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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사 이항복

작성자이계묵|작성시간13.02.12|조회수893 목록 댓글 0

 

 

 

 

                                              백사 이항복                 白沙 李恒福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 1556~1618)은 조선시대에서도 특히 친숙한 인물이다. 그의 이름이 낯설더라도 ' 오성과 한음 '이라고 말하면, 대부분 알고 있다. 부연이 필요 없겠지만 오성(鰲城)은 오성부원군 이항복(李恒福)이고, 한음(漢陰)은 한원부원군 이덕형(李德馨)이다.

 

 

서로 다섯 살 차이인 두 사람은 뛰어난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던 16세기에도 우뚝한 존재이었다. 그러한 위상과 능력 때문에 이항복은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당댕(당爭)의 격동에서 중심적 역할을 맡을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임진왜란을 극북하는 데 뛰어난 외교적 활약을 펼쳤지만, 당쟁의 여파로 유배지에서 일생을 마쳤다.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은 조선 중기의 문신(文臣)이요 정치가이었다. 본관은 경주, 자는 자상(子常), 호는 백사(白沙), 필운(弼雲), 청화진인(淸化眞人), 동강(東岡), 소운(素雲),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우참찬을 지낸 이몽량(李夢亮)의 아들이며, 도원수 권율(權慄)장군의 사위이다.

 

 

아버지 이몽량(李夢亮)은 우애가 깊고 너그러운 인물이었던 것 같다. '명종실록'의 졸기(卒記)에는 일찍 세상을 떠난 형과 혼자 사는 누이가 가난하였는데, 이몽량은 그 조카들을 모두 거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명종실록. 명종 19년 10월4일). 아버지가 참찬이라는 고관이었지만, 이항복은 부모를 일찍 여의었다. 아버지는 그가 8세 때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도 7년 뒤에 죽었다. 그 후 그는 누이의 집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

 

 

 

 

 

형조판서와 우참찬을 지낸 이몽량(李夢亮)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태어나서 사흘 동안은 울지도 않고 젖을 먹지 않아 모두들 걱정하였는데, 점성술사가 보고 장차 큰 인물이 될 아기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영특하고 자라면서는 해학에도 뛰어나 만인의 귀여움을 받았다.

 

 

9세 때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16세에는 어머니마저 잃는  불행을 당한다. 어린 시절에는 놀기를 좋아하여 동네 불량배의 우두머리로 세월을 헛되게 보냈으나 어머니의 교훈으로 학업에 정진하게 된다.

 

 

영의정을 지낸 권철(權轍)이 이항복의 이웃에 살고 있었다. 이항복의 인물 됨됨이를 알아 본 권철은 아들 권율(權慄)에게 이항복을 사위로 삼을 것을 권하여 이항복은 19세에 권율(權慄)의 딸과 결혼하였다. 1580년(선조 13) 문과에 급제하여 1581년 검열(檢閱)이 되었으며, 이 해에 이덕형도 20세에 문과에 乙果 ( 4등부터 10등 사이) 1인으로 급제하여 함께 벼슬을 시작하였다.   

 

 

 

 

 

 

 

 

 

이항복은 1580년(선조 13)에 24세의 나이로 급제하였다. 그 때 조정의 중심인물은 율곡 이이(율곡 이이)이었다. 20세 연상의 대정치가 '율곡 이이'는 이항복과 이덕형 등을 홍문관(弘文館)에 추천하였다. 그 뒤 기축옥사(己丑獄事  .. 선조 때 정여립의 모반으로 일어난 동인과 서인의 당쟁. 동인들이 많이 희생되었다)가 일어나기 전 까지 이항복은 사간원 정언, 이조좌랑, 홍문관직제학, 우승지 등 주요한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앞서 말했듯이 62년에 걸친 이항복의 생애에서 그 후반을 구성하고 있는 주요 사건은 임진왜란(壬辰왜亂)과 당쟁(黨爭)이었다. 그 사건들은 그 규모와 기간에서 각각 동아시아와 국내를 전체적으로 지배하였다. 기축옥사(己丑獄事. 1592년)와 임진왜란(1592년)이 일어났을 때 이항복은 30대 중반의 촉망받는 관원이었다. 그가 그 사건들의 중심에 섰던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에 가까웠다.    

