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희빈 張禧嬪
희빈 장씨(禧嬪 張氏. 1659~1701)는 조선시대뿐 아니라 한국사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여성의 한 사람일 것이다. 이러한 명성의 확산에 크게 기여한 것은 소설, 드라마, 영화와 같은 대중예술이었다. 그만큼 그녀의 삶은 극적(極的)이었다.
역사와 대중예술에서 그린 장희빈의 이미지는 ' 권력을 지향한 요부(妖婦)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모든 이미지가 그렇듯이, 거기에는 사실과 왜곡(歪曲)이 섞여 있다. 유사 이래 권력의 중심부에는 언제나 음모와 암투(暗鬪)가 넘쳤다. 그것은 권력의 속성이었다.
어떤 일과 사람을 선악(善惡)의 구도로 재단(裁斷)하는 것은 명쾌하지만, 그만큼 단순화(單純化)와 왜곡(歪曲)의 위험이 뒤따른다. 어쨋든 그녀가 남다른 원력 의지를 가진 것은 사실이었다. 그것은 당쟁(黨爭)과 환국(換局)이라는 급박한 시대적 환경과 그것을 주도한 숙종(肅宗)의 처결과 맞물리면서 비극적인 결과를 낳았다.
장희빈의 가문은 비빈(妃嬪)의 지위와는 어울리지 않게 상당히 한미(寒微)하였다. 그녀는 1659년(효종 10)에 장경(張烱. 본관, 인동, 1623~1669)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본명은 장옥정(張玉貞)이다. 장경(張烱)은 처음에 '고씨'와 결혼하였지만, 그녀가 23세의 나이로 일찍 사망하자 '윤씨 (尹氏. 1626~1698. 본관 파평, 사역원 첨정 윤성립의 딸)'와 재혼하였다. 그 사이에 1남2녀를 두었는데, 희빈 장씨는 막내이었다. 그녀와 함께 널리 알려진 장희재(張希載. 1651~1701)는 맏아들이자 희빈의 오빠이다.
역관의 신화 ... 장현(張炫)
장희빈의 가계(家系)에서 언급할 만한 사실은 그녀의 숙부가 역관(譯官) 장현(張炫)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역관은 중인(中人)이었지만 상당한 부(富)를 축적하였고, 그것을 매개로 권력도 어느 정도 누릴 수 있었다.
장현(張炫)은 '숙종실록'에 ' 국중(國中)의 거부(巨富) '로 기록될 정도로 부자이었다. 그리고 남인(남인)의 영수인 허적(許積)의 서자(庶子) 허견(許堅)이 결탁하고 있던 복평군(福平君) 등과도 친밀한 사이였다. 장희빈이 남인(南人)과 가까왔던 것은 이런 사정이 적지 않게 작용하였다. 아버지 장경(張烱)은 장희빈이 나이 10세 때 세상을 떠났다.
조정에서는 중국에 사신을 보낼 때 여비를 공식적으로 지급하지 않고, 1인당 인삼(人蔘) 여덟 상자를 중국에 가져다 팔아 쓰게 하였는데, 돌아올 때에 중국의 골동품이나 사치품을 사다가 국내에서 팔면 몇 배의 장사가 되었다. 인삼(人蔘)이 차츰 귀해지자, 인조(仁祖) 때에는 인삼 1근을 은(銀) 25냥으로 쳐서 2000냥을 가져가 무역을 하게 하였다. 인삼이 귀해지면 은(銀)을 가져갔고, 은(銀)이 귀해지면 인삼을 가져갔다. 그러나 사신(使臣)들은 중국 장사꾼을 만날 수 없었으므로 사신들의 몫까지 역관(譯官)들이 대신 무역하였다. 역관들은 무역을 통하여 막대한 부(富)를 축적하게 되었다. 또한 역관들은 막대한 재산과 해박한 국제정세를 통한 정권의 핵심과 가까웠다.
입궁과 총애 入宮과 寵愛
위와 같은 한미한 배경을 가진 장희빈이 입궁(入宮)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러한 행운을 제공한 사람은 동평군 이항(李杭. 1660~1701)과 당시 우의정 조사석(趙師錫)이었다. 동평군(東平君)은 인조(仁祖)의 후궁인 '귀인 조씨'의 아들인 숭선군 이징(李澄)의 아들인데, 그의 어머니가 조사석(趙師錫)의 사촌누이이었다. 조사석은 관직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대단한 명문 출신이었다. 아버지는 형조판서 조계원(趙啓遠)이고, 어머니는 영의정 신흠(申欽)의 딸이었으며, 아들은 영의정까지 오른 조태구(趙泰耉)이었다.
숙종실록(肅宗實錄)에 따르면 ... 희빈(禧嬪)의 어머니 '윤씨'는 조사석(趙師錫) 처가(妻家)의 종(從)이엇는데, 조사석(趙師錫)과 사통(私通)한 사이이었다. 조사석은 동평군(東平君)에게 정부(情婦)의 딸은 입궁시켜 달라고 부탁하였고, 그런 요청에 따라 희빈은 나인(內人)으로 입궁하였다. 희빈의 미모가 매우 뛰어났다. 숙종실록 .. 1687년 6월16일
장희빈의 일생에서 중요한 전기(轉機)는 그녀 나이 21세 때인 1680년(숙종 6)이었다. 그 해 10월 26일 숙종의 왕비 인경왕후(仁敬王后. 1661~1680)가 죽었는데, 그 뒤에 장희빈이 처음으로 숙종(肅宗)의 은총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처음의 은총(恩寵) 이후 행운은 바로 현실화되지 못하였다. 당시 대비(大妃) 명성왕후(明聖王后)는 당파적(黨派的) 색채가 강하였는데, 장희빈과 연결되어 남인(南仁)세력이 진출할 수도 있다고 판단하여 그녀를 궁궐 밖으로 내쫒았기 때문이다. 이듬해 1681년에 노론(老論)의 핵심 가문 출신의 인현왕후(仁顯王后. 1667~1701. 민유중(閔維重)의 딸)가 계비(繼妃)로 책봉되었다. 나이는 장희빈보다 8세가 어렸다.
조선시대 왕(王)들 중에서 숙종(肅宗)만큼 자주 드라마에 등장하는 왕은 없을 것이다. 이것은 비단 숙종(肅宗) 임금 자신 때문이 아니라 그가 거느렸던 여인들 때문인데, 이 탓에 숙종은 가끔 여인들의 치마폭에 놀아난 호색한(好色漢)의 이미지를 주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 숙종은 호색한도 아니고, 우유부단한 찌질이도 아니었다. 오히려 영리하고도 비정(非情)한 임금이었다.
숙종의 여인들
당시 조정에서는 남인(南人)과 서인(西人)이라는 두 개의 당파가 존재, 대립하고 있었다. 그러나 숙종은 두 당파를 없애려고 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그대로 방치하지도 않으면서 두 당파를 적절히 이용해서 왕권(王權)을 강화하기로 결심한다. 즉, 왕권과 신권(臣權)의 조화를 꾀하려 한것이다. 그 과정에서 숙종이 이용한 것이 인현왕후(仁顯王后), 희빈장씨(禧嬪 張氏) 그리고 숙빈 최씨(淑嬪 崔氏)의 세 여인(女人)들이었다.
