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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雜多한 야그

금강산 전설 23가지 모음

작성자무태안|작성시간25.12.16|조회수75 목록 댓글 0

 金剛山의 傳說


(1) 곰바위 傳說


옛날 毘盧峰마루에 百 年 묵은 곰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발바닥만 핥으며 긴긴 겨울밤을 자고 난 곰은 깨어나자 尋한 虛飢症을 느꼈다.
窟에서 나와보니 온 金剛山이 파릿파릿 봄빛을 띠기 始作하였는데 그 어디를 보나 軟豆빛 世界였다.
毘盧峰과 將軍城 골짜기에는 아직 흰 눈이 띄엄띄엄 깔려 있는데 그 아래 世尊峰, 玉女峰의 奇巖絶壁에는 진달래가 활짝 피어 꽃무늬 緋緞같이 아름다웠다. 곰은 한참 동안이나 눈을 껌벅이며 恍惚한 金剛山의 景致에 醉해서 서 있었는데 배고파 결딜 수가 없었다. 좀 무엇인가 찾아 療飢를 해야 되겠다고 생각한 곰은 입을 헤벌죽거리며 水晶峰 陽地를 向해 천천히 걸어갔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文珠潭 맑은 물 속에 도토리가 수북이 깔려 있는 것이 아닌가! 오랫동안 굶었던 곰은 맑은 물에 비친 구슬 같은 자갯돌을 지난해 가을에 떨어진 도토리로 잘못 보았던 것이다.
곰은 單숨에 삼켜 버릴 미련한 생각에서 있는 힘을 다하여 뛰어내렸다.
그런데 오랫동안 굶주린 탓인지 힘껏 내려 뛰노라 한 것인데 그만 文珠潭까지 이르지 못하고 絶壁 中턱 위에 떨어지고 말았다.
워낙 무거운 體重인지라 내려 뛴 힘에 뒷발이 바위 속에서 움푹 빠져 들어가 꼼짝달싹 할 수 없게 되었다.
아무리 용을 써도 뒷발이 빠져 나오지 않았다. 미련한 곰은 鈍重한 궁둥이를 바위에 붙인 채 주둥이를 헤벌름거리며 목을 길게 빼어 들고 文珠潭을 게걸스럽게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어찌하랴! 군침만 돌뿐, 입에는 아무것도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아, 배고프구나, 어떻게 하면 저 도토리를 다 먹을 수 있담?』 움직일 수 없게 된 몸이건만 곰은 조금도 한눈을 팔지 않고 물 속에서 어른거리는 「도토리」를 내려다 보고만 있었다.
時間은 흘렀으나 곰은 끝내 한 알의 도토리도 먹어보지 못한 채 돌로 굳어지고 말았다.
文珠潭 맞은편 中觀音峰 中턱 絶壁 위에 있는「곰바위」가 바로 毘盧峰의 곰의 化身이라고 한다.

(2) 구렁이 觀世音菩薩 ★ 參考文獻 ~ : 權相老傳士記

 

어느 때 어떤 중이 金剛山 구경을 갔는데 그는 좋은 念珠를 가졌었다.
須彌庵의 主僧은 그것을 貪내어 山으로 구경을 가자고 꾀어 어느 危險한 곳으로 引導하여 念珠는 뺏고 사람은 絶壁에서 밀어 떨어뜨렸다.
그 客僧은 絶壁에서 떨어져 내려가다가 무엇엔지 걸리어 죽지는 않았지마는 精神을 잃었다가 다시 깨어보니 까마득한 絶壁의 한 中턱의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다.

그러나 깍은 듯한 絶壁이라 올라갈 道理가 없었다.
마침 보니 돌틈에서 어마어마하게 큰 大蟒이 나와 落葉 위에 누우니 無數한 작은 뱀들이 四方에서 모여들어 큰뱀의 비늘을 들치고 피를 빨아먹고 갔다.
그러자 그 큰뱀은 사람의 말을 하며,
「스님!」하고 불렸다. 客僧은 놀라며 對答했다.
뱀은 다시,
「스님이 내말을 들으시면 내가 살려드릴 것이요, 듣지 않으면 내게 죽을 것이니 어떻게 하시려오.」 했다.
客僧은 살아야 겠기에 듣겠다고 對答였다.
뱀은 다시
「나는 前生에 楡岾寺 化主 아무개입니다. 그런데 절을 重修하고 施主에게 돈을 걷어가지고 절을 重修하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이 몸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아까 그 작은 뱀들은 모두 그 施主들로 큰 法堂 마루 밑에 묻고 貯蓄해 두었지마는 施主의 돈을 제대로 써주지 못해서 이 罪를 받고 있습니다. 스님께서 楡岾寺로 가서 그 돈을 찾아 절을 重修해 주시면 나는 이 몸을 벗을 수 있습니다.」
했다.

