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묘지의 역사
아래 글은 미국의 유명한 장묘전문회사 로웬그룹의 사내교육교재를 번역한 것입니다
묘지의 역사
매장과 화장의 역사(BC62,000년부터 현재까지)
Todd W. Van Beck ( Loewen Group의 교육담담 이사) 저
*역자 주; Loewen Group: 미국에 본사를 두고 있는 다국적 장묘전문그룹
미국, 카나다, 영국 등에서 묘지운영,장례식장 운영 등을 한다
자세한 내용은 회사 홈페이지 www.loewengroup.com참조
*번역; 강동구(姜東求)-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생사의례학과 겸임교수, FBA지도교수
목차
제1장; BC62,000년 경의 서아시아의 죽음과 관련된 의식들
제2장; BC4200-BC525년 이집트
제3장; 고대 그리스
제4장; 고대 로마
제5장; 히브르의 매장
제6장; 초기 기독교의 매장
제7장; 교회와 화장(화장의 역사;BC 1000년 이전)
제8장; 중세시대(476년-1500년)
제9장; 르네상스 시대와 초기 미국
제10장; 19C의 매장제
제11장; 19,20C의 매장의 역사
결어
제1장; BC 62,000경 서아시아의 죽음과 관련된 전통들
기네스북에 의하면 인류의 가장 오래된 종교의식은 다름 아닌 주검의 매장의식이다
즉 시신의 처리와 묘지의 기능이야말로 인류가 기록했던 가장 오래된 행위였음이 자명하다
매장전통에 대한 최초의 증거는 1951년 랄프 솔레키박사에 의해 서아시아에서 발견된 호모사피엔스(최초의 인류)계열의 네안데르탈인이다. 그림은 육중한 이마와 두껍고 큰 코, 짐승 같은 생김새의 원시인 네안데르탈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실상 그들의 모습은 고대 유럽인의 모습과 유사하다.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발군된 두개골로 추정해 볼 때 네안데르탈인의 뇌 용량이 현대 우리의 별반 차이가 없다고 한다. 다소 짐승 같은 외양이긴 하나 그들은 제법 문명화된 사회를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솔레키 박사의 연구에 의하면 우리 인류의 조상은 죽음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북 이라크의 자그로스 산맥에 위치한 샤니다 동굴에서 발견된 유물로 볼 때 네안데르탈인들은 장례의식을 치른 후에 시신을 묘지에 매장하기 시작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들은 시신과 함께 음식, 사냥도구, 그리고 목탄(숯)을 함께 매장했다. 프랑스의 꽃가루전문가인 아르레테는 당시의 발굴 조사시 묘지주변에서 포도, 히야신쓰 등 8종이 넘는 야생화 샘플을 찾아냈다. 이는 당시에 시신을 여러 꽃들로 장식한 소나무가지 깔개에 �혀 묻었음을 보여준다.
6만 년 전에도 사람들은 장례식에 불을 사용했다. 이는 샤니다 동굴의 묘지유물에서 나온 토치(횃불을 켜는 도구)를 보면 명백하다. 물론 그들이 왜 토치를 사용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참 후에 고대 로마인들은 장례식의 토치의 불꽃이 영혼을 영원의 세계로 인도한다고 믿었으며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퓨너럴이란 말도 토치, 토치의 행렬이란 의미의 라틴어 퓨너스,퓨너럴리스에서 유래하고 있다
솔레키 박사는 1960년에 다시 샤니다 동굴에 현지조사를 가서 6구의 두개골을 발견했는데 그들의 매장방식은 모두 유사했다. 6만2천년 전의 유족들도 자그로스 산의 꽃들을 꺾어 고인의 넋을 위로했는데 이는 아마도 죽은 자에 대한 유족들의 의미가 어떠했는지를 나타내주는 가장 오래된 묘지사의 예라 하겠다.
네안데르탈인시대와 고대시대의 사이에 언급할만한 매장법의 변천이 두가지 있었는데 BC 일만 년 전 크로마뇽인들은 시신을 특정장소에 묻기 시작했으며 또한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은 미스테리한 붉은 가루로 시신을 덮었던 것이다. 결국 시신은 (뭔가에) 싸여져 갈대나 관목들로 만들어진 방석 등에 놓여 묻혀지게 되었으며 이러한 매장법은 그이후의 묘지역사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나타나게 된다(그러한 매장법이 일반화되게 되었다)
제2장; 이집트(BC 4200년경에서부터 BC525년까지)
오늘날 발달해 있는 석관이나 묘지, 석묘는 고대 이집트의 묘에서 연유한다.
초기 이집트의 묘지는 단지 구덩이에 불과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묘지는 더욱더 중요해지기 시작했고 결국 무덤은 죽은 자를 위한 집이었고 따라서 영원히 견딜 수 있도록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묘에 있어서의 영원성에 대한 태도는 요즘에도 여전하다
묘는 시신이나 부장한 보물을 도둑들로부터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요새였다. 오늘날의 관(미국의 카스킷이나 볼트; 석관, 청동관, 목관 등)에서도 시신을 완벽히 지키려는 이러한 의도가 충실히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이집트인들에게 있어 매장묘는 그들이 살고 있는 집보다 더욱더 중요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살아생전에 자신들의 무덤을 만들었는데 이를 마스터바라 했다. 마스터바는 역사적으로는 서민들을 위한 무덤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화려해지기 시작했다. 벽돌과 돌로 만들어졌으며 왕의 마스타바는 많은 석실들에 아름답게 조각되고 화려하게 꾸며졌다. 어떤 마스터바에서는 시신이 샤프트(shaft)를 통해 매장석실로 내려졌는데 석묘라고 불리는 기저부에 석관이 놓이게 되었다
한 가족에 하나의 마스터바가 만들어졌는데 때로는 여러 가족들이 수세대동안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석공들은 마스터바의 각각의 부위들을 영구히 견딜 수 있도록 견고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해가 갈수록 왕들은 더 많은 것들을 무덤이나 마스터바에 함께 부장하게 했고 묘들은 점점 더 크고 웅장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져 하나의 피라미드의 구조를 갖게 되기 시작했다 . 수많은 그룹의 노동자들이 피라미드의 네 귀퉁이 흑 성벽을 쌓아 그 위로 거대한 돌덩이들을 끌어올려야 했고 피라미드가 점점 쌓아져 올라가면서 또 다른 흑 성벽을 쌓아야 했다. 하나의 거대한 피라미드를 축조하는 데는 이백만개의 돌 블럭이 소요되었다 . 피라미드는 왕의 시신이 있는 석실을 보호하도록 축조되었다. 피라미드 근처에는 사찰과 창고 그리고 왕의 가족과 하인들이 묻힐 마스타바가 만들어졌다. 후기의 왕들은 테베의 왕들의 계곡이라 알려진 사막에 있는 비밀지하묘지에 매장 되어 있는 이곳은 수많은 터널과 통로 석실들이 있었으며 이와 더불어 묘 그 자체도 암석 속 깊은 곳을 파서 맞들어 무덤을 약탈할 수 없도록 만들어졌고 동시에 매우 웅장하게 조각되었고 채색되었다
제3장 고대 그리스
인류에 대한 고대 그리스인의 가장 위대한 공헌은 바로 지혜에 대한 사랑, 즉 철학이었다.
그리스의 장례와 매장관습에 대한 기록은 대다수가 BC 5세기 소위 그리스의 황금시대라 불리던 시기에 쓰여 진 서적들에서 발견된다.
그리스인들은 죽은 자에게 최대한의 사회적, 철학적 경외감을 표현했다. 이러한 그리스 문화는 토장을 하게 했고 고인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경외감이 어떠했는지는 유명한 두 문학작품에서도 여실히 보여준다.
소포클레스의 연극 안티곤에서 보면, 안티곤은 크레온에게 그녀의 오빠인 폴리니스의 장례를 성대히 치루어 줄 요구하다 거절당하자 그녀는 자살을 하고 만다.
또한 호머의 일리야드에서 보면 트로잔의 영웅 헥토르가 아칠레스에게 자신의 아들의 장례식에 부왕인 프리얌이 내린 황금을 받아 줄 것을 간청하고 있는데 이는 그리스인들에게 있어 장례는 고인에 대한 경외라는 그들의 철학을 반영하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던 것이다
제4장 고대 로마
오늘날 우리의 장례나 매장 전통에 많은 것이 고대 로마에서 연유한다.
