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역사 자료 문헌

남명 조식 (南冥 曺植) .. 행동하는 지성의 표상

작성자이계묵|작성시간13.02.12|조회수210 목록 댓글 0

 

 

 

                                       남명 조식                    南冥 曺植

 

 

 

 

 

왕(王)을 고아(孤兒)로, 대비(大妃)를 과부(寡婦)로, 조선을 뒤흔든 상소(上疏)의 주인공. 몸에 칼을 품고 방울을 달았던 선비, 남명 조식(南冥 曺植) ! 50명의 제자들을 의병장(義兵將)으로 키우고 행동하는 지성(知性)의 표상이 된 남명(南冥) ! 오늘 그가 우리에게 던지는 절절한 화두. 책을 뚫고 현실로 나아가라  

 

 

 

 

 

 

 

 

 

 

 

 

조선시대 학자들의 본분이 무었이었을까. 유학자(儒學者)라면 학문을 이룬 뒤 이를 바탕으로 과거(科擧) 시험을 통하여 벼슬길에 나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16세기를 대표하는 학자 '남명 조식(南冥 曺植)'은 벼슬길에 나가는것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을 몸에 차고 그 소리를 들으며 스스로 경계(警戒)와 반성(反省)을 그치지 않은 조식(曺植)은 일생토록 타락한 권력을 질타(叱咤)하고 무기력(無氣力)한 지식인(知識人) 사회에 경종(警鐘)을 울리는 이른바 ' 선비정신'을 실천한 인물이었다.  

 

 

 

                                                남명 조식의 선비정신

 

 

  

남명 조식(南冥 曺植)의 선비정신에 관한 설화는 1622년 '어우당 유몽인 (於于堂 柳夢寅)'이 완성한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수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식(曺植)은 두류산(頭流山.. 현재의 지리산)의 산천재(山天齎)에서 성리학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여 명망이 높았고, 이에 여러 차례 임금이 벼슬을 내려 등용하려 하였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조식(曺植)이 탕춘대(蕩春臺) 북쪽과 무계동(武溪洞) 남쪽에서 한양(漢陽)으로 간 적이 있었다. 마침 '남명 조식'의 인품(人品)을 사모하던 여성위(礪城尉 .. 왕의 사위에게 주는 품계)가 그것을 알고 술 한잔을 올리고 싶어, 장의문(藏義門) 소나무 숲 속에 장막을 치고 '조식'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여성위(礪城尉)는 길가에서 공수(拱手 .. 공경의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오른손 위에 왼손을 포개어 잡음)하고 서 있었고, 하인은 말 앞에서 기다리게 하였다.

  

 

그러나 '조식'은 여성위(礪城尉)가 높은 지위의 사람임을 알고, 말에서 내리지 않은 채 술에 취(醉)한 것처럼 하면서 ' 이렇게는 어른을 맞이할 수 없다'라고 말하며, 여성위(礪城尉)의 술을 받지 않고 가던 길을 계속 갔다. 그렇게까지 속세(俗世)의 권위에 대해 초탈한 '조식'의 모습이 여성위의 눈에는 아득히 천길 높이 나는 봉황(鳳凰)같이 보였다고 한다.         

 

 

 

 

 

 

 

 

 

 

남명 조식(南冥 曺植)의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健中), 호는 남명(南冥)으로 생원(生員) 안습(安習)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승문원판교 언형(彦亨이며, 어머니는 인주(仁州) '이씨'로 삼가현(三嘉縣 .. 지금의 경남 합천 일대) 지역의 유력한 사족(士族)이던 충순위 이국(李菊)의 딸이다.

 

 

 

 

                                                  출생과 생애 초반

 

 

 

 

남명 조식(南冥 曺植)은 경상도 삼가현(三嘉縣 ..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의 토공(兎洞)에서 태어나 4~7세 사이에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왔으며, 이후 아버지의 벼슬살이를 쫓아서 의흥(義興), 단천(端川)에 가기도 하였으며 20대 중반까지 주로 서울에 거주하였다.

 

 

서울의 처음 거주지는 연화방(蓮花坊)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여기서 이웃에 살던 이윤경(李潤慶 .. 후일에 판서벼슬을 지냄), 이준경(李浚慶 .. 후일 영의정이 됨) 형제와 절친하게 지냈으며, 이로 미루어 황효헌(黃孝獻)과 이연경(李延慶)에게 학문을 배웠을 가능성이 있다. 18세 때 북악산 밑의 장의동으로 이사하여 성운(成運)과 평생을 같이하는 교우(交友)관계를 맺었고, 부근의 청풍계(淸風溪)에 숨어서 살던 성수침(成守琛) 형제와 교우하였다.

 

 

이후 7~8년 간 서울 근교의 백운대나 탕춘대(蕩春臺)의 무계동(武溪洞)에 있는 절을 찾아 독서에 몰두하면서 때로 과거(科擧)에 응시하기도 했는데, 22세 때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의 초시(初試)와 문과(文科)의 초시에 합격했으나 회시(會試)에 시패하였으며, 26세 때 부친상을 당해 고향인 '삼가현'으로 돌아가 3년상을 마친 뒤, 한때 의령의 도굴산(覩堀山)에서 독서하다가 30세 되던 해 어머니를 모시고 김해 탄동(炭洞)에 있는 처가(妻家)로 거처를 옮겼다.

 

 

장인(丈人)인 충순위 조수(曺琇)가 김해(金海) 일대에서 부자(富者)로 소문나있던 만큼 처가의 도움으로 경제적 안정을 갖게 되어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독서에 힘쓰며 특히 31세 때 서울 친구이던 이준경(李浚慶)과 송인수(宋麟壽)로부터 선물받은 '심경'과 '대학'을 읽고 성리학(性理學)에 몰두하였다. 37세 되던 해 어머니의 권유로 과거(科擧)에 응시하였다가 낙방되자, 어머니를 설득하여 과거(科擧)를 포기한 뒤 비로소 처사(處士)로서 삶을 영위하며 본격적인 학문 연구와 덕성(德性) 함양에 전념하였다.            

 

 

 

 

 

 

 

남명 조식이 15세에 부친이 함경도 단천군수(端川郡守)로 임명되자, 단천(端川)으로 이주한 '남명 조식'은 유교경전을 비롯하여 천문(天文), 지리(地理), 의학(醫學), 병법(兵法)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공부를 하였다. 그가 실천(實踐)과 비판의식(批判意識)을 지닌 선비로 성장한 데는 지방관 생활을 한 부친의 영향이 컸다.