客僧이「그리하마.」
고 했더니 그 뱀은 돈을 묻은 場所와 돈의 額數를 仔細히 일러주며,
「그러면 내등에 업히시오.」
하고 허리를 치밀었다.
客僧이 그 위에 올라앉으니 뱀은 허리를 치밀어 絶壁위에 대어 주었다.
客僧은 楡岾寺로 바로 달려가서 大衆에게 절을 重修할 化主가 되겠다고 請했다.
거기서 承諾을 얻어 뱀에게 들은 대로 그 돈을 파내서 절을 一新 重修했다.
廻向하는 날에 內外 金剛山 各寺庵 主僧을 모두 請했더니 須彌庵 主僧도 왔다.
그 主僧은 이 化主를 보자 깜짝 놀라 어찌할 줄을 몰랐다.
化主는 쫓아나가 그 손을 잡고 웃으며,
「이러한 因緣이 到來하여 佛菩薩과 護法神이 그렇게 만든 것이지 그것이 어찌 스님의 本心이겠소. 安心하시오. 스님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이런 佛事를 할 수 있었겠소.」
하고 破惑을 하였다.
楡岾寺는 53佛의 數爻대로 化主가 나고 또한 重修를 한다고 한다.

(3) 九成洞 쑥밭 傳說 (月明首座 콩밭등 이야기)


九成區域은 金剛郡 蓬田리(쑥밭마을)에서 개울을 따라 南東쪽으로 金剛山 最高峰인 毘盧峯 (1,638m)과 잇달린 깊고 긴 골짜기이다.
이 區域은 上登峰, 玉女峰, 永郞峰, 毘盧峰의 等 뒤로 10如 km 펼쳐진 溪谷인데 鬱蒼한 숲과 奇巖怪石이 어우러진 가운데 아름답게 連이은 개울 景致가 溪谷美를 더하고 있다.
이 區域은 內金剛과 外金剛이 만나 境界를 이루는 곳이며, 下九成洞과 上九成洞, 그리고 진부골로 이루어져 있다.
內金剛에서 溫井嶺(857m)을 따라 外金剛을 向해 가다 보면 九成區域의 入口인 蓬田里가 나온다. 이곳에서 오른쪽 溪谷으로 2km 程度 들어가면 下九成洞에 이르게 된다. 下九成洞은 九成洞 골짜기의 첫 어귀인 검정沼부터 玉永瀑布까지를 包括하는 地域이다.
더 들어가면 골짜기에 雅淡하게 생긴 푸른 沼가 있는데 이를 ‘龍沼’라 한다.
여기서 좀 더 오르면 永郞峰과 凌虛峰 中間에 펼쳐진 ‘月明首座 콩밭등’이라고 하는 平平하고 비스듬한 高原에 이르게 된다. 高山地帶 特有의 갖가지 植物들이 茂盛한 숲을 이룬 가운데 철 따라 갖가지 꽃으로 裝飾되는 아름다운 곳이며, 內金剛 뒤를 환하게 내려다볼 수 있는 展望臺이기도 하다. 한便 九成區域 入口인 ‘쑥밭마을’과 옛날에 神仙이 콩 農事를 지었다는 ‘月明首座콩밭등’의 地名이 생겨난 由來와 關聯하여 이야기가 傳해오고 있다.

