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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암서원(돈巖書院) |

작성자이계묵|작성시간13.02.12|조회수315 목록 댓글 0

 

돈암서원(돈巖書院)

 

 

 

 돈암서원은 논산에 있는 서원으로, 조선 선조~인조때의 문신이었던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1633년(인조11)에 건립되었다.  그후 1660년  현종이 돈암서원으로 이름지어 현판을 내려 준 사액서원(賜額書院)이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살아 남은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원래는 현 위치에서 약 1.5km 정도 떨어진 곳에 건립되었으나, 창건된지 240년이 지난 1880년(고종 17)에 이르러 서원 앞의 사계천(沙溪川)이 서원의 담장을 침식해 들어오자 사림들이 뜻을 모아

이 곳으로 이건(移建)하였다.

 

 

 

사계 김장생은 조선 예학(禮學)의 태두(泰斗)이며,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적통이었다. 부모가 죽은 뒤, 3년 시묘(侍墓)살이가 김장생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서원(書院)의 영역은 홍살문에서 시작한다. 홍살문 옆에 하마비(下馬碑)가 기울어져 서있다. 

 

 

 

 

 

 

 

 

 

 

 

 

 

仁祖가 돈암서원이라는 현판을 내려 사액서원이 되었다. 사액서원이 되면 전답이 내려지고, 세금 및 노역이 면제되는 등 많은 혜택이 따랐다. 한편 그 폐해도 심하여 흥선대원군은 47개의 서원을 제외한 모든 서원을 철페한다. 이 외삼문(外三門)의 이름은 입덕문(入德門)이다.

 

 

 

돈암서원이라는 이름은 이 서원 근처에 돼지를 닮은 바위가 있어 그렇게 지었다고 전한다.

 

 

 

 

 

 

 

 

 산앙루(山仰樓) ...돈암서원에 들어서면 먼저 이 산앙루를 맞이하게 된다. 굽어 山을 바라 보라는 의미이겠지...그러나 이 산앙루는 원래는 없었던 건물이다. 이 곳으로 이전하면서 최근에 신축한 건물이다.

 

 

 

어찌되었건 이 위치는 북쪽으로부터는 계룡산의 줄기가, 남쪽으로부터는 대둔산의 줄기가 흘러 와 마주치는 길지(吉地)이다.

 

 

 

 

산앙루의 주련(柱聯)은 다음과 같은 詩를 적어 놓았다. 중국 송(宋)의 소강절(邵康節)의 詩이다.

 

 

 

 

                                         세한 (歲寒)

 

              松栢入冬靑    소나무와 잣나무는 겨울에 들어 더욱 푸르르니

              方能見歲寒    비로소 추운 겨울이 온 것을 볼 수 있네

              聲須風裡聽    소리는 모름지기 거친 바람 속에서 들어야 하고

              色更雪中看    그 빛갈은 눈 속에서 보아야 새로워 진다네.

 

 

 

 

 

 

 

파노라마로 촬영한 서원 내부의 전경이다. 왼쪽부터 응도당(凝道堂), 정회당(靜會堂),장판각(藏板閣), 양성당(養成堂)과 동,서재(東西齋) 그리고 사당이 배치되어 있다.

 

 

 

 

 

 

 

 

응도당(凝道堂) .. 학문을 연구하고 강론하던 강당이다. 응도(凝道)는 道를 응축한다, 굳힌다..라는 의미인데 선인들은 학문을 연마하는 것을 道를 닦는다고 여긴 듯하다.

 

 

 

최근 보물 제1569호로 지정이 되었다. 응도당은 현존하는 서원 건물 중 거의 유일하게 고대 예서(禮書)에서 말하는 하옥제도(廈屋制度)를 본받아 지어진 건물이라는 것이 보물 지정의 주요 이유이다. 하옥(廈屋)이란 理想的인 의례용 큰 殿閣을 의미한다. 

