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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황상제("玉皇上帝") 환인(桓因) 환웅(桓雄) 단군 (한민족 시조) [檀君] 시조 태사공 할아버님

작성자태사공의 후손|작성시간08.01.21|조회수752 목록 댓글 0

옥황상제
 본문
옥황상제는 천신, 즉 하늘의 신령이라는 의미로, 하늘의 중심, 하늘 자체를 신격화하거나 하늘에 있는 초인적인 신격을 믿음으로써 생겨난 개념이다. 옥황상제는 하늘의 중심에서 우주만물을 지배하며 하늘, 땅, 물의 모든 신들로 하여금 우주의 만상을 다스리게 한다. 또한 인간의 무병장수, 길흉화복, 기우를 담당하는 신으로 하늘님, 하느님, 하나님 등의 호칭으로도 불리는 최상의 신이다. 옥황상제라는 명칭은 중국도교의 영향을 입은 것이고, 『삼국유사(三國遺事)』가 보여주고 있듯이 제석(帝釋)이라는 명칭은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원래는 인도의 고대 신령인 인드라(INDRA)가 불교에 수용되고 중국에 와서 제석으로 한역된 것이다. 『가락국기(駕洛國記)』의 황천(皇天) 등의 호칭도 모두 옥황상제를 의미하는 단어들이다. 고구려는 하늘에 제사지내는 ‘동맹(東盟)’ 의례를 치렀고 백제 또한 천지에 제사지내었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을 참조하자면, 천신신앙의 유래는 이미 부여, 고조선 및 삼한 당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이라 생각된다. 여기에다 신라의 영성제(靈星祭), 일월제, 오성제(五星祭) 고구려의 영성제 등까지 고려한다면 우리 상고대사회의 하늘신앙은 보다 더 다양하였을 것으로 지적될 수 있다. 우리의 천신 숭앙은 부여, 고구려, 가락, 신라, 고조선 등 상고대 왕국의 시조왕이 나라의 창건주로서 그리고 문화영웅으로서 지상에, 하늘에서부터 내려온 신격적인 존재로 인식됨으로써 구체화된다. 이들 상고대 시조왕들은 예외 없이 하늘에서 내림한 천신이자 지상왕국의 왕으로서 생각되고 섬겨진 존재들이다. 이같이 시조가 하늘에서 내림한 신이라는 관념은 한 씨족의 시조신화에도 나타난다. 옥황상제는 하늘의 중심이 되는 신으로, 천신, 하나님, 하늘님, 하느님 등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 불려져왔다. 옥황상제는 우리나라의 설화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고 있다. 옥황상제가 등장하지 않는 설화가 드물 정도로 우리의 옛이야기에는 옥황상제가 주연이든, 조연이든 빠짐없이 등장하고 있다. 설화에서 옥황상제는 대부분 벌을 주는 인물로 나오고 있는데 모두 매우 엄한모습이다. 하늘의 중심에 서서 만물을 주관하는 위치에 있으므로 하나같이 엄한 존재, 절대자의 상징으로 묘사되고 있는 듯하다. 우주만물을 지배하는 옥황상제를 고구려를 비롯한 우리나라의 고대국가에서는 제사를 지냈는데 동맹, 영성제, 일월제, 오성제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국가 주재의 제사에서 옥황상제가 모셔졌다는 것을 통해 옥황상제가 얼마나 중요하게 모셔졌었는지 중요성을 새삼 실감할 수 있다.
환인 (한국 신화)  [桓因]
출처: 브리태니커
관련백과