예를 들면 오늘날 사용하는 장례(funeral)란 말도 로마의 토치 횃불 행렬을 의미하는 퓨너럴리스(funeralis)에서 유래했다
고대로마에서 최초로 장례사(장의사)란 직업이 공식적으로 등장했는데 이들을 리비티얀리우스라 불렀다
고대로마에서는 시내에 매장하는 것은 보건위생상의 문제로 금지되었으며 현재처럼 시외에 매장하는 전통을 만들어 냈으며 로마인들은 시신의 방치가 질병의 원인이 된다는 알았다
로마인들은 매장시 땅을 성화하였으며(신성하게 했으며) 매장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세정의식(청결의식)을 거쳐야 했다. (고인의) 유품 등 잔해물을 묻음으로써 장례서비스는 종결되고 추도자들은 가슴을 치거나 머리카락을 쥐어뜯거나 피가 날 때까지 얼굴을 긁어대는 등의 행위를 통하여 고인을 애도했으며 또한 추도객들은 관을 세 번 돌면서 고인의 이름을 외쳐 불렀다. 콘클라먀쇼 모티스로 알려진 이러한 매장의식은 죽음의 슬픔과 동시에 죽음의 종결을 의미했다
로마시대였던 BC 452년, 페르시아 여왕 아르테메시아는 그녀의 남편이었던 모솔레스왕의 무덤을 완성했는데 이는 세계에서 가장 웅장한 무덤중의 하나이다. 이 무덤을 만드는데 3천만 불이 소요되었고 1만 명 이상의 노예들이 동원되었다. 오늘날의 모설리엄이란 묘의 유래가 된 이 묘는 111피트의 원주(원형기둥)에 총 높이가 140피트에 달한다.
제5장 헤브루의 매장
고대 헤브루인들의 매장은 매우 전통적이었다. 시신은 물에 씻긴 후 영유(기름)을 바른 다음 수의(린넨)가 입혀졌다
대다수 묘들은 시외에 있었다. 헤브루인들은 화장을 거의 하지 않았는데 이는 고인에 대한 이교도적인 천박한 의식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또한 매장을 하지 않거나 묘를 해하는 것은 하나의 불명예였다. 헤브루인들은 화장은 독일이나 스칸디나비아 등 이교도 지역에서 널리 행해지는 장례법으로 알았기 때문에 화장을 금지했다. 또한 화장은 그들의 전통적 신념인 영혼과 육체의 결합을 파괴하는 것이라 여겼다
헤부르인들은 임종한 날의 저녁에 매장을 했다. 시신은 수의를 입혔으며 상여(BIER)로 매장장소로 옮겨졌다. 제일 중요한 것은 그들은 매장을 하나의 성스러운 의무로 여겼으며 묘를 훼손하는 것은 엄청난 범죄행위였다.
헤브루인들은 가족들이 함께 묻히면 저세상에 가서도 함께 산다고 믿었다. 초기 헤브루 묘지는 가족농장에 있었는데 이것이 가족묘의 기원이다. 가족묘에는 가족구성원만 묻혔다.
헤부르인들은 재난으로 죽은 사람들은 다른 곳에 묻었는데 이는 신의 벌(심판)에 의해 죽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헤부루인들은 자연상태대로의 단순한 묘지를 선호했다. 묘지가 있는 곳들은 신성한 곳으로 여겨졌고 묘지는 숭배와 결혼서약이 이루어지는 곳이었으며 죄인들과 떠돌이(홀리스)들의 성역이었다.
묘는 장남이 바친 선물들로 장식되었기에 남자가 없다는 것은 그 시대에 대단한 근심거리였다. 헤브루의 무덤들은 통상 땅속으로 푹 꺼져있거나 큰돌로 덮혀 있다. 무덤 주위에는 추모객들을 위한 벤치가 놓여졌다. 무덤을 동굴 안에 만들 땐 하나의 안치실이 사용되었다.
안치실은 1과 1/2 피트(약 50CM)의 정 방향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예수님의 매장방식이었기도 하다. 우리는 현재까지 지켜지고 있는 여러 장례전통들이 헤부르 시대에 그 기원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6장 초기 크리스챤 매장사
예수는 모든 영혼의 평등함을 가르쳤다. 따라서 기독교 매장법은 여타의 타른 문화권이나 종교에서 나타나고 있는 매장방식과 여러모로 다르다
초기의 기독교식 매장은 서로 함께 하는 자비의 행위였으며 고인을 위한 기도는 자비의 정신적 행위로 간주되었다. 고대교회에 있어 초기 매장의식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조객들이 고인이 된 기독교신도의 가슴부위에 다음과 같은 성약이 담긴 내용의 종이를 넣어주었던 것이다. 그 성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즉 고인은 죽기 전에 세례를 받았으며 신앙심이 깊었고 교인으로서 교회에 열심히 다녔다는 내용이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고인을 매우 진지하고 성스럽게 다루었는데 포쏘르들에 의해 만들어진 캐터콤(지하묘지)에서 이러한 그들의 의식이 잘 나타나고 있다
묘공(묘지를 만드는 사람들)의 조상 포쏘르 이야기
로마의 중심부로부터 3마일쯤 떨어진 곳에 어두운 통로와 휴식터 그리고 작은 방들로 구성되어 이어진 지하구역이 있는데 예나 지금이나 칼릭투스,도미틸라, 등의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 초기 기독교도들의 순교자들이 묻혀있다
이 성스런 묘지들에는 특별한 방들이 있는데 여기에는 초기 기독교인 시신들의 성스런 유물들이 안전하게 수장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초기 기독교인들의 캐터콤-지하묘지이다
수세기동안 캐터콤(지하묘지)는 전 세계 역사학자, 고고학자, 그리고 교회지도자들에게 대단한 관심거리였고 16세기 이래 각 시대의 유명학자들이 이곳 순교자들의 무덤을 연구하고 그에 대해 저술하였다. 이러한 연구와 저술에서 케터콤을 만들고 감독하고 관리하고 했던 사람들에 대한 정보가 나타나는데 이들이 바로 묘공의 조상 포쏘르이다.
포쏘르(라틴어의 Fodere;땅을 판다는 뜻)는 초기 기독교시대(AD300년-450년까지)의 캐터콤에서 묘지를 만들거나 무덤을 파는 사람들이었다. 포쏘르들은 독특한 길드(중세의 조합)를 조직했고 주교나 목사들로부터 장례와 묘에 대한 특별한 임무를 부여 받았다. 초기 교회시대에 기독교인들만이 묻힐 수 있는 묘지가 필요했다. 기독교인들의 묘지를 만들게 됨으로써 포쏘르들은 매우 위험한 상황에 빠지게 되는데 이는 역사적으로 캐사르(로마의 황제)가 산사람이든 죽은 사람이든 기독교인이면 누구나 박해를 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쏘르들은 때때로 그들의 목숨을 걸고 로마에 있는 사형장으로 숨어들어가 고문과 사형집행으로 숨져 부패되고 있거나 사자 밥으로 던져진 기독교 순교자들의 시신을 꺼내오기도 했는데 이러다 발각되면 그들은 로마인들에 의해 사형의 벌을 피할 수가 없었다.
포쏘르의 임무(일)는 이교도의 배스필론(장의사)과 같은데 베스필론이 그들 사회에서 매우 낮은 계급이었음에 반해 기독교의 포쏘르는 목사 다음가는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이에 관해서는 성 옵파투스의 “게스타 어푸드 제노필룸”이란 작품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작품에서 성 옵타투스는 교회에 참석한 성직자들을 높은 위치부터 열거하는데 주교와 그다음의 주교보다 낮은 성직자를 열거한 다음 포쏘르인 자누아리우스, 헤르츄스, 그리고 푸루스토소스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다. 또한 성 제롬은 포쏘르를 성직자로 언급하고 있으며 카디널 마이에 의해 편찬된 6세기 년 표에는 성직자의 역할과 위계를 나열하면서 포쏘르를 두 번째로 열기하고 있다.
아마도 초기 기독교인의 매장은 기독교 자선단체들이 담당했던 듯한데 이들은 대가나 보상 없이 이일을 했다. 그러다가 교회가 팽창하고 인구가 증가하자 매장에 관한 일이 포쏘르에게 맡겨졌다. 이 시대에 매장은 교회의 공금으로 행해졌고 주교나 목사가 주관했다
처음에는 포쏘르들은 지속적인 월급을 받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점차 개인들(묘주)로부터 임금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교회의 조직의 일부로서 교회로부터 통상적인 재화를 받았다. 기독교가 기성종단으로 커짐에 따라 포쏘르들은 캐터콤에서 일종의 재산관리자로의 역할을 부여받았고 공식적으로 조상이나 자신들의 무덤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묘지를 팔게 되었다. 묘지매매의 예는 무수히 많은데 그 증거가 캐터콤의 묘비에 나타나 있다. 이러한 묘지매매는 적어도 4세기 후반 이전에는 없었으며 5세기 전반기 25년보다 앞서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을 입증하는 초기 기독교 저술들은 많이 있는데 예를 들면 성 시리아쿠스 캐토콤에서 두 여자가 포쏘르인 퀸타스로부터 한 순교자 무덤 옆의 합장묘를 샀다는 기록이 있다
포쏘르들은 성직자 다음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들은 예술적 재능도 뛰어났다. 석묘들의 내부에 있는 대단히 복잡한 그림들을 보면 포쏘르들의 작업이 얼마나 정교했는가를 알 수 있다. 캐터콤의 포쏘르들의 작품들 중에서 잘 알려진 것이 포쏘르 디오제네스의 것이다. 이 그림은 벽에서 떼려다 심각한 손상을 입기도 했지만 디오제네스 오른 어깨위로 곡괭이를 들고 왼쪽 어깨 위로는 쌕(납작한 자루모양의 가방)을 걸치고 왼손엔 불을 밝혀주는 도구를 들고 위의 각인된 글자는 다음과 같다; 포쏘르 디오제네스, 10월초하루 8일전에 평화롭게 잠들다(매장되었다).