  

 

                                             벼슬 포기, 진정한 학문의 길

 

 

 

어린 '조식'은 지방 관아(官衙)에 생활하면서 백성들의 어려움을 직접 눈으로 보았고, 이를 개선할 방법을 학문에서 찾았다. 방대한 독서량을 자랑했던 '조식'은 젊은 시절 '좌전(左傳)'과 유종언(柳宗元 .. 당송 8대가의 한 사람)의 고문(古文)을 좋아했다고 한다. 1518년 18세에 '조식(曺植)'은 부친을 따라 서울 장의동(藏義洞 .. 지금의 북악산 밑 경복고 일대)로 이주하였다. 당시 그의 집은 성운(成運), 성우(成遇) 형제의 집과 가까웠다. 성운(成運)은 훗날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 형(兄)이 화(禍)를 당하자 속리산(俗離山)으로 들어가 은거(隱居)의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이웃사촌이었던 '조식(曺植)'과 '성운(成運)'은 수시로 만나 학문을 토론하고 함께 인격을 수양해 갔다. 평온하게 학문 활동에 매진하던 가운데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면서 조광조(趙光祖)가 사사(賜死)되었는데, 이때 조식(曺植)의 숙부인 '조언경'도 화(禍)를 당했다. 기묘사화를 계기로 조식(曺植)은 벼슬길이 험난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성운 형제와도 헤어지게 되었다.

 

연이은 사화(士禍)를 지켜보면서 벼슬길에 회의(懷疑)를 갖기도 하였지만, 곧장 과거(科擧)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1520년 진사생원(進士生員) 초시(初試)와 문과(文科) 초시에 모두 급제한 '조식(曺植)'은 이듬해 문과회시(文科會試)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했다. 그 후 과거(科擧) 준비와 함께 학문을 닦던 그에게 일생의 항로(航路)를 바꾸는 전기(轉機)가 찾아왔다.

 

과거시험을 공부하던 중 '성리대전(性理大典)'에 실려 있는 ' 대장부가 벼슬길에 나가서는 아무 하는 일이 없고 초야(草野)에 있으면서는 아무런 지조(志操)도 지키지 않는다면 뜻을 세우고 학문을 닦아 장차 무엇을 하겠는가 '라는 허형(許衡 ..원나라 학자)의 글이 그의 가슴을 친 것이다. 이때가 그의 나이 25세가 되던 해이었다. 이후로 조식(曺植)은 출세를 위한 형식적이고 지엽적인 학문을 버리고 유학(儒學)의 본령을 공부하는데에 전념하였다. 실생활에서도 유학(儒學)의 성현이자 대유(大儒)들인 주렴계, 정명도, 주자(朱子)의 초상화를 그려놓고 아침마다 절을 올릴 정도로 독실하게 공부에 전념하였다.      

 

 

                                          남명 묘                     南冥 墓

 

 

 

 

이곳 묘(墓)자리는 남명(南冥)이 생전에 직접 정한 곳이다. 묘소에는 성운(成運)이 지은 묘갈명이 서 있다. 묘소는 돌담으로 병풍처럼 둘러처져 있어 고풍스럽다.  이 묘소는 지리산과 덕천강 그리고 덕산(德山)의 마을이 한 눈에다 조망되는 위치에 있다.

 

 

 

 

 

 

 

 

남명은 서울에서 내려와 자굴산에 머물다가 어머니 '인천 이씨'를 모시기 위하여 처가(妻家)가 있는 김해(金海) 신어산 아래 탄동(炭洞)으로 이사를 하였다. 이때 남명의 나이 30세이었다. 이로부터 15년이 흐른 후, 남명이 45세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선산에 모시고 3년상을 치르며 자식의 도리를 다하였다. 3년상을 마치자 넉넉한 처가살이를 마다한 채 부모의 묘(墓)가 있는 고향 삼가(三嘉)로 돌아왔다. 이때 부인에게 같이 삼가현(三嘉縣)으로 갈 것을 궈하였지만, 부인 조씨는 김해(金海)에 그대로 살기를 원하면서 삼가(三嘉)로 가지를 않았다. 삼가(三嘉)로 와서 혼자 사는 망명에게 시중을 들 사람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남명'은 같은 삼가(三嘉) 관내에 사는 선비 '송린'의 딸을 부실(副室)로 맞았으며, 남명의 묘소 아래에 있는 또 하나의 묘는 바로 부실(副室)의 묘소이다.  

 

 

 

 

 

 

 

 

 

 

 

남명 조식은 61세에 지리산(地理山) 아래 산청(山淸) 덕산으로 옮겨 산천재(山川齋)를 지어 후진을 양성하였다. 그의 교육철학은 개성 교육으로 개인이 자질에 따라 가르치며 제자백가(諸子百家)를 섭렵하여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것을 중시하였다.그는 또한 성리학(性理學)의 이론적 측면만을 궁구함에 따른 폐단을 깊이 알고 실천(實踐)을 중시하여, 제자들에게 성리학뿐만 아니라 천문, 지리, 의학, 궁마(弓馬) 등도 가르쳤다. 

 

 

 

 

                                                    남명 조식의 최후 

 

 

 

 

남명 조식이 67세 되던 해 왕위에 오른 선조(宣祖)가 여러 번 벼슬을 내렸으나 나가지 않았고, 68세에는 학문적 성과를 집약한 것으로 유명한 '무진봉사 (戊辰封事)'를 올려 정치의 폐단과 이를 개혁할 대안을 제시하였다. 일생 동안 선비의 삶을 올곧게 지키며 국정의 쇄신과 백성의 안위(安危)를 걱정하다가 72세인 1572년 2월 8일 산천재(山川齋)에서 세상을 떠났다.  남명 조식의 죽음을 듣게된 선조(宣祖)는 스스로 '소자(小子)'라 칭하며 의지할 대로(大老)의 서거를 슬퍼하는 사제문을 내렸다. 광해군(光海君) 때에 문정(文貞)이라는 시호(諡號)와 함께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지리산 처사                   智理山 處士 

 

 

 

 

 

동양 전통사회의 자연관(自然觀)은 공자(孔子)의 ' 요산요수 (樂山樂水) '라는 말에서 잘 드러나 있다. 공자(孔子)는 논어(論語)에서 '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동적(動的)이고 어진 사람은 정적(靜的)이며, 지혜로운 사람은 낙천적이며 어진 사람은 장수(長壽)한다 '고 말했다.

 

 

옛 사람들이 산(山)을 즐겨 찾은 데에는 이러한 자연관(自然觀)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 산수(山水)를 유람하며 사색하고, 자연의 덕(德)을 배우고 실천하려는 이러한 인식은 ' 산이 그곳에 있기에 오른다 '는 서양의 정복적(征服的) 자연관과는 크게 차이를 보인다. 이 때문에 공자(孔子)는 동산에 올라서는 노(魯)나라가 작다는 것을 알았고, 태산(泰山)에 올라서는 천하(天下)가 작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 맹자(맹자)는 산에 오르면서 ' 높은 곳에 오르려면 반드시 낮은 데로부터 시작한다 '는 평범한진리를 깨우쳤다.