단군신화에 나오는 하늘의 신.
환웅(桓雄)의 아버지이며 단군(檀君)의 할아버지이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고기 古記〉에 의하면 아들 환웅이 늘 인간세상에 뜻을 두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삼위태백(三危太伯)을 내려다보니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하므로 천부인(天符印) 3개를 주며 가서 다스리게 했다고 한다. 환인이라는 명칭은 원래 산스크리트 '제환인타라'(提桓因陀羅:'天帝')에서 차용한 말이다. 따라서 〈삼국유사〉를 편찬한 일연(一然)도 환인은 제석(帝釋)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를 달았다. 이처럼 환인이라는 명칭은 불교가 전래한 뒤에 수식된 것이나 원래의 신화에 전혀 없던 것이 가공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우며, 하늘[天] 또는 태양을 숭배하던 사상에서 출발하여 시간이 지나면서 불교적인 표현으로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환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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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조선 - 단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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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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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의 간섭기 / 삼별초의 난
홍건적의 고려 침공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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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창덕궁·종묘·화성
대한제국
대한민국임시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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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정기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환웅(桓雄)은 단웅(檀雄) 또는 신웅(神雄)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환인, 환웅, 단군의 신주를 모신 삼성당(三聖堂) 또는 삼성사라고 하는 곳이 황해도 문화현 구월산에 있었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고기(古記)》, 《세종실록》〈지리지〉에 인용된 《단군고기(檀君古記)》에 의하면, 환웅은 환인의 서자이자 단군의 아버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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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사서에 설명된 환웅

《삼국유사》와 《조선왕조실록》에는 옛 기록을 인용하여 단군신화를 설명하였다.

[편집] 삼국유사

환웅은 인간 세상에 뜻을 두어 환인으로부터 천부인 3개를 받아 3천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 정상에 내려와, 그 곳을 신시(神市)라 부르고 곡식.수명.질병.형벌.선악 등 인간의 360여가지 일을 주관하였다.

어느날 호랑이가 환웅을 찾아와 인간으로 만들어 달라고 간청하자, 각자에게 신령한 1주와 마늘 20개를 주면서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서 이것만 먹고 산다면 인간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곰과 호랑이가 삼칠일을 버텼고, 곰은 여자가 되었으나 호랑이는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웅녀는 혼인할 곳이 없어서 신단수 아래에서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빌었다. 이에 환웅이 잠시 인간의 몸으로 변하여 웅녀와 혼인을 하고 아이를 낳으니, 그 아이가 단군왕검이다.

[편집] 조선왕조실록

상제 환인(桓因)의 서자인 웅(雄)이 세상에 내려가 사람이 되려 하여 천부인 3개를 받아 태백산 신단수 아래에 내려와 단웅천왕(檀雄天王)이 되었다. 그 손녀로 약을 마시고 사람이 되게 하여 단수(檀樹)의 신(神)과 혼인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가 단군(檀君)이다.

[편집] 야사에 설명된 환웅

규원사화》와 《부도지》에 환웅에 대한 설명이 있다. 《규원사화》에서는 환웅이 '신시씨(神市氏)'로 불리운다.

[편집] 같이 보기

[편집] 참고문헌 및 링크

  • 일연, 《삼국유사》, 고려시대
  • 《조선왕조실록》, 조선시대
  • 북애자, 《규원사화》, 조선시대
원본 주소 ‘http://ko.wikipedia.org/wiki/%ED%99%98%EC%9B%85
단군 (한민족 시조)  [檀君]
출처: 브리태니커