마르셀리누스와 페터 캐터콤에는 두 개의 벽화가 있다. 하나는 젊은이로 말끔히 면도한 단발이며 허리띠를 차고 맨발로 한쪽엔 램프를 매달고 돌을 곡괭이로 돌을 쪼아내고 있는 그림이며 또 하나는 노인으로 일은 하지 않고 끝이 뾰족한 핸들에 램프를 매달고 있는 그림이다. 포쏘르의 램프는 초기 기독교인들을 캐터콤으로 안내하여 장례식에 참석하게하거나 또는 로마인들의 박해를 피해 숨겨주는데 이용되었다. 최근에는 포쏘르의 곡괭이가 칼�투스 캐터콤에서 발견되었는데 녹이 많이 쓸었지만 알아 볼 수는 있을 정도이다
가장 오래된 벽화는 두 명의 포쏘르를 그리고 있는데 이는 2세기 후반부에 그려진 것이다. 그것은 성 칼�투스 캐터콤의 쌔크라멘트 사원에 있는데 성체감사의식을 담은 이 그림에서 두 사람은 각기 다른 그들의 임무를 나타내고 있다 즉 순교자의 죽음을 기념하는 캐터콤 의식에 초대되지 않은 사람을 제지하는 것이다
포쏘르의 역할과 캐터콤의 번성이 끝나는 데는 불과 60여년 정도 밖에 안 되는 짧은 기간이었다. AD 350년경 캐터콤에서의 매장은 거의 없게 되었고 AD 410년경에는 로마의 약탈에 의해 매장은 중지되었다. 캐터콤의 운명이 다함에 따라 포쏘르의 운명도 끝나게 되었다.6세기에 캐터콤은 고쓰족의 침략에 의해 황폐화되었고 롬바르드족의 침략에 의해 거의 다 파괴되었다. 포쏘르에 대한 기록과 그들의 작업에 대한 기록도 롬바르드의 침략에 의해 동시대에 소멸되었다. 포쏘르에 대한 마지막 기록은 AD426년에 있었다. 롬바르드에 의해 케터콤이 파괴됨에 따라 교황 폴1세와 파살 1세는 결국 캐터콤을 포기하고 성스런 유물들을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되었다. 캐터콤의 출입문은 폐쇄되고 캐터콤과 그에 대한 기록들은 잊혀진 상태로 존재하다 1578년에 우연히 다시 발견되기에 이르렀다.
초기 기독교교회는 매장에 적합한 땅을 선정하여 성화(聖化)의식을 통하여 그 땅을 신성한 곳으로 만들었다. 초기 기독교 묘지는 캐터콤을 포함하여 시외에 가족관(가족묘)으로 구성되었으며 로마의 보건법에 따라 시신의 방치는 공동체의 위생에 해가된다고 생각하였다.
AD 258년 초기 교회는 로마의 매장법을 무시하고 피터와 폴 황제의 시신을 현재의 바티칸 씨티에 새로이 캐터콤을 조성하여 그곳에 모셨다.4세기가 끝남에 따라 기독교에 대한 박해도 끝나게 되고 지상묘(Open air cemetery)가 등장하게 되었다. 또한 4세기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몰리게 되었고 시신을 교회에 매장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4세기부터 19세기까지 기독교인들은 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르고 교회에 묻히는 것이 일반화되었던 것이다. 오랜 기간 동안 교회에서의 의례적인 장례식과 교회의 묘지화는 화장의 문제를 좀더 중요하게 부각시키게 되었다
제7장 : 교회와 화장-화장의 역사(BC 1000년 이전 시대)
불에 의한 시신의 분해 즉 화장은 서구에 있어서 BC 1000년경 그리스에서 유행했다. 후에 로마인들도 화장을 도입하게 되었는데 우리가 사용하는 화장(Cremation)이란 용어도 라틴어로 ‘태워버린다“는 뜻의 크레마레에서 유래했다. 하지만 화장법이 그리스에서 연유한 것은 아니다. 인류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화장은 북유럽에 거주했던 원시부족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들과 달리 그리스인들은 화장에 종교적 의미를 부가하지 않았고 오히려 보다 실질적인 필요에 따라 화장을 하게 되었다. 전시에 이방의 땅에서 전사한 영웅들을 수주 또는 수개월 지난 후에나 고국으로 옮겨 가족과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장례식을 치를 수 있게 한 것이 바로 화장이었다. 시신들은 전장에서 화장되었고 통신병에 의해 또는 유골함에 넣어져 나중에 옮겨졌던 것이다. 시신을 보전할 수단이 없었기에 화장이야말로 시신을 보존하고 옮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빈번하게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된 고대 고전적 전쟁에서 화장은 보편화되었고 매장보다 선호되게 되었다. 그리스나 로마의 시민들에게는 땅에 매장하는 것이 보편적이긴 했으나 화장은 점차 그들에게 멋진 임종에 어울리는 장법으로 여겨지고 화장이 곧 용맹, 미덕, 애국, 군인의 영광 등을 의미하기에 이르렀다.
영웅은 위대할수록 화장을 위한 불더미는 그에 따라 더 커졌다. 일리야드의 기록에 의하면 하늘의 신 제우스는 아켈레스에게 트로이 왕 프리얌이 왕의 방식대로 화장할 수 있도록 헥토르의 시신을 넘겨받을 것을 지시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에 앞서 아킬레스는 그의 친구인 파트로클루스가 전사하자 100평방피트가 넘는 장작더미를 쌓아 그를 화장하였으며 트로이 전쟁의 리더였던 그도 아킬레스건에 화살을 맞아 죽게 되자 친구의 화장보다 더 큰 화장을 하도록 하였다.
로마인들은 마침내 화장을 비즈니스화 했다. 애니드의 버질(로마의 시인)은
무미건조하고 아무런 의식 없이 단지 편의성만 좇아하는 화장을 비판했다. 하지만 그도 마른 잎과 사이프리스 나뭇가지가 타는 불꽃들이 장작더미를 돌며 고인을 애도하는 조객들의 외침과 어우러지는 모습에는 경탄해했다.
로마인들의 화장은 그들의 신분을 나타내주는 상징이기도 했다. 빈천한 사람들은 초라한 화장을 했고 부자들은 탑처럼 쌓인 장작더미에서 마지막을 이별했던 것이다.
비즈니스(이익)란 개념은 유족들에게 유골함을 팔고 또한 지하 납골당(니쉬)의 공간(안치실)을 파는 것으로 가시화되었다
그러나 AD100년경 화장은 중지되었다. 화장의 중단은 역사적으로 볼 때 갑작스러운 것이었으나 은연중 이해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살펴보면 기독교의 확장이 주요한 원인이었다. 후기 교회는 화장을 금지했지만 초기 교회는 배타적으로 화장을 금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교회는 화장에 대해 두 가지 이유를 들어 곱지 않게 인식했다. 하나는 이교도들이나 하는 게 화장임으로 기독교인들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고 예수님이 화장을 하지 않으셨다는 것이 그 두 번째 이유였다. 역사가들은 화장의 소멸에 대해 보다 실질적인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AD100년경 로마에는 화장으로 인해 땔감이 매우 부족했다는 것이다. 또한 목재는 배나 요새의 건축에 있어 주요한 자재였기 때문에 목재사용의 우선순위가 매겨졌고 로마 시민들은 그 법령을 따라야했고 결국 화장은 없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화장을 다음의 네 가지 이유로 좋지 않은 것이라 여겼다. 하나는 이교도들이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고 기독교를 조롱하는 방편으로 화장을 이용했다는 것이며 둘째는 성경에 이르기를 몸은 성령의 사원으로 매장과 달리 화장은 그러한 몸을 완전히 파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셋째로 화장은 초기 기독교시대에서조차 죽음을 희화화하는 실질적인 문제점들을 야기 시켰던 것이다. 넷째로 세계 최초로 기독교를 공인했던 그 유명한 콘스탄틴 대제가 화장을 금지시켰다
마침내 교황 레오 8세가 화장금지법(화장은 금지하고 매장을 해야 한다)인 캐논법 1203조를 제정하여 시행하게 됨에 따라 화장은 완전히 소멸하게 되었다
또한 1886년 5월 바티칸은 법령을 통해 육체의 부활을 부정하는 화장이 확산되는 것을 용인하는 집단과의 교류를 금지시켰다.
1963년 교황 폴5세는 화장금지법인 캐논법 1203조를 폐기시켰고 그 이후 50년간 화장율은 지속적으로 높아지고 있다
제8장; 중세시대
현재 우리의 매장에 관한 관습들 대부분이 이 시대에서 유래한다.
