었던 까닭으로 그 원통함을 알고서 바야흐로 관(棺) 뚜껑을 덮을 적에 시 한 수를 지어 비밀히 관 속에 넣었는데, 집안사람들도 몰랐던 것이었다. 급기야 그 아들이 장성하자, 천장(遷葬)하게 되어 관을 열어보니, 세월이 이미 30년이 지났는데도 종이와 먹 빛이 그대로 있었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입을 두고도 감히 말을 못하고/ 有口不敢言
눈물이 있어도 감히 울지 못하네/ 有淚不敢哭
베개를 만지되 남이 볼까 무섭고/ 撫枕畏人窺
소리를 삼키며 몰래 눈물만 삼키네/ 呑聲潛飮泣
그 누가 날선 칼날을 가지고서/ 誰將快剪刀
굽이굽이 맺힌 간장 잘라내 줄꼬/ 痛割吾心曲
이 말을 듣는 자들은 코끝이 시큰시큰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 시는 처음에 본집(本集) 속에 실렸었는데, 금본(今本)에는 삭제되었으며, 구집(舊集)이 세상에 혹 있는데도 크게 기휘하는 바가 되었다. 나는 광주(廣州)에 사는 송(宋)가 성을 가진 사람의 집에 수장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서 사람을 시켜 기록해 냈으니, 세상의 변괴가 이와 같은 것이 허다하다.
《성호사설, 제28권, 시문문(詩文門) 》
○ 재상 최연(崔演)의 문장은 호건(豪健)하여 필한(筆翰)이 물 흐르는 것같다.
인종(仁宗)의 만시(挽詩)는 이러하다.
삼년상을 짧게 한 한 나라를 마음으로 낮추보고 / 三年短制心嫌漢
오월을 여막에 거처함은 예법이 등 나라보다 낫네 / 五月居廬禮過滕
전고(典故)를 쓴 것이 매우 적당하다.
임 사문 형수(林斯文亨秀)가 인종의 만장을 짓기를,
오늘의 눈물을 차마 가지고서 / 忍將今日淚
작년 옷을 거듭 적시랴 / 重濕去年衣
하였다. 중종(中宗)이 승하하고 1년이 되지 않아 인종(仁宗)이 승하하였으니, 말은 간략하나 뜻은 극진하였다.《권인응, 송계만록(松溪漫錄)》
송강이 함경도 감사로 갔을 때에 최고죽(崔孤竹 최경창(崔慶昌)의 호)이 경성(鏡城)에서 와병 중이었다. 공에게 편지를 보내어 역마를 빌려 돌아가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말이 이르기 전에 고죽은 숨을 거두었다. 공이 만시(挽詩)에 쓰기를,
말 한 필 운중에 들어 왔는데 / 一馬入雲中
봄날에 어느 곳에서 울 것인가 / 春風何處嘶
장군이 병영에 누웠으니 / 將軍臥細柳
다시 운제에 오를 길이 없구나 / 不復上雲梯
이 운제는 바로 관외(關外)의 지명이었다. 윤기헌(尹耆獻) 《장빈거사호찬(長貧居士胡撰》
○ 국오(菊塢 강희맹〈姜希孟〉의 호) 강경순(姜景醇 강희맹의 자)이 엮은 《진산세고(晉山世稿)》는 참판 김수녕(金壽寧)이 고치고 다듬은 것인데,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하여 부조의 시명(詩名)을 후세에 선양(宣揚)했으므로, 사람들이 그것으로써 효도를 하였다고 하나 나는 그것은 효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상사(上舍) 신영희(辛永禧)의 집안에 조부 문희공(文禧公)의 시집이 있었으나, 친구들이 묻기를, “자네 집안의 문집이 간행할 만한가.” 하니 신영희는, “조부께서 비록 문명(文名)이 세상에 으뜸가기는 했으나, 집안 문집에 실은 것으로서 후세에 전할 만한 것은 하나도 없소. 전일 한 문하생의 만시(挽詩)에,