?~?
우리 민족의 시조(始祖)이며 고조선(古朝鮮:단군조선)의 첫 임금.
개요
단군 /단군상, 충청남도 온양시 온양민속박물관 ...
단군왕검(檀君王儉) 또는 단웅천왕(檀雄天王)이라고도 한다. 천제(天帝) 환인(桓因)의 손자이고, 환웅(桓雄)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웅녀(熊女)이다. 우리나라 국조신화(國祖神話)인 〈단군신화〉의 주인공이다.
단군신화
〈단군신화〉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는 중국의 〈위서 魏書〉와 우리나라의 〈고기 古記〉를 인용한 〈삼국유사〉 기이편(紀異篇)을 들 수 있다. 그밖에 고려 후기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 帝王韻紀〉, 조선 초기 권람(權擥)의 〈응제시주 應製詩註〉와 〈세종실록〉 지리지에도 기록되어 있다. 내용이 풍부하여 일반적으로 인용되는 기록은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고기〉의 것인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랜 옛날에 환인의 서자(庶子:장남이 아닌 차남 이하의 아들을 가리킴)인 환웅이 항상 인간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아버지 환인이 아들의 뜻을 알고 천부인(天符印) 3개를 주어 세상에 내려보내 인간세계를 다스리도록 했다. 이에 환웅이 무리 3,000을 이끌고 태백산(太白山) 꼭대기에 있는 신단수(神壇樹) 아래로 내려와서 여기를 신시(神市)라 이르니 그가 곧 환웅천왕이다. 그는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穀)·명(命)·병(病)·형(刑)·선(善)·악(惡) 등 무릇 인간의 360가지 일을 맡아서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했다. 이때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있어 같은 굴속에 살면서 항상 환웅에게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한번은 환웅이 이들에게 신령스러운 쑥 1자루와 마늘 20쪽을 주면서 이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된다고 했다. 곰은 이것을 받아서 먹고 근신하여 3·7일(21일) 만에 여자의 몸이 되고 호랑이는 이것을 참지 못하여 사람이 되지 못했다. 웅녀는 그와 혼인해주는 이가 없으므로 신단수 아래에서 아이를 가지게 해달라고 기원했다. 이에 환웅이 잠시 변하여 결혼해서 아들을 낳으니 그가 곧 단군왕검이다. 왕검이 당고(唐高:중국 3황 5제 중의 堯를 말함. 당시 고려의 제3대 왕인 정조의 이름이 요인 까닭에 이를 피하여 뜻이 같은 高자를 대신 쓴 것임) 즉위 50년 뒤인 경인년(庚寅年:당고의 즉위년은 무진년으로 50년뒤면 정사년이므로 경인년이란 표현은 아마 틀린 듯함)에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일컬었다. 이어서 도읍을 백악산(白岳山)의 아사달(阿斯達)로 옮겼는데 그곳을 궁홀산(弓忽山:弓자 대신 方자를 쓰기도 함) 또는 금미달(今彌達)이라고도 했다. 단군은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고 주(周)의 호왕(虎王:주의 무왕을 말함. 고려 2대 혜종의 이름이 武이기 때문에 이를 피한 것임)이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왕에 봉하고, 자신은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뒤에 아사달에 돌아와 숨어서 산신이 되니 나이가 1,908세였다." 그밖의 다른 기록들도 세부적인 면에서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기본적으로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
단군신화의 해석
〈단군신화〉는 우리 역사상 등장한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에 관한 것인 만큼 오늘날에는 민족 전체의 국조신화로 여겨지고 있으며 신화의 주인공인 단군은 우리 민족의 시조로 모셔지고 있다. 신화란 원래 당시의 현실 속에서 고대인이 경험한 것을 객관화시켜 형성된 관념이 간접적으로 표현된 사회적 의식형태의 하나이다. 따라서 현재 우리에게 전하는 신화는 과거의 어떤 특정한 시점에서 완전한 형태로 정착된 것은 아니다. 역사발전과정을 거치는 동안 신화도 오랜 세월 변천을 거듭하여 내용의 일부가 소멸하기도 하고 첨가되기도 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이때문에 학자들 사이에는 신화의 내용을 허구로 인식하여 〈단군신화〉와 관련된 고조선의 존재조차도 부정하는 견해로부터 신화의 내용을 그대로 역사적 사실로 믿어야 한다는 주장에 이르기까지 의견이 다양하다. 〈단군신화〉에 대한 연구를 관점의 차이에 따라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나누어볼 수 있다.
