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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수신(黃守身)의 묘 ..아버지 황희와 함께 부자 정승

작성자이계묵|작성시간13.02.12|조회수56 목록 댓글 0

 

황수신 (黃守身)

 

 

 

황수신(黃守身. 1407~1467) ..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계효(季孝), 호는 췌부(悴夫)이다. 아버지는 세종시절의 명재상이었던 황희(黃喜)이며, 兄은 판서를 지낸 黃致身이다. 후일 아버지 뒤를 이어 영의정에 올라 아버지 황희와 함께 父子 政丞으로 유명하다.

 

 

 

 

 

 

                                                 과거 실패

 

 

 황수신은 16세가 되던 1423년(세종). 사마시에 응시하였다가 사소한 일로 시관(시관)에게 모욕을 당하자, 한 수 의 시를 갈겨 써 남기고 다시는 과거를 보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擇民濟世非科第      나라를 구제하는 길은 과거가 아니다.

                      不必平生作腐儒      내 평생 저 썪은 선비처럼 되지 않으리

 

 

 

 

                                                                            神 道 碑

 

두 개의 신도비가 있는데, 하나는 원래 세웠던 신도비이고, 다른 하나는 1943년 그의 후손들이 마모된 비문(碑文)을 다시 새겨 세운 碑이다. 비문은 예조판서 이승소(李承召)가 지었다고 한다.

 

 

 

 

 

                                      충녕대군( 후일, 世宗)과의 인연

 

 

다시는 科擧에 응시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황수신에게 어느 날, 우연히 만난 역술가 김학노(金鶴老)

에게서 "을유년에는 상위에 오르겠나이다"라는 말을 듣고 학문에 정진하게 되었다.

 

그 후 흥천사라는 절에서 글을 읽다가, 뒤에 世宗에 오르는 忠寧大君을 만나 서로 얼굴을 익히게 되었다. 충녕대군은 막히는 곳 없이 글을 잘 외는 황수신이 바로 황희의 셋째 아들임을 머리 속에 기억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곧 왕위에 오른 세종은 황희의 아들 가운데 이미 관직에 나가있는 두 아들 밑으로 아직 출사하지 않은 황수신을 불러, 과거를 거칠 필요없이 종7품 종묘부승(宗廟副丞)의 벼슬을 내리니, 이는 종묘와 왕능 앞의 정자각(丁字閣)을 관리하는 자리이었다.

 

 

비록 매우 보잘 것 없는 직위이었으나, 황수신은 성실히 임무를 수행하여, 그 능력과 인품을 인정받는다. 세종은 그를 사헌부 감찰, 지평, 호조정랑 등으로 계속 벼슬을 높여 주었다. 그리고 1446년(세종28)에 조선 개국이래 과거급제자가 아니면 감히 생각도 못할 도승지로 발탁한다. 즉 세종의 비서실장이 된 것이다. 이어 世祖 때에 영의정에 오른다. 

 

 

                          

 

 

 

 

 

                                                    

                                                  음 서   蔭 敍

 

 

 

위에 적은 바와 같이  세종은 황수신이 과거를 거치지 않고 벼슬길에 오르도록 조치한다. 그리고 세종시절에 비서실장격인 도승지에 임명하고, 황수신은 世祖代에 이르러 드디어 영의정에 오른다.

 

 

 

                                                       蔭 敍

 

 

음서(蔭敍)란 ? 고려, 조선시대에 父나 祖父가 일정한 관직생활을 하였거나, 나라에 공훈이 있는 경우, 그 자손을 科擧에 의하지 않고 특별히 서용(敍用)하는 제도를 말한다. 문음(文蔭), 남행(南行), 백골남행(白骨南行), 음사(蔭仕), 음직(蔭職)이라고도 한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로 과거시험이 있었으나, 일단 벼슬에 오른 사람들은 그들의 지위를 자손대대로 계승하여는 욕구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부분적으로나마 관직을 세습할 수 있도록 만든 제도이다.

