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 宋時烈
조선(朝鮮)을 ' 송시열의 나라 '라고까지 연상하게 만든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조선 후기 정치계(政治界)와 사상계(思想界)를 호령하였던 인물이다. 조광조(趙光祖)와 더불어 조선을 유교(儒敎)의 나라로 만든 장본인이었던 그는 우리나라 학자 중 유일하게 ' 자(子) '를 붙여 ' 송자(宋子) '라고 불린 유일한 인물로, 역사상 가장 방대한 문집(文集)인 일명 '송자대전(宋子大典)'을 남겼다.
송시열 (宋時烈 ... 1607~1689) ...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 또는 화양동주(華陽洞主),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1633년 생원시에서 장원급제하여, 최명길(崔鳴吉)의 추천으로 경릉참봉(敬陵參奉)이 되었으나 곧 사직, 1635년 봉림대군(鳳林大君 ..효종)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가문과 일생
우암 송시열은 은진(恩津) 송씨로, 그의 가문은 역대로 충남 회덕(懷德)이 세거지이었다. 아버지는 송갑조(宋甲祚)이며 어머니는 '선산 곽씨'이다. 그의 집안이 회덕(懷德)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9대조인 송명의(宋明誼)가 회덕으로 장가들면서부터이다. 그 후손들은 이후 회덕 백달촌에 송씨(宋氏)의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으며, 그로 인해 이 지역을 송촌(宋村 .. 현재 대전시 동구 중리동)이라 불렀다. 백달촌은 산이 높고 물이 깊으며 흙이 비옥하여 농사에 적합한 땅이었다.
'은진 송씨'가 회송(懷宋)이라고 불릴 만큼 지역 사회에 깊은 연고를 가지게 된 것은 쌍청당(雙淸堂) 송유(宋愉. 1388~1446)부터이다. 1432년(세종 14)에 '송유'가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백달촌에 쌍청당을 짓고 살았는데, 그 뜻을 받든 후손들이 쌍청당을 정성껏 지켜내어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은진 송씨' 집안은 송유(宋愉) 이후 크게 현달한 집안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벼슬길이 완전히 끊긴 것도 아니었다. 17세기에 들어와 '은진송씨' 가문(家門)은 송규연, 송규렴, 송상기, 송준길, 송구수, 송시열등 뛰어난 인물들을 배출하기 시작하였다.
송시열은 외가(外家)가 있는 옥천 적동강가 구룡촌에서 태어났다. 외가인 '선산곽씨' 집안은 옥천에 세거지가 있었으며, 외할아버지는 임진왜란 때 조헌(趙憲)과 함께 목숨을 바친 의병장 곽자방(郭自防)이다. 송시열을 낳을 때 어머니 곽씨는 명월주를 삼키는 태몽(胎夢)을 꾸었고, 부친은 공자(孔子)가 여러 제자들을 거느리고 집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어릴 때 이름인 성뢰(聲賚)는 부친이 꾼 태몽에 따른 것이다.
송시열이 친가(親家)가 있는 회덕(懷德)으로 간 것은 여닮 살 되는 1614년이다. 이때 친족인 '송이창' 집에서 송이창의 아들이자 쌍청당의 7대손인 송준길(宋浚吉. 1606~1672)과 함께 수학하였다. 11세가 되던 해인 1617년(광해군 9)부터는 아버지 송갑조(宋甲祚)에게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아버지로부터 받은 교육은 송시열의 성품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아버지 송갑조(宋甲祚)는 광해군 시절, 사마시에 합격한 이들이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있는 서궁(西宮)에 인사하지 않겠다는 것에 반발하여 홀로 서궁에 찾아가 절을 할 정도로 대쪽같은 인물이었다. 이 일로 유적(儒籍)에서 삭제되어 고향으로 낙향하였고, 그 뒤로 두문불출하며 학문과 아들 교육에만 전념하였다. 송시열의 학문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주자(朱子)와 율곡(栗谷)이었다. 그렇게 된 데는 부친의 영향이 크다. 송갑조는 송시열이 열두 살 때 ' 주자(朱子)는 훗날의 공자(孔子)이다. 율곡(栗谷)은 훗날의 주자(朱子)이다. 공자를 배우려면 마땅히 율곡(栗谷)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라며 주자와 율곡 그리고 조광조 등을 흠모하도록 가르쳤다.
효종의 사부가 되다
16252년(인조 3), 송시열은 19세의 나이로 도사 '이덕사'의 딸 '한산 이씨'와 혼인하였는데, 이씨는 목은 이색(牧隱 李穡)의 후손이다. 1627년 이;후 송시열은 연이는 큰 슬픔을 당하게 된다. 1627년 후금(後金)이 조선을 침입하는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 그만 그의 맏형인 '송시희'가 운산에서 전사하였다.
22세 때인 1628년에는 부친마저 세상을 떠났다. 부친상을 마친 뒤인 1630년에 송시열은 율곡(栗谷)의 학문을 계승하기 위하여 율곡을 정통으로 계승한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고, 이듬해 김장생이 죽자 그 아들 김집(金集)의 문하에 들어갔다. 1633년 송시열은 27세의 나이로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를 시제(試題)로 논술하여 생원시에 장원급제하였고, 최명길(崔鳴吉)의 천거로 경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곧바로 사직하고 송준길과 영남을 유람하며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가 1635년 11월에 훗날 효종(孝宗)이 되는 봉림대군(鳳林大君)의 사부로 임명되었다. 이후 약 1년간에 걸친 사부생활은 효종과의 깊은 유대와 함께 북벌계획을 도모하는계기가 되었다. 이듬해 병자호란 때 왕을 호종(扈從)하여 남한산성으로 피란하였고, 1637년 인조(仁祖)가 삼전도에서 청(淸)나라에 항복한 후 낙향한다.
