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천 최명길 遲川 崔鳴吉
최명길 (崔鳴吉 .. 1586~1647) ... 본관은 전주, 자(字)는 자겸(子謙), 호는 지천(遲川), 창랑(滄浪)으로 아버지는 영흥부사를 지낸 기남(起南)이며 이항복(李恒福)과 신흠(申欽)의 문인(門人)으로 실질을 중시하는 양명학적(陽明學的) 사고(思考)를 바탕으로 병자호란때 주화론(主和論)을 주장하며 강화(講和)를 담당하였다.
1605년 과거에 급제하여 벼술길에 올랐으나, 1614년(광해군 6) 폐모론(廢母論)의 기밀을 누설하였다고 하여 파직당하였다. 그 후 가평으로 내려가 조익(趙翼), 장유(張維) 등과 교유하며 양명학 연구에 노력하였다. 1623년 김유(金踰), 이귀(李貴) 등과 함께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일으켜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으로 완성군(完城君)에 봉해졌고, 그 뒤 이조참의, 이조참판, 부제학,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최명길이 살았던 시기의 조선 사회는 정치, 경제, 사회, 사상 모든방면에서 큰 변화를 겪고 있었다. 현실적이고도 개혁적인 이념은 퇴조하고, 보수적인 사림정치(士林政治)가 무르익어가면서 명분론과 예론(禮論))이 고개를 들기 시작할 때였다. 두 차례에 걸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전쟁이 국토를 피폐하게 만들었고, 양반의 면세(免稅)와 면역(免役)으로 국가 재정은 궁핍해져 갔다. 신분 질서 또한 서서히 붕괴도고 있었다.
병자호란 때 주화론(主和論)을 이끈 최명길은 조선사회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는 가장 암울한 시기에 활동한 정치가이자 학자이다. 그의 주화론(主和論)은 척화론(斥和論)의 대표적 인물인 김상헌(김상헌)과 줄곧 비교되면서 조선 후기 사회를 유지하는 지표 역할을 하였다.
신도비 神道碑
신도비(神道碑)란 임금이나 정3품 이상의 고관들의 평생 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묘 앞에 세워두는 비(碑)이다. 최명길은 선조 38년(1605) 문과에 급제한 후, 승문원을 거쳐 예문관 전적이 되었다. 그러던 중 광해군이 인목대비(仁穆大妃.. 영창대군의 생모)를 유폐하고, 정치가 날로 어두워지자 인조를 추대하는 인조반정(인조반정)에 가담하였다.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에는 청나라를 배척하는 당시의 여론에 맞서 현실적인 외교정책을 추진하였다.
병자호란이 끝난 후에는 우의정이 되어 왕을 위로하고 흩어진 정사를 잘 정리하여 안정되도록 노력하였고, 이후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이 비는 숙종 28년(1702)에 세운 것으로, 비문(碑文)은 朴世堂이 짓고, 글씨은 최명길의 후손 최창대가 썼다.
최명길은 인조(仁曺)를 왕으로 추대한 인조반정(仁祖反正)의 1등 공신 중의 한 사람이다. 그가 '인조반정'에 참여한 것은 부친과도 관련이 있다. 부친인 최기남(崔奇南)은 광해군(光海君) 때에 영흥부사로 있다가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연루되었고, 간신히 목숨만은 부지하여 경기도 가평에서 7년을 은둔하다가 병사(病死)하였다.
최명길의 부친 최기남은 '우계 성혼(牛溪 成渾)'의 문인(門人)으로 1591년(선조 24)에, 송강 정철의 건저문제(建儲問題 .. 선조 24년에 왕세자 책봉 문제를 둘러싼 동인과 서인 간의 싸움)로 서인(西人)이 실각당할 때 이에 연좌되어 과거시험을 본 자격을 잃기도 하였으나, 1600년에 벼슬길에 들어와 왕자들의 사부(師傅)로 임명될 정도로 학식을 인정받은 인물이다. 최기남은 모두 5형제를 두었는데, 맏아들인 '몽길'이 일찍 죽고 그 아래 둘째가 '래길(來吉)'이며 셋째가 명길이다. 그 밑으로는 혜길(惠吉)가 만길(晩吉)이 있다.
지천꾸러기의 유래
지천(遲川)은 최명길의 호이다. 그리고 지천꾸러기는 애물단지 즉 무척 속을 썩이는 아들을 일컫는 전라도 말이며,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남에게 까닭없이 원망이나 힐책을 듣는 사람을 의미한다. 지천꾸러기하면 누구나가 힐책하며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을 일컫는 말인데, 그 어원(語源)을 살펴보면 바로 지천 최명길(遲川 崔鳴吉)이 나온다.
병자호란을 당하여 모든 신하들이 청나라와 싸우자고 하였으나, 최명길은 홀로 화해를 주장하니 뭇 사람들의 지탄을 받게 되었다. 결국 화해가 아닌 항복을 치욕을 겪게 되는 조선...이러한 국치의 변을 당하고 보니 오히려 관료에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그 책임을 최명길에게 있다고 한풀이 하듯 몰아 세우는데, 그로부터 많은 사람들로부터 힐책을 받게 되거나 하면 "지천꾸러기"라고 불리워지게 되었다
최명길은 20세 때인 1605년 한 해에 소과와 대과시험을 모두 통과해내는 천재성을 발휘하였다. 그리고 중앙 정부에 진출하여 홍문관 전적이 되었지만, 북인(北人)의 권력독점이 심화되던 164년(광해군 6)에 병조좌랑에서 삭직(削職 .. 벼슬과 품계를 빼앗고 명부에서 이름을 지움)되었다. 이후 섡(宣祖)의 비(妃)인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유폐되자 이귀(李貴)가중심이 된 반정계획(反正計劃)에 참여하였다. 인조반정(仁祖反正)의 정사공신(靖社功臣)으로 그 공(功)이 인정되어 왕선부원군(完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이후 반정(反正) 정권의 핵심인물로 이조좌랑에서 이조참판에 이르기까지 출세길을 달렸다.