숙종은 14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기 때문에 초기에는 어머니인 명성왕후(明聖王后)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명성왕후는 두뇌회전이 빠르고 정치에 관심도 많은 여인이어서 직,간접적으로 조정 일에 개입하였다. 특히 명성왕후의 아버지 '김우명'이 남인(南人)과의 대립에서 패배하여 조정에서 축출되고 그 후 홧병으로 죽은 일로 인하여 남인(南人)에 대한 증오는 매우 깊었다. 숙종 초에는 그런 명성왕후의 영향으로 조정에서 서인(西人)들의 크게 득세하였다.
같은 맥락에서 명성왕후는 내명부(內命府)에도 서인(西人) 출신 여인들이 들어오기를 원하였기 때문에 갓 숙종의 눈에 든 남인(南人) 출신의 장옥정(張玉貞 .. 훗날 장희빈)은 명성왕후 생전에 내명부에 이름을 올릴 수 없었으며, 숙조의 왕비들은 모두 서인(西人) 가문 출신의 여인들이 간택되었다. 숙종의 첫 부인은 '사씨남정기(사씨남정기)'로 유명한 김만중(金萬重)의 조카딸인 인경왕후(仁敬王后) 김씨이었지만, 그녀는 20살의 젊은 나이에 천연두로 요절하였기 때문에 인경왕후 사후(死後) 계비(繼妃)로 들어간 여인이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이다. 그러나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가 죽으면서 그동안 비대(肥大)해진 서인(西人) 세력을 억누르기 위한 묘책을 마련하는데, 그 묘책의 핵심이 바로 쫒겨났던 장옥정(張玉貞)이었다.
숙종과 장희빈의 만남
남종여비의 유교사상으로 인하여 '조선왕조실록'에는 여인에 대하여 그다지 언급을 하지 않고, 특히 여인(女人)의 외모에 대해서는 더더욱 언급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 자못 아름다웠다 '라는 외모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을 남길 정도의 절세미인(絶世美人)이었으니 그녀가 바로 훗날의 '희빈 장씨'가 되는 장옥정(張玉貞)이다.
장옥정(張玉貞)은 서인(西人)이 장악한 정권을 탈환하기 위하여 남인(南人)들이 숙종에게 바칠 요량으로 준비한 회심의 카드이었다. 남인(南人)들은 왕실의 윗어른인 자의대비(慈懿大妃 ..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에게 줄을 대어 장옥정(張玉貞)을 자의대비전(慈懿大妃殿)에 입궁시켰고, 스무살의 젊은 나이에 홀아비가 된 숙종(肅宗)이 '자의대비전'에 문안인사를 올 때 장옥정(張玉貞)을 발견하도록 만들었다. 예상했던대로 숙종은 절세미인인 장옥정에게 한눈에 반하지만, 호랑이 같은 어머니 명성왕후가 남인(南人) 출신의 장옥정을 내명부(內命府)에 들이지 못하도록 결사반대하였으므로 장옥정은 승은(承恩)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궐밖으로 내쳐진다.
장희빈 .. 영광의 정점에서
장옥정(張玉貞)이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에 의하여 궐밖으로 내쳐지 후 서인(西人) 가문 출신의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가 숙종의 계비(繼妃)로 간택되어 입궐하고, 장옥정은 그대로 궐 밖에서 묻히는가 싶더니 장옥정이 궐 밖으로 쫓져난 후 2년만에 명성왕후가 갑자기 승하하였다.
명성왕후의 갑작스러운 죽음
명성왕후의 죽음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야사(野史)가 전해지고 있다. 숙종(肅宗)이 원인모를 병에 걸려 좀처럼 낫지를 못하고 몹시 앓자 명성왕후는 급한 마음에 무당을 불러 점을 보았는데, 이는 명성왕후에게 든 삼재(三災)때문이므로 그녀가 물벼락을 맞는 물벌을 받아야 숙종이 낫는다는 점괘가 나왔다.
이에 명성왕후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무당의 말대로 삿갓을 쓰고 소복(素服) 차림으로 물벼락을 맞았는데, 하필이면 그때가 엄동설한의 한겨울이었는지라 명성왕후는 살을 에는 차가운 물벌 끝에 병을 얻게 된다. 점괘가 맞았는지 신기하게도 숙종은 그 이후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났지만, 명성왕후는 그때 얻은 병으로 인하여 42세의 나이로 갑자기 승하하였다.
물론 '숙종실록'에 명성왕후가 무당을 궁에 들였다는 소문은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하고 있지만, 역으로 생각해 보면 '실록'에 기록될 정도로 널리 퍼진 소문이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내용은 숙종실록 명성왕후 행장에 기록되어 있다.
장옥정 다시 궁궐로 들어오다
대비(大妃) 명성왕후(明聖王后)에게 대궐 밖으로 쫒겨난 장희빈에게 기회는 1683년(숙종 9)에 대비 명성왕후가 죽으면서 찾아왔다. 거릴낄 것이 없어진 숙종(肅宗)은 당장 장희빈을 불러 총애하였다. 이때 장희빈의 나이 25세이었다. 숙종의 총애는 매우 컸다. 그녀는 숙원(淑媛. 종4품. 1686년)을 거쳐 소의(昭儀. 정2품. 1688년)로 승급하였다. 그동안 오빠 장희재(장희재)와 그의 첩(妾) 숙정(淑正)은 남인(南人)과 연합하라고 장희빈에게 계속 충고하였다. 장희빈은 남인(南人)과 더욱 가까워졌다.
어쨋든 서인(西人) 세력의 비호자이었던 어머니 명성왕후가 죽자, 그동안 명성왕후를 등에 업고 지나치게 비대(肥大)해진 서인(西人) 세력에 불만을 갖고 있던 숙종은 바로 칼을 빼어드는데 그 구실로 이용한 것이 지난날 어머니 명성왕후에게 쫒겨났던 장옥정(張玉貞)이었다. 숙종은 장옥정을 다시 궁궐로 불러들여서 숙권(淑媛)에 봉하고 크게 총애함으로써 서인(西人)을 견제해 나갔다. 이 때 장옥정은 숙종보다 두 살 많은 25살이었다.
숙종(肅宗)이 20살, 장옥정이 22살 되던 해에 처음 만났지만, 곧 명성왕후에 의해 쫒겨났다가 명성왕후 사후 재입궐하였을 때 그녀의 나이는 25살이었다. 그런데 장옥정이 정말 미인(美人)이기는 미인이었던 모양이다. 지금은 여자나이 25살이면 한참 예쁘다고 말하지만, 조선시대에는 그보다 한참 어린 16세 무렵이 가장 예쁜 나이이자 그때가 결혼적령기라고 여기었다. 그러니 그 시대에 여자가 25살이면 서당에 다닐만큼 큰 아이가 딸린 유부녀가 되어있어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장옥정은 그런저물어가는 나이에 궁궐로 다시 돌아와서도 숙종의 총애를 독점하였으니 장옥정의 미색(美色)이 실록(실록)에 기록될만큼 뛰어났다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닐 것이다.