 

 

 

 

 

 

 

 

 

 

 

 

 

 

 

 

 

 

 

 기호학파(畿湖學派) .. 조선 중기 畿湖지방을 근거지로 한  이율곡, 성혼(成渾)학파를 통칭한 말이다.  원래 기호(畿湖)지방은 경기도와 호서지방(湖西地方 ..제천의 義林池를 기준으로 서쪽 지방)을 포괄하는 지역을 의미하지만, 역사적인 개념에서 기호학파는 경기도,충청도 지역의 이율곡,성혼의 門人과 학자들의 집단을 뜻한다.

 

 

 

조선 초기에 영남지방은 고려 말, 조선 초의 왕조 교체에 불만을 품고 은거한 학자들을 중심으로 일단의 學者群이 형성되고, 조선 중기에 이퇴계가 배출되면서 영남학파(嶺南學派)가 성립되었지만, 기호학파는 넓은 지역을 대상으로 하여 학문적 결속력이 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선조 이후 동서분당(東西分黨)이 형성되고, 영남학파의 다수가 동인(東人)이 되면서 이에 대항하는 서인(西人)세력이 기호지방을 중심으로 결집하게 되었다.

 

 

 

 

 

 

 

 

 

당색(黨色)으로 볼 때 기호학파는 西人의 주축을 형성했지만, 서경덕(徐敬德)처럼 기호지방(개성)을 근거지로 하면서도 북인(北人)으로 나간 인물이 있음을 고려할 때, 기호학파가 곧 西人이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기호학파를 성립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은 이율곡, 성혼(成渾), 송익필(宋翼弼)을 들 수 있으며, 인조반정(仁祖反正)이후 西人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기호학파의 세력은 크게 확장되었다.

 

 

 

특히 이율곡의 제자인 김장생(金長生)을 거쳐 송시열(宋時烈)에 이르서 기호학파는 정계, 학계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다. 기호학파가 정계의 주도권을 장악한 데에는 무엇보다도 서울에 근접해 있다는 점이 많이 작용하였다.

 

 

 

숙종代에 이르면 기호학파 내부에서도 분열이 일어나 회적(懷德)을 중심으로 한 송시열 계열은 노론(老論)이 되고, 이산(泥山)을 중심으로 한 윤증(尹拯)계열은 소론(少論)으로 분립되었다.

 

 

 

 

 

 

 

 응도당의 건축적으로 두드러진 특징인 덧지붕이다. 한자로는 영(榮)이라 하고, 우리 말로는 눈썹처마라고  부른다.

 

 

 

 

 

 

 

 

 기호학파(畿湖學派)는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 등의 성리설과 예학(禮學) 등에서 많은 학문적 성과를 남겼는데, 특히 송익필(宋翼弼),김장생(金長生), 송시열(宋時烈) 등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예학(禮學)은 남인(南인)과 맞서 극렬한 예송논쟁(禮訟論爭)을 일으키게 하는 사상적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장판각(藏板閣)이다. 이 곳에는 김계휘(金繼輝 ..김장생의 부친), 김장생, 김집(金集 ..김장생의 아들)의 문집들을 보관하고 있는 곳으로 황강실기(黃岡實記), 사계전서(沙溪全書), 신재전서(愼齋全書), 상례비요(喪禮備要) 의 판각 2,100매가 보관되어 있고, 王室의 하사품인 사액연(賜額硯)과 옥등잔(玉燈盞)이 보관되어 있다.

 

 

  

 

 

 

 

                                          청야음(淸夜吟)

 

 

                          月到天心處         달은 하늘 중간에 떠있고

                          風來水面時         바람은 물결 위에 찰랑인다.

                          一般淸意味         이렇게 맑은 기분을

                          料得少人知         아는 이 적으리라.  