그 후 효종이 즉위하자 장령(掌令)에 등용되었으나, 당시 집권세력인 서인(西人)의 청서파(淸西派)에 속한 그는 공서파(功西派)의 김자점(金自點)이 영의정이 되자 사직하고 다시 낙향한다. 이듬해 김자점이 파직된 후 다시 벼슬길에 올랐으나 김자점(金自點)이 청(淸)나라에 조선이 북벌(北伐)을 계획하고 있다고 밀고(密告)함으로써, 북벌계획의 핵심인물로 지목받아 청(淸))나라의 압력으로 사직하고 다시 낙향하였다. 그 뒤 충주목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후진 양성에 전심하였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비극은 송시열의 전 생애에 걸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의 절친한 동문인 윤선거(尹宣擧)와도 갈등을 빚었고, 윤서거의 아들이면서도 그가 총애한 윤증(尹拯)과도 결별함으로써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의 분쟁도 일어 났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 청나라와 굴욕적인 강화(講和)를 맺게 되자 송시열은 벼슬생활의 뜻을 접고 충북 황간으로 낙향하여 한천정사(寒泉精舍)를 짓고 북벌계획(北伐計劃)을 구상하며 강학(講學)에 힘을 기울였다. 낙향한 그를 인조(仁祖)가 여러 차례 불렀지만 송시열은 그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송시열(宋時烈)이 인조(仁祖)의 계속적인 부름에 응(應)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는 잘 알려져 있지는 않다. 모양새로는 그가 벼슬에 관심이 없어서 그런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가 경세(經世)에 뜻이 없는 인물은 아니었다.
효종(孝宗)과 북벌계획
송시열의 나이 43세인 1649년에 효종(孝宗)이 즉위하자, 효종은 대군(大君)으로 있을 때 사부(師傅)이었다는 이유로 송시열을 불러 곁에 두고 싶어하였다. 효종은 왕위에 오르기 전, 병자호란으로 중국 심양(瀋陽)에서 인질(人質) 생활을 몸소 겪은 왕이었다.
효종은 즉위하면서 재야에서 학문에만 전념하던 산림(山林)들을 대거 중앙 정계에 등용하고자 하였고, 대표적인 인물이 스승인 송시열이었다. 효종은 즉위하자마자 국가 원로들을 궁궐로 초빙하였고 병자호란의 치욕을 갚기 위하여 와신상담할 것을 밝혔다. 화답이라도 하듯이 송시열은 1649년 기축봉사(己丑封事)를 올려 북벌론(北伐論)의 합당함을 제시하고 북벌(北伐)이야말로 국가대의(國家大義)라는 것을 표방하였다.
기축봉사(己丑封事)는 밀봉한 채로 효종에게 올려졌다. 모두 13개조로 되어 있는 이 봉사(封事)에서 송시열은 '대일통 (大一通) '의 큰 뜻을 밝히는 것을 가장 중요한 내용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 내용이 밖으로 알려져서는 안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 조목은 ' 슬픔을 절제하여 몸을 보호할 것 ... (絶哀以保身)으로부터 정사를 바르게 하여 오랑케에 맞설 것 ...(修政事以禦外侮)에 이르기까지 군왕으로서 지켜야할 내용들이었다.
물론 여기서 오랑케란 청나라를 의미하는 것이다. 송시열에게 중국의 주인은 여전히 청(淸)이 아닌 명(明)이었다. 청나라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는 현실인식은 송시열에게는 패륜(悖倫)이자 반역(叛逆)과 같은 것이었다. 효종이 즉위하자마자 송시열은 현실로 굳어진 국제관계를 무시하고 유교적인 가르침대로 명나라를 위해 복수해 줄 것을 효종에게 당부하고자 한 것이다.
송시열에 대한 효종의 대우는 극진하였다. 왕이 청나라에 대한 북벌(北伐)을 계획할 때면 사관(史官)이나 승지(承旨)마저 멀리한 채, 독대로 의논할 정도이었다. 효종의 총애를 받은 송시열이지만, 인조(仁祖)에게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벼슬길에 나서지는 않았다. 표면적인 이유는 70이 넘은 늙은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예의와 염치가 없는 무리들이 권력을 잡고 있는 조정에는 나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효종(孝宗)은 거듭해서 송시열에게 관직을 내렸고, 송시열은 그때마다 사양하였다. 효종의 끊임없는 구애는 계속되었다. 효종 9년인 1658년 2월에 송시열이 부름에 응하지 않자 효종은 ' 봄이 와서 날이 풀리면 올라오라고 했는데, 송시열이 오지 않는 것이 청나라 사신이 온다는 소식을 들어서인가 ? '라며 걱정했다. 결국 그해 7월 효종의 간곡한 부탁으로 송시열은 관직에 나갔고, 9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2월에는 북벌(北伐) 때 입으라며 초구(담비로 만든 옷)을 직접 하사할 정도로 효종은 그를 존경하였고 신임했다. 그러나 효종은 그로부터 1년도 되지 않아 급서(急逝)하였다. 송시열이 조정의 대신으로 효종과 국사를 의논한기간은 너무 짧았고, 서인(西人)의 영수로서 정치적 부침(浮沈)이 시작되었다.
