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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 자리 < 석굴암 석굴 >

작성자이계묵|작성시간13.02.16|조회수377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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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석굴 (石窟庵石窟)

1966년 초등학교 수학여행시 석굴암에 처음 가보았다. 그때는 개방되어 있어 장난치며 부처님 엉덩이도 만져본 기억이 난다. 그후 여러차례 다녀왔지만 그때마다 흐릇한 유리를 통하여 보다가 관광객에 떠밀려 나오는 관람현실이 안타까웠다. 우리가 제대로 볼 수 있는 불상은 38구 중 인왕상과 본존불 정도 뿐이다.

언제 다시 안에 들어가 걸출한 솜씨로 제작된 종교예술품인 제존상(諸尊像)들을 볼수 있을까 ?

<석굴암>이라는 말만 들어도 늘 그부분이 아쉽기만 하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철학가이자 교육가인 박종홍(1903-1976)은 1922년 <개벽>에 '한국미술사'를 연재하여 큰 인기를 모았다. 그런 그가 리프스의 조각에 관한 이론을 기준으로 석굴암을 설명하기 위해 한 여름을 석굴암 부근 암자에서 보냈으나 연구를 계속할 용기가 나지 않아 한국미술사를 포기하고 이듬해 경성제대 철학부에 입학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석굴암에 대해서 제대로 평가기는 매우 어려우나, 몇분 전문가의 코멘트를 소개한다.

‘피도 없고 물도 없고 정도 없는 화강석에서 맥박이 뛰고, 신성(神性)이 넘치고, 호흡이 고르고, 온(溫·따뜻함)과 엄(嚴·엄숙함)을 구비한 위대한 모습이 드러날 때, 환희는 장인의 손끝에 있지 않고 신라 천지를 휩쌌을 것이고 천지를 울렸을 것이다.’ (한국 미술사학의 선구자로 대접받는 우현(又玄) 고유섭(高裕燮,1905∼1944) 선생의 글)

석불사(石佛寺)의 석굴(石窟), 그것은 종교와 과학과 예술이 하나됨을 이루는 지고(至高)의 최미(崔美)이다. 거기에는 전세계 고대인들이 추구했던 이상적인 인간상으로서 절대자의 세계가 완벽하게 구현되어 있다. (유홍준의 문화유산답사기의 글이다. 그는 석굴암은 잘못된 표현이라 한다.)

정각(正覺, 완벽하고 올바른 깨달음)의 장엄(莊嚴)을 석굴암보다 더 훌륭하고 아름답고 완벽하게 표현한 것은 세계에 없다. 그러한 표현의 지혜를 터득한 사람들이 바로 신라인들이었다.

신라의 대부분 유적은 훼손 후 복원되었으나 유일하게 제자리에서 크게 파손되지 않고 건축과 조각이 남아 있는 것은 석굴암뿐이다. 神品이라 天神이 보호한 것인가. (강우방의 글)

잘 알려진대로,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창건을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에 완성하였으며, 건립 당시에는 석불사라고 불렀다.경덕왕은 신라 중기의 임금으로 그의 재위기간(742∼765) 동안 신라의 불교예술이 전성기를 이루게 되는데, 석굴암 외에도 불국사, 다보탑, 석가탑, 황룡사종 등 많은 문화재들이 이때 만들어졌다.

석굴암이 창건된 이후 조선중반까지는 큰 변화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숙종 때(1688년) 丁時翰의 <山中日記>에는 석굴암에 유숙하며 그 절묘한 솜씨를 찬미한 내용이 있고, 겸재 정선은 <교남명승첩>에 경주의 골굴암과 석굴암을 그렸는데 이 화첩은 최근의 복원공사에서 목조 전실을 첨가하는 자료가 되었다.

국운의 쇠퇴와 함께 잊혀가던 석굴암은 일제시대 (1907년)한 일본인 우편배달부가 자신이 석굴암을 지하동굴에서 발굴한 양 선전하여 일본 무뢰한들이 많은 유물을 훔쳐가는 계기가 되었고(그 때 석굴 조상 2기를 잃었다.) 일본 소네 통감과 초대 총독 데라우찌는 직접 방문하여 일제는 석굴 전체를 일본으로 가져갈 계획까지 세웠으나 한일합방으로 굳이 반출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

(사진 : 답사여행의 길잡이 경주편)

일제는 석굴암에 1913년 이래 세 차례의 복원공사를 했다. 그러나 잘못 조립하여 불상의 정확한 위치와 구조를 알수없게 되었고 당시 신소재로 각광받던 시멘트로 둘레를 막아 내부에 습기차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40구 불상에 대하여

토함산 중턱에 백색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인위적으로 석굴을 만들고, 내부공간에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위 벽면에 보살상 및 제자상과 역사상, 천왕상 등 총 40구의 불상을 조각했다. 석굴암 석굴의 구조는 입구인 직사각형의 전실(前室)과 원형의 주실(主室)이 복도 역할을 하는 통로로 연결되어 있으며, 360여 개의 넙적한 돌로 원형 주실의 천장을 교묘하게 구축한 건축 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뛰어난 기술이다.