서른 둘에 세상을 떠나니 / 三十二而卒
불행함이 안회와 같도다 / 不幸同顔回
한 것이 있는데 이 시 이외에 시라 할 만한 것이 없으니, 어찌 간행할 수 있겠소.” 하여, 남들은 그것이 불효라고 했지만 나는 그것을 효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조부가 행한 일을 그대로 말하였으니, 그것이 곧 효도이다. 설사 말을 꾸며 부조(父祖)를 기린들 부조의 넋이 어찌 저승에서 부끄러워하지 않겠는가. 남효온 《추강냉화(秋江冷話)》
○ 계운(季雲: 金馹孫)은 참으로 세상에 드문 선비였으나, 불행한 시대를 만나 화를 입고 죽었다. 그 화를 입은 경위와 신원(伸寃)을 다하지 못한 일에 대해서는 후생으로서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공의 무덤을 옮길 제 남지정(南止亭 남곤)이 지어 보낸 만시(挽詩)에 그 사연이 자세히 적혀 있다. 그 시에 이르기를,
귀신은 아득하게 어둡고 / 鬼神茫昧然
천도는 진실로 알기 어렵구나 / 天道諒難知
좋아하고 미워함이 인간과 달라서 / 好惡與人異
화와 복을 항상 거꾸로 베푸네 / 禍福恒舛施
길고 먼 이 우주에 / 悠悠此宇宙
오래 사나 짧게 사나 하루살이와 같은 것 / 脩短同蔑咨
촉루(해골)의 즐거움이 / 焉知髑髏樂
임금보다 나은지 어찌 알랴 / 不易南面治
달관으로 한 웃음에 붙이니 / 達觀付一莞
뜬구름처럼 아득하기만 하구나 / 浮雲於渺瀰
오직 아까운 것은 세상에 이름난 사람은 / 獨憐名世人
한 번 나기 매양 더디어 / 其出每遲遲
수백 년을 걸려서야 / 契濶數百年
겨우 한 번 볼 수 있다네 / 乃得一見之
…… 하고, 또,
성 동쪽의 낮은 언덕은 / 坡垞城東土
초라하여 주검 묻을 곳 못 되니 / 草草難掩屍
사랑하는 자손들이 있어 / 情鍾有子孫
좋은 땅 가려 이장하려 하는구나 / 卜兆謀遷移
그대 지금 하늘 위에서 / 君今九天上
굽어보면 먼지만 자욱하리 / 俯視息相吹
훗날 도지 엮을 제 / 他年纂圖誌
이 무덤 기록하여 빼지 말라 / 錄墓當不遺
하였다. 끝 귀는 계운의 무덤이 마땅히 도지에 기록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그 뒤 《속 여지승람(續輿地勝覽)》을 편찬할 때에 낭관(郞官)들이 그의 무덤을 기록해 올렸더니, 당상관(堂上官) 한 사람이 말하기를, “계운은 재상이 아니요 또 근후(勤厚)한 사람도 되지 못하였다.” 하여, 드디어 삭제하고 말았다. 이 어찌 성세(盛世)의 가장 공정한 논의라 할 수 있겠는가. 계운을 위하여 거듭거듭 아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숙권, 《패관잡기》
[석지형(石之珩)] 개성(開城) 사람으로 호가 수현(壽峴)인데, 문장으로 이름이 났다. 그의 문집에 실린 휴세유(休世遊) 한 편은 자구(字句)가 까다로워 읽을 수가 없어서 비록 문장에 노숙(老熟)한 자라도 거의 읽어내려가지를 못하니, 필시 사람들을 속이는 작품일 것이다. 아무리 읽기 어려운 《서경(書經)》의 반경(盤庚)·소고(召誥)·낙고(洛誥) 등 편이라 하더라도 어찌 이렇기야 하겠는가.
