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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주 천전리 암각화, 반구대, 공룡 화석 발자국

작성자이계묵|작성시간13.02.12|조회수1,411 목록 댓글 0

 

 

 

 

                                                  암각화                 岩刻畵

 

 

 

 

 

 

 

 

 

 

 

 

 

 

암각화(岩刻畵)는바위 표면을 갈아 파거나 그어서 여러 가지 동물상이나 기하학적(幾何學的) 상징 문양을 새긴 것으로, 풍요(豊饒)와 다산(多産)을 기원하는 주술적 목적의 그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7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조사, 발굴되었는데, 그 규모와 내용 면에서 울산 반구대(盤龜臺 ... 국보 제285호) 암각화, 울주 천전리 각석(刻石 ..국보 제147호) 그리고 고령 양전동(良田洞) 암각화(암각화 ... 보물 제605호)가 대표적인 암각화 유적이다. 

 

 

 

 

 

                                                    제작기법과 환경

 

 

 

 

 

암각화(岩刻畵)는 바위의 표면을 쪼아내거나, 갈아 파거나, 선을 그어서 형상을 새긴 것이다. 중국이나 시베리아, 유럽 등지에서는 물감으로 채색한 암채화(岩彩畵)도 발견되었으나, 아직까지 우리나라의 암화(岩畵)에서 채색화는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우리나라 바위 그림은 암각화(岩刻畵)를 일컫는다. 암각(岩刻)의 기법은 바위를 단단한 돌이나 다른 도구를 이용하여 쪼아내는 방법 ( PECKING. 그림 1), 쪼아낸 부분을 갈아 파서 깊고 매끈하게 만드는 방법 ( GRINDING. 그림 2), 그리고 날카로운 금속도구를 이용하여 가는 선(線)으로 형상을 묘사하는 방법 (CARVING . 그림3)으로 나눌 수 있다. 

 

  

 

 

                                  그림 1. 쪼아내기 ... 울주 반구대 암각화

 

 

                                                      그림 2. 갈아내기  ... 남원 대곡리 암각화

 

 

                                그림 3. 그어 새기기  ... 울주 천전리 암각화

 

 

 

 

 

 

 

또한 그림의 형태로 구분하여 면각(面刻)과 선각(線刻)으로 나눌 수 있는데, 면각(面刻)은 윤곽선 내부를 쪼거나 갈아내어 넓은 면으로 표현하는 방법이고, 선각(線刻)은 그림의 윤곽선이나 도형의 내부를 여러 개의 선(線)으로 분할하여 묘사하는 방법이다. 면각과 선각의 선후관계는 분명하지 않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대체로 면각화(面刻畵)가 선각화(線刻畵)에 앞서 나타났다고 보고 있다.

 

 

우리나라 암각화는 대부분 강가의 수직바위 면에서 발견되며 대부분 동남향이나 남향으로 햇빛이 잘 드는 곳에 새겨져 있다. 하늘을 마주보는 평면에 새겨져 있는 안동 수곡리 암각화와 고인돌 등 소형바위에 새겨진 그림을 제외한 암각화는 대개 강가의 수직절벽에서 발견되었다. 또한 대부분의 암각화가 높지 않은 위치에 새겨져 있어서 선사인(先史人)들이 제작조건이 유리한 바위을 선택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울산 반구대(盤龜臺) 암각화의 경우는 높이 3m, 길이 10m 정도의 대규모 암각화로 특수한경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반구대는 거의 북향으로 여름철 아침에 햇빛이 닿는다는 점도 특이하다. 우리나라 암각화 유적의 환경은 강가의 수직암벽이며 해가 뜰 때나 낮에 햇빛이 비친다는 두 가지 조건을 가지고 있어 암각화가 강(江) 그리고 태양(太陽)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울주 천전리 각석              蔚州 川前里 刻石

 

 

 

 

 

 

 

 

 

 

 

 

 

 

천전리 암각화는 반구대(盤龜臺) 유적의 상류에서 발견되었다. 동쪽을 향하고 있는 바위면 앞으로 높은 산봉우리가 솟아 있어 해가 뜨면 잠깐 볕이 들다가 곧 그늘이 진다. 그러다가 오전 늦게 햇빛이 비치면 깊숙하게 갈아 판 추상(抽像)도형이 모습을 드러낸다. 암각화가 있는 바위면 앞으로 약간의 평지가 단(壇)을 이루고 있다. 천전리 암각화의 바위면은 비교적 매끈한데, 보다 고대(古代)의 동물상, 인물상 위에 선각(線刻)의 글씨와 그림을 새기기 위해 바위를 평면으로 다듬은 것이다.

