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율곡 이율곡
율곡 이이 (栗谷 李珥. 1536 ~ 1584).... 조선 중기의 대표적 학자이자 經世家로 ...사헌부 감찰 이원수(李元秀)의 아들로 중종31년(1536), 외가(外家)인 강릉 오죽헌(烏竹軒)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인 신사임당(申師任堂)이 율곡을 낳던 날 밤, 검은 용(龍)이 바다에서 침실로 날아와 아기를 안겨주는 것을 보았다 하여, 어릴 때 이름을 현룡(見龍)이라 하였으며, 태어 난 방을 몽룡실(夢龍室)이라 부르고 있다.
강릉의 명소 오죽헌(烏竹軒)의 몽룡실(夢龍室)이다. 오죽헌(烏竹軒)은 모친인 신사임당(申師任堂)이 거주하던 집이었다. 신사임당(申師任堂)은 율곡의 부친인 '이원수(李元秀)'와 혼인하고서도 37세 되던 해 집안 살림을 맡아 하기 전까지는 서울의 시가(媤家)보다는 친정에서 주로 살았다. 이런 풍습은 16세기까지 우리나라의 보편적인 결혼 풍습과도 관련된 것으로, 당시까지는 남자가 여자 집에 가서 혼인하여 자식을 낳고 이내 계속 생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를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이라고도 한다. 이율곡이 6살 때까지 강릉 오죽헌(烏竹軒)에서 생활하게 된 것은 이런 까닭이다.
외가, 처가, 본가 外家, 妻家, 本家
그의 생애와 관련이 깊은 지역이 세 곳이 있는데, 첫째는 그가 태어난 외가(外家)가 있었던 강릉 오죽헌이고, 둘째는 처가(妻家)가 있던 황해도 해주의 석담, 그리고 세째는 덕수이씨(德水 李氏) 가문의 본거지이면서 그가 성장하였던 파주(坡州) 율곡리이다. 그의 號 율곡도 율곡리에서 유래된 것인 만큼 그의 생애에서 파주와의 관련성은 대단히 크다.
어려서부터 대단히 총명하여 이미 3세에 글을 읽었고, 1543년 8세때에 화석정시(花石亭詩)를 지었고, 1545년 10세때에 경포대부(鏡浦臺賦)를 지었으며, 1548년 13세의 어린 나이에 진사(進士) 초시(初試)에 합격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강릉에서 외조모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새활하던 율곡은 6살 때 서울 본가(본가)로 왔다. 본래 율곡 집안은 경기도 파주(坡州)에 선산과 함께 화석정(花石亭) 등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조부(祖父)가 벼슬을 하지 못하였고, 부친 또한 낮은 관직을 전전긍긍한 이유로 넉넉한 가정 형편은 아니었다. 물론 집안이 구차하였고 하여 율곡의 가문이 한미(寒微)했던 것은 아니었다.
개성(開城) 아래 덕수(德壽)를 본관으로하는 율곡(栗谷) 가문은 16세기에 크게 일어나서, 율곡 증조부의 6형제 중 이의무의 아들 '이행'과 '이기'가 각기 중종과 명종 때 좌의정과 영의정을 지냈으며, 그 아들들이 청요직(淸要職)에 진출한 것이다. 물론 이들은 이 시기에 새롭게 대두되던 사림(士林)들과는 정치성향을 달리하여서 '이행'의 경우 언로(言路)를 막는다고 하여 조광조(趙光祖)로부터 탄핵을 받았고, 특히 '이기'는 명종 초 윤원형(尹元衡)과 결탁하여 을사사화(乙巳史禍)를 일으킨 장본이었다. 그들은 흔히 말하는 훈척계(勳戚系)이었다.
사림(士林) 계열로 전환
훈척적(勳戚的) 성향을 보이던 율곡의 가문은 그러나 서서히 사림(士林) 계열로 전환하였다. 율곡 스스로 지적하듯이 ' 마음 속으로는 요순(堯舜) 시대를 그리워하고 몸으로는 유학(儒學)의 실행에 힘쓰며, 항상 바른 말을 하는 사람 '이 되었다.
물론 이러한 율곡에게도 정신적 방황기가 있었다. 모친을 여읜 후 한 때 불교(佛敎)에 깊이 빠져들어 입산(入山)할 정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적 갈등과 방황은 율곡에게 인간적인 성숙과 함께 단지 경전(經典)을 들추거나 시(詩) 구절을 짓는 데에 머물게 하지 않고 장차 국가를 경영할 통유(通儒)로서 자기 수련과 경륜을 쌓게 하는 토대가 되었다.