송시열의 執權과 失閣, 그리고 사사(賜死)
1658년(효종 9)에 이조판서로 승진, 효종(孝宗)과 함께 북벌계획(北伐計劃)을 추진하였으나 이듬해 효종이 죽자 그 계획은 중지되었다. 그 뒤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제기되자 기년설(琪年說 ..만 1년)을 주장하여 관철시키고 2년설을 주장하는 남인(南人)을 제거하여 정권을 장악하며 서인(西人)의 지도자로 자리를 굳혔다.
1660년(현종 1)에 앞서 효종의 장지(葬地)를 잘못 옮겼다는 규탄을 받고 낙향하였고, 1668년에 우의정이 되었으나, 좌의정 허적(許積)과의 불화로 사직하였다가 1671년 다시 우의정이 되었고, 이듬해 좌의정이 되었다.1674년 인선왕후의 죽음으로 시작된 2차 예송(禮訟)에서는 기년설(琪年說)을 주장한 남인(南人)에게 패배하여 덕원(德源)으로 유배되었고, 그 후 여러 곳으로 옮겨가며 유배생활을 계속하였다.1680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南人이 실각하자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로 기용되었다가 1683년 벼슬에서 물러나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이 무렵 남인(南人)에 대한 과격한 처벌을 주장한 김석주(金錫胄)를 지지함으로써 많은 비난을 받았는데, 그 중에서도 제자 윤증(尹拯)과의 감정 대립이 악화되어 마침내 서인(西人)은 윤증(尹拯) 등 소장파를 중심으로 한 소론(少論)과 송시열을 영수로한 노장파의 노론(老論)으로 다시 분열되었다.그 뒤 정계에서 은퇴하고 화양동(華陽洞)에서 은거생활을 하였는데, 1689년 왕세자가 책봉되자 이를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 상소를 했다가 제주에 안치되었고 이어 국문(鞠問)을 받기 위하여 서울로 오는 도중 정읍(井邑)에서 사사(賜死)되었다. 그리고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가 끝난 후에 신원(伸寃)되었다
송시열은 주자(朱子)를 신앙으로 삼을 정도로 '주자제일주의자 (朱子第一主義者)'이었다. 송시열이 항상 주자(朱子)을 입버릇처럼 되뇌이자, 효종(孝宗)이 ' 경(卿)이 말마다 옳은 이가 주자이며, 일마다 옳은 이가 주자이십니다 '라고 답변할 정도이었다고 한다.
송시열과 주자
송시열은 주자(朱子)의 남송(南宋)시대가 자신의 시대와 유사하다고 믿은 인물이었다. 내우외환(內憂外患)이라는 주자가 당면했던 문제가 조선의 당면 문제와 유사한 것으로 보았고, 그로 인해 주자(朱子)가 제시하였던 대책은 지금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하였다.
조선이 건국된 상황은 송(宋)과 똑같기 때문에 그 말류(末流)의 폐단 또한 서로 비슷합니다.국력(國力)의 강하고 약함도 비슷하고 지방관리들의 부패도 비슷하며, 호강(豪强)한 자가 제맘대로 난폭하게 구는 것도 비슷합니다. 주자(朱子)는 당시에 눈으로 이런 것들을 보았으므로, 말한 바가 매우 절실하고 정성스러워, 그 병에 꼭 들어맞는 처방이었습니다. 오늘날의 병(病)을 치료하고자 한다면, 이 약(藥)을 버리고 무엇으로 하겠습니까? ... 숙종실록 권 14. 숙종9년 6월.
송시열은 유학(儒學)의 정맥이 윤휴(尹虧) 등에 의하여 심하게 훼손되었다고 생각하였고, 주자(朱子)의 학설을 비판한 윤휴(尹虧)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았다. 윤휴(尹虧)에 대한 송시열의 반감은 훗날 그가 총애하던 제자 윤증(尹拯)과 불화(不和)하는 이른바, '회니시비(懷尼是非)'라는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의 분당(分黨)으로까지 비화되었다.
회덕(懷德)에 살았던 송시열과 니산(尼山)에 살던 윤증(尹拯)은 사제지간이었고, 윤증의 부친 윤선거(尹宣擧)는 ' 사계 김장생'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사이이었다. 생전에 율곡(栗谷)의 년보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윤선거가 '윤휴'의 논지를 인정하는 뜻을 비친 적이 있었는데, 윤선거는 송시열과 자신의 아들인 윤증 사이를 원만하게 이끌려는 의도가 있었지만, 송시열은 윤선거가 '윤휴'를 두둔해주었다고 생각하였다.
송시열의 영정(影幀) ... 국보 제239호
국보 제239호로 지정된 이 그림은 가로 56.5cm 세로 97cm의 크기로 비단바탕에 채색하여 그린 반신상(半身像)이다. 머리에는 검은색 건(巾)을 쓰고 유학자들이 평상시에 입는 옷인 창의(彰衣)를 걸치고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다.