 

 

 

 

 

                                                     국보 제147호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에 있는 선사(先史) 및 역사시대의 조각, 바위 그림 및 여러 종류의 명문(銘文) 유적이다. 국보 제14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70년 동국대학교박물관 학술조사단에 의하여 발견되었으며, 1971년 두 차례에 걸쳐 정식으로 조사되었다.

 

 

이곳 각석(刻石)은 태화강(泰和江) 지류(支流)인 대곡천(大谷川) 중류 강안(江岸) 암벽지대에 있다. 이 지역은 울산과 경주를 잇는 길목지대에 해당되어 울산, 언양 일대의 풍부한 물산(物産)이 경주(慶州)로 운반되는 교통로로 많이 이용되었다. 또한 경관이 빼어나 예로부터 명승지로 이름난 곳이기도 하다. 이 각석(刻石)은 발견 이후 암반(岩盤) 하부에 새겨진 다량의 명문(銘文) 때문에 서석(書石)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면각(面刻)으로 새겨진 동물상(動物像)은 쪼아파기로 얕게 새겨져 있고, 마멸과 훼손이 심하여 지금은 바위면의 오른쪽과 왼쪽 끝에 약간 남아 있으며 중심부에는 비교적 깊게 새긴 것만이 남아 있다. 그런데 군데군데 남아 있는 상(像)을 통해 처음에는 상반부 전체에 가득 새겼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면각화(面刻畵)의 주제는 사람의 얼굴, 사슴, 종류, 고래와 비슷한 물고기 등으로 약 40여 점이 있다. 암수 한 쌍이 묘사된 사슴은 몽골과 중국 북부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 상(像)으로 역시 생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것으로 본다. 바위면의 가장 중심부에 크기가 작은 동물 사이로 작은 꽃모양이 보이는데 이 모양을 태양(太陽)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사슴의 큰 뿔과 태양(太陽)의 숭배는 북방문화(北方文化)의 영향과 관련하여 볼 수 있다.

 

 

 

 

 

 

 

 

 

울주 천전리 각석(刻石)은 너비 9.5m  높이 2.7m의 규모이다. 상부(上部)의 문양(紋樣)은 주로 쪼기(彫琢) 기법을 사용하였으며, 하부(下部)는 긋기(線刻)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이것은 제작시대 및 제작 집단(集團)이 서로 달랐음을 의미한다. 상단부에는 바위를 쪼아낸 뒤 깊게 갈아내어 만든 추상(抽像)도형이 여러 점 표현되어 있다.

 

 

바위면 하단부에는 철기로 파낸 가는 선(線) 그림이 집중되어 있다. 가는 선(線)그림은 신라의 선각문자(線刻文字)와 중복되어 나타나며 마멸이 심해 정확한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다. 바위 중앙부에는 다양한 동물과 글자, 직선과 곡선이 교차되어 새겨져 있으며 인물의 입상(立像)도 남아 있다.   

 

 

 

 

 

 

 

                                                     암각화의 상부

 

 

 

 

 

이 암각화의 상단부에는 바위를 쪼아낸 뒤 깊게 갈아내어 만든 추상도형(抽像圖形)이 여러 점 표현되어 있다. 이 도형은 대체로 연속적인 마름모꼴과 동심원(同心圓) 모양이며, 도형은 아니지만 같은 기법으로 만든 사람 얼굴도 두 점이 있다. 마름모꼴의 이중선 내부에 세로선을 새겨 양분하거나 중심점을 찍은 것은 여성의 성기를 묘사한 것으로 보기도 하는데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다. 또한 동심원과 나선형의 문양도 일반적으로 태양(太陽)을상징하는 것으로 인정되지만, 동심원과 나선형이 어떻게 다른지는 알 수 없다.

