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림 鷄林
사적 제1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 면적은 7,300㎡이다. 물푸레나무, 홰나무, 휘추리나무, 단풍나무 등의 고목(古木)이 울창하며, 신라 왕성(王姓)인 ' 김씨 '의 시조인 김알지(金閼智)의 탄강(誕降) 전설이 있는 숲이다.
삼국유사에 ' 60년(탈해왕 4) 8월 4일 밤에 호공(瓠公)이 반월성 서쪽 마을을 지나가는데, 마을 옆 숲이 황금 궤(机)에서 나오는 광명으로 가득 차고 흰 닭 한 마리가 울고 있어 탈해왕에게 고하였다. 왕이 즉시 이 숲으로 가서 궤(机)를 열어보니 사내아이가 있어 알지(閼智)라고 이름하였고, 금궤에서 나왔다고 하여 성을 김(金)이라 하였다 '고 하는 기록이 있다.
계림(鷄林)이란 명칭은 숲에서 닭이 울었다는 것에서 연유되었으며, 후에 나라 이름으로도 사용되었다. 신라의 신성한 숲이라고 하여 지금까지 보존되어 오는데, 1000여 그루의 고목(古木)과 1803년에 건립한 비(碑)가 남아 있다.
계림비각 鷄林碑閣
순조 3년인 1803년에 세운 육각형(六角形)의 비각으로, 안에는 계림(鷄林)의 내력과 경주김씨(慶州金氏)의 시조인 김알지(金閼智)의 탄생설화를 새긴 ' 경주김알지탄생기록비 (慶州金閼智誕生記錄碑) '가 있다. 이 비석은 높은 대석과 비신, 개석(蓋石)으로 이루어졌으며, 영의정 남공철(南公轍)이 비문을 짓고, 경주부윤 최헌중(崔獻重)이 글씨를 썼다.
금궤도 金櫃圖
조선 후기의 화가 조속(趙涑)이 김알지(金閼智)의 탄생 설화를 그린 고사인물화(故事人物畵)이다. 크기는 가로 48.8cm 세로 132.4cm의 축화(軸畵)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인조(仁祖)의 지시에 의하여 1656년에 그린 그림이다.
이 금궤도(金櫃圖)는 비단 바탕에 채색을 하였으며, 청록산수의 기법으로 삼각형 모양의 산(山)을 원경에 배치하고 나뭇가지에 걸린 금궤(金櫃), 그것을 쳐다보고 있는 흰색의 닭 그리고 닭우는 소리를 찾아 계림(鷄林)으로 간 호공(瓠公)과 시종이 화면 중앙에 그려져 있다.
고목(古木)은 음영(陰影)을 넣고 입체감이 있게 묘사하였다. 그리고 산은 쌓아 올라가는 산세에 큰바위를 얹은 오대의 거연식(巨然式)의 구성에다 짧게 끊어뜨린 소부벽준(小斧劈蠢)으로 질감을 표현하였다. 닭은 흰색의 호분으로 가늘고 섬세한 필치로 깃털을 묘사하였으며, 인물은 선(線)으로 윤곽을 그리고 그 윤곽을 따라 훈염하였다.
그림 위쪽에 어제(御製)를 김익희(金益熙. 1610~1656)가 다음과 같이 해서체(楷書體)로 적었다. '김익희'는 효종 때 문신으로 1656년 이조판서가 되었지만 7월에 병으로 사직하였으며 12월에 사망하였다. 이로 미루어 글을 쓴 시기는 그가 이조판서로 있던 1656년쯤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림을 그린 조속(趙涑)은 당시 사헌부에 속한 정4품 장령(掌令)의 직책을 맡은 사대부 화가이었다. 사대부 화가가 궁정의 회화 제작에 참여한 일은 드문 일이며, 화원(畵員)식의 청록산수 화풍으로 그린 점 역시 특이하다.
御製 此新羅敬順王金傅始祖 金櫃中得之 仍姓金氏者 金櫃閼千樹上 其下白鷄鳴 故見而取來 金櫃中有男子 繼昔氏爲新羅君也 其孫敬順王入高麗 嘉其來順諡敬順 歲乙亥翌年春 命圖見三國史 吏曺判書臣金益熙奉 敎書 掌令臣趙涑奉 敎繕繪 ..... 이 분은 신라 경순왕 김부(金傅)의 시조로서 금궤 안에서 그를 얻었기에 성을 김씨라고 하였다. 금궤는 나무 위에 걸려 있고, 그 아래 흰 닭이 울고 있어서 보고 가져와 보니 금궤 안에는 남자아이가 있는데, 석씨의 뒤를 이어서 신라의 임금이 되었다. 그의 후손인 경순왕(敬順王)이 고려에 들어오매 순순히 온 것을 가상히 여겨 경순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올해 다음 해 봄 삼국사기를 보고 그리하고 명령하였다. 이조판서 김익희가 교시를 받들어 쓰고 장령 조속이 교시를 받들어 그렸다.
이 어제(御製)에 의하면 이 그림을 제작하라는 지시는 1636년(인조 14) 봄에 이루어졌으나, 실제 제작은 20년 뒤인 1656년에 시행되었다. 그 이유는 1636년 가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유야무야되다가 20년 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김알지'가 금궤에서 태어난 설화를 다루면서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고려에 순순히 나라를 넘겨주어 경순왕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것은 인조(仁祖)가 여러가지 재변(災變)으로 나라가 뒤숭숭하여 위기의식이 고조되자, 신라가 멸망한 역사를 되새기면서 나라를 굳건히 보존하려는 교훈을 얻으려는 목적으로 그림의 제작을 명령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