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가도입명(假道入明)
1589년 3월 히데요시가 요시시계의 아들 소 요시토시(宗儀智)에게 조선 국왕의 알현이 지연됨을 질책하며 독촉했다. 소(宗)씨 집안은 진퇴양난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그해 6월, 승려 게이테쓰 겐소(景轍玄蘇)가 정사(正使)로 요시토시 자신이 부사(副使)가 되어 조선으로 건너와서 히데요시의 명나라 정복에 선도하라는 명령을 명나라에 조공을 위한 가도입명(假道入明)으로 변조하고 통신사 파견을 결정해 주면, 바닷길을 안내하겠다고 간청했으나, 쉽게 성사되지 않았다. 조정에서 논의를 거듭한 끝에 정해년(1587)에 끌려간 포로 116명이 돌아오고 반민(叛民) 사화동(沙火同)과 왜구 긴시요라 등을 조선으로 소환하여 처벌한 다음 그해 9월에 통신사 파견이 결정되었다.9)
1590년 3월 1일,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과 50여명 조선통신사가 경성(京城)을 출발하여10) 7월 21일, 교토에 도착했을 때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오오슈(奧州) 25개국 평정 작전을 독려하려고 동북지방 무쓰(陸奧) 지방에 나가있었다. 조선의 통신사들은 교토 대덕사(大德寺)에서 무더위와 싸우며 객관에서 3개월 반 동안 기다리다가 11월 7일, 히데요시(豊臣秀吉)를 알현하고 전국 통일을 축하하는 국서를 전했다. 이 무렵 히데요시는 “무운이 곁들어 용이 하늘로 날아오르듯 행복감을 만끽하고 있었다.”11) 히데요시는 대륙의 예의범절을 무시하는 방약무인(傍若無人)의 교만한 태도로 조선통신사를 속국의 사절단으로 여겼으니 일본 사행(使行) 아무 소득 없이 끝나 버렸다. 조선통신사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오사카의 계빈(堺濱) 항구로 물러나서 13일 기다린 후에 받은 답서의 내용은 거칠고 거만하여 조선이 바라던 바는 아니었다.12) 조선 국왕의 격을 낮추어 ‘각하(閣下)’로 한 것과 선조의 선물을 조공물로 여겨 ‘방물(方物)’13)이라 하고 통신사의 방문을 속국의 ‘입조(入朝)’라고 쓴 문구를 고쳐 달라고 항의 했으나, 끝내 성사되지 못 했다. 명나라를 정복하고자 하니 길을 인도하라! 고 지시하는 내용이 답서에 포함되어 들어있었다.14)
11) 카타노 쯔기오(片夜次雄), 김택수 역.『李舜臣과 히데요시』 p13. 12) 유성룡(2007), 이재호 옮김,『징비록』 p. 31. 13) 방물方物) : 관찰사나 수령이 임금에게 바치던 그 고장의 특산물. 14) 기타지만 만지(北島万次)(2008),『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pp. 8-9. *히데요시의 의도는 조선을 점령하여 전진 기지로 삼아, 명나라 정복에 조선이 앞장서도록 명령하는 정명향도(征明嚮導)였다. 사신들과 선봉 장수들이 정명가도(征明假道) 또는 가도입명(假道入明)으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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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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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송헌 작성시간 10.05.31 하운 이제 글보는 재미 또한 좋구먼...! 정명가도(征明假道) 나 가도입명(假道入明)이나 그게 그거지...! 그놈들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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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도봉 작성시간 10.06.01 둘다 거짓을 말하는데 정명가도는 명을 치기위해 길을 빌린다는 거짓이고, 가도 입명은 명으로 들어가기위해 길을 빌린다는 거짓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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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하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0.06.01 그러하네. 거짓말로 조선을 초토화해서 차지하고, 발판으로 삼아 명나라도 차지하려는 수작을 조선 조정도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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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도봉 작성시간 10.06.02 글을 읽으면서 자네 하운산방에 처음 갔을때 이층 작은 서재 벽에 걸려있던 충무공 서사시 준비를 위해 빼곡이 적혀있던 작품 진행상황표가 생각났네. 무슨 복잡한 어는 집안의 족보같은 느낌이었네. 철저한 준비가 결국 이렇게 탄탄한 작품으로 탄생한것 같네. 왜의 일련의 조치를 이런 죽일놈들 하기 전에 우리 국력을 이미 일본에서는 훤히 알고 있었던게야. 우물안 개구리 조선 위정자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