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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마을 ... 충효당

작성자이계묵|작성시간13.02.12|조회수667 목록 댓글 0

 

 

 

 

 

 

                                         충효당                      忠孝堂

 

 

 

 

 

 

 

 

 

 

 

 

충효당(忠孝堂)의 현판은 미수 허목(眉수 許穆)의 글씨이다. '미수 허목'은 조선 중기의 학자 겸 문신이며, 사상적으로 퇴계 이황과 정구(鄭逑)의 학통을 이어받아 '성호 이익'에게 연결시킴으로써, 기호 남인의 선구자이며 남인(南人) 실학파의 기반이 되었던 인물이다. 전서(篆書)에 독보적 경지를 이루었다. '충(忠)' 자는 흙(土)에서 올라온 나무가 해를 받들 듯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형상이라고 한다.

 

 

 

 

 

 

 

 

 

충효당(忠孝堂)은 1600년대에 지어졌다. 서애 류성룡의 손자, 졸재 (拙齋) 류원지(柳元之)가 류성룡의 학덕과 업적을 숭모하기 위하여 유림들과 제자들로부터 성력(誠力)을 모아 먼저 내당을 이룩하였고, 류성룡의 증손자인 눌재(訥齋) 류의하(柳宜河)가 외당을 완성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증축한 부분은 'ㅁ'자 형에서 돌출된 사랑방 우측 1칸과 사랑 대청을 비롯한 5칸이다. 행랑채는 류성룡의 8세손 류상조(柳相祚)가 지은 것이다.

 

 

이 충효당은 서애 류성룡의 형, 겸암(謙巖)이 입암고택(立巖古宅)을 물려받아 양진당(養眞堂)으로 계승하자, 동생인 서애 류성룡이 그 집 앞쪽의 서향(西向)한 터전에 따로 지어 분가한 살림집으로 생전에는 재력이 넉넉하지 못하여 초가삼간(草家三間)이었으나, 서애(西涯)의 문하인 후인(後人)들이 서애 류성룡의 사후에 그 유덕(遺德)을 기리는 의미에서 돈을 모아 손자인  ' 졸재 류원지(拙齋 柳元之) ' 를 도와 이 집을 지었고. 증손자인 병조판서 ' 눌재 류의하(訥齋 柳宜河) '가 다시 확장 중수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서애 류성룡의 종택(宗宅)이다.

 

 

 

 

 

 

 

 

 

 

 

 

당호(堂號)를 '충효당'이라고 한 이유는, 류성룡이 평소에 자손들에게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라는 말을 자주 하였기에 이를 받들어 이름 지은 것이다. 류성룡은 임종할 무렵 詩 한 수를 지었는데, 평생동안 부끄러운 일 많은 것이 한스럽다고 자신을 낮추며 자손들에게는 충과 효를 강조하였다. 류성룡이 지은 詩는 다음과 같다.  

 

 

 

 

                                  임간일조체불식             林間一鳥涕不息

                                  문외정정문벌목             門外丁丁聞伐木

                                  일기취산역우연             一氣聚散亦偶然

                                  지한평생다괴작             只恨平生多愧炸

                                  면이자손수신정             勉爾子孫須愼珽

                                  충효지외무사업             忠孝之外無事業 

 

 

 

                                 숲 속의 새 한 마리는 쉬지 않고 우는데

                                 문 밖에는 나무 베는 소리가 정정하게 들리누나

                                 한 기운이 모였다 흩어지는 것도 우연이기에

                                 평생 동안 부끄러운 일 많은 것이 한스러울 뿐

                                 권하노니, 자손들아 꼭 삼가하라

                                 충효 이외의 다른 사업은 없는 것이다.