 

 

 

 

 

                                                      이항복의 墓

 

 

 

 

1975년 경기도 기념물 제24호로 지정되었다.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금현리 산 4번지 화산 들 옆 작은 구릉에 있다. 부인 안동권씨와 함께 묻혀있는 쌍분(雙墳)이고, 묘제(墓制)에 특성은 없는 일반 묘와 같으며, 묘비, 상석, 망주석, 문인석 등이 배치되어 있다. 비탈 아래 약 20m 지점에는 앞면 3칸, 측면 2칸의 영정을 모신 사당(祠堂)이 있으며, 사당의 오른쪽에는 1652년(효종 3)에 세운 신도비가 있다. 

 

 

 

 

 

 

 

 

 

 

 

이항복(李恒福)은 결국 북청(北靑)의 유배지에서 생(生)을 마치고 이곳 포천의 선영에 묻혔다. 그의 " 행장 "에는 그의 죽음 이후에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조문하는 인근 고을의 선비와 서민들의 숫자를 기억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하였으며, 함흥 및 영흥 등 북방의 선비들이 제문을 보내 치제하였고, 영남의 선비들도 부의를 보냈다고 한다. 이들은 모두 " 公이 평소에 알지 못했던 사람들 "이었다고 한다. 아울러 북청 및 포천의 인사들이 심지어는 공을 위해 재목을 모아서 사당(祠堂)을 건립하기에 이르자, 나라에서 이를 금(禁)하였으나 막을 수가 없었다고 하였으니, 당시 이항복에 대한 민심이 어떠했는지는 미루어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이항복의 묘역은 현재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금현리 산 4번지에 아담하게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 백사문집 "에는 이 포천의 묘역과 관련하여 이항복 자신의 흥미로운 기록이 남겨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그는 자신의 묘(墓)에 대하여 이렇게 가훈(家訓)을 남기고 있었다. 

 

 

 

 

 

나의 선영(先瑩)은 조역(兆域)이 협착한데다 묘를 쓴 곳이 점차 넓어져서 더 이상 남은 땅이 없다. 그래서 항상 마음 속으로 "  내가 죽은 뒤에 자손이 미약하면 어떻게 다른 산을 따로 얻어서 영역(瑩域)을 정할까 "하고 생각하여 이 일을 깊이 근심하였다. 그런데 하루는 우연히 교수 박상의(朴尙義)와 이야기를 하다가, 이 일에 대해 언급하였을 때 그가 인하여 말하기를 " 내가 옛날에 포천을 지나다가 귀문(貴門)의 선영을 보았는데, 지금 이미 묘를 쓴 곳은 다만 지산(支山)일 뿐이고, 본종산(本宗山)의 복지(福地)는 버려두고 쓰지 않았으므로, 내가 마음 속으로 항상 괴이하게 여겼었다 "고 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뛸 듯이 매우 기뻐 조카 탁남(擢男)으로 하여금 말을 대령하게 해서 박상의를 맞이하여 함께 포천으로 가서 구경하고 그 산에 자리를 잡아 나의 신후지지(身後之地)로 정하였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여기에 기재해서 후일의 참고로 삼고자 하니, 내가 죽은 뒤에 여러 자식들은 오직 법식에 맞추어 자리를 정하고 날짜를 잡아 장사를 지내기만 하면 될 것이다. 감히 함부로 이의(異義)를 일으켜 가훈(家訓)을 어지럽히는 일이 있어서야 되겠는가. 나의 이 짤막한 이야기를 볼지어다. 

 

 

                                           

 

 

 

 

 

 

 

 

 

 

 

                                                이항복의 집터 .. 필운대

 

 

 

 

 

 

 

 

 

 

 

 

이항복이 살던 곳으로 필운(弼雲)은 그의 호(號)이다. 종로구 필운동의 배화여자고등학교 뒤뜰에는 큰 암벽이 있는데, 그 왼쪽에 " 필운대(弼雲臺) "라는 정자(正字)가 크게 새겨져 있고, 가운데에 시구(詩句)가 새겨져 있으며, 오른쪽에 10명의 인명(人名)이 나열되어 있다.  필운(弼雲)은 중종 때 명나라 사신들이 인왕산을 나름대로 부른 데에서 비롯되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그 봉우리 하나를 필운대라고 불렀다. 필운대는 원래 권율(權慄. 1537~1599)장군의 집터이었는데, 권율장군의 무남독녀와 결혼한 이항복이 물려 받았다. 