 

 

 

 

 

 

 

 

 

 

 

 

 

 

 

 

 

 

 

 

 

 

 

 

 

 

 

 

 

양성당(養性堂) ..사계 김장생이 후학들을 가르치던 장소이다.  

 

 

 

 

 

 

 

 

 

 

 

 

 원정비(阮庭碑) .. 서원을 세우게 된 내력과 서원의 구조 그리고 사계 김장생과 그의 아들인 신독재 김집(愼獨齋 金集)의 학문과 업적을 적고 있다.

 

 

 

이 비(碑)는 높은 사각 연꽃무늬의 받침대 위에 비신(碑身)을 세워 지붕을 올린 모습이다. 1699년

(현종 10년)에 세웠고, 비문(碑文)은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지었으며, 글씨는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浚吉)이 썼다.

 

 

 

 

 

 

 

 

 

 

 전사청(典祀廳) ..제사지낼 때 음식 등 모든것을 준비하는 장소이다.

 

 

 

 

 

 

 

 일반적으로 내,외삼문(內,外三門)은 솟을 3문으로 만드는 것이 보통인데, 이 곳 돈암서원의 3門은 특이하게도 각각 3개의 문을 따로 분리시켜 놓았다.

 

 

 

문이 3개인 것은 동입서출(東入西出)에 따른 전형적인 예법에 따르고 있는 것이며, 동쪽 문으로 들어 가서 서쪽 문으로 나오라는 의미이다. 가운데 문은 제사를 지낼 때 혼령이 지나는 신문(神門)으로 문은 늘 닫혀 있다.

 

 

 

 

 

 

 

 

 사우(祀宇)인 숭례사(崇禮祀)에는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을 주향(主享)으로 하고, 그의 아들인 신독재 김집 (愼獨齋 金集),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浚吉), 우암 송시열(尤菴 宋時烈) 등 문묘(文廟)에 배향된 선대의 현인 네 사람만을 모시고 있는 보기 드문 선정서원(先正書院)이다.

 

 

 

 

 

 

 

 

정료대(庭燎臺)  .. 불을 밝히는 정료대이다. 세월의 깊이를 느끼게 된다. 정료대는 일종의 등물인데 야간의 통행이나 짐승들의 접근을 방지하기 위하여 관솔 등을 모아 불을 밝히는 곳이다.

 

 

 

관솔은 소나무의 송진이 많이 엉긴 소나무 가지나 옹이를 말하는 데, 관솔은 불리 잘 붙고 또한 쉽게 꺼지지 않아 등불 대신 많이 사용하였다. 이 불을 관솔불이라고 한다.

 

 

 

 

 

 

 

 

숭례사의 담장은 전돌을 박아 넣고 회칠을 한 특이한 형태이다. 그 담장에 사계(沙溪)의 인품과 학문적 사상이 요약된 글씨가 12字 새겨져 있다.  그 뜻을 풀어 보면 다음과 같다.

 

 

 

지부해함(地負海涵)은 땅이 온갖 것을 다 실어주고,바다가 모든 물을 다 받아 주듯이 그렇게 모든 것을 다 포용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

 

 

 

3개의 문사이에 있는 두 곳의 담장에는 박문약례(博文約禮)이다. 지식은 넓게 가지고 행동은 예의에 맞게 하라는 논어(論語)의 박학어문약지이례(博學於文約之以禮)에서 따온 것으로 "군자가 글을 널리 배우고 禮로써 그 것을 요약한다면 道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하여 지식은 넓을수록 좋지만, 그 것이 단지 지식으로만 그치고 행동과는 무관하게 됨을 경계한 말이다. 知行合一이다.

 

 

 

 

서일화풍(瑞日和風) .. 서일상운 화풍감우 (瑞日祥雲 和風甘雨)에서 가져온 말이다. 좋은 날씨, 상서로운 구름, 부드러운 바람과 때를 맞추어 알맞게 내리는 단비와 같이 웃음올 대하고 남을 편하게 해 주라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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