도산(陶山)으로 '퇴계 이황 (退溪 李滉) '을 찾아가 도학적(道學的) 분위기에 고무되었고, 평생의 지기(知己)인 ' 우계 성혼(牛溪 成渾) '과 함께 성리설(性理說)의 탐구에 마음껏 몰두한 것이 바로 이떄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관직에 나가서 그가 펼쳤던 경세론(經世論)이 이 기간에 형성될 수 있었다. 그의 향리(鄕里)인 파주(坡州)에는 명종(明宗) 초, 을사사화(乙巳史禍)로 죄를 입었다가 귀양에서 풀려난 백인걸(白仁傑)이 살고 있었다.
율곡은 원로인 백인걸(白仁傑)을 존경하여 자주 찾아보고, 성리설 등의 학문을 논하였다. '백인걸(白仁傑)은 '정암 조광조(靜岩 趙光祖)'의 으뜸가는 문인(門人)으로서 스승의 추숭(追崇)과 그 주장의 계승과 실현에 앞장선 인물이었다. 따라서 율곡은 이러한 백인걸을 통해 소문으로만 듣던 조광조(趙光祖)의 인물됨을 알게 되었고, 그 도학정치론(道學政治論)의 핵심에 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율곡의 학문은 현실적인 문제 해결을 중시하는 실천적 학문으로 조선 유학계에 영남학파의 거두인 이황(李滉)과 쌍벽을 이루며, 기호학파(畿湖學派)를 형성 주도하여 조선시대 성리학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율곡의 이러한 학문경향은 정치, 경제, 교육, 국방 등에 걸쳐 구체적인 개선책을 제시하여 경세가(經世家)로도 큰 업적을 남겼는데 , 사창(社倉)설치, 대동법(大同法) 실시,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 주장 등 사회 정책 전반에 대한 획기적 선견(先見)은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의 관직생활
율곡의 관직 생활은 약 20여 년간이었다. 이 기간 동안 율곡은 당시 사회가 안고 있던 여러 모순과 폐해의 변통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율곡 자신이 살던 시대를 조선이 건국된 지 200여 년이되었으므로 중간 쇠퇴기(衰退期)로 인식하는 것에서 출발하였다.
율곡은 아무리 좋고 튼튼하게 지은 건물이라도 세월이 흐르다 보면 상한 곳이 생기고 집이 기울게 마련이듯이, 나라도 시대가 달라지면 처음에 만든 제도의 결함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하여 마침내 국가 전체가 무너질 위기를 맞는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오래된 집을 유지하려면 유능한 기술자를 시켜 기둥을 갈고 수리해야 하듯, 같은 이유로 국가도 달라진시대에 맞게끔 제도를 고쳐야 하며 바로 이것이 ' 경장 (更張) '이라는 것이었다. 더욱이 율곡 생존 당시 조선은 국가와 백성이 마치 큰 병(病)을 앓고 있는 사람과 같이 원기가 모두 쇠진하고 겨우 숨만 붙어 있는 정도라며 이러한 때 외국으로부터 침략을 당하거나 혹시 백성 가운데 반란이라도 일어난다면 나라는 한 순간에 무너지고 만다는 것이다 . 경장(更張)은 바로 이런 환자에게 원기를 북돋우게 하는 영약이었다.
율곡은 선조(宣祖) 초부터 자신의 경장론(更張論)을 담고 있는 '동호문답(東湖問答)"이나 '만언봉사(萬言封事)' 등의 시무(施務) 관련 상소(上疏)를 계속 올려 임금의 자질과 당대 정치의 폐단을 거론하고 경장(更張)을 위한 대책을 제시하였다. 1575년에는 유교적 이상(理想)을 담은 제왕(帝王)의 정치교과서인 '성학집요(聖學輯要)'를 편찬해서 임금에게 올렸다. 경장(庚張)에 소극적이고, 옛 제도의 묵수(墨守)를 바라는 쪽인 대신들의 의견을 외면하지 못하는 임금 '선조(宣祖)'를 자기 쪽으로 돌리게 하는 회천(回天)을 바라는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다.