 

 

 

 

 

 

 

 

 

 

 

 

 

                                              1750년 경 겸재 정선이 그린 필운대

 

 

 

 

 

 

 

 

 

 

백사 이항복이 젊었을 때, 당시 조정을 농단하던 어떤 권신(權臣)에게 " 내 집에는 아침에 새벽 안개가 일어나고, 저녁에 석양이 비껴들며, 낙락장송이 돌 틈에서 자라있는 괴석(怪石)이 있다 "고 자랑을 하였다. 이에 그 권신(權臣)이 높은 값을 쳐서 사려고 하자, 백사 이항복은 남산 잠두봉(蠶頭峰)을 가리키며 " 저 것이니 가져가라"고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잠두봉은 남산의 봉우리 생김새가 누에 같다고 하여 붙은 별명이다.

 

 

 

 

 

 

 

 

 

 

 

위 글은 이항복의 후손이며, 고종(高宗)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李裕元)이 지은 것이다. 바위 오른쪽에는 동추 박효관(同樞 朴孝寬) 등 9명이 공사(工事)를 감독하였다고 새겨져 있다. 봄에 이곳에서 한양을 내려다 보면 복사꽃이 무리를 지어 피어있는 모습이 잘 보였다고 한다. 이런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시(詩)를 지으며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지금은 배화여고(培花女高) 건물에 가려 시내가 보이지 않는다.

 

 

 

 

           아조구거후예심     我祖舊居後裔尋     우리 할아버지 옛날 살던 곳에 후손이 찾아 왔는데

           창송석벽백운심     蒼松石壁白雲深     푸른 돌벽에는 흰 구름이 깊이 잠겼도다

           유풍불진백년구     遺風不盡百年久     끼쳐진 풍속이 백년토록 오래 전했으니

           부노의관고역금     父老衣冠古亦今     옛 조상들의 의복과 모자가 지금까지 전해진다.

 

 

 

 

 

 

 

 

 

 

 

 

 

 

 

 

                                                이항복의  불우한  末年

 

 

 

 

 

 

 

백사 이항복 하면 " 오성과 한음 '을 떠 올리며 유쾌하고 행복한 일생을 보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한음 이덕형과의 여러 일화는 어린 시절 한 때에 불과하다. 실제로 "백사집'이나 "한음문고" 어디에도 기발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다.

 

 

두 사람은 모두 정승(政升)의 자리에 오를 정도로 출세한 삶을 살았지만, 모두 말년(末年)은 불우(不憂)하였다. 1671년 광해군(光海君)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한 사건은 잘 나가던 두 사람의 발목을 잡았다. 폐위(廢位)를 반대한 이덕형은 쫒겨나 지방에 내려가 살다가 여생을 마쳤다. 폐위 반대 상소를 올렸던 이항복은 더 불우하였다. 함경도의 북청으로 유배를 떠난 지 5개월만에 병으로 죽었던 것이다.

 

 

이항복의 삶과 생각은 그의 문집 " 백사집(白沙集) "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 책에도 유배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의 유배생활을 어떠하였을까? 그 자세한 기록은 제자 정충신(鄭忠信)이 쓴 북천일록(北遷日錄.. 원제는 백사선생북천일록)에 나와 있다.

 

 

 

 

 

                                          북천일록                   北遷日錄

 

 

 

 

 

 

 

 

 

 

 

 

조선 전 국토를 쑥대밭으로 만든 임진왜란(壬辰倭亂)과 그 직후 광해군(光海君) 시대에 조선 정계에는 치열한 권력 암투가 전개되었다. 특히 광해군 시대는 선조(宣祖)의 계비(繼妃)인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위(廢位) 문제를 둘러싸고 피비린내가 진동하였다.  