〈단군신화〉의 생성과정과 주인공에 관한 학설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첫째,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의 관점에서 이를 이해하는 견해이다. 중앙아시아로부터 한반도와 일본 등을 포함하는 지역에 사상 중심의 신앙과 사회조직을 가지는 종족들이 백산(白山)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었다. 종족적 관계는 여하튼 간에 이 문화가 우리 역사 속에 나타난 실체가 바로 단군과 부루(夫婁)라고 본다. 둘째, 이 신화가 삼신(三神)사상의 표현이고 구체적으로는 태양신화와 토테미즘 두 계통의 신화가 섞여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 즉 신화를 달리하는 두 종족이 정치·사회적으로 통합되면서 두 종족의 시조신화가 융합된 것으로 이해했다. 셋째, 천신족(天神族)인 환웅이 지신족(地神族)인 고마족의 여성과 혼인하여 단군이 출생했다는 것을 설화화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여기에서는 단군이라는 호칭은 무군(巫君), 즉 제주(祭主)의 의미가 많고, 왕검이라는 호칭은 정치적 군장(君長)의 의의가 강하다고 보아 종교적 기능과 정치적 기능이 명칭상에서 구분된다고 파악하고 있다. 넷째, 신화 또는 토테미즘의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태도를 벗어나 우리 민족 태고의 의식을 보여주는 사실로 파악하는 견해이다. 이 견해는 〈단군신화〉의 농경관계 기사를 곡물재배민족의 제의(祭儀)로 파악하고 환웅과 웅녀를 쌍분체제(雙分體制 dual organization)로 간주하여 곰과 범이 한 굴에서 살았다는 내용을 일광금기(日光禁忌)와 탈피(脫皮) 동기에 초점을 맞추어 이해했다. 다섯째, 단군신화에 나타난 곰숭배사상에 주목하여 이 신화내용을 동북아시아 지역에 분포되어 살고 있던 고아시아족(Paleo Asiatic)과 연결시키는 견해이다. 이 견해의 논거로 고아시아족의 시조설화에 곰숭배사상이 포함되어 있고 자신들은 곰의 자손이라고 믿고 있었던 점, 최고의 샤먼을 뜻하는 텡그리(tengri)와 단군이 어원상으로 관련이 있다는 점, 텡그리의 기능과 관련된 세계목(世界木:고대신화에서 하늘과의 통로로 여겨진 신성한 나무) 관념이 신단수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 등이 제시되고 있다.
민족의 개국신화로 정착되는 과정에 관한 논의는 다음과 같다. 먼저 원래 고조선의 한 종족신화였던 〈단군신화〉가 대몽항쟁(對蒙抗爭) 등 민족의 단합이 요구되는 시대에 전체 민족의 신화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이 견해에서는 단군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는 〈삼국유사〉의 편찬시기가 대몽항쟁기였던 점, 〈제왕운기〉에서 구월산(九月山)을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아사달산으로 보고 거기에 사당이 존재한다고 기록하고 있는 점 등을 들어 이 무렵부터 단군신화가 민족 전체의 신화로 자리잡기 시작했다고 본다. 그리고 조선 세종 때 평양에 사당을 지어 단군을 모신 뒤로는 명실상부한 국조(國祖)로 추앙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전혀 다른 견해도 제시되고 있다. 여기에서는 〈단군신화〉가 처음부터 우리민족의 건국사화(建國史話)로 인식되었다고 보고 있다. 즉 고조선은 이미 BC 12세기 이전에 북경 근처의 롼허 강[灤河]서쪽 경계로 하여 동북부는 헤이룽 강[黑龍江] 밖까지 이르는 만주일대와 한반도 전지역을 영토로 하는 동아시아의 대국으로 실재하고 있던 국가이므로 〈단군신화〉는 단순한 신화가 아니며 따라서 단군은 그뒤 줄곧 개국시조로 인식되었다고 보는 견해이다.