먼 옛날 淮陽고을에 ‘蓬田’이라고 하는 자그마한 마을이 있었다. 이곳에는 부지런하고 마음이 몹시 어진 사람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땔나무를 하기 위해 새벽밥을 먹고 九成洞 골짜기로 들어갔다. 길을 가던 途中 어느 개울가에서 흰 옷차림에 파란 고깔을 쓴 아리따운 少女를 만났다. 老人은 그 少女의 容貌와 姿態가 하도 예쁘고 아름다워서 自己도 모르게 少女의 뒤를 따라갔다.
그렇게 한참을 따라가다가 문득 앞을 보니 그 少女는 보이지 않고 깊은 골짜기에 자리 잡은 雅淡한 草堂만 보일 뿐이었다. 老人이 異常하여 草堂으로 들어가 四方을 두루 살펴보니 잘 다듬은 벼루 같은 바위가 눈앞에 있고 집 뜨락에는 그윽한 香氣와 아름다운 姿態를 뽐내는 꽃나무와 싱그러운 풀들이 자라고 있었다. 뜰 가운데에는 水晶같이 맑고 깨끗한 물이 흘러 흰 爆布와 푸른 潭沼를 이뤘는데 神秘롭고 아름답기가 그지없었다.
이 光景을 바라보던 老人은 문득 精神이 恍惚해져 우두커니 서 있었는데 갑자기 草堂 門이 열리더니 아름다운 處女가 나왔다. 그 女는 自己가 이 九成洞 골짜기에 사는 月明首座라고 하면서 老人을 반가이 맞이하였다. 그 뒤로 두 名의 處女가 나타나서 老人을 房으로 모셨다.
房 한가운데의 큰 床에는 香氣로운 술과 山海珍味의 按酒들이 놓여있었다. 老人은 處女들이 부어주는 술을 마시다가 時間이 어떻게 가는 줄도 모를 程度로 滿醉하였다. 그러다가 老人은 문득 집안 일이 걱정되어 나무를 해서 집으로 돌아가려 하였다. 그러자 處女들은 暫時만 기다리라고 挽留하더니 콩 몇 알을 손에 쥐고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房안에 있던 老人이 無心코 窓밖을 내다보니 草堂 뒤의 둔덕진 곳에서 處女들이 콩을 심고 있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이내 싹이 돋고 푸른 잎이 茂盛하더니 콩이 주렁주렁 달리고 今時에 누렇게 익는 것이었다. 老人은 속으로
“깊은 골짜기에 神仙이 산다고 하더니 저들이 바로 그런 분들이구나!” 하고 感嘆하였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소담하게 자란 콩대를 한 아름 안은 處女들이 房안으로 들여와서 그것을 까서 豆腐를 만들고 飮食을 차려서 老人에게 勸했다.

이렇게 老人은 處女들이 차려주는 飮食待接을 받으면서 時間 가는 줄도 모르며 놀다가 그들에게 고맙다는 人事말을 한 後 草堂을 떠나 마을로 돌아왔다. 그런데 分明히 아침까지 있었던 自己 집은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에는 雜草와 쑥대만이 茂盛할 뿐이었다. 老人은 氣가 막히고 한便으론 영문을 몰라 이웃집에 가서 물어보려 했으나 보는 사람들마다 모두 記憶에 없는 낯선 얼굴이었다. 老人은 하는 수 없이 지나가는 마을 사람을 붙들고 自己 집에 關해 물었더니 그가 하는 말이
“그때 살던 사람들은 다 늙어서 죽고 그 後孫들만이 이웃마을에서 살고 있소.”라고 하였다.
老人은 이 말을 듣고
“옛말에 神仙의 하루는 數百 年의 人間 世上과 맞먹는다고 하더니 九成洞 골짜기에서 하루의 神仙놀음에 어느덧 數百 年이란 歲月이 흐른 模樣이구나!”라고 嘆息하면서 이웃마을을 向해 떠났다. 以後 그 老人이 살던 蓬田마을을 “쑥밭마을”이라 부르게 되었고, 九成洞 골짜기의 神仙 이름이 月明首座였기 때문에 그 女가 콩을 심어 거둔 넓은 벌판을 “月明首座콩밭등”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4) 九龍淵


하늘땅을 뒤흔드는 듯한 瀑布소리 千 갈래 萬 갈래로 부서지는 물갈기, 千岳萬峰에 걸어놓은 무지개, 雄大하고 壯快한 그 모습은 말과 글로 다 形言키 어렵다.
아름답고 神秘로운 金剛山을 지키기 爲해 먼 옛날 아홉 마리의 龍이 못에 내려 宜좋게 살면서 不義를 막았다는 由來로부터 九龍淵이라 부른다. 瀑布가 쏟아져 내리는 모습은 마치도 巨大한 龍이 살아 움직이면서 온갖 造化를 피우고
하늘로솟구쳐 오르는 듯 하다.

(5) 鬼面巖
鬼面巖이란 本來 鬼神의 얼굴 같은 바위라는 뜻인데 하도 妙하고 氣막히다는 뜻을 比喩하여 이르는 말이다.
鬼面巖은 三仙巖과 하나의 調和를 이루고 三仙巖이 구름을 타고 둥실 거리면 鬼面巖이 험상궂게 노려보면서
萬物相 바위들을 안개로 감싸버려 自然의 秘密을 보이지 않으려는 듯 숨바꼭질을 한다.