 

1671년 표면화된 이 정쟁(政爭)에서 이항복은 " 정사헌의(丁巳獻議) "라는 글을 광해군에게 올려 폐모론(廢母論)을 극력 반대하였다. 하지만 이는 광해군의 뜻이 아니었다. 광해군은 백사 이항복의 유배(流配)를 명령한다.  북천일록의 기록에 따르면 ... 이항복의 유배(流配) 길은 결정 과정에서부터 우여곡절이 많았다. 처음에는 " 관직삭탈 "에 그쳤으나, 반대파들의 입김이 거세지면서 " 중도부처(中道付處 .. 거주 제한 조치) " 그리고 다시 " 원찬(遠竄 .. 원거리 유배)으로 처벌의 강도가 높아졌다. 유배지도 평안도 창성에서 함경도 경원, 삼수 등 여러 번 바뀐 뒤에야 북청(北靑)으로 최종 결정되었다. 청(淸)나라와 될 수 있으면 먼 곳을 택하려는 이유이었다. 

 

 

 

 

 

 

 

 

 

이렇게 하여 이듬해인 1618년 광해군 10년 1월11일, 이항복은 경기도 포천에 있는 선산에 성묘한 것을 시작으로 함경도 북청을 향해 유배를 떠나게 된다.  1월18일 오후 북청으로 가는 길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철령에 이항복은 올랐다. 이 때 읊은 시조가 " 철령 높은 재(고개) "이다.

 

 

 

 

                                            철령(鐵嶺) 노픈 재예 자고가는 뎌 구름아

                                              고신원루(孤臣寃淚)을 비 삼아 쒸여다가

                                              님계신 구중궁궐의 쁘려본들 엇더리

 

 

 

 

조정의 원훈대신인 그의 유배길에는 심복이자 제자인 정충신(鄭忠信. 1576~1636)이 수행(隨行)하였다. 병졸(兵卒)에서 시작하여 포도대장과 경상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하게 되는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정충신은 이항복이 북청 유배지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몇 달을 보내다가 중풍이 재발해 1618년 5월 13일 이항복이 죽을 때까지는 물론이고, 선산(先山)에 묻힐 때까지 그의 운구(運柩) 행렬을 따라 이항복과 함께 했다. 정충신은 이 모든 과정을 일기로 남겼다. 북천일록(北遷日錄)이다.

 

 

 

 

 

                                                       정충신

 

 

 

 

 

 

이 북천일록(北遷日錄)에서 정충신(鄭忠信)은 철령(鐵嶺)에 오른 백사(白沙)가 지은 이 시조에 대하여 " 이노래가 서울 안에 전해 퍼지니 궁궐 안 사람들이 모두 불렀다. 어느날 광해군(光海君)이 뒤뜰에서 잔치를 벌이다가, 주흥(酒興)이 무르익자 이 곡조를 듣고는 누가 지었는지를 물었다. 궁궐 사람들이 사실대로 대답하니 임금은 슬픈 기색을 띠고는 우울해 하더니 눈물을 흘리면서 술자리를 파하고 말았다"는 해설을 붙였다.

 

 

마침 이항복이 유배를 떠난 때가 한겨울이라 그 행렬이 고되기는 했으나, 유배가 우리의 상식처럼 고난(苦難)의 길만은 아니었다. 이항복이 워낙 정계의 거물인지라 지나는 곳마다 손님접대를 하였다.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시킨 대북파(大北派)는 이항복에 대하여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그의 유배지를 관할하는 지방관을 자파(自派)의 인물로 교체(交替)해 버리기도 하였다. 이항복은 이름난 기생들과 담론을 나누며 시작(詩作)을 즐기기도 하였다. 

 

 

 

이 북천일록(北遷日錄)에서 또 하나 생생한 대목은 당시 사대부(士大夫)의 장례(葬禮) 제도에 관한 증언이다. 관곽(棺廓)은 어떤 나무를 어떤 크기로 해서 만들었는지를 보여주며, 무덤의 축조에 사용된 회(灰)는 경기도 양주지방에서 캐왔다는 사실도 드러난다  

 

 

 

 

 

 

 

 

                                                 정충신의 갑옷

 

 

 

 

 

정충신(鄭忠信. 1576~1636)은 조선의 무신(武臣)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 17세의 나이로 전라도 광주목사 권율(權慄) 밑에서 활약하였다. 당시 권율의 보고서를 가지고 의주(義州)로 피난 중이던 선조(宣祖)에게 갔다가 이항복을 만나게 되고, 이항복의 주선으로 학문과 무예를 닦았다. 그 해 겨울 무과에 급제하였다. 1624년 이괄의 난(李适의 亂) 때 도원수 장만(張晩)의 휘하에서 이괄의 군사를 무찔러 진무공신(振武功臣) 2등이 되었고 금남군(錦南君)에 봉해졌다. 광주광역시 금남로(錦南路)는 그의 봉호에서 따와 이름을 지은 것이다.