신화에 담겨진 역사적 현실과 그 시기 및 사실성 여부에 관해서도 다양한 논의가 있다. 첫째, 〈단군신화〉가 시대적 변화를 계기적으로 반영한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 즉 1단계에서는 씨족사회에서의 단순한 씨족토템이 생겼고, 2단계에서는 군사민주주의 단계로 이행하는 시기에 군사수장으로서의 단군이 등장했으며, 3단계에서는 계급국가 형성 뒤 고조선 국왕으로서의 단군이 등장한 것으로 보았다. 둘째, 사회경제사적 관점에서 고대국가의 성립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 이 견해에서는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풍백·우사·운사·선·악·곡·형 등 360가지 인간사 등의 단어들이 갖는 의미를 분석하여 〈단군신화〉에 나타난 사회가 부권(父權) 중심의 농경사회 내에서 계급분화가 이루어지고 지배자가 등장한 청동기시대 초기라고 보았다. 또한 곰과 호랑이, 환웅과 웅녀의 결혼 등의 내용을 통하여 토템을 믿는 몇 개의 종족이 결합하여 부족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셋째, 〈단군신화〉가 포용하고 있는 역사의 시대를 고고학적인 연대와 관련하여 신석기시대의 문화를 반영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즉 우리의 신석기문화가 시베리아 지역과 관련되며 시베리아 신석기문화의 담당자가 고아시아족이라는 사실을 바탕으로 〈단군신화〉의 시대적 성격이 신석기문화와 연결되고 있다는 주장이다. 넷째, 〈단군신화〉를 4단계의 역사적 발전단계가 압축된 것으로 보아 무리사회 단계인 환인시대, 부락사회 단계인 환웅시대, 부락연맹체사회 단계인 환웅과 웅녀의 결혼시대, 국가사회 단계인 단군시대로 보아 한민족의 역사적 체험, 즉 인류사회의 보편적 발전과정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이에 따르면, 각 시대를 고고학 자료와 연결시켜 환인시대는 1만 년 이전의 구석기시대와 중석기시대, 환웅시대는 1만 년 전 전후부터 6,000여 년 전까지의 전기신석기시대, 환웅과 웅녀의 결혼시대는 6,300~4,300여 년 전(BC 2300경)의 후기신석기시대, 고조선시대는 BC 2300년경부터 BC 2세기말까지로 보아 신화의 내용 대부분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와 함께 랴오닝[遼寧] 지역의 풍하문화(豊下文化:夏家店下層文化)가 청동기문화로서 단군의 개국연대와 연결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섯째, 〈단군신화〉를 고고학적인 측면에서 언급한 견해도 제기되었다. 즉 문헌에 보이는 자료를 토대로 산둥 성[山東省]에 있는 무씨사당(武氏祠堂) 석실 내의 화상석(畵像石)의 그림과 〈단군신화〉의 내용이 일치하고 있음을 주목하여 이의 전파가 종족 이동과 관련된 것으로 이해했다. 최근에는 이 견해의 바탕이 되는 무씨사당의 화상석이 단군신화의 내용과는 관련이 없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그밖에 단군과 관련된 문헌 중 도가(道家) 계통의 역사서인 〈규원사화 揆園史話〉·〈환단고기 桓檀古記〉 등을 제시하여 단군조선의 역사가 47대의 마지막 왕에 이르기까지 실사(實史)였음을 강조한 견해가 제시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이 역사서가 한말과 일제하에 만들어진 위서(僞書)라는 비판이 강력히 제기되고 있다. 원래 신화는 역사적인 사실 바로 그 자체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 속에 내재된 역사성을 중시해야 하며 어떤 맥락에서든 신화의 의미는 풀려야 한다. 그러나 단군의 개국신화를 그대로 왕조사인 것처럼 해석하는 것에는 무리한 점이 많다. 어쨌든 〈단군신화〉는 우리 민족이 수난을 당하고 위기에 처할 때마다 민족의 단합을 요구하는 구심체 역할을 해왔고 계속 이러한 의미와 가치를 유지할 것이다.
한편 일제강점기의 민족의식의 고양과 관련하여 단군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종교로 발전한 것이 대종교(大倧敎)이다. 대종교는 1909년(융희 3) 나철(羅喆)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대종교에서 단군의 탄생일을 기념하는 행사이던 개천절(開天節)을 8·15해방 후 정부가 정식으로 국경일로 지정했다. 1945년 대한민국정부 수립과 동시에 법령으로 공포되어 사용되던 단기(檀紀)는 고려말 우왕(禑王)의 사부였던 백문보(白文寶)가 사용한 예에서 처음 보인다. 요즘의 단기는 조선시대의 사서 〈동국통감 東國通鑑〉에서 고조선의 건국을 요 즉위 25년 무진년으로 본 것에 근거하여, 단군 원년을 BC 2333년으로 정한 것이다. 5·16군사정변으로 군사정부가 집권한 뒤인 1962년 1월 1일부터 단기 사용을 중지시키고 공식적으로는 서기(西紀)만을 쓰고 있다.
李弼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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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연(龍淵)의 금궤에서 나온아이 고려 개국공신 坡平尹氏 시조 윤신달 장군 천문지리