과장되게 표현된 거구(巨軀)의 몸체와 개성적인 눈썹, 깊게 패인 광대뼈의 주름, 강한 눈매, 붉은 입술 등에서 그의 학문의 깊이와 동시에 과격한 성품을 엿볼 수 있다. 얼굴은 엷게 채색한 다음 갈색선으로 주름을 그렸고, 옷의 주름은 부드러운 곡선으로 간결하게 표현하였다. 그리고 옷의 黑과 白의 극명한 대조(對照)는 유학자로서의 기품을 더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이 초상화를 그린 화가는 누구인지 모르며, 제작 시기도 알 수 없다. 그림 오른쪽 상단에 1651년 45세인 송시열이 지은 제시(題詩)와 1778년(정조 2)의 정조 어제찬문(御製讚文)이 적혀 있는데, 이를 근거로 이 그림을 1651년에 제작된 것으로 판단하기는 곤란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우암연보(尤庵年譜)에 기록된 송시열의 생시도사본상(生時圖寫本像)의 기술내용과 다르며, 그림의 얼굴모습이 45세가 아닌 노년기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그림은 어제찬문(御製讚文)이 씌여진 정조(正祖)초기에 이모(移摸 .. 원본을 충실하게 옮겨 그린 모사본)된 것으로 추정하며, 그 위에 송시열이 45세 때 지은 제시(題詩)를 옮겨 적은 것으로 보고 있다.
성리학의 보급과 함께 서원이나 사당이 지역별로 늘어나면서 이 곳에 봉안할 초상화가 많이 필요하게 되었다. 송시열의 비중을 말해주듯 그가 죽은 뒤 그를 받들고 추모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많은 영당과 서원이 건립되었고, 그 곳에 봉안하기 위하여 이모본(移摸本)들이 제작되었는데, 현재 5점이 전해지고 있으며 그 중에서 이 그림이 가장 뛰어난 즉, 비록 이모본이라고 하더라도 명암(明暗)을 사용하지 않은 솜씨가 훌륭한 그림이라고 한다.
1차 예송전쟁 1차 禮 訟 論 爭
효종(孝宗)이 죽은 뒤, 그의 계모(繼母)인 자의대비(慈懿大妃 .. 趙大妃)가 효종의 상(喪)에 어떤 복(服)을 입을 것인가를 두고 일어난 논란이었다. 조선의 지배 이념인 성리학에 근거한 예론(禮論)에서는 자식이 부모에 앞서 죽었을 때 그 부모는 그 자식이 적장자(嫡長子)인 경우에는 3年喪을, 그 이하 차자(次子)일 경우에는 1년상을 입도록 규정하였다.
인조(仁祖)는 첫째 아들인 소현세자가 죽은 뒤, 소현세자의 아들이 있었음에도, 차자(次子)인 봉림대군 (효종)을 세자로 책봉하여 왕통을 계승하게 하였다. 따라서 효종이 왕위에 오름으로써 왕통(王統)은 인조에서 효종으로 이어졌지만, 적장자(적장자가 有故 時, 嫡長孫)가 잇는 관념에서는 벗어난 일이었다.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西人세력은 1년상을 주장한 것에 반하여, 윤휴(尹휴), 허목(許穆), 윤선도(尹善道) 등 南人은 그 주장을 반박함으로써 1차 예송논쟁이 시작되었다.송시열 등 西人은 효종이 왕통상으로는 仁祖의 적통을 이었지만 종법상(宗法上)으로는 인조의 둘째 아들이므로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는 당연히 종법에 따라 1년상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고, 반면 허묵 등 남인(南人)은 천리(天理)인 종법이 왕가의 의례에서는 변칙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는 논리로 자의대비는 효종을 위하여 3년의 복을 입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결국 경국대전에 장자와 차자의 구분없이 1년복을 입게 한 규정에 의거하는 것으로 결말지어지게 되어, 결과적으로 서인(西人)의 예론(禮論)이 승리를 거두었으므로 서인정권(西人政權)은 현종시절에 계속 유지될 수있었지만, 종법질서에 있어서 효종의 위상에 대한 논란은 결론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이 문제는 결국 2차 예송(禮訟)의 빌미가 되었다.
장례 복상 문제를 놓고 서인과 남인이 치열하게 대립한 이 논쟁은 단순한 왕실의 장례절차 문제가 아니었다. 예(禮)란 그 자체가 사회규범이자 행동의 절차이다. 예송논쟁은 禮의 틀에 각 정파의 정치적 이해가 실림으로써 일어난 정치국면이다. 인조(仁祖)이래 정치권력을 독점한 西人과 그에 대항하여 정권교체를 추구해 온 南人 사이의 정치투쟁이 예송이란 외투를 입고 나타난 것이다.
예론이란 형식을 빌려 나타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국정운영에 대한 철학과 노선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서인의 신권(臣權)강화론과 남인의 왕권(王權)강화론의 대립이었다. 서인(西人)이 도학(道學)의 경지를 이상적 정치로 상정하는 것은 도학의 권위자인 사대부가 정치를 담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 차례의 예송에서 일관되게 국왕의 특수 지위보다 주자가례(朱子家禮)의 규정을 상위에 두고자 한 것은 국왕의 국정에 대한 전권 행사를 사실상 부인하는 것이었다.
한편 남인(南人)의 왕권강화론(王權强化론)에는 권력의 주변에만 머물러 있어야 했던 소수세력(少數勢力)의 처지가 담겨져 있다. 평소 구상해 온 정책을 펴보기 위하여는 집권(執權)을 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왕권(王權)과 결합할 수 밖에 없었다. 두 차례의 예송(禮訟)에서 국왕의 권위를 일관되게 주장한 것도 그런 이유이었다.