인현왕후와 장희빈 ... 불편한 동거
장옥정이 이렇게 승승장구할 때 과연 인현왕후(仁顯王后)는 조신하고 현숙하게 처신하고만 있었을까 ? 오늘날 인현왕후(仁顯王后)가 ' 현모양처의 대명사 (賢母良妻의 代名詞) '로 남은 것은 '인형왕후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현왕후전은 사관(史官)이 기록한 정사(正史)가 아니며, 인현왕후를 모시던 궁녀가 지어 후세에 남긴 것이다.
인현왕후와 동고동락한 측근이 과연 얼마나 주관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기록을 남길 수 있을까 ? 실제로 '인현왕후전'과 '숙종실록' 간에는 모순되는 기록이 상당수 있다. 이 '인현왕후전'에 의하면, 인현왕후는 보살처럼 후덕하고 인자한 현모양처이지만, 숙종실록 등의 정사(정사) 속의 인현왕후는 결코 후덕한 현모양처만은 아니었다.
인현왕후가 중전에 책봉된지도 몇해가 흐렀지만, 인현왕후는 회임(懷姙)은 커녕 남편 숙종의 사랑을 받지도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숙종의 총애를 받는 '숙권 장씨(淑媛 張氏 ..훗날 장희빈)'는인현왕후의 근심거리이었다. 더구나 '숙원 장씨'는 인현왕후보다 8살이나 더 많았다. 만약 왕후가 나이가 들어서 왕이 어린 후궁을 찾는다면 그나마 이해를 하겠지만, 인현왕후의 경우에는 반대로 왕후가 더 어린데 신혼 초부터 왕이 그 어린 왕후를 독수공방시키고 나이든 후궁만을 찾아가는 상황인지라 인현왕후에게는 견디기 힘든 굴욕이었을 것이다.
또한 단순히 여인으로서의 질투뿐만 아니라, '숙원 장씨'는 인현왕후의 정적(政敵)에 해당하는 남인(南人) 세력을 등에 업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인 계산에 의해서도 견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숙종실록'에 의하면 인현왕후가 '숙원장씨'를 트집 잡아 종아리를 쳤다는 기록은 물론, 인현왕후가 끊임없이 숙원장씨를 비난하는 말을 하여 숙종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심지어 '숙원 장씨'가 전생에 숙종이 쏘아 죽인 짐승이라서 복수를 위해 궁궐로 들어온 요물이며, 숙원 장씨는 결코 아들이 없을 팔자이며 인현왕후 본인은 후손이 많을 팔자이니, 주상께서 숙원 장씨에게 아무리 애쓰셔도 소용없다고 악담을 퍼부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한편 인현왕후가 홀로 애써도 숙원장씨를 견제할 수 없자, 인현왕후는 같은 서인(西人) 출신의 김씨를 간택후궁으로 추천하여 입궐시키는데, 그녀가 훗날의 '영빈 김씨 (瑛嬪 金氏)'이다.
인현왕후는 숙의(淑儀)의 첩지를 받아 입궐한 김씨와 '숙원 장씨'를 견제하고자 하였으나, '숙의 김씨' 조차 숙종의 총애를 전혀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숙원 장씨'를 견제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훗날 원자책봉 과정에서 폐위(廢位)된 이후에도 인현왕후는 서인(西人) 정권의 부활과 자신의 복위(復位)를 위한 정치자금을 모아 대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으니 인현왕후는 눈물과 슬픔을 안으로만 삭히며 남편의 뜻을 받드는 지고지순한 여인만은 아니었다. 어쩌면 이러한 모습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오히려 '인현왕후전' 속의 인현왕후가 지나치게 비인간적인 성녀(聖女)의 경지까지 미화(美化)시킨 것은 아닐까.
드디어 아들을 낳다
한동안은 인현왕후와 숙원 장씨의 북편한 동거(同居)가 이어졌으나, 숙원 장씨는 자손이 없을 팔자라던 인현왕후의 소망과는 달리 그녀는 꾸준히 숙종의 총애를 독차지하여 소의(昭儀)로 진봉되었고 드디어 회임(懷妊)을 하게 되었다.
당시 숙종은 즉위한지 14년이 지나도록 대(대)를 이을 왕자는 커녕 슬하에 자녀가 단 한명도 없는 처지이었다. 물론 예전에 인경왕후(仁敬王后) 소생의 공주 두 명이 있었지만, 두 공주 모두 태어나자마자 요절해버렸고, 인경왕후가 죽은 후 계비(繼妃)로 맞아들인 인현왕후는 왕후 책봉 8년이 지나도록 회임을 하지 못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소의 장씨(昭儀 張氏)가 회임하자 단번에 전세가 역전되었다. 더구나 '소의 장씨'가 숙종이 십여년을 애타게 기다려온 장남 윤(윤)을 생산하자 숙종은 그녀를 후궁에서 가장 높은 정1품 빈(嬪)으로 진봉시켜, 희빈(禧嬪)의 첩지를 내림으로써 드디어 그 유명한 장희빈(張禧嬪)이 탄생하게 되었다.
기사환국 己巳換局
이때까지는 숙종이 남인(南人)들에게 힘을 실어준다고 해도 정계의 주도권은 서인(西人)들이 갖고 있었는데, 남인 출신의 소의 장씨가 왕자를 생산하자 서서히 주도권이 남인(南人)들에게 넘어가기 시작한다. 숙종은 아예 왕자 윤(윤)을 훗날 세자로 책봉될 원자(元子)에 책봉하겠다는 의사를 밝힌다. 이에 서인(西人)들이 원자(元子)는 적장자(嫡長子)를 책봉하는 것이 원칙인데 새로 태어난 왕자는 적장자가 아닌 서장자(庶長子)이며, 인현왕후가 아직 젊으니 적장자를 생산할 수도 있다는 명분을 내세워 남인(南人) 배경의 원자(元子)의 책봉을 결사반대한다.
하지만 숙종이 이들의 주장에 크게 노하여 수많은 서인(西人)들이 떼죽음을 당하게 되니 이 사건이 기사환국(己巳換局)이다. 이 과정에서 인현왕후가 폐위(廢位)되어 서인(庶人)의 신분으로 사가(私家)에 내쳐지는 것이다. 정사(正史)에 기록된 인현왕후의 폐위 사유는 칠거지악(七去之惡)에 해당하는 투기(투기)이었다. 인현왕후는 희빈 장씨가 회임(懷妊)하기 전에도 대립적인 관계였지만, 왕자를 생산한 후에는 더욱 심하게 대립하여 '숙종실록'에 숙종이 인현왕후가 어린 원자(元子)를 해칠까봐 걱정하는 내용의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이었다. 안그래도 서인(西人)을 몰아낼 생각을 갖고 있던 숙종이 서인세력의 상징인데다 투기까지 하여 심기를 거슬리게 하는 인현왕후를 가만두지 않았던 것이다.