2005/10/04 13:37

http://blog.naver.com/seaamcs/40018193158

 

[ 용연(龍淵)의 금궤에서 나온아이 고려 개국공신 파평윤씨(坡平尹氏) 시조 윤신달 장군 ]

 

파평윤씨시조 태사윤신달 발상 설화


  파평산 서북맥내령 기슭에 있는 깊이 10미터 넓이 백수십보(2,000여평)가 되는 큰 연못에서 서기 893년(신라 진성왕 7) 8월 15일 천둥번개와 아울러 소나기가 쏟아지면서 운무가 사면에 자욱한 가운데 연못위로 갑자기 번쩍거리는 금궤가 떠올랐다. 이를 본 관원들이 이상히 여겨 태수에게 사연을 고하고 즉시 와서 보니 금궤는 다시 물속으로 가라앉아 떠오르지 않아 할 수 없이 헤어졌다 한다. 그날 해가 질 무렵 근처에 사는 노파가 그 연못에서 빨래를 하는데 서산에 무지개가 찬란하게 뜨며 또다시 금궤가 떠오르자 이를 건져 안고 집으로 돌아와 열어보니 금궤안에 오색이 찬란한 우모(羽毛)에 싸여 있는 남자 아이가 서광이 빛나는 눈과 용모가 범준하며 양어깨에 붉은 점이 日, 月을 상징하고 양쪽 겨드랑밑에는 87개의 용(龍)의 비늘이 있으며 등에는 북두칠성의 검은 점과 손바닥에는 尹자 모양의 손금이 그어져 있었다 한다. 이분이 바로 파평윤씨 시조 윤신달이다. 이분은 성장함에 따라 기골이 장대하고 총명하여 학문에 능숙하였으며 파평산 금강굴에서 용마(龍馬)을 얻어 무예를 익히며 파평산 정상을 비호같이 오르내렸으며 이곳을 치마대(馳馬臺)라 하였으며 지금까지 일부 흔적이 남아있다.

이러한 가운데 어느해 극심한 가뭄으로 농작물은 물론 산야에 초목이 고사할 지경에 이르자 기우제를 지내기 위해 국왕께서 제문을 지어 올리도록 문신들에게 지시하니 문신들이 갑작스런 일로 생각이 안나 주저하는 것을 본 윤신달이 제문을 지어 올렸는데 ‘군신이 죄가 있으면 마땅히 재앙을 달게 받겠지만 어찌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초목을 마르고 타게 하나이까? ’宣君臣之有罪甘受 災殃 奚草木之無知等 蒙焦熱(선군신지유죄감수 재앙 해초목지무지등 몽초열)란 글귀로 써 놓으니 과연 명구(名句)라며 문신들이 탄복하였으며 기우제를 지낸 후 비가 쏟아졌다 한다. 고구려는 당시 궁예왕 막하에 왕건, 윤신달, 신종겸, 홍유, 복지렴, 유검필등 쟁쟁한 명장 걸사들이 모여 세력을 확장 국호를 후고구려로 하고 강원, 함길, 평안, 황해도의 북방지역을 장악 도읍을 송도로 하고 또한 철원으로 천도 태봉(泰封)으로 국호를 개칭하였다.

