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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성대

작성자이계묵|작성시간13.02.12|조회수2,589 목록 댓글 0

 

 

 

 

                                         첨성대                   瞻星臺 

 

 

   

                                                 

 

 

 

 

 

 

 

 

 

첨성대는 국보(國普) 제31호 지정되어 있다. 높이 9.17m, 밑지름 4.93m, 윗지름 2.85m의 규모이다. 밑에서부터 4.16m되는 곳의 남쪽 허리에 한 변이 1m인 정사각형의 문이 달려 있다. 꼭대기에는 정자석(井字石)이 2단으로 짜여 있는데, 그 위에 관측(觀測)기구를 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혼천의(渾天儀)같은 관측기구를 설치하고 춘분, 추분,하지, 동지 등의 24절기를 별을 통하여 측정하였고, 정자석을 동서남북의 방위를 가리키는 기준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 첨성대가 제단(祭壇)이었다는 학설도 있다. 삼국유사에 신라 선덕왕 때 건립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경주(慶州)는 교과서에 적혀 있는대로 '찬란한 문화유산의 보고(寶庫)'이다.그러나 바로  이러한 교과서 때문에 경주는 뭇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겨주는 허망의 도시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것이 ' 찬란하다 '는 찬사만 듣고 배워 왔을 뿐,  왜 그것이 그토록 칭송되는가에 대한 근거는 좀처럼 들어 볼 기회가 없었다. 감동은 고사하고 실망 만을 안겨주는 대표적인 유물이 바로 첨성대이다. 교과서에서 동양 최고(最古)의 천문대라고 배운 첨성대가 겨우 10m도 안되는 초라한 규모라는 사실에 망연자실해질 따름이다. 저것도 천문대라고 기어 올라갔다는 말인가 ? 거기에 올라가면 하늘이 가깝게 보이더란 말인가 ? 

 

 

 

 

 

 

 

 

 

 

 

 

 

 

                                                     첨성대의 위치

 

 

 

 

 

 

 

 

 

 

 

 

 

 

 

경주(慶州)시내 인왕동(仁旺洞)에 있는 첨성대는 신라시대로 말하자면 궁성이 있던 반월성 (半月城)과 계림 (鷄林)의 바로 위쪽에 있으며, 대릉원(大陵苑)의 고분군과 석빙고, 안압지와 이웃하고 있다. 즉 서라벌의 주택가나 다운타운이 아니라 관공건물(官公建物)이 모여 있던 곳이다. 거기에 신라의 국립관상대 내지는 천문대가 있던 곳이 첨성대 주변이 된다. 국립기상대에는 별도의 건물이 있었겠지만 신라시대 모든 목조건축들이 그렇듯이 폐허가 되어 사라졌고 지금은 그 상징물이던 첨성대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마치도 폐사지에는 덩그라니 석탑만이 남아 있듯이...

 

 

 

한국과학사의 연구자들은 첨성대의 기능에 대하여 첨예한 의견대립만 계속할 뿐 아직껏 합의에 도달한 결론이 없지만, 유흥준교수는 다음과 같이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만약 지금 서울 서대문에 있는 국립기상대 건물 앞마당에 천문기상관측의 상징물 하나 세운다고 하면 어떤 형태의 조형물이 될까? 설계자들은 이 시대의 천문지식을 최대한 상징해 보려고 고심할 것이다.

 

  

신라사람들이 다다른 결론은 곧 첨성대의 구조이었을 것이다. 첨성대 전체 모양은 대(臺)이었다. 과학사 연구자들은 이것이 병 모양이라고 설명하는데, 그런 것이 아니고 제기(祭器)를 받치는 기대(器臺)에서 따온 것이리라. 신라의 토기 중에는 이 첨성대와 비슷한 형상의 器臺가 여러 개 있다.그러니까 첨성탑(塔), 첨성옥(屋)이 아니라 첨성대가 된 것이다. 거기에 올라가 밟고 섰다고 해서 대(臺)가 아니라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받침이라는 뜻이라는 것이다.   

 

 

 

 

 

 

 

 

 

 

 

 

 

 

 

                                                        별을 보다

 

 

 

 

 

예로부터 별을 보는 데에는 두 가지의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국가의 길흉(吉凶)을 점치기 위하여 별이 나타내는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역법(曆法)을 만들거나 그 오차(誤差)를 보정하기 위하여 별의 운행을 관측하는 것이다. 전자(前者)는 미신적(迷信的)인 점성술(占星術)이며, 후자(後者)는 과학적인 천문학(天文學)에 해당한다.