 

 

 

 

 

 

 

 

 

 

 

 

 

                                                    보물 제 414호

 

 

 

 

 

충효당은 보물 제41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비교적 원래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다. 솟을대문이 선 줄행랑채는 광과 방으로 구성되어 있고, 솟을대문을 들서서서 마주 보이는 사랑채는'일'자형 평면으로 왼쪽에서부터 사랑방과 대청, 방과 마루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안채는 'ㅁ'자형으로 동북쪽에 부엌을 두고 'ㄱ'자로 꺾여서 안방, 대청,건넌방을 두었다.

 

 

건넌방 앞에는 마루와 두 칸의 온돌방과 부엌이 있으며 사랑채와 연결되어 있다. 또 부엌 앞에는 찬방, 고방, 헛간이 있고, 중문간 행랑채와 연속되어 있다. 사당은 사랑채 동쪽의 따로 쌓은 담장 속에 세워져 있다. 이 '충효당'의 구조는 보수할 때의 개작으로 보이는 견치석 쌓기에 장대석으로 마무리 한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으며, 기둥 위에는 주두없이 납도리를 받치고 기둥 사이의 창방위에 소로를 두어 납도리의 장여를 받치고 있는 민도리소로수장집이다.

 

 

   

 

 

 

 

 

 

 

 

                                           영모각                     永慕閣

 

 

 

 

 

 

 

 

 

 

충효당 사랑채를 오른편으로 돌아 가면 서애 류성룡의 유물을 보존하고 있는 영모각(永慕閣)이 보인다. 이 영모각은 1965년 박정희대통령이 유물들을 일반인에게 공개하도록 정부에서 보조금을 지원하도록 하여 1966년 개관하였다. 

 

 

영모각의 현판도 박정희대통령의 글씨이다. 그러나 양옥식으로 건축되어 마을 경관에 어울리지 않을 뿐 아니라 협소하기도 하여 1977년 다시 한옥식 현재의 건물로 준공하였다. 여기에 보관된 유물들은 본래 영모각 맞은편 사당(祠堂) 안의 궤(机) 안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그 자물쇠가 특이하여 열쇄 3개가 동시에 꼽혀야 열 수 있게 제작되어서, 종손이 1개, 유사 2명이 각 1개씩 소유하여 세 사람이 합의하여야 열 수 있었으니 그토록 엄중한 보관제도때문에 오늘날까지 귀중한 보물로 남아 있게 되었다. 그 궤(机)와 자물쇠도 영모각 안에 보관되어 있다. 

 

 

영모각에는 국보 제132호인 빙비록을 비롯하여 보물 제160호 군문등록(軍門騰錄) 외 25종류, 보물 제460호인 서애선생필첩(西厓先生筆帖) 외 34종류, 그 이외에 중요 유물 20종류와 교지(敎旨) 문헌 등 다수 보관 전시되고 있다.     

 

 

 

 

 

 

 

 

 

 

 

                                 류성룡 유품                        柳成龍 遺品

 

 

 

 

 

 

류성룡 종손가 유물(宗孫家 遺物)은 보물 제460호로 지정되어 있다. 유물은 세 분류로 구별되는데, 첫째는 임진왜란 당시 국난을 극복하는 데 크게 기여한 류성룡이 직접 사용하던 유물, 둘째는 모부인(母夫人 .. 유성룡의 어머니)의 분재기(分財記), 셋째는 류성룡에게 조정이 내린 문서(文書) 등이다. 부속문화재는 보물 제460-1호인 서애유물(西厓遺物), 보물 제460-2호인 서애선생모부인곤문기(西厓先生母夫人昆文記), 보물 제460-3호인 고문서(古文書)들이다.

 

   

 

 

 

 

                                               갑주                  甲胄

 

 

 

 

 

갑주(甲胄)란 몸에 부착하는 방호용 무구를 말한다. 머리 부분을 가리고 덮는 주(胄 ..투구)와 주로 몸을 가리는 갑(甲 .. 갑옷)으로 이루어진다. 갑주의 기원은 불명확하나, 전투나 수렵 시에 가죽 따위로 몸을 가려 보호하는기능으로 매우 오래 전부터 사용되었으며, 점차 단순한 방어수단 이상의 권위표상적 성격이 짙어졌다.