 

 

 

 

 

 

 

 

 

 

 

 

 

 

                                              백사실 .. 이항복의 별장터 ?

 

 

 

 

 

 

 

 

 

 

 

 

 

 

백사실계곡의 정식 명칭은 백석동천(白石洞天)이다. 백석동천은 조선시대 양반들의 별서(別墅)가 있었던 곳이다.  자연경관이 수려한 곳에 건물터와 연못 등이 남아 있으며,, 인근에 백석동천(白石洞天), 월암(月巖) 등 각자(刻字) 바위가 있다.

 

 

  

 

 

 

 

 

 

 

 

백석동천의 백석(白石)은 백악(북악산)을 의미하고, 동천(洞天)은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을 뜻한다. 한편 백석동천은 우리에게 " 백사실 계곡 "으로 불리우면서 이항복의 별장지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는 이항복의 호(號)가 백사(白沙)인 것에서 유래하여 구전(口傳)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이곳에는 연못과 육각정의 초석이 그대로 남아있고, 그 뒤 높은 곳에는 사랑채의  돌계단과 초석이 잘 남아있다. 

 

  

 

 

 

 

 

 

 

 

 

 

 

 

 

 

 

 

 

 

 

 

 

 

 

왕이 사는 궁궐 뒷편에 이렇게 너른 별서(別墅 .. 요즘의 별장)를 유지한 사람은 과연 누구이었을까? 인근에 안평대군의 무계정사터, 흥선대원군의 석파정이있으니, 이곳 역시 세도가의 소유이었을것이다. 연못 근처 바위에 18세기의 文人 이광려(李匡呂)의 호(號)인 월암(月巖)을 새긴 각자(刻字)바위가 있고, 그의 문집에 이 백사실터를 묘사한 듯한 시(詩)가 있으므로 조성시기를 18세기 즈음으로 추정할 뿐이다. 백사 이항복의 별서지라는 말이 있지만 기록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임진왜란과 이항복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이항복은 도승지(都承旨)로 선조(宣祖)를 의주(義州)까지 호위하여 오성군(鰲城君)에 봉해졌다. 그리고 두 왕자를 평양까지 호위해 형조판서로 특진하면서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겸하였다. 조정에서 왕에게 함흥으로 피난하기를 청했을 때 함흥은 명나라와 교통할 수 없으므로 영변으로 피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또한 이덕형과 더불어 명나라에 속히 구원을 청하기를 주청하였고, 윤승훈을 해로(海路)로 호남지방에 보내어 근왕병(勤王兵)을 일으키게 하였다. 

 

 

명나라에서는 조선이 왜병(倭兵)을 끌어들여 명나라를 침공하려 한다는 의혹을 가지고 있었으나, 병부상서 석성(石星)의 조사 후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고 군대를 파견하였다. 이후 이항복은 5차례에 걸쳐 병조판서를 지내면서 군(軍)을 정비하였다. 

 

 

그 뒤 문홍도(文弘道)가 유성룡이 휴전(休戰)을 주장하였다고 주장하면서 탄핵(彈劾)하자, 자신도 휴전에 동조(同助)했다면 사의(辭意)를 표했으나 도원수 겸 체찰사에 임명되어 남도 각지를 돌며 민심을 선무하였다. 1600년에 영의정에 오르고 다음 해 호종공신(扈從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1602년 정인홍, 문경호 등이 성혼(成渾)이 최경영을 모함하고 살해하려고 했다면서 성혼을 공격하자, 이항복은 성혼의 무죄를 변호하다가 정철(鄭澈)의 당(堂)이라는 혐의를 받아 자진하여 영의정에서 사퇴하였다. 그리고 1608년 다시 좌의정에 임명되었다.   

 

 

 

 

 

 

 

 

 

 

 

                                           백사집                     白沙集

 

 

 

 

 

 

 

 

 

 

 

 

백사 이항복의 시문집이다. 1629년(인조 7)에 강릉에서 간행한 강릉본과 진주에서 이항복의 제자 정충신(鄭忠信)이 간행한 진주본, 1603년에 장유(張維)가 편집한 중간본, 5대손인 종성(宗城)이 최종 정리한 판본 등이 있다.