 

 

우리나라 천문대의 역사는 삼국시대부터 시작되었다. 백제에 점성대(占星臺)라는 천문대가 있었는데, 이 영향으로 경주에 첨성대가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신라의 첨성대는 고대 천문대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것 중의 하나이다. 첨성대의 '첨(瞻)'은 ' 우러러 보다 ' 또는 ' 쳐다 보다 '라는 뜻으로 '첨성'은 ' 별을 살피다 '의 의미이다. 삼국유사에는 ' 이 임금 때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쌓았다 (是王代練石築瞻星臺) '라는 간단한 기록이 나온다.  이 임금이란 선덕여왕을 가리킨다.

  

 

 

첨성대의 몸체는 27단(段)인데 이것은 선덕여왕(善德女王)이 제27대 임금임을 나타내며, 창(창)의 아래위가 각각 12단인 것은 1년 12개월을 표현하며, 합계 24단은 24절기(節期)를, 사용된 돌의 수가 362개인 것은 1년의 날수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또 옛날 사람들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天圓地方思想), 첨성대의 기단이 사각형(四角形)이고 몸체가 원(圓)으로 되어 있는 것은 바로 이 사상의 표현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첨성대는 점성학적인 비중이 컸던 시대에 시작되었다. 경주 첨성대의 용도가 별을 관측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수학적인 내용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탑이라거나, 불교의 우주관인 수미산(須彌山)의 모양을 본따서 만든 제단이라는 설도 제기되고 있으나, 신라시대의 천체(天體)에 대한 관심은 꾸준히 이어져 내려와 조선 世宗 때의 천문관측소인 서운관(書雲館)으로 열매를 맺는다.

 

 

 

 

 

                                                                                           

                                                                               개성  첨성대

 

 

 

 

 

 

 

 

 

 

 

 

 

북한(北韓)의 국보 문화유물 제131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려시대에 천문관측을 위하여 축조한 첨성대로, 고려 왕궁터인 개성 만월대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그래서 서쪽 첨성대라고도 한다. 919년(고려 태조 1) 연경궁을 세울 때 축조된 것으로 추정한다.

 

 

이 첨성대는 네모난 5개의 주춧돌위에 화강석 기둥을 세우고 2.2 x 2.2m 크기의 돌마루를 깐 형태로, 7세기 경에 축조되었던 경주의 첨성대와는 그 구조가 다르다.각 기둥은 크기 0.4 x 0.2 x 2.8m 지면에서 돌마루까지의 높이는 2.3m이다. 땅바닥에서 돌마루까지는 디딤돌이나 사다리로 오르내렸을것으로 짐작되나,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첨성대의 돌마루와 기둥에는 관측기구들을 설치하는 데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름 12cm, 깊이 9cm의 구멍 1개와 지름 4cm, 깊이 3.5cm의 구멍 2개가 있다.

 

 

 

 

 

 

 

 

 

 

 

첨성대의 구조는 기단부, 원주부(圓柱部), 정자형두부(井字形頭部)로 나누어진다. 기단부는 사각형 모양으로 상하 2단으로 되어 있으며, 상단은 한 변이 518cm, 높이 39.5cm인 직육면체 석재 12개로 이루어졌다. 이 기단의 방향은 남쪽 변이 정남에서 동쪽으로 19도 돌아가 있다. 원주부는 총 27단으로 높이는 805cm에 이르며 술병 모양을 하고 있다. 제일 아랫단의 둘레는 1,600cm, 14번째의 둘레는 1,170cm, 제일 윗단의 둘레는 920cm이다. 아래부터 제12단까지는 각 단의 높이가 약 30cm이다. 중앙의 출입구는 제13~15단에 걸쳐 있으며, 한 변의 길이가 약 95cm이다.

 

 

 

 

 

 

 

 

 

 

 

                                                      국보 제 31 호

 

 

 

 

 

1962년 국보제31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9.17m, 밑지름 4.93m, 윗지름 2.85m이다. 밑에서부터 4.16m되는 곳의 남쪽 허리에 함 변이 1m인 정사각형의 문이 달려 있다. 모양은 원통형으로 남쪽 문에 사다리를 걸었던 자리가 있다. 30cm높이의 돌 362개로 27단을 쌓아 만들었다. 내부는 제12단까지 흙이 차 있고, 제19단에서 제20단까지와 제25단에서 제26단까지의 두 곳에 정(井)자형 長大石이 걸쳐 있는데 그 양끝이 밖으로 나가 있다. 제27단 내부의 반원(半圓)에는 판석(板石)이 있고, 맞은편에는 판목(板木)을 놓았던 곳으로 보이는 자리가 있다. 판석은길이 156cm, 너비 60cm, 두께 24cm이다.