병자호란과 최명길
최명길은 병자호란이라는 전란(戰亂)만 없었다면 관료로서 뛰어난 업적을 칭송받았을 것이다.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으면서 관제개혁을 주장하였고, 병조참판 시절에는 백성들의 부세(負稅) 및 군량미를 경감시키는 정책을 펼쳤다. 사헌부 대사헌으로 있을 때에는 인조(仁祖)의 친동생인 능원군(綾原君)이 저지른 살인(殺人) 사건을 조사하다가 파직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당한 왕위 계승권자가 아니었던 인조(仁祖)를 추대한 탓에 인조(仁祖)의 생모인 계운궁의 3년상과 생부 정원군의 별묘(別廟) 건립을 주도하여 두고두고 사류(士類)들의 비난거리가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의 편찬자가 최명길의 졸기(卒記)를 쓰면서 ' 소인(小人) '으로 지칭한 것도 이 일과 연관이 있다.
그러나 사류(士類)들의 배척과는 달리 인조(仁祖)의 여전한 신임으로 이조판서가 되어 대제학을 겸하였고, 호조와 병조판서를 역임하던 중 병자호란(丙子胡亂)을 당하였다. 김상헌(金尙憲)을 중심으로 한 척화론(斥和論)에 맞거 적극적으로 화의(和議)를 주장하여 또 한 차례 사류(士類)들로부터 강한 비난을 받지만, 위기에 대처한 공로로 우의정 및 좌의정 자리에까지 올랐다.
서인(西人)정권의 외교 실책
인조반정(仁祖反正)의 가장 큰 명분 중의 하나는 친명반청(親明反淸)이었다. 광해군(光海君)을 밀어내고 정권을 잡은 세력들은 '도덕적 가치(道德的 價値)'를 내세운 정권답게 광해군의 중립외교(中立外交) 대신에 명(明)과의 의리를 중시하는 도덕외교를 구사하였고, 이는 결국 1627년(인조 5)에 정묘호란(丁卯胡亂)으로 일어났다. '정묘호란(丁卯胡亂)'으로 후금(後金)과 조선은 ' 형제의 맹약(兄弟의盟約)'을 맺었다. 최명길은 이 시점부터 후금(後金)과의 화친을 주장하였다.
정묘화약(丁卯和約)을 맺은 이후 후금군(後金軍)은 철군하였다. 그러다가 1636년(인조 14), 중국의 중원을 장악한 후금(後金)은 나라 이름을 청(淸)으로 고치고는 종전의 입장을 바꾸어 조선에 ' 군신관계(君臣關係)'를 강요하였다.
청나라의 요구에 불쾌한 인조(仁祖)는 청나라와 일전을 불사르겠다는 일념으로 척화파(斥和派)를 지지하였지만, 미처 전의(戰意)를 갖추기도 전에 청나라 군대는 압록강을 넘고 있었다. 청나라와의 전쟁에 승산이없다는 사실을 간파한 최명길(崔鳴吉)은 인조(仁祖)가 강화도로 하루빨리 옮겨 가기를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636년 12월 8일, 압록강을 넘은 청나라 군대는 6일 만에 서울 근교까지 진출하였고, 인조(仁祖)가 강화도(江華島)로 피신을 하지 못하게 서울과 강화도를 연결하는 길을 차단하였다. 강화도행을 포기한 인조는 우왕좌왕하면서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고 남한산성의 항전(抗戰)은 청나라 군대의 위협 이외에도 거센 눈보라와 맹추위와도 싸워야 하는 악조건 속에서 진행되었다.
이제 조선정부는 전쟁을 계속할 것인지, 창나라와 강화(講和)를 맺어야 할 것인지 선택을 강요받고 있었다. 1637년 1월23일 밤, 청나라 군대는 남한산성의 공격과 함께 강화도를 공격하였다. 강화도가 점령되고 위기감이 고조(高潮)되자 남한산성 내에는 척화(斥和)에서 강화(講和)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결국 강화(講和)가 성립되어 1월30일 인조(仁祖)는 항복의식(降腹儀式)을 거행하는 수모를 겪게 되었다.
청태종의 최후통첩
淸나라 황제는, 살기를 원하면 城門을 열고 나와 항복하라는 최후통첩을 仁祖에게 보낸다. 이미 항복의 불가피성을 인지하고 있던 仁祖는 그 답서를 작성할 臣下를 찾지만, 만고의 역적이 되기를 두려워 하는 신하들은 모두 피하기만 하였다. 인조는 드디어 항복문서를 작성할 신하를 지명한다.