 

 

 

 

 

 

 

 

투구는 철제로서 높이 24cm, 둘레 63.5cm, 지름 20.5cm의 크기이며, 형태는 네 조각의 처편을 붙인 것으로, 위로는 좁고 아래로 퍼진 모양을 하고 있다. 정개(頂蓋)에 보주(寶珠) 장식을 하고, 그 밑에 삭모를 달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앞쪽에는 반월형의 해가리개가 남아 있으나 뒤쪽의 목가리개는 흔적이 없다.  

 

 

 

 

 

 

 

 

임진왜란 중에 서애 류성룡이 전쟁터에서 착용하였던 것으로 현재 유일한 갑옷이며, 목 부분은 철편을 가죽끈으로 엮었고, 몸통 부분은 가죽편을 가죽끈으로 엮어 만든 것이다. 이 갑옷은 가죽조각을 연결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많은 손상을 입어 현재는 부분별로 남아 있을 뿐이다. 이 조각들은 부분에 따라 차이가 있어 세 종류 크기의 부분 조각들이 남아 있다.   

 

 

 

 

 

 

                    류성룡 모부인 분깃문기                      柳成龍 母夫人 分衿文記

 

 

 

 

 

 

 

 

 

 

이 유물은 류성룡 어머니의 곤문기(昆文記)로, 크기는 가로 362cm, 세로 67.2cm이다. 한지에 행서체로 쓰였는데, 여로 곳이 벌레로 인하여 훼손되었다. 이 문서는 류성룡 어머니의 분재기(分財企)로 매우 희귀한 것인데, 분재기(分財記)란 재산과 노비(奴婢)를 자식에게 나누어주면서 이를 기록한 문서이다. 유교문화권인 조선시대에는 여자는 모든 면에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남자에게 예속되었다. 그런데 엄청난 예외도 있었다. 부인을 두고 남편이 먼저 죽으면 재산의 상속권이 일단 그 부인에게 주어졌다가, 부인이 상속권을 행사하였다는 사실이다. 

 

 

 

 

 

 

 

 

 

 

위 분재기(分財記)는 서애 류성룡이 32세 때에 선친 감사공이 별세하여 유산이 미망인 김씨에게 상속되었다가 그 후 20년 후에 시댁과 친정의 제위토(祭位土)와 접빈용토지(接賓用土地)를 먼저 분재하고 나머지 유산을 자녀들에게 공평하게 분배한다는 뜻을 쓴 기록이다.  가로 362cm, 세로 67.2cm의 한지 두루마기에 행서로 쓰여있다. 부분적으로 좀이 먹은 흔적이 있다.   

 

 

 

 

                    동국지도서애선생수택본                    東國地圖西厓先生手澤本

 

  

 

 

 

 

 

 

아래 좌단(左端)에 모두 손상이 있다. 현재 삼수(三水), 갑산(甲山), 단천(端川), 길주(吉州), 명천(明川), 경성(鏡城), 부령(富寧), 종성(鐘城), 은성(隱城), 경원(慶源)의 각 면(면)과 아오지(阿吾知)의 편면(片面)만이 남아 있어 완본(完本)은 아닌 것 같다. 각 면 한지에 담채(淡彩)로 그려져 있다. 류성룡이 휴대하고 다니던 지도이다.

 

 

 

 

                                    영의정 교지                       領議政 敎旨

 

 

 

 

 

 

 

선조(宣祖)는 1952년 5월2일, 파천(播遷)길에 개성에서 서애 류성룡을 영의정으로 임명하였는데, 그 때의 임명장이다. 그런데 영의정으로서 경연홍문관(經筵弘文官), 예문관(藝文館), 춘추관(春秋館), 관상감사(觀象減事), 세자사(世子師) 까지 겸직하였다. 보물 제160호로 지정되어 있다.