2차 예송논쟁 2차 禮訟論爭
2차 예송은 효종의 비(妃)인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효종의 계모인 조대비(趙大妃 ..자의대비)가 어떤 상복을 입을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벌어졌다. 1차예송에서는 국제기년복(國制箕年服)이 채택됨으로써 효종의 장자,차자 문제가 애매하게 처리되었으나, 인선대비가 죽으면서 이 문제가 다시 표면으로 떠 올랐다. 즉 효종을 長子로 인정한다면 인선대비는 장자부(長子婦)이므로 조대비는 기년복(1년)을 입어야 되지만, 효종을 차자(次子)로 볼 경우 복제는 대공복(大功服 .. 9개월)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조(禮曺서는 처음에 기년복(箕年服)으로 정하였다가, 다시 대공복(大功服)으로 바꾸어 올렸다. 현종은 예조에서 대공복제를 채택한 것은 결국 효종을 차자(次子)로 보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여 잘못 적용된 예제로 판정하였다. 이후 송시열계의 서인(西人)세력이 대대적으로 정계에서 축출되면서 결국에는 남인정권(南人政權)이 들어서는 계기가 되었다.
회니시비 懷尼是非. 1. ... 스승 宋時烈과 제자 尹拯의 대 립
노론(老論)의 영수 송시열(宋時烈)과 송시열의 제자(弟子)이며 소론(少論)의 영수이었던 윤증(尹拯)의 대립을 흔히 회니시비(懷尼是非)라고 부른다. 송시열이 대전의 동쪽에 위치한 회덕(懷德)에서 살았고, 윤증(尹拯)은 논산군 노성면에 해당하는 니성(尼城)에 살았기 때문이다. 훈구파와 사림파가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절이 지나면 조선은 붕당정치(朋黨政治)에 휩싸인다. 붕당(朋黨)은 조선 중기(中期)에 모습을 드러내어 세도정치(勢道政治)가 등장하는 조선 말기(末期)까지 이어진다.
애초 붕당정치의 정국 주도권을 잡은 것은 동인(東人)이었으나, 인조반정(仁祖反正)을 거치며 서인(西人)이 득세하였다. 그러나 서인(西人)도 숙종 초에 핵분열을 일으켜 노론과 소론으로 갈리며 이후 약 100여년 가량 각종 현안에 대하여 대립과 갈등을 보였다. 노론(老論)과 소론(少論).. 그 중심에는 송시열(宋時烈)과 그의 제자(弟子) 윤증(尹拯)이 있었다.
송 시 열 윤 증
송시열은 8세에 송이창의 문하로 들어갔는데 이 때 송준길(宋浚吉)을 만나고, 두 사람은 우여곡절 속에서도 평생지기(平生知己)로 지낸다. 그 후 송시열은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과 김집(金集)의 가르침을 받으면서는 윤증(尹拯)의 아버지 윤선거(尹宣擧)와 우정을 나누게 된다.
송시열은 병자호란과 효종의 북벌계획이 탄로나면서 조정과 재야(在野)를 넘나들던 중, 20년 가까이 절친하게 지내던 윤선거와 사이가 벌어진다. 그 발단은 백호 윤휴(白湖 尹虧)의 경전 해석... 윤휴가 "중용(中庸)'에 대해 집주(集註)를 달자 송시열은 그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 붙였다. 송시열과 윤휴의 대립은 예송논쟁(禮訟論爭)으로 극에 달하였고, 윤휴는 숙종 6년 허적(許積)의 서자(庶子) 허견(許堅)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사약을 받았다. 반면 윤증의 아버지이자 송시열의 친구이었던 윤선거는 윤휴의 경전해석을 긍정적으로 보았다. 오직 주자해석(朱子 解釋)만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통념에서 다소 벗어난 시각이었다.
윤증은 1629년에 출생하여 송시열보다 22세 아래이다. 아버지 윤선거를 비록하여 송준길, 송시열에게서 수학(修學)하였고, 윤휴,윤선도 등 남인계 석학들과도 교류를 갖으며, 양명학(陽明學)에도 관심이 컸다. 특히 송시열 문하에서는 가장 뛰어난 실력을 보여 조정으로부터 여러 차례 관직을 제의받았으나 끝까지 한사코 뿌리쳤다.
회니시비(懷尼是非)는 송시열이 예송논쟁을 벌이는과정에서 윤선거(尹宣擧) 부자(父子)가 자신에 동조하지 않고, 윤휴를 감싸고 돌자 병자호란 당시의 강화도(江華島) 수난과 탈출 사건을 들고 나오면서 시작되었다. 송시열의 주장에 따르면... 윤선거는 강화도에 있을때 친구들과 함께 의병(義兵)을 모집한 뒤 성(城)을 사수하기로 약속하였다.
친구인 권순장과 김익경, 이돈오 등은 남한산성이 청나라 군사에 함락되던 날 약속대로 자결하였고, 윤선거의 처(妻)도 자결하였다. 오직 윤선거만이 살아 남았다. 더구나 윤선거는 적군에게 무릎을 꿇고 구걸하였다. 봉림대군(鳳林大君 ..후일 효종) 사신 일행이 성으로 들어오자 이름을 바꾸고 노비로 위장한 뒤, 돌아가는 사신 일행에 붙어 몸만 살짝 빠져나온 모양새가 참으로 부끄러운 행동이라는 것이었다.
윤선거의 주장은 조금 다르다. 그는 권순장과 김익경은 남문을 지키던 정승 김상용(金尙容)이 분신자살하자 싸우지도 않고 자결하였으며, 자신의 처(妻)가 죽은 것 역시 적(敵)에게 잡혀 능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자결하는 것이 낫다고 여긴 탓이다.