 

 

 

 

 

 

 

 

 

 

 

기하학적 문양 ... 상부의 기하학적 문양은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어 있다. 마름모꼴무늬, 굽은무늬,둥근무늬, 우렁무늬, 십자무늬, 삼각무늬 등이 홑이나 겹으로, 혹은 상하 좌우 연속으로나타나기도 한다. 이들 기하학적 문양은 대개 직선(直線)보다 곡선(曲線)이 많고 상징성을 띠는 것이 많아 명확한 의미를 파악하기는 힘들다.

 

 

가장 많이 새겨진 것은 마름모꼴무늬로 홑무늬, 겹무늬 외에 연속문이 있다. 연속문에는 가로, 세로로 겹친 것과 한 무늬 내부에 같은 무늬가 두 겹 세겹 반복되거나, 점이나 빗금이 있는 것도 있다. 굽은무늬에는 가로굽은무늬와 세로굽은무늬가 있다. 원시문양(原始紋樣)에서 이들은 각기 물결과 뱀(蛇)을 상징한다. 

 

 

상부 오른쪽 끝의 열매를 꿴 화살모양의 무늬는 암수이 결합을 의미하는 문양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상부의 이와 같은 문양들은 본질적으로 신석기시대 무늬토기의 기하학문양과 연결된다. 표현이 단순, 소박하면서도 명쾌한 무늬토기 문양양식을 이어받아 청동기시대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문양은 곡식(穀食)이나 음식물 등이 항상 풍요롭기를 바라는 청동기시대(靑冬期時代)의 기원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동물상 ... 동물상은 대부분 상부 왼편에 있다. 사슴종류가 압도적으로 많고 이름을 알 수 없는 각종 동물과 물고기, 새 등이 있다. 사슴은 대개 암수 2마리가 서서 마주보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한 쌍으로 표현된 사슴 중 숫사슴은 뿔이 매우 크고 가지가 무성해 순록(馴鹿)의 일종을 나타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크기가 작은 사슴들은 신체의 특징이 각기 다르게 표현되어 염소나 말 등 다른동물로 볼 수 있는 것도 여러 마리가 있다.

 

 

상부 중심부에는 도안화된 얼굴의 한 인물과 태양을 나타낸 듯한 둥근 문양의 좌우로 4마리의 사슴이 뛰어가는 모습을 새겨놓았다. 이는 당시의 어떤 종교의식이나 신앙관념과 관련있는 표현으로 보인다. 이들 동물상과 기하학 문양 사이에는 곡식 이삭이나 풀뿌리, 꽃종오리를 나타낸 문양도 있으나 상징성을 띤 기하학 문양의 변형으로 볼 수도 있다. 

 

 

석각(石刻) 상부의 문양 제작집단(製作集團)과 종교신앙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상부 왼편 끝에 보이는 인두수신상(人頭獸身像)이다. 이 동물상은 부드러운 얼굴을 한 사람의 머리와 사슴을 닮은 몸체가 결합된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것은 선사(先史)시대 사람들이 믿고 숭배하던 신수(神獸)의 하나로 생각되며, 반인반수(半人半獸) 관념의 기원과 관련하여 중요하게 평가되는 자료이다. 그밖에도 몸체가 긴 두 마리의 동물이 교미를 하는 듯 돌아서서 꼬리를 맞댄 채 서있는 모습이 2군데 보인다. 어떤 동물을 나타낸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상부 왼편에는 상어를 나타낸 듯 꼿꼿한 지느러미가 여러 개 있는 물고기 2마리와 주둥이와 비늘까지 표현된 물고기 1마리, 붕어모양의 물고기 1마리가 각각 새겨져 있다.

 

 

 

인물상 ... 인물상은 뚜렷이 파악되는 것이 모두 7군데이다. 얼굴만 묘사된 것과 전신(全身)을 나타낸 것 등 두 종류가 있다. 모두 원시암각화(原始岩刻畵) 특유의 극도로 단순화된 표현법을 쓰고 있어 사실성이 약하며, 일면 괴상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얼굴상은 대부분 원시종교의식가 관련된 탈을 연상시킨다. 눈, 코, 입이 뚜렷이 새겨진 얼굴상 하나는 시베리아 아무르강 유역 암벽조각에 새겨진 원시탈과 유사하여 주목된다.        