그러나 태봉왕이 된 궁예왕은 날로 난폭하고 잔악해져 중신들의 학살등으로 민심이 흉흉하게 되어 덕망이 높은 왕건에게 조정백관을 비롯 백성들이 따르게 되자 태봉왕은 왕건이 반역할까 두려운 나머지 관심술을 써서 나를 반역할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 하고 호통을 치며 죽여 없애려고 왕건은 소리치며 물러나와 윤신달,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유검필, 박술연 등 제장들과 의논 끝에 왕건을 국왕으로 추대키로 하고 궁궐로 쳐들어가니 918년(동예 26세) 궁예왕은 궁중에서 빠져나와 강원도 부경(現 平康)으로 도망치다가 피살됨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이리하여 왕건이 등극 송도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고려로 하고 고려왕국 태조가 되었다. 이 당시 윤신달은 파평현에 거주함으로 개국백에 봉한 후 본관을 파평(坡平)으로 하였다. 당시 신라는 박(朴), 석(昔), 김(金)씨 三姓이 992개년(55世) 집권해 내려오던 중 935년(신라 경순왕 9) 국정이 문란 민심이 날로 쇠퇴함으로 고려조에 굴복 폐망되었으며 또한 전라도 지방에 진훤이 892년 후백제를 세워 그의 아들 신검이 건국 45년만에 고려에 항거함으로 삼국통일이 되었다.

이는 오직 고려 태조를 극진히 보필한 중신 태사 윤신달선생께서 일상 덕을 닦아 인의 토대위에서(修德行 仁以利天下) 천하를 다스려야 한다는 간곡한 권유로 말미암아 왕건이 큰뜻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으며 태조는 삼국통일 후 신라와 후백제를 평정한 것도 윤신달의 공이 크다 하였다는 전설(羅濟之平 尹莘達之功也)이 내려오며 아래 건국공신들에게 책훈을 내리었다. 파평윤씨 시조 윤신달(坡平尹氏 始祖 尹莘達), 평산신씨 시조 신숭겸(平山申氏 始祖 申崇謙), 경주배씨 시조 배현경(慶州裵氏 始祖 裵玄慶), 달성홍씨 시조 홍유(達城洪氏 始祖 洪儒), 오천복씨 시조 복지겸(汚川卜氏 始祖 卜智謙), 안동김씨(신) 시조 김선평(安東金氏(新) 始祖 金宣平), 문화유씨 시조 유차달(文化柳氏 始祖 柳車達), 전의이씨 시조 이탁(全義李氏 始祖 李탁 ), 안동장씨 시조 장길(安東張氏 始祖 張吉)또한 그밖에 20명에게 수훈을 내렸다.

태사윤신달선생은 문무를 겸전 인의지도(仁義之道)를 제창 파평사저에서 송도로 말을 타고 조정에 입궐당시 임진강 여음탄을 매일 도강하는데 강을 건널적에 물이 양쪽으로 갈라져 육지를 다니듯 하였다하며 말이 물을 마신 나루(如飮津)를 여음 또는 음진이라 불리우게 되었다 한다. 그 후 용마가 죽자 기념하기 위하여 파평산 치마대에 철마를 만들어 세웠으나 조선조시대 철공(대장간)하는 사람들이 이를 사용하고자 훔쳐 달아나다가 직사하였다 하며 후한이 두려워 흙으로 다시 만들어 세웠다하나 지금은 흔적이 없다.