미복(微服)으로 강화도를 탈출한 것은 교전(交戰)이 이미 끝났을 뿐만 아니라 적(敵)에게 포위된 남한산성으로 급히 아버지를 만나러 가기 위해서였다는 것이었다. 양쪽의 주장은 다소 차이(差異)가 있지만, 윤선거가 강화도에서 당한 수난과 탈출(脫出)은 사실이었다. 때문에 윤선거는 과거(科擧)시험도 단념하고, 재취도 얻지 않은채 평생을 자숙하여 재야(在野)에서 지내야 했다. 죽을 때까지 강화도에서의 일은 그를 옭아맨 족쇄이었다.
회니시비. 2 懷尼是非. 2
그러나 송시열과 윤선거는 회니시비를 벌이면서도 아주 절교(絶交)하지는 않았다.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가 1669년에 죽자, 41세의 윤증은 아버지의 연보(年譜)와 박세채(朴世埰)가 지은 행장(行狀)을 갖고 아버지의 친구이자 자신의 스승인 송시열(宋時閱)을 찾아가 묘갈명(墓碣銘)을 부탁한다.
이에 송시열은 새삼 병자호란 당시 윤선거의 비겁한 행적을 거론하며, 억지로 묘갈명을 써 주지만 아술부작(我述不作 ... 나는 다만 기술만 하였지, 짓지는 않았다 )이라는 첨언을 분명히 하였다. 즉 " 나(송시열)는 윤선거를 잘 모른다. 오직 박세채가 쓴 행장(行狀)에 의거하여 말할 뿐"이라는 것이다.이에 윤증은 4~5년에 걸쳐 장문(長文)의 편지를 보내거나 직접 송시열을 찾아가 개찬(改撰)을 청했으나, 송시열은 비문(碑文) 내용에는 전혀 손대지 않고 글자 몇 군데만 고쳐서 주었다. 이는 스승과 제자 두사람이 멀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계기는 따로 있었다.
먼저 윤증이 비명(碑銘)을 요청하며 가져간 기유의서(己酉疑書)가 화근을 낳았다.윤선거가 죽기 4년 전에 작성한 기유의서(己酉疑書)는 설령 윤휴와 허목 등이 잘못했을지라도 같은 사림(士林)이니 너무 배척하지 말고 차차 중용하는것이 옳다며 송시열에게 충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윤증은 윤선거가 생전에 보내지 않았던 서신을 선의(善意)로 보여주었지만 이는 송시열의 비위를 건드린 것이 되고 말았다.
여기에 신유의서(辛酉疑書)가 덧붙여지면서 송시열과 윤증 사이에는 갈등의 골이 깊어지기만 한다. '신유의서'는 숙종13년 경신환국이 있었던 다음 해에 윤증이 송시열에게 보내려고 쓴 편지이다. 송시열의 학문은 그 근본이 주자학이라고 하나 기질(氣質)이 편백하여 주자(朱子)가 말하는 실학(實學)을 배우지못하고 있다는 내용이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송시열의 존명벌청(尊明伐淸)은 말로만 방법을 내세울뿐 실익이 없다는 것이었다.
윤증은 이 의서(疑書)를 먼저 박세채에게 보여 주었는데, 박세채가 보내지 말라고 강권(强勸)하여 일단 송시열에게 보내지 않았다. 그러나 송시열의 손자이자 박세채의 사위인 송순석이 박세채의 집에서 의서를 몰래 가져가 송시열에게 전하였다. 송시열은 크게 화를 내며 치를 떨었고, 그 후 두 사람은 의절하였고,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의 분당(分黨)에도 가속도가 붙었다.
회니시비(懷尼是非)는 삼전도의 비문(碑文)을 뚤러 싼 시비(是非)로 이어졌다. 삼전도(三田渡) 비문은 송시열을 조정에 천거한 이경석이 지었다. 송시열은 숭명(崇明) 의리에 입각하여 이경석을 성토하고 나섰고, 윤증을 중심으로 한 소론은 어차피 군신)君臣이 청(淸)에 항복한 이상 누구든지 그 비문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는 상황논리로 반박하였다.
송시열을 영수로 한 노론(老論)과 윤증을 따르는 소론(少論)은 이처럼 여러 면에서 의견을 달리하며 첨예한 대립을 보였다. 송시열은 주자학 절대주의자이었으며, 철저한 숭명반청(崇明反淸)을 정치철학으로 삼았다. 반면 윤증은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도모하고 현실에 바탕한 정치를 꿈꿨다. 그 탓에 스승과 제자는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갈라섰다.
宋子와 宋者 그리고 李子
조선왕조실록에 3,000번 이상 언급된 송시열(宋時烈)은 83세의 나이에 " 죄인들의 수괴 (罪人들의 首魁) "라는 죄목으로 정읍(井邑)에서 사약(賜藥)을 마시고 세상을 떠났다.
조선의 유학자 가운데 송시열만큼 극단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사람도 드물다. 그를 추앙하는 이들은 "사문(斯文)의 종사(宗師)" ... "아동(我東)의 주자(朱子)" .. "태산교악(泰山喬嶽)"이라 평가하여 칭송하고, 반대쪽에 있는 이들은 " 당쟁(黨爭)의 화신" .... " 권력욕(權力慾)의 화신" .... "골수 사대주의자(事大主義者) " 등이라 비난한다.