첫번째로 지명받은 정6품 "수찬(修撰)"은 왕에게 "늙어가는 몸이 병마저 깊어, 분부를 거두어 달라는 상소를 올리고, 그 대신 매를 맞고 답서의 작성을 면하게 된다. 두번째, 정5품 "교리(校理)"는, 자신의 글이 채택되어 청나라 황제에 보내질 경우, 후세 만대에 이어질 치욕에 고민하다가 논둑에서 심장병으로 죽었다. 세번째, 정5품 "정랑(正郞)"은 미친 척하며 엉뚱한 답서를 지어 올린다.
최명길 ... 역사의 죄인을 자처하다
최명길은 1624년의 이괄의 난(李适의 亂)에는 무신(武臣)이 아닌데도 위험 속에서 홀로 임진강을 건너 원수 장만(張滿)을 찾아갔고, 계책을 세워 안현(安峴)전투를 승리로 이끎으로써 반란(叛亂) 진압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병자호란 초기에 청나라의 기동대가 들이닥쳤을 때 자원하여 목숨을 걸고 적장(敵將)에게 침략을 항의함으로써 인조(仁祖)와 백관들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할 시간을 벌었다. 병자호란 후에도 스스로 청나라를 왕래하면서 대청(對淸) 외교에서 패전국(敗戰國)으로서 겪는 온갖 어려움을 당당한 자세로 해결하여 나갔다.
그의 이러한 성격과 활동은 주로 정적(政敵)들이 편찬한 '인조실록'에서도 곳곳에서 높게 평가되었다. 구체적인 정책은 외부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개혁을 추구하되 시세의 변화에 따라 변통하는 유연성을 취하며 개혁을 추진하였다. 후금(後金) 및 그 후의 청나라에 대해서는 유연한 외교관계를 유지하여 충돌을 피하고 우리의 입장을 지키자는 주장으로 일관하였다. 병자호란 때는 ' 싸우자니 힘이 부치고 감히 화의(和議)하자고 못하다가 하루아침에 남한산성이 무너지고, 위아래가 어육(魚肉)이 되면 종사를 어디에 보존하겠느냐 ...'는 입장에서 강화(講和)를 주장하였지만, 자신이 쓴 항서(降書)를 찢는 척화파(斥和派) 김상헌(金尙憲)의 행동에도 의미가 있다고 인정함으로써 독단(獨斷)에 빠지지 않았다.
이제는 崔鳴吉의 차례이었다. 최명길은 스스로 答書를 작성하여 왕에게 전한다.
최후통첩에 대한 최명길의 답서
최명길이 먹을 갈았다. 남포석 벼루는 매끄러웠다. 최명길의 시선이 벼루와 먹 사이에서 갈렸다. 새카만 묵즙이 눈에서 나오는가 싶었다. 묵즙이 흘러서 연지에 고였다. 최명길이 붓을 들었다. 최명길이 붓을 적셨다. 최명길이 젖은 붓을 종이 위로 가져갔다.
소방(小方)은 바다 쪽으로 치우친 궁벽한 산골로, 시문(詩文)과 담론(談論)에 스스로 눈이 멀어 천명의 순환에 닿지 못하였고 천하의 형세를 살피지 못하였습니다. 캄캄한 두메에서 오직 明을 아비로 섬겨 왔는데. 그 섬김의 지극함은 황제께서 망월봉(望月峰)에 오르시어 친히 보신 바와 같습니다. 소방의 몽매함은 그러하옵고, 이제 밝고 우뚝한 황극(皇極)이 있는 곳을 벼락 맞듯이 깨달았으니, 새로운 섬김으로 따를 수 있는 길이 비로소 열리는 것이옵니다. 소방의 군신(君臣)들이 들불처럼 휘몰아 오는 황군(皇軍)의 위무(威武)를 차마 영접하지 못하고, 우선 몸을 피해 山城으로 들어왔으나 어찌 감히 대국에 맞서려는 뜻이 있겠나이까.
쫒기는 작은 짐승이 굴 속으로 숨어든 일을 황제께서 기어이 군사를 움직여 꾸짖으신다면, 소방은 황제의 은덕에 닿지 못하여 오직 죽음이 있을 뿐이옵니다. 또 성벽에서 닭싸움 하듯 소소한 다툼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 또한 한줄기 허술한 돌담을 지켜보려는 미망이었을 뿐 어찌 황제의 군사에 대적할 뜻이 있었겠나이까? 황제께서 친히 여러 강을 건너시어 이 궁벽한 산골로 내려 오시니, 오셔서 소방의 죄를 물으시더라고 복되고 또 기뻐서 달려 나가 배알하려 하나 황제의 크신 노여움과 깊으신 근심이 또한 두려워서 소방은 차마 나아가지 못하고 돌담 안에서 머리를 조아릴 뿐입니다.
이제 스스로 새로워지고 기뻐서 따르려는 小方의 뜻이 돌담 안에서 시들지 않도록 살펴주시옵고, 모든 생령들의 살고자 하는 기운을 거두시어 기르시는 황제의 천하에 소방이 깃들게 하여 주시옵소서. 황제께서 끝내 노여움을 거두지 아니하시고 군사의 힘으로 다스리신다면 소방은 말길이 끊어지고 기력이 다하여 스스로 갇혀서 죽을 수 밖에 없으니, 천명을 이미 받들어 운영하시는 황제께서 시체로 가득 찬 이 작은 城을 취하신들 그것을 어째 패왕의 사업이라고 하겠나이까?
