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및 왕을 호위하는 군대 내금위(금군)

작성자역사를왜곡하지말라|작성시간07.01.18|조회수2,150 목록 댓글 0
궁궐 수비 병력은 일차적으로 왕권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았다. 또한 궁궐은 외국 사신들이 드나들

고 백성들이 우러러보는 곳이므로 수비 병력은 무력을 과시하는 의장병으로서의 성격도 겸하였

다. 대궐문을 지키는 수문병을 비롯하여 정전 주변에 근무하는 병력들은 무술 실력이 뛰어날 뿐

만 아니라 출신 성부나 신체 조건도 우수하였다.

궁궐 수비를 담당한 사람들은 비정규병과 정규병으로 구분되었다. 비정규병은 왕, 왕비, 후궁, 세

자, 배디 등이 거처하는 생활영역을 호위하는 사람들로, 100명 내외의 내시와 액정서 소속의 별감

들이었다. 이외의 지역은 정규 병력이 구역을 나누어 수비하였다. 정규 병력은 궁궐수비를 전담하

는 금군禁軍과 그외의 일반병으로 나뉘었으며, 모두 합하여 약 2,000여명 정도의 병력이 입직(入

直:궐내 근무)하여 각각의 구역을 경비하였다. 금군은 궁궐 수비를 전담하는 정예군으로 대궐 정

문 안쪽에서 정전까지 궁궐의 외전 지역을 담당하였다. 그래서 무예가 탁월하고 신체 조건이 우수

한 사람들만이 선발되었고, 대우가 좋아 양반 출신의 금군도 많았다.

조선 초기의 금군은 내금위內禁衛, 겸사복兼司僕, 우림위羽林衛의 세 부대로 구성되었다. 각각의

부대는 종 2품의 내금위장, 겸사복장, 우림위장이 통솔하였으며 대궐 정전의 행랑에 지휘부를 두

었다. 금군은 영조 31년(1755)에 용호영龍虎營으로 개칭되었는데 그 수는 시기별로 변동이 많았

다. 조선 초기에는 총인원이 300명 정도였는데, 후기에는 1,000명이 넘을 때도 있었다. 이들은 서

로 번(番:차례)을 나누어 100염 명씩 궁궐에 들어가 경비를 섰다.

금군과 함께 궁궐을 수비하는 일반 병력으로는 중앙군의 핵심 전력인 조선 초기의 오위와 조선 후

기의 오군영이 있었다. 일반 병력은 궐내 곳곳에 위치한 경비 초소와 대궐문에 나누어 궁궐을 수

비했다. 일반 병력이 담당하는 궁궐 안의 경비 초소 중에서 중요한 곳은 대궐의 4문 부근에 위치

한 사소(四所:동소, 서소, 남소, 북소)였다. 사소는 대궐 정문 앞의 외소와 함께 오소가 되었고,

오소에는 오위 또는 오군영에서 파견된 병력들이 배치되어 경비를 담당하였다. 조선시대 중앙군

의 조직이 오위나 오군영으로 된 것은 대궐을 다섯 방향에서 수비하는 제도와 관련이 있었는데,

이런 대형은 유사시에 즉시 오위 진법으로 변형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궐내의 사소에는 도총부

(都摠府:오위의 지휘부)의 위장(衛將:종 2품 무반직)과 부장(部將:종 6품 무반직)이 지휘관으로

근무하면서 일반병들을 감독하였다. 특히 사소의 부장은 궁궐 곳곳에 위치한 초소를 주야간에 수

시로 순찰하면서 경비 상황을 점검하였다.

대궐문을 지키는 수문장과 수문병들도 궁궐 수비의 중요한 병력이었다. 특히 궐문을 지키는 수문

병들은 대궐을 출입하는 수많은 사람을 상대해야 하므로 신체 조건이 좋은 병사들이 담당하였다.

수문병의 수는 대궐문의 규모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났다. 대궐의 동서남북에 위치한 4대문은 3문

으로 구성되었는데, 가운데 문에 30명, 좌우 협문에 20명씩, 총 70명 정도의 수문병이 각각 배치

되었으며, 이들은 수무장이 지휘하였다. 또한 중문에는 20명, 소문에는 10명의 병력이 배치되었

다. 이렇게 조선시대 대궐에는 궐문을 지키는 수문병만도 수백 명이 넘었다. 이외에 궐내각사에

도 수비병들이 배치되었다.