그를 일컫는 송자(宋子)에 대한 해석도 극단적이다. 송시열을 추앙하는 이들에게는 공자(孔子))와 주자(朱子)에 버금가는 성인(聖人)으로 존칭하여 쓰는 말이고, 비난하는 쪽은 욕할 때 쓰이는 " 놈 者 "를 써서 송자(宋者)라는 최하급의 비칭으로 부른다. 그에 대한 평가를 단적으로 알 수 있는 단어이다.
이자 李子
율곡 이이(李珥)와 퇴계 이황(李滉)도 한때 이자(李子)로 불린 적이 있다. 이도중(李度中)이 이율곡의 책을 편찬하며 " 이자성리서 (李子性理書) "라는 제목을 붙인 적이 있고, 성호 이익(李瀷)은 퇴계 이황의 책에 "이자쇄어(李子粹語)"라고 이름 붙인 적이 있다.
이율곡과 이퇴계의 이름 뒤에 " 자(子) "를 붙인 이유는 만주족(滿州族)의 청(淸)나라가 중국을 정복한 후 성현(聖賢)의 도(道)가 중국에서는 사라진 반면 조선으로 이어졌다는 적극적인 의사표시이었다. 하지만 이는 한 때뿐이었고, 또한 개인(個人) 차원의 높임이었다.
그러나 송시열이 송자(宋子)로 존숭된 것은 조선 후기 내내 이루어졌고, 또 국가 차원의 높임이라는 점에서 율곡이나 퇴계의 경우와 달랐다. 송시열의 문집인 " 송자대전(宋子大典) "은 정조(正祖)의 명에 의하여 국비(國費)로 간행된 사실이 이를 말해 준다. 사약을 마시고 죽은 송시열은 불사신(不死身)처럼 국가의 성현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송시열의 죽음
송시열... 그는 유교국가, 조선에서 최고의 성현(聖賢)으로 추앙받던 인물이다. 전라북도 정읍시(井邑市)에는 송시열의 수명유허비(受命遺墟碑)가 세워져 있다. 송시열은 이 곳에서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이 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 83세이었다. 당시 유배지이던 제주도에서 국문(鞫問)을 받기 위하여 압송되어 오던 중 이 곳에서 사사(賜死)된다.
受 命 遺 墟 碑 ..전북 정읍, 이곳에서 송시열은 賜死된다.
송시열은 83세라는 아주 많은 나이에 , 그것도 사약을 마시고 세상을 떠난다. 조선시대에 대신(大臣)이라는 신분은 역적(逆賊)의 죄가 아니라면 사형 당한 전례가 없었는데, 송시열은 역적(逆賊)이 아닌 " 죄인들의 수괴( 罪人들의 首魁)"라는 애매한 죄명으로 사형을 당하였고, 그것도 국문을 당하기 위하여 제주도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도중에 서둘러 사약을 마시고 죽은 매우 특이한 죽음이었다.
연려실기술
연려실기술에는 송시열의 죽음에 대해 완전히 相反된 두 개의 기록이 실려 있다.
김재구(金載久)의 조야회통(朝野會通) ... 송시열은 오직 바를 직(直)자, 한 자로 후손들을 가르쳤다. 죽기 전날 밤, 흰 기운이 하늘에 뻗치더니 죽는 날 밤에는 규성(奎星 ... 학문을 상징하는 별)이 땅에 떨어지고 붉은 빛이 지붕위에 뻗쳤다...
나량좌(羅良佐)의 명촌잡록(明村雜錄) ... 사약을 받던 날, 송시열은 효종과 명성왕후의 어찰을 빌어 목숨을 구걸하였다. 그러나 받아 들여지지 않자 다리를 뻗고 바로 드러 누웠다. 끝내 마시지 아니하니 약을 든 사람이 손으로 입을 벌리고 약을 부었는데, 한 그릇 반이 지나지 못해 죽었다고 되어있다. 죽음에 임한 그의 모습은 목숨을 구걸하는 소인배이었다는 것이다.
연려실기술에 송시열에 대한 상반된 평가가 동시에 실려 있다는 것은, 이긍익이 이 역사서를 쓰면서 당시의 상반된 두가지 주장을 동시에 기록함으로써 자신의 저술을 객관화하려는 의도이었다. 송시열은 조선 후기 최고의 유학자로 훗날 송자(宋子)로까지 칭송된 인물. 그러나 살아서는 물론 죽음의 순간까지 극단적인 찬사(讚辭)와 비난(非難)을 한 몸에 받았던 인물이었다.
송시열은 조선을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개개인마다, 시대마다 다르겠지만, 그가 조선사회에 끼친 영향력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3천 번이나 그 이름이 등장하는 인물, 사약(賜藥)을 받고 죽었음에도 유교의 대가들만이 오른다는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저국 23개 서원(書院)에 제향되었다. 그의 죽음은 신념을 위한 순교(殉敎)로 이해되었고, 그의 이념을 계승한 제자들에 의해 조선사회는 움직였다.
영욕의 삶
효종(孝宗)의 스승으로서 존재감을 과시하였던 송시열이지만, 효종의 죽음과 함께 영욕(榮辱)의 삶도 저물어갔다. 송시열은 효종의 장지(葬地)를 잘못 옮겼다는 탄핵을 받았고, 당시 임금 현종에 대한 실망감으로 벼슬을 버리고 화양동(華陽洞)으로 은거하였다.