서기 1117년(고려 예종 12) 여진을 평정한 공으로 추충좌리평계척지진국공신문하시중 판상서 이부사 지군국 중사(推忠左理平戒拓地鎭國功臣門下侍中 判尙書 吏部事 知軍國 重事)가 되어 943년 왕건태조가 승하 혜종이 왕위에 오르자 윤신달은 삼남지방을 평정하기 위해 대도독으로 임명 경주(東京)대도독부(大都督府)에 52세에 부임되었으나 30년만에 다시 돌아와 81세로 서거하니 태사 삼중대광으로 추증하고 경주 기계현 아치동(현 영월군 기계면 봉래동)에 구봉산 사원(四原)에 국장을 지냈다 한다. 조선조 영조 대왕시 경주 유림들이 봉강서원을 건립 매년 향사를 지내고 있던중 대원군때 서원철폐령으로 폐철된 후 자손들이 묘옆에 묘사를 건립 매년 음 10월 1일과 한식일에 전국 후손들이 모여 향사를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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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태사공께서 파주 파평산에서 글과 무예를 닦으셨는데 파평산 마루에서 공이 말을타고 달리시던 곳을 치마대라고 하며, 천 여년이 지난 오늘 날에도 그때 길을 닦았던 석축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치마대에는 공께서 훈련중 타고 다니시던 애마가 죽어서 다섯개의 철마를 만들어 놓으셨다는 전설이 있는데 그 후 어떤 철공이 철마를 무심코 훔쳐 갔다가 즉사 하였다 한다.

그때 같이 갔던 사람이 겁을 먹고 후에 그 자리에 흙으로 역시 다섯개의 철마를 구워다 놓았으나 그 모양이 아주 작아서 말 같지가 않았다고 합니다.

 

[ 파평윤씨성지용연 표지석 ]

 

 

 

 

 

 

 

 

 

 

 

 

 

 

 

 

 

 

 

 

 

 

 

 

 

 

 

 

 

 

 

 

 

[ 파평윤씨 시조 기념 비석 ]

 

 

 

 

 

 

 

 

 

 

 

 

 

 

 

 

 

 

 

 

 

 

 

 

 

 

 

 

 

 

 

 

 

[ 금궤가 떠내려온 용연지에 가득한 연꽃들 ]

 

 

 

 

 

 

 

 

 

 

 

 

 

 

 

 

 

 

 

 

 

 

 

 

 

[ 파평면 파산서원 ]

 

 

 

 

 

 

 

 

 

 

 

 

 

 

 

 

 

 

 

 

 

 

 

 

 

파산서원 []
요약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늘노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서원.
지정번호 경기문화재자료 제10호
지정연도 1983년 9월 19일
소재지 경기 파주시 파평면 늘노리 235
시대 조선시대
분류 서원
파산서원 / 경기 파주시 파평면 늘노리 235. 경기문화재자료 제10호. 조선시대의 서원.
본문

1983년 9월 19일 경기도문화재자료 제10호로 지정되었다. 파주 유림()이 소유하고 있다. 조선시대 학자 성수침()과 그의 아들 성혼(), 아우 성수종() 및 백인걸()의 위패를 봉안하고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다.

1568년(선조 1)에 이이(), 백인걸 등 파주 지역 유생들의 주창으로 창건되었고 1650년(효종 1)에 사액()을 받았다.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이 실시한 서원철폐령 때에도 남은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후에 복구하였으나, 6·25전쟁 때 다시 소실되어 1966년 사당만 복원하였다.

사당 주위로는 담장을 돌리고 정면 중앙에 솟을삼문을 두었다. 사당은 이벌대의 기단 위에 전돌을 깔고 원형의 초석 위에 원형 기둥을 세웠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전면()칸은 툇칸이고 각 칸에는 2분합의 띠살문을 달았다.

지붕은 맞배지붕에 겹처마를 이루며 기둥머리는 이익공()의 공포형식이고 내부 바닥은 우물마루이다. 건물의 초석과 기단석 등은 건립 당시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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