중세시대에 사람이 죽으면 시신은 상여나 허스(herse)로 옮겨졌다. 허스(운구차)라는 용어는 매우 재미있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원래 허스는 시신을 운반하는 기구가 아니라 사실은 농업용 갈쿠리였다. 농기구에서 오늘날의 시신운반용 영구차로 변화한 것은 곧바로 진행된 것은 아니다. 변화된 과정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로마의 농부들은 하이펙스(라틴어로 갈쿠리를 의미한단)라는 한쪽에 뾰족한 부분이 붙어있는 나무나 철로 만들어진 삼각형의 꼴을 한 농기구로 쟁기질을 하였는데 BC51년 로마가 가울을 점령했을 때 그들은 하이펙스를 서유럽에 도입했고 마침내는 영국에 해로(Harrow;말이나 트랙터로 끌면서 제초, 밭갈이를 하는 써레 비슷한 농기구)라는 이름으로 도입되기에 이르렀다. 해로라는 이름은 11세기 노르만족이 영국을 침략하면서 Harrow를 허쓰라고 발음함에 따라 허쓰(Herse)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들이 볼 때 허쓰는 뒤집어서 위를 아래로 하면 그들이 장례식에 전통적으로 써 왔던 나뭇가지 모양의 큰 촛대(캔들러브라)와 너무나도 흡사했다. 캔들러브라는 노르만 장례식에서는 제단위에 놓는 꼭 필요한 제구였다.
때맞춰 성직자들의 수가 늘어났고 그들을 위한 기념일도 늘어나게 되었으며 따라서 그들을 기념하기 위해 꽂아야 할 초의 수도 빠르게 늘어났고 결국 허쓰가 캔들러브라를 대처하게 되었던 것이다. 2세기까지 유명인의 장례식엔 더 큰 허쓰가 장례식 동안 상여 위에 놓여졌다. 수 백 년이 지난 15세기엔 허쓰의 크기는 더욱 더 커졌다. 거의 6피트 길이에 수십여 개의 촛불이 켜진 채로 장례식 행렬 내내 관 위의 눈에 띄는 곳에 놓여져 대단한 장광을 연출했다. 16세기 영국에서는 바퀴 달린 상여(카트)가 관과 허쓰를 운반했고 마침내 오늘날의 영구차호 변화하게 된 것이다
원래 허쓰는 사람들에 의해 운반되었다(우리나라의 상여처럼)
장례식 행렬이 예나 지금이나 천천히 움직이는 것은 고인에 대한 애도의 뜻에서 그러기보다는 16세기 장례행렬에서 허쓰의 촛불은 의례상 중요한 요소였는데 행렬이 빨리 가면 촛불이 꺼질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통은 현재의 영구차에서도 나타나 장례식의 영구차는 천천히 움직이는 것이다. 앞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장례라는 용어(funeral)가 촛불의 행렬이란 의미의 라틴어 Funeralis에서 유래한 것이 우연의 일치라 하겠다.
중세에는 신앙심의 상징으로 시신 위에 성서를 놓았고 희망의 상징으로 십자가를 놓았으며 검정색의 실크 또는 린넨 관보로 시신을 덮었는데 관보에는 교회의 상징이 수놓아져 있었다.
오늘날까지 검정이나 어두운 색이 고인에 대한 존경과 애도를 표현하는 색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검은색의 사용은 원래 역사적으로 볼 때 죽은 자에 대한 두려움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세시대 사람들은 경계를 늦추지 않을 경우 죽은 자의 영혼이 산 사람한테 들어온다고 믿었다. 인류학자들에 의하면 그래서 백인들은 장례식에 그들의 얼굴을 검정색으로 칠하고 참석했는데 이는 죽은 사람의 영혼으로부터 스스로를 변장하여 숨기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반대로 흑인들은 그들의 몸을 흰 분말가루로 칠하였는데 이 역시 최근에 죽은 영혼들이 자신들을 알아볼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중세까지만 해도 시내에 매장하는 것이 표준이었다. 시신들은 사실상 교회 내부에 매장되었는데 이것(장소)이 바로 납골당이다.
납골당은 최초로 6세기에 나타났는데, 당시 교회는 교인들도 많이 증가했고 또한 그들이 묘지로 교회나 교지의 뜰을 선호했기 때문에 심각한 묘지 난과 위생문제를 야기 시키고 있었다. 교회는 말 그대로 성역이었고 시신들이 교회빌딩의 안팎으로 널려있게 되었다.
교회내에 있는 매장실(Vault)에는 금가고 부패한 목관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고 여름엔 악취와 파리들로 들 끌었다. 그래서 대개의 교회 납골당들은 교인들에게 직접적인 질병의 원인이 되었다. 교회 밖의 교회 뜰은 보다 심각했다. 시신들은 이제 더 이상 6피트 이상의 깊이로 묻히지 못했다. 관들이 채곡 채곡 싸여져 올라와 맨 위의 관은 지표로부터 거의 1인치도 안되게 되었다. 대다수 교회 뜰은 관들이 지표까지 올라오게 되고 그래서 점차 지표면이 높아지게 되었고 마침내 교회의 낮은 쪽 유리창의 문턱까지 차게 되었다.
정부의 보건복지담당부서는 고대 로마처럼 시외에만 매장할 수 있도록 하는 법을 시도했지만 교회는 여전히 치외 법권의 영역이었다.
중세, 르네상스 그리고 18세기까지 교회내의 납골당과 교회 뜰은 시신들로 붐볐고 이는 마치 악몽 같은 것이었다. 마침내 교회 무덤지기는 밤중에 은밀하게 해골이나 채 부패되지도 않은 시신들을 파서 아무도 모르는 곳의 구덩이에 버리기까지 했다. 교회와 교회 뜰은 한결같이 음습했고 비위생적이었으며 19세기 초까지도 그래서 사람들은 시신을 마치 전염병 대하듯 했던 것이다.
그러한 납골당들은 대개 유럽에 있었지만 미국의 경우도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1820년 스코틀랜드의 여행 작가 바실홀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조객들의 무릎 깊이까지 빠지는 질벅질벅한 교회뜰(묘지)은 (시신)뼈와 관 등의 잔해로 뒤범벅이 되어있었다” 볼만한 광경은 아니다
이에 대한 개선은 19세기에 이르러 ‘공원, 전원 묘지’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묘지는 교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개인이나 공공기관에 의해 만들어 졌다. 이들 묘지는 공공기관이나 개인 또는 비영리법인-예를 들면 캠브리지의 마운트 어번, 신시네티의 스프링그로브, 볼티모어의 그린 마운트-에 의해 운영되었다
중세시대에 석묘가 시작되었는데 실상은 석관이었고 석관의 뚜껑은 통로나 교회의 마루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관 뚜껑에는 상징이 조각되다가 나중에 무덤을 표식하기 위해 고인의 초상화가 새겨졌다. 나중에는 석관의 뚜껑이 지표면 위로 올라와 무덤을 표식하게 했고 교회의 묘지위엔 차양과 꽃 장식줄이 쳐지게 되었다. 런던에 있는 웨스트민스터사원이 이러한 모양의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묘지업자인 묘공(Cemetery sexton; 묘지에서 무덤을 파는 사람이란 뜻)이 출현한 시기도 중세시대이다. 중세시대 섹스톤(묘공)은 그 직업에 있어서 세 가지 주요한 임무가 있었는데 하나는 묘지를 포함한 교회재산을 관리하는 것이고 둘째는 교회의식에서 종을 울리는 것, 셋째는 무덤을 만드는 것이었다.
중세시대에 나타났던 가장 특이한 것 중의 하나가 골장이라 불리는 것이었다(Born burial). 이것은 교회의 성유(聖遺;성스런 유물)로 보전되어 온 성자나 순교자의 유골을 매장하는 것이었는데 교회 안이나 사당(성골함)에 매장했다. 기사작위를 받은 사람들도 종종 이곳에 묻히지 못하고 차선의 장소에 묻혔으며 부자들은 개인묘를 만들기도 하였다.
어떤 경우에는 유명인의 유골은 개장되어 특별한 사당에 혼자 모셔지기도 했는데 19세기 중반 아프리카에서 숨진 데이비드 리빙스턴 박사는 그의 혼은 아프리카에 묻혔으나 그의 육신은 영국 런던의 웨스트민스터사원에 모셔져 있다.