 

 

모두 목판(木板)으로 인쇄되었으며, 최종본은 30권 15책이다. 저자의 현실 인식과 그 개선책, 정치적 상황에 대한 기록 등이 시, 의(議), 소차, 잡저 등에 실려 있다. 시의 "일출도문만사회(一出都門萬事灰)"는 1619년(광해군 11) 대북파(大北派)가 추진하였던 인목대비(仁穆大妃) 폐위 움직임에 반대하여 북청(北淸)으로 귀양가면서 쓴 것으로, 나라와 백성의 앞날을 근심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백사북천일록"과 더불어 당시의 정황을 살피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

 

 

의(議)는 대부분 임진왜란 이후의 민생회복과 국토 복구에 대한 저자의 개선책이다. 잡저에는 정여립(鄭汝立)의 모반과 이를 빌미로 서인(西人)이 동인(東人)을 축출한 기축옥사(己丑獄事)의 전개 양상을 상세하게 수록한 "기축옥사", 임진왜란 초기의 일들을 정리한 "임진변초사(壬辰變初事)", 권율, 이순신 유성룡 등 임진왜란 때 중요한 功을 세웠던 장군들의 행적을 기록한 "난후제장공적(亂後諸將功蹟)" 등이 실려 있다.    

 

   

 

 

 

 

 

 

 

임진왜란 3년 전 기축옥사(己丑獄事)가 일어났다는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 시기 조선을 휩쓴 내홍(內訌)은 당쟁(黨爭)이었다. 이항복은 서인(西人)의 대표적 인물로 당쟁의 중심에 섰다가 결국 유배지에서 일생을 마쳤다.

 

 

기축옥사 당시 이항복은 33세의 예조정랑이었다. 그는 그 사건에 문사낭청(問事郎廳 .. 죄인을 문초한 조서를 작성하는 등의 일을 맡은 임시관직)으로 참여하였는데, 신하들끼리 비난이 난무하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잘 중재하고 시비(是非)를 공정하게 판단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 후 이항복이 주로 맞선 정파는 북인(北人)이었다. 북인(北人)은 선조 말엽부터 세력을 확대하고, 그 영수는 정인홍(鄭仁弘)이었다.

 

 

이항복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우의정을 거쳐 최고의 자리인 영의정에 올랐다. 즉 그는 율곡 이이와 성혼이 떠난 뒤 서인(西人)의 대표적인 인물이 된 것이다. 북인(北人)과의 갈등은 격화되었다. 1602년 정인홍(鄭仁弘)은 기축옥사에서 최영경(崔永慶)이 무고하게 옥사(獄死)한데에는 성혼(成渾)에게 큰 책임이 있다고 공격하였다. 이항복은 성혼을 비호하였는데, 북인(北人)이 탄핵하자 즉시 사직하였다.

 

 

그 후 북인(北人)의 영향력은 더욱 커졌고, 결국 광해군의 등극으로 집권하게 되었다. 10년 뒤 유배지에서 죽었다는 사실이 보여주듯이, 이항복은 그 기간동안 임해군(臨海君)의 처형, 영창대군 살해 등 주요 사안에서 북인과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결국 이항복은 1613년 관직에서 물러나 망우리에 동강정사(東岡精舍)를 짓고, 동강노인(東岡老人)이라고 자칭하면서 지냈다. 57세이었다.     

 

 

 

                                                       이항복의 죽음

 

 

 

 

 

광해군 즉위 후 정권을 잡은 북인(北人)이 광해군의 친형인 임해군(臨海君)을 살해하려 하자, 이항복은 이에 반대함으로써 정인홍 일당의 공격을 받고 사퇴의사를 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뒤에도 북인이 선조의 장인 김제남(金悌男) 일가를 역모혐의로 멸산시키고, 영창대군을 살해하는 등 정권 강화작업을 벌이자 적극 반대하였다. 

 

 

1613년(광해군 5) 다시 북인(北人)의 공격으로 물러났으나 광해군의 선처로 좌의정에서 중추부로 자리만 이동하였다. 1617년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에 반대하다가 1618년 관직이 삭탈되고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그 해 관작이 환급되고 포천에 예장되었다.

