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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자료 문헌

심곡서원(深谷書院)

작성자이계묵|작성시간13.02.12|조회수86 목록 댓글 0

 

심곡서원(深谷書院)

 

 

조광조(趙光祖)를 배향하기 위하여 세어진 심곡서원(深谷書院)이다. 김종직의 학통을 이어받아 사림파(士林派)의 영수가 된 조광조는 34살 되던 中宗10년(1515)에 관직에 등용되면서 중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그는 유교를 정치의 근본으로 삼는 지치주의(至治主義)에 입각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역설하며 과격한 정치개혁에 착수하지만, 그의 급진개혁은 곧 난관 즉 훈구파(勳舊派)의 반대에 부딪친다.

 

 

 

 

 이른바 주초위왕(走肖爲王)사건이다. 조광조의 반대파들은 조광조를 모함하기 위하여 대궐의 나무 가운데 글씨를 쓸 수 있을만큼 큰 잎사귀를 가진 오동나무를 골라 그 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의 글자를 꿀로 써놓았다.

 

벌레들은 꿀 발라놓은 부분을 파먹어 주초위왕의 글자가 선명히 드러나게 되었고, 그들은 이를 왕에게 고하며 조광조의 탄핵을 상소한다. 走肖爲王...합하면 조(趙)씨가 왕이 된다는 의미이다.

 

중종은 필요에 의하여 조광조를 중용하였지만, 조광조는 지치주의를 주장하며 왕권마저 견제하는 등 중종도 조광조를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던 차에 훈구파의 모함을 받고 조광조를 호남의 능주(綾州)로 귀양보내고, 그 일파는 투옥하였다.

 

중종은 드디어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린다. 조광조는 사약을 벌컥 들이마신 뒤 " 한잔으로 부족하다.한 잔 더 가져 오너라 " 하며 죽음에 이른다. 기묘사화(己卯士禍)이다.

 

이 때 조광조와 뜻을 같이 하다가 관직이 박탈 당한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이 시신을 수습하여 능주 골짜기에 가묘를 썼다가 후일 이 곳 용인으로 이장하였다.

 

 

 

 

 

조광조가 죽은 후 130년도 더 지난 1650년에 비로소 조광조의 후손들과 유림들은 그의 묘소가 있는 용인 이곳에 서원을 세우고 그의 위패를 모셨다. 학포 양팽손도 추가 배향되면서 심곡(深谷)이라는 사액(賜額)을 받는다. 흥선대원군 시절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전국의 서원이 철폐되었지만, 47개만이 남을 수 있었는데 심곡서원도 살아 남았던 유서깊은 서원이었다.

 

 

 

일소당(日昭堂)

 

서원의 강당으로 여러 행사 및 유림(儒林)의 회합과 학문의 강론 장소로 사용되었다. 일소당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조광조가 중종으로부터 사약을 받고  " 백일임하토 소소조단충  (白日臨下土 昭昭照丹衷) "이란

시를 남긴다. 즉, 하늘이 이 땅을 굽어 보시니,  내 일편단심 충심을 밝게 비추리....에서 한자씩을 따와 일소당(日昭堂)이라고 이름지었다.

 

 

 

 

 

 

 

 

 

                                           수령(樹齡) 500년으로 추정되는 느티나무

 

 

 

 사당(祀堂).. 조광조와 양팽손의 위패가 함께 모셔져 있다. 조광조의 위패는 처음에 역시 용인에 있는 정몽주의 충렬서원(忠烈書院)에 모셨으나 후일 이 곳으로 옮겨왔다.

 

 

 

 

 

 

 

 장서각(藏書閣)... 원래 67종 486책이 보관되어 있었으나 1985년 전부 도난 당하고, 지금은 정암집(靜庵集)과 조선사(朝鮮史)만이 남아 있다고 한다.

 

 

 

 

 수령(樹齡)  500년이 넘은 느티나무와 향나무가 나란히 자라고 있다. 심곡서원보다도 더 오래 된 나무이다. 향나무가 곁에 있는 탓에 느티나무는 품을 넓히지 못 하고 키만 훌쩍 크다.

 

 

 

 

 

 

 

 

 1392년 7월 이성계는 개성의 수청궁에서 고려의 34대 공양왕으로부터 선양의 형식으로 왕위에 오른다. 그리고 1393년에 고조선을 계승한다는 뜻에서 국호를 조선으로 고치고 1094년 10월에 한양으로 천도한다. 그 후 약 100년 후인 1494년에 연산군이 즉위한다.

 

연산군(1494~1506)때부터 선조(1567~1608)때까지 약 110년의 시간은 훈구파와 사림파가 중앙정치세력으로 남기 위하여 피로 얼룩진 큰 혼란기이었다.

 

무오사화(1498년), 갑자사화(1504년), 기묘사화(1519년) 그리고 을사사화(1545년)로 이어지는 조선의 4대사화(4大士禍)가 모두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수많은 사화의 중심에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있고, 그 기묘사화의 중심에 조광조가 있는 것이다. 15세기의 조선은 왕조의 창건과 제도의 정비에 힘쓴 훈구파에 의하여 지배되었다.그러나 15세기 말부터 지방의 사림(士林)들이 중앙정계에 진출하면서 그들은 훈구파와 권력,이념 등에서 극심한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연산군은 양쪽의 세력을 모두 배척하였으나 상대적으로 사림파의 세력은 더욱 커지게 되었고, 마침내 양자의 대립이 표면화되어 무오사화, 갑자사화가 연달아 일어나 견제세력이 없어진 연산군은 사치와 방탕을 일 삼다가 中宗反正으로 쫒겨난다.

 

 

 

 

 反正에 성공한 中宗은 다시 사림파를 중용하는데 조광조는 도학정치(道學政致)를 꿈꾸며 무너진 유교정치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개혁의 방향이 너무 급진적이고 과격하여 中宗마져 그를 불편하게 생각하였고 때마침 반대파의 모함으로 기묘사화가 일어나게 된다.   

                                   

 

이후 사림들은 향촌으로 밀려나게 되지만, 서원과 향약을 바탕으로 향촌에 깊이 뿌리를 내려 명종시절에는 다시 조정의 실권을 잡게 된다.

 

 

정권을 잡은 사림파들 사이에서 다시 정권다툼이 일어나며 이를 붕당정치라고 한다. 붕당정치는 宣祖시절 다시 동인, 서인으로 갈라지고 정권이 대립할 때마다 옥사가 일어난다. 정권이 이렇게 자주 바뀌면서 왕권은 쇄약해지고, 조선은 서서히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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