위와 같은 율곡의 경장론(更張論)이 당시에 적용되기는 쉽지 않았다. 우선 당시 조정에 만연되어 있는 무사안일주의의 인습(因襲)으로 관리들은 보신(保身)에 급급하여 혹시나 남의 비난을 받을까 눈치나 보고, 혹은 변통하자는 말이라도 나오면 임금의 뜻을 돌리기가 어렵다는 구실을 내세워 운명 탓으로 돌릴 뿐 어떻게 해보려는 마음조차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하여 그동안 악습(惡習)에 편승해 사리사욕(私利私慾)을 채워왔던 소인배(小人輩)들이 경장(更張)을 하게 되면 그 이익을 잃게 되므로 한사코 방해하려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율곡(栗谷)은 임금을 위시한 당시의 조정에 대하여 '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느니 차라리 경장(更張)이라도 하자 '며 분발하여 경장(庚張)에 매진할 것을 역설하였다.
조제보합 調劑保合
더구나 당시와 같이 사림(士林)이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이 분열된 상황에서 '경장(更張)'은 더욱 바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율곡(栗谷)은 당쟁(黨爭)을 종식시키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 이를 위한 방안으로 '동인'과 '서인'의 명목을 타파하고, 이를 바탕으로 조제보합(調劑保合)하자고 호소하였다. 분열된 사림(士林)의 결속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율곡(栗谷)이 기대한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여서, 오히려 동인과 서인의 갈등은 더욱 심화(深化)되었다. 이에 율곡은 동,서 갈등의 당사자인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에 대하여 양시양비론(兩是兩非論)을 제기하여 이를 해결하고자 노력하였다.
즉, 서인(西人)측 심의겸(沈義謙)은 외척(外戚)이면서도 이전에 사림(士林)을 보호한 공(功)이 있고, 동인(東人) 측 김효원(金孝元)은 명류(名流)를 끌어들여 조정을 청명하게 한 공(功)이 있으므로 양시(兩是)라는 것이다. 그러나 '심의경'은 외척으로서의 행동을 조심하지 못하고 정치에 관여하는 발못을 저질렀고, '김효원'은 유생(儒生) 신분으로 한때 권간(權奸 ..윤원형을 지칭함)의 집에 출입하던 허물이 있으니 이를 양비(兩非)라고 하였다. 물론 율곡이 '양시양비론'으로 분쟁이 종식되리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단, 소모적인 정쟁으로 인해 국가적인 현안 문제가 논의조차 되지 않는 현실에 대한 타개책이었던 것이었다.
구도장원공 九度壯元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율곡은 모두 9번 과거시험에서 장원급제하였다. 그래서 그를 九度壯元公이라고 부른다. 13세에 시작하여 29세에 마무리한 그의 과거시험 도전기를 정리해 본다. 조선의 과거제도는 기본적으로 小科라고도 불리는 生進科와 문과(大科), 무과, 잡과의 네 종류가 있다.이 중에서 문관 등용시험인 文科는 크게 大科와 小科로 나뉘어지며, 이들 시험은 式年試라하여 3년에 1회씩 정기적으로 시행되었다.
초급 문관시험인 소과에는 生員科와 進士科가 있었고, 이는 生進科로 통칭되고 있다. 이 시험에는 초시(初試)와 복시(覆試)가 있었고, 여기에 합격한자를 초시, 생원, 진사라고 불렀다. 이 소과의 특징은 바로 관직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자격이 주어지거나, 문과에 응시하여 관직에 나갈 수 있는 자격만을 줄 뿐이었다. 그래서 벼슬없는 진사, 생원이 많았었다.
1548년 文宗 시절...율곡은 13세의 나이에 進士科 시험에서 장원급제하여 세상을 놀라게 한다.조선의 과거시험 과목은 대부분 사서삼경 등 유교경전에서 출제되는데, 따라서 진사시험 정도는 그경전들을 완벽하게 암기만 하여도 합격이 가능하였고...이미 7세에 사서삼경 등을 모조리 암기한 율곡에게 틀에 박힌 정답을 적어 내기에는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율곡은 3年後인 1541년에 시행되는 문과시험에 응시할 자격을 받았으나, 공교롭게 그 해에 어머니 신사임당이 죽는다. 그리고 율곡은 3년동안 어머니의 묘 곁에서 시묘(侍墓)살이를 한다. 13세에 小科에서 장원하고, 어머니 시묘살이를 마치고 나니, 6年이 지나 19세의 청년이 되었고, 이미 모든 유교서적을 암기한 율곡은 좀처럼 마음을 잡지 못하고 방황한다. 시대의 天才에게도 사춘기의 방황이 시작된 것이다.
