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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시

<죽음에 관한 시 모음> 박제영의 '저승길이 환해질 때' 외

작성자나동엽|작성시간11.02.28|조회수2,040 목록 댓글 0

<죽음에 관한 시 모음> 박제영의 '저승길이 환해질 때' 외

+ 저승길이 환해질 때

덤불 우거지고 잡풀 웃자라
이 골이 저 골 같고 저 골이 이 골 같아서
도무지 찾을 길 없는 길을
아버지는 어찌 알고 저리 수이 오르시는가

덤불 우거지고 잡풀 웃자라
표식도 없고 비석도 없어
도무지 경계 없는 무덤을
아버지는 어찌 알고 저리 수이 찾으시는가

- 아버진 어찌 그리, 길도 무덤도 잘 찾으요?
- 늙으면 저승길이 환해지는 법이다

우거진 덤불과 웃자란 잡풀들
아버지, 낫으로 베어낼 때마다
조금씩 환해지는
알몸의 길이여
알몸의 무덤이여
(박제영·시인)


+ 해질 무렵 어느 날

꽃 지고 난 뒤
바람 속에 홀로 서서
씨를 키우고
씨를 날리는 꽃나무의 빈집

쓸쓸해도 자유로움
그 고요한 웃음으로
평화로운 빈손으로

나도 모든 이에게
살뜰한 정 나누어주고
그 열매 익기 전에
떠날 수 있을까

만남보다
빨리 오는 이별 앞에
삶은 가끔 눈물겨워도
아름다웠다고 고백하는
해질 무렵 어느 날
애틋하게 물드는
내 가슴의 노을빛 빈집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한가지 소원(所願)

나의 다소 명석한 지성과 깨끗한 영혼이
흙 속에 묻혀 살과 같이
문드러지고 진물이 나 삭여진다고?

야스퍼스는
과학에게 그 자체의 의미를 물어도
절대로 대답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억지밖에 없는 엽전 세상에서
용케도 이때껏 살았나 싶다.
별다른 불만은 없지만,

똥걸레 같은 지성은 썩어 버려도
이런 시를 쓰게 하는 내 영혼은
어떻게 좀 안될지 모르겠다.

내가 죽은 여러 해 뒤에는
꾹 쥔 십원을 슬쩍 주고는
서울길 밤버스를 내 영혼은 타고 있지 않을까?
(천상병·시인, 1930-1993)


+ 약력

그리움으로 피었다 지는 꽃
살아온 흔적 중에 빛나는 일만 적으라 하네
높은 지위
남에게 자랑하여 고개 숙일만한 일들을
요약해서 적는 것이 약력이라네
나이 들면서 자꾸 뒷 쪽을 바라보는 것은
덧셈보다 뺄셈에 능숙해지는
바람을 닮아가기 때문이라네
바람이라고 적을 수는 없네
떠돌이였다고 말할 수는 없네
태어난 그날부터 지금까지
먼지처럼 쌓였다 사라져버린
그 수많은 날들을
나는 축약할 수가 없다
기억나지는 않으나
밥 먹고 잠들었던
잠들었다 부시시 깨어나던 동물의 날들을
나는 버릴 수가 없다

나는 약력을 쓰네
꿈이 꿈인 줄 모르고
꿈속을 헤매다가
꿈속에서 죽어서도
죽은 것인지조차 모르는 사람이라고
한마디로 줄여서 약력을 쓰네
(나호열·시인, 1953-)


+ 국경

독일에서
오스트리아로
오스트리아에서
이탈리아로
국경을 넘는다.

이탈리아를 지나면
스위스가 나타나고
프랑스가 나타난다.

그래, 그렇지.
이승의 국경을 넘으면
거기에도
나라는 있겠지.

호반이 있고
새들 지저귀는
숲이 있고
마을이 있겠지.
(손광세·시인, 1945-)


+ 임종 예습

흰 홑이불에 덮여
앰블런스에 실려간다.

밤하늘이 거꾸로 발 밑에 드리우며
죽음의 아슬한 수렁을 짓는다.

이 채로 굳어 뻗어진 내 송장과
사그라져 앙상한 내 해골이 떠오른다.

돌이켜보아야 착오 투성이 한평생
영원한 동산에다 꽃 피울 사랑커녕
땀과 눈물의 새싹도 못 지녔다.

이제 허둥댔자 부질없는 노릇이지…

"아버지 저의 영혼을
당신 손에 맡기나이다"

시늉만 했지 옳게 섬기지는 못한
그분의 최후 말씀을 부지중 외우면서
나는 모든 상념에서 벗어난다.

또 숨이 차온다.
(구상·시인)


+ 한 늙은 농부의 기도

오늘도 저물었습니다.
밭에는 씨를 뿌렸고
논의 물꼬도 막았습니다.
올 농사도 당신이 거두어주소서.

저는 믿습니다.
해마다 당신은 거두어주셨지요.
당신이 원하시는 그 때에.
아내와 자식
며느리와 손자들
논밭의 곡식들

땅을 파는 이 손은 기억하고 있지요.
마른 논바닥 같은 이 손
당신이 꼭 쥐어주는 이 손

사람들은 두런거립니다.
땀에 찌든 이 몸뚱이 보고
개냄새가 난다고,
허리 굽은 이 몸뚱이 보고
무덤냄새가 난다고.