 

 

경국대전의 이전(吏典) "음자제조(蔭子弟條)"에 의하면 ...  음직 제수의 범위를 功臣이나 2品 이상 관리의 자(子), 손(孫), 서(서), 제(弟), 질(姪) 그리고 3품 이상 관리의 자손으로 제한하여, 실력에 의한 선발 시험인 과거의 비중을 높였다. 그러나 음서는 혈통을 중시하는 신분제 사회의 속성을 띠면서, 과거제도와 함께 조선의 양반관료사회를 형성하는 하나의 중요한 축으로 기능하였다.

 

 

음서에 의하여 선발된 관리를 음관(蔭官)이라고 하는데, 원칙적으로 장자(長子)만이 받을 수 있었으나, 長子가 유고인 경우에는 長孫이나 次子가 減等하여 음직을 받을 수 있었다. 음관을 제수받는 연령은 만 18세 이상으로 규정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15세를 전후하여 관직에 등용되었으며, 父와 祖父의 정치적 배경에 따라 승진 속도에 차이를 보이기도 하였다. 음서제도는 혈통을 중시하는 문벌제도(門閥制度)가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였음을 보여 주는 것으로, 음서제의 범위와 역할은 고려와 조선사회의 성격을 비교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영의정에 오르는 황수신

                                       과거에 의하지 않은 최초의 영의정

 

 

 

世祖는 하례사로 明나라에 다녀온 황수신을 좌의정에 임명하고, 곧이어 영의정에 임명하니, 황수신이 음직(蔭職)으로 出仕한지 30년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황수신은 영의정에 오른지 겨우 한달만인 5월에 61세를 일기로 병을 얻어 죽었다.

 

 

황수신은 아버지 황희처럼 여러 非理事件으로 탄핵을 받았으나, 世祖의 신뢰를 바탕으로 영의정까지 오를 수 있었다. 여러 비리에도 불구하고, 황수신은 용모가 단아하고 학문이 깊었다고 한다. 그리고 관직에서는 백성들에게 불편을 주는 제도는 반드시 추려내어 바로 잡으려 애썼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그를 아버지 황희의 後光으로 출세하였고, 世祖의 등극에 功을 세워 공명을 누렸다고 비판적으로 평가하였다. 아마도 여러 비리사건이 있었고, 정통성이 결여된 세조의 과분한 총애를 받은 탓이기도 하였다.

 

 

 

 

 

 

 

 

 

황수신은 세종의 신임을 등에 업고 여러 직첩을 거치며 많은 치적을 남겼다. 도성 안에서 민심을 현혹시키는 요무(妖巫)들을 모조리 쫒아내고, 수년간에 걸쳐 결단을 미루었던 옥송(獄訟)을 과감하게 처결하여 국법질서를 바로 잡는 과단성도 보여 주었다.

 

 

그러나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부사정 임원준(任元濬 .. 간신 임사홍의 부친)에게 사소한 특혜를 준 일이 트집잡혀 파직된 일도 있었으나, 새로이 즉위한 文宗에 의하여 복직되어 병조참판을 지냈다.

 

 

 

 

 

 

 

황수신은 세종시절 병조참판으로 있으면서 수양대군이 병법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는데 크게 공한하여, 수양대군과 밀접한 관계가 되었다.

 

 

마침내 세조가 즉위하자 황수신은 공신에 오르고 승진을 거듭, 좌참찬으로 명나라 사신으로 가서 활약하고 돌아와 우찬성에 임명되어 세조를 보필하였다. 그리고 세조의 즉위와 동시에 좌익공신(佐翼功臣)으로 남원부원군(南原府院君)에 봉해졌고, 우참찬, 경상도관찰사,좌참찬으로 승진을 거듭한다.

 

 

 

 

                                    황수신의 묘 저 건너편에 아버지 황희의 묘가 보인다.

 

 

 

 

 

 

 

 

 

                                                                     황수신의 비리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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