1666년 8월에 화양동(華陽洞)으로 거주지를 옮긴 송시열은 이후 1688년까지 화양동을 출입하며 산수(山水)를 즐겼고, 강학(講學)을 하며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화양동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 뒤에도 1668년 그는 우의정에 올랐으나, 좌의정 허적과의 불화로 사직하였고, 1674년 2월 효종비 인선왕후의 복제문제로 실각을 경험하기도 했다. 결국 이듬해 송시열은 유배되었다가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西人)이 재집권하자 석방되었다.
송시열의 나이 76세 되던 1682년에 김석주 등 훈척들이 남인(南人)들을 일망타진하려는 작업을 하였다. 이때 송시열이 주동자 중의 한 사람인 김익훈을 두둔하였는데, 김익훈은 스승인 김장생의 손자이었다. 실망한 젊은 선비들은 송시열을비난하였고, 제자인 윤증과도 반목이 더욱 심해졌다. 이 일로 송시열은 정계에서 은퇴하여 정주화양동으로 다시 은거하였다.
송시열의 나이 83세인 1689년 1월, 숙의 장씨가 아들 (훗날 경종)을 낳자 원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서인(西人)이 실각하고 남인(南人)이 재집권하였다. 송시열은 왕세자가 책봉되자 시기상조라며 반대하다가 결국 제주돌 유배되었다. 송시열은 다시 정계로 복귀하지 못하고 서울로 압송되던 중, 사약을 내리려고 오던 금부도사 행렬과 6월 3일 정읍에서 마주쳤다. 송시열은 사약 두 사발을 자진하여 마시고는 영욕(榮辱)이 교차하는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하였다. 이때 자손에게 남긴 친필유서(親筆遺書)가 아직도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송자대전 宋子大全
책의 이름을 "송자대전(宋子大全)"이라고 한 것은 ... 송시열을 공자(孔子)와 주자(朱子)에 버금가는 성인(聖人)으로 존칭하여 송자(宋子)라고 한 데서 비롯한 것이며, 서명을 문집(文集)이 아닌 " 대전(大全) "이라 한 것도 이례적인 것으로, 당시 송시열의 문인(門人)들이 주축이 된 노론(老論)이 정계(政界)와 학계(學界)의 주도적 위치에 있으면서 송시열을 상징적인 존재로 부각시켰기 때문이었다.
1717년(숙종 43)에 왕명으로 운각활자본(芸閣活字本)으로 간행된 우암집(尤庵集)과 경례문답(經禮問答), 그리고 부록. 연보(年譜) 등을 합하여 1787년에 간행되었다. 평안감사 이명식(李命植)의 주선으로 총 236권9원편 215권, 목록 2권, 부록 19권), 102책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으로 간행되었는데, 평안감영에서 간행되어 기영본(箕營本)이라고도 한다.
체재는 주자대전(朱子大全)의 편찬 방식에 따라 엮었으며, 권두(券頭)에 편찬의 원칙을 밝힌 18칙(則)의 범례(凡例)가 있다. 그리고 어제(御製) 묘비명과 제문, 어필(御筆)의 발문이 있어 송시열의 정치적 입지를 짐작하게 한다. 이 책은 주로 소(疎), 차(箚), 서(書), 명(銘), 축문, 제문, 신도비명(神道碑銘), 묘갈명(墓碣銘) 등으로 구성되는데, 이들 자료에는 북벌(北伐)과 대명의리론(對明義理論)을 주장한 송시열의 정치적,사상적 위치가 잘 나타나 있다.
서찰은 102권에 걸쳐 수천통이 수록되어 있는데, 당대의 정치가와 학자들이 망라되어 있어, 노론과 소론의 대립과정을 밝혀 주는 자료들이 다수 있다. 그리고 삼학사전(三學士傳), 임경업장군전(林慶業將軍傳) 등 이 책의 전반에 나타나 있는 의리명분론(義理名分論)은 당시 집권층을 형성하고 있던 문인(門人)들에게 영향을 주면서 조선사회 내의 학문 역량을 심화시키고 위정척사 사상과 한말(韓末)의 의병운동(義兵運動)의 사상적 연원이 된 긍정적 측면이 있는 반면에, 18세기 이후에 조선 사회를 보수적인 방향으로 흐르게 한 주요한 축이 되었음도 부인할 수 없다.
後學들이 그린 송시열의 초상화
호걸과 영웅의 자태로 以豪傑英雄之資
조심하고 삼가하여 공덕을 세웠네 有戰兢臨履之功
좁은 담 안에서도 호연지기를 모으니 險浩氣禦環堵之灼
우주를 채울 만하고 可以塞宇宙
작은 한 몸으로 중임을 감당하니 任至重於一身之小
화산 숭산에 말 설 만하네 可以抗華嵩
높은 조정에 출사하여 進而置之巖廊
제왕의 사부가 되어도 영화를 뽐내지 않고 爲帝王師而不見其秦
골짜기에 물러나 退以處乎丘譴
사슴과 벗하여도 곤궁하다 여기지 않네 與嬖鹿友而不見其窮
우뚝할 손, 단단한기둥이 큰 강물에 솟은듯 巖巖乎抵柱之峙洪河
늠름할 손, 낙락장송이 한겨울을 견디는 듯 稟稟乎寒松之挺大冬
진실로 억만년 뒤에 苛億世之下
이 칠분의 모습을 바라 본다면 觀乎此七分之貌
삼백년간 기운이 모인 바를 우러러 알 수 있으리 尙識其爲三百年間氣之所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