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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장례의 역사(Habenstein and Lamers(7th, 2007, NFDA; U.S.A.)

작성자효쟁이 박종윤|작성시간17.10.10|조회수1,128 목록 댓글 0

미국 장례의 역사(Habenstein and Lamers(7th, 2007, NFDA; U.S.A.)

제1부 초기 장례

제1장: 현대장례의 뿌리

현대 미국인들은 많은 것들에 대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인간이 “삶, 자유, 행복 추구”와 같은 권리를 가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긴다. 법 앞의 평등이 천부인권이고 거주이전의 자유, 직업과 결혼의 자유, 중요한 의사결정을 할 권리들에 대해서도 별 의심 없이 보장된다고 여긴다. 그들은 또 모든 아이들이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종종 언론에 회자되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사람들이 확고히 상황이 어떠하든 존엄하게 매장될 권리도 가진다고 여긴다.
이렇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일반적인 믿음이나 신념들이 사회제도의 근간을 이룬다. 우리가 어떻게 시신을 처리할 것인가? 이미 항해 중인 배 위에 내려놓기만 하면 되는가? 시신으로부터 심장을 빼 내 한 곳에 묻고 나머지는 다른 곳에 묻어야 하는가? 아니면 화장해야 하나? 이러한 의문들은 그런 질문에 그다지 주의을 주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시신을 그렇게 다루는 것이 적당한 방식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한다.
여기엔 이미 기존에 성립한 법, 관습, 전통, 태도, 등이 있다. 사람들이 일단 어떤 특정 방식대로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면 그것을 바꾸는 것이 쉽지 않다.
오랜 기간 서서히 변화해 온 결과로 그 뿌리는 서구 문명 역사에 깊숙이 박혀있다. 오늘날 미국인들은 고인들이 장의사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장의사 서비스엔 엠바밍, 뷰잉을 위한 시신준비, 장례기간, 시신을 보호하고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관의 사용, 사별자의 마음을 고려한 존엄한 의식서비스, 각 개인과 공동체의 신념을 표현하는 조사 등이 포함된다. 최종적으로 존엄한 장소에서 존엄한 방식으로 시신을 매장하며 이는 공중도덕에 반하지 않는 한 그들의 신념을 공고히 하고 사별자의 애도를 표하며 그들의 전통과 방식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는 만족감을 주게 된다.
이 모든 것이 이러한 기능을 제공하는 특정 직업 집단의 본질이 되었고 하나의 독립적 직업집단으로서, 목사들에 의해 수행될 수도 있는 서비스에 보충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존엄한 장례”는 미국인들의 사상과 삶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부분이며 통상 장례지도사들의 서비스가 고인 매장에서도 사용될 것이라 당연하게 생각한다.
이러한 현행 미국인들의 방식에 근저를 이루는 것들은 무엇인가? 고인을 다루는 데 있어 왜 미국인들은 특정한 방식과 기준으로 하려고 하며 왜 주요역할을 맡기려고 특정 직업 집단들에게 전화를 하는가?
명백히 이른바 미국 장례의 “뿌리”는 인도주의, 즉 인간의 의무는 오로지 인간과 인간관계만으로 제한되고 좌우된다는 신념으로부터 유래한다. 이는 초기 르네상스와는 다른 이교도 르네상스의 성장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이것만 보는 것은 역사적 기원을 단순화하는 실수를 범할 수 있다. 인도주의 그 자체는 오늘날의 장례관습이 태동하게 된 삶과 죽음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해석을 설명하지 못한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왜 사람들이 선조들이 고인에 대해 했던 바대로 하는지 하는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초기 기독교 장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그런 후 이를 넘어 초기 문명의 장례를 살펴봐야 할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고찰은 단지 직접적으로 관련된 관습들을 보여줄 뿐 아니라 흥미 있는 유사성과 직접 관련되지는 않지만 오늘날 통상적인 것들의 연원을 알게 해 줄 것이다. 만일 수천 년 간 서로 왕래가 없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두 민족이 시신을 무덤으로 옮기는 데 둘 다 유사한 도구를 사용한다면 이는 같은 필요가 독립적으로 (그 도구의)발명의 어머니(동기)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현대 미국 장례를 이해하기 위한 기초를 찾기 위해 가장 보편적인 고대, 중세 장례를 살펴볼 것이다.
형식에 있어 조금 다를지라도, 그리고 너무나 자주 언급되어 진부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오늘날 서구문화의 상당부분은 그리스 미학과 철학 그리고 로마의 행정과 법, 주류 유대-기독교전통에 부가된 독일적(teutonic) 열정에 기초하고 있다. 하지만 현대 미국 장례의 가장 큰 부분은 역시 기독교 전통에서 유래한다. 그리고 기독교 장례의 기초는 헤브라이(유대교, 이스라엘 유대인을 다소 낮게 부르는 말)의 종교적, 윤리적 개념 하에 기초한다. 헤브라이 개념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초기 이집트와 고대 문명의 생사관과 장례관습에 막대한 영향을 받았다. 이들 고대 문명의 생사관이나 장례관습은 또 우리가 현재 알지 못하는 선사시대 이전의 우리 인류 조상들의 관습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초기 교회들은 오늘날 장례에서까지 의미와 중요성을 가지는 해석들을 구약에 추가했다. 그리고 여기에 크든 작든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와 철학적 사상들이 추가되었다. 초기 기독교 교회시대에 행해지던 몇몇 이교도적 관습들이 기독교 장례문화에 흡수되었다. 이러한 초기 기독교 장례와 여기서 유래한 현대 미국 장례를 보다 잘 이해하려면 우리를 여기로 이끈 길을 따라 역사 속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

1. 고대 이집트의 장례

남유럽과 서아시아, 북 아프리카를 포괄하는 지중해 지역에서 발생한 위대한 문명들, 즉 바빌로니아, 앗시리아, 페르시아 등의 문명 중 현대 우리 서구에 가장 영향을 준 것은 바로 이집트 문명이었다. 다른 문명들도 전혀 영향을 주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런 이유로 이집트 문명을 우선 살펴볼 것이다.
나일 삼각주와 나일강이 만들어 낸 평원에서 5천년 동안 정교하고 실용적인 학문과 기술, 실용과학들이 발전했다. 여기에 덧붙여 외부적 강제가 아니라 내부적 합의에 의해 역사시대 이래 최초로 집단적 삶의 도덕성이 태동하게 되었다. 거의 6~7천 년 전의 일을 현재 뭐라 단정하기는 위험한 일이긴 하지만, 이집트 물질문명이 이후 인류에 상당히 가치 있는 것이라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현재는 폐허가 되었지만 당시의 장대한 도시, 동상과 무덤, 피라미드, 기타 당대인들이 만든 유물들은 지금에 봐도 대단한 것들이다. 사막을 파고 유물들로부터 문명을 만든 사람들의 삶을 복원하는 고고학자들은 이 나일 국가의 보물들을 결코 탕진시키지 않았다. 새로운 발견들이 고대 이집트의 5천년에 걸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성취들에 대해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1)죽음관