 

 

 

 

 

 

 

 

 

 

꼭대기에는 정자석(井字石)이 2단으로 짜여 있는데, 그 위에 관측기구를 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혼천의(渾天儀)와 같은 관측기구를 정상에 설치하고 춘분, 추분, 동지, 하지 등의 24절기를 별을 통하여 측정하였고, 정자석을 동서남북의 방위를 가리키는 기준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에 신라 선덕여왕(재위 .. 632~647) 때 건립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첨성대의 구조

 

 

 

 

 

 

 

 

 

 

 

경주 첨성대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되어 있다. 첫째는 기단부인데, 첨성대 전체를 받치고 있으나 그 밑부분은 흙 속에 묻혀 있다. 이 기단의 외부는 2단으로 깔아 놓은 12개의 판석으로 되어 있고, 천체 모양은 네모 반듯하다. 오랜세월에도 불구하고 동과 돌 사이에 서로 갈라진 틈이 보이지 않는 점으로 보아 돌의 길이가 충분히 길뿐만 아니라 폭도 넓어서 안쪽으로 깊이 들어간 듯하다. 기단부는 남쪽 변이 정남(正南)에서 동쪽으로 19도 정도 돌아서서 있는데, 방향은 북두칠성(北斗七星)을 바라보는 방향과 일치하고 있다. 

 

 

 

 

 

 

 

 

 

 

 

 

 

 

 

 

두번 째 부분은 첨성대의 원통부이다. 기단에서 높이가 약 8m까지 돌을 원통 모양으로 쌓아 올린 부분이다. 그 쌓은 모양이 너무 특이하다 하여 어떤 사람은 중국이나 중동지역의 것을 본따서 만든 것이라고 말하지만 이와 똑같은 축조물은 중국이나 다른 지역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지적하고 있지 못하다. 유리병 모양으로 밑부분이 굵고 위로 올라가면서 가늘어지는 이 독특한 모양은 신라인들의 창작이며 모방은 아니다. 기단 위에 있는 제1단의 둘레는 약 15.5mm인 원인데, 이로 올라가면서 둘레는 조금씩 줄지만 돌의 두께는 거의 같다고 한다.

 

 

 

 

 

 

 

 

 

 

첨성대 내부(內部)도 재미있는 구조이다. 우선 12단과 15단 사이에 있는 출입구(出入口)를 들어가 보면 제 12단까지 그 밑은 흙으로 꽉 차 있다. 지금까지 이 흙을 파 본 사람은 없는 것 같다. 한편 제12단 위로 속이 비어 있는 원통속 같은데, 원통의 내부로 뻗은 돌들의 넓이가 각각 달라서 안에서 보면 들쭉날쭉하다고 한다. 따라서 좀 조심스럽기는하지만 이돌들의 넓이가 각기 달라서 안에서 밟고 올라갈수 있도록 만든 것 같다. 

  

 

이렇게 돌을 제 12단까지 쌓아 올린다음 제13단에서 제 15단 사이에는 네모난 구멍을 만들었다. 이 네모난 구멍 (약 95×95cm의 크기)은 정남(正南)이 아니라 약간 서쪽을 향하고 있다. 이 구멍은 관측자들이 첨성대 꼭대기에 올라가기 위한 출입문이다. 다시 9단을 더 쌓아 올린 다음 제25단과 26단에는 네 방향으로 밖을 향해 튀어 나온 돌이 있다. 이 두 단은 마지막 단인 제27단의 높이에 맞는 바닥돌을 얹어 놓기 위한 지지대(대들보)인 동시에 몸통의 돌들이 이완하지 않도록 하는 역할도 하기 위한 것이다.    