 

 

우리나라의 선인들도 마찬가지이었다.  옛 사람들은 산을 찾아 자신을 성찰(省察)하며, 당시 사회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하였다. 그들에게 산(山)은 단순한 등산(登山)의 대상이 아니었다. ' 산을 보고 물을 보고 인간을 보고 세상을 보러 .. 看山看水 看人看世 '는 수양과 학문연구의 한 방편이었다. 옛 사람들이 즐겨 찾은 산은 금강산, 삼각산, 묘향산, 소백산, 백두산, 지리산 등을 꼽을 수 있다.       

 

 

 

                                           지리산                  智理山

 

 

 

특히 지리산(智理山)은 영,호남(嶺,湖南) 유학자들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유람처이었다. 지리산(智理山)은 옛 사람들에게 두류산(頭流山)이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불렸다. 두류산(頭流山)은 ' 백두산(白頭山)에서 흘러내린 산 '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지리산(智理山)은 금강산(金剛山), 한라산(漢拏山)과 함께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꼽혔다. 또 웅장하고도 걸출한 산세(山勢)는 선비들의 호여지기(浩然之氣)를 기르는 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화엄사, 쌍계사, 천은사 등 고찰(古刹)들이 곳곳에 있어 그에 얽힌 사적과 설화도 유학자(儒學者)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였다.

 

조선시대에 지리산(智理山)을 찾은 문인(文人) 학자들은 이륙(李陸), 남효온(南孝溫), 김종직(金宗直), 김일손(金馹孫), 유몽인(柳夢寅), 조식(曺植), 정여창(鄭如昌), 허목(許穆)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이들은 대부분 유산기(遊山記), 유산록(遊山錄) 등 산행기(山行記)를 남겼으며, 산에 오른 감흥(感興)을 시(詩)로 읊기도 하였다.

 

영남 사림파(士林派)의 정신적 지주이었던 김종직(金宗直)은 함양군수(咸陽郡守)가 된 것을 계기로 지리산 정상에 오른 뒤 산행기를 남겼다. 김종직(金宗直)의 산행(山行)은 그의 문인 남효온, 김일손, 정여창 등이 연이어 지리산을 찾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지리산 등반을 위해 진주목사(晉州牧使)를 자원했던 김일손(金馹孫)은 남자가 태어나서 구경해야 할 대표적인 산(山)으로 지리산을 꼽았다. 지리산의 명성은 유몽인(柳夢寅)의 증언에서도 확인된다. 금강산, 백두산, 묘향산, 설악산 등을 섭렵한 당대 최고의 문인 등산가이었던 유몽인(柳夢寅)은 ' 내가 다녀본 산들을 등급 매긴다면 지리산이 단연 첫 번째이다. 만약 세상의 영리를 버리고 산으로 들러갈라치면, 오직 이 산에서만 편히 은거(隱居)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

 

 

 

 

 

 

 

 

                                                 남명 조식과 지리산

 

 

 

이처럼 많은 선비들이 다투어 지리산을 찾았지만, 등산 횟수(回數)를 따진다면 남명 조식(南冥 曺植)을 따를 자가 없다. 남명(南冥)은 58세 되던 1558년 4월 10일부터 26일까지 17일 동안 지리산일대를 유람하였다.  그의 코스는 진주(晉州)에서 섬진강(蟾津江)을 거슬러 올라 쌍계사, 불인암, 신응사 등지를 둘러보고 육로(陸路)로 다시 돌아오는 유람이었다. 등산(登山)이라기 보다는 유람(遊覽)이라는 표현이 적절하지만, 그는 이 여정을 '유두류록(遊頭流錄)'이라는 글로 남겼다. 그에게 이번 유람은 생애 12번째 지리산 기행이었다. 

 

 

 

 

 

 

남명(南冥)은 '유두류록' 말미에 ' 덕산동으로 3번, 청학동, 신응동으로 3번, 용유동으로 3번, 백운동으로 1번, 장항동으로 1번 지리산에 들어갔다' 면서 벌써 11번 지리산에 올랐음을 밝히고 있다. 남명의 지리산 산행은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 지리산 주변이라는 지정학적(地政學的) 요인도 크게 작용하였다. 남명은 경남 합천에서 태어나 20대 후반에 김해(金海)로 이사갔으며, 45세에 다시 고향 합천으로 돌아가 살았다.

 

그러나 그가 지리산을 자주 찾은 것은 명산에 은거(隱居)하며 후학을 가르치고 학문에 매진할 수 있는 도량을 구하고자 하는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출세(出世)의 수단으로 전락한 과거(科擧)를 멀리한 채 임금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으며 평생 '참된 학문'에만 몰두해 온그에게 산 만큼 좋은 수행처는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61세 되던 해 남명(南冥)은 천왕봉(天王峰)이 바라보이는 지리산 자락인 산천(山淸) 덕산(德山)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에서 그는 산천재(산천재)라는 서당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세상을 뜰 때까지 살았다. 아예 산 속으로 들어가 그가 그토록 원했던 지리산의 기상을 닮고 산(山)의 덕(德)을 체득하고, 산의 기운을 받고자 했던 것이다. 남명(남명)의 이러한 바람은 그가 남긴 시(詩)와 산문(散文)에서 확인된다.

 

 

두류산(頭流山) 양단수을 예 듣고 이제보니  /  도화 뜬 맑은 물에 산영(山影)조차 잠겼어라   /  아희야 무릉이 어디메요 나는 옌가하노라

 

 

지리산을 수도 없이 올라간 남명(南冥)이었지만, 그는 돌 하나 풀 한포기에도 애정을 쏟았다. 그는 '유두류록(遊頭流錄)'에서 바위에 이름을 새긴 것을 보고 속유(俗儒)의 소행이라고 개탄하고 있다. 또 지리산을 유람하면서 최치원, 한유한, 정여창 등 선인들의 행적을 살피기도 하였다. 

 

후대 학자들은 남명(南冥)이 공리공론(空理空論)에 치우친 성리학(性理學)에서 벗어나 양명학(陽明學), 노장사상(老莊思想) 등을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은 지리산(智理山)의 정신사적(精神史的)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한다. 생전에 교유(交流)가 거의 없었던 ' 학문의 라이벌' 퇴계(退溪) 이황(李滉)조차도 ' 유두류록(遊頭流錄)'을 읽고 ' 정신이 번쩍 들게 하였다 '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신도비                    神道碑

 

 

 

 

 

 

 

 

 

 

 

남명기념관 서쪽 마당에 남명(南冥)의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그의 신도비는 여러 개가 있다. 처음의 신도비는 광해군(光海君) 7년에 성균관 유생(儒生)들의 상소(上疏)로 '남명(南冥)'이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되자 문인(門人)인 정인홍(鄭仁弘)이 신도비명을 지어 세웠으나,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없애버렸다. 