율곡은 시묘살이가 끝나던 해인 1554년...후일 성리학의 대가가 되는 성혼(成渾)과 같이 금강산에 들어 가, 불교를 공부하지만, 현실적이지 못한 불교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1555년 下山하여 다시 유교학문에 매진하게 되며, 그만의 독창적인 철학세계를 완성해 가게 된다. 그러나 천재 율곡에게도 과거시험에 낙방한 한번의 기록이 있다. 금강산에서 下山하여 1558년 시험에 낙방한 것이다. 아마 그의 방황과 불교에 대한 공부가 당시 과거시험에서 요구되는 논술의 방향과는 조금 어긋난 것 아니냐..하는 짐작이 있다.
이 때 이퇴계는 율곡에게 편지를 보내 그의 마음을 달래 주는 아름다운 얘기가 있다. 즉, " 옛 사람이 이르기를 젊은 나이에 과거에 오르는 것은 하나의 불행이라고 하였으니, 자네가 이번 과거에 실패한 것은 아마도 하늘이 자네를 크게 성취시키려는 까닭인 것 같으니, 자네도 아무쪼록 힘을 쓰게나.......
그러나 율곡은 그해 시행된 특별시(特別試)에서 하늘의 도리에 관한 "天道策"이라는 답안을 제출 장원 급제하게 된다. 조선의 과거시험 역사상 가장 훌륭한 문장으로 지금도 평가받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장원급제 역시 3년 후의 시험을 볼 수 있는 자격만 주어지기때문에 또 3년을기다려야 했다. 율곡의 不運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버지가 죽은 것이다. 율곡 16세에 어머니가 죽고, 율곡 26세에 다시 아버지가 죽어, 아버지의 시묘살이가 끝나는 3년 후, 율곡이 29세가 되어서야 初試를 보게 된다.
율곡은 29세가 되던 해에 문과의 초시(初試), 복시(覆試), 전시(殿試)를 동시에 장원급제하여 삼장장원(三場壯元)이 된다. 하여튼 율곡은 단 한번의 낙방을 제외하고 모든 과거시험에서 9번 장원으로 급제하여, 사람들은 그를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부르게 되었다.
율곡의 묘는 가족묘역 중에서도 가장 윗쪽에 있다. 그리고 부인 노(盧)씨의 묘는 쌍분도 합장도 아닌 형태로 남편인 이율곡보다 조금 윗쪽에 연이어 자리잡고 있다. 자식이 벼슬이 높으면 아버지보다 윗쪽에 묘를 쓰는 것은 크게 이상할 것 없지만, 자식과 부모간에 차이가 없고, 또한 율곡의 묘는 합장도,쌍분도 아닌 희귀한 형태이다.
부모의 묘가 자식의 아래에 위치한 것을 역장(逆葬)이라고 한다. 조선 전기나 중기에는 흔한 일이었으나, 성리학이 발달하면서 이 역장은 예를 거스르는 행동으로 여겨져 금지되었다고 한다. 이 이유에 대하여 기록은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 때 부인 노씨는 남편인 율곡의 묘를 껴앉고 있다가 왜적에게 살해당하였다는 것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8년전에 율곡이 49세를 일기로 죽자, 이 곳에 묘를 정하였는데, 그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인은 이 옷에서 한 女從과 묘를 지키고 있었다. 이 때에 왜적이 겁탈하려하자, 이에 두 女人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훗날 왜란이 끝나고 후손들이 이 곳을 둘러보니 율곡의 묘 옆에 두 여자의 유골이 흩어져 있는데, 세월이 오래 지나 부인과 여종(女從)을 구분할 수 없었다. 이에 두 유골을 모아 합장도,쌍분(雙墳)도 아닌 형태로 연이어서 묘를 썼다고 한다. 기구한 사연이다.
율곡은 시대의 변화를 읽는 점진적 개혁주의자라 평가할 수 있다. 비유하면, 오래 되어 낡은 집을 놓고 인습(因襲)에 젖은 일반관료들은 지붕을 땜질하고 기둥의 상한 부분을 깎아내는 정도의 수리로 유지하려고 하였다. 반면 율곡은 낡은 서까래와 기등을 바꾸고 살아가기 편하도록 집의 구조를 고치는 경장(更張)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점진적 개혁주의자
율곡의 경장론(更張論)이 이같이 점진적이지만, 그것조차도 그의 생전에 실현되지 못하였다. 오히려 임진왜란(任辰倭亂)을 겪으면서 그 진가(眞價)가 제대로 발휘되었다. 당면한 국난(國難) 극복을 위해서는 어떠한 형태로든 대채 마련이 요구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율곡의 '경장론'과 다양한 변통책은 비로소 진지한 검토의 대상이 되어 당국자들의 손을 거쳐 국가 재건에 이바지하게 되었다.