 

 

 

 

 

 

 

 

 

 

 

 

 

                                                      암각화 하부

 

 

 

 

 

 

 

 

 

 

 

 

각석(刻石)의 하부는 선각화(線刻畵)와 명문(銘文)이 뒤섞여 있다. 대개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대에 걸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선각화(線刻畵)는 인물, 기마행렬도(騎馬行列圖)를 비롯해 환상적인 동물들과 자연계의 동물, 크고 작은 배가 항해(航海)하는 모습 등 다양한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선각화 (線刻畵) ...  인물, 기마행렬도는 3군데에서 보인다. 이 중 하부 중앙 제2행렬도의 한 기마인물(騎馬人物)은 눈, 코, 입을 점으로 찍어 표현하고 얼굴 윤곽을 마름모꼴로 처리한 것이 신라의 토용(土俑)이나 토기(土器) 선각화 중 인물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얼굴과 흡사하여 주목되고 있다.

 

 

상부 왼편 제3행렬도의 말(馬)은 질주하는 순간의 모습이 간략한 몇 개의 선(線)만으로 잘 표현되어 제작자의 빼어난 표현감각을 잘 드러내고 있다. 환상적인 동물로는 용(龍)으로 보이는 것이 여러 마리 새겨져 있다. 특히 하부 오른편 끝에 새겨진 용(龍)은 머리를 쳐들고 왼편을 향해 허공을 날아가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몸체의 지느러미와 비늘, S자형으로 휘며 뒤로 뻗은 꼬리부분 등이 세심하게 처리되어 있어 언뜻 고구려 중기 고분벽화의 사신도(四神圖)에 보이는 청룡(靑龍)을 연상시키는 측면도 지니고 있다. 자연계의 동물로는 말이 홀로, 혹은 군마(群馬)의 형태로 묘사되었고, 새(鳥)도 여러 마리 새겨져 있다. 그 밖에 큰 돛을 단 범선(帆船)과 사람이 노(櫓)를 젓고 있는 용머리의 배는 당시 신라인의 해상활동과 관련된 주요한 자료이다.         

 

 

 

 

 

 

 

 

 

 

 

 

 

 

                                                   서석          書石

 

 

 

 

 

 

 

 

 

 

이 각석(刻石)은 발견 후 암반 하부에 새겨진 다량의 명문(銘文) 때문에 서석(書石)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있다. 이 명문(銘文) 중 확인된 글자는 모두 800자가 넘는다. 상부 오른편의 원명(原銘)과 그 왼편의 추명(追銘)이 내용의 중심을 이루고 있고, 그밖에 제명(題銘)이 다량 보이고 있다.

   

 

 

 

 

 

 

 

 

 

오른편의 원명(原銘)이 새겨진 기사년(己巳年)은 신라 법흥왕 12년(525)이고, 추명(追銘)이 새겨진 기미년(己未年)은 법흥왕 26년(539)으로 추정하고 있다. 뒤에 새긴 추명(追銘)은 왕(王)과 왕비(王妃)가 이곳을 찾은것을 기념하여 기록했음을 밝히고 있어 6세기경의 신라사회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명문(銘文) 중에는 사탁부(沙啄部)라는 부명(部名)이 여러 번 언급되어 있다. 이것은 이곳이 신라 6부(六部)의 하나인 사탁부(沙啄部) 사람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장소임을 뜻하고 있다. 이곳은 사탁부(沙啄部)의 고유한 종교의식(宗敎儀式)이 행해지던 성지(聖地)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밖에도 제명(題銘)에는 영랑(永郞), 금랑(金郞), 정광랑(貞光郞) 등 여러 화랑(花郞)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당시 많은 화랑이 이 곳을 찾아 도장(道場)으로 삼았음을 전해준다. 이들 각석(刻石) 하부의 명문과 각종 선각화(線刻畵)는 신라 6부체제의 발전,변화 과정과 내용을 규명하나가는데 주요한실마리를 제시해주고 있으며, 앞으로 이에 대한 보다 종합적이고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한다.