고대 이집트인들의 생각이나 문화를 유형 지은 가장 영향력 있는 주제가 바로 죽음과과 내세관이었다. 태양숭배와 지하세계의 신이자 죽은 자에 대한 심판관인 오시리스(Osiris)에 대한 믿음이 죽음관에 가장 영향을 끼쳤다. 건조하고 따뜻한 기후이기에 고인의 시신은 온화하게 다루어졌고 자연적 미라화가 가능했으며 나일의 초기 정착민들이 사후에도 지속적으로 삶을 이어간다고 믿도록 했다. 죽음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반응 중의 하나가 무덤 속의 시신도 어떤 생명이 지속되며, 동시에 고인의 일부나 어떤 부분이 무덤 이외의 어느 곳에 살게 된다고 믿는 것이다.
이집트인들은 이 신성 것을 영혼(soul)이라 생각했다. 그들은 영혼이 현생에서 선악과 싸우며 사후 현생에서의 삶의 결과에 따라 영혼이 심판받는다고 생각했다. 오시리스 면전에서 좋은 평가를 받으면 영원한 행복 속으로 들어가는 반면 나쁜 평가로 심판을 받으면 영원한 불행 속으로 빠져든다는 것이다.
판각문(sculptured record)을 남길 수 있던 사람들은 (좋은)심판을 받은 사람들임은 무덤에서 발견된다. 즉 미라는 이미 하나의 오시리스였던 것이다. 정교한 의례와 엠바밍 그리고 무덤을 찾은 사람들의 기도는 고인의 미래 행복을 위해 필수적이었다. 엠바밍은 고인이 사후에도 현생과 같은 생을 이어가는 것이기에 중요했고 초기 시대의 경우에는 고인의 태양으로의 여정을 돕기 위해 하인들과 음식, 돈을 희생시키는 것이 일상적이었다.
이집트인들은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자 핵이며 태양으로부터 모든 것이 나오고 다시 태양으로 돌아간다고 믿었다. 이집트인들 죽음관의 추축은 사람을 형성하는 복잡한 요소들이 다시 고인의 시신 속에 재결합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들 요소들은 바(Ba; soul)와 야쿠(Yakhu; 빛나는 무엇), 이름, 그림자, 심장(지식과 감정의 원천) 그리고 카(Ka)였다. 카(Ka)는 가장 중요한 것으로 고인의 시신에 그대로 남아 있으며, 따라서 산자들이 보살펴야 했다. 그래서 초기에는 무덤에 음식을 바쳤는데 이후에는 무덤을 찾아 기도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집트인의 사후관의 핵심은 시신이 부활한다는 믿음이었다. 죽을 때 고인의 모든 요소들이 흩어지지만 오시리스의 기적과 일련의 의례에 따라 다시 고인의 몸에 결합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육신 그 자체는 복원될 수 있도록 본래 상태로 보존되어야 한다. 1705년 발행된 ‘엠바밍의 기술’이란 책의 저자인 외과의사 토마스 그린힐(Thomas Greenhill)은 “까다롭기 그지없는 영혼은 육체가 썩고 혐오스런 상태로 누추한 것에 있으면 떠나는 반면 육체가 완전하고 단정하면 결코 떠나지 않고......, 좋은 천으로 육체를 싸 놓으면 영혼이 육체에 깃들기 좋다.” 기술하고 있다.
이런 목적으로 엠바밍 기술이 채택되었고 알려진 바와 같이 완전한 상태까지 도달했다. 하지만 이집트 역사를 연구해 온 제임스 브레스티드(James H. Breasted)는 “영혼의 불명성에 대한 믿음이나 불멸성이란 개념을 이야기하는 것을 이집트인들의 공으로 돌리는 것은.....옳지 않다.”라고 말한다. 대신에 어떤 의미에선 영혼이 육신으로 되돌려 질 때 “불명화 된다”고 말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영혼과 이름, 그리고 그림자와 심장, 육신이 서로 결합할 때 한 “사람”이 복원되는 것이다.
이집트 장례의식의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가 과자나 오일, 맥주, 와인과 같은 음식물을 고인에게 공여하는 것과 관련된 의례이다. 이러한 제물을 공여하기 위해 재산의 일정 부분이 저축되었다. 음식물들은 일반적으로 썩거나 의례 참여자들이 먹어도 고인이 복을 받는다는 논리로 참여자들에 의해 소비되기 때문에, 음식물이 통과할 수 있는 튜브가 무덤 외부에서 고인의 입까지 연결되었다.
정교한 의례와 고인의 부활을 위한 실질적인 준비들이 실행되었지만 여전히 무덤과 고인의 영혼에 대한 유가족들의 배려와 주의는 필요하다고 믿어졌다. 시신과 관, 부장품을 보호하고자 하는 필요는 견고한 무덤 축조의 동기를 제공했다. 이어 의례를 집전하기 위한 장례 목사(tomb priest)가 이집트 장례에 생겨났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념물인 이집트 피라미드는 이집트 지배자들의 기념관이자 무덤이다. 거의 4천년 동안 이집트 사회는 파라오에서 노예에 이르기 까지 무덤을 짓고 고인을 케어하는 데 상당한 부분을 할애했다. 이에 대해 브레스티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예든 지금이든 어떠한 국가에서도 사후의 영원한 여정을 위해 고인에게 그렇게 많은 주의를 기울인 나라는 없다. 이집트인들이 많은 재산과 시간, 그리고 에너지를 “영원의 집”을 짓기 위해 헌신하게 된 믿음은 우리가 아는 한 실제 삶에 있어서 가장 오래된 믿음이다.

매장 후, 연중 가족들은 특정 때에 공여물(offerings)을 제공했고, 묘비에는 고인의 안녕을 위해 지나가는 자들이 기도를 했다고 적었다. 무덤에서 지정된 공여물을 만드는 것이 아마도 가장 불편했을 것이다. 그래서 매장지엔 직업 엠바머나 2류 성직자들이 일과, 때론 사기와 절도로 생계를 잇기 위해 모여들었다. 우리는 어떻든 이러한 분위기에 기꺼이 그들의 재산을 쓴 이집트인들의 관용에 경의를 표해야 한다.

(2)매장 동기로서의 흑사병 공포

종교적 동기와 아울러 고대 이집트인들이 적절한 시신처리를 위해 가졌던 관심사는 위생이었다. 고대 중국인들처럼 이집트인들도 부패물들이 토양 속으로 스며들어 흑사병을 유발하지 않도록 건조장법을 사용했다. 건조장법에서 시신들은 수의에 싸여 멤피스 대평원의 가장자리 사막에 6-7피트 깊이에 있는 목탄 침대 위에 놓여졌다. 건조한 공기와 토양은 시신을 느리고 위생적인 상태로 해체되도록 했고 마치 엠바밍을 한 것처럼 부패로부터 잘 보호했다. 이러한 장법은 대다수 이집트인들의 경제적 필요에도 부합되었고 종교적, 의례적 목적과 마찬가지로 다분히 위생적 효용의 목적에도 부합되었다. 즉 건조장법은 이집트 민중들에게 보다 저렴한 엠바밍의 형태로 효과적이었다. 헤로도토스(Herodotos)는 이집트 민중들이 전염병원에 상당히 노출되어 있다고 느꼈고 그래서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고 적고 있다.