제9장; 르네상스 그리고 초기 미국의 장법
중세후기로부터 르네상스운동을 거치면서 미국 식민지는 변혁을 겪었지만 매장전통은 지속되었다. 뉴잉글런드(역자 주;본래 미국 북동부의 6개주를 말함)인들은 공동체의 구성원이 죽으면 장엄한 장례와 의식을 치뤘다. 묘지는 조객들로 붐볐고 문학적인 묘비명이 적힌 묘석들로 꾸며졌다
하나의 예를 들면 “ 내가 개척한 땅이 나의 묘지이다. 친구들이여, 그대들은 어떻게 할 건지를 잘 생각해 보라”
매장은 교회 뜰에서 행해졌고 유족과 조객사이에는 위문반지, 장갑, 책, 음식 등의 선물을 교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엘류 렛치포드는 1645년 뉴잉글런드의 한 장엄한 장례식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매장식에는 아무런 낭독도, 아무런 설교도 없었다. 그러나 모든 이웃들이 참석했고 벨을 울리며 고인을 묘지로 엄숙하게 운반했으며 매장되는 동안 시신 곁을 지켰다. 목사들은 대부분 참석했다”
당시에 영국에서 유행이었던 것처럼 허쓰엔 고인을 찬양하는 글귀나 문장을 붙혔다. 이때의 허쓰는 장식된 상여나 촛불과 관이 놓여있는 관가(棺架)를 말했는데 현재는 운구차를 말한다. 이러한 찬양 글귀는 종종 장례식후 출판되기도 했는데 토마스 셰퍼드의 장례식에 대해 노재판관 씨월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만장이 있기는 했으나 허쓰에 고장되어 있지는 않았다”
당시에 추도문이나 추도 팜플렛의 출판은 청교도 신문의 주요한 임무였다. 신문엔 종종 해골이나 십자뼈, 관이나 사팔뜨기, 활처럼 휜 해골 등으로 으스스하게 꾸며지곤 했다
청교도가 죽으면 친구들은 애도했고 장례에 참석해서 일을 했으며 때로는 슬픔과 존경의 표시로서 만가나 묘비명을 지어 바치기도 했다. 사실 대다수 청교도들은 문학적이지 못 했고 그래서 고인의 공적에 대한 작문은 간단할수록 인상적이었다.
장례 설교 또한 칙칙한 검정으로 프린트되었는데 표지에는 두개골과 십자뼈가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장례 설교는 실제로 장례식이 거행될 때 행해지지 못했다. 통상 목사가 한 장례 설교를 준비하는데 수주일이 걸렸고 그를 프린트하는데 또 수주일이 걸렸다(실제론 그 설교문을 읽을 수 있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점차 장례행렬이 출발하기 전 집에서 적절한 기도를 하는 관습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청교도 문화에 있어서 최초의 예는 1683년 매사추세츠 록스베리의 파스토 엘람 아담의 장례식이다. 1697년 매사추셋츠 덕스베리에 묻힌 조나단 알덴의 경우처럼 종종 무덤 앞에서 간단한 설교가 행해지기도 했다
노재판관 씨월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시신을 파묻는 것을 잠시 멈추게 하고는 아주 간단하지만 아주 적절한 말로 자신의 슬픔을 토로했다
“애정과 눈물로”
시신을 운반하는 데는 두 종류의 상여꾼이 있었는데 한 부류는 주로 젊은이들로 상여 위의 관을 운반했고 또 한 부류는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로 관 위에 관보를 편 다음 상여꾼의 머리 위로 관보를 운반하는 사람들이었다.
상이 나면 유족의 집에는 여러 삶이 모여 도와주었다. 여자들은 부엌일을 도왔고 남자들은 음식을 나르고 농장 일이 어긋나지 않도록 했다. 장례식 전날에는 모두 모여 질펀하게 먹고 마셨다. 이때에 시신은 관례적으로 장례 파티가 있는 곳에서 떨어져 있는 고인의 방에 다시 모셨다.
후기 식민지 시대의 장례식과 매장에는 많은 음식과 술이 소요되었으며 1724년 한 보스턴 장례식에는 무려 844달러가 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장례식은 청교도들에게는 유일하게 실컷 먹고 마실 수 있는 날 이었다
상당히 많은 럼주가 장례식에 소요되었는데 그렇게 마시고 장례식에서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지! 장례식이 끝난 후엔 다시 유족의 집에 모여 술을 마셨다. 장례비용(주로 술값) 때문에 유족들은 수년간 고생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장례식에서 많은 량의 술 소비는 비단 뉴잉글런드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플로리다에서 마인에 이르는 해안가 지역의 경우도 장례식에서 엄청난 량의 술을 마셨다. 뉴잉글런드에서는 장례 지출비용이 과다했다. 미국의 개척시대에 장례식은 매우 단촐 하고 비용이 들지 않았다는 말은 한마디로 넌센스이다. 1678년 익사한 코네티컷 하트포드의 데이빗 포터 장례식 지출비용을 보면 얼마나 많은 량의 음료수가 소요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음료수, 술의 지출내용별로 적시함- 번역 생략)
심지어 마을의 생활보호자들(빈민들)에게도 2-3갤론의 럼주와 1배럴의 사이다가 주어졌다.
이렇게 형성된 관습을 폐지하는 데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고 마침내 장례식에서의 음주습관은 사라졌다. 뉴잉글런드의 노인들은 과거의 장례식에서의 폐습을 떠올리며 씁쓸하게 한마디 했다 “ 장례식에선 이젠 술을 안 마신답니다.” `
도시가 발달하고 부가 축적되자 상류층의 장례식은 보다 화려하고 웅장해졌다. 새로이 조성된 묘지에서는-심지어 여자 묘까지도 - 조총이 발사되었다. 매사추셋츠만의 식민지를 건설하고 윈트롭의 장례식에서는 1.5배럴의 화약이 소모되었을 정도이다
장례식의 관습은 지방마다 달랐는데 하트포드와 그 주변지역에서는 장례기간 동안 모든 장식품과 거울, 그림들은 옷가지나 냅킨으로 싸서 보관했고 필라델피아에서는 수년간 집 정문의 창문을 내려 걸고 검은 천으로 묶어 놨다.
묘지로의 장례행렬은 매우 격식 있게 진행되었다. 행렬에 있는 조객들은 경의를 표했고 어쩌면 온갖 욕을 했을지도 모른다. 통상 지위가 높은 사람이 미망인과 같이 행렬에 참가했다. 씨월은 종종 그의 일기에서 “조의를 입은 미망인을 안내 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식민지 시대에는 관이나 운구차에 많은 비용이 들지 않았고 오히려 술이나 장갑 위문반지에 많은 돈이 들었다. 1636년 통치자였던 벨처의 부인 장례식에는 무려 10개의 장갑이 사용되었다. 한 장례식에서도 참석자의 사회적 지위나 고인과의 친분 정도에 따라 다양한 종류의 장갑이 지급되었다. 1633년 초기 플리머쓰 식민지의 사무엘 풀러는 그의 여동생이 12실링이나 나가는 장갑을 갖게 한 반면 평민인 레베카 프라임은 2실링 6펜스의 장갑에 만족해야 했다. 관을 운반하는 상여꾼들은 관보를 운반하는 상여꾼들에 비해 더 싼 장갑을 지급 받았다. 물론 목사들에게도 장갑이 지급되었는데 보스턴 북교회의 주임목사인 안드류 엘리엇은 그가 받은 장갑과 반지에 대한 기록을 남겼는데 32년간 그가 받은 장갑이 무려 2,940켤레였다. 그는 11명의 자녀가 있었지만 그 장갑들을 한번도 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보스톤에 있는 모자가게에 장갑을 팔아 넘기는 거래를 지속했다. 뉴잉글런 청교도 장례식에서는 반지가 주어졌는데 씨월의 기록에 의하면 그가 1687년부터 1725년까지 받은 반지가 57개나 됐다고 한다. 1758년에 죽은 사무엘 벅스톰은 항아리의 1/4에 이르는 조문반지를 남겼고 안드류 엘리엇은 반지로 가득 찬 머그잔을 남겼다. 1738년 보스톤의 어떤 장례식에서는 200개의 반지가 소모되었고 윈드롭의 장례식에서는 반지비용이 무려 그의 전 재산의 1/6에 이르는 6백 파운드나 됐다.
조문반지는 금으로 검정이나 흑백으로 에나멜 되었고(enamelled), 해골이나 관 등으로 장식되기도 하였다. 때때로 고인의 머리카락이 박히거나 입에 꼬리를 문 뱀의 모양을 한 반지도 있었다. 금세공업자들은 이러한 반지를 만들어 유족들에게 판매하여 큰돈을 벌었다.
당시 뉴잉글런드 사람들은 조문반지를 얻기 위해 노력했음이 여러 일기나 저술에서 볼 수 있다. 그래서 씨월은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는 것은 “반지를 잃는 것”이라고 썼다. 매사추셋츠 살렘의 에�스 박물관에 가면 여러 조문반지를 볼 수 있다
해가 감에 따라 반지나 장갑에 드는 비용에 대한 강한 반감이 대두되었고 장례식에서의 음주에 대해서 그랬듯이 1741년 매사추셋츠 지방법은 장례식에서 상여꾼이나 목사에게 주는 장갑을 제외하고는 추가로 장갑이나 스카프,조문반지,술을 제공하는 것을 금지시켰고 이를 위반할 경우 50파운드의 벌금을 물게 했다. 이러한 역사적 실례를 통해볼 때 장례비용을 통제하는 것은 새로운 것도 아니고 또한 독창적인 것도 아니다.
