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비 최씨[寧妃 崔氏] - 고려 제 32 대 우왕의 제 2 비[妃]
1. 우왕이 폐위되어 강화도로 유배될 때 그녀가 수종하였음.
영비 최씨는 최영의 딸로 1388년 3월에 왕비에 간택되어 입궁하였다. 그녀가 왕비로 간택된 시기가 최영과 우왕의 요동정벌이 감행되던 시점이라는 사실은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다. 당시 우왕은 권력의 핵심에 서 있던 최영의 보필이 절실하였다. 그는 요동정벌 이후에 혹 발생할지도 모르는 혼란 속에서도 자신을 보필해줄 든든한 안전장치가 필요했던 것이다.
사실 최영은 자신의 딸은 우왕에게 시집보내기를 원치 않았다. 영비 최씨는 측실의 소생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왕은 간곡하게 영비를 원했고, 이에 최영은 삭발을 하고 절로 들어가겠다는 표현을 하면서까지 우왕의 요청을 거절했지만 우왕은 필사적이었다. 결국 우왕은 자신의 뜻대로 영비 최씨를 왕비로 맞아들였다.
우왕은 영비를 맞아들인 뒤에 최영의 집에 자주 출입하였다. 그 이전에는 최영의 곧은 성격을 싫어하여 전혀 발걸음을 하지 않던 그였다. 이는 영비가 최영과의 관계를 보다 긴밀하게 하기 위한 우왕의 징검다리 구실을 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말하자면 우왕이 필사적으로 영비를 맞아들인 것은 정략적인 행동이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런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해 6월 이성계와 조민수가 요동정벌군 5만을 이끌고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우왕을 폐위시켰기 때문이다. 이 때 영비는 우왕과 함께 강화도에 유배되었고, 또한 이듬해 11월 우왕이 강릉으로 이배되자 영비도 함께 이배되었다. 그리고 그해 12월에 우왕이 살해되자 그녀는 우왕의 시체와 함께 생활했다고 전해온다.
1. 아버지 : 철원부원군 최영
2. 어머니 : 최영의 측실
신우 무진 14년(1388)
3월 우가 최영의 딸을 맞아들였다. 처음에 우가 최영의 딸을 들이고자 사람을 시켜 말하니, 영이 불가하다고 여겨 이뢰기를, “신의 딸이 못생겼고, 또 정실 소생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 측실(側室)에 두고 있으니 지존(至尊)의 배필이 될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반드시 들이고자 하신다면 노신이 머리를 깎고 산으로 들어가겠습니다." 하고 울며 굳이 거절하였다. 부하 정승가(鄭承可)ㆍ안소(安沼) 등이 우의 뜻에 영합하여 마침내 영의 뜻을 꺾었다. 이날 우가 상의(尙衣)에서 옷을 늦게 바쳤다 하여 별감 강의(康義)와 원윤해(元允海)를 베었다.
신우 무진 14년(1388)
2월 안숙노(安叔老)의 딸을 봉하여 현비(賢妃)로, 소매향(小梅香)을 화순옹주(和順翁主)로, 연쌍비(燕雙飛)를 명순옹주(明順翁主)로 삼았다. 최씨를 봉하여 영비(寧妃)로, 또 신아(申雅)의 딸을 봉하여 정비(正妃)로, 왕흥(王興)의 딸을 선비(善妃)로 삼았다. 이근비(李謹妃)로부터 이하 최영비(崔寧妃)ㆍ노의비(盧毅妃)ㆍ최숙비(崔淑妃)ㆍ강안비(姜安妃)ㆍ신정비(申正妃)ㆍ조덕비(趙德妃)ㆍ왕선비(王善妃)ㆍ안현비(安賢妃)와 소매향ㆍ연쌍비ㆍ칠점선(七點仙) 등 세 옹주(翁主)의 여러 궁에 공급하려는 물품은 창고가 모두 비었으므로 미리 3년 동안의 공세(貢稅)를 징수하였으나 부족하여 또 가외로 더 거두니 그 폐단이 극도에 달하였다.
신우 무진 14년(1388)
6월 경술일에 우를 강화로 추방하였다. 처음에 모든 장수들이 영비를 내쫓기를 청하니 우가 이르기를, “만일 영비를 내쫓는다면 나도 함께 나가겠다." 하였다. 이에 여러 원수가 군사를 거느리고 대궐을 지키면서 강화로 나가기를 청하였다. 우가 할 수 없이 나와서 채찍을 잡고 안장에 걸터앉으며 이르기를, “해가 이미 저물었구나." 하니, 측근들이 꿇어 엎드려 울면서 응답하는 자가 없었다. 드디어 영비ㆍ연쌍비와 함께 회빈문(會賓門)을 나와서 강화로 향하였다. 백관(百官)이 전국보(傳國寶)를 받들어 정비(定妃)에게 바쳤다.
공양왕 기사 원년(1389)
12월 왕이 여러 재상에게 차례로 물으니 모두 잠잠히 말이 없었는데, 홀로 우리 태조가 아뢰기를, “이 일은 용이하지 않습니다. 이미 강릉(江陵)에 안치시켰다고 중국 조정에 알렸으니 중도에 변경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신 등이 있사오니, 우가 비록 난을 일으키고자 한들 무슨 걱정이겠습니까."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우가 죄 없는 사람을 많이 죽였으니, 스스로 죽음을 당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지신사(知申事) 이행(李行)에게 명하여 교서를 내리고, 정당문학 서균형(徐鈞衡)을 강릉(江陵)으로 보내어 우를 베며, 예문관 대제학 유구(柳玽)를 강화(江華)로 보내어 창을 베도록 하였다. 우의 아내 최씨(崔氏)가 크게 울면서 말하기를, “첩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우리 아버지 최영의 허물이다." 하였다. 10여 일 동안 먹지 않고 밤낮으로 울며 밤에는 반드시 시체를 안고 자며, 쌀을 얻으면 번번이 정하게 찧어서 전(奠)을 드리니, 그때 사람들이 이를 불쌍하게 여겼다.
출처 : 고려사[高麗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