 

 

 

 

                                                            원명           原銘

 

 

 

 

 

 

 

 

 

 

원명(原銘)은 서석(書石)의 하단부 중앙에서 왼쪽으로 조금 치우친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서석의 면을 파서 곱게 다듬고 가장자리에 테두리를 둘러 구획을 정한 후에 글자를 새겼다. 서석의 명문 가운데 이것이 가장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가장 먼저 작성되었다고 보이기 때문에 원명(原銘)이라고 불렀다.

 

 

원명(原銘)의 작성연대는 을사(乙巳)라는 간지가 보인다는 점, 추명(追銘)에서 과거의 사실을 축약하여 기술한 사실, 주인공인 사부지발문왕(徙夫知葛文王,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이 진흥왕이 즉위한 해인 540년 이전에 사망하였다는 사실 등을 종합적으로 감안하여 525년(법흥왕 12)로 추정하고 있다. 원명(原銘)의 내용은 사훼부(沙喙部) 소속의 갈문왕이 고곡(古谷)을 찾아 이를 서석곡(書石谷)으로 이름지었다는 것인데, 이것은 추명(追銘)의 내용과 더불어 6세기 전반 신라 왕실의 실태와 정치사를 이해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을사년(乙巳年)에 사훼부(沙喙部)의 갈문왕(葛文王)이 찾아 놀러와 처음으로 골짜기를 보았다. 오래된 골짜기인데, 이름 없는 골짜기이므로, 좋은 돌을 얻어 글을 짓고, 이로 말미암아 서석곡(書石谷)으로 이름을 삼아 명문(銘文)을 새겼다. 더불어 놀러 온 이는 갈문왕과 우매(友媒)와 여덕광묘(麗德光妙)한 아수추안랑(於史鄒安郞) 셋이다. 사냥을 많이 하여 일체의 일을 맡으신 이는 이리부지 내마(奈麻)와 실득사지(悉得斯祉) 대사제지(大舍帝智)이었다. 음식을 만들어주시는 분은 송지지 일길간지(宋知智 壹吉干支)의 처(妻)인 거지시혜 부인과 진육지 사간지의 처(妻)인 아혜모홍 부인이다. 글을 쓴 사람은 모모이지 대사제지(慕慕荑智 大舍帝智)이다.  

 

 

 

 

 

 

 

 

 

 

 

 

 

 

 

                                                    추명         追銘

 

 

 

 

 

 

 

 

 

 

추명(追銘)은 원명의 좌측에 서석의 면을 약간 파서 다듬고, 가장자리에 테두리를 둘러 구획을 짓고 글자를 새겼다. 내용과 위치로 보아 원명과 연속된 명문 자료로 추정되기 때문에 추명(追銘)이라고 이름하였다. 여기에 기미년(己未年)이 보이는 점, 내용 가운데 '사부지왕자(徙夫知王子 ..갈문왕의 아들)'의 이름이 보이는 점에 근거하여 추명의 작성연대는 539년이라고 볼 수 있다.

 

 

글자가 마멸되어 정확하게 판독되지 않는 것이 있다. 판독에 따라 명문의 해석에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다. 대체로 명문의 내용은 앞부분에 을사년에 사부지갈문왕(徙夫知葛文王) 등이 서석곡(書石谷)을 찾아온 일, 갈문왕(葛文王)의 누이와 더불어 갈문왕도 사망하였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이어서 기미년(기미년) 7월3일에 서석곡을 찾아왔다는사실, 그들을 따라온 사람들의 인명 등을 차례로 기술하였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법흥왕(法興王)이 태왕(太王)이라는 왕호를 사용하였음을 전하는데, 이를 통하여 530년대에 왕호(王號)가 매금왕(寐錦王)에서 대왕(大王)으로 바뀌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법흥왕 재위 기간 동안에 그의 동생, 갈문왕이 사망하였다는 사실도 살필 수 있다. 이밖에 추명(追銘)의 기록들은 법흥왕대 관등표기 방식, 갈문왕(葛文王)의 성격 등을 살필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과거 을사년(법흥왕 12. 525년) 6월 18일 새벽에 사훼부(沙喙部)의 사부지 갈문왕과 누이인 어사추여랑님이 함께 놀러온 이후 올해로 14년이 흘렀다. 누이를 생각하니 이미 누이는 돌아가신 분이다. 정사년(법흥왕 24. 537년)에는 갈문왕(葛文王)도 돌아가셨고, 그 왕비 지몰시헤비는 애달프게 그리워 하였다. 기미년(법흥왕 26. 539년) 7월 3일 갈문왕과 누이가 함께 써 놓은 서석(書石)을 보러 골짜기에 왔다. 이때 세 분이 함께 왔는데 무즉지태왕비인 부걸지비와 사부지갈문왕의 아들인 심맥부지(深麥夫知)가 함께 왔다. 일을 맡은 총 책임자는 사훼부의 지례부지 사간지와 박육지 거벌간지이다. 의례를 맡은 신하는 정을이지 내마(奈麻)이다. 음식을 만든 이는 진육지 파진간지 부인인 아혜모호 부인과 이부지 거벌간지의 부인인 일리등차 부인, 거례차 거벌간지의 부인인 사효공부인이 함께 하였다. 