황제의 깃발 아래 만물이 소생하고 스스로 자라서 아믈다워지는 것일진데, 황제의 품에 들고자 하는 소방이 황제의 깃발을 가까이 바라보면서 이 돌담 안에서 말라 죽는다면 그 또한 황제의 근심이 아니겠습니까. 하늘과 사람이 함께 귀의하는 곳에 소방 또한 의지하려 하오니 길을 열어 주시옵소서....
仁祖와 신하들... 소설 남한산성
최명길의 답서를 받아든 仁祖는 야심한 밤에 영의정 김류(金踰)와 김상헌, 최명길을 행궁으로 불렀다. 그들은 최명길의 답서를 돌려 읽었고, 이윽고 영의정 김류가 말문을 열었다.
"전하! 최명길이 청태종을 가리켜 황극(皇極)이라고 일컫고 있으니 만고에 없는 일이옵고, 明에게도 바치지 않았던 말이옵니다. 또 명길의 청나라를 가리켜 "하늘과 사람이 귀의하는 곳"이라 하였는데, 천인소귀(天人所歸)는 하늘을 청나라 태종에게 내주자는 뜻으로, 이는 태종의 신하라 해도 입에 담을 수 없는 말 이옵니다. 문서를 청에 보내기 전에 우선 명길은 문초하여 삼전도를 오가면서 龍骨大에게 무슨 밀약을 받았는지를 먼저 알아내야 할 것입니다....."
이어 김상헌이 앞에 나왔다. " 전하! 뜻을 빼앗기면 모든 것을 빼앗길 터인데, 이 문서가 과연 살자는 문서이옵니까? " 임금은 대답하지 않았다. 김상헌이 다시 임금을 다그친다. " 전하! 이제 청나라 왕을 황극이라 칭하였으니, 이 문서가 적에게 가면, 전하는 황제의 신하가 되고,신(臣)들은 청 황제의 말잡이가 되며, 백성들은 황제의 노예가 되는 것이옵니까? "
임금이 대답이 없자 김상헌이 다시 말한다. " 적이 비록 성을 에워싸고 있다하나, 아직도 고을마다 백성들이 살아있고 또 의지할만한 성벽이 있사오니 어찌 회복할 길이 없겠습니까? 전하! 최명길을 내치시고 근본에 기대어 살 길을 열어 나가소서..."
이윽고 최명길이 말한다. " 김상헌은 제 자신에 맞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敵들이 성벽을 넘어 들어오면, 세상은 기약할 수 없는 것이온데, 상헌이 말하는 根本은 태평한 세월의 것이옵니다. 세상이 모두 불타고 무너진 풀밭에도 아름다운 꽃은 필 터인데, 그 꽃은 반드시 상헌의 넋일 것이옵니다. 상헌은 과연 백이(伯夷)이오나, 臣은 아직 무너지지 않은 초라한 세상에서 만고의 역적이 되고자 합니다. 전하의 성단으로 臣의 문서를 황제에게 보내 주소서..."
김상헌이 두 손으로 마리를 싸쥐며 소리쳤다. "전하! 명길의 문서는 글이 아니옵고..." 최명길이 김상헌의 말을 막았다. " 그러하옵니다. 전하. 신의 문서는 글이 아니옵고 길이옵니다. 전하께서 밟고 걸어 가셔야 할 길바닥이옵니다 "
영의정 김류가 말한다. " 명길이 자신의 문서를 길이라고 하는데, 성 밖으로 나아가는 길이 어찌 글과 같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글을 밟고서 나갈 수 있다면 글 또한 길이 아니겠습니까 ?" 임금이 겨우 말했다. "영의정의 말이 어렵구나. 쉬고 싶다. 모두 물러가라" 그날 밤 仁祖는 승지를 불러 문서에 국새를 찍었다.
남한산성 행궁
행궁에서 물러 나오며 김상헌은 행궁 앞뜰에서 최명길의 항복문서를 찟는다. 최명길이 " 나라에는 이런 글을 쓰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이런 글을 찢어야 하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 "는 말을 남기며, 찟어진 종이조각을 다시 붙인다. 이를 바라다 보며 임금 인조(仁祖)는 " 찟는 자도 충신이요, 주워 붙이는 자도 충신이로다 "라고 말하며 눈물을 글썽이었다.
강화(강화)가 이루어진 뒤 최명길은 명나라 황제에게 ' 조선이 청나라와 강화한것은 종묘 사직을 위하여 보존하기를 도모한 것일 뿐'이라는 내용의 자문(咨文... 외교문서)을 보내고자 생각하였다. 요동(遼東)을 지키는 청나라 군대를 피해 바닷길로 은밀하게 보내야했다. 1638년 가을에 강가에서 경비하던 군사가 독보(獨步)라는 이름의 중을 데리고 왔는데, 최명길은 이 사람에게 명나라에 자문(咨文)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겼다. 이 자문(咨文)은 마침내 명나라 황제에까지 전달되었다.
최명길, 청나라에 소환되다
최명길은 1642년(인조 20)에 명나라와 내통(內通)하였다는 죄목으로 청나라에 소환되었다. 최명길은 용골대(龍骨大)의 심문을 받았다. 그는 왕은 모르는 일이고 자기가 전적으로 한 일이라고 하였다. 이윽고 수갑과 쇠사슬이 채어진 상태로 심양(瀋陽) 북관(북관)에 갇혔는데, 북관(北關)은 사형수를 가두어두는 감방이었다.