 

그의 후손들이 다시 명사(名士)의 글을 구하였는데, ' 미수 허목 (眉瘦 許穆)'과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글이 동시에 당도하였다. 두 사람 모두 산림처사(山林處士)인 '남명'을 추앙하였지만, 각각 남인(南人)과 노론(老論)의 영수로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이 각각 찬(撰)한 비(碑)를 함께 세울 수가 없었다. 난처해진 후손들은 미수(眉瘦)의 비(碑)는 덕산(德山)에 세우고, 우암(尤庵)의 비(碑)는 남명의 고향인 삼가현(三嘉縣)에 세우게 되었다.

 

 

그러나 기축옥사(己丑獄事)로 '퇴계학파'가 주축인 남인(南人)계열이 정권을 장악하자, 북인(北人) 계열로 대립관계에 있었던 '남명학파'는 빛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자 후손들은 퇴계학파인 '미수 허목'이 찬(撰)한 비석을 치워버리고 노론(老論)의 영수인 '우암 송시열'이 찬(撰)한 비(碑)를 남명의 묘(墓) 아래에 세우게 되었다.

 

 

산천재(山天齋) 도로 건너 '남명기념관' 내에 있는 신도비(神道碑)는 이때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것이다. 그러나 남인(南人) 정권도 노론(老論)에 밀려났다. 송시열(宋時烈)을 중심으로 한  노론(老論) 정권도 남명 조식을 떠받드는 것은 아니어서 '남명(南冥)'은 점점 잊혀지고 말았다. 따라서 오늘날 대부분 사람들이 퇴계, 율곡, 우암 송시열은 알아도 '남명 조식 (南冥 曺植)'은 잘 모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단성소                       丹城疏

 

 

 

 

1555년 조식(曺植)은 조정으로부터 단성현(丹城縣)의 현감(縣監)자리를 제안받았다. 그가 윤원형(尹元衡)을 비롯한 간신(奸臣)들이 가득한 조정에 나갈 마음이 없었던 그에게 사양하기 힘든 벼슬자리가 단성현감(丹城縣監)이었다. 조정은 조식(曺植)의 거주지와 그리 멀지 않은 단성현(丹城縣)의 현감자리라면 사양할 명분이 별로 없을 것이라 판단했다. 하지만 조식(曺植)은 이마저도 사양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작정하고 국왕을 향해 그간 가졌던 재야이사(在野人士)로서의 의견을 강력하게 제시하였다. 이것이 곧 단성소(丹城疏)라 불리는 '을묘사직상소(乙卯辭職上疏)'이다.  

 

 

 

 

                                   단성소 전문                       丹城疏 全文

 

 

 

 

 

 

 

 

 

 

선무량(宣務郞)으로서 단성현감(丹城縣監)에 새로 제수된 '조식(曺植)'은 진실로 황공하여 머리를 조아리며 주상전하께 소(疏)를 올립니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데 선왕(先王 ..중종)께서는 신(臣)이 변변치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시고 처음에 참봉(參奉)에 제수하셨습니다. 그리고 전하(殿下)께서 왕위를 이으신 뒤에 주부(主簿)를 제수하신 것이 두 번이었는데 지금 또 제수하여 현감(縣監)으로 제수하시니 떨리고 두렵기가 언덕과 산을 짊어진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감히 횡종(橫縱) 한 자쯤 되는 땅에 나아가서 하늘의 해와 같은 은혜에 사례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임금이 사람을 쓰는 것은 목수가 나무를 쓰는 것과 같습니다. 깊은 산과 커다란 연못 어느 곳에 있는 것이든 재목을 버려두지 않고 그것을 가져다가 커다란 집을 짓는 일을 이룩하는것은 훌륭한 목수(木手)가 하는 것이지 나무가 스스로 참여할 수는 없는 일인 것입니다. 전하께서 사람을 쓰시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시는 책임 때문입니다. 제가 걱정이 되어 견딜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니 감히 그 큰 은혜를 저 혼자 누릴 수는 없습니다만 머뭇거리며 나아가기 어려워 하는 뜻을 끝내 측석(側席 .. 어진 신하의 자리) 아래 감히 말씀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臣)은 벼슬에 나아가기 어려워하는 뜻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지금 저의 나이는 예순에 가깝고 학문은 어두우며, 문장(文章)은 과거(科擧)시험에 끝자리에도 뽑힐 수 없고, 행실은 물 뿌리고 비질하는 일을 제대로 해 내기에도 모자랍니다. 과거시험을 보기 10여 년 동안에 세 번이나 떨어진 뒤 물러났으니 애초부터 과거공부를 일삼지 않은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만약 과거(科擧)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은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런 사람은 성질이 급하고 마음 좁은 평범한 백성에 지나지 않을 뿐이니 큰 일을 할 만한 온전한 인재는 아닙니다. 하물며 그 사람 됨됨이가 선(善)한가 선(善)하지 않은가는 과거(科擧)를 보려고 하느냐 과거를 보려고 하지 않느냐 하는 데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잘 것 없는 신(臣)의 이름을 도둑질하여 집사(執事 .. 자신을 추천한 관원)에게 제가 훌륭한 인물이라고 잘못 판단하게 했고, 집사(執事)는 이름만 듣고서 저하에게 제가 훌륭한 인물이라고 잘못 판단하도록 한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과연 신(臣)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도(道)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문장에 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문장에 능한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도(道)를 지닌 사람은 아니며 도(道)를 지닌 사람은 반드시 신(臣)처럼 이렇지는 않습니다. 신(臣)에 대해 다만 전하께서 아시지 못한것일 뿐만아니라 재상(宰相)도 또한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알지 못하면서 등용(登龍)하여 훗날 국가의 수치(羞恥)가 된다면 어찌 죄(罪)가 보잘 것 없는 신(臣)에게만 있겠습니까. 헛된 이름을 바쳐 몸을 파느니 알찬 곡식(穀食)을 바쳐 벼슬을 사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신(臣)이 차라리 신(臣)의 한 몸을 저버릴지언정 차마 전하(殿下)는 버릴 수 없습니다. 이것이 나아가기 어려운 첫 번째 까닭입니다.

 

 

또 전하의 국사(國事)가 그릇된 지 이미 오랩니다. 나라의 기틀은 이미 무너졌고, 하늘의 뜻도 이미 전하(殿下)에게서 멀어졌습니다. 비유하건데, 큰나무가 백 년 동안이나 그 속을 벌레에게 파 먹혀 진이 빠지고 말라 죽었는데도 그저 바라보기만 하여 폭풍우가 닥치면 견디어 내지 못할 위험한 상태가 언제 올지도 모르는 실정에 있는지가 오랩니다.