(3)엠바밍

이집트 신왕조시대(1738~1102 B.C.)에 만개했던 엠바밍은 고대 이집트인들이 고인을 다루었던 관습 중 가장 흥미있는 방법 중 하나이다. 이후의 고대 역사가들, 특히 헤로도토스와 디오도루스(Diodorus)는 이집트 엠바밍을 아주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는데 여기엔 투여되는 시간, 사용되는 용품의 질 등에 따라 3등급이 있었다고 한다.
가장 비싸고 많은 주의를 기울였던 최고 등급의 경우 뇌와 내장은 제거되어 4개의 유골함에 별도로 보존되었다(그림 1참조). 신왕조시대 이 유골함은 독수리 머리 모양을 한 신인 호루스(Horus)의 4자녀를 상징하는 4개의 머리를 가진 유골함이 있었다. 메스타(Mestha)는 인간의 머리모양을 한 것으로 위와 대장을 담았고, 하피(Hapi)는 개의 머리 모양으로 소장을, 투아무텝(Tuametef)은 재칼 머리모양으로 폐와 심장을, 그리고 퀩세누푸(Qebhsennuf)는 독수리 모양으로 간과 방광을 담았다. 머리와 시신의 구멍들은 깨끗이 씻긴 다음 향신료와 송진으로 막았다. 그런 다음 시신은 40여일간 소다수에 담근 후 린넨 천으로 감쌌다.
최상급보다 더 저렴한 두 번 째 방법은 내장을 제거하지 않고 구멍으로 향나무 오일을 주입하는 것이었다. 시신을 규정된 시간 동안 알카리 성분인 천연탄산수(natron)에 담근 후 부드러운 장기들을 녹이는 향나무 오일을 주입했다. 천연탄산수는 살점들을 녹여 피부와 뼈만 남게 한다. 보다 가난한 계층이 했던 세 번째 방법은 장기들을 제거한 후 소다용액에 70일간 담그는 방법이다. 역청(아스팔트)을 사용하는 방법은 나중에 개발된 것으로 이는 보다 딱딱하고 검은 미라를 만들어 거의 영구적으로 보관할 수 있게 해 준다. 서구인들에게 이집트 미라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바로 이 유형이다. 값비싼 재료들과 향신료, 오일과 송진 등으로 엠바밍된 시신도 천으로 감싸지 않으면 그 보존 상태를 잃을 수 있었고 일반인들이 볼 수 있도록 오랫동안 남아 있을 수 없다.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그리스인 헤로도토스는 이집트 엠바밍에 대해 가장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는 ‘페르시아 전쟁’에서 이집트 엠바밍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법에서 엠바밍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지정하고 있다. 그들에게 시신이 오면 그들은 고인 친구들에게 나무로 만들어진 엠바밍 모델들을 제시한다. 그런 후 그들은 가격을 이야기 한다. 가격 흥정이 끝나면 친지들은 물러가고 엠바머들이 작업을 진행한다. 그들은 먼저 콧구멍을 통해 기구를 넣어 뇌를 꺼낸 후 측면을 절개하여 내장들을 제거한다. 이 장기들을 팜유로 씻어 좋은 향물로 덮는다. 그런 후 시신은 정제한 몰약(myrrh), 카시아 등으로 채운 다음 꿰맨다. 그런 후 니트로겐을 발라 70일 있은 다음 다시 씻어내고 면붕대로 단단히 감은 후 이집트인들이 접착제로 사용하는 아교를 바른다. 그런 후 친지들에게 돌려주면 그들이 시신을 사람 형상을 한 나무 관에 넣는다. 이것이 가장 비싼 형태의 엠바밍 방법이다. 보다 값싸게 하려면 다음과 같이 한다. 장기들을 꺼내지도 않고 시신을 절개하지도 않는다. 엠바머들은 향나무오일로 만든 연고를 주입한 후(모든 장기들을 녹인다) 니트로겐에 담가(살점들을 녹인다) 정해진 기간동안 기다린다. 그러면 피부와 뼈만 남게 된다. 이후 마지막 날 오일을 제거한 후 고객에게 인도한다. 빈자들을 위한 세 번째 방법은 몸을 투과하도록 만들어진 특수한 세정제를 사용한다. 이후 니트로겐에 70일간 담근 후 인도된다. 상류층 부인들이나 미모가 빼어난 여성들은 사후 즉시 엠바머에게 인도되지 않고 3~4일 정도 있다고 인도되었는데 이는 엠바머들이 시신을 욕보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사건이 일어났던 적이 있었다.

(4)관(Coffins)

시신을 땅에 닫지 않도록 하고자 하는 욕구는 이집트인들 뿐 아니라 대부분의 초기 아프리카 민족들에겐 공통적이었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초기 이집트인들은 갈대나 방석, 목재 등을 사용했다. 방부 기술이 발전했던 것처럼 보다 정교한 관을 개발하는 기술도 발전했다. 11대 왕조부터(B.C.2500연 경) 제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이집트 장례에선 관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역사 시대 초기, 관은 대개 직사각형에 컸으며 외부에 새겨진 머리카락처럼 가는 조각된 문자는 기도자, 가계도, 종교적, 주술적 내용으로 이는 시신의 복원을 통해 고인을 소생시키고 사후에서 고인의 능력을 증가시키기 위한 것이었다.(그림2 참조). 제12세와 18세 왕조 사이, 관의 모양이 변했는데 아마도 이는 오시리스 의식이 강화된 결과로 보이며 사람을 닮은(주로 남자) 관이 쓰이게 되었다. 초기엔 주로 고인의 얼굴을 목각으로 조각했으나 이후엔 천(linen)과 벽토(stucco)로 생전모습을 복원하여 미라 관을 만들었다(그림3 참조). 통상 이런 모습의 외관은 얼굴과 손만 외부에 노출되었으며 외곽엔 “오시리스가 심판함”이란 제목과 이름이 새겨졌다. 이러한 형태의 완성판이 자화상 관으로 2세기 경 로마 지배시대에 개발되었는데 여기엔 머리 모양을 본뜨는 대신에 목재에 얼굴이 그려졌다. 이 자화상은 현실성과 세부성에서 이집트 관을 훨씬 능가한다. 버지(Budge)는 이러한 자화상관(portrait coffin)을 다음과 같이 세부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제 18대 왕조시대 이후 가장 아름다운 자화상관이 출현했다. 아멘라(Amen-Ra; 신들의 왕)의 귀족과 성직자들에겐 최고의 장례용품들이 지급되었다. 대귀족의 경우 3중관에 묻히는 것이 통례였다. 가장 외부에 있는 관은 석관이었다. 관은 매우 정교하게 잘 만들어졌는데 내외부엔 장식무늬와 티베인의 사자의 서(Theban book of the dead), The Book of Gates, "Ammi-Tuat"의 긴 구절들과 고인의 여정을 보여주는 장면들이 조각되었다. 이밖에 고인이 오시리스신을 위시한 많은 죽은 자들의 신과 태양신을 경배하는 그림들이 곳곳에 새겨졌다. 무늬장식과 이러한 구절들은 밝은 색으로 칠해 진 다음 황금색 도금체로 덧씌워졌다. 34세기라는 세월이 색조의 밝음을 상당부분 퇴색시켰기는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미려하다.

가장 화려한 관들은 군청색 등 다양한 불투명 색유리에 진주와 준보석들이 박혀있다. 투탕카몬(Tutankh-Amon)의 관은 황금과 보석들로 만들어졌다(그림 3 참조). 석재나 화강암 관은 주로 귀족들이 사용했다.