이듬해 4월, 최명길은 부고간에서 남관(南關)으로 이관되었는데, 당시 남관(南關)에는 척화파(斥和派)의 거두 김상헌(金尙憲)이 수감되어 있었다. 주화파(主和派)와 척화파(斥和派)의 대표가 나라를 위하다가 청나라의 감옥에서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운명적으로 다시 만난 것이었다.
최명길으 김상헌(金尙憲)이 명예만을 위하는 자라 판단하고 정승 천거에서 깎아버리기까지 하였는데, 같이 구금된 상황에서 죽음이 눈앞에 닥펴도 확고하게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고 드디어 그의 절의(節義)를 믿고 탄복하였다. 김상헌도 최명길을 남송(南宋)의 진회(秦檜)와 다름없는 인물로 보고 있었는데, 그가 죽음을 걸고 스스로 뜻을 지키며 흔들리거나 굽히지않는 것을 보고 그의 강화론(講和論)이 오랑케를 위한 것이 아님을 알게되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서로 마음을 풀고 시(詩)를 지으며 우정을 나누었다.
從尋兩世好. 양대의 주정을 찾고 / 頓釋百年疑. 백년의 의심을 푼다. 이와같은 김상헌의 시(詩)를 받은 최명길이 답시(答詩)를 주었다. 君心如石終難轉. 그대 마음 돌 같아서 끝내 돌리기 어렵고 / 吾道如環信所隨. 나의 도는 둥근 꼬리 같아 경우에 따라 돈다네
머나먼 타국에서 옥살이를 하는 동안 그들은 서로 방법이 달랐을 뿐, 나라를 위한 마음은 같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화해한 것이다. 마침내 최명길은 1645년 3월에 풀려나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그의 나이 60세. 이제 병들고 늙은 몸만 남아있는 노인이었다. 귀국한 지 2년 후 병으로 누운 뒤 인조(仁祖)가 직접 문병을 갔으나 일어나지 못하고 5월17일 62세를 일기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재심옥화김청음운 在瀋獄和金淸陰韻
심양의 옥중에서 청음 김상헌에게 화답하다
정처관군동 靜處觀群動 고요한 곳에서 여러 움직임 관찰하면
진성란만귀 眞成爛漫歸 참되게 합의점을 이루리라
탕빙구시수 湯氷俱是水 끓는 물과 얼음 모두 같은 물이고
구갈막비의 구褐莫非衣 고급 모피와 갖옷과 천한 베옷도 다 같은 옷이라오
사혹귀시별 事或歸時別 혹 일이야 때에 따라 달라질 지라도
심녕여도위 心寧與道違 어찌 마음이 진리와 어긋나리오
군능오사도 君能悟斯道 그대 능히 이 도리를 깨달았는가
어묵각천기 語默各天機 말 없이 각자 하늘의 이치를 지켜 나가세
그저 黨爭이었다고 누가 폄하하는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화친론자(和親論者)인 최명길은 척화파(斥和派)의 화신 김상헌을 만났다. 그리고 최명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최명길 .. 대감과 절교를 할까 하고 이렇게 찾아 왔습니다.
김상헌 .. 절교, 좋겠지. 그래야 될 일이 있다면 그래야 할 수 밖에...
( 김상헌은 최명길의 진의를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담담하게 수긍한다.)
최명길 .. 그 대신 請이 하나 있습니다.
김상헌 .. 請이라 ...?
최명길 .. 대감의 목을 가져 갔으면 합니다
김상헌 .. 내 목을 ? 하면 遲川(최명길의 號)은 내게 무엇을 주시겠소?
최명길 .. 저는 명예를 내 놓겠습니다.
두 사람은 가슴 섬뜩한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서도 태연하고 격의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최명길의 논리는 이러 하였다. 10만 병력의 오랑케는 싸움에 이긴 뒤, 조선 조정의 척화정책(斥和政策)을 추궁하여 올 텐데, 그 때 조정에서도 최명길과 같은 화친론자(和親論者)가 있었음을 내세운다면 피해를 줄이게 된다. 그리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척화를 주장한 대가로 목을 내주는 것으로 많은 대신들의 희생을 막아야 한다.. 그 일을 김상헌이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병자호란을 앞둔 절대절명의 상황에서 한 사람은 후대에 길이 남겨질 씻을 수 없는 오욕(汚辱)을 감수하고, 또 한 사람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 나라를 구하자는 맹약을 맺는다. " 나는 명예를 버릴터이니, 당신은 목숨을 내주시오. " 척화파와 주화파의 정쟁(政爭) 이면에는 이와 같은 구국(救國)의 대의명분이 깔려 있었다.