율곡의 개혁정신과 그의 경장론(更張論)에서 보이는 방법상의 특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한꺼번에 모든것을 달성하려는 조급함이 아니라 하나 하나씩 고쳐 나가서 궁그적인 개혁에 이른다는 점진성(漸進性)이다. 둘째, 경장(更張)이 반드시 높은 식견과 넓은 안목을 갖춘 인물을 얻어 그에게 모든 것을 위임한 상태에서 추진되어야 한다는 인재(人材) 발굴과 위임론(委任論)이다. 셋째, 경장(更張)을 위한 전제로 조정의 모든 신하들이 뜻과 지혜를 함께 모아 졍장(更張)에 적극 참여하고 지지하여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화합성이었다.
십만양병설 十萬養兵說
율곡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9年 전에 십만양병설을 건의하지만, 당시 宣祖임금이나 서애(西涯) 유성룡 등의 반대로 받아들여 지지 않는다. 지금도 율곡하면 우선 십만양병설을 떠올리게 되고, 유성룡하면 그에 反對한 유약한 선비 또는 임진왜란의 戰犯으로까지 얘기되고 있다. 여기서도 권력을 잡은 者들의 편의와 입맛에 따라 역사가 왜곡되는 실상을 엿볼 수가 있다.
한마디로 구분하는 것은 無理가 있을 수 있지만, 당시 배경을 쉽게 이해하기 위하여 구별한다면,
율곡은 서인(西人)세력의 巨頭이었으며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송시열(宋時烈)은 율곡의 수제자이었다. 반면 동인(東人)의 巨頭는 퇴계 이황이었으며, 서애 유성룡은 이황의 수제자이었다. 모두 다 훌륭한 학자이고 나라를 진심으로 걱정한 사람들이었지만, 어느 편이었느냐...어느 편이 권력을 잡고 있었느냐.. 에 따라 역사의 기록은 혼란스럽기 조차하다.
율곡의 십만양병설이 처음 기록에 나타는 것은 김장생(金長生)의 ' 율곡전서(율곡전서) '에서이다. 그는 율곡전서에서 " 일찍이 경연(經筵)에서 율곡이 청하기를...십만의 병력을 양성하여 위급한 사태에 대비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10年이 채 안되어 토붕와해(土崩瓦解)의 화(禍)가 있을 것입니다...." 라고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김장생의 뒤를 이은 우암 송시열(우암 송시열)은 ' 율곡연보(율곡연보) '에서 보다 더 구체적으로 율곡의 주장을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선조실록에는 그에 대하여 조금의 언급도 없었다. 선조실록에는 율곡의 죽음마저 그저 이이졸(李珥猝)이라는 세 글자로 간단히 언급할 뿐이다.
그러나 서인(西人)들이 권력을 잡고 있던 시대에 편찬된 ' 선조수정실록 ' 에는 율곡의 십만양병설과 율곡의 죽음에 대하여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율곡의 십만양병설이 기록된 것은... 전부 율곡의 제자들의 개인 문집이거나, 그들이 권력을 잡고 있을 때 수정한 '선조수정실록'에서만 발견될 뿐이다. 그리고 그들 간의 기록에서도 서로 상충되는 부분이 드러나고 있다.
한편, 서애 유성룡(西涯 柳成龍)은 율곡의 십만양병설에 반대하였다고 하여 훗날 따가운 질책과 비판을 받으며, 전란의 주범으로까지 규탄되고 있는 현실이다. 율곡이나 유성룡이나 학문적으로 높은 수준의 경지에 오른 사람들이고, 국가 경영에 있어서도 높은 식견과 혜안을 가지고 있었던 분들임이 분명하다. 특히 유성룡도 율곡보다 훨씬 앞서 ' 비변오책(備邊五策) '을 주장하는 등 국방에 소홀한 유약한 학자가 절대 아니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누구보다 먼저 이순신(李舜臣)과 권율장군을 인재로 추천하여 등용케 하였으며, 선조의 무능력과 이순신에 대한 여러 모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이순신을 보호한 사람이다. 특히 선조의 이순신에 대한 질투, 시기는 극에 달하였었던 시절이었다. 기록에 보면 유성룡은 당시 조정의 재정상태를 감안하여 반대한 기록은 있다. 율곡도 이를 이해하고, 유능한 장군을 전방에 배치 할 것 등...절충안을 내 놓는 것이다. 역사의 진실이 그러하다면..우리는 왜 율곡은 先見之明이 있는 나라의 충신이요, 유성룡은 그에 반대한 전란(戰亂)의 주범으로 취급되고 있는가?