(5)장례 전문사들과 엠바밍 의식

고인의 장례와 보살핌에 많은 시간과 재물, 에너지를 썼던 그런 사회에서 그 업무를 담당한 정교한 직업 분야가 발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고인을 적절하게 돌보는 것은 가족들이나 친지들의 몫인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부자와 귀족들은 이를 전문가들에게 맡겼다. 이집트가 사회, 경제적으로 발전해 감에 따라 고인의 사후를 위해 보다 많은 것들을 이들 전문가들에게 맡기게 되었다. 따라서 가족의 부와 지위가 상승함 따라 장례의 비용과 호화로움은 커졌고 동원되는 장례 전문가들도 많게 되었다.
다향한 계층의 전문가들이 이집트 계층구조에 맞추어 장례식을 준비했다. 장례식은 매우 신성했고 주술적, 종교적 요소들이 개입했다. 의례적 맥락에서 모든 단계에 고인을 위한 행위들이 행해졌다. 가장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주부들은 “미친 듯이 거리를 거닐며 가슴을 치고 때때론 머리를 뽑으며 거리의 먼지를 뒤집어쓰고 슬픔으로 절규했다.” 커햅(Kher-heb)이나 성직자들이 방부처리와 장례식을 감독했는데, 이들은 고인 사망으로 호출되면 최대한 빨리 상가에 도착했다. 곧 시신은 방부처리실로 옮겨지고 이들 성직자 또는 커햅은 유가족들과 방부처리법과 장례식에 대해 의논했다. 그리고 2~3개월 후 모셔질 무덤을 준비했다. 무덤은 각종 구절과 문양들이 음각되고 고인의 생애에 맞게 축조되었다. 또 전문적인 애도꾼들이 조직되어 시내를 누비며 장송곡을 불렀다.
엠바밍실은 커햅이 책임지고 있었는데 그의 책임 하에 조수들과 의사(physician)가 엠바밍을 진행했다. 엠바밍은 기본적으로 현생으로부터 고인의 분리, 그리고 오시리스신의 세계로의 재통합이란 종교적, 상징적 요소들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엠바밍의 각 단계들엔 일정한 기도와 주술이 따랐다. 조수 한 명이 시신절개 과정을 부르면 또 한명의 조수가 신성한 돌칼을 이용해 절개를 했다. 이때 고인의 신성한 몸을 절개하는 것에 대해 종교적 의식에 행해졌다. 시신절개가 이루어진 후 조수들은 시신을 씻고 향신료와 고무액을 발랐다. 꺼낸 내장들을 보존처리하여 캐노픽 유골함에 넣은 후 시신은 네이트론 용액(천연탄산소다수)에 넣어 물기를 뺀다. 그런 후 시신의 몸속에 각종 향신료와 방부제 등을 넣은 후 시신을 감싸는 복잡한 일이 진행된다. 시신을 감쌀 때는 많은 의례들이 이루어진다. 수의엔 사후 고인에게 힘을 줄 많은 구절들이 쓰여 진다. 전문가들이 시신을 감싸는 것엔 수백 야드의 천(bandages)과 수주가 소요된다. 천 안이나 관, 무덤엔 풍뎅이와 부적 그리고 많은 부장품들이 함께 들어간다.(그림4 참조).
전 역사에 걸쳐 매장을 위해 시신을 준비하는 것에 이집트처럼 그렇게 많은 절차와 기능들이 개입했던 적은 없는 것 같다. 17세기 말의 작가이자 의사인 토마스 그린힐(Thomas Greenhill)은 헤로도토스와 디오도루스, 그리고 많은 고대 역사가들의 저술을 분석한 후 이집트 엠바밍엔 다섯 명의 전문가들, 즉 디자이너, 해부전문가, 약제사, 엠바머(또는 외과의), 그리고 성직자가 필요했다고 적고 있다. 마지막 사람의 기능은 “위대한 철학자”이자 이 의식에서 타인들을 감독하는“ 것이었다. 그리힐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외과의(surgeon, 또는 엠바머)는 엠바머 총감독(chief embalmer)으로 통상 엠바밍 과정을 감독했고 때론 직접 엠바밍을 했다. 즉 낮은 계급의 경우엔 조수들(해부전문가 등)이 했지만 귀족이나 왕족의 경우 외과의가 직접 했다. 그리고 약제사는 각종 향신료와 오일 등의 각종 방부 액들을 어떻게 섞을 것인지를 결정했다. 그리고 의사(성직자, physician)는 외과의가 방부 처리하는 것을 돕거나 조언을 했다.

장례과정은 커햅이 주도했는데 그는 조수들과 함께 관에 들은 고인 시신을 운구했고 그 밖의 장례용품들을 챙겼다. 운구시 미라화 된 고인은 소나 사람들이 이끄는 슬레지(莎草) 위에 놓이고 장례행렬엔 유가족과 노예들 그리고 친지들과 애도꾼들이 장지를 향하며 슬픔을 토로하고 종교적 의례들을 했다. 장례행렬시 강이나 호수에 닿으면 시신은 성화된 배로 옮겨졌다. 마침내 장지에 이르면 부자들의 경우 매장지를 담당하는 성직자와 그 조수들에 의해 매장이 진행되었다. 먼저 무덤 맨 밑에 가족들의 능력에 따라 준비된 석관이 놓였다. 그리고 무덤 위엔 고인의 안녕을 위해 각종 공물들이 놓였다. 일반인들의 경우 대다수는 지상에 어떤 구조물이나 돌집이 없는 공동 무덤에 집단으로 묻혔다. 디오도루스에 따르면 모든 사람들은 법정에서 매장허가를 득해야 했다고 한다. 이것은 오늘날 이집트 장례관습에서 고인을 매장하기 전 한 증인이 고인의 특성에 대해 진술해야 하는 제도에 여전히 남아있는 것 같다. 고인이 묻히면 최종적으로 돌 뚜껑이 이 영원한 무덤을 닫게 된다.

(6)이집트 장례관습의 영향

이집트인들의 그들의 모든 재능과 에너지를 오로지 고인 장례에만 쏟은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집트 문명이 상대적으로 상당한 경제적, 사회적 발전에 도달했기 때문에 그들이 고인을 호화스럽게 모신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사후 고인의 영생을 믿는 오시리스 의식은 전 이집트 사회로 확산되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고인을 미라화 한 기본적인 이유는 한 개인의 총체성을 이루는 모든 요소들이 완벽히 보존되도록 해야 한다는 믿음이었다. 이러한 믿음이 기독교 신학에 그대로 반영된 것은 아니지만 이집트에 사는 기독교인들의 관습에는 영향을 미쳤다. 이집트인들은 저승으로 들어가는 것이 마술적(주술적), 신화적 절차에 좌우된다기보다는 기본적으로 생전의 선악에 의해 좌우된다고 믿었다. 이것은 고인의 심장이 죽음의 신인 아누비스(Anubis)의 저울에서 깃털의 무게에 의해 측정되어 판단된다. 심장의 무게가 깃털의 무게보다 무거우면 괴물 아멘트(Ament)가 먹어치우게 되고 그러면 고인은 영원한 오시리스의 세계로 가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믿음은 헤브르인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이들의 가치관과 의식을 대변했다.
고인을 엠바밍하는 이집트 관습은 현대 서구문명과는 습합되지 않은 종교적 믿음에 근거하지만 지금까지도 상당한 흥미를 일으키고 있고 그들이 사용했던 엠바밍의 방법과 이념은 지금껏 상당한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이집트 엠바밍을 생각해 보면, 엠바머가 성직자 계급에 속해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엠바밍 그 자체가 하나의 종교적 의식임과 동시에 하나의 물리적 행위였다. 이러한 엠바밍의 이중적 기능은 이후의 서구 장례관습에 이어지지는 못했다.