 

 

 

추명(追銘)의 내용은 사부지 갈문왕(葛文王)과 어사추여랑이 서석곡(書石谷)을 찾은지 14년이 지난 기미년(539년)에 갈문왕의 부인과 그 가족이 다시 서석곡을 찾아왔다. 그리고 이때는 갈문왕과 어사추여랑은 모두 사망한 상태이었으며 갈문왕은 2년 전인 정사년에 이미 사망하였다. 어사추여랑는 갈문왕 보다 앞서 사망하였다.

 

 

 

 

 

 

 

 

 

 

 

 

 

 

 

 

 

 

                                                  다양한 문양(紋樣)들

 

 

 

 

 

 

 

 

 

 

 

 

 

 

 

 

 

 

 

 

 

 

 

 

 

 

 

 

 

 

 

 

 

 

 

 

 

 

 

 

 

 

 

 

 

 

 

 

 

 

 

 

 

 

 

 

 

 

 

 

 

 

 

 

 

 

 

 

 

                                                      반구대             盤龜臺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의 사연댐 상류에 있는 반구대(盤龜臺)마을은 예로부터 뛰어난 풍광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마을에서 동(東)으로 흐르는 태화강 지류(支流)인 대곡천(大谷川)을 따라 약 1킬로미터 내려가면 오른쪽으로 수십미터에 이르는 높은 절벽이 병풍처럼 서 있고, 이곳에 반구대(盤龜臺) 암각화가 있다.

 

 

울산의 젖줄 태화강 상류 반구대(盤龜臺) 일대의 인공호(人工湖) 서쪽 기슭의 암벽에 새겨져 있다. 댐의 축조로 평상시에는 수면 밑에 있다가 물이 마르면 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 크기는 가로 약 8m, 세로 약 2m이고, 조각은 암벽 밑에까지 부분적으로 퍼지고 있어, 밑에서부터 암각화 상단선까지의 높이는 3.7m쯤 된다. 

 

 

 

                                                                  제작 시기 

 

 

 

이 암각화의 제작 시기에 관하여는 신석기시대부터 만들기 시작하였다는 설과 청동기시대의 작품이라는 설 등이 있다. 시기의 차이가 나는 표현 양식과 내용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암각화 그림 모두가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고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원하는 그림을 추가하는 등 신앙행위(信仰行爲)의 장소로서 계속되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다양한 문양들

 

 

 

 