 

 

 

 

 

                                           유서통                     諭書筒

 

 

 

 

 

 

 

 

 

충효당 영모각(永慕閣)에는 유서통(諭書筒)이라고 설명문을 붙인 대나무로 만든 이상한 통(筒)을 볼 수 있다. 이 '유서통'은 임금님이 고관에게 중대한 사명을 내릴 때의 지령서를 유서(諭書)라고 하는데, 이 대나무통은 '유서(諭書)'를 담아 사용하던 것이다.

 

 

이 유서통은 중대한 문서를 보관하는 통이기에 엄중한 보호가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별도의 호위도 없이 평소에는 양반들 앞에서는 고개도 못들고 살던 낮은  신분의 전령(傳令 ..하인배)이 이 유서통을 메고 가게 됨으로써 보안을 위해, 국법으로 이 유서통을 메고 가는 자에게 길을 가로막거나, 시비를 벌이거나 방해를 하면 삼족(三族)을 멸한다는 법을 적용하였다고 한다. 

 

 

그러하였으니 이 유서통을 메고 가는 자의 행패가 어떠 했겠는가 ? 천한 신분으로 평소에 맺힌 권력에 대한 한풀이로 아무리 거들먹거려도 그 누가 감히 대항하며 시비를 따질 수 있겠는가. 주막이나, 관아에서나, 양반에게도 무소불위로 행패를 부렸기에 분수없이 행패를 부리는 자에게 ' 유세통 졌나? 유세 부린다 '는 말이 유래되었다.  

 

 

 

 

 

 

 

  

 

 

 

 

                                              갓끈                    笠線

 

 

  

 

 

 

 

 

 

 

갓끈은 갓을 매는 데 사용하는 끈으로, 대부분은 헝겁으로 만들어 사용하였으나, 호박 또는 수정(수정) 등을 이용하여 장식적으로 만든 것도 있다. 특히 주영(珠瓔 .. 구슬로 꿴 갓끈)은 갓끈 중에서 가장 멋을 낸 것으로 대개 가슴 밑으로 길게 늘어뜨려 장식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사치스러운갓끈의 사용을 금지하는 법 조항을 만든 적도 있고, 신분에 따라 사용하는 재질에 따라 차별을 두기도  하였다.   

 

 

  

 

                                               혁화                   革靴

 

 

 

 

 

 

 

 

 

 

흑혜(黑鞋)는 가죽으로 만든 운두가 낮은 신으로 조선시대 상류층이 신었던 신발이다. 평상시에 신었던 가죽신인데, 이 가죽신의 크기가 엄청나게 커서 제법 발이 큰 사람도 신을 수 없을만큼 큰 크기로 미루어 류성룡의 체구가 장대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고, 옛사람들의 체구가 평균적으로 지금보다 컸다고 한다. 길이 33cm, 너비 7.5cm로 신창은 다섯 겹을 합쳐서, 운두는 6.5cm의 가죽을 돌려 만든 신이다. 코돌림이 원만하고 둥글어 약간 둔탁한 느낌을 주고 있다.

 

 

 

 

                                                관자                  貫子

 

 

 

 

 

 

 

 

 

 

관자(貫子)는 망건을 매는 끈인 당줄을 걸어 넘기는 역할을 하는 작은 고리이다. 관자의 재료는 관품(官品)과 신분에 따라 달랐다. 당상관(堂上官)은 금이나 옥으로 관자를 만들었고, 그 이하 서민들은 뼈나 뿔, 마노(瑪瑙), 대모(玳瑁), 호박(琥珀) 등으로 관자를 만들었다. 당상관 중에서도 고관의 경우에는 '도리금'이라고 하여 조각이 없는 금관자를 썼다. 관직이 높을수록 금이나 옥에 조작이 없고, 크기가 작은 간소한 관자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상아홀                 象牙笏

      

 

 

 

 

 

 

 

 

 

홀(笏)은 관료들이 관복을 입었을 때 손에 들던 것이다. 본래 국왕에게 아뢸 내용이나 국왕의 명령을 기록하기 위해 사용되었으나, 후에는 의례적인 용도로 변하였다. 홀(笏)은 관품에 따라서 재질이 달랐는데, 1~4품의 관료는 상아(象牙)로 만든 것을 사용하였으며, 그 이하의 관료는 나무로 만든 것을 사용하였다. 왕이 지시를 할 때에는 먹(墨)은 병에 넣어서 차고 다니고, 붓은 도포자락에서 꺼내어서 여기에 기록을 하였기에 먹 자국이 있다. 