잉글런드의 구시대에 대항해 새롭게 태어나 빠르게 확산된 애국주의적 반항은 장례개혁에도 가속도를 붙게 했다. 보스톤은 1767년 10월 그곳에서 만들어지지 않은 조문용 장갑의 사용을 금지하는 법안을 만들었고 다른 주에서도 비슷한 법안을 만들었다. 심지어 미국 산 조문장갑에는 애국 표장을 붙이자는 제안도 있었다. 1788년에는 구매자가 아닌 장례용품 판매자에게는 20실링의 과료를 부과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법률은 장례식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엄격하게 강제되지는 않았다. 사망률은 높았다. 사실 사망률이 얼마나 높았던지 1790년 보스턴 사람들은 장례행렬이 교통을 방해한다고 불평했을 정도이다. 그래서 그들은 거리에서의 자유왕래가 가능하도록 도와주는 장례행렬에서의 교통도우미제도를 제안했으며 청교도들이 일요일에 장례식을 치르는 것을 선호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요일 장례를 금지하였다
청교도 시대의 후반기에 이르러 마침내 정부가 장례비용을 통제하려 했다. 매사추셋츠 살렘에서는 장례식의 조종을 울리는데 8펜스를 부과할 수 있었으며 보스톤에서 장의사들은 1793년 비용에 대해 1실링을 부과했다. 장의사들은 의자나 관보를 대여하거나 부고를 해주는 댓가로 최대 8실링까지 부과할 수 있었다
제10장: 19세기의 매장
미국 식민지시대로부터 19세기로의 도약은 시신보호에 대한 필요성의 대두로부터 시작되었다. 시신보호에 대한 필요성은 의과대학에 해부용 사체를 팔아넘기는 무덤도둑들의 천인공노한 작태에서 촉발되었다. 19세기 초, 영국, 스코틀랜드, 미국에서는 일부 범죄자들이 무시무시한 신종 범죄행각을 벌였는데-해부학 발전에의 기여라는 면에선 유용한 측면도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스스로를 소위 “부활론자”라 불렀던 무덤도굴꾼들이었다.
이 시대 영국과 미국의 법은 인간 사체에 대한 존중을 이유로 시신의 의학적 해부를 엄격히 금지하였다. 사형 당한 범죄자의 시신만이 유일한 예외였다.
시신해부의 금지에 대한 여론도 높았지만 의사들에게 인체구조에 대한 보다 자세한 연구를 진행해야 된다는 여론도 높았음은 당시대의 딜렘마였다.
그래서 의사들은 의학발전을 위한 시신 해부의 필요성 때문에 자연히 소위 무덤도굴꾼들과 연계가 되었다.
야밤에 무덤에 가서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발굴하여 은밀하게 의대의 해부학교실로 시신을 옮기는 것은 대단히 끔직한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도굴꾼들은 값비싼 것이 부장되어 있는 시신에 대해선 특히 주의를 기울여 모든 것을 턴 다음 시신만 의대로 넘겼다. 당시의 법은 시신도굴보다 더 엄격하게 처벌한 것이 부장품의 도굴이었다. 당시의 도굴꾼들은 수십 분 내에 무덤 담을 넘어 도굴을 끝낸 후 무덤을 원상복귀한 후 시신을 운반하는 것에 대해 자랑으로 여겼다. 무덤도굴꾼들은 의대의 해부학과로 시신을 운반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들을 동원해야 했다. 그들은 시신을 시장에 쌓여 있는 야채더미나 나무더미에 시신을 숨기기도 했다. 일단 시신이 해부실로 옮겨지면 경찰이 해부실로 들어오는 것이 금지되었으므로 의사들은 두려울 것이 없었고 의사들은 도굴꾼들에게 “귀중한 견본”인 시신의 대가로 영국에서는 4내지 8파운드, 미국에서는 2내지 35달러를 지불했다. 런던 의과대학에 해부학 박물관을 설립한 그 유명한 의학박사 존 헌터는 유명한 아일랜드 거인 바이른의 시신을 확보하기 위해 무려 오백달러를 지불했다. 바이른은 8피트나 되는 거인이었다. 그는 런던에서 그 큰 키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으로 먹고 살았는데 그는 특히 간이 안 좋아 오래 살 수가 없었다. 어떻든 헌터박사는 그의 뼈를 표본으로 갖고 싶었다. 그래서 바이른에게 시신을 기증하면 8백 파운드를 주겠다고 제의했다. 그러나 바이른은 거절했고 헌터박사는 얼르고 달랬다. 심지어 바이른이 죽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시신을 확보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네 명의 친구들을 시켜 바이른의 시신을 파 오게 하겠다고도 했다. 결국 헌터박사는 성공했다. 바이른이 죽자 바이른의 네명의 친구들은 헌터박사에게 바이른의 시신을 확보해 주는 대가로 오백 파운드를 요구했고 헌터박사는 기꺼이 그 대가를 지불했다.
무덤도굴꾼들의 악명은 전국에 퍼졌고 이에 대한 공포감을 점증되었다. 이러한 공포감이 오늘날의 매장용 관을 비롯한 “안전한 무덤”을 위한 각종 발명들의 기폭제가 되었다.
런던 주민들은 도굴로부터 묘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장전한 총을 들고 순찰을 했는데 동료 순찰 시민이나 일반 시민들에 대한 오발사고가 빈번했다. 이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고 도굴꾼의 무덤도굴은 지속되었다.
에딘버그 대학은 매우 유명한 의과대학이었다.
이 대학엔 해부용 시신이 충분하게 공급되었다. 특히 크녹스라는 의학박사는 시신에 관한한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당시에 크녹스 박사는 대단한 해부학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전 세계 해부학계에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프로젝트였다. 크녹스 박사에게 시신을 공급하던 사람은 구두공 윌리엄 버크였는데 그는 존헤어라는 사람과 공모하여 시신을 공급했다. 버크와 헤어는 에딘버그의 빈민촌인 테너스클로즈에 살았다. 헤어는 골목길을 한참 들어가 있는 지하 단칸방에 살았고 버크는 금박 무너져버릴 것 같은 낡은 건물의 6층에 살았다.
1828년 초, 에딘버그에서는 이상한 실종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주정뱅이나 거지들이 실종되었는데 나중에는 잘 알려진 소년과 소녀도 실종되었다. 실종된 소녀는 엄청난 미인으로 실종된 소년은 괴짜 거지로 유명했는데 먼저 소녀가, 그 다음에 소년이 실종되었다. 여론은 흥분했고 인육을 먹는 비밀집단이 있다는 흉흉한 소문들이 떠돌아 다녔다. 수개월이 지난 후 또 다른 실종사건이 발생했고 그에 따라 공포에 휩싸여 있던 11월1일, 한 노동자가 이웃집 방에 쌓여있는 밀짚더미에서 살해된 것이 분명한 한 할머니 시신을 발견했다고 신고했다. 그 이웃이 바로 버크였다. 그의 집을 수색한 경찰은 물증을 찾아냈고 헤어의 집에서 또 다른 시체가 발견되었다. 버크와 헤어는 체포되고 그들은 자백했다. 그들은 처음, 빛 때문에 갑자기 죽은 늙은 군인의 시신을 파는 것으로 이일을 시작했다고 진술했다. 그들은 그 시신을 크녹스 박사에게 전달했고 박사는 8파운드라는 거금을 그들에게 주었다. 이를 기화로 살인행각은 시작되었다. 시신을 팔기 위해 온갖 어려움이 있는 무덤도굴보다는 직접 시신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훨씬 쉽더군” 라고 헤어는 진술했다!!!!!!!
버크가 제안한 버크-헤어의 방법은 항상 동일했다. 안개가 자욱히 낀 날 시내 빈민가를 돌며 남자든 여자든 가급적 술이 취한 사람을 노렸다. 접근해서 말을 붙이곤 집으로 데려갔다. 테이블에 앉히고 술을 권하며 함께 마셨다. 목소리 좋았던 버크는 노래도하고 상대가 완전히 취하면 헤어가 뒤로 돌아가 입을 막고 목을 조르고 나이가 있는 버크는 움직이지 못하도록 가슴을 눌렀다. 그래서 한동안 모덤도굴이 “버킹”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들은 한 할머니를 살해했고 크녹스박사는 왜 죽었는지에 대한 아무런 질문 없이 그 시신을 10달러에 샀다. 둘은 할머니와 그 딸을 살해했고 또 다른 할머니와 그의 손자,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시신을 팔기 위해 살해했다.
헤어는 모두 16명을 살해했다고 기억하면서 어쩌면 더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버크는 1829년 사형되고 헤어는 사형은 피했지만 맹인거지로 생을 마감했다.
미국에서 가장 흥미 있고 놀라운 시신도굴사건은 존 스콧 해리슨이란 사람과 관련된 것이다. 존 스콧 해리슨은 미국 9대 대통령의 아들이며 동시에 마국 23대 대통령의 아버지이다. 존 스콧 해리슨은 1878년 죽어 신시네티 서부의 오하이오 노쓰벤드 의회묘지에 안장되었는데 그가 매장된 후 모톤이란 도굴꾼이 그의 시신을 도굴하여 신시네티에 있는 오하이오 의과대학에 팔았다.
학교 관계자들은 실습용 시신을 암시장에서 구매해 왔는데 그 시신이 유명한 사람이었는지 몰랐다. 나중에 미국 23대 대통령이 된 그의 아들이 다른 일로 그 대학에 들렀는데 우연히 자기 아버지의 시신이 로프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 기절초풍을 한 것이다.