 

 

 

 

 

 

 

 

 

 

 

몸통은 기단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제18단까지는 약간씩 가늘어지다가 제 19단에 이르면 거의 같은 둘레를 지키면서 27단까지 올라간다. 이 사이에 사용된 돌의 두께는 거의 같으나 길이는 약간씩 서로 다르다. 각기 밖으로 노출된 부분은 그 단의 돌레와 같은 곡율(曲率)로 둥글게 다듬어져 있다. 마지막 제27단의 둘레는 약 8.95m이다 석재의 수는 기단부를 제외한 1~27단까지가 362매, 지대석 8매, 기단석 12매, 상부의 정자석 8매, 중간의 정자석 8매, 남쪽 문주 2매, 27단의 판석 1매로 도합 401매로 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몸통 위에 정자(井字) 모양을 하고 있는 정상부이다. 이것을 눕혀 놓은긴 돌이 2단으로 겹쳐진 부분이다. 정자 모양이라고 하는 이유는 가장 위에 있는 돌 끝이 서로 물리면서 끝 부분이 약간 밖으로 뻗어 나와있기 때문이다. 이 2단으로 눕힌 돌은 서로 벌어지지 않을뿐만 아니라 밑에 있는 몸통의 돌들이 흩어지지 않도록 무겁게 누르는 역할도 함께 하고 있다. 

 

 

따라서 이 장치야말로 이 신라 첨성대가 1300여 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지내오는 동안 지진으로 인한 지각변동이 여러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잘 견디어 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첨성대보다 약 700여년이나 뒤늦게 만든 조선시대의 광화방 관대의 윗부분이 서로 갈라져 틈이 생긴 것과 견주어 보면 신라인의 건축술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구조의 상징성

 

 

 

 

 

첨성대는 신라 선덕여왕때 건립된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관측대이다. 그러나 막상 그 앞에 가보면 높이 10m도 안되는 초라한 규모일 뿐이다. 이것도 천문대라고 올라가 하늘을 관측하였다는 것인지... 차라리 언덕 위에 올라가 볼 일이지 !

 

 

 

 

 

 

 

 

 

 

 

첨성대의 가치는 그 구조(構造)에 있다. 첨성대에는 자연에 관계되는 많은 상징성과 그 변화의 기준을 잡아내는 관측기능이 있다. 첨성대는 2단의 기단(基壇) 위에 두께 30cm의 돌을 27단으로 쌓아올린 병 모양의 형태로 정중앙에는 네모난 창이 뚫려있고, 꼭대기에는 정자석(井字石)이 모자처럼 얹혀있다. 이 정자석은 신라 자오선의 표준으로 각면(各面)이 정확하게 동서남북(東西南北)의 방위를 가리키고 있다. 

 

 

정남으로 뚫린 중간의 창문은 춘분(春分)과 추분(秋分)에 태양이 남중(南中)할 때 광선이 창문 속까지 완전히 비치고, 하지(夏至)와 동지(冬至)에는 창 아랫부분에서 광선이 완전히 사라진다. 즉, 춘분과 추분의 분점(分點)과 하지와 동지의 지점(至點)을 정확하게 알려준다.

 

 

 

 

 

                                                      구조의 상징성

 

 

  

 

 

첨성대 구조의 상징성을 살펴보면 아래는 네모지고, 위가 둥근 것은 천원지방(天圓地方)을 의미하며, 첨성대를 이루고 있는 돌의 총수는 362개로 1년을 상징한다. 돌을 쌓은 27단과 꼭대기의 정자석을 합하면 28단으로 별자리의 28수(宿)와 통하고 거기에 2단으로 된 기단부(基壇部)까지 합하면 30단이 되어 한 달 길이에 해당하고 있다. 

 

 

가운데 난 창문을 기준으로 아래 위가 12段으로 나눈어지는데 이는 1년 12달과 24절기를 의미한다. 참으로 절묘한 구조이다. 그리고 형태미에 있어서는 얼마나 아담하고 곡선미는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리고 첨성대는 맨 위 정자석의 길이가 기단부의 꼭 절반일 정도로 치밀하게 설계되었다. 이러한 상징성을 염두에 두고 첨성대를 바라보면 신라사람의 과학과 수학과 예술에 대한 지식과 그들의 조화를 읽을 수 있다. 

 

 

 

 

 

                                          천원지방                  天圓地方

 

 

 

 

 

 

 

 

 

 

 

                                                   첨성대에 관한 기록

 

 

 

 

 

 

첨성대에 관한 역사적 기록으로는 '삼국유사'의 선덕왕지기삼사조(善德王知幾三事條) 끝에 '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쌓았다. (是王代練石築瞻星臺) ' 라는 기록이 처음이다. 이어 '고려사'에도 그에 관한 기록이 있다.