2. 고대 그리스의 장례

미세네의 황금기(Mycenae, 1600, B.C.)와 그리스 문명의 최종몰락을 상징하는 아테네 대학의 폐쇄시기(529, A.D.)의 사이 2천여 년 동안, 현대 서구문명의 기초 문화를 구성하는 위대한 그리스 문명이 있었다. 이집트 문명처럼 역사적 깊이가 풍부했던 것은 아니지만 B.C.5세기 경 그리스 문명은 절정에 달했다. 예술과 철학 그리고 정치적 행위가 이 고대 황금기에 최고봉을 이루었다. 우리는 여기서 고대 그리스의 죽음관과 장례관습을 살펴보는 것에 집중할 것이다.

(1)고대 그리스인들의 죽음관

그리스에서 죽음은 항상 인류에게 보다 더 가혹한 것 중의 하나로 인식되었다. 고대 그리스 문헌들이 죽음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죽음에 대해 엄격한 형용어구를 썼다. 모든 그리스 문헌에 사후생에 대한 믿음이 모호하게 존재하지만 초기엔 고인을 지하 세계에 살아있는 존재로 인식했다. 이후 호메로스 시대(circa, 700B.C.)에 이러한 믿음은 고대 지중해 사람들에게 보편적이었던 육체를 벗어난 영혼들이 모여 사는 어두운 세계란 개념으로 대체되었다.
그리스 장례관습에 정통한 로데(A.Rohde)는 육체를 탈피한 존재란 이러한 믿음이 화장 도입을 가져왔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이 이론이 3세기 이전 청동기 시대 그리스 부족국가들이 미세네(Mycenae)의 지도아래 아케이언 제국(Archaean)으로 느슨하게 통합되어 있을 당시 최초로 화장이 도입된 사실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고인을 태우는 관습은 당시 야만족과 접촉이 있었던 북 그리스로부터 그리스 반도로 유입되었다. 처음엔 화장하는 사람들이 적었다가 이후 추상적인 기하학 무늬시대(Proto-geometric period)에 이르러 화장자가 늘어났다. 이후 B.C. 700년경 역사시대 직전 매장법을 취하게 되었다.
사후생에 대한 그리스 관념의 절정기 땐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어 영원하고 불멸인 사후생으로 상승하거나 여행한다고 믿었다. 이에 대해 러쉬(Rush)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트레이스(Thrace)에서 기원한 술의 신인 디오니시우스(Dionysius)에 대한 숭배는 영혼 불멸에 대한 믿음의 최초의 씨앗이었음에 틀림없다. 이 의식은 일상의 삶을 벗어나는 황홀한 것으로 그러한 황홀감 속에서 영혼은 육체를 떠나 신의 세계로의 여정을 하는 것으로 상상될 수 있었다.

다분히 동양적이고 이국적인 이러한 의식이 대중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인의 죽음에 대한 통상적인 생각이나 반응은 영광스런 사후세계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체념적인 것이었다. 천국행이나 신의 세계로의 통합은 오로지 소수만이 가능했다. 그리스의 죽음관은 염세적인 것, 희망 없음과 절망적인 것으로 여러 저술가들이 그려내고 있다. 이러한 개념의 죽음에 대한 반발적 특성은 유리피데스가 자신을 “시신의 왕, 곧 죽음”이라 언급한데서도 보여 진다. 하지만 사후에 대한 믿음이 어떠하든, 영혼이 육체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의미에서 물질적이었다. 죽음은 현실적인 것이고 그래서 악이고 나쁘며 무서운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장례식이나 무덤의례 그리고 고인에 대한 기억은 살아있는 자들이 고인과 자신들을 연결시키는 방식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2)장법

고인에 대한 숭배는 그리스 모든 시대에 걸쳐 매장관습에 배어든다. 고인을 적절하게 매장하는 것이 관습이었고 아테네법은 심지어 이방인이라도 적어도 흙으로 덮도록 규정했다. 고인을 등한시하는 것은 비난받았다. 그리스의 여러 문헌들이 매장이 그리스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여러 사례들을 밝히고 있다. 예를 들어, 소포클레스의 연극 안티고네(Antigone)에는 폭군 크레온이 반역자 폴리니세스의 매장을 금지하자 그의 여동생인 안티고네가 고인이 땅위를 배회하지 않고 신들의 세계로 갈 수 있도록 상징적인 매장이라도 해 줄 것을 탄원하는 내용이 있다. 이 탄원이 거절되자 여동생은 오빠의 시신에 흙을 뿌리고는 제국 법을 어기고는 시신을 가지고 간다. 호머의 일리야드에서 트로이의 영웅 헥토르가 그리스의 영웅 아킬레스에 의해 정복되자 그의 발아래 무릎을 꿇고는 살려달라고 말하지 않고 자신이 매장될 수 있도록 자기 시신을 아버지인 토로이의 왕 프리암에게 주고는 자신이 알고 있는 금은보화를 가져갈 것을 간청한다.
고인이 매장되지 못한 채 남아있지 않도록 아테네인들은 전장에 거대한 장작더미를 쌓아 전사들을 화장했고 뼈를 수습해 아테네로 가져가 적절한 의식과 함께 매장했다. 아테네 평의회 앞에서 승리의 소식을 급하게 알리기 위해 전장에서 전사들을 매장하지 않고 남기고 온 장수를 처형할 것을 요구하는 부모들의 이야기도 있다.
초기 그리스 매장관습에는 사람을 희생양으로 바치는 경우도 있었던 것 같으나 이후에는 그레이브스(Graves)가 “매장과 관련된 모든 것들이 매우 현대적인 것처럼”보인다고 지적했던 바와 같이 상징적인 공여물로 대체되었다. 사망하면 고인의 입과 눈은 곧바로 가족이나 친지들에 의해 봉해졌다. 그리스의 장례함(유골함; funerary urns)에는 이러한 광경들이 묘사되어 있는 데 통상 고인의 입이나 눈을 봉하는 것은 여자들이나 어린이들이었다.(그림5 참조). 저승으로 가기 위해서는 스틱스(Styx)란 강을 건너야 했는데 이때 뱃사공인 샤론(Charon)에게 뱃삯을 치르기 위해 고인의 입에 3펜스를 넣었다. 뱃삯을 지불하지 못하면 유혼(shade)은 수백 년 간 강가를 헤매게 된다.
매장을 위한 시신준비는 통상 가족들이 했다. 가장 가까운 친지들 중 선발된 여성이 고인을 따뜻한 물로 씻겼다. 그 과정에서 죽은 고인이 살아날 수도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러한 행위는 상징적 행위 그 이상이었다. 시신에 수의를 입히는 것 역시 신성하게 여겨졌고 같은 방식으로 여성에게 맡겨졌다. 시신에 성유나 향, 각종 향신료를 발랐지만 영혼은 해체되어 유지된다고 믿었기에 방부처리와 같은 행위는 하지 않았다. 그리스 초기시대부터 고인에겐 옷을 입혀 매장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그리스의 철학자로 ‘영웅전’의 작가인 풀루타르크(Plutarch)는 고인의 수의를 호화롭게 장만하던 당시 세태가 솔론 왕으로 하여금 수의는 단 세벌로만 하도록 하는 법을 만들게 했다고 말한다. 즉 장례침상(funeral bed)을 싸는 것과 고인을 싸는 것 그리고 가장 외피를 싸는 수의이다. 이렇게 장례비용을 통제하는 법은 역사적으로 특이한 것이 아니다. 미국 식민지 시대에서도 호화장례를 금지하는 법들이 있었다.
고인의 친지들과 친구들은 꽃으로 화환을 만들어 고인에게 바쳤다. 지옥문을 지키는 머리 셋에 뱀 꼬리를 한 케르베루스(Cerberus)를 위해 꿀로 만든 과자를 고인이 지니고 가도록 했다. 추모객들은 검은 색 옷을 입은 반면 고인은 흰색 수의를 입었다. 사망 후 1일 이내 고인을 씻기고 성유를 바르며 수의를 입히면 매장준비가 끝나는 것이다. 그런 후 친구와 친지들이 고인의 죽음을 최종 확인하는 의식으로 고인을 문상했다. 그러는 동안 여성들이 의례적 울음을 시작했다. 그 상태에서 하루가 지난 뒤, 고인이 7일간의 애도를 할 정도의 사회적 신분이 아닌 경우, 시신을 무덤으로 운구하는 행렬이 이루어졌다. 통상 여명 한 시간 전 행렬이 출발했다. 장례행렬은 친지들이나 친구들이 또는 고용된 운구도우미가 운반하는 관가에 실린 고인과 친목회 회원들 그리고 고용된 만가꾼들이 앞뒤로 구성되었다.(그림6 참조). 재미있게도 남자는 누구든 이 음침한 행렬에 끼어들 수 있지만, 여자는 60세가 넘었거나 아니면 16세 이상의 고인 혈족이 아니면 이 행렬에 참가할 수 없었다.
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화장은 B.C. 1000년경 그리스에서 북 그리스의 이민자들로부터 시작된 하나의 매장 방법으로 시작되었다. 처음엔 거의 행해지지 않다가 점차 증가해 호메로스(Homeric)와 고전시대(Classical times)에 와서 주된 장법이 되었다. 어떤 시기에도 매장이 없어지진 않았지만 불꽃의 힘이 고인의 영혼을 자유롭게 해 준다는 믿음으로 화장이 성행했다. 하지만 고인의 유골은 여전히 영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고 여겨졌다. 비록 화장이 후기 그리스 시대에 보편적으로 행해졌지만 장례식 역시 고대 이집트인들이 사람을 구성하는 물질들을 완벽히 갖추어야 재탄생할 수 있다는 생각한 것과는 완연히 구분되는, 육체를 떠난 영혼, 또는 유혼이란 개념을 나타냈다.

