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학사(三學士)라고 해서 무조건적인 찬양은 피할 일이다. 그들 역시 송시열(宋時烈)처럼 명분론(名分論)에 사로잡힌 인물들 일 뿐이다. 그들은 조선 역대로 오랑케로 멸시하였던 여진족(女眞族)의 후예인 청나라를 배척하고, 명나라에의 절의를 주장한 것이다. 오히려 최명길(崔鳴吉)과 김상헌(金尙憲)의 상반된 입장을 통하여 병자호란을 읽는 것이 옳은 일일듯....
삼 학 사 三 學 士
병자호란 당시 조정에는 오달제, 윤집, 홍익한 등의 삼학사(三學士) 말고도 많은 척화신(斥和臣)들이 있었다. 윤황(尹惶), 이일상(李一相), 유계(兪棨), 정온(鄭溫), 조경(趙絅) 등이 그들이었다. 그럼에도 이 세 사람이 淸나라에 넘겨지는 " 희생양 "으로 낙점된 까닭은 무엇일까 ? 그 것은 청태종의 칭제건원(稱帝建元 ...왕을 황제라 칭하고, 독자적인 年號를 사용 )사실이 알려진 직후 이 삼학사들이 누구보다 격렬하게 " 홍타이지(皇太極)의 참월(僭越) '을 비난하였고, 주화신(主和臣)을 성토하였기 때문이다.
홍익한(洪翼漢)은 1636년 2월 " 홍타이지가 보낸 사신(使臣)의 머리를 베어 明나라에 보내든가, 그것이 싫으면 나의 머리를 베라 "는 극렬한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오달제(吳達濟)는 1636년 10월 " 공론을 두려워 하지 않고, 방자하고 거리낌없이 화친을 시도하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 "고 최명길을 겨냥하며 직격탄을 날렸다. 윤집(尹集)은 더 나아가 " 명나라의 은혜를 배신하고 오랑케와 화친(和親)을 주도하는 최명길은 진회(秦檜 .. 중국 南宋의 매국노)보다 나쁜 자 "라고 극언을 퍼부었다.
삼 한 산 두 三 韓 山 頭
三韓山斗 : 조선의 태산북두(泰山北斗)와 같이 빛나는 인물
淸나라는 어쩔 수 없이 삼학사(三學士)를 죽이기는 하였지만, 이후 삼학사의 절의(節義)를 인정하였다. 그들은 삼학사를 기리는 사당(祠堂)을 짓고, 삼한산두(三韓山斗)라는 비(碑)를 세웠다. 그리고 강희제(康熙帝)는 훗날 " 조선이 明나라 말년에도 끝까지 배신하지 않은 것은 본받을 만한 일" 이라고 찬양하였다.
위 신문의 기사와 같이 중국의 봉천(奉天)에서 용을 조각한 비석이 중간이 부러진 채 땅 속에 묻혀있다 발견되었다. 이 비석에는 " 삼한산두(三韓山斗) "라는 글씨가 있었는데.. 여기의 삼한(三韓)은 조선을 가리킨다. 즉, 조선의 태산(泰山)과 북두(北斗) .. 태산과 같이 높고 북두칠성과 같이 빛난다..라는 뜻이다
청태종(淸太宗)은 삼학사(三學士)를 회유하고 고문하며 그들을 신하로 만들려고 앴다. 그러나 삼학사는 완강히 거절하는 가운데 이들을 처형하기 전에 청태종은 친히 국문하였다. 이 때 홍익한 (洪翼漢)은 " 나라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도를 못함을 안타까워 할 뿐.. "이라 하였으며, 윤집(尹集)과 오달재(吳達濟)는 " 몸바쳐 나라를 구하려 했던 뜻은 죽어도 떳떳하다 "며 기개를 보였다. 청태종은 이들의 기개에 오히려 감탄하며, 삼학사(三學士)가 죽고 난 후 그들의 충절을 기리는 비석을 세웠다. 淸나라가 몰락하고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 비석을 잘 관리되지 못하고 파괴되어 방치되다가 1930년대에 발견되었다.