(참고) 40구의 불상의 내력은 다음과 같다. 팔부신중 8구, 인왕상 2구, 사천왕상 4구, 본존불 1구, 천부상 2구, 보살상 2구, 십대제자상 10구, 11면 관음보살 1구, 감실보살상 10구. 이 중 감실상 2구는 도둑맞았다.

석굴암 석굴의 입구에 해당하는 전실에는 좌우로 4구(軀)씩 팔부신장상을 두고 있고, 통로 좌우 입구에는 금강역사상을 조각하였으며, 좁은 통로에는 좌우로 2구씩 동서남북 사방을 수호하는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다.원형의 주실 입구에는 좌우로 8각의 돌기둥을 세우고, 주실 안에는 본존불이 중심에서 약간 뒤쪽에 안치되어 있다.주실의 벽면에는 입구에서부터 천부상 2구, 보살상 2구, 나한상 10구가 채워지고, 본존불 뒷면 둥근 벽에는 석굴 안에서 가장 정교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이 서 있다.

원숙한 조각 기법과 사실적인 표현으로 완벽하게 형상화된 본존불, 얼굴과 온몸이 화려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 용맹스런 인왕상, 위엄있는 모습의 사천왕상, 유연하고 우아한 모습의 각종 보살상, 저마다 개성있는 표현을 하고 있는 나한상 등 이곳에 만들어진 모든 조각품들은 동아시아 불교조각에서 최고의 걸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특히 주실 안에 모시고 있는 본존불의 고요한 모습은 석굴 전체에서 풍기는 은밀한 분위기 속에서 신비로움의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의 본존불은 내면에 깊고 숭고한 마음을 간직한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모든 중생들에게 자비로움이 저절로 전해질 듯 하다.석굴암 석굴은 신라 불교예술의 전성기에 이룩된 최고 걸작으로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어 더욱 돋보인다.현재 석굴암 석굴은 국보 제24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으며, 석굴암은 1995년 12월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록되었다.

석굴암에 갔다가 사진은 이것밖에 못 찍었다.

석굴암석굴의 여러 부조상들 (문화재청 사진)

입구전실에서 배열된 순서임

1. 팔부신중(전실) : 원래는 인도의 신이었으나 석가모니의 교화로 불교의 수호신이 되었다.

2. 인왕상(금강역사상) : 탑 또는 절의 문 양쪽에서 수문신장의 역할을 맡는다.

3. 사천왕상: 수미산 중턱의 동서남북 네 지역을 관장하는 천왕상이 본존불을 맞이한다.

4. 본존불 : 깨달은 자, 부처를 의미한다.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어 석가여래로 보인다.

5. 제석천과 범천 : 석가여래를 찬양하고 불법을 지키는 신

6. 문수와 보현보살상

(문수보살상과 제석천)

7. 십대제자상 : 세계미술사에서도 극히 드문 대형조상으로 특징있는 표현과 예술성으로 높이 평가.

8. 십일면관음상 : 머리위에 부조된 머리가 11면이다. 본존불 바로 뒤에 있어 잘 보이지 않으나, 다른 부조에 비해 강하게 돌출시키고 6.5등신의 현세적 미인관 즉 '미스 신라' 라 이름할 만큼 섬세하고 아름다운 조각으로 유명하다.

(본존불 바로 뒤로 11면 관음보살과 좌우로 10대제자상이 보인다. 위로 둥근 광배가 있고 좌우로 5개씩의 감실상이 있다.)

석굴암석굴 천정

"보지 않은 자는 보지 않았기에 말할 수 없고, 본 자는 보았기에 말할 수 없다."

그래선지 석굴암에 바친 시는 겨우 4편이라 한다.

경주에서 10년간 교편을 잡았던 청마 유치환 (1908-1967)의 시를 보면..

목놓아 터트리고 싶은 통곡을 견디고

내 여기 한개 돌로 눈감고 앉았노니

천년을 차거운 살결 아래 더욱

아련한 핏줄, 흐르는 숨결을 보라

(중략)

뉘가 알랴 !

하마도 터지려는 통곡을 못내 견디고

내 여기 한개 돌로

적적(적적)히 눈감고 가부좌하였노니.

................

,,,,,,,,,,,,,,,,,,,산중일기 일제시대

중국의 모든 석굴사원의 벽면과 불상들은 온갖 화려한 채색으로 장엄되어 눈을 현란케 하나, 석굴암의 건축과 조각은 색체를 지극히 절제함으로써 성스러운 공간을 만들어 마음을 침짐케한다. 탄성도 거부하며 오직 침묵케 하고 숙연케할 뿐이다.

작품앞에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지성. 이성보다도 감성. 감정. 정서. 감수성이다. 이들은 사랑(情)이다. 머리로 보지 말고 가슴으로 보아야 한다. 이성은 부분만을 보지만 감성은 전체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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