(3)관과 무덤

목재와 석재 그리고 불에 구운 흙 관이 초기 그리스 시대에 사용되었다. 초기 시대를 대표하는 구운 흙 관은 대부분 별다른 문양이 없었지만 일부는 꽃 그림 문양이 새겨져 있다. 이후엔 사이프러스(cypress) 목재상자관이 사용되기도 했지만 석재관이 가장 대중적이었다. 석관은 운구하기가 어려웠다. 시신은 관가에 놓여 화장되거나 아니면 관에 넣은 상태로 매장되었다. 무덤은 4종류로 구분되는데 스텔래(srelae; 수직갱도; shafts), 키오네스(kiones; 기둥형태;columns), 트라파자에(trapazae; 정방형의 무덤), 나이디아(naidia; 사원형태)이다. 스텔래는 곧은 석판이었고 다른 무덤들은 종종 얕은 돋을새김들로 덮여 있고 채색으로 마무리되어 있다.(그림6 참조). 새겨진 풍경들은 죽음침상에 누워있는 고인이나 집에서 일하는 것 등 생전의 모습과 유사했다. 아테네에서 발견된 한 돋을새김에는 식사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한 수염 기른 남자가 접시를 들고 긴 침상에 기대어 있고 그의 아내가 접지 받침대를 들고 그의 발아래 앉아 있으며 친구 한 명이 침상머리에 서 있고 그 밑에는 개가 누워있다. 무덤이나 관 안에는 실용적이며 예술적인 부장품들, 장신구, 보석, 용기, 화환, 각종 화장실 도구, 전쟁도구, 놀이기구들이 놓여 있다. 이집트인들처럼 죽음 준비는 죽기 전 각자가 했다. 가족묘지도 역시 사용되었다.
장례식의 최종 단계는 유가족들이 지켜온 단식을 중단하는 장례축제였다. 이후 특정일에 가족들은 무덤에 각종 공물을 진설했다. 초기 그리스 시대엔 이러한 진설물(공물)이 신을 달래는 희생물이었으나 이후엔 음식이나 술, 그리고 다양한 배합주로 대체되었다. 이를 통해 그리스인들은 고인과의 관계 그리고 그들이 인간의 숙명이라 여겼던 황량한 저승과의 관계를 생생하게 유지했던 것이다.
헤로도투스는 초기 그리스인들이 고인의 사후 물질적 풍요를 위해 노예나 짐승들을 희생했다고 말한다. 고인을 위해 모든 저승 신들에게 감사하고 고인이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는 이러한 관습은 많은 민족들의 장례관습에서 발견된다. 인도 힌두교의 고인 부인이 자해하거나 아니면 스스로 화장하는 수티(Suttee)가 현재는 불법이지만 드물게 현재도 일어나고 있다. 대부분은 이러한 행위가 상징적 행위로 대체된다. 이집트인들이 주인을 위해 노예를 죽여 함께 묻는 것도 나중에는 작은 토기모양으로 노예를 만들어 함께 묻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상징물이 무엇이든 대부분 고인과 함께 묻히는 것은 고인을 위해 쓰여 질 물건들이다. 예를 들어 이집트 무덤에서 발견되는 대부분의 작은 토기로 만들어진 형상들(풍뎅이 등)은 사후에 실질적으로 쓰이는 물건이 아니라 소생을 상징하는 것들이다. 소똥을 굴려 둥글게 만들어 알을 낳고 다시 소생하는 풍뎅이를 본 이집트인들은 고인이 썩어 다시 새로운 생명이 탄생한다고 믿었다. 이집트인들은 밀도 상징으로 여겼다. 무덤 속의 밀은 한 생명이 새로운 싹을 틔울 준비를 마친 상태에서 동면중인 것임을 상징한다. 만일 기독교인 무덤에서 밀과 포도가 발견되면 그것은 각각 술과 음식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기엔 성찬식이란 의미가 추가된다.