복원된 三韓山斗碑 .. 발해대학
중국 동포들은 성금을 모아 碑를 복원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에 중국의 문화혁명 때, 이 碑는 다시 파괴되어 碑身만이 세 조각난 채로 농가의 주춧돌로 쓰이는 신세가 되었다. 다행히 이 비석을 발해대학에서 구입하여 보관하게 되었고, 2005년에 발해대학(渤海大學)이 중심이 되어 발해대학 안에 복원하여 세워 놓았다.
삼 학 사 전 三 學 士 傳
우암 송시열(尤巖 宋時烈)은 국난(國難)을 당하여 의리를 지키며 죽는 방식에 자결(自決), 전사(戰死), 절사(節死) 등 세가지 방식이 있는데, 이 중에서 포로로 잡혀 전사(戰死)하는 것이 가장 貴한 죽음이라고 하며, 삼학사의 절의를 높게 평가하였다.
송시열이 편찬한 삼학사의 전기(傳記)로 송자대전(宋子大典)에 수록되어 있다. 병자호란 당시 척화론(斥和論)을 주장하다가 심양(瀋陽)으로 압송되어 죽음을 당한 삼학사의 행적과 언론을 기록하여 춘추대일통(春秋大一通), 존화양이(尊華攘夷)의 뜻을 높이기 위하여 편찬하였다. 삼학사들의 약전(略傳)과 언행을 기록하고 그들이 청나라에 잡혀 갈 때부터 심양에서 죽을 때까지 조정 내부의 의논과 대청관계(對淸關係) 등 주변상황을 기록하였다. 삼학사(三學士)에 대한 약전(略傳)과 병자호란(丙子胡亂) 전후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으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의 상황에서 조선 지배층의 대내외적(對內外的) 대응방식을 이해한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오달제 吳達濟
오달제(吳達濟. 1609~1637)
본관은 해주(海州)이며, 자(字)는 계휘(季輝), 호(號)는 추담(秋潭)이다. 19세에 사마시에 합격, 1634년에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여러 벼슬을 거쳐 1635년에 정언, 지평이 되고 1636년 수찬(修撰)을 거쳐 부교리(副校理)가 되었다.이 때 후금(後金)의 위협으로 사신(使臣)을 교환하게 되자 이에 반대하여 주화파(主和派)의 최명길(崔鳴吉)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 들어가 청나라와의 화의(和議)에 극력 반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군(淸軍)에 항복하게 되자 스스로 척화신(斥和臣)을 자처(自處) 적진(敵陣)에 압송되었다.
적장 용골대(龍骨大)의 심문에 굴하지 않아 다시 심양으로 이송되었고, 그 곳에서도 모진 협박과 유혹에 굴하지 않자 결국 심양성 서문 밖에서 윤집, 홍익한과 함께 처형당했다. 뒷 날 좌승지, 영의정으로 추증되었고, 광주의 현절사(顯節祠), 평택의 포의사우(褒義祠宇), 홍산(鴻山)의 창렬서원(彰烈書院), 영주의 장암서원(壯巖書院), 고령의 운천서원(雲川書院)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충렬공유고(忠烈公遺稿)가 있고, 묵매화에도 뛰어났다.
묘소 입구
대낭장비 帶 囊 藏 碑
오달제 등 삼학사는 모두 심양(瀋陽)에서 처형되고, 그 시신(屍身)의 수습조차 금지되었으므로, 그들이 묻힌 곳을 찾을 수 없다. 다만 오달제의 후손들이 그가 몸에 지니고 다니던 요대(腰帶)와 주머니를 이 곳에 묻었다. 오달제의 부인 두명과 함께....
순조 28년(1828)에 오달제의 손자 오경원이 세웠다. 그 이름은 대낭장비(帶囊藏碑)이다. 그가 지니고 다니던 요대(腰帶)와 주머니(囊)을 묻었다는 의미....
오달제의 편지
1637년 1월, 오달제(吳達濟)는 윤집(尹集)과 함께 청(淸)나라로 끌려 가면서 그의 맏형 오달승(吳達升)에게 편지를 3통 보낸다. 그는 맏형과 남한산성에서 이별한 후, 압송되어 가면서 편지를 써서 소매 속에 감추어 가지고 다니다가 신천(信川)에서 어느 늙은이를 통하여 고향에 보낸다. 그리고 2개월 후 심양(瀋陽)에 도착하여 처참한 죽음을 당한다.
