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마루란 지붕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수평 ‘마루’다.
그러면 ‘마루’는 또 뭐냐? 하고 물을 지 모르는데
바닥에 깐 널빤지가 마루지만, ‘지붕이나 산 따위의 꼭대기’도 마루라고 한다.
그러니까 아래 사진과 같이 지붕 꼭대기 앞 뒤면을 가르는 선에 솟은 부분이 용마루다.
사진: 경복궁 근정전. 필자가 지붕 꼭대기에 용마루라고 써 넣었다.
그런데 궁궐을 다니다 보면 용마루가 없는 전각들을 볼 수 있다.
사진: 경복궁 강녕전-국왕의 침전이었다. 용마루가 없다.
용마루가 없는 전각들은 대략 임금이나 왕비의 침전(寢殿)이다.
그러다 보니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시중에 널리 퍼져 있다.
…왕은 용(龍)이다. 용(龍)이 자는데 다른 용(龍)이 위에서 누르면 되겠는가?
그래서 용마루를 설치하지 않았다…….운운
필자도 어느 글에서 이 설(說)을 소개한 적 있다.
그런데 최근 어느 강의를 듣다 보니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강사 이강근 경주대 문화재학과 교수는 건축사(建築史)를 전공하고 박사학위 받은 분이다.
학위가 문제가 아니라 논리 전개가 합리적이라 옮긴다.
이 교수에 따르면 “…용(龍)을 또 다른 용(龍)이 누를 수 없어
만들지 않았다…” 는 그야말로 전설의 고향 같은 헛소리로,
조선 말기에 청(靑)나라 건축양식에서 영향 받았다는 것이다.
용마루가 없으니 꼭대기 부분이 각이 지지 않고, 둥글게 넘어가게 되고
그 곡면을 덮은 기와를 곡와(曲瓦) 또는 궁와(弓瓦)라고 한다.
중국 청나라에서 멋을 내려고 발전시킨 양식인 모양이다.
그리고 건축기법 상 용마루 없이 만드는 것이 더 어렵다고 한다.
사진: 창덕궁 희정당 (熙政堂) 해체 공사 시 찍은 것이다.
필자가 가필(加筆)한 것 처럼,
지붕 중심선에서 아래로 벋은 것이 서까래
그 서까래를 밑에서 받쳐 주는 것이 도리,
도리와 도리를 횡으로 받치는 것이 보 다.
보 중 맨 밑 중심 되는 것이 대들보 다.
그런데 다른 부분 ‘도리’ 는 한 개씩이나,
희정각 지붕 바로 밑 ‘도리’는 쌍이다.
곧 용마루 없으면 이음매가 곡선으로 넘어갈 수 밖에 없으니
지붕 밑 도리가 쌍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런데 현재 희정당 (熙政堂)은 용마루가 있다.
사진: 희정당
구조는 용마루 없어도 되게끔 되어 있는데 왜 용마루가 있을까?
일제 강점기인 1917년 창덕궁에 큰 불이 나 전각들 대부분이 불탄다.
그러자 일제(日帝)는 경복궁 전각들을 뜯어 옮겨 지어 버렸다.
1920년 경복궁의 국왕 침전인 강녕전(康寧殿)을 뜯어다 만든 것이
현재 희정각이다. 경복궁 강녕전일 때는 용마루가 없었으니
위의 구조였지만, 창덕궁으로 옮겨 오면서 용마루를 올려 버린 것이다.
참고로 창덕궁 침전(寢殿) 대조전(大造殿)은 경복궁 교태전을 뜯어 온 것이다.
지금 경복궁 강녕전과 교태전은 최근 복원한 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3년전 상해 예원(豫園)을 갔을 때 보니 용마루가 있던데…
사진: 상해 예원(豫園)의 어느 지붕
아래 오른 쪽 관우상(關羽像)에 초점을 두어 지붕 전체를 볼 수 없으나
분명히 용마루가 있다. 청나라 양식이 아니라서 그런가?
이제 궁궐의 나머지 침전 사진들을 본다.
사진: 경복궁 교태전.
강녕전은 국왕의 침전, 교태전은 왕비의 침전이다.
대원군 때 지은 것은 위 설명대로 1920년 창덕궁으로 뜯어가 버렸고
지금 건물은 최근 복원한 것이다.
사진: 창덕궁 대조전.
위에서 말한대로 1920년 경복궁 교태전을 옮겨다 지었다.
사진: 창경궁의 통명전-역시 용마루가 없다.
그러나 아래 사진에서 보다시피,
창경궁의 경춘전, 환경전은 침전(寢殿)이지만 용마루가 있다.
사진: 창경궁 경춘전. 침전이지만 용마루가 있다.
사진: 창경궁 환경전. 침전이지만 용마루가 있다.
그건 조선 후기 청나라 양식을 따라 용마루 없이 지을 때
우선 중요 건물부터 그렇게 했을 것이라는 것이 이강근 교수의 추정이다.
사진: (*) 동궐도(東闕圖) 중 창덕궁 중앙부분
왼쪽 중앙 인정전, 그 오른 쪽 선정전, 다시 그 오른 쪽 희정당은
모두 용마루가 있으나, 맨 오른 쪽 위인 대조전에는 용마루가 없다.
(*) 창덕궁과 창경궁을 합쳐서 동궐(東闕)이라고 불렀다.
이에 대해 경복궁은 북궐(北闕), 경희궁은 서궐(西闕)이다.
동궐도(東闕圖) 는 1820년 경 제작한 것으로 추정한다.
도해(圖解)가 대단히 정밀하여 최근 창덕궁, 창경궁 복원 때
이 동궐도를 많이 참조했다.
용마루가 왜 없나? 내막을 알고 보니 좀 허망하고 무미건조하다.
임금이 용인데 또 다른 용이 누를 수 없어 그랬다 쪽이 인간적이다.
이래서 전설이 사라지지 못하는 모양이다.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