그의 시 가운데 구 중랑(具中郞) 부인의 만사(挽詞)에서,
근일 손암(遜菴 원중거(元重擧)) 원장(元丈)께서 해빈(海濱)에서 유 주부(劉主簿)를 조곡(弔哭)하였는데, 그 만사(挽詞)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인생은 한 번 피는 꽃이요/ 人世一番花
건곤은 바로 큰 나무일세/ 乾坤是大樹
잠깐 피었다 다시 떨어지니/ 乍開還乍零
원통함도 없고 두려움도 없나니/ 無寃亦無懼
《청장관전서 제16권 아정유고 》
송계(松溪) 권응인(權應仁)은 성주(星州)에 살았는데 퇴계(退溪) 선생의 제자이다. 퇴계가 죽으매 응인이 만사(挽詞)를 지었는데 여러 제자들이 응인을 서얼(庶孼)이라 하여 고의로 배척하고 쓰지 않았다.
그러자 응인이 그 만사를 장대에 걸어 문 밖에 꽂아 놓고 길에 나앉아 3주야(晝夜) 동안을 곡했다. 그런데 밤이면 반드시 장대 위에서 서광(瑞光)이 내쏘였으므로 제자들이 그것을 기이하게 여겨 시험삼아 그 만사를 쓰도록 허락하였다.
응인(應仁)은 장대하고 괴위(魁偉)하여 범인(凡人)과 달랐으며 문장에 능하였다. 그래서 일곱 차례나 북경에 들어갔으며 세 차례나 대마도(對馬島)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그가 일찍이 퇴계에게, "선생님은 조금 담박(澹薄)한 풍월(風月)과 농흑(濃黑)한 초서(草書)에도 유의하시면 도덕(道德)이 더욱 높아질 것입니다."
하였는데, 풍월(風月)이란 우리나라 풍속에서 시(詩)를 이르는 말이다. 이것은 비안(庇安) 사람 진사(進士) 김득후(金得厚)가 한 말이다.
《청장관전서 제68권 한죽당섭필 상(寒竹堂涉筆上)》
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라 기구를 이어 받아/ 孫桐祖栗繼箕裘
나라를 빛냈구려 문장의 제 일류로서/ 華國文章第一流
양자운의 꿈속엔 토봉을 이루었고/ 揚子夢中成吐鳳
포정의 눈 밑엔 온전한 소가 없었네/ 庖丁眼底欠全牛
인간엔 아직 금궤를 못다 풀었는데/ 人間未畢抽金匱
천상에선 누가 들어 옥루기를 재촉했나/ 天上誰催記玉樓
슬프다! 죽은 사람 다시 살리기 어려우니/ 惆悵九原難可作
남긴 글은 무릉에서 구하기만 기다리네/ 遺書應待武陵求
란 시가 있는데, 이는 취금헌(醉琴軒) 박팽년(朴彭年)이 대제학(大提學) 윤회(尹淮)를 두고 지은 만장(挽章)이다. 세상 사람들은 다 공의 천지를 지탱하고 일월을 꿰뚫은 대절(大節)만을 알고 문장이 이와 같이 원숙한 줄을 모르므로 삼가 기록한다. 그 인물을 사모하기 때문이다.
Ⅱ. 결론
이덕무(李德懋)는 만시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했다.
옛사람의 만시와 애사를 모아가지고 순서대로 살펴보니 갑이 죽자 을이 조문하고 을이 홀연히 죽자 이번에는 병이 조문하여 끝없이 이어져 갔다. (중략) 世界란 다만 이 두 가지 일로서 이럭저럭 銷遣해나가는 것이 아닌가?
『이목구비심서』, 2권
갑이 죽자 을이 만사를 짓고, 을이 죽자 병이 만시를 짓고, 또 병이 죽자 정이 만시를 지으며 인간 세상에는 세대가 교체되어간다. 이덕무는 세계란 이렇게 세월을 보내는 것인가 하며 생의 허무함을 탄식한 것이다.
죽음을 통해 이 세계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의 만시에는 이들의 삶의 모습이 잘 정리되어 전해지고 있고, 그들에 대한 당대인과 후인들의 평가가 여실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에 이를 통하여 당시 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따뜻한 인정미의 세계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韓國漢詩와 죽음의 문제」, 안대회
「退溪李滉의 만시연구」, 이정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