3. 고대 로마의 장례

B.C.753년 로물루스(Romulus)가 로마의 첫 왕이 된 이래부터 1200년이 지난 A.D.476년 이민족 오도아세르(Odoacer)가 서로마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Romulus Augustus)를 폐위시킬 때까지 로마문명이 출현해 번영하다 수많은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종교적 변화 속에 결국 외부로부터의 이민족 침입과 내부의 도덕적 부패로 인해 급격해 해체되었다. 로마의 정치 경제적, 사회적 제도들은 서구 유럽의 유산이 되었다. 비록 로마가 실질적인 표현예술의 여러 영역에서 로마 문화에 빚을 졌지만 과학, 행정에 대한 로마의 공헌은 독창적인 것이었다. 세세한 로마 장례관습들이 오늘날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종교적 장의사가 아닌 세속적인 장의사가 출현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로마의 매장관습이나 방식은 오늘날 장례지도사의 역할과 특성, 지위, 직업적 역할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1) 로마의 죽음관과 매장의 중요성

로마인들의 사후에 대한 믿음은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다양했다. 초기시대의 경우 영혼이 생명력을 가진다는 애니미즘적 시각으로 인간의 영혼이 죽음으로 육체와 분리되어 영혼 그 자체의 행복과 평화를 위해 매장지 주변을 떠돌며 후손들에게 끊임없이 음식과 마실 것을 요구한다고 생각했다. 고인에 대한 제사(공물)가 끊기면 고인은 행복해질 수 없고 오히려 악령이 되어 자신을 등한시한 후손들에게 해를 끼친다고 믿었다. B.C. 300년경부터 그리스 문화와 접촉하면서 로마인들에게 죽음과 사후에 대한 새로운 종교적, 철학적 신념이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스와 동양의 신비적 의식들은 사후의 영적 측면을 강조했고 영원하고 황홀하며 기쁜 영원의 세계에서 신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희망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러한 영원의 세계 반대편은 고문과 기근 등 지옥의 세계가 있었다. 에피크로스 학파가 제창한 보다 철학적인 개념은 원자를 구성하는 육체와 영혼이 죽음으로 인해 단지 해체된다는 개념이었다. 따라서 인간의 사후는 생전과 다르지 않다. 다만 중용의 철학은 성 파울이 “우리가 죽을 내일을 위해 먹고 마셔라”라고 특징화했던 것처럼 일상 속으로 속화되었다. 아우구스탄 시대(Augustan age 43 B.C.~14 A.D.)에 저술활동을 한 마에케나스(Maecenas)는 시를 통해 당대의 질병뿐 아니라 로마인들이 현생과 이승에 대해 가지고 있던 질곡들을 잘 표현하고 있다.

손과 발엔 통풍 든 살점이 두둑해도
종양 덩어리가 뿌리 채 자라고
중풍이 내 연약한 넓적다리를 흔들어도,
어깨는 천근만근, 축 늘어진 잇몸으로라도
살고만 있다면 좋은 것이라네.

로마제국의 지배적 종교로서 기독교의 출현은(A.D.300년경) 처음으로 죽음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내놓게 되었다. 죽음은 인간과 조물주에 대한 조직화된 신념체계가 부여하는 의미였고 장례식은 예수의 죽음을 본뜬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죽음과 시신처리에 대한 다양한 지향들로 인해 그것을 일반화하기는 쉽지 않다. 통상, 어떤 식의 사후이든 로마의 어떤 시기, 어떤 사람들이든 모든 로마인들은 나름대로의 사후관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에피쿠로스도 유언서에서 죽은 조상들에겐 영원히 제사를 지내야 하며 자신의 생일에도 기려줄 것을 부탁했다. 더더욱, 사후의 형태를 어떻게 여기든, 산자와 고인의 관계는 산자에게든, 죽은 자에게든 지속적이었고 매우 중요했다.

(2) 로마의 매장관습

로마엔 여러 시대에서 화장과 매장이 행해졌다. 공화정과 예수 사후 1세기 시대엔 화장이 보편적인 장법이었으나 로마황제시대에 이르러 화장이 토장으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변화의 원인은 불을 혐오하는 동양적 의식들이 널리 퍼진 것과 신성한 몸을 강조하는 기독교의 부흥, 그리고 일종의 유행이었다.
위생상의 이유로 로마시내 안에 매장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따라서 외부로 나가는 큰길가에 부자들이 만든 정교하고 값비싼 무덤들이 즐비했다.(그림7 참조). 이들 대부분은 가족 묘지였다. 동상이나 기념관을 지어 시민들이 개인을 참배하는 것도 있었는데 이는 엄밀히 말해 묘지는 아니었다. 물론 로마의 서민들은 그리 화려하지 못했다. 노예나 외국인들의 시신은 시내 외곽의 공동묘지(commune sepulchrum)에 묻혔다.
거대묘지로 화장 유해를 담은 유골함을 넣는 납골실로 가득 차 있는 컬롬바리아(납골당; columbaria)는 적절한 묘지를 구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빌려주기 위해 투기꾼들(speculator)이 건립했다. 한편 이를 본떠 장인계급들은 매장조합(burial societies)을 만들어 판매를 목적으로 이러한 건축물을 지었다. 물론 목욕탕이나 도서관처럼 시민복지 증진을 위해 독지가들의 후원으로 만들어진 것들도 있었다.(그림7 참조). 비천한 계층의 매장처리는 공기관의 책임이기는 했지만 매장조합들이 가난한 노동계급의 매장을 처리하는 최초의 대행기관이 되었다. A.D.100~200년경, 라누비움(Lanuvium)엠 이를 규정하는 법이 있기도 했다.
로마 장례에선 고인들이 외롭지 않았다. 즉 죽음의 실재를 피하거나 서둘러 고인을 감추지 않았다. 사람들은 직계가족이 모인 가운데서 임종했다. 보통 시신은 따뜻한 물로 씻겨 진 후 성유를 바르고 흰 토가(toga) 수의를 입혀 고인의 사회적 지위에 맞추어 준비되고 꾸며졌다. 그런 후 시신을 장례 침상(funeral couch)에 누인 후 고인의 지위에 따라 3일에서 일주일 간 모셨다. 장례침상엔 꽃들이 뿌려지고 향을 피웠으며 문밖엔 죽음으로 인한 오염을 경고하기 위해 사이프러스나 소나무가지를 놓았다.
부자인 경우 시신은 전문 장의사에게 맡겨져 장례식과 매장이 준비되었다. 로마인들의 경우 이집트인들처럼 시신의 영원성을 위해 엠바밍을 했던 것이 아니라 부패하지 않고 오랫동안 모실 수 있도록 엠바밍이 행해졌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의 경우 오랜 기간 동안 원래의 상태대로 모셔질 수 있도록 주의가 요망되었다. 로마 장례에 대해 언급한 여기저기의 문헌들을 종합해 보면, 의사(physician; 장의사)의 역할은 명확하지 않다. 예를 들어, 플린니(Pliny)가 이집트인들의 경우 의사(physician)의 기술로 고인을 방부 처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말하는 것과는 달리 그리스나 로마인들의 경우 의사가 엠바머로 활동한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비록 일반적인 로마의 엠바밍이 시신을 향신료나 각종 향료로 시신 외부를 바르는 단순한 것이었지만 일부 부유층이나 명망가들의 경우 시신의 각종 구멍을 막는 엠바밍도 행해졌다. 이 경우 엠바밍은 로마의 장례지도사(head undertaker)들인 리비티나리우스(libitinarius)의 노예이거나 고용자들인 폴링터(pollinctores)들에게 맡겨졌다. 리비티나리우스란 이름은 이들이 사원이나, 리비티나(Libitina; 장례, 죽음, 시신의 여신 )의 숲(grove)에서 장의업을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원이나 리비티나에 사망서가 등록되었다. 장의사 밑에는 이들 폴링터 이외에 장례식과 장례행렬을 맡아 행하는 데지그네이터(designator; 지명자)란 또 다른 하위 장의사가 있었다. 프래코(praeco)는 공공장례에 부름을 받는 전문 울음꾼들이었다. 매우 흥미롭게도 이들 장의업에 종사하는 자들은 이들이 정치적 행위에 참여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던 것으로 보아 사회적 지위가 그리 높지 않았으나 그 직을 퇴임하면 그들이 최고의 관직에 선출될 수 있었다.