그래요, 그래요
그래도 저는 일을 하지요.
밤낮없이 일을 하지요.
당신이 여기 계시기에
당신이 그걸 원하시기에

이제 이 몸도
당신이 거두어주소서.
(김형경·시인, 1960-)


+ 죽음이 나에게 찾아오는 날은

죽음이 나에게 찾아오는 날은
화려하게 꽃피는 봄날이 아니라
인생을 생각하게 하는
가을이 되게 하소서

죽음이 나에게 찾아오는 날은
사고나 실수로 나를 찾아오지 않고
허락하신 삶을 다하는 날이 되게 하소서

하늘은 푸르고 맑아
내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이 평안하고
행복한 날이 되게 하소서

늙어감조차 아름다워 추하지 않고    
삶을 뒤돌아보아도 후회함이 없고
천국을 소망하며 사랑을 나누며 살아
쓸데없는 애착이나 미련이 없게 하소서

병으로 인하여 몸이 너무 쇠하지 않게 하여 주시고
가족이나 이웃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는
기력이 있고 건강한 때가 되게 하소서

나의 삶에 맡겨주신 달란트를 남기게 하시고
허락하신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며
가족과 이웃에게 사랑을 나누고 베풀며 살게 하소서

죽음이 나에게 찾아오는 날은
주님의 구원하심과 죄의 용서하심과 사랑을
몸과 영혼으로 확신하는 날이 되게 하소서

가족들에게 웃음 지으며
믿음으로 잘 살아가라는 말과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을 남기게 하소서
마지막 숨이 넘어가는 순간 고요히 기도 드리며
나의 영혼을 주님께 맡기게 하소서
(용혜원·목사 시인, 1952-)


+ 수의 패션쇼

강남 한복판에서 수의 패션쇼가 열렸다
죽음의 옷이 산 사람을 꿰입고
휘황찬란 조명 아래 활보한다
산 사람이 죽음의 옷 속에 담겨 조용히
전시중이다 사람들은
수의 위에 박수를 치고 휘파람을 불어댄다
조명발을 받은 수의는 이 세상처럼 환한데
수의 속 산 사람의 몸은 무덤처럼 캄캄하다
이제 죽음은
빙초산 맛 같은 불빛 아래 진열되는
상품이 되었다, 나는 후일
어떤 디자인에 맞춰 임종하게 될까
턱시도 수의, 드레스 수의, 무궁화 자수가 만발한
거들치마 수의
대로변에 버젓이 검은 입 벌리고 대기중인 납골묘
아직 새파란 사람들이 저축하듯 유서를 쓰고
영원한 안식인 죽음은
죽은 몸 부릴 곳조차 없다, 상여 붙잡고 울 틈도 없이
무대 위로 불려 올라가 번쩍번쩍 요란한
박수 소리만 흘려 보낸다
(이해리·시인, 경북 칠곡 출생)


+ 죽음을 사랑합니다

왜 이렇게 열렬히 사랑하는지 당신 잘 이해 못 하시는군요. 그건 제가 죽어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단 한 번뿐인 삶으로, 매순간 제 죽음으로, 당신 전부를 사랑하기에 그토록 뜨거운 겁니다. 당신 만날 때마다 매번 죽고 싶다고 말하는 건 당신이 너무나 소중하단 뜻입니다. 단 하나 목숨으로 당신 우주처럼 사랑하고 싶지만 그에 못 미칠 때 절망합니다. 당신 또한 단순히 절 사랑하는 게 아니라 제게 삶의 가장 빛나고 화려한 생명의 순간을 죽음으로 주신다는 걸 압니다. 청춘이 죽고 삶이 죽어지지 않는 거라면 우리 사랑 이토록 슬프고 간절하진 못할 겁니다. 아시겠지요? 전 매순간 제 죽음으로 당신 삶을 불태우듯 사랑합니다.
(김하인·소설가, 1962-)


+ 쉬

그의 상가엘 다녀왔습니다.

환갑을 지난 그가 아흔이 넘은 그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생(生)의 여러 요긴한 동작들이 노구를 떠났으므로, 하지만 정신은 아직 초롱 같았으므로 노인께서 참 난감해 하실까봐 "아버지, 쉬, 쉬이, 어이쿠, 어이쿠, 시원허시것다아" 농하듯 어리광 부리듯 그렇게 오줌을 뉘였다고 합니다.

온몸, 온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듯 아, 몸 갚아드리듯 그렇게 그가 아버지를 안고 있을 때 노인은 또 얼마나 더 작게, 더 가볍게 몸 움츠리려 애썼을까요. 툭, 툭, 끊기는 오줌발, 그러나 그 길고 긴 뜨신 끈, 아들은 자꾸 안타까이 땅에 붙들어매려 했을 것이고 아버지는 이제 힘겹게 마저 풀고 있었겠지요. 쉬-

쉬!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
(문인수·시인, 1945-)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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