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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원 수필(삶과 채움)

작성자sunbee|작성시간26.06.10|조회수14 목록 댓글 0

                     삶과 채움
※ 2026.6.9. 영남경제신문 게재
                                           손 원

누구에게나 매일 해야 할 일이 있다. 직장인은 직장의 일이 있고, 농부는 농사가 있으며, 학생은 공부가 있다. 설령 백수라 하더라도 하루를 보내는 동안 몇 가지는 반드시 한다. 미뤄둔 서랍을 정리하기도 하고, 산책을 하거나, 전화 한 통을 하거나, 밥 한 끼를 챙겨 먹는다. 살아 있다는 것은 결국 무엇인가를 하며 시간을 채워간다는 뜻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는 모두 인생이라는 커다란 항아리 하나를 품고 사는지도 모른다. 그 항아리는 태어나는 순간 빈 채로 주어진다. 그리고 사람은 평생에 걸쳐 그 안에 무엇인가를 담는다. 기쁨도 넣고, 후회도 넣고, 사랑과 욕심, 성취와 좌절도 함께 넣는다. 누구는 큰 국자를 사용하고, 누구는 작은 숟가락을 사용하지만 결국 모두는 저마다의 항아리를 채워간다.

그 항아리는 단숨에 채워지지 않는다.
마치 물시계가 일정한 속도로 흐르듯, 인생 또한 정해진 시간 속에서 조금씩 흘러간다. 하루 분량의 삶이 있고, 한 달 분량의 책임이 있으며, 일 년 분량의 성장이 있다. 그래서 삶은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작은 채움으로 완성된다.

사람들은 흔히 거창한 성공만을 성취라 생각한다. 큰돈을 벌거나 높은 자리에 오르는 일만 의미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실상 인생은 그렇게 거대한 사건들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소소한 일상의 완수가 삶의 대부분이다. 오늘 해야 할 일을 끝냈다는 안도감, 누군가와의 약속을 지켜냈다는 뿌듯함, 가족을 위해 밥상을 차려냈다는 만족감 같은 것들이야말로 삶의 실제적인 성취다.

어릴 적 방학숙제를 떠올리면 쑥쓰럽다기 보다 한 컷의 교훈으로 다가온다. 특히 일기 쓰기가 가장 큰 부담이었다. 밀려 있는 숙제를 없애고 싶어서 이틀 동안 한 달 치 일기를 몰아서 쓴 적이 있다. 내용은 뻔했다. “오늘은 날씨가 좋았다.” “친구와 놀았다.” “집에서 쉬었다.” 비슷한 문장이 반복되니 누가 봐도 한꺼번에 쓴 티가 났다. 하지만 그때는 숙제를 끝냈다는 홀가분함이 좋았다.

돌이켜 보면 그것은 삶을 너무 서둘러 소비한 방식이었다. 인생은 그렇게 한꺼번에 몰아 써버리듯 살아서는 안 된다. 천천히, 살뜰히, 하루하루 채워가야 한다. 서둘러 비워낸 시간은 낭비로 이어지지만, 정성껏 살아낸 시간은 오래 향기를 남긴다.

내 침실에는 늘 큼직한 달력이 걸려 있다.
농협에서 나눠주는 달력인데, 24절기와 간지가 적혀 있어 농사 일정 챙기기에 좋다. 나는 그 달력에 한 달 스케줄을 적어 둔다. 가족생일, 모임일, 농사 시기, 지인과의 약속 같은 것들이다. 나이가 들수록 기억보다 기록이 더 긴요함을 절감한다.

그 스케줄들 가운데는 기다려지는 일도 있고, 부담스러운 일도 있다. 가기 싫지만 가야 하는 자리도 있으며, 마음 설레는 만남도 있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한 달이 지나고 달력을 넘길 때면 묘한 충만감이 든다. “이번 달에도 할일을 충실히 이행했구나.” 라는 마음 때문이다.

그 달력은 단순한 일정표가 아니다.
한 달의 삶이 담긴 기록이며, 짧은 일기장이다. 특히 농사에는 그 가치가 더 커졌다. 마음에 두고 있는 작물일지라도 가끔은 파종 시기를 놓쳐 낭패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해 달력에 적어 둔 메모를 보면 언제 씨를 뿌렸고, 언제 수확했는지가 그대로 남아 있다. 삶은 이렇게 기록 속에서 경험이 되고, 경험은 다시 다음 삶의 지혜가 된다.

모아둔 달력만 해도 몇 부는 된다. 달력에 적힌 몇 글자지만 지난 날을 반추하게 된다. 만약에 태어 날 때 부터 기록된 달력이 있다면, 얼마나 소중한 인생의 연대기가 되었을까. 칠십 권의 달력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면, 그간 나의 인생역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을 것이다.

비록 그렇게 완벽하게 기록하지는 못했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그 시간들을 실제로 살아냈다는 사실이다. 어른으로 성장했고, 가정을 이루었고, 수만가지의 희노애락을 겪었다. 그것 모두가 내 삶의 채움이었다. 그러니 삶을 단순히 허무라고만 말할 수는 없다.

사람은 결국 자신만의 항아리를 완성하며 살아간다. 그 안에는 향기로운 기억도 있고, 부끄러운 흔적도 섞여 있다. 때로는 자랑스럽고, 때로는 들추기 싫은 장면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인간다운 삶이다. 완벽하게 향기로게 항아리를 채운 사람은 없다. 다만 조금 더 따뜻하고, 조금 더 정직한 내용을 담기 위해 애쓸 뿐이다.

그래서 함부로 남의 삶에 돌을 던질 수 없다. 누구나 저마다의 무게를 견디며 항아리를 채워왔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화려한 꽃으로 채웠고, 어떤 이는 질퍽한 진흙 속에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고 살아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번듯하게 보이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성실히 자신의 삶을 살아냈느냐다.

요즘은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거의가 유골을 화장한 재를 항아리에 담는다. 어쩌면 그 작은 항아리 속에는 단순한 재가 아니라 한 인간이 평생 이루어낸 성취의 흔적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울고 웃으며 채워온 세월, 사랑하고 견디며 살아낸 시간들이 마지막으로 응축되어 그 안에 담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매일 무언가를 이루며 산다.
그것이 비록 아주 작은 일일지라도 삶의 한 조각 성취다. 오늘 하루를 무사히 살아낸 것, 누군가를 위로한 말 한마디, 포기하지 않고 견뎌낸 시간 하나도 모두 채움이다.

삶은 거창한 성공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하루하루 자신의 항아리를 성실히 채워가는 과정 자체가 곧 삶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인생은 결코 허무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성취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언젠가 저 세상에서 나를 부르는 날이 오더라도, “나는 내 항아리를 끝까지 채우고 갈거야.” 하고 담담히 말할 수 있다면, 그것 또한 괜찮은 삶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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