寄伯氏 .. 맏형에게 보내는 편지. 1
남한산성에서 형님과 이별하던 정상을 어찌 말로써 다 표현하겠습니까? 나라 일이 이 지경 되었는데, 사사로운 인정이야 말하여 무엇할까마는...형님 그 동안 집안 소식이나 얻어 들었습니까? 온 집안 식구는 아무 탈이나 없는지요? 생각컨데 지금쯤은 모두들 집으로 돌아가 함께 모였을 듯 합니다.이 아우는 처음 적진(敵陣)에 붙잡혀 왔을 때부터 적장(敵將)인 용골대(龍骨大)로부터 죽이겠다는 협박을 수없이 받아 왔습니다. 그 뒤에도 적군의 진지에 머물면서 수 많은 고초를 당하였습니다. 그 처참한 형상이야 어찌 글로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아직 그리 큰 병은 얻지 않았으니, 그것만은 다행입니다.
요즈음 듣자니 저 사람들이 우리를 심양(瀋陽)으로 데려가서는 오래도록 붙잡아 놓겠다고 합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차라리 빨리 죽는 것이 낳겠습니다. 그러나 의리(義理)로 보아 일부러 죽을 필요는 없을 듯 합니다. 굳이 살아도 될 형편이 되면, 그 상황을 보아가며 닥쳐 오는 운명에 순종하겠습니다. 노친(老親)과 연약한 아내가 , 만일 이 아우가 청(淸)으로 붙잡혀 갔다는 소식을 들었으면 반드시 상심한 나머지 병이라도 날터이니 좋은 말로 위로해 주십시요. 병(病)이 난다고 하여 해결될 일이 아니니까 말입니다. 만일 하늘이 도와준다면 혹시라도 살아 돌아가 만날 날이 있을 지 누가 알겠습니까 ?
붙잡혀 가는 도중에 가장 필요한 것은 머리빗과 망건(網巾) 그리고 신발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저쪽에는 없는 것들이니 아무리 구하려 하나 구(求)할 수가 없습니다. 뒷날 사신(使臣)이 들어 오거든 이것들만이라도 빨리 좀 보내 주셨으면 합니다. 다만 망건(網巾)만은 변두리(逸子)가 튼튼하고 넓은 것이라야 쓸 수 있습니다. 이 것들에 대하여는 저의 아내가 저의 성질을 잘 압니다. 따듯한 날이 가까워 오니 봄옷도 한벌 보내 주십시요. 난리 후이므로 집에서도 주선하기 어려울 듯하오니, 만일 옛날 입던 옷이라도 보내어 주시면 좋고, 그것도 없거든 꼭 보낼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입고 있는 옷도 두꺼운 것과 얇은 것이 있으니 번갈아 입으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름 옷은 꼭 보내주셔야 합니다. 또한 저의 남괘자(藍掛子)만은 뒤에 오는 인편(人便)으로 보내 주시면 좋겠습니다.
난리를 겪고 난 뒤라 가산(家産)이 탕진되어 틀림없이 노친(老親)을 봉양할 방법이 없을 듯 합니다. 그렇다고 서울로 모시고 올라 오더라도 특별히 의지할 곳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 어떻게 처리하셨습니까? 결성(結城)에 있는 저의 처가(妻家)에 농장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면 아마 도와 줄 것 입니다. 저의 아내와 의논하여 보십시요. 노친을 모시고 우선 거기라도 가서 여름을 나도록 하는 것이 어떠 하겠습니까? 처가의 인심이 자못 두터우니 반드시 보살펴 줄 것 입니다.
모친과 아내, 그리고 조카인 창(昌)과 여러 동생들에게는 종이가 없어서 따로 쓰지 못하였습니다. 저의 뜻을 대신 전하여 주십시요. 제가 양화도(楊花渡) 근처에 있을 때 이 글을 써서 소매속에 숨겨 두었습니다. 우리가 붙잡혀 가는 도중에라도 혹시 돌아가는 인편(人便)이 있으면 보내려 합니다. 그러나 이 편지가 과연 분실되지 않고 전하여 질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종이는 작고 마음은 어수선하여 이만 줄입니다. 뒷날 기회 있으면 자세히 쓰겠습니다.