 

 

이항복은 유배지인 북청에 도착한 후 3개월째인 1618년 5월 13일 새벽닭이 울어 동이 틀 무렵에 백사 이항복은 63세를 일기로 운명하였다. 평생 동안 그의 은혜를 입었고, 금남군(錦南君 .. 光州 금남로의 유래가 되었다)이자 충무공 시호를 받았던 정충신(鄭忠信) 장군이 백사를 수행하였는데, 백사(白沙)의 시신(屍身)을 거두어 포천으로 6월17일 출발하여 7월12일 도착하였다. 8월4일 소식을 들은 남녀노소가 달려와 울음으로 장사를 지냈다.    

 

 

 

 

 

 

 

 

 

 

 

 

 

                                                    이항복 일생에 대한 평가

 

 

 

 

 

한 인간이 세상에서 태어나 일생을 마치고 세상을 떠난 뒤에 그의 삶을 제대로 평가하여 역사적 지위를 올바르게 인정받을 수 있는 일처럼 의미있는 일이 있을까. 이항복은 백척간두에 서있던 나라를 구하고 학문과 문장 및 탁월한 경륜으로 나라를 중흥시킨 위인이다. 평가해준 후학이나 후배들이 있었기에 실행했던 일에서 크게 부족함이 없는 역사적 평가를 후세에 길이 큰 이름을 전하는 몇 안되는 인물 중 한 사람이다.

 

 

이른바 조선 4대 문장가 중의 한분인 계곡 장유(張維. 1587~1638)는 대제학에 우의정이라는 높은 지위에 오른 분으로 이항복의 문집인 "백사집"의 서문을 썼는데, 그 글에서 하늘이 백사공을 태어나게 했던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어려운 국난을 해결할 수 있는 뛰어난 인물을 내어서 책임을 맡도록 하려는 뜻에서 였다고 그의 위대함을 설명해 주었다.

 

 

장유(張維)는 또 다른 글 " 오성부원군이공행장(鰲城府院君李公行壯) "이라는 장문의 이항복 일대기에서 " 공은 나라를 유지하게 하였고, 은혜와 혜택은 백성들에게 미쳤으며 맑고 깨끗하기는 빙옥(氷玉)과 같았고 높은 산악처럼 무거웠으니 국가의 주석(柱石)이자 사류(士類)의 가장 높은 위치에 닜는 분이었다"라는 높은 찬사를 바쳤다. 

 

 

4대 문장가의 또 다른 한 사람으로 대제학에 영의정이라는 고관을 역임한 상촌 신흠( 象村 申欽. 1566~1628)은 이항복과 같은 조정에서 벼슬하면서 인품과 능력을 제대로 파악할 수있었다. 장유보다는 훨씬 선배이면서 이항복에게는 10년 후배인 그는 오성부원군 신도비명이라는 글에서, 백사가 63세로 세상을 떠나자 귀양지인 함경도 북청에서 선산이 있는 경기도 포천에 장사를 지낼 때 소식을 들은 백성들이 지위의 고하를 묻지 않고 모두 찾아와 울고 절하면서 그의 죽음을 슬퍼하였고, 장사를 지낼 때에는 거리의 멀고가까움을 따지지 않고 군관민이 모두 찾아와 통곡하면서 제물과 제문을 바치는 사람이 끊일 줄을 몰랐다고 하였다.  

 

   

 

 

 

 

                                                          오성과 한음                鰲城과 漢陰

 

 

 

 

 

 

 

오성과 한음 (鰲城과 漢陰) .. 이 두 사람이 빚어내는 어린 시절의 재미있는 일화는 아마도 후세의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일 뿐이다. 이들은 고향이 서로 다를 뿐만 아니라, 나이마저 다섯살이나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같은 공간에서 나이 어린 그들이 서로 벗으로 어울렸을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운명적인 만남은 성인(成人)이 되어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한다. 

 

 

백사 이항복 즉, 오성(鰲城)은 15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그리고 3년 상을 마친 다음 곧장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에 힘쓰다가, 1580년(선조 13)에 25세의 나이로 알성(謁聖)문과에 급제를 하였다. 바로 이때 약관 20세의 한음(漢陰) 이덕형도 과거에 급제하여 두 사람은 홍문관에 들어가 문한(文翰)을 다루는 일을 하였는데, 아마 이 시기부터 두 사람이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오성(鰲城)과 한음(漢陰)은 선조, 광해군 조의 사람으로 가까운 친구이었다. 그리고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같은 동네에서 살았던 것은 아니다. 오성은 한음보다 5살이 더 많았다. 