 

 

조정에 있는 사람 가운데 충성된 뜻 있는 신하와 일찍 일어나 밤늦도록 공부하는 선비가 없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미 이미 그 형세가 극도에 달하여 지탱할 수 없고 사방을 둘러 보아도 손쓸 곳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소간(小官)들은 아래에서 히히덕거리며 주색(酒色)이나 즐기고 대관(大官)은 위에서 거들먹거리면서 오직 뇌물(賂物)을 긁어 모으는 데 혈안입니다. 고깃배가 썩어 들어가는 것 같은데도 그것을 바로 잡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내신(內臣)들은 파당(派黨)을 세워 궁중의 왕권을 농락하고, 외신(外臣)들은 향리(鄕吏)에서 백성들을 착취하여 이리떼처럼 날뛰면서 가죽이 다 닳아 없어지면 털이 붙어 있을 곳어 없는이치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신(臣)은 깊이 생각해 보면 탄식만 길게 나올 뿐, 낮이면 하늘을 우러르기 수 차례이었고 눈물과 한숨을 누를 길이 없어 밤이면 잠을 이루지 못한 지가 오랩니다. 나라가 이 지경이고 보면, 자전(慈殿 .. 문정왕후)께서 생각이 깊으시기는 하나 밖의 소식이 막힌 깊은궁궐 안의 한 과부(寡婦)에 지나지 않고, 전하(殿下)는 나이 어린 선왕(先王)의 한 외로운 자식일 뿐입니다. 저 많은 천재(天災)와 천 갈래 만 갈래로 흩어진 민심(民心)을 무엇으로 막고, 어떻게 수습할 수 있겠습니까. 

 

 

냇물이 마르고 곡식이 비처럼 내리니 그 조짐이 무엇이겠습니까. 노랫가락이 구슬프고 입는옷이 흰색이니 나라가 어지러울 형상임이 나타났습니다. 이런 때를 당하여 비록 재주가 공(公)과 공(公)을 겸하여 삼공(三公)의 위치에 있다 해도 손을 쓰기 어려운 형편이온데, 하물며 미신(微臣)과 같이 아무 힘도 없는 자야 더 말해 무엇하리이까? 위로는 나라의 위태로움을 조금이나마 부지할 수 없을 것이며, 아래로 터럭만큼도 백성들을 구제할 수 없을 것이니 전하의 신하 되기 또한 어렵지 않습니까. 추호라도 헛된 이름을 팔아 전하의 벼슬을 도적(盜賊)해서 그 녹(祿)만 먹고 하는 일이 없이 지내는 그런 신하가 되는 것을 신(臣)은 원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나아가기 어려운 두 번째 까닭입니다.

 

 

또 제가 요즈음 보건데 변방(邊方)에 일이 있어 여러 대신(大臣)들이 밥도 제 때에 먹지 못한다고 들었는데, 신(臣)이 이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것은 일찍이 20년 전부터 이 일이 생겼던것을 전하의 영명(靈明)하심에 힘입어 이제야 발각된 것이요, 하루아침에 된 것은 아닙니다. 평소 조정에서는 재물로 사람을 임용(任用)하니 재물만 모이고 민심(民心)은 흩어져 결국 쓸만한 장수도 없게되고 성(城) 안의 병사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기에 이르렀으니 적(敵)이 무인지경으로 쳐들어 온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입니다. 

 

 

이번에도 대마도(對馬島) 왜노(倭奴)가 향도와 남몰래 짜고 만고에 끝없는 치욕스러운 짓을 하였건만 왕의 신령한 위엄이 떨치지 못하여 마치 절 하듯 하였습니다. 이는 옛 신하를 대우하는 의리가 혹 주(周)나라 예법보다 엄하면서 원수를 총애하는 은덕이 도리어 망(亡)한 송(宋)나라보다 더한 경우가 아니겠습니까. 세종(世宗)께서 남쪽 오랑케를 징벌하시고 성종(成宗)께서 북벌(北伐)하신 일을 보아도 어디에도 오늘날과 같은 일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것은 하찮은 피부병에 지나지 않고, 마음과 속의 병(病)은 이보다 더 심각합니다. 가슴과 배의 통증(痛症)이란 걸리고 막히어 위아래가 통하지 않게 되는 것이니 이것은 곧 공경대부(公卿大夫)가 목이 마르고 입술이 타 들어가도록 열심히 일하지만 수레는 달리고 사람은 달아나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근왕병(勤王病)을 불러 모으고 나라 일을 정돈하는 것은 자질구레한 정치나 형벌(刑罰)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전하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마음의 사이에서 말이 땀을 흘리는 것처럼 노력하여 만 마리의 소가 밭을 갈아야하는 너른 땅에서 곡을 거두는 그 기틀은 자기 자신에게 있을 뿐입니다.

  

 

유독 전하(殿下)께서 종사하시는 일이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학문(學問)을 좋아하십니까 ? 주색(酒色)을 좋아하십니까 ? 궁마(弓馬)를 좋아하십니까 ?  군자(君子)를 좋아하십니까 ? 소인(小人)을 좋아하십니까 ? 그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국가의 존망(存亡)이 달려 있습니다. 진실로 전하께서 할연히 깨달으시어 분연히 학문에 진력하사 명덕(明德) 신민(新民)의 도(道)를 얻으신다면 거기에 만선(萬善)이 갖추어져 있어 백 가지 응책(應策)이 연이어 나올 것이니 그것으로 조치를 취하신다면 나라를 바르게 다스리고 백성을 평화롭게,  위기를 평안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약해서 간직하시기만 해도 마음이 비지 않음이 없으며 저울질이 고르지 않음이 없으며 사특한 생각이 나오지 아니할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진정(眞正)이란 것도 다만 마음을 간직하는 데에 달려 있을 뿐이니 위로 하늘의 이치에 통하게 되는 데 있어서는 유교(儒敎)와 불교(佛敎)가 한 가지입니다. 다만 사람의 일을시행함에 있어서는 다리가 없이 땅을 밟고 있는 형국이므로 우리 유가(儒家)에서는 본받지 아니할 뿐입니다. 전하께서는 이미 불교를 좋아하시니 그것을 학문하는 데로 옮기신다면 이것이 바로 우리 유가(儒家)의 일입니다. 이는 어렸을 때 집을 잃었던 아이가 자기 집을 찾아 부모 친척 형제 친구를 만나보는 일과 같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정치(政治)를 하는 것은 사람에 달려 있고 사람을 쓰는 것은 몸으로써 하고 몸을 수양하는 것은 도(道)로써 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만약 사람을 쓰는 데 몸으로써 하신다면 유악 안에 있는 사람은 사직을 보위하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니 아무 일도 모르는 보잘 것 없는 저 같은 자가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 만약 사람을 문으로만 뽑으신다면 잠잘 때 이외에는 모두 속이고 저버리는 무리일 것이니 이 경우에도 앞뒤가 막힌 보잘 것 업는 저 같은 자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다른 날 전하께서 왕 천하의 지경에 이르도록 덕화를 베푸신다면 저는 마굿간의 말석(末席)에서나마 채찍을 잡고 그  마음과 힘을 다해서 신하의 직분을 다할 것이니 어찌 임금을 섬길 날이 없겠습니까 ?