(3) 초기의 장례지도(funeral directing)

명백히 로마의 리비타나리우스가 장의사나 현대 장례지도사의 직접적인 선조임엔 틀림없다. 이들은 시신에 성유를 바르거나 엠바밍 하는 것은 물론 추도전문객, 추도옷, 각종 장례용품을 공급했고 사별슬픔을 치유하기 위한 각종 서비스도 공급했다. 더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가 장례행렬의 세세한 것을 챙기는 데지그네이터를 관리감독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장례행렬은 현재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었다. 현재의 장례행렬도 중요하지만 별다른 주의를 끌지 못하나 로마의 장례 행렬은 공공행렬로 고인이나 유가족의 사회적 지위와 부를 보여줄 수 있는 중요한 기회였다 죤스톤(Johnston)은 당시의 장례행렬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보통 시민의 장례행렬은 단순했어요. 가족들과 이웃, 친구들이 참여했죠. 시신은 고인의 아들들과 가까운 가족들이 어깨에 매어 운구했고 그 뒤엔 음악 연주가들이 따랐죠. 반면 권력자의 행렬은 온갖 치장을 하고는 가능한 모든 것을 보여주는 행렬이었죠. 필요한 준비가 끝나면 곧바로 행렬이 진행되었어요. 공적인 울음꾼들도 동원되었고 많은 시민들이 보았죠. “시민들은 죽음에 포위되어 있다. 시간이 나는 사람들은 장례식에 갈 시간이다. 고인이 지금 막 집을 나서고 있다.” 장의사인 데지그네이터가 장례행렬 순서를 정했죠. 행렬의 맨 앞엔 음악밴드가 섰고 이어 만가를 부르는 소리꾼들이 뒤를 이었어요. 이어 익살꾼들과 어릿광대들이 서 구경꾼들을 재미있게 했고 이들은 심지어 고인처럼 분장을 하거나 흉내 내기도 했어요. 이어 고인의 조상들을 본떠 왁스(초)로 만든 마스크(평소엔 알라에(alae)란 장소에 보관함)를 쓴 광대들이 따랐죠. 이들 조상들이 고인을 조상들 곁으로 안내한다는 의미였어요. 세르비우스(Servius)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조카인 어린 마르셀루스(Marcellus)의 장례식엔 심지어 600여개의 가면이 등장했다고 쓰고 있어요. 이어 고인의 생전에 한 행위를 기리는 기념물들이 뒤따랐는데, 예를 들어 고인이 만일 장군이었다면 높은 침상에 고인얼굴을 한 자가 전쟁승리 행렬처럼 서서 행렬을 했던 것이죠. 이 뒤를 이어 유가족들과 고인이 자유를 준 자유민 그리고 노예와 친구들이 추모복장을 하고 그들이 당시 느끼는 감정들을 자유롭게 토로하며 따랐죠. 밤에 운구하는 관습을 흉내 내어 횃불 운반자들도 열에 참여했어요.

고인을 흉내 낼 익살꾼을 선정하기 위해 고인을 닮은 배우를 고르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희화화는 고인을 지하세계의 새 멤버로 가입하는 것을 에스코트하기 위한 것이었다. 왁스로 만든 마스크들은 이후 장례식에 쓰도록 가보로 보관되었다.
통상의 장례식이 밤에 진행되었지만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낮에 묻혔다. 이때도 밤의 매장관습에 따라 횃불 운반자들이 행렬에 참가했다. 사회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의 장례식에는 시내 포룸(Forum; 고대 로마의 공공광장)에서 조사(弔辭)가 읽혀졌다. 그런 후 시신은 화장이나 매장지로 옮겨졌다. 여기서는 매장지의 성화, 참석한 사람들의 정화의식 그리고 고인에게 흙을 뿌리는 의식이 행해졌다. 매장 후 일정기간 추도기간이 설정되어 신들을 위한 제물이 올려 지며 고인에 대한 기념물이 다음 추도축제까지 유지되었다. 산자들이 고인을 등한히 하면 고인이 해를 끼칠 수 있다는 두려움으로 전문적인 추도 울음꾼들을 장례식에 참가시켰다. 고용된 울음꾼들(여성)은 가슴을 치며 울부짖었다. 의례가 마지막에 이르면 이들의(울음꾼) 슬픔은 절정에 올라 고인을 부르며, 머리를 쥐어뜯고 옷과 얼굴을 피가 날 때까지 쥐어뜯으며 관을 세 번 도는 의식으로 절정에 이르렀다.(그림7 참조).
최초의 기독교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대제(A.D.314~379)에 이르러 정부가 적절히 매장지를 구할 수 없는 시민들을 위해 개입하기 시작했다. 장례행렬과 운구, 그리고 무덤을 파기 위해 다양한 공적 기관들이 생겨났다. 과다한 장례비용을 금지하는 법안이 마련되어 장례비용이나 용품 값을 과도하게 받는 것은 불법이었다. 풋클(Puckle)은 “필요한 모든 사람들은 비용 지불 없이 관을 지급받을 수 있고, 가장 가난한 사람들조차도 네 명의 운구도우미와 8명의 수도사 그리고 3명의 시종들이 고인의 매장지까지 동행해야 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 시대부터 장례식은 점점 더 교회의 영역이 되어갔고, 이후 서구문화 혁명까지 1500여 년 간 세속적 장의사는 사장되게 되었다.

(4) 로마 장례관습의 영향

현대 장례에 대한 로마 장례의 영향은 지금껏 경시되어 왔다. 예를 들어 장송곡(conclamatio motis) 의례는 공식적인 기독교 교회의례로 채택되지 않았다. 녹(Nock)은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당시 상류사회의 관습이 점차 밑에 계급으로 확산되었다. 석관을 쓰는 매장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석관은 비쌌지만 최고의 부자들은 호화로운 무덤을 만들었다. 그럴 여유가 없는 사람들도 석관을 썼고....점차 석관이 가난한 사람들에게까지 주류 장법이 되어 갔다.

현대 장례에 대한 로마의 영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로마 장의사이다. 이들은 장례 전반의 관리자이자 감독자이며 모든 용품과 서비스를 공급했다. 덧붙여 시신은 적절한 공적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로마의 장례행정과 법 역시 현대 사회에 시사 하는 바가 크다.

위 자료는 미국 장례업계 종사자들의 필독서라 할 수 있는 미국 장례의 역사(Habenstein and Lamers 7th, 2007, NFDA; U.S.A.) 제1부를 번역한 것입니다. 강의를 위해 번역한 것으로 저작권자의 허락을 받은 것은 아님을 밝힙니다. (번역자: 강동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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