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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란도란 한마디

체코 프라하 성 비투스 대성당 .현 대통령관저로 일부 사용중(26.05.14)

작성자청노루|작성시간26.06.07|조회수41 목록 댓글 0

체코 프라하 성 비투스 대성당

 

    성당건설은 14세기 카를 4세 시대에 시작되어 약 600년에 걸쳐 완성되었다고 한다.

  뾰족한 고딕양식 첨탑과 매우 높은 수직구조로 정면으로 보이는 거대한 장미 창문위와 파사드에 가득한 성경 장면, 성인조

 각이 돋보인다. 체코 왕들의 대관식 장소이고 성 비투스,성 바츨라프 등 체코 수호성인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으며 체코 건축

 의 최고 걸작이다.

스테인드글라스 

성당안 대형 파이프 오르간

바로크 장식과 금색 천사상이 장식되어 있다.

체코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오르간으로 지금도 미사, 국가 행사, 연주회때 실제로 사용 된다고.

체코나 폴란드등은 성당안을 공개적으로 사진을 찍를수 있음, 알리는 목적으로 목적 즉, 대대적으로 홍보하여 알리고 있는 것은 

예를 들자면, 오스트트리아 멜크 수도사 수도원은 외부 경관만 사진을 짝을수 있고 내부는 사진을 찍을수 없게 감시원을 

배치하여 철저하게 단속한다. [가이드 말에 따르면 체코는 400여년 지배를 받아 빠른 시일내에 세계적으로 알려야 하기

때문일수도 있다고]

성 비투스 대성당(성 비투스 바츨라프 아달베르트 대성당)내부이다.

거대한 스테인드글라스 가운데 창은 '알퐁스 무하'가 디자인 했다고 한다.

성 비투스 성당의 장미창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인상적이다.

성당 안에는 체코 수호성인 성 바츨라프 예배당과 왕실 묘지 ,보헤미아 왕관 보관실

등 이 있어  체코역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 공간이다.고

벽 중앙의 거대한 문장은 보헤미아(체코 왕국)의 국장이다.

두마리 사자가 중앙 방패를 받치고 있다.

 

 

 

 

 

성 비투스 성당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조 시절인 1638년에 예수회에서 약 100년에 걸쳐 건립하였다.

그 당시 유행한 3개의 회중석을 둔 스타일 대신에 이태리 베니스에 기초한 유럽의 현대건축기법을 도입하였다.

그리고 건물의 지붕 또한 둥근 원형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유럽에서 보기 드문 형태의 성당이다.고 한다.

 

프라하성 제 2중정 둥근 흰 건물은 성 십자가 예배당이고, 오른쪽으로 보이는 분수는 콜의 분수

노란색 바로크 건물들로 둘러싸인 넓은 광장이다. 

 

현재 체코 대통령 관저로 사용 / 근무중 (오른쪽 국기가 계양 되었으면 근무중 / 없으면 출타중 )

프란츠 카푸카(1883.7.3~1924.6.3) 의 [변신]  N22 (작업실  현재는 서점 및 상점)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령이었던 지금의 차코에서 태어나 독일어를 쓴 유대인 소설가 

                   출생 : 1883년 7월 3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프라하 

                   사망 : 1924년 6월 3일 (향년 40세)오스트리아 -제 1공화국 클러스터노이부로크 키얼링 [폐결핵으로 사망]

                   국적 :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1883-1918)

                              체코슬로바키아(1918-1924)

                       사후에 발표된 소설들 덕에 특히 실존주의자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으며 역사에 이름을 남김 

[ 변신 ]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잠자리 속에서 한 마리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있음을 발견한다. "

쓸모와 존재의 문제 ? - 책을 구해서 보거나 인터넷 참조 요망

체코 프라하 성 

 

성 비투스 성당을 나와 버스 타러 가면서 찍은 사진 

새로 지은 프라하성

 

카를 4세가 귀국했을 때 프라하는 도사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황폐해진 상태였다고 한다. 외할아버지 바츨라프 2세 시대에

불이 나는 바람에 무너진 프라하성은 아무도 수리하지 않아 폐허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머무를 곳이 없어 구시가지에 있는 귀족

의 집에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는 현실을 개탄했다.