 

 

엎드려 원하옵건데 전하께서는 반드시 마음을 바로 하는 것으로써 백성을 샓게 하는 요점으로 삼으시고 몸을 수양하는 것으로서 사람을 쓰는 근본으로 삼으셔서 왕도의 법(王道의 法)을 세우십시요. 왕도의 법이 왕도(王道)의 법(法) 답지 않으면 나라답게 되지 못합니다. 밝게 살피시길 엎드려 비옵니다. 신(臣)은 떨리고 두려운 마음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죽음을 무릎쓰고 전하께 아룁니다.                                                     

 

 

 

 

 

 

 

이 사직상소(辭職上疏)를 받아본 국왕은 당시 스물을 갓 넘긴 명종(明宗)이었다. 중종(中宗)과 문정왕후(文定王后) 사이에서 태어난 명종(明宗)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탓에 모친인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수렴청정(垂廉聽政)을 하였다. 대비(大妃)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는 동안 피붙이인 윤원형(尹元衡)을 비롯한 외척(外戚)들은 권력을 마음대로 농단하였고, 급기야 임꺽정의 난 (林巨正의 亂)과 왜구(倭寇)의 침략 등 국내외의 혼란은 가중되고 있었다. 결국 이러한 혼란기에 가장 고통을 받는 것은 민초(民草)들이었다.

 

 

상소문(上疏文)을 받아본 명종(明宗)은 본질은 외면한 채 '고아(孤兒)'와 '과부(寡婦)'라는 표현에 격노하여 조식(曺植)을 불경죄(不敬罪)로 처벌하라고 명령하였다. 이 일을 두고 '조선왕조실록'의 사관(士官)은 ' 왕이 신하의 상소에 대해 답(答)을 하지 않고 도리어 문책(문책)하는 것은 자유로운 언로(言路)를 막는 것이다 '고 적었다. 또 ' 이 이후로 온나라의 선비들은 임금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알게되어  모두 비위 맞추는 데로 몰리게 될 것이다 '라고 애석해 하였다. 재야(在野) 지식인으로서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남명 조식(南冥 曺植)은 이 상소(上疏)로 인하여 논란의 중심에 섰지만, 한편으로는 국왕도 무시할 수 없는 재야(在野) 사림(士林)의 영수로 우뚝 서게 되었다.    

  

남명 조식은 이 상소문에서 대왕대비 문정왕후(文定王后)를 세상 물정 모르는 과부(寡婦) 또는 아녀자라고 하였고, 22세의 임금 명종(明宗)을 물 위의 배에 비유하며 어린아이에 불과하다고 했으며, 벼슬아치는 백성들 껍데기를 벗기는 탐관오리만한다고 하였으니,왕조시대인데도 온 나라를 진동시킬 만큼국정을 극력하게 비판한 것은 조선조 500년 역사상 전무후무(前無後無)한 것이었다.

 

 

남명이 살아간 시대는 사화(士禍)의 시기이었다. 50년간 지속된 사화(士禍)로 말미암아 지방에서 하문적, 사회적 기반을 바탕으로 중앙정부에 진출을 모색하던 사림파(士林派)는 훈구파(勳舊派)의 반격을 받아 좌절을 겪어야 했다. 을사사화(乙巳士禍) 이후 사화(士禍)의 끝이 보이는 듯 하였으나, 명종(明宗)의 즉위와 문정왕후(文定王后) 그리고 윤원형(尹元衡)으로 이어지는 외척(外戚)정치의 횡행은 국가의 기강(紀綱) 문란(紊亂)과 왕실의 친인척을 비롯한 권세가들의 정치 독점(獨占)을 강화시켰다. 

 

 

남명은 이러한 현실에서 선비가 서야 할 길은 비판의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것으ㅗ 여겼다. 임금에게 불경(不敬)한 표현이 될지언정  현실을 발 지적해주는 것이 선비의 몫이라고 판단했다. 당시 이 상소문(上疏文)으로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 군주(君主)에게 불경(不敬)을 범했다 '는이유로 남명을 처벌하자는 주장도 제기되었지만, 상당수의 대신(大臣)이나 사관(士官)들은 ' 남명이 초야(草野)에 묻힌 선비여서 표현이 적절하지 못한 것이지, 그 우국충정(憂國衷情)은 높이 살 만하다' 거나 또는 '남명에게 죄를 주면 언로(言路)가 막힌다 '는  논리로 남명(南冥)을 적극 변호함으로써 파문은 가라앉을 수 있었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과 '남명 조식(南冥 曺植)'은 같은 경상도에서 같은 해에 태어났다( 동도동경. 同道同庚). 퇴계는 경상좌도에서 태어나 인(仁)을 사랑했고, 남명 조식은 경상우도에서 태어나 의(義)를 사랑하였다. 이익(李瀷)은 ' 남명(南冥) '은 경상우도(慶尙右道)에, 퇴계(退溪)는 경상좌도(慶尙左道)에 해와 달처럼 있었으며, 좌도는 인(仁)을 사랑하고, 우도는 의(義)를 사랑한다'고 했다. 두 사람은  다 같이 '성리대전(性理大典)'에서 득력해 도학(道學)에 정진하였으며, 학문과 실천을 다함께 중요시하였다. 

 

 

 

 

 

                                         성성자                        惺惺子 

 

 

 

 

 

그러나 다른 점도 많았다. 남명 조식(南冥 曺植)은 ' 주자(朱子) 이후에 꼭 저술을 남길 필요가 없다.朱子以後 不必著述 '이라고 해 이론(理論)보다는 실천(實踐)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반면 퇴계(퇴계)는 왜 심성(心性) 수양을 해야 하는지를 따지는 이론(理論)을 중요시하였다. ' 남명 조식'이 존덕성(尊德性)을 강조하였다면, 퇴계는 도문학(道門學)을 강조한 것이다. 이 때문에 퇴계(退溪)는 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에 대한 연구와 토론에 열을 올렸는데 반하여 ' 남명 조식(南冥 曺植)'은 물 뿌리고 소제하고 손님을 응대하는 법도 모르면서 오활하게 이기(理氣)를 논하고 있다고 비아냥거렸다.   

 

 

 

 

 

 

 

 

 

 

 

남명(南冥)은 오히려 마음에 사욕(私慾)이 침노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를 칼로 잘라내고, 정신을 늘 깨어있게 하기 위해 경의검(敬義劍)과 성성자(猩猩子)를 차고 다녔다. 이 경의검(敬義劍)은 뒤에 그의 수제자(首弟子)인 정인홍(鄭仁弘)에게, 성성자(惺惺子)는 그의 외손녀사위 김우옹(金宇甕)에게 전수되었다.

