쑥 뜯기
※ 2026.6.8. 고령신문 게재
손 원
봄이 오면 산과 들은 가장 먼저 향기로 계절을 알린다. 눈으로는 연둣빛이 먼저 보이지만, 코끝으로는 쑥 향이 먼저 다가온다. 흙냄새와 햇살를 머금은 그 풋풋한 향은 어린 시절의 기억까지 끌어낸다. 논두렁이며 밭둑, 냇가와 제방 어디든 쑥은 지천이었다. 가난했던 시절에는 배고픔을 달래 주던 구황식품이었고, 세월이 흐른 지금은 건강을 챙기는 귀한 먹거리가 되었다. 시대는 변했지만 쑥의 향기만은 변함없이 사람 곁을 지키고 있다.
봄철 쑥 채취는 우리 집의 중요한 연례행사다. 손주들은 아침대용식으로 쑥절편을 잘 먹는다. 부드럽고 쫄깃한 떡에서 은은하게 풍기는 쑥 향을 좋아한다. 입맛 까다로운 아이들이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래서 해마다 봄이면 일 년 먹을 쑥을 마련해야 한다. 제철에 뜯은 쑥을 데쳐 물기를 짜낸 뒤 둥글게 뭉쳐 냉동실에 넣어 둔다. 그리고 수시로 꺼내 쌀과 함께 방앗간에 맡기면 푸른빛 도는 쑥절편이 만들어진다. 한 번에 서너 되의 쌀과 쑥을 넣어 만든 절편은 냉동 보관해 두었다가 아침마다 몇 개씩 꺼내 손주들에게 먹인다.
몇 해를 그렇게 먹여 보니, 이것이야말로 값비싼 보약보다 나은 자연 건강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섬유질이 풍부해 속이 편하고, 달지 않아 부담도 없다. 무엇보다 손주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 절로 흐뭇하다. 음식이란 단순히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먹이는 일임을 새삼 느끼게 된다.
그동안 쑥 채취는 거의 아내 몫이었다. 해마다 팔공산 친구네 텃밭이며 들녘을 찾아다니며 한두 차례씩 뜯어 왔다. 그러나 올해는 사정이 달랐다. 봄날이 유난히 짧게 지나갔고, 이런저런 모임까지 겹쳐 쑥 뜯을 시간이 부족했다. 사월 말경 아내는 친구들과 한 번 다녀온 것이 전부였다. 그 양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자칫하면 채취 시기를 놓칠 판이었다.
결국 내가 나서기로 했다. 평소라면 “당신이 더 잘 알잖아” 하며 뒤로 물러섰겠지만, 올해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손주들 아침거리도 걱정이었지만, 늘 혼자 애써 온 아내의 수고를 조금이라도 덜어 주고 싶었다. 가족을 위한 일에는 결국 누군가의 땀과 정성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오월 셋째 주 토요일, 나는 혼자 강정보로 향했다. 디아크 주변에 차를 세우고 보니 넓은 정원이 온통 쑥밭처럼 보였다. 사람들 왕래가 많고, 혹시나 뿌린 잔디 관리 약품이 마음에 걸려 잠시 망설였다. 그래도 가장자리에는 제법 싱싱한 쑥이 눈에 띄었다. 그때 지나가던 한 사람이 햇볕 잘 드는 남쪽 편을 알려 주었다. 강가 쪽은 뱀이 많고, 산란기라 위험할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 말을 듣고 욕심을 접었다. 건강 챙기려다 위험을 자초할 일은 아니었다.
그날 날씨는 초여름 같았다. 한낮 기온이 삼십 도 가까이 오른다 했고 자외선도 강했다. 모자를 눌러쓰고 얼굴에는 자외선 차단제를 발랐다. 이미 철이 조금 지나 누렇게 변한 쑥도 많았지만, 햇빛 아래서 부드러운 초록빛 어린 쑥을 골라 가위로 윗부분만 잘라 냈다. 처음에는 서툴렀지만 점점 손에 익었다. 더운 줄도 모르고 두 시간을 정신없이 뜯었더니 쇼핑백 하나가 가득 찼다. 욕심이 생겨 하나를 더 채웠다. 하지만 나중에 집에서 다듬을 때 문제가 생겼다. 너무 서둘러 자른 탓에 잡초와 누런 잎이 많이 섞여 있었다.
아내는 두 시간 넘게 앉아 잡티를 골라냈다. 그러면서도 타박보다는 웃으며 말했다. “양이 조금 적더라도 다음에는 깨끗하게 뜯어 오면 좋겠네.”
그 말에 미안하면서도 정겨운 웃음이 났다.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서로의 서툼을 다듬어 주는 일인지도 모른다.
이튿날 일요일에도 나는 다시 집 근처 제방길로 나갔다. 산책길 옆 유휴지와 배수로 주변에 쑥 군락이 제법 있었다. 도로는 차단벽으로 막혀 있어 차량 먼지도 적었고 사람 발길도 드물었다. 햇볕을 듬뿍 받은 쑥들이 도톰하게 자라 있었다. 허리를 굽혀 한 포기씩 잘라내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두 시간쯤 지나자 쇼핑백이 다시 가득 찼다.
이틀 동안 모은 쑥은 모두 세 봉지나 되었다. 제법 든든한 양이었다. 다음 날 시골 가마솥에 장작불을 지펴 한꺼번에 데쳤다. 팔팔 끓는 물에 쑥을 넣자 순식간에 초록빛 향이 피어올랐다. 마당 가득 퍼지는 쑥 냄새는 봄의 정수 같았다. 그 향을 맡고 있노라니 어린 시절 어머니가 가마솥 앞에서 쑥국을 끓이던 모습까지 떠올랐다. 세월은 멀리 흘렀어도 냄새 하나는 기억을 한순간에 불러낸다.
데친 쑥은 물기를 빼 냉동실 여러 칸에 나누어 넣었다. 아내는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정도면 손주들 일 년은 먹이겠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묘한 뿌듯함이 밀려왔다.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니지만, 가족의 일 년 먹거리를 마련했다는 안도감이 마음을 푸근하게 했다. 젊은 시절에는 돈 버는 일이 가장 큰 역할이라 여겼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가족을 위해 함께 움직이고, 작은 수고를 나누는 일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쑥은 흔한 풀이다. 하지만 그 흔한 풀 한 줌에는 계절의 향기와 가족의 건강, 그리고 살아온 세월의 정이 함께 들어 있다. 허리를 굽혀 땀 흘리며 뜯어 온 쑥은 단순한 나물이 아니라 마음의 양식이었다. 손주들이 내일 아침에도 여느때와 같이 쑥절편을 맛있게 먹겠지만, 그 떡 속에는 할머니의 손길과 할아버지의 땀이 함께 스며 있는 사랑의 보양식이면 좋겠다.
봄날 들녘에서 맡은 쑥 향은 오래 남는다. 아마도 그것은 단순한 풀 냄새가 아니라 가족을 향한 사랑의 냄새이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