갑술환국 갑술환국
드디어 왕후에 책봉되다
인현왕후가 폐위되어 사가(私家)로쫒겨나고 '장희빈'은 정궁 왕후에 책봉되었다. 조선왕조 500년을 통틀어 승은(承恩)을 입은 후궁이 왕후가 된 예는 장희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전에도 후궁으로 입궁하여 중전이 된 경우는 꽤 여러번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양반가의 여식(女息)이었으며, 승은 후궁(承恩後宮)이 아닌 왕실에서 정식으로 간택하여 입궐시킨 간택 후궁이었다. 그러니 대비전(大妃殿) 나인으로 들어와 일약 내명부의 수장인 중전으로 수직상승한 장옥정은 가히 조선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최고의 신데렐라라 할 수 있다.
어쨋든 장희빈이 숙종의 총애를 등에 업고 중전으로 책봉됨에 따라 장희빈의 친정과 장희빈에게 주을 대었던 남인(南人)들은 모두 부(富)와 권력을 움켜쥘 수 있었다. 하지만 화무십일홍(花貿十日紅),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 하고, 달도 차면 기운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늘 높은 줄 모르던 중전 장씨에 대한 숙종의 총애도 곧 식어가는데, 이 과정에서 지나치게 비대해진 남인(南人) 세력에 대한 숙종의 부담감이 크게 일조하였음은 물론이다.
서인(西人)들의 세력이 너무 비대해져서 이를 견제하기 위해 남인(南人) 출신의 장옥정을 중전까지 올렸던 것처럼 남인(南人)들의 세력이 필요 이상으로 비대해지자 숙종은 다시금 서인(西人)들을 조정으로 불러들일 생각을 하게된다. 이러한 숙종의 이해타산에 부합하여 탄생한 새로운 신데렐라가 바로 영조(英祖)의 어머니 '숙빈 최씨(淑嬪 崔氏)'이다.
숙빈 최씨의 등장
숙빈최씨는 궁녀(宮女)보다도 낮은 신분인 '무수리' 출신이었다. 장희빈도 궁녀로 입궐하긴 하였지만, 궁녀는 궁궐에서 왕실에 봉사하는 일종의 전문직인 반면, 무수리는 궁녀들의 뒷치닥거리와 각종 허드렛일을 하는 하녀(下女)로 궁궐의 가장 최하위 계층이었다. 따라서 숙빈(淑嬪)은 희빈(禧嬪)보다도 더 천한 신분이었다. 드라나 '동이'에서는 숙빈 최씨가 장학원노비를 거쳐 감찰궁녀가 되었다는 설정이지만, 역사 속에서는 숙빈 최씨는 7세에 입궁하여 무수리로 지내다가 숙종의 승은(承恩)을 입게 된다.
인현왕후(仁顯王后)가 폐위된 뒤 승은을 입은 '최씨'는 숙원(淑媛)에 봉해졌고, 왕자를 생산하나 첫 왕자는 곧 요절하고 만다. 하지만 곧이어 두번째 왕자인 '연잉군 금(延仍君 金)'을 낳고 숙의(淑儀)로 진봉되었다.
이 당시에 중전이었던 '장옥정'은 자신이 후궁으로 지내다 인현왕후를 밀어내고 중궁의 자리를 차지한 것처럼 다른 후궁이 자신의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기때문에 '숙의 최씨'를 무섭게 견제하였고 이과정에서 '숙이 최씨' 역시 중전 장씨를 미워하는 마음을 갖게 되어 자연히 서인(西人)들과 결탁하게 되었다. 안그래도 숙종이 지나치게 커져가는 남인(南人)세력을 부담스러워하는 상태에서 총애하는 '숙의 최씨'가 끊임없이 서인(西人)을 다시 중용할 것을 권하자 숙종은 결단을 내려서 중전 '장씨'를 희빈(禧嬪)으로 강등시키고 폐비 민씨 즉, 인현왕후를 다시 왕후로 복위시킨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남인들이 숙청을 당하였고 이 이후로 남인(南人) 세력은 두 번다시 부활하지 못한다.
인현왕후의 복위와 장희빈의 강등
인현왕후가 복위된 뒤 '장옥정'는 중전에서 희빈으로 강등되었을 뿐 여전히 궁궐에 남아 있었다. 장옥정이 죄(罪)를 지어 중전에서 쫒겨나고 그 자리를 인현왕후가 다시 차지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인현왕후가 돌아옴에 따라 기존 서열에 따라 장옥정이 밀려나는 것이라서 중전엣 폐위된 것이 아니라 강등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하여튼 인현왕후는 복위된 이후 시름시름 앓다가 35세의 젊은나이에 죽는데, 정1품 숙빈(淑嬪)으로 진봉된 '최씨'는 이것이 장희빈의 저주때문이라고 숙종에게 귀뜸을 한다. '숙종실록'에 의하면 인현앙후가 생전 병석에 있을 때 친정 오빠인 민진후(閔鎭厚)를 비롯한 측근들에게 말하기를 왕후로 복위되었어도 궁궐 내 민심은 여전히 세자(世子)의 생모인 장희빈에게 기울어져 있었으므로 희빈전의 궁녀들이 함부로 중궁을 드나들며 염탐을 해도 말리는 이가 없더니 급기야 몇몇 구녀의 동태가 수상한이후로 병석에 앓아 누웠다고 말하였고, 인현왕후 승하 이후 이를 숙빈이 숙종에게 고함으로써 무고의 옥(巫蠱의 獄) 서막이 올랐다는 것이다.
인현왕후는 다시 복귀된 이후 시름시름 앓다가 서른 다섯의 젊은 나이에 죽었는데, 정1품 숙빈(淑嬪)으로 진봉된 '최씨'는 이것이 장희빈의 저주(咀呪)때문이라고 숙종에게 귀뜸을 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위와 같이 '숙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무고의 옥 巫蠱의 獄
1689년 왕비 인현왕후 민씨(閔氏)가 폐위되고 '장씨'가 왕비가 되었으나, 1694년에 인현왕후 민씨가 왕비로 복위되면서 '장씨'는 다시 희빈(禧嬪)으로 강등되었다. 이때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張希載)가 장희빈에게 보낸 편지가 발각되었는데, 그 속에 '폐비 민씨'를 모해하려는 문구가 있어서 장희재(張希載)를 죽이려 하였으나, 소론(少論)인 남구만(南九萬)이 그가 세자(世子)의 친척임을 이유로 적극 변호하여 장희재는 무사하였다.
당시 정국은 장희빈 소생인 세자(世子)에 대한 지지(支持) 여부를 쟁점으로 노론(老論), 소론(少論)이 대립하였는데, 소론(少論)은 세자(世子)를 지지하였기 때문에 세자에게 미칠 영향을 고려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인현왕후 민씨가 죽은 뒤 장희빈이 취선당(就善堂) 서쪽에 신당(神堂)을 설치하여 인현왕후를 저주하고, 자신이 중궁으로 복위하기를 기도한 사실이 발각됨으로써 무고의 옥(巫蠱의 獄)이 일어났다.