곧바로 오하이오주는 시신도굴금지법안을 만들어 통과시켰고 앤드류 반 비버라는 사람은 ‘안전한 묘’를 발명하여 특허등록을 하였다. 1879년 스프링필드의 죠지 w 보이드는 공기압 원리를 이용하여 밀봉하는 금속 매장관을 최초로 개발하여 특허를 냈다. 무덤도굴을 방지하기 위한 이 두 가지 발명품은 매우 훌륭했다.
무덤도굴꾼들은 초기 상여꾼에게도 골치 아픈 존재였다
중세시대 상여꾼은 관을 싸고 있는 관보 밑에서 상여를 운반하였는데 그들은 곤봉이나 묵직한 나무 막대기를 차고 있어야 했다. 왜냐하면 당시에도 사람이 많지 않은 장례행렬은 종종 시신도굴꾼들로부터 습격을 당했기 때문이다.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확보하는 것보다 매장하기 전에 시신을 빼앗는 것이 더 수월했고 그러한 직업이었으니!!
어떻든 상여꾼들은 곤봉으로 시신의 안전을 지켜야 할 임무도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무 곤봉은 트런천(경찰용 곤봉)으로 개선됐고 무기라기보다는 장례의식을 진행하는 하나의 상징으로 되었다.
장례 후에 그 장례를 주관했던 사람들은 하나의 상징으로 그 곤봉을 장식하고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장례행렬이 지나가는 동안 누가 그 장례를 주관하는지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관습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운구차의 한쪽 유리에 장의사의 이름(상징)을 붙혀 다니는 것이다.
제11장; 19세기와 20세기의 매장 역사
19세기말과 20세기의 묘지의 조류는 다음 세 가지의 발생으로 대변할 수 있다. 바로 정원묘지, 산상묘지, 잔디 공원묘지이다
정원묘지
묘지개혁의 단초가 된 것은 1800년대 미국 북서부 지방을 휩쓸었던 극심한 전염병이었다. 교회묘지는 심한 악취뿐 아니라 공공위생의 심각한 해를 끼쳤다. 시내 묘지는 만원이었다. 19세기 초 뉴욕 보건당국은 묘지조사를 하고 시내에 매장하는 것이 더 이상은 불가하며 시신은 산 사람에게 해가된다고 지적했다. 또한 시내묘지는 소독되고 재개발되어 공설묘지로 조성해야하며 더 이상 부패의 온상, 미아즈마의 원천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미아즈마는 당시에 가장 무시무시한 말이었는데 모든 전염병의 원인이 되는 유기물이 부패할 때 나오는 눈에 보이지 않는 기체를 말하였다.
시내를 떠돌아다니는 미아즈마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묘지도 공원묘지로 재개발 되지 않았고 개장되거나 폐쇄된 묘원은 더더욱 없었다. 1822년 찌는 듯한 여름, 살인 전염병 황열(yellow fever)은 한달도 안돼 16000명의 뉴욕시민들을 숨지게 했고 맨해탄은 화급히 동수의 묘지가 필요했으나 쓸 수 있는 묘지는 남아있지 않았다. 어쩔수 없이 당국은 새로운 묘지를 찾아 나섰고 동강을 지나 부룩클린 교외에서 새로운 묘지로 조성이 가능한 넓은 지역을 발견했다. 부루클린은 미국의 두 번째 정원묘지, 그린우드로 개발되었다.
반면 보스톤과 필라델피아의 묘지는 더 심각했다. 1800년대 몇 번의 전염병을 거치면서 필라델피아에는 더 이상 묻힐 묘지가 없었다. 아이들이 명랑하게 뛰어 놀던 자리가묘지로 바뀌어갔다. 신문들은 당시의 놀이터가 묘지로 바뀌는 처참함을 기록하고 있다. 보스톤도 더 낳을 것이 못되었다. 시의회는 더 이상 시내에 매장하는 것을 금지시켰고 불과 몇 인치 깊이로 뒤범벅으로 매장된 시신들을 개장할 것을 결정하였다. 필라델피아는 묘지 난을 미국 세 번째 정원묘원인 로렐 힐의 조성으로 해결하였다. 매사추셋츠는 묘지난 해결의 선구자였는데 바로 하버드 대학생들의 피크� 장소를 미국 최초의 정원묘지-마운트 오번으로 바꾼 것이다.
매사추셋츠 주 캠브리지에 전원풍으로 조성된 마운트 오번 묘원은 앤드류 잭슨 주지사 시절에 건설되었는데 당시 주정부에는 운 좋게도 야곱 비질로우라는 전직 식물학자이며 의사이며 시인인 사람이 있었다. 의사로서 비질로우는 보스턴 교회묘지의 비위생성을 알았고 식물학자로서는 철철이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가지는 새로운 개념의 공원묘원을 제안하였다. 1825년 몇몇 식물학자와 더불어 비질로우는 적절한 장소를 찾아 나섰고 마침내 하버드 대학 근처의 찰스강가에서 72에이커의 땅을 발견했다. 그곳은 다양한 식생과 지형을 하고 있었으며 부드러운 언덕과 얕은 계곡, 소로와 냇물이 있었다. 정상은 찰스 강 위로 115피트 정도였고 캠브리지, 하버드, 보스턴의 첨탑들이 아름답게 보이는 곳이었다. 그곳은 원래 스톤우드 알려졌는데 그곳에 소풍가곤 했던 하버드 대학생들이 올리버 골드스미스의 목가적인 시 “사막의 마을”을 빗대어 스위트 오번이라 명명했던 곳이었다.
비질로우는 이곳을 묘지로 개발하기 위해 묘지 개혁론자들과 당시에 힘이 있었던 매사추셋츠 원예조합을 연계시켰다. 원예업자들은 그들이 주역이 될 72에이커의 새로운 신록의 땅이 만들어지는 것에 고무되었다. 묘지 개혁론자들은 부지가 충분히 넓어 많은 수의 가족묘지(플롯)를 만들 수 있어 안도했다. 산자와 죽은 자, 모두가 이익을 향유할 수 있는 곳이었다. 1831년 8월 묘지개혁론자들과 식물학자들이 백 명의 묘지개발에 관심 있는 보스턴 재력가들을 불러 모았고 6천불이 모금되었다. 마침내 스톤우드가 마운트 오번공원묘지로 바뀌게 되었다. 모두가, 특히 비질로우는 공원 내의 언덕, 길, 연못, 나무들에 벨워트, 로렐, 비버넘 등 식물의 이름을 따 명명했다. 그래서 유족들은 백조가, 앵무새로, 종달새도를 걸어 고인을 찾아뵙게 되고 단조로운 주위환경들은 세기적인 아름다운 광경(죽음의 낭만성)으로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보기 흉하게 널려있는 묘지들은 다듬어지고 티 없이 유지되었다. 또한 묘지는 도굴꾼이나 묘지 파괴자 등으로부터 완벽하게 보호되었다. 비록 재력 있는 보스톤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마운트 오번 묘원은 누구나 뭍힐 수 있었다. 그곳에 묻히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묘를 쓰기 위해 부자들은 돈을 냈고 가난한 자들은 물건이나 노역을 제공했다. 농부들은 가족묘를 쓰는 댓가로 묘원 내 소로들을 관리했고 대장장이는 화려하고 정련된 철문을 만들어 주었다. 영세한 장사꾼들은 잔디를 기부했고 주부들은 자발적으로 잔디를 심고 풀을 뽑았다. 묘지를 판매한 돈은 묘원을 관리하기 소요되었고 그 이후 마운트 오번은 비영리법인이 되었다.
미국의 최초 정원묘지인 마운트 오번은 1831년 8월, 시신을 매장한 것은 아니었지만 공식적으로 개장했다. 묘지를 만드는데 공헌했던 모든 사람들이 살아있었기 때문에 완공 후 9개월 동안 묘원은 묘지하나 없이 있다가 마침내 한 보스턴 가족의 아이가 죽어서 묻히게 되고 공원은 일반에 공개되었다.
언론은 새 공원묘원을 산사람들에게 “자연의 신학”을 가르치는 “구원의 땅”이라 극찬했다.
어떤 작가는 마운트 오번의 인공이 가미되지 않은 풍부한 자연미에 대해 “인간이 어떻게 이러한 아름다움을 만들어 냈는지 설명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라고 표현했다. 시작은 이렇게 사람의 성취 물에 자연이 단역을 행사하는 식으로 개시되었다.
뉴 잉글런드 매거진은 마운트 오번은 사람들에게 죽음이 삶의 자연스럽고 적절한 마감이라는 것을 볼 수 있게 해준다고 강조하면서 “전지전능한 우주질서에서 파괴자로서 시간의 경과는 재창조에 도움이 되도록 만들어 진 것은 하나도 없다”고 기사를 쓰고 보다 직접적으로 “창조와 파괴의 순환은 영원하다”라고 결론을 맺었다.
마운트 오번에 매료된 일반인들이 앞 다투어 교회묘지의 조상을 개장하여 마운트 오번으로 이장을 했고 이로 인해 마운트 오번은 예기치 못한 재정적 풍파를 겪었다. 네 가족이 묻힐 수 있는 15*20피트의 가장 작은 사이즈의 묘지가 적절한 가격인 60달러에 팔렸다.