  

 

 

                                           조복띠                     朝服帶

 

 

 

 

 

 

 

 

                                                책상                冊床

 

 

 

 

 

 

서애 류성룡이 애용하였던 책상으로 뒷면에 이 책상의 내력을 적은 음기(陰記)가 새겨져 있는데, 임진와랜을 극복한 서애 류성룡의 탁월한 경륜과 높은 학문이 여기에서 나왔다.

 

 

 

 

                                   당장제시선                        唐將題時扇

   

 

 

 

 

 

 

 

 

 

 

 

 

 

 

 

 

임진왜란 당시 존망의 위기에 처해 있던 조선은 명나라에 원군을 청하게 되었고, 이여송 (唐將 李如訟)은 원병을 이끌고 왔다. 전쟁터에서 특히 원군(援軍)의 행패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는데, 도체찰사(都體察使)인 서애 류성룡이 임진년(壬辰年) 12월, 명나라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을 안주(安州)에서 마중을 하게 되었는데, 이여송은 아무 말도 없이 오만방자한 자세로 손을 내밀었다고 한다. 

 

 

 

 

 

 

 

 

 

이에 서애 류성룡은 도포자락에서 평양 탈환을 위한 작전수의서(作戰搜議書)를 이여송에게 매밀었더니 크게 놀란 이여송이 " 조선은 적지만, 인물은 크다 '고 감탄하면서 들고 있던 부채에 시(詩) 한 수를 써주었다고 한다. 당장제시선(唐將題詩扇)이다. 일설에 의하면, 이여송의 5대조는 명나라에 귀화한 조선사람으로 성주이씨(星州李氏)의 후예라고 하며, 당시 조선 주둔 중에 조선인 부인을 맞아 아들을 얻었는데 그의 후손들이 지금도 경상남도 거제군에서 한 마을을 이루고 있다.  

 

 

 

 

 

 

 

 

 

 

 

 

 

 

 

 

 

 

 

 

 

 

                                 류성룡종손가문적          柳成龍宗孫家文籍

                                                     보물제160호

 

 

류성룡의 종손가에 전래하고 있는 전적(典籍)과 문서 일괄은 보물 제160호로 지정되어 있다. 11종 22책이다. 류성룡의 친필문적(親筆文籍), 수록(手錄), 중국 장수의 시화첩(詩畵帖), 류성룡의 호성공신녹훈교서(扈聖功臣錄勳敎書) 등 주로 류성룡의 임진왜란(壬辰倭亂)관련 자료들이다.

 

이 문화재들은 당초 ' 안동류씨문서(안동류씨문서) '라는 명칭으로

 

 

 

 

 

 

 

 

 

 

 

 

 

 

 

 

 

 

 

 

                                       영국 엘리자베스여왕의 충효당 방문

 

 

 

 

 

 

 

 

 

 

 

 

 

 

 

 

 

 

 

 

 

 

 

 

 

 

 

 

 

 

 

 

 

 

                                            사랑채                 舍廊채

 

 

 

 

 

 

 

 

 

 

 

 

 

 

사랑채란 사랑(舍廊)이 딸려있는 집을 말한다. 우리의 옛 어른들은 집을 세는 단위로 '채'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사랑채란 사랑이 딸려있는 집을 말한다. 또 사랑방이란 사랑채에 딸려있는 방을 이르는 말로, 이 사랑방은 대부분이 주인(그 집안의 가장 어른인 남자주인)이 거처하면서 손님이나 집안의 대소사를 관장하며 지내는 곳이었다.