이때에도 소론(少論)은 세자(世子)를 위하여 장희빈을 용서할 것을 청하엿으나, 결국 숙종(肅宗)은 장희빈을 자진(自盡)하도록 하고, 장희재(張希載)와 장씨 일파를 국문하여 죽였으며, 남구만 등 소론(少論) 대신들을 귀양 또는 파면시켰다. 이 사건으로 소론세력은 약화되는 반면, 노론(老論)이 조정에 크게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위와 같이 무고의 옥(巫蠱의 獄)이 일어났으나, 흥미로운 사실은 장희빈이 실제로 인현왕후를 저주(咀呪)한 확실한 증거가 나온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본인의 자백이나 확실한 물증이 아니라 장희빈 측근들의 증언을 토대로 장희빈을 처벌하게 되었는데, 이 증언역시 모진 고문(拷問) 끝에 나온 것이므로 진위(眞僞)를 확신하기는 어렵다.
특히 장희빈 친정 식두들 중 가장 많은 증언을 쏟아낸 이는 장희재(張希載)의 정실(正室)인 '작은아기'이었는데, 이에 장희재는 작은아기가 노론(老論) 김춘택(金春澤)과 사통(私通)하는 관계라서 그를 위해 거짓고변을 하고 있다고 항변하였고, 숙종은 '작은 아기'가 김춘택(金春澤)과 사통(私通)한다는 말은 믿지 않았어도, 작은 아기의 증언은 거짓이라고 여겼다. 여기서 '작은 아기'라는 것은 이름이 아니고 둘째 며느리라는 의미이다. 장희재가 둘째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작은아기는 고문(拷問)이 채 시작하기도 전에 증언을 쏟아내었는데, 이것이 다른 증인들의 말과는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숙종실록'에는 ...작은아기가 숙정(淑貞)에게 죄(罪)를 덮어씌우려고 거짓토설을 하므로 형장(刑杖)을 더 쳐야 할 것이나 훗날 대질(對質)을 위하여 살려두어야 하니 일단 형장(刑杖)을 멈춘다는 기록이 있다. 위에서 언급한 숙정(淑貞)은 장희재의 첩(妾)이고, 즉 작은아기가 질투에 눈이 멀어 거짓을 고했다는 것이다. 결국 작은아기는 거짓말을 늘어놓다 남들보다 더 많은 형장을 맞았고, 결국 장독(杖毒)이 올라 옥중에서 죽었다.
반면 장희빈의 오빠인 장희재(張希載)의 애첩(愛妾) 숙정(淑貞)은 모진 고문을 버티다가 조선시대 최고 고문형(拷問刑)이었던 압슬(壓膝)을 두 차례나 받은 후에, 장희빈이 미심쩍은물건을 요구해서 구해는 주었지만, 취선당(就善堂)에 불길한 일이 있어 액땜을 한다고만 알고 있었고, 다만 점을 보았는데, 중전이 죽고 희빈이 다시 중전이 된다는 결과가 나와서 기뻐하긴 했다고 토설(吐說)한 후 처형당했다.
숙종의 비정한 결단
이렇듯 당시 상황이 장희빈의 무고(巫蠱)를 확신하기에는 애매하였고, 또한 장희빈이 세자(世子)의 생모(생모)라는 점 때문에 장희빈의 정적(政敵)인 서인(西人)들조차도 장희빈을 죽여야 할지 말지 좀처럼 의견통일을 하지 못하였으나 숙종(肅綜)이 부득불 장희빈을 죽여야 한다고 강(强)하게 주장하였기 때문에 장희빈은 죽게 된다.
장희빈의 최후(最後)에 대하여는 숙종의 명으로 자결(自決)하였다는 설도 있고, 사약(賜藥)을 받고 죽었다는 설도 있고, 둘을 합쳐서 자결을 명했으나 장희빈이 자결(自決)을 거부하여 사약을 먹여 죽였다는 설도 있지만, 어쨋든 숙종의 명령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렇게 인현왕후가 죽은 해에 장희빈도 속전속결로 죽는데, 이것은 꼭 장희빈이 인현옹후를 저주하였기때문만은 아니다. 속종(肅宗)의 진정한 속뜻은 세자(世子)의 생모(生母)이기때문에 죽인 것이다. 숙종은 자신이 죽고 장희빈이 낳은 세자가 왕위에 오르면 지난날 자신의 어머니 명성왕후(明聖王后)가 그랬던 것처럼 장희빈도 왕의 생모라는 점을 들먹이며 권력을 휘두를까 걱정하였다. 숙종도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를 가지고 잠재적 위험요소인 장희빈을 죽인 것이다.
실제로 '숙종실록'에 남겨진 숙종의 족적을 보면, 숙종이 작정하고 장희빈을 죽였음을 알 수있는데, 인현왕후가 죽은 후 장희빈에게 인현왕후를 무고(巫蠱)했다는 의혹이 쓰워지자, 미처 사실관계도 파악하기 전에 갑자기 장희빈에게 자진(自盡)하라는 비망기(備忘記)부터 내리려 하였다. 이에 장희빈의 정적(政敵)인 노론(老論) 중신들조차 숙종을 면대하여 이렇게 처사함은 옳지 않다고 간(諫)하였고, 이 가운데 도승지이었던 윤지인(尹知仁)이 그러면 정확히 하기 위하여 추국(推鞫)을 해보는 것이 어떠냐고 고(告)하자, 추국을 뭐하러 하냐며 노발대발하면서 숙종은 윤지인(尹知仁)을 삭탈관직해버린다.
결국 노론, 소론, 남인을 망라한 모든 중신들이 숙종의 처사가 정당하지 못함을 간(諫)하여 추국(推鞫)을 열긴 하는데, 이미 숙종은 장희빈을 죽이기로 마음이 굳어진 상태이었고, 이에 추국에 동원된 장희빈 친정 사람들과 측근 궁녀들에게는 모진 고문(拷問)이 이어졌다. 결국 장희빈의 자백은 없었으나, 고문으로 얻어낸 궁녀들의 증언을 토대로 다시금 장희빈에게 비망기(備忘記)를 내렸고 이에 장희빈의 죽음으로 '무고의 옥(巫蠱의 獄)'은 마무리된다.
인생은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장희빈이 숙종의 사랑을 받을 때에는 세자(세자)를 낳은 덕택에 궁녀에서 일약 중전까지 뛰어올랐으나 , 숙종의 사랑을 잃은 후에는 그녀에게 영화를 가져다 준 세자의 생모(生母)라는 바로 그 이유때문에 죽게 된다.
하지만 빈(嬪)의 직책을 그대로 유지한 채 죽게되는데 그것이 세자(世子)를 생각해서 장희빈에게 베푼 숙종의 마지막 배려이었다. 어찌되었든 장희빈은 여러모로 조선왕조에 단 한명이라는 기록을 세운 여인이다. 미천한 신분으로 일약 정궁 왕후까지 올라가기도 했고, 비록 다시 후궁으로 강등되기는 하였지만 한 번 왕후에 책봉되었던 적이 있는 특수한 사례이었던지라 그녀가 죽은 후 옥산부 '대빈(大嬪)'의 존호를 받게 되는데 이는 후궁의 초고품계인 정1품 빈(嬪)보다 높되, 왕비보다는 낮은 특수한 지위이었다.