최명길의 주화론(主和論) 원문
여기강화이존(與其講和而存), 무녕수의이망(無寧守義而亡), 차내인신수절지언이(此乃人臣守節之言耳) ... 강화하여 존속하기 보다는 차라리 의를 지켜 망하는 것이 낫다는 것, 이는 신하가 절개를 지키는 말일 뿐입니다.종사존망(宗社存亡), 이어필부지사(異於匹夫之事) ... 종묘사직의 존망은 필부의 일과는 다릅니다.부불자량력(夫不自量力), 경위대언(輕爲大言), 횡도견양지노(橫挑犬羊之怒) ... 무릇 스스로 힘을 헤아리지 않고 경솔히 큰소리를 쳐서 개와 양의 노여움을 거슬러 일으켜,
종지어생령도탄(終至於生靈塗炭), 종사불혈식(宗社不血食), 즉기위과야(卽其爲過也), 숙대어시(孰大於是) ... 마침내 생민이 도탄에 이르러 종묘사직에 제사하지 못한즉, 그 허물됨이야 무엇이 이보다크겠습니까. 상절이위국력방갈(常截以爲國力方竭), 로병상강(虜兵尙强), 고수정묘지약(姑守丁卯之約), 이완수년지화(以緩數年之禍) ... 늘 臣이 생각하건데 국력은 바야흐로 다하고, 오랑케의 군사는 오히려 강성하니 ,잠시 정묘년의 화약을 지켜서 몇 년 禍를 늦추고,득이기간(得以其間), 발정시인(發政施仁), 수습민심(收拾民心), 축성저량(築城儲糧) ... 그 사이 정령을 발하고, 인정을 베풀어 민심을 수습하고, 성을 쌓고 군량을 비축하여익고변비(益固邊備), 렴병부동(斂兵不動), 이관피흔(以觀彼炘), 위아국계(爲我國計), 무출차자(無出此者) ... 변방의 수비를 더욱 굳건히 하고 군사를 단속하여 동요함이 없게 하면서, 저들의 허점을 살피는 것으로 우리나라의 계책을 삼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최명길과 김상헌 .. 역사의 라이벌
1637년 1월 18일, 청군(淸軍)에게 포위되어 있던 남한산성의 분위기는 침울하였다. 산성으로 쫓겨 들어온지 한 달이 훨씬 지났지만, 돌파구는 보이지 않았다. 연일 이어지는 매서운 추위에 병사들은 얼어 죽거나 동상(冬傷)에 걸려 쓰러지고, 얼마 남지 않은 군량(軍糧)은 하루하루 줄어들고 있었다. 더욱 절망적인 사실은 구원병이 끊겨버린 점이었다.
시간은 자신들 편이라고 확신했던 청나라 군대 지휘부는 연일 출성(出城)과 항복을 독촉하였다. 벼랑 끝으로 몰린 조선 조정은 결국 청나라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이조판서 최명길(崔鳴吉)이 청군 진영에 보낼 문서의 초(草)를 잡았다.
그 문서는 ' 조선 국왕은 절하고 대청국 괸온인성 황제께 글을 올립니다 '라는 구절로 시작되었다. 조선이 처음으로 ' 오랑케 ' 청나라를 '황제국'으로 인정하는 순간이었다. 예조판서 김상헌(金尙憲)은 글을 보고 통곡하였다. 그는 항복문서를 빼앗아 찢어버린다. 그러자 최명길은 흩어진 종이 쪽을 주워 모아 풀로 붙인다. 처참하고도 희극적인 장면이었다. 왜 한 사람은 찢어버리고, 다른 한 사람은 도로 붙인 것일까?
17세기 초반, 조선을 둘러싼 동아시아 정세(政勢)는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15세기 이래 패권국으로 군림하였던 명(明)의 몰락이 뚜렷해지고, 만주(滿州)에서 급속히 떠오른 후금(後金)이 명(明)에도전하고 있었다. 두 나라 사이에 낀 조선의 처지는 괴로웠다. 임진왜란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상황에서 대륙 패권(覇權)의 변동이라는 격변 속으로 휘말렸기 때문이다. 명나라는 조선을 끌여들여 후금(後金)과 싸움을 붙이려 했고, 후금(後金)은 후금대로 조선에 중립(中立)을 지키라고 압박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은 정묘호란(丁卯胡亂)을 겪는다. 명나라와의 결전을 앞두고 조선을 묶어 두려 했던 후금(後金)의 침략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후금군 철기(鐵騎)의 돌격을 감당할 수 없었던 조선은 후금과 형제(兄弟)관계에 입각한 화약(和約)을 맺는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고뇌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이 지니고 있는 세계관으로 보자면 만주족 후금(後金)은 분명히 '오랑케'이자 '금수(禽獸)'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금을 형(兄)으로 섬기는 것은 도무지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갈수록 엄혹해졌다. 조선이 '임금'이자 '부모'로 섬기던 명나라는 후금에 계속 밀리기만 했다. 정묘호란 이후 후금은 명(明)과의 싸움에서 연전연승하면서 기세가 높아졌다. 급기야 1636년 후금의 '홍타이지' 칸은 황제가 되기로 하고, '아우' 조선에 그 사실을 통고한다.
칭제(稱帝) 사실을 알리려고 후금(後金)의 사신 용골대(龍骨大) 일행이 조선에 입국하자 조선의 조야는 정신적으로 공황상태에 빠진다. ' 중화국 명나라의 천자(天子)만이 천지간에 군림하는 유일한 황제' 라는 조선지식인들의 믿음과 원칙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조선의 조정은 격앙되었다. 대다수 신료들은 ' 명나라는 부모의 나라이고 후금(後金)은 부모의 원수인데다,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왔으므로 절대로 배신할 수 없다'라고 하며 용골대(龍骨大) 일행의 상경을 막으라고 촉구하였다.
용골대 일행의 목을 베어 명나라로 보내고 전쟁을 불사하자는 초강경론을 펼치는 사람도 있었다. 김상헌(金尙憲)은 그 같은 주장을 펴던 척화파(斥和派)의 맏형 격인 인물이었다. 천자국 명나라를 섬겨온 예의와 명분을 수홓기 위해서도 후금(後金)과의 모든 관계를 끊고 결전의 길로 나가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 명나라를 위해서라면 종사가 망하는 것도 감수할 수 있다 '는 주장이기도 하다.