  

 

 

 

 

 

 

 

 

 

 

 

 

 

 

 

                                                 안채              안채

 

 

 

 

 

 

 

 

 

 

안채는 안주인이 생활하면서 집안 살림으 돌보던 공간으로 동북쪽에 부엌을 두었고 'ㄱ'자로 꺾여서 안방, 대청, 건넌방이 있다. 또한 건넌방 앞에는 마루와 2칸의 온돌방, 부엌이 있으며 사랑채와 연결되어 있다. 또한 건넌방 앞에는 마루와 2칸의 온돌방, 부엌이 있으며 사랑채와 연결되어 있다. 

 

 

 

안채는 사랑채에 이어진 중간 행랑채의 중문을 통하여 드나들도록 되어 있으며, 이 건물도 전치석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방주(方柱)를 세웠는데 대청의 전면은 두리기둥으로 되어 있다. 안채도 역시 홑처마의 팔작지붕이며 바닥은 우물마루인데 마루보다 방의 면적이 훨씬 더 넓다. 이 건축물은 상류층의 주택이면서도 모든 부분이 기능적으로 처리되고, 방의 면적이 커지는 등 민간형을 따른 전형적인 상류층 안채이다.   

 

 

 

 

 

 

 

 

 

 

 

                                               행랑채           行廊채

 

 

 

 

 

 

 

 

 

 

행랑채는 주택의 바깥 부분에 해당되는 주거 공간으로, 행랑(行廊)은 대문간에 붙어 있는 방을 뜻하므로 행랑채는 행랑방이 시설된 집채라고 할 수 있다. 보통 대문을 중심으로 마구간, 하인들이 기거하는 방, 광 등으로 되어 있고 주택의 경계선에 따라 세워지는 경우가 많다.

 

 

행랑채는 주택은 물론 조선시대의 궁전이나 과나 건축에도 일반적으로 지어졌으며, 주로 심부름을 하는 사람들이 기거하거나 각종 창고로 이용되었다. 행랑채의 구조는 3량집으로 된 목조가구식으로 가장 간단한 것이며, 한 방의 크기는 1칸 또는 2칸 정도가 일반적이다.

 

 

 

 

 

 

 

 

 

 

                                                         솟을대문

 

 

 

 

 

솟을대문은 주택의 정문이며, 대문 옆 담의 지붕 높이보다 대문의 지붕 높이를 한 단 올린 것을 말한다. 지붕은 맞배지붕이 된다. 대문은 보통 1칸으로 되어 두 짝의 문을 안으로 열게 되어있다. 일설에는 사대부들이 가마에 앉은 채 대문을 출입하므로 가마가 문을 지나기 위하여 지붕 높이를 높인 것이 솟을대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솟을대문의 발생은 향리에서 사대부들이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기 위하여 의식적으로 대문을 권위있게 꾸미려 한 데서 찾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솟을대문의 양 옆으로는 가마를 보관하는 가마고와 마구간이 있고 그 옆으로 하인들의 살림방이 여러 칸 있다. 그 나머지 방들은 대개 광으로 쓰이게 되는데, 곡식을 저장하거나 집안의 일용잡기들을 보관한다. 

 

 

 

 

 

 

 

 

 

 

 

 

 

 

 

 

 

 

 

 

 

 

 

 

                                                만지송           萬枝訟

 

 

 

 

 

 

 

 

 

 

이 소나무는 서애 류성룡의 17대 종부(宗婦) 무안이씨(務安李氏)가 1955년 식목일에 화산(花山)에서 이곳으로 옮겨 심은것으로 후손들의 번영을 기원하는 할머니의 소원이 담겨 있다고 한다. 소나무의 가지가 만개가 된다고 하여 예로부터 만지송(萬枝松)이라고 부른다.

 

 

 

 

 

                                               사당                    祠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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