정축년(1937년) 2월 9일. 사제(舍弟) 達濟
후서(後書 ..追記)
편지를 써 놓은지가 오래 되었는데 보낼 인편(人便)이 없어서 또 이와 같이 덧붙여 씁니다. 우리 일행 중에는 포로가 많아 사람이 무척 많아서 하루에 겨우 10里 정도를 가게 되고, 또 머무는 곳도 많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간다면 3월 중에나 저쪽에 도착할 듯 합니다.길 가는 도중의 어려움이야 어찌 말로써 다 하겠습니까? 다만 주장(主將)이 때때로 음식을 보내어 지난 번보다는 대접이 좋아졌습니다. 그리하여 수직(守直)하던 병졸로부터도 크게 곤욕을 당하지 않습니다.
다만 60여일 동안 한번도 옷을 벗지 못하고 잠을 자니, 서케와 이가 들끓어서 그 괴로움을 형언할 수 없습니다. 베적삼과 베버선 그리고 얇은 솜바지를 빨리 보내 주시겠습니까. 저 쪽에는 바늘과 실도 매우 귀하다고 하니 터진 옷을 기울 방법이 없습니다. 바늘과 실도 조금보내 주십시요. 그리고 글씨를 쓰는 도구도 저들에게는 없다고 하니, 종이와 먹 그리고 붓도 구하여 보내 주십시요. 우선생활에 꼭 필요한 물건들만 이렇게 적었습니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나리를 치른 뒤의 집안 형편으로 넉넉히 마련할 수 없을 것도 압니다. 또 저도 저쪽에 도착한 뒤에 어떻게 될지 또는 이 편지가 집에 도착할지, 아니면 도착하지 못할지 모두 알 수 없는 일 입니다. 그러하오니 만일 그것들을 보내더라도 많이 보내지 마십시요. 그냥 어렵게 사는 가운데 병이라도 만나면 만족하게 생각하겠습니다.
이 몸은 죽음의 땅에서 살아 돌아 가기는 쉽지 않을 듯 하오니, 온 집안 식구들이 저를 불쌍히 여기는 감정때문에 공연스레 많이 준비하느라고 物資만 낭비하지 말게 해 주십시요. 이 것이 이 아우의 뜻 입니다. 부디 필요없는 비용을 허비하지 못하도록 꼭 부탁 드립니다. 영초(靈草 ..담배)를 좋은 것으로 역시 구하여 보내 주시면 좋겠습니다. 지금 우리는 파주의 풍수원(楓水院) 근처에서 하루를 묵었으므로, 또 이렇게 글을 써서 앞서 써 놓은 봉투에 넣습니다.
정축년 (1937년) 2월 12일 사제 (舍弟) 달제
奇伯氏 .. 맏형에게 보내는 편지. 2
봄 날이 따듯하여 가고 있는데, 집 안의 안부는 어떠합니까? 고국(故國)을 지척에 두고 이 몸은 호랑이 아가리(虎口)에 물려 가고 있습니다. 봄날이 다 가도록 집안 소식을 전연 들을 수 없어 안타깝습니다. 위로는 병드신 어머니께서 이 자식을 생각하느라고 얼마나 마음 아파하실까 생각하니 더욱 애가 탑니다. 그리고 늙어 가시는 형님이나 연약한 저의 아내와도 만날 기약이 없으니, 이 아우의 마음이야 차라리 죽는 것만 못하옵니다.
그러하오나 차마 죽지 못하는 이유는 만일이라도 살아 돌아 가서 어머니나 형님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더 보고 싶어서 입니다.지난 달 스무날 저는 붙잡혀 가는 몸으로 어머님의 생일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형님께서 혼자 어머님 모시고 생일상을 올릴 것을 말 없이 그려보고 또 어머님께서 늙은 나이에 이 자식을 생각하여 부르짖으며 우실 것을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리었습니다.
자나깨나 애쓰시는 그 마음을 어떻게 위로하겠습니까? 이 불효막심한 아우는 어머니 말씀을 곁에서 모시지 못 한 채 적군(敵軍)의 포로가 되어, 이렇게 슬하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평상시에도 제대로 모시는 자식 구실을 못하였는데 지금에 와서 오히려 자식으로 말미암아 무궁한 슬픔을 안겨 드리게 되니, 스스로 지은 이 크나 큰 불효한 죄를 가지고 어찌 하늘을 쳐다 보겠습니까.