보다 자세한 기록은 '세종실록'에... ' 첨성대는 경주부의 남쪽 월남성에 있는데, 당태종 정관(貞觀) 7년 계사년(癸巳年. 633년)에 신라 선덕여왕이 쌓은 것이다. 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위는 네모지고아래는 원형이다. 높이가 19.5척, 위의 둘레가 21.6척, 아래 둘레가 3.7척이다. 가운데를 통하게 해서 사람이 올라가게 되어있다 '라는 설명이 있다.

 

 

 

첨성대의 용도를 최초로 설명한 사람은 아마도 조선시대 역사학자  안정복(安鼎福.1712~1791)일 것이다. 그는 그의 저서인 ' 동사강목 (東史綱目) '에서 첨성대를 축조하였다는 사실과 그것은 ' 천문을 살피고, 요망스러운 기운을 살피기 위하여 ' 축조한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후대의 학자들이 안정복의 설명을 인용하면서 ' 천문을 살피고 '라는 대목에만 주목하였지, 정작 주요한 대목인 ' 요망스러운 기운을 살피기 위하여 '라는 구절을 누락 또는 무시하였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첨성대는 천문대가 아니라 고대국가의 제천의식을 위한 제단(祭壇)이었다는 주장이 그 근거를 얻고 있는 것이다. 

 

 

 

  

 

 

 

 

 

 

정자형(井字形)의 두부(頭部)는 상하 2단의 정자형 구조로, 각 段은 306 x 32 x 32cm 크기의 석재를 4개씩 정자형으로 물려 놓았다. 정자석의 내부에 220x64cm의 공간이 확보되므로 하부에 나무판을 깔았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중앙의 출입구는 제13~15단에 걸쳐 있으며, 한 변의 길이가 약 95cm이다. 출입구의 방향은 정남쪽에서 동쪽으로 16도 돌아가 있다. 출입구 아랫변의 돌은 커다란 평판석으로 되어 있으며, 13단 이상은 내부가 텅 비어있다.

 

 

 

 

 

 

 

 

 

 

그리고 평판석에는 사다리를 걸쳤다고 생각되는 홈이 출입구 양쪽에 파져 있다. 13~27단까지 내부가 비어 있으므로 관측자가 사다리를 설치하고 아래위로 오르내렸을 것이다.

 

 

 

 

 

 

 

 

 

 

                                               첨성대는 천문대가 아니다 ?

 

 

 

 

 

 

첨성대의 위치는 경주의 중심지로부터 동남쪽으로 30리 떨어진 평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옆으로는 반월성(半月城)을 끼고 있다. 석재는 화강암으로 높이는 9.17m이고 바탕의 지름은 5.17m이다. 상층부의 지름은 2.5m이다. 첨성대가 세워진 연대는 신라 27대 선덕여왕 16년 (서기 647년)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천문대가 아니라는 근거

 

  

 

 

 

첫째 ...  천문대로 보기에는 그 위치가 적합하지 않다. 별을 관측하기 위해서는 좀 더 높고 한적한 곳을 찾아가야 한다는 것은 상식적인 일이다. 그런데 첨성대는 경주의 평지에, 게다가 반월성을 끼고 있다. 별을 관측하겠다는 사람이 어떻게 낮은 지대에다가, 그것도 성 아래에 관측소를 세울 생각을 하였을까?

 

 

둘째 ...  돌의 다듬질에 문제가 있다. 햇빛이 잘 비치는 날, 첨성대의 남쪽으로 뚫린 창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 보면 안쪽의 석재는 전연 다듬어지지 않았다. 이 건축물 안에서 사람들이 활동(관측)하기 위하여 지어진 것이라면 바깥 표면을 다듬지 않는 일은 있을 수 있어도, 안을 다듬지 않는 일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일 것이다. 더구나 위로 올라 갈수록 직경이 좁아져서 사람이 운신하기 조차 협소한데, 돌에 부딪쳐 생기는 부상을 막기 위해서라도 안을 다듬었을 것이다. 안을 다듬지 않고 밖을 다듬었다고 하는 것은 이 건물을 밖에서 사용하기 위해 지었다는 분명한 증거가 된다.

 

 

셋째 ... 첨성대는 별을 관측하기가 매우 불편하다. 첨성대의 정상에서 별을 관측할 요량이었다면 처음부터 사다리를 타고 위로 올라갈 일이지, 중간에 사람이 드나들기에 너무도 비좁은 문을 뚫고 그곳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위로 올라갈 이유가 없다. 입구의 문지방이 마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문을 통하여 사람들이 드나든 것은 분명하다.  