반반하고 매끈거리는 병풍 같은 바위면에 고래, 개, 늑대, 호랑이, 사슴, 맷돼지, 곰, 토끼, 여우, 거북, 물고기, 사람 등의 형상과 고래잡이 모습, 배와 어부의 모습, 사냥하는 광경 등을 표현하였다. 이곳에 표현된 동물들이 주로 사냥의 대상 동물이고, 이 동물 가운데에는 교미(交尾)의 자세를 위하고 있는 것과 배가 불룩하여 새끼를 가진 것으로 보이는 동물의 모습이 보인다. 이 암각화는 당시 사람들이, 동물들이 많이 번식하고 그로 인하여 사냥거리가 많게 되기를 기원하면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춤추고 있는 남자의 모습에서 성기(性器)가 과장되게 표현된 것은 인간의 생식능력(生殖能力)이 자연의 번식력과 깊은 관계를 가졌다고 생각하였던 당시 사람들의 관념을 나타낸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어로(漁撈)의 행위를 묘사하고 있는 고기잡이배와 그물에 걸려든 고기의 모습을 묘사한 것도 실제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일종의 주술적(呪術的) 행위로 볼 수 있다. 아마도 당시에는 반구대 지역이 사냥과 어로(漁撈)의 풍요를 빌고 그들에 대한 위령(慰靈) 을 기원하는 주술 및 제의(祭儀)를 행하던 성(聖)스러운 장소이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동물의 표현 중에 소위 'X레이' 화법이라고 하는 배 부분의 내장(內臟)을 표시한 것이나, 입에서 시작하여 내장(內臟)까지 닿는음식을 내장으로 보내는 일종의 생명선의 표현은 동불들의 생명 운영과 그를 위한 기본 기관이 들어있는 부분에 대한 특별한 관심의 한 표현으로 보인다.  

 

 

 

 

 

 

 

 

 

 

 

 

 

 

 

 

 

 

 

 

 

 

 

 

 

 

 

 

 

 

 

 

 

 

 

 

 

 

 

 

 

 

 

 

 

 

 

 

 

 

 

                                                           공룡 발자국 화석

 

 

 

 

 

 

 

 

 

 

 

                                                중생대          中生代

 

 

 

 

 

지질시대에서 화석(化石)이 풍부하게 나타나기 시작한 이후의 시기를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때 가운데에 해당하는 시대를 중생대(中生代)라고 한다. 고생대(古生代)와 신생대(新生代) 사이의 시대로, 약 2억2,500만 년 전부터 약 6,500만 년 전까지의 1억6,000만 년간에 해당한다. 중생대는 오래된 순서부터 '트라이아스' 그리고 '쥐라기' 마지막으로 백악기(白堊期)의 3기(期)로 나누어진다. 중생대 무척추동물(無脊椎動物)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암모나이트(ammonite)이고, 척추동물(脊椎動物)로는 파충류, 특히 공룡류(恐龍類)가 현저히 발전하였다. 육상식물로는 은행나무, 소철류, 소나무류 등의 겉씨식물이 번성하였다. 

 

 

 

 

 

                                                  공룡            恐龍

 

 

 

 

 

 

 

 

공룡(恐龍)은 중생대(中生代) 중 맨 처음 시기인 '트라이아스'기 후반기에 출현해 '쥐라기'와 '백악기'에 크게 번성하다가 백악기(白堊期) 말에 절멸(絶滅)한 거대 파충류목(조반목. 鳥盤目)을 공룡(恐龍)이라고 한다. 파충류는 중생대의 지구상에서 수륙공(水陸空)의 3권(圈)에서 크게 번성하였다.

 

 

공룡(恐龍)은 고생대(古生代) 말에 양서류(兩棲類)에서 진화하여 나타났다. 대표적인 공룡은 '쥐라기'의 '알로사우루스'와 백악기(白堊期)의 '티라노사우루스' 등이며, 모두 거대한 육식성(肉食性) 공룡들이다. '알로사우루스'의 몸 길이는 10m에 이르며, 무게는 2톤이나 되었고, 사지(四肢)는 갈퀴모양의 발톱을 가지고 있었다. '티라노사우루스'는 몸길이 15m, 몸무게가 7톤이 넘었고, 일어섰을 때의 키는 5~6m에 이른다. 

 

 

 

 

 

 

 

 

 

 

울주군 천전리(川前里) ' 공룡발자국화석 (恐龍발자국化石) '은 대곡천(大谷川) 하천 옆의 평평한 바위 위에 있으며, 약 1억 년 전 백악기(白堊紀)시대에 살았던 중, 대형 공룡(恐龍)의 흔적으로 보인다. 바위 위에는 대형, 초식공룡(草食恐龍)인 한외룡(限外龍 ... 울트라사우루스)을 비롯하여 중형, 초식공룡인 '이구아나룡'에 속하는 고성룡(高城龍 ... 고성 고사우루스) 등의 공룡 발자국 화석(化石) 200여 개가 확인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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