 

 

 

그들은 과거시험장에서 처음 만나 일면여구(一面如舊)가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같은 시험에 급제한 것도 아니다. 한음(漢陰)이 문과에도 빨리 급제하였고, 벼슬도 오성(鰲城)보다 빨리 올라갔다. 다 같이 영의정을 역임하였지만, 한음은 37세에 영의정이 되었지만, 오성은 그보다 훨씬 늦었다. 한음(漢陰)은 이덕형의 호(號)이지만, 오성(鰲城)은 이항복의 군호(君號)일 뿐이요, 호는 처음에 필운(弼雲)이라 했다가 후에 백사(白沙)로 바꾸었다. 오성 이항복이 필운동에 있는 처갓집에 살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배화여고 뒤에는 필운대가 있다. 오성(鰲城)은 해학도 좋아하고 사람도 잘 사귀었으나, 한음(漢陰)은 수재이었고, 착실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국사를 논할 때에는 서로 뜻이 맞았다. 

 

 

두 사람은 유명한 장인을 둔 것으로 유명하다. 오성 이항복의 장인은 임진왜란 때 도원수로 행주대첩(幸州大捷)을 이끈 권율(權栗)이요, 한음 이덕형의 장인은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李山海)이었다. 두 사람은 어릴 때 대단히 가난했던 공통점이 있다. 오성은 소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기재(寄齋)에서 공부한 적이 있었다.  이 때 영의정을 지낸 권율의 아버지 권철(權轍)의 권유로 권율의 사위가 되었으며,

 

 

한음 이덕형은 삼촌 토정 이지함(土亭 李之涵)의 추천으로 이산해(李山海)의 사위가 되었다. 왜 가난한 한음을 추천하느냐고 물었더니, 이지함은 " 너보다 먼저 영의정이 될 것이다 "라고 했다고 한다. 오성은 서인(西人), 한음은 남인(南人)이지만, 두 사람은 당파와 무관하게 사람을 사귀었다.

 

 

그러면 두 사람은 국가를 위하여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 오성(鰲城)은 우선 선조(宣祖) 때 병조판서로 병권(兵權)을 장악하고 있던 사람이다. 그래서 광해군 시절의 대북(大北)정권에서도 오성(鰲城)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였다. 그는 장만 정충신, 남이홍 등 많은 무장들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선조가 의주(義州)로 피난할 때는 도승지로서 가장 가까이서 호종하였고, 그 때문에 호종공신(扈從功臣) 1등이 되었다.

 

 

이에 비하여 한음(漢陰)은 외교관(外交官)으로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였다. 그는 일본과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 일본과 평화조약도 맺었고 명나라 원병을 끌어들이기도 하였다. 만약 명나라의 원병이 오지 않았더라면 조선은 멸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대북정권의 폐모살제(廢母殺弟)를 반대하다가 죽었다. 한음은 1513년 8월8일에 영의정으로서 영창대군을 죽이는 것을 반대하다가 9월에 삭탈관직되어 용진(龍津)으로 물러나 울면서 굶어 죽었고, 오성은 그의 묘지문(墓誌文)을 써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그리고 오성도 1617년(광해군 9) 11월23일에 폐비정청(廢碑庭請)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역시 삭탈관직되어 용강(龍岡), 북청(北淸)으로 귀양갔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앞서거니 뒷서거니

 

 

 

 

 

재미있는 사실은 한음과 오성, 이 두 사람이 평생동안 벼슬을 서로 물려주고 물려받았는데, 특이하게도 어린 한음(漢陰)이 항상 한 걸음 앞서 나갔다는 점이다. 한음은 31세에 대제학에 올라 그 후 그 자리를 오성에게 물려주었는데, 38세에 우의정이 되었다가 이어 좌의정이 되었을 때는 오성(鰲城)이 그 뒤를 이어받아 우의정에 올랐다.  그리고 한음이 42세에 영의정이 되자 오성이 다시 좌의정 자리를 물려받았고, 마침내는 오성도 한음의 뒤를 이어 영의정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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