 

 

 

 

 

 

 

 

 

 

 

 

 

                                                                   요망스러운 기운을 살피는 곳

 

 

 

 

 

 

첨성대는 신라시대 국립기상대의 근처에 세웠던 상징적 조형물이라는 것이 유흥준교수의 해석이고, 조선시대의 역사학자 안정복(安鼎福.1712~1791)은 그의 저서 '동사강목'에서 첨성대를 축조하였다는 사실과 함께 그것은 ' 천문을 살피고 요망스러운 기운을 살피기 위해 지은 것 '이라고 설명하였다. 즉, 첨성대는 고대 부족국가의 제천의식을 위한 제단(祭壇)이라는 주장이다. 첨성대를 제단이었다고 보는 견해의 논리적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 첨성대는 왜 평지의 반월성 밑에 위치하고 있는가? 어는 고대국가이든 당시에는 군사들이 전쟁터로 떠나기에 앞서 승리를 기원하는 의식을 반드시 치루었다. 그 장소는 쉽게 의식을 치를 수 있는 城과 가까운 곳 일수록 좋았다. 고대국가에서 전쟁은 종교적이고 축제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고, 거기에는 무속적이고 주술적인 요인들이 필수적으로 가미될 수 밖에 없었다. 

  

 

둘째 ... 신라 중심의 역사를 기록하였던 삼국사기의 金富植은 첨성대에 관하여 전연 언급하지 않았고, 신라역사에 대하여 그토록 애착을 가지고 있던 일연(一然)스님도 삼국유사에서 선덕여왕이 첨성대를 세웠다는 말만 남긴채 일체의 부연 설명이 없었다는 점은 이해하기 힘들다. 그것은 유학을 믿는 삼국사기의 김부식이나 스님 신분의 일연(一然)의 눈으로 볼 때 그같은 제천의식 (祭天儀式)은 ' 음란한 짓 '으로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셋째 ...  첨성대를 불교와 관련시키는 것도 무리이다. 첨성대를 이루고 있는 27층의 적석(積石)이 점성술의 28수(宿)와 관련이 있다거나, 첨성대의 전체 층 수인 31층인 것이 불교의 33천관 관련이 있다거나, 그 모양이 수미산(須彌山)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추측에 불과하다. 정말 관련이 있다면 28이나 33의 숫자에 딱 떨어지게 맞추어야지, 왜 27이나 31로 하였을까? 이처럼 엇비슷한 숫자는 큰 의미를 부여하기 힘들다.  첨성대가 진실로 불교적 사고에서 축조되었다면 그 문(門)은 서방정토가 있는 서쪽을 향해야지 남쪽을 향하고 있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또 첨성대가 불교의 상징 조형물이었다면 일연스님이 외면할 리가 없는 것이다.

 

 

 

 

 

 

                                             불경에 나오는 수미산 모습

 

 

 

 

 

넷째 ...  그렇다면 門은 왜 남쪽으로 났는가? 그것은 제주(祭主)와 부락민들이 그 앞에서 북쪽을향해 제사를 드렸음을 의미한다. 북쪽의 무엇을 향해 제사를 드렸을까? 그것은 북두칠성이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첨성대라는 이름이 붙여졌을 것이다. 북두칠성은 영원과 장생(長生)을 기원하는 노장(老莊)사상의 상징이었으며, 첨성(瞻星)이라는 말도 ' 별을 관측한다 '는 의미가 아니라 ' 별을 우러러 본다 '는 사전적 의미를 갖고 있다. 첨(瞻)은 우러러 본다는 뜻이다. 그들은 별을 우러러 보았지 꿰뚫어 본 것이 아니었다.

  

 

다섯째 ... 그러면 첨성대 맨 위에 있는 우물 정(井)자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글자 그대로 우물로서 비를 기원하는 기우(祈雨)의 의미를 담고 있다. 관개가 발달하지 않고, 천수답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농경사회인 신라로서는 기우제야말로 중요한 국가행사이었다.

 

 

 

 

역사학이란 결국 풀이(解釋)의 학문일 것이다. 따라서 이 풀이가 잘못되면 역사는 그 본래의 뜻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 갈 수 밖에없다. 첨성대가 별을 신앙적으로 우러러 보던 곳이었는가? 아니면 과학적으로 별을 관측하던 곳이었는가의 해석에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정신사(精神史)로 볼 것인가 아니면 科學史로 볼 것인가를 결정하게 될 것이고, 이에 따라 그들의 결론은 전혀 다른 곳으로 흘러 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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