"나는 어릴때부터 화려한 파리의 궁전에서 사는데 익숙해 졌어. 그곳과 비교하면 푸라하의 현실은 너무 초라해. 게다가 파리에서

결혼한 아내 블랑카를 프라하로 데려오기로 했는데 궁전 하나 없는 상황을 보여줘야 한다는 게 너무 민망하군'

카를 4세는 어머니의 채취가 흐르는 프라하를 좋아했다. 아무리 현실이 딱하더라도 이 곳을 버리고 떠날 생각은 처음부터 갖고 있

않았다. 그는 서둘러 궁과 궁전을 재건하기로 했다. 성을 복구 할려먄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아내에게는 "불편하더라도 참고 평법한 저택에서 잠시 지내자"고 양해를 구한 다음 프라하에 오라고 했다. 다행이 아내는 남편의

뜻을 이해했고, 힘든 현실에서도 보헤미아 사람들과 잘 어울려 지냈다.

 

카를 4세가 궁과 궁전 건축을 서둘러야 할 이유는  한가지 더 있었다. 바로 아버지의 새 부인 , 그로서는 새 어머니였다.얀은 첫 아

내인 엘리쉬카가 죽은 뒤에도  4년 동안 부인 없이 혼자 살았다. 이때 프랑스 왕가가 중매쟁이로 나섰다. 그들이 소개한 신부는 겨

후 열네 살이었던 부르봉 자작의 막내딸 베아트리체였다. 얀과는 스물네 살 차이였고 카를  4세 보다도 네 살 아래였다.  

 

프라하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던 베아트리체는  결혼직후부터 향수병에 시달렸다. 세상 물정 이라고는 하나도 모르는 철부지 소녀

파리는 물론이거니와 부르봉과 비교해도 시골이나 미찬가지였던 프라하에서 사는 건 힘들 수밖에 없었다. 얀은 아들에게 성과

궁전 재건을 서두르라고 재촉했다.

평민이 사는 오두막이나 그저 그런 귀족이 거주하는 평범한 주택도 아이고 , 왕부부가 살아야 할 궁전을짓는 일이 하루아침에 이

루어 질수는 없었다. 궁전도 없는 프라하생활을 도저히 참지 못하게 된 베아트리체는 겨혼 3년 뒤인 1337년 성비투스대성당에서

여왕 대관식을 치르자 마자 어린 아들조차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카를 4세는 프라하 성과 궁전을 적당히 재정비 한 뒤 들어가 살았다. 왕족이 살기에 완벽한 궁전은 아니었지만 참고 지낼만한 정

도는 될수 있었다. 구왕국이 현재 모습으로 갖춘 것은  이후 여러 왕이 끊임없이 손을 댄 덕분이었다.

 

아버지가 돌아 가신뒤 1346년 국왕 자리에 오른 카를 4세는 어머니가 생전에 당부하던 일을 잊지 않았다. 드는 어머니의 영혼이

나  마찬가지인 보헤미아를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경제, 군사, 문화의 강국으로 만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즉위하고 첫 10년 동안 보헤미아 역사상  가장 활발하게 다양한 건설 작업을 진행한다. 프라하성과 궁전은 첫 작품이었다. 여기에

카를 다리 건설을 사업도 시작했다. 나중에는 성 비투스 대성당, 신시가지, 카를 대학교 ,카를슈타인 성등 체코에서 내놓라하는 많

은 건축물을 새로 만들거나 보수 했다.   

 

카를 4세 덕뷴에 프라하는 유럽 최고 도시로  보헤미아는 유럽에서 가장 발전한 나라로 성장 할수 있었다.

카를 4세가 1378년 62세 을 일기로 세상을 떠나 성 비투스 대성당에  묻힐  때까지 보헤미아 프라하는 40년동안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체코인은 오늘날 까지도' 체코의 아버지'라고 그가 통치했던 시기를 보헤미아의 황금기라고 부른다.

[ 사진은 직접 촬영/ 글은 인터넷 발췌해서  옮김 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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