'대빈(大嬪)'의 칭호를 받은 것은 조선 역사상 장희빈이 유일하다. 또한 중전의 지위에 머물렀던 적이 있는 그녀의 사당에는 후궁의 사당 중에서 유일하게 원형(圓形) 기둥이 사용되어 있다. 조선왕실의 예법상 원형 기둥은 오직 왕이나 왕비의 사당에만 사용할 수 있었다.
대빈궁 大嬪宮
육궁(六宮)은 숙종의 후궁이 되어 영조(英祖)를 생산한 '숙빈 최씨(淑嬪 崔氏)'를 모신 묘궁(廟宮)이 있었기 때문에 '숙빈묘(淑嬪廟)'라고 하였다가, 1744년 '육상묘(毓祥廟)'로 이름을 바꾸었고, 영조 29년인 1753년에 다시 '육상궁(毓祥宮)'이라 하였으며 1882년 소실(燒失)되었다가 이듬해 6월에 중건(重建)되었다.
육궁(六宮)은 조선 국왕을 생산한 사친(私親) 6명의 신주를 봉안한 묘궁(廟宮)이며, 정문을 들어서면 남북으로 축(軸)을 이룬 두 채의 재실이 있고, 그 뒤로 육상궁(毓祥宮), 연호궁(延祜宮), 덕안궁(德安宮), 경우궁(景祐宮), 선희궁(宣禧宮), 대빈궁(大嬪宮), 저경궁(儲慶宮)이 있다.
1908년 한성에 흩어져 있던 여섯 사친묘(私親廟)를 합사(合祀)함으로써 육궁(六宮)이 되었다. 영조(英祖)의 후궁이자 진종의 생모인 '정빈 이씨(靖嬪 李氏)'의 연호궁(延祜宮), 선조(宣祖)의 후궁이자 원종의 생모인 '인빈 김씨(仁嬪 金氏)'의 저경궁(儲慶宮), 숙종(肅宗)의 후궁이자 경종의 생모인 '희빈 장씨(禧嬪 張氏)'의 대빈궁(大嬪宮), 영조의 후궁이자 장조의 생모인 '영빈 이씨(暎嬪 李氏)의 선희궁(宣禧宮), 정조(正祖)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綬嬪 朴氏)'의 경우궁(景佑宮)이 합사(合祀)되었다. 1929년 일제 총독부가 고조 광무제의 후궁 엄씨의 사당 덕안궁(德安宮)을 육궁(六宮)으로 옮겼으나, 후궁 엄씨는 조선국왕을 생산한 사친(私親)이 아니다. 이에 따라 지금은 육궁이 아니라 칠궁(七宮)으로 부르고 있다.
실제의 숙종(肅宗)이' 사씨남정기"의 유한림과 너무나 딴판이었다는 점은, 숙종을 가까이에서 접한 사람들이 숙종 사후(死後)에 숙종(肅宗)이란 묘호(廟號)를 올린 것에서 잘 드러난다. 표면상으로도 '엄숙함'의 느낌을 풍기는 '숙(肅)'자 속에는 훨씬 더 엄숙한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景宗) 즉위년(1720) 6월 15일자 '경종실록'에 따르면, 숙종이 죽은 지 7일 뒤에 2품 이상의 대신들이 모여 '숙(肅)'이라는 묘호를 올린 것은 그가 강덕극취(剛德克就)한 군주(君主)이었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강덕극취(剛德克就)란 ' 강직하고 덕스럽고 이겨내며 나아간다 '는 의미이다. 숙종을 가까이에서 접한대신들이 모여 숙종의 캐릭터를 이같이 정리한 것은, 그들에게는 숙종이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저돌적인 인물로 비쳤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나타나는 숙종의 이미지 중 하나는 남의 손에 놀아날 인물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숙종의 여인과 정치
인현왕후도 죽고 장희빈도 죽고 살아남은 '숙빈 최씨.. 영조의 생모'가 최후의 승자가 되는 듯 하였다. 그러나 숙빈 최씨 역시 숙종(肅宗)에 의하여 제거된다. 장희빈을 사사(賜寺)하면서 숙종은 다시는 후궁(后宮)이 중전에 오르지 못하도록 하는 어명을 내렸으므로 '숙빈 최씨'는 장희빈이 그랬던 것처럼 중전이 되는 영광을 누리지 못하였으며, 더 나아가 장희빈이 사사(賜死) 당한 후 곧바로 숙빈(淑嬪) 최씨를 아예 왕궁 밖으로 출궁(出宮)시켜버린다.
인현왕후 생전의 내명부(內命府)에는 인현왕후, 숙빈 최씨 대 장희빈의 대립구도를 형성하였었는데, 인현와후의 죽음을 기점으로 인현왕후와 장희빈이 한꺼번에 사라지고 '숙빈 최씨'만 남자 숙종은 숙빈 최씨가 내명부를 장악하고 서인(西人) 정권을 비호할 새로운 막후 실력자가 될 것을 염려하여 숙종이 죽기도 전에 미리 그녀를 왕궁 밖으로 내보내서 권력으로부터 격리시킨 것이다. 어찌보년 숙빈최씨도 토사구팽(兎死狗烹)을 당한 것이다.
남인(南人)세력을 상징하는 장희빈을 죽이기 위하여 '숙빈 최씨'를 이용하고, 그 활용도가 다하자 숙빈 최씨가 세력을 얻어 새로운 골치거리가 되버리기 전에 깔끔하게 제거해 버렸던 것이다. 그 후 숙종은 숙빈 최씨가 아닌 양갓집 규수를 간택하여 제2계비(繼妃)인 인원앙후를 맞아들였으며, 숙빈 최씨를 출궁시킨 뒤 명빈 박씨 등의 다른 후궁들을 진봉시켜 내명부(內命府)를 물갈이 한다.숙빈 최씨는 왕궁을 나와 이현궁(梨峴宮)이라는 잠저(潛邸)에서 10여년을 지냈는데, 나중에는 이 이현궁(梨峴宮)이 일개 후궁이 독단으로 머물기에는 너무 과하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이현궁을 회수 당하고, 아들 연잉군(延仍君)이 머무르던 창의궁(彰義宮)에 가서 함께 살다 숙종보다 2년 먼저 죽는다.
숙종에게 붙여진 '숙(肅)'자가 단순한 미사여구가 아니라는 점은, 궁정의 여인천하(女人天下)와 조정의 붕당정치(朋黨政治)를 함께 연동시켜 적절히 활용한 그의 노련한 솜씨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숙종이 인현왕후를 중전으로 책봉했다가, 인현왕후를 폐하고 장희빈을 중전으로 세운 뒤에 다시 장희빈을 폐하고 인현왕후를 복위시키는 과정은, 숙종이 서인(西人)과 남인(南人)을 다루는 과정과 놀랍게도 일치한다.