소수파였던 주화파(主和派)의 의견을 달랐다. 주화파의 대표자 최명길(崔鳴吉) 또한 ' 오랑케와 척화(斥和)해야 한다 '는 주장이 정론이자 원칙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문제는 당시 현실에서 '원칙'을 관철하려 할 경우 나라가 망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최명길은 ' 임금의 의리는 필부의 그것과 다르다 '면서 ' 조선의 임금이 명나라를 위해 종사(宗社)를 망하게 할 수는 없다 '라고 했다. 그러면서 정묘년에 맺은 후금(後金)과의 형제관계를 유지하도록 끝까지 노력하되, 후금의 칭제(稱帝)에 대해 호오(好惡)의 감정을 드러내지 말자고 강조했다. 최명길은 ' 오랑케가 칭제했다 '는 사실 자체에 흥분하여 기존의 관계를 무조건 파기하자고 했던 척화파를 비난했던 것이다.
병자호란과 같은 절대절명의 위기상황에서, "죽을지언정, 굴복은 있을 수 없다 "는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과 "굴복은 할지라도, 살아야만 한다 "는 지천 최명길(遲川 崔鳴吉).... 두 사람의 의견은 극명하게 갈렸지만, 둘 중 누가 더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이들은 개인의 안위가 아닌 진정한 애국심의 발로이었다. 김상헌과 최명길 .. 이들이야말로 아직까지도 그 우열과 정당성을 가리기 힘든 진정한 역사의 라이벌이었다.
인조(仁祖)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는 결국 다수파인 척화파의 의견을 받아 들인다. 후금(後金)과 맺은 형제관계를 파기하고 절교하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절교(絶交) '이후'에 대한 군사적 대책은 매우 미흡하였다. 청나라가 침략할 경우 서울을 떠나 강화도(江華島)로 들어가 맞선다는 것이 주된 대책이었다.
1636년 12월 9일 압록강이 얼어붙자 청나라 철기(鐵騎)는 서울을 향해 내달렸다. 12월14일 청나라 군대의 선봉은 지금의 녹번동 부근까지 도달하였다. 청군(淸軍)은 의주(義州)에서 서울로 이르는 대로 주변의 산성에 들어가 청야작전(淸野作戰 .. 적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농작물이나 건물 등 지상에 있는 것들을 말끔히 없애는 작전)을 폈던 조선군을 무시하고 돌격을 감행하였다. 허를 찔린 조선 조정은 강화도로 피날할 시간적 여유를 상실하였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당시 남한산성에는 14,000여 명의 병력과 그들이 45일 정도를 버틸 수 있는 군량(軍糧) 밖에는 없었다. ' 춥고 배고픈 ' 남한산성은 청나라 군대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었고 남북방의 구원병들은 산성으로 접근하는 즉시 청군에게 궤멸되었다. 청나라는 처음에는왕세자를 내보내야 항복을 받아 주겠다고 했다. 이어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였고, 나중에는 척화신(斥和臣)들을 묶어 보내야 한다고 압박의 강도를 높였다.
최명길과 김상헌 崔鳴吉과 金尙憲
포위된 남한산성에서도 ' 선택 (選擇) '을 둘러싼 논쟁은 지속되었다. 김상헌 등은 인조에게 ' 오랑케의 신하가 되느니 최후의 결전을 벌여 깨끗이 망하자 '는 주장을 폈고, 최명길 등은 ' 종사와 백성을 생각해야 할 임금은 은인자중해야 한다 '고 강조했다. 산성을 지키던 병사들도 동요했다. 추위와 굶주림, 공포에 지친 병사들 가운데는 항복하자고 시위를 벌이는 자들도 있었다. 막다른 상황에 몰리자 인조(仁祖)는 결국 최명길(崔鳴吉) 등의 건의를 받아들인다.
최명길 .. 實利를 중시한 민족의 지도자
김상헌 .. 名分에 입각한 민족의 자존심
1618년 광해군에 의하여 영창대군의 生母,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서궁 유폐사건이 일어나자
최명길 .. 이귀, 김류와 함께 반정세력에 가담, 훗날 仁祖反正을 주도한다
김상헌 .. 폐모론에 격렬하게 반대하다 낙향하고 만다
仁祖反正에 의하여 光海君이 축출되고, 仁祖가 즉위하고, 자신의 부친 정원대원군을 왕으로 추존하려는 추숭논의(追崇論議)가 일어나자
최명길 .. 大義에는 어긋나나, 임금의 입장이 중요하다며 인조를 지지한다
김상헌 .. 대의에 어긋나며, 公과 私를 구분해야 할 일이라며 반대한다.
仁祖가 즉위하자
김상헌 .. 주로 대사헌, 대사간 등을 역임하면서 강력한 言論活動으로 국정을 牽制한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김상헌 .. 선전후화론(先戰後和論)을 강력히 주장하고
최명길 .. 선화후전론(先和後戰論)을 내세우면서, 두 사람의 대립은 본격화된다
살아서 죽을 것인가 ? 죽어서 살 것인가 ?
죽어서 아름다울 것인가? 살아서 더러울 것인가?
실천 불가능한 正義인가 ? 실천 가능한 恥辱인가?