사악한 거짓 역사
요즈음도 정권이 바뀌면 교과서를 수정해야 한다고 난리들이다. 이명박정권도 마찬가지이다. 지금의 현안이 되고 있는 현실.... 근세에 이르러 서인(西人)가문의 이병도(李炳燾)란 역사학자가 西人들의 저서들을 종합하여 '한국사대관 (韓國史大觀)'을 발간하였다. 현세에 알고 있는 율곡의 십만양병설도 바로 이 한국사대관에 근거한 것이고...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그들의 利害와 당시의 사회분위기에 편승하여 , 모든 교과서는 한국사대관에 입각하여 저술되었고, 우리는 그 것을 배웠다.
구한 말 ,日本에게 조선을 바친 세력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西人세력들 이었다. 이병도의 친척祖父인 이완용을 비롯하여 을사5적 모두가 西人이었으며, 친일파로 변절한 박영효나 윤치호 역시 西人 기호학파(畿湖學派) 출신이었다. 율곡의 학통을 이어받은 것이 바로 서인(서인)의 기호학파(기호학파)인 것이다. 반대로 퇴계 이황의 학파에서는 공교롭게 친일파(親日派)는 하나도 없고, 모두 만주나 해외에서 독립운동에 힘을 썻다.
그후 해방이 되자 기호학파 출신의 친일인사(親日人士)들이 대거 이승만 정권에 기용되면서, 그들이 나라의 역사를 논하게 되는데.. 그 중심에 이병도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병도의 아들들은 서울대학교 총장과 문화재청장을 지내면서 승승장구한다.
역사란 과연 승자(勝者)에 의해서 기록된 승자를 위한 역사이다. 승자에 의해서 역사가 만들어지기 때문에, 권력을 쥐고 있는 승자 중심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을 빙자로 세상을 위해 살았던 사람들을 세월 속에 묻어버리면서, 악인(惡人)으로까지 매도한다면 승자의 역사는 분명 사악한 거짓 역사인 것이다.
고산구곡가 高山九曲歌
고산구곡가(高山九曲가)는 율곡이 그의 나이 43세 되던 해 해주(海州) 석담(石潭)에 은거할 때 지었는데, 모두 10수(首)로 되어 있다. 이 작품은 율곡(栗谷)이 석담(石潭)에서 고산구곡(高山九曲)을 경영하여 은병정사(隱屛精舍)를 짓고 은거(隱居)하면서 주희(朱熹)의 '무이도가(武夷櫂歌)'를 본떠서 지었다고 한다.
이 작품이 무이도가(武夷櫂歌)를 본떠 지었다고 하나 서로 내용을 검토하여 보면, 단순한 모방작이 아님을 볼 수 있다. '무이도가'가 수채화(水채畵)에 견줄 수 있는 반면에 '고산구곡가'는 담백한 묵화(墨畵)를 연상하게 한다. 그 까닭은 작자 나름의 확고한 시론(詩論)에 바탕을 두고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의 시론(詩論)은 ' 시(詩)는 담백하고 꾸밈이 없어야 한다. 主於沖澹蕭散不事繪師 '라는것이다.
작자인 율곡(栗谷)과 주희(朱熹)는 한결같이 도학적 문학론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작품에는 이처럼 표면적으로는 도학(道學)의 문구가 전혀 없다. 이는 그들이 문학의 본질, 즉 문학이 지니고 있는 미의식(美意識)을 긍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율곡의 미의식(美意識)은 주희(朱熹)의 그것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것은 율곡이 주희(朱熹)의 미의식을 그대로 추종하지 않고 독창적인 시경(詩境)을 개척하였음을 말해 준다.
조선시대 주자학적 지식인들이 '무이도가'를 수용하는 데 있어서 이왕(李滉)의 경우가 그렇듯이 거의 한시(漢詩)로 차운(借韻)한 것에 반해, 율곡은 시조(詩調)의 형태로 변용하였다는 사실이 높게 평가되고 있다. 또한 이 작품은 17세기에 와서 송시열(宋時烈)을 비롯한 주자학적 지식인들에게 계승되어 한역(韓譯)되기도 하고, '고산구곡'이라는 자연(自然)을 소재로 한 많은 시(詩)가 창작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