 

 

 

                                            경과 의                 敬과 義

 

 

 

남명(南冥)은 무엇보다 학문에 있어서 수양(修養)과 실천(實踐)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경(敬)과 의(義)는 바로 남명사상(南冥思想)의 핵심이다. 남명은 '경(敬)'을 통한 수양을 바탕으로, 외부의 모순에 대하여 과감하게 실천하는 개념인 '의(義)'를 신념화하였다. 경(敬)의 상징으로 성성자(惺惺子 .. 항상 깨어있음)라는 방울을, 의(義)의 상징으로는 칼을 찼으며, 칼에는 ' 내명자경 외단자의 (內明者敬 外斷者義 ' ... 안으로 자신을 밝히는 것은 경(敬)이요, 밖으로 과감히 결단하는 것은 의(義)이다..라고 새겨 놓았다. 방울과 칼을 찬 선비 학자, 언뜻 연상하기 어려운 선비의 모습이지만, 남명은 이러한 모습으로 실천해 나갔다.

 

 

조정에 잘못이 있을 때마다 상소문(上疏文)을 통해 과감하게 문제점을 지적하고, 왜구(倭寇)의 침략에 대비하여 후학(後學)들에게는 강경한 대왜관(對倭觀)을 심어 주었다.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정인홍(鄭仁弘), 곽재우(郭再祐), 김면(金沔), 조종도(趙宗道) 등 남명 문하에서 최대의 의병장(義兵將)이 배출된 것도 '남명'의 가르침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남명(南冥)이 스스로에 엄격(嚴格)하였음은 '욕천 (浴川) '이라는 시(詩)에서 가장 압축적으로 나타난다. '그래도 티끌 먼지가 오장(五腸)에 남았거든 바로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보내리라 '는 시구(詩句)에서 보이듯, 유학자의 입에서 나왔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의 과격한 표현을 사용하였으며, 이는 그만큼 자신을 다잡는 강한 의지에서 나온 것이다.

 

 

경의(敬義)를 중요시한 남명의 사상에서 의(義)는 실천적 행동을 의미했다. 남명의 의(義)는 상벌(賞罰)에 엄격한 무인(武人)의 기질에도 어울리며, 그가 차고 다녔던 '칼'의 이미지와도 맥을 같이 한다. 남명의 칼은 안으로는 자신에 대한 수양(修養)과 극기(克己)로, 밖으로는 외적(外敵)에 대한 대처와 조정의 관료들에게 향해져 있었다. 남명이 1568년에 올린 상소문에서 주장한 '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 '은 조선 후기까지 조정에서 널리 수용되기도 했다. 칼로 상징되는 그의 이미지는 수양(修養)을 바탕으로 과감하게 현실의 부조리(不條理)와 모순(矛盾)을 극복해 가는 실천적인 선비 학자의 모습 바로 그것이다.

 

 

남명 사상의 핵심은 철저한 자기 수양(修養)과 적극적인 현실대응으로 집약된다. 중앙 정치가 정쟁(政爭)과 권력독점으로 인해 새로운 정치비전을 제시해줄 수 없을 때 '남명'은 그 대안으로 보다 객관적이고 냉철하게 현실을 판단할 수 있는 비판세력(批判勢力)의 현실참여(現實參與)를 적극 주장하였다. 엄격한자기 과리를 통해 비판자의 안목을 키우고 원칙과 양심에 비추어 옳은 것이라면 그 대상이 국왕이라도 결단코 주저하지 않았다. 그가 죽음에 이르면서도 현실비판자로 살아간 ' 처사 (處士) '로 불려지기를 원했던 것도 자신의 소신을 지켜나간 것이었다.  

 

 

 

 

 

 

 

 

 

 

평소 남명(南冥)은 한 개의 장도(粧刀)를 늘 품에 지니고 다녔다. 그가 지니고 있던 장도(粧刀)에는 ' 내명자경 외단자의 .. 內明者敬 外斷者義 '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직역하면, ' 내 안을 밝히는 것은 경(敬)이요, 내 밖을 처단하는 것은 의(義)다 '라고 옮길 수 있을 것이다. 그가 경(敬)과 이(義)를 좌우명으로 삼고 살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경(敬)은 '받듦'과 '삼가함'의 자세를 의미한다. 타인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이다. 남명(南冥)은 이 '경(敬)'으로 자신의 내부를 늘 밝히면서 근신하고 지냈던 것이다. 한편 '의(義)'는 '옳음'이니 정의로움을 향하는 정신이다. 그는 외부의 여러 정황들을 의로운 정신으로 판단하고자 했다. 의롭지 못한 것은 칼로 자르듯 베어내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가 패용하고 다녔던 장도(粧刀)는 자신을 경계하고 지키는 무기(武器)이었던 것이다. 그 칼은 '경'과 '의'에 혹시 소홀해질지도 모르는 자신을 추호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준열한 결의의 상징물이다.

 

 

또한 남명은 두 개의 작은 쇠방울을 그의 옷고름에 매달고 다녔다. 그는 그 방울의 이름을 ' 성성자(惺惺子) '로 명명하였다. '성(惺)'은 바로 '깨달음'이니 '성성자'는 스스로 경계하여 깨닫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성성자는 그가 움직일 때마다 영롱한 소리를 울렸으리라. 그 방울소리를 들을 때마다 남명은 자신을 일깨우고자 했던 것이다. 지금 나는 '경'과 '의'를 떠나 있지는 않는가 ? 내가 지금 가고 있는장소가 혹시 '경(敬)'과 '의(義)'로부터 먼 곳은 아닌가 ? 이러한 자기 검열, 자아 반성의 구도자적(求道者的) 삶을 살았던 것이다.       

 

 

 

 

 

 

                                    남명 기념관                   남명 기념관

 

 

 

 

 

 

 

 

 

 

 

 

 

 

 

 

 

 

 

 

 

 

 

 

 

 

                                          신명사도              신명사도

 

 

 

 

 

 

 

 

 

 

 

                                    남명과 퇴계                   南冥과 退溪 

 

 

 

 

우리나라 역사에서 16세기는 지방을 토대로 한 이른바 ' 사림 (士林) '이라 불리는 지식인들이 성장한 시기이었다. 이들 세력들은 지방에 따라 학문적 차이도 드러나게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곧 남명학파(南冥學派)와 퇴계학파(退溪學派)이다.