병자호란에서 전황이 조선에 불리하게 돌아가자, 조정은 주전론자와 주화론자로 兩分되어, 매일 치열한 격론을 벌였고, 명분(名分)보다는 실익(實益)이 중요하다는 대세에 힘 입어 최명길이 강화를 주도한다. 청나라 군사에 의해 남한산성이 포위되고, 패색이 짙어지자
최명길 .. 仁祖가 있던 남한산성과 淸軍營을 부지런히 오가며 講和를 준비하였고
김상헌 .. 그러는 최명길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계속해서 斥和를 주장한다
최명길에 의하여, 항복 문서가 만들어지자
김상헌 .. 항복문서를 찢어 버리고 대성통곡을 하였으며
최명길 .. 그런 김상헌의 행동이 이유가 있다고 인정하며, 조선의 무력함을 한탄한다.
드디어 仁祖가 송파 三田渡에서 아홉번 절을 하며 청태종에게 항복하자
김상헌 .. 國恥를 한탄하며 식음을 전폐하고 자결을 기도하다가 두문불출한다.
최명길 .. 이후 영의정에 올라 복잡한 대외문제 등 전후처리를 주도한다
끝까지 대의를 지키고자 분전한 청음 김상헌(淸蔭 金尙憲)은 충절의 상징으로 부각되어, 당대(當代)의 선비들에게 추앙을 받았지만, 끝까지 나라를 구하고자 분전한 지천 최명길(遲川 崔鳴吉)은 당대의 성리학적 사대분위기에 밀려 폄하되었고 결국 변절자로 치부되었지만, 용기있는 행동으로 후대(後代)의 선비들에게서 재조명을 받는다.
후세의 평가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는 최명길의 졸기(卒記)를 보면, 그가 동시대 에 선비들로부터 어떠한 평가를 받았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의 인물 됨됨이를 가리켜 실록의 찬자(撰者 .. 글을 지은 사람)는 ' 기민하고 권모술수에 능하였다 '고 하였다.
더욱이 화의론(和議論)을 주장하여 선비들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내용까지 노골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남한산성의 변란(變亂) 대에는 척화(斥和)를 주장한 대신(大臣)을 협박하여 청나라에 보냄으로써 개인감정을 풀었고, 환도(還都)한 뒤에는 바르지 못한 사람들을 등용하여 사류(士類)와 알력이 생겼다고 했다. 그러나 위급한 경우를 만나면 앞장서서 피하지 않았고, 일에 임하면 칼로 쪼개듯 분명히 처리하였으니, 역시 한 시대를 구제한 재상이라고 평가하였다.
최명길의 졸기(卒記)는 척화론의 영수이었던 김상헌(金尙憲)의 졸기(卒記)와 비교해 볼 때 초라하고 평가절하된 모습이 역력하다. 최명길은 인조반정(仁祖反正)의 핵심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조 묘정에 배향되지 못하였다. 세월이 흘러 숙종(肅宗)이 인조 묘정에 다시 배향하라고 명령하였으나, 사헌부의 반대로 끝끝내 배향되지 못하였다.
반면, 김상헌의 척화론(斥和論)은 송시열(宋時烈)의 숭명배청(崇明排淸)으로 이어지면서 노론(老論) 정국 속에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의 자손은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주역이 된 반면, 최명길의 후손은 증손자대 이후로는 크게 현달하지 못했다. 실록의 찬자(撰者)는 김상헌의 길고 긴 장문의 졸기(卒記) 말미에 그를 가리켜 ' 문천상(文天祥) '이 송나라 삼백 년의 정기(正氣)를 거두었다고 하는데, 문천상 뒤로는 동방에 오직 김상헌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라고 극찬하였다.
졸기 卒記
졸기(卒記)라는 말은 ' 죽음에 대한 기록'이라는 의미이다. 우리에게는 국보(國寶) 제 151호이고, 유네스코에서 ' 세계의 문화유산 '으로 선정하여 인류의 보배임을 인정한 '조선왕조실록'에는 공직에 몸담았던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면, 그 날짜의 '왕조실록'에 '졸기(졸기)'를 적어서 고인의 생애를 뒤돌아보게 하고 있는데, 역사인식이 투철하지 못한 민족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본보기이다.
정부에서 편찬하는 공식문서에 관여한 한 인간의 삶을 평가할 수 있는 공식적인기록을 남긴다는 사실 .. 그것이 그의 삶을 긍정적으로 보는 듯 하면서도 비판적인 시각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은 매우 놀랍고 아름답기조차 하다. 물론 그 기록들은 사관(史官)들이 쓴 것이지만, 또 다른 사관(史官)들의 검증을 거치지 않고서는 '실록'에 등재될 수 없다.
물론 그 기록이 관찬(官撰)이라는 사실만으로 완벽한 신뢰를 보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역사의 기록은 역시 '승자의 기록(勝者의 記錄)'이라는 관점도 있다. 그러면서도 사관에 의하여 쓰여진 '졸기'가 또 다른 사관들에 의해 검증된다는 역사인식의 지엄함은 놀란만 하다. 다시 말하면 '승자의 기록'이라는 시각을 사관들 스스로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미 채택된 '졸기'를 등재한 다음, 다시 ' 사신은 말하기를 ... (史臣曰) '이라고 명시한 '졸기'를 중복하여 등재하고 공정을 기하고자 하였다. 물론 '사신왈'이라는 비평기사는 모든 공직자의 졸기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집필하지 않은 사관이 읽었을 때 불만스럽게 느껴지는 경우에만 ' 사신왈'이 첨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