마운트 오번은 자연경관의 아름다움 이외에 또 다른 것이 있었는데 다름 아닌 최초로 사람들에게 죽음과 인간의 유한함을 충격적으로 깨우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정원묘지운동의 교육적 의의는 죠셉 스토리의 개관식사에서 잘 읽을 수 있다. “우리의 묘지는 종교와 인간이 해야 할 지고의 목적에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묘지들은 아무도 듣지 않으려 하겠지만 분명히 산 자들이 들어야 할 교훈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그는 천명했다. 이렇게 해서 묘지가 인간의 유한성을 가르치는 산 사람들을 위한 교육기관으로서의 문화적 개념을 갖게 되었다. 보스턴에서 출발하여 전 미국에 걸쳐 정원묘지가 “종교와 철학을 가르치는 학교”가 되었던 것이다. 시신 처리에 대한 윤리와 믿음이 지속적으로 축적되었고 이는 와우에 의해 풍자되고 미트포드에 의해 경멸되기도 하였다.
예술사가들은 묘지에 있는 대리석과 브론즈 동상들이 미국 조각의 발전에 공헌한 바 크다고 말한다. 보스턴 이브닝 트랜스크립트는 마운트 오번에 조각가들을 고용하여 그곳 경치에 필적할만한 조각상들을 만들 것을 촉구했고 마운트 오번은 그들의 말에 따랐다. 결과는 절충적인 형태로 나타났다. 즉 고딕식 교회에 바로크식 타워 그리고 이집트식 출입문이었다.
마운트 오번을 따라 만들어진 정원식 묘지에는 이집트 풍의 조각이 많았다.오벨리스크와 스핑크스는 사람들이 제일 많이 주문하는 묘석이었다. 죽음에 대한 이집트식 상징물은-날개 달린 구, 묶인 실린더, 거꾸로 된 토치, 꼬리를 문 뱀 등- 묘원을 산책하다보면 눈에 많이 띄는 것들이다. 왜 이집트식일까? 이에 대한 당시의 한 사회 논평가는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죽은 자의 집에 적용되는 미스테리하고 독특한 건축양식이다”
마운트 오번 묘원에 비해 시내의 교회묘지는 하루 종일 열어놨지만 찾는 이가 별로 없었다. 마운트 오번은 낮 동안만 열었지만 조객들과 관광객들로 만원이었다. 말이 끄는 마차 금지, 음식반입금지, 꽃 훼손금지 등등 묘원의 규정은 엄격했다. 점심시간에 잠깐의 휴식을 위해서 또는 주말 나들이로 묘원에 가는 것은 오늘날 상상하기 힘들지만 당시엔 수천의 사람들이 마운트 오번이나 나중에 만들어진 정원묘지에 놀러가곤 했다. 미 대통령이 된 프랭클린 피어스는 1852년 볼티모어의 민주당 지명식에 참석하지 않고 대신에 마운트 오번을 찾아 산책을 했다. 당시 제임스 부케넌, 루이스 카스 그리고 피어스 이렇게 세 명의 대통령 후보가 서로 교착상태에 빠져 있었고 결국 절충안으로 피어스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 소식을 전하려고 전령이 전 보스턴을 뒤지다 결국 마운트 오번 묘원의 한 이집트식 석묘 옆의 나무그늘아래서 차기 대통령을 찾았던 것이다. 당시에 마운트 오번은 하버드 대학보다 더 유명했고 외국인이든 미국인이든 관광객들이 필수적으로 보는 코스였다. 마운트 오번에 입장하려는 긴 행렬에서 “사람들은 마운트 오번에 묻히기 위해 죽는다.”라는 말도 생겨났다. 마운트 오번은 유명한 사람들이 많이 묻혀있어 미국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이란 말도 있다. 로웰, 홀름, 롱펠로우 등 유명시인들과 미플린, 찰스리틀 등 언론인, 베이커 에디라는 유명한 기독과학자 등이 잠들어 있다. 또한 우리가 지금 보는 시립공원이나 골프코스의 등장이 수많은 고인들이 잠들어 있는 묘원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0세기로의 변동은 캘리포니아 글렌데일에 있는 숲속잔듸 묘지에서 출발한다. 숲잔듸 묘지의 출현은 미국의 묘지역사에 혁명적인 변화를 초래했다. 우리의 현재의 삶과 미래에 대한 숲잔듸 묘지의 영향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 어떠한 상황에 있든 간에 자연은 인간에 의해 개선되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고 자연 그대로 있는 것이 오히려 비자연적인 것이다” 세기를 바꾼 한 건축가의 이 말은 세계 최초의 메모리얼 파크이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묘원인 포리스트 론을 가능하게 만든 철학을 한마디로 잘 요약하고 있다. 정원식 묘지(마운트 오번)가 자연 그대로의 풍경-종종 사람들이 만든 부속물들이 있지만-속에 고인을 매장하는 묘원이었다면 메모리얼 파크는 사람이 인공적으로 만들어 고인을 잠들게 한 묘원이다. 메모리얼 파크는 자연배경은 최소화되어 원래의 자연보다 더 크고, 더 대담하며 더 밝게 만들어 지는 묘원이다. 이것은 포리스트 론에서 명백하게 나타난다. 미켈란젤로의 데이비드 상은 원래의 것보다 더 크며, 교구예배당의 베네치아식 유리 모사 천장벽화는 원래의 로마 프레스코보다 더 화려하며 플로랭스 뱁트리스티의 길버트 문의 복사품은 원래 것보다 더 육중하다. 포리스트 론은 이웃해 있는 헐리웃으로부터 원래보다 더 큰 것을 선호하는(영화의 고장 표현 등) 방식을 도입했다. 1916년 묘지 재개발 전문가인 허버트 이튼에 의해 제안된 포리스트 론은 “떠난 자들의 영원한 휴식처”인 동시에 “산 자들의 신성한 놀이터”의 개념으로 조성되었다. 매스터 빌더라 불렸던 이튼은 우연히 그대로 남겨지거나 또는 자연 상태로 있는 것을 묵과하지 않았다.
1906년부터 원래 글렌데일의 작은 묘지들이 있었던 자리에 7년 후 이튼이 포리스트 론을 개장하자 50에이커가 넘었고 1941년 300에이커로 확장되었으며 후에 네 개의 분리된 묘원으로 구성된 1200에이커의 묘원으로 확장되어 오늘날에 이른다. 1940년대 포리스트 론에서는 매년 천구의 매장이 있었다. 오늘날에는 캘리포니아 매장의 1/10인 8천구에 이른다.
포리스트 론과 같은 메모리얼 파크는 어떤 의미에서든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에 영향을 주는 묘원이다. 어린이들은 동화속의 성처럼 꾸며진 룰러비 랜드에 묻히고 어른들은 신개념의 웨스트민스터식 납골당을 선택할 수도 있다. 글렌데일 묘지의 건축양식은 다분히 옛시대 절충양식이다. 반면에 포리스트 론의 자매묘원 헐리웃 힐은 천만여 색조의 베네치아 유리로 지난 미국 역사의 25개 장면을 “자유의 창조”라는 이름으로 되살려 낸 식민지 시대의 양식이다. 에블린 와우의 소설을 각색하여 리버레이스와 죠나단 윈터가 주연한 1966년의 영화 “사랑하는 사람들”은 포리스트 론에서 사는 사람들을 풍자한 영화였다. 나중에 생긴 오린지 카운티에 있는 사이프레스 묘원은 버지니아 식민지시대풍이며 코비나힐스 묘원은 죠지아 식민지시대풍이다. 복합 메모리얼 파크는 세계의 그 어떤 묘원보다 더 많은 미켈란젤로의 모사품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 자부심이 대단하다.
정원묘지의 철학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튼은 묘원이 “망각의 두려움을 극복”하고“불멸에 대한 믿음을 강화”하는 역할을 넘어 나아가 “행복이 재창출되고 슬픔이 잊혀지는” 공간이라고 개념화하였다. 이는 포리스트 론 개발자들이 달성하고자 했던 경탄할만한 목표였다.
여기 캘리포니아에서는 언제나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대로 묻히고 있음을 기억하라. 여기 포리스 론에는 많은 영화배우들이 잠들어 있다.
험프리 보가트,론채니,에롤플린,어니 코박,챨스 로톤,스탠 로렐,스펜서 트레시,클라크 케이블,개롤 롬바드,진 할로 등이다.
결어
62,000년 전에서부터 오늘날의 포리스트 론에 이르는 묘지의 역사는 고인에 대한 존경(놀랍게도 그렇지 못했던 시대도 있었지만)과 마음에의 평화를 추구하는 우리 인간의 능력에 관한 이야기이다. 대단히 훌륭하게 만들어진 묘원들은 글래드스톤의 불멸의 경구를 다시 한번 떠올리게 한다.
“모국이 죽은 자들을 위하여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를 보면 국민들의 감성과 준법정신, 모국에 대한 충성심이 어느 정도인지를 정확하게 산출해 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