차라리 고국 땅에서 죽어, 어머니를 그리는 넋이 고향 집을 가까이 가 볼 수 있다고 한다면, 비록 불효한 죄악이야 속죄하지는 못 한다 하더라도, 이승에서의 소원은 조금이나마 덜 수 있을 듯 합니다.지금 신천(信川)에서 오랜동안 머물고 있사온데, 할 일이 없이 해만 기니 이 애타는 마음 더욱 견디기 어렵습니다. 늘 성백(成伯 .. 尹集의 字)과 함께 집에 두고 온 노친(老親)에 대한 이야기를 한답니다. 그리고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울다가 눈물이 목을 막아 흐느끼곤 합니다.
지난 번 양화도(楊花渡)와 풍수원(楓水院)에서 쓴 편지도 아직까지 소매 속에 갈무려 가지고 다닙니다. 혹시라도 고향에 돌아가는 인편(人便)을 만나면 보내려고 말 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끌고 가는 군인들이 주위에 사람을 얼씬도 못하게 하고 또 하도 빈틈없이 지키어, 어쩌다가 우리나라 사람들을 볼 수 있어도 전달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지금에야 간신히 편지를 전하여 줄 사람을 만나, 지금까지 쓴 편지를 함께 봉하여 보내는 바 입니다. 여러가지 하고 싶은 말들은 앞서 쓴 편지에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행렬은 지루하게도 머무는 곳이 많습니다. 그리하여 언제쯤이나 심양(瀋陽)에 도착할 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4월 중에는 틀림없이 도착할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 있을 때에도 집안 소식을 듣지 못하여는데, 저 나라에 가서야 말 할 것도 없이 더 어렵겠지요.
고국 생각때문에 가는 발걸음이 더욱 무겁습니다. 형님께서는 부디부디 몸조심 하십시요. 어머님의 슬하에는 형님 한 분 뿐입니다. 제가 하고 싶은말은 이 것뿐이 아니지만은 두 줄기 눈물이 숨구멍을 막습니다. 붓을 들고 종이를 대하니 마음이 떨리어 하고 싶은 말을 다 기록할 수가 없습니다. 마침 생각하였던 바를 詩를 써서 올립니다.
형님에게 (寄伯氏)
南漢當時就死身 남한산성 싸움터에서 죽었어야 할 이 몸이
楚囚猶作未歸臣 적군의 포로되어 끌려 가게 되었어라
西來幾濾思兄淚 서쪽으로 가는 동안 몇번이나 형 생각에 울었든가
東望遙憐憶弟人 먼 동쪽 하늘 바라보며 아우 생각하는 이, 가련도 하다
魂逐塞鴻悲隻影 넋은 변방으로 날아가는 외로운 기러기를 쫒아 가고
夢驚池草惜殘春 꿈은 봄이 끝나가는 연못가 풀을 보고 놀란다
想當彩服趨庭日 형님께서 채색 옷을 입고 어머니 앞에 나아가서
忍作何辭慰老親 글쎄! 무슨 말로 늙은 어머님을 위로하였을까
그 중 한 편은 아내에게 붙이는 것이오니 형님께서 불러다 놓고, 그 詩의 뜻을 풀이하여 저의 생각을 알도록 하여 주십시요
琴瑟恩情重 정이 깊어 금슬도 좋았지요
相逢未二朞 만난지 두 해도 못되었는데
今成萬里別 이제는 멀리 이별하게 되니
虛負百年期 백년해로 하자는 약속 헛되이 등졌구려
地闊書難寄 길은 멀어 글 띄우기가 쉽지가 않고
山長夢亦遲 산이 높아 꿈 길 역시 더디겠지요
吾生未可卜 이 내 목숨은 점 칠 수가 없으니
須護腹中兒 부디 당신 뱃 속의 아이를 보호해 주오