숙종이 중전을 세우거나 폐(廢)하는 과정은 집권당을 바꾸는 과정과 거의 정확히 일치하였다. 그는 집권당과 중전이 같은 당파(黨派)가 되도록 조율하였던 것이다. 전근대 정치의 두 축(軸)인 궁정과 조정에서 동시에 정건교체(政權交替)가 일어나도록 했던 것이다. 이는 그가 중전을 바꾼 것은 눈이 멀어서가 아니라 정치적 필요에서 그렇게 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주목해야 할 점은, 숙종이 패배한 쪽을 완전히 죽이지 않고 어느 정도 살려놓은 뒤에, 승리한 쪽이 너무 강해진다 싶으면 또 다시 집권당과 중전을 신속히 교체하는 정치패턴을 선보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는 영니들이든 붕당(朋黨)들이든 간에 상호 신뢰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어느 쪽이든지 자신에게 의존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주변 사람들을 분열시켜 놓은 상태에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대 일가견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사씨남정기 謝氏南征記
숙종(肅宗) 년간에 서포 김만중(西浦 金萬重)이 한글로 지은 고대소설이다. 남정기(南征記)라고도 한다. 확실한 창작연대는 미상이나, 숙종이 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를 폐위시키고 장희빈을 왕비로 맞아들이는 데 반대하다가 마침내 남해도(南海島)로 유배, 배소(配所)에서 흐려진 숙종의 마음을 참회시키고자 이 작품을 썼다고 하므로, 1689년(숙종 15)에서 작자가 세상을 뜬 1692년 사이에 썼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작자 서포 김만중은 우리나라 문학이 마땅히 '한글'로 쓰여져야 한다고 주장, 한문소설(漢文小說)을 배격하고 이 작품은 창작하였는데, 이는 김시습(金時習)의 '금오신화(金鰲新話)' 이후 잠잠하던 소설문학에 허균(許筠)의 뒤를 이어 획기적인 전기를 가져오게 하였다. 즉, 소설(小說)을 천시(賤視)하던 당시에 참된 소설의 가치를 인식하고 이 소설을 창작함으로써 이후 고대소설(古代小說)의 황금시대를 가져왔다. 소설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붕국 명(明)나라 때 유현(劉炫)의 아들 연수(延壽)는 15세에 장원급제하여 한림학사가 되었다. 유한림(劉翰林)은 그후 숙덕(淑德)과 재학(才學)을 겸비한 사씨(謝氏)와 혼인하였으나, 9년이 지나도록 소생이 없자 교씨(喬氏)를 후실(後室)로 맞아들인다. 그러나 간악하고 시기심이 많은 '교씨'는 간계(奸計)로써 '사씨부인'을 모함하여 그녀를 폐출시키고 자신이 정실(正室)이 되었다. 그후 '교씨'는 간부(姦夫)와 밀통하며 남편인 '유한림'을 조정에 모함하여 귀양보내게 한 다음 재산을 가지고 간부(姦夫)와 도망치다가 도둑을 만나 재물을 모두 빼앗기고 궁지에 빠진다. 한편 '유한림'은 혐의가 풀려 배소(配所)에서 풀려나와 방황하는 '사씨(謝氏)'를 찾아 다시 맞아들이고 '교씨(喬氏)'와 간부(姦夫)를 잡아 처형한다.
작중 인물 중의 '사씨부인(謝氏婦人)'은 인현왕후를, '유한림(劉翰林)'은 숙종(肅宗)을, 요첩(妖妾) '교씨(喬氏)'는 장희빈을 각각 대비시킨 것으로, 궁녀가 이 작품을 숙종에게 읽도록 하여 회오시키고 인현왕후를 복위(復位)하게 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필사본 외에 후손인 김춘택(金春澤)이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 있다.
장희빈 아버지 장형
인동 장씨 20대 장응인(장應仁)은 선조 16년 의주(義州)에서 역한훈도로 있었다. 장응인의 아들 장형(張炯)도 취재를 거쳐 사역원(司譯院) 봉사를 지냈는데, 장영(장형)의 장인(丈人) 윤성립(尹成立)은 '밀영 변씨' 역관 집안의 사위이다. 장형(張炯)의 맏아들 '희식'은 효종 8년에 역과(역과)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한학직장이 되었으며, 작은 아들 장희재(張希載)는 총융청(摠戎廳)의 으뜸벼슬인 총융사(摠戎使)까지 올랐다. 장형의 딸이 바로 장희빈이다. 장희빈이 처음 종4품 후궁인 숙원(淑媛)에 봉해지던 숙종 12년 사관(史官)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장씨를 책봉하여 숙원(淑媛)으로 삼았다. 전에 역관 장현(張炫)은 온 나라의 큰 부자로 목창군 이정과 목선군 이남의 심복이 되었다가 경신년 옥사(獄事)에 형(刑)을 받고 멀리 유배되었는데, 장씨는 바로 장현의 종질녀이다. 나인(內人)으로 뽑혀 궁주에 들어왔는데, 얼굴이 아주 예뻤다. 경신년에 인경왕후가 승하한 후 비로소 은총을 받았다.
왕실과 가까이 했던 장현(張炫)은 경신환국(庚辛換局)으로 한 때 밀려났지만, 바로 그 해에 5촌 조카딸 장옥정(張玉貞)이 숙종의 눈에 들면서 기사회생하였다. 장현(張炫)이 딸을 궁녀로 들였던 것처럼, 장형(張炯)도 딸을 궁녀로 들였다. 숙종 14년 장씨가 아들을 낳자 숙종은 노론(老論)의 반대를 무릎쓰고 원자(元子)로 정하여 종묘사직에 고했으며, '소의 장씨'를 희빈(희빈)에 봉하였다.
장희빈의 아버지 장형(장형)은 영의정, 증조부 장수는 좌의정, 할아버지 장응인은 우의정에 추증하여, 역관(譯官) 집안이 정국의 핵심에 들게 되었다. 목내선은 ' 역관 장현(張炫)이 청나라 내각의 기밀문서를 얻어 온 공로를 표창해주십사'고 아뢰었다. 이미 품계(品階)가 숭록대부까 지 올라 더 이상 오를 수 없지만 ' 600금이나 비용을 쓴 점을 감안하여 그 자손에게라도 수여하자 '고 하자, 숙종이 ' 그 자손에게라도 한급으로 올려라 '라고 명하였다. 장희빈이 왕비로 책봉되자, 오빠 장희재(장희재)도 포도대장을 거쳐 총융사(摠戎使)에 올랐다. 그는 국사를 빙자하여 역관의 무역 방법을 활용했는데, '숙종실록' 18년 기록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왕이 주강에 나오자, 무신 장희재가 아뢰었다. ' 신이 주관하고 있는 총융청(摠戎廳)은 군수가 피폐하므로, 병조판서 민종도와 상의하였습니다. 병조의 은(銀) 1만냥을 꿔다가 장차 교련관에게 주고 사신이 북영에 갈 적에 같이 가서 잘 처리하여 그 이득을 가지고 동(銅)을 무역해다가 주전(鑄錢)하는 재료로 삼기로 했습니다 '. 그러자 임금이 옳게 여겼다. 이 때 민종도와 장희재가 서로 안팎이 되어 마구 뇌물을 주기를 자기들 하고 싶은 대로 하였다.