궁궐의 수비 병력을 지휘하기 위해 대궐 안에 도총부와 내병조를 설치했다. 창덕궁의 경우 내병조

는 정전인 인정전 남쪽에, 도총부는 침전인 대조전 북서쪽에 위치했다. 도총부에는 오위 도총부

의 당상관 2명이 입직하여 궐문과 궐내 사소의 경비 병력들을 통솔하였고, 내병조에는 병조의 당

상관 1명이 근무하면서 금군을 지휘했다. 왕은 도총부와 내병조를 각각 분할, 통솔함으로써, 궐내

의 군사 반란에 대비하였다.

왕과 왕비의 침전이 있는 내전 주변에는 선전관과 취라치가 주야로 항상 대기하였다. 선전관은 도

총부와 내병조의 지휘관들을 소집하거나 도성 내의 병력들을 비상 동원할 때 연락을 담당하였고,

취라치는 비상 소집이 있으면 나팔을 불었다. 도총부와 내병조의 당상관을 비롯하여 내금위장, 겸

사복장, 우림위장, 궐내 사소의 위장과 부장, 수문장 등은 날마다 병조에서 성명을 기록하여 왕

의 결재를 받았다(병조에서 궐내에 숙직하는 지휘관의 성명, 근무지, 근무 시간 등을 적어서 왕에

게 보고하는 문서를 성기省記라고 한다). 왕이 궐내 군사 지휘관의 인적 사항과 근무 위치, 근무

시간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와 함께 병조에서는 매일 군호(軍號:군사 암호)를 왕에서

보고하여 결재를 받았다. 궁궐의 야간 수비를 위해 대궐문은 초저녁에 닫았다가 해뜰 때 다시 열

었다. 대궐문의 열쇠는 승정원에서 관리하였는데, 도총부의 당하관이 액정서의 관리와 함께 승정

원에 와서 열쇠를 받아 가 일을 완수한 후 다시 와서 반납하도록 하였다.

왕은 늘 궁궐 안에만 머물러 있는 것도 아니고 군사 훈련, 왕릉 참배, 온천욕 등을 위해 수시로

한양을 떠났다. 이때 궁궐 수비를 위해 도성 안팎에는 비상 계엄이 발령되었다. 왕의 행차시 궁

궐 수비는 유도대신留都大臣, 수궁대장守宮大將, 유도대장留都大將이 책임졌다. 유도대신은 왕이

수도를 비웠을 때 수도 한양의 행정적 총책을 맡았고, 수궁대장은 궁궐 안의 수비를, 유도대장은

궁성 밖과 한양의 경비를 담당하였다. 유도대신과 유도대장은 궁궝 밖에서 비상 숙직을 하고 수궁

대장은 궁궐 안에서 비상 근무를 하였다. 만약 왕이 궁궐을 비운 사이에 궁중에서 쿠데타가 발발

한다면, 일차적인 진압의 책임은 이 세명에게 있었다. 이들은 궐 안과 밖으로 나뉘어 서로를 감

시, 견제하였다.

유도대신, 수궁대장, 유도대장은 보통 국왕과 대신의 협의에 의하여 선정되었다. 특히 궁중 안에

서 숙직하는 수궁대장은 보통 왕의 장인인 국구國舅가 담당하였다. 유도대신과 유도대장은 각각

병력들을 동원하여 궁궐 정문 앞에 좌우로 나누어 진을 쳤다. 궐 밖에서 쿠데타군이 공격해 올 경

우, 이들을 진압할 책임이 유도대신과 유도대장에게 있었다. 수궁대장은 궁궐 안에서 비상 근무하

면서 궐 내의 상황을 감독하였다. 한양 밖의 왕에게는 유도대신, 수궁대장, 유도대장이 각자 따

로 매일 근무 상황을 보고하였다. 이외에도 왕은 궁궐과 한양의 상황을 확인하기 위하여 수시로

감찰관을 보냈다.

조선 500년간 왕이 한양을 비우는일은 꽤 많았지만, 그 기간에 일어난 쿠데타는 한 번도 없었다.

이는 조선시대 궁궐 수비 제도가 얼마나 완벽했는지를 증명해 준다.

자료협조:국사편찬위원회,역사관 수정:쪽발쉐키,역사를왜곡하지말라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