종이도 구(求)할 수 없어서 길거리에 떨어져 있는 것을 주어다가 이렇게 씁니다. 그리하여 유실 누이(柳妹 .. 柳氏에게 시집 간 누이)와 두 형수에게도 따로 편지를 쓰지 못 하였습니다. 이 말씀 전하여 주십시요. 조카인 창(昌)은 여기 있는 편지를 보면 될 것입니다. 제가 바라기는 그가 독서는 많이 하되 아직 대과(大科)는 보지 말게 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그의 뜻이나 형수님의 뜻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정축년(1637년) 3월 9일. 舍弟 達濟
사친시 思親詩 어머니를 생각하며
풍진남북각부평 風塵南北各浮萍 남북의 풍진에 떠도는 부평초 신세
수위상분유차행 誰謂相分有此行 이번 길이 헤어지는 길이라 누가 말했소
별일양아동배모 別日兩兒同拜母 떠나던 날 두 아들이 어머니께 함께 절하였는데
내시일자독추정 來時一子獨趨庭 돌아올 땐 한 자식만 마당을 서성이겠네
절거이부삼천교 絶踞已負三遷敎 어머님 가르침 뿌리치고 떠난 자식
읍선공항촌초정 泣線空巷寸草情 홀로 남아 바느질하며 자식 걱정에 눈물 흐르네
관새도수서경모 關塞道修西景摹 몸 떠나는 변방 길은 새로 바뀌고 서산에 해는 지는데
차생하로재귀녕 此生何路再歸寧 어느 길로 무사히 돌아와 어머님 뵐 수 있을까
오달제가 스스로 척화파임을 자임(자임)하고 청나라로 압송되어 가면서, 어머니를 그린 詩이다. 본 詩에서는 군신유의(君臣有義), 부자유친(父子有親), 부부유별(夫婦有別)의 세 가지 인간관계의 충돌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 즉, 세 가지 덕목의 우열관계, 순차관계의 문제가 등장하는 것이다. 물론 당시의 이념적 가치는 군신관계가 가장 우위의 德目으로 사회적 당위성으로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연약하고 자기 방어적일 수 밖에 없는 개인으로서의 인간은 이러한 표면적 가치와 자신을 지키려는 내면적 가치는 현실적으로 충돌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묵 매 도 墨 梅 圖
이 묵매도(墨梅圖)는 인쪽 상부에 장문의 발(跋)이 있는데, 이는 오달제의 충렬을 기린 어제시(御製詩)를 그의 후손 오언유(吳彦儒)가 쓴 것이다.
묵매는 약간 진한 담묵(淡墨)에 몰골(沒骨)로 그려 기교를 나타내지 않았으나 능숙한 필력(필력)으로 활달하게 죽죽 그려나간 기백이 역력하다. 늙은 매화 등걸이 오른쪽 하단에서 좌측 상단으로 굽어 뻗고, 거기서 다시 큰 가지 등걸이 우측 상단으로 뻗어 이 두 등걸이 근간을 이루고 , 밑 등걸에서 세 가지로 위로 뻗었는데, 가지 등걸을 거쳐 솟아 있다. 매화꽃은 세 가지 중 잔가지가 좌우로 솟은 거의 화면 중심에 있는 가지의 사이사이와 새순 끝에 점점이 피었는데, 다른 가지에는 눈만 붙어 있다. 이러한 표현은 이 시대의 양식에 따른 것이지만, 이 그림에서 보이는 서리발같은 기백을 가히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이 숭엄해지게 한다.
雪 梅 圖
이 설매도(雪梅圖)는 담묵(淡墨)으로 그 표현이 부드럽고 능숙한 가운데, 설중풍상(雪中風霜)에 매화가 가지가지 맺히고 바위와 대나무를 곁들여 기백이 뛰어난 작품이다. 늙은 등걸이 왼쪽 아래에서 오른쪽 상단으로 구불구불 솟고, 다시 그 끝에서 작은 등걸리 왼쪽 위로 솟아 올랐으며, 늙은 등걸 및에서 가지가 휘어 윗등걸을 걸쳐 솟아 있다.
청태종 淸太宗
청태종(淸太宗)은 삼학사를 회유하여 자신의 신하로 만들려고 고문(拷問)을 가하였으나, 끝내 거부하는 삼학사를 참혹하게 죽인다. 그러나 삼학사(三學士)의 절의(節義)와 충성을 높이 평가하여 삼한산두(三韓山斗)의 碑를 세워 삼학사의 뜻을 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