숙종이 기사환국(己巳換局)을 통하여 당쟁(黨爭)으로 약화된 왕권을 회복하려 하자, 남인(南人)들은 그 기회를 이용해 집권하고 서인(西人)들에게 복수하려고 하였다. 장희재(張希載)는 국고(國庫)를 이용하여 역관(譯官)의 무역방식으로 재산을 불렸는데, 후대의 사관은 군수를 빙자한 무역의 이익이 결국은 두 사람의 뇌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판단했다. 수출과 수입을 통해서 몇 배를 벌어들인 뒤에 그 구리로 동전(銅殿)까지 찍어 풀었으니 얼마나 남는 장시었는지 계산하기가 힘들 정도이다. 한양의 돈줄을 역관(譯館) 집안에서 쥐었다는 사실은 '허생전'뿐만 아니라 이러한 기록에서도 확인될 수있는 것이다.
장희빈 오빠, 장희재
장희재(張希載 .. ?~1701).. 장희빈의 오빠이다. 누이 장희빈이 어머니의 정부(情夫) 조사석(趙師錫)과 동평군(東平君)의 주선으로 궁녀로 들어가 숙종의 총애를 독차지하게 되자, 그 덕택으로 금군별장(禁軍別將)이되었으며, 1692년에는 총융사(摠戎使)로 승진하였다.
경찰권과 군권을 장악
장희재는 누이동생의 후광으로 경찰청장인 포도대장, 경기지역 군사령관인 총융사(摠戎使), 서울특별시 부시장인 한성부 우윤(右尹) 등 종2품 차관급 등의 관직을 독차지하였다. 명목상은 차관급이었지만, 경찰권(警察權)과 군권(軍權)을 장악했다는 점에서 장희재의 실제 위상은 그보다 훨씬 높았다.
장희재. 숙종의 측근을건드리다
경찰권과 군권을 장악한 장희재가 1693년(숙종 19)에 포도대장 신분으로 전격 체포되었다가 곧 석방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포도대장 장희재는 왜 전격적으로 체포되었다가 왜 곧 석방되었을까? 숙종 19년(1693) 3월24일 "승정원일기"에서 그 이유를 확인할 수 있다.국왕 비서실인 승정원의 근무일지인 "승정원일기(승정원일기)"에 따르면, 그 전날인 3월23일 오후에 포도청 군관 이지훈이 군관 3명과 군사 4명을 이끌고 승정원 당하관(堂下官)들이 모인 장소를 불법 사찰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들은 병조(兵曺 ..국방부)의 하급직원인 결속리(結束吏)의 안내를 받아 그 곳에 잡입한 뒤에 창호지문을 찢고 방안을 몰래 엿보는 등의 행위를 했다고 한다. 국왕의 비서들인 승지들은 모두 당상관 즉 정삼품 상(上) 이상이었다. 따라서 정3품 하(下) 이하인 승정원 당하관들은 승지 아래의 직원들로서 오늘날로 치면 청와대 비서관 밑의 행정관에 해당하는 사람들이었다.
승지건 아니건 간에 국왕의 측근들을 불법 사찰하였으니, 이것은 당연히 문제가 될 수 밖에 없었다. 포도청 관리들은 '예문관(禮文館 ...공문서 작성 기관)의 청지기를 몰래 체포하기 위하여 그런일을 했다'고 말했지만, 그것이 불법사찰의 진짜 의도이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중요한 것은 포도청 하급관리들이 국왕의 측근을 불법사찰했다는사실이었다. 포도대장 장희재가 이미 적정선을 넘어버린 것이었다. 누이동생의 권세를 맏은 장희재가 권력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임금의 영역까지 건드리고 만 것이다. 당시 누구보다도 권력유지에 민감한 숙종(숙종)을 정면으로 자극할만한 사건이었다.
숙종의 수사, 체포지시
그런데 승정원은 이 사건을 숙종에게 곧바로 보고하지 않았다. 사건 발생 당일날 보고하지 않고 다음 날 보고한 것이다. 그 사유는 사료에 정확히 나와있지는 않지만, 이 사건이 포도대장 장희재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잘못 보고했다가는 숙종이나, 장희빈 혹은 장희재로부터 반격을 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무작정 덮어둘 수도 없는 일, 그러다간 더 큰 벌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승정원은 다음날 숙종에게 보고하면서 승부수를 던진다, 장희재에 대한 수사를 건의한 것이다.
이것은 전에 없던 변고입니다. 포도대장을 심문하시고 군관과 결속리(結束吏)는 담당 관청에서 구금하고 형벌을 부과하도록 해주실 것을 청합니다.
수사를 건의하면서 승정원 승지들은 무척 긴장하였다. 그런데 숙종은 뜻밖에도 매우 신속하였고, 또한 장희재에 대한 수사를 재가한 것이다. 승정원의 건의가 쉽게 수용되는 모습을 지켜본 사간원(司諫院)에서는 며칠 뒤인 4월1일에 한층 더 강력한 어조로 숙종에게 건의하였다. " 포도대장을 잡아다가 심문하고 처단하라고 명령해 주십시요" 이번에도 숙종은 신속하게 건의를 수용한다. 이로 인해 장희재는 포도대장으로 체포되는 수모를 당하고 말았다.
장희빈 몰락의 출발
이 사건은 결국 장희재가 하루 만에 석방되고 포도대장에서 해임되는 동시에 여타 관련자들만 중형을 받는 선에서 마무리되었지맘, 이 속에는 장희빈,장희재를 포함하여 남인(南人)세력 전체에게 보내는 숙종의 경고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동시에 이 일은 장희빈에 대한 숙종의 애정이 예전과 같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희빈과 남인세력은 숙종의 이러한 경고 메시지를 충분히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듬해인 숙종 20년(1694)에 집권여당인 남인세력은 서인세력이 주도하는 페비복위운동을 과잉 제압하고 이를 빌미로 서인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하려 시도했다. 하지만 이것은 숙종에게는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비칠만한 일이었다. 서인(西人)세력이 초토화되면 권력의 균형이 깨져 국왕인 자신이 남인(南人)세력에 눌리는 형국이 조성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숙종은 남인세력에게 정치적 타격을 가하고 장희빈을 후궁(後宮)으로 강등(降等)한다. 몰락의 시작인 것이다.
장희빈(張禧嬪)이 한창 위세를 부릴 당시 장안에는 해괴한 타령조 노래가 입소문을 타고 퍼져 나갔다. 은유(隱喩)와 파자(破字)를 사용하여 왕실의 내명부(內命府) 실상을 비꼬는 참요(讖謠)로 저잣거리 장사꾼 조차 그 속내를 훤히 알고 있었다.
미나리는 사철이고 장다리는 한철이라
요사부려 오른 자리 십 년 갈까 백 년 갈까
살아생전 누린 호강 죽어서도 가져가나
이 참요(讖謠)에는 어질고 현숙하였던 인현왕후(仁顯王后) 여흥 민씨(여흥 민씨 .. 숙종 제1계비)를 미나리에, 모질고 영악하였던 장희빈을 장다리(무, 배추의 꽃줄기)에 각각 비유하고 있다. 장희빈은 죽어서 경기도 광주시 오포면 문형리에 장사지냇다. 죽은 지 268년이 지난 1969년 도로공사로 묫자리가 수용되면서 서오릉(西五陵) 안 명릉 서록에 이장되었다.
장희빈에 대한 역사의 기록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