 

 

 

 

 

 

 

 

 

'남명학파'와 '퇴계학파'는 지리적(地理的)으로 낙동강(洛東江)을 사이에 두고 좌우(左右)로 나뉘어져 있어 각각 영남우도(嶺南右道)와 영남좌도(嶺南左道)를 대표하였다. 진주(晉州) 지역을 중심으로 한 '남명학파"가 현실을 비판적(批判的)으로 인식하고 실천적(實踐的)인 학문을 주장하였다면, 안동(安東)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퇴계학파(退溪學派)'는 현실을 긍정적(肯定的)으로 인식하면서 성리학(性理學)을 이론화(理論化)하였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實學者)' 성호 이익 (星湖 李瀷) '은 그의 저서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이 두 학파(學派)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 정리하고 있다. 중세 이후에는 퇴계(退溪)가 소백산(小白山) 밑에서 태어났고, 남명(南冥)이 두류산(頭流山 .. 지금의 지리산) 동쪽에서 태어났다. 모두 경상도 땅인데, 북도(北道)에서는 인(仁)을 숭상하였고, 남도(南道)에서는 의(義)를 앞세웠다.

 

  

성호 이익(星湖 李瀷)은 지리산(地理山) 아래에서 출생한 남명(南冥)이야말로 우리나라에서 기개(氣槪)와 절개(節槪)로는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였다고 평가하면서, 그의 제자(弟子)들이 여기에 영햐을 받아 정의(正義)를 사랑하고 구히지 않는 지조(志操)를 지녔다고 하였다. 반면 퇴계(退溪)의 제자들은 깊이가 있고 겸손(謙遜)하다고 평가하였다.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남명 조식(曺植)과 퇴계 이황(李滉)은 나이가 동갑이었다. 1501년에 경상우도와 경상좌도를 대표하는 대학자가 두 명이나 태어난 것이었다. 이황(李滉)이 71세로, 조식(曺植)이 72세로 세상을 떠났으니 두 사람은 완벽하게 동시대(同時代)를 살아간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서신(書信)만 왕래하였을 뿐 실제로 대면(對面)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조식(曺植)은 '퇴계학파'의 성리한 논쟁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는 '퇴계학파'가 현실인식(現實認識)은 하지 않고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이론(理論) 논쟁만 일삼고 있다고 생각했다. 반면 이황(李滉)은 조식(曺植)이 유학(儒學) 이론에 깊지가 못하다고 평하였다.  

 

이렇게 학문적으로는 이견(異見)이 있었지만, 두 사람은 서로 호감(好感)을 갖고 있던 라이벌이었다. 경상도(慶尙道)의 학자들 가운데는 두 사람을 모두 존경하여 두 문하(門下)를 번갈아 출입하며 학문을 계승한 인물들이 많았다. 정구(鄭逑), 김우용(金禹鏞), 정탁(鄭琢) 등이 그 대표적인 학자이다. 그러나 조식(曺植)의 수제자(首弟子)라고 할 수 있는 정인홍(鄭仁弘)의 경우 이황(李滉)을 비판한데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역적(逆賊)으로 처형을 당하면서 조식(曺植)의 명망이 퇴계에 비해서 빛을 잃게 되었다. 훗날 정조(正祖)는 ' 영남(嶺南)에서 절의(節義)있는 선비가 배출된 것은 실로 조식(曺植)의 힘 때문이니, 후세에 어찌 중도의 선비를 얻을 수 있겠는가. 이런 사람도 얻기가 쉽지 않다 '고 평했다. 

 

1571년에 퇴계(退溪)가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들은 조식(曺植)은 눈물을 흘리며 ' 같은 해에 태어나고 살기도 같은 경상도에 살면서 70년을 두고 서로 만나지 못했으니 어찌 운명(運命)이 아닌가. 이 사람이 가버렸다고 하니 나도 아마 가게 될 것이다 '하였다. 이 말처럼 조식(曺植) 또한일년 뒤 세상을 떠났는데, 일설에 의히면, ' 내 비석에는 처사(處士)라고만 써라 '는 이황(李滉)의 유언(遺言)을 들은 조식(曺植)이 ' 퇴계가 할 벼슬은 다하고 처사(處士)란, 평생 동안 출사(出仕)하지 않은 나도 이 칭호를 감당하기 어렵거늘...'이라고 했다고 한다. 

 

남명 조식(南冥 曺植)은 경상우도(慶尙右道)라는 지역적 정서와 함께 그 시대 사화(士禍)의 참상을 경험하면서 경의(敬義)를 학문이 실천지표(實踐指票)로 삼은 인물이다. 그의 실천적 학풍은 제자들에게 그대로 계승되어 임진왜란(壬辰倭亂) 의병장(義兵將) 출신에는 조식(曺植)의 제자들이 많이 나왔다. 남명학파(南冥學派)의 의병(義兵) 활동은 조식(曺植)의 핵심사상인 '경(敬)'과 '의(義)'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남명정신(南冥精神)을 대변하던 제자 정인홍(鄭仁弘)이 반역죄로 처형되면서 '남명학파'는 큰 타격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적 위기가 있을 때마다 민본(民本)을 바탕으로 한 '남명 조식'의 정신은 면면히 이어져 왔다. 1862년 진주(晉州)에서 민란(民亂)이 발발한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출처관                  出處觀

 

  

 

두 사람은 출처관(出處觀)도 달랐다. 퇴계는 도연명(陶淵明)을 좋아하는 자연주의자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와 형의 권유로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과거(科擧)에 3번 낙방(落傍)한 뒤 33세에 문과(文科) 급제하여 37년간을 벼슬살이를 하였고, 우찬성(右贊成)에 대제학(大提學)까지 지냈다. 비록 관직을 버리고 초야(草野)에 묻혀 도학(道學) 연구에 정진하려 했으나 이미 유학(儒學)의 종장(宗丈)이 되어 뜻대로 물러날 수 없었다.

 

반면에 남명(南冥)은 13번이나 왕의 부름을 받고도 한 번도 응하지 않았다. 나가면 하는 일이 있어야 하고 (出則有爲), 은거해 있으면 지키는 것이 있어야(處則留守)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명종(明宗) 때 한 번 불려나갔다가 명종(明宗)의 실정(失政)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다시 돌아왔다. 퇴계(退溪)는 사림(士林)이 정치 주체가 되어가려는 당시의 정국이 나가서 한 번 해볼만하다고 생각한 데 반해, 남명(南冥)은 문정왕후(文定王后)와 윤원형(尹元衡)이 설치는 권신정치(權臣政治) 시대에 나아간들 자기의 뜻을 펼 수 없다는 주장이다. 

 

그렇다고 남명(南冥)이 끝까지 벼슬을 하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세월이 좋아지면 나가도 된다는 것이고, 실제로 제자들을 내보내 화담계열과 함께 광해군(光海君) 시절 북인정권(北人政權)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남명계'는 몰락하였다. 이런 점에서 도통(道統)은 퇴계(退溪)로 넘어가고, 남명(南冥)은 절의(節義)를 숭상한 마지막 인물로 남게 되었다.    

    

 

 

 

요즘트위터페이스북더보기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