(6) 金剛山 山神靈꿈과 壬辰倭亂을 豫言한 李之菡
16世紀의 儒學者이자 官僚이던 土亭 李之菡은 '周易'等의 冊을 硏究하여 當時 百姓들에게는 天地의 運數를 아는 사람으로 通하고 있었다.
그는 生前에 金剛山을 遊覽하다가 壬辰倭亂의 勃發을 斟酌하게 되었는데, 이에는 다음과 같은 傳說이 내려온다.

1570年代 李之菡은 八道 江山을 두루 遊覽하다가 江原道 金剛山에 들게 되었다.
絶勝景槪에 이끌려 時間 가는 줄 모르다가 어느 높은 山마루 아래에 到着했을 때는 이미 날이 저물기 始作하고 있었다.
그는 바위 위의 한 庵子를 發見하고는 가까이 다가가 댓돌 옆에 지팡이를 세우고 欄杆에 依支하여 金剛山의 夕陽을 즐기다가 自身도 모르게 잠에 빠져 들었다.
얼마 뒤 몇 名의 중들이 나와 法堂을 오가며 屛風과 자리를 갖다놓고 무슨 準備를 하였다.
李之菡은 궁금하게 생각되어 물어보니
"只今 全國 名山의 山神靈들이 나라에 일이 생긴 것을 걱정하여 이곳으로 오고 있나이다" 하는 것이었다.

果然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燈불이 輝煌하게 비치는 가운데 여러 山神靈들이 차례로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먼저 온 三角山의 神靈이 智異山의 神靈에게 말하였다.
"요즘 天文을 보니 將帥별의 움직임이 正常이 아닌데 南에서 北으로 움직이는 것을 보니 南쪽에서 무슨 事變이 생길 듯 하오.
이것은 外國의 妖邪스러운 氣運이 東南쪽으로 해서 온다는 것이 아니겠소."
智異山 神靈이 곧바로 말을 이어받았다.
"非但 별의 움직임뿐 아니라 사람들의 일에도 念慮되는 바가 있으니 南쪽 오랑캐가 날뛰는 것이 날로 甚해지고 있소.
그런데 朝廷에서는 宴會만 열고 每日 놀고 있으니 나라가 亡할 徵兆가 아니고 무엇이겠소."
이 말을 듣고 있던 金剛山 神靈이 매우 놀라면서 이렇게 말을 잇는다.
"朝鮮은 自古로 東邦禮義之國이요, 우리는 이 나라에 살면서 祭物을 받아 먹고 있으니 우리 또한 禮義之神인 셈이지요.
저 南쪽의 倭는 짐승의 나라인데, 그 醜惡한 오랑캐가 이 나라에 들어와 살게 되면 우리 또한 짐승의 神이 되고 말 것이니, 어찌 아니 부끄럽고 亡身스럽지 않을 수 있겠소.
그러니 이 자리에 모인 諸公들이 제가끔 깊이 생각하여 對策을 세우는게 좋을 듯 싶소."
山神靈들은 모임을 마치더니 서로 손을 흔들어 가볍에 人事를 하고 물러가는 것이었다.

이 때 李之菡이 눈을 뜨고 보니 當初에 지팡이를 세워 두었던 곳은 바위 모서리였고, 몸을 依支하였던 곳은 한 그루의 소나무였다.
그리고 훤히 비치던 燈불은 봉우리 위에 걸려 있는 새벽달이었다.
그는 비로소 그것이 꿈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는 單純한 꿈이 아닌, 꿈을 通해 山神靈이 뭔가를 暗示해 준 것으로 받아 들였다.
이때부터 그는 앞날에 반드시 倭놈들이 變亂을 꾀할 것이라고 確信하고, 倭놈의 偵探者가 있는지 살피고 다녔다.
그가 三陟 고을에 臨時로 가 있을 때였다. 중차림을 한 사람을 만났는데, 말소리나 얼굴 模樣이 恰似 倭놈과 같았다.
그 놈을 잡아다가 여러가지 審聞을 해보니, 倭놈임을 實吐하면서 목숨을 求乞하는 것이었다.

李之菡은 1578年 忠淸道 牙山縣監으로 있다가 世上을 떠났는데,
그가 죽은 뒤 14年 後 마침내 倭놈들이 壬辰倭亂을 일으켰다.
이때 倭놈의 將帥 가운데 쓰시마(對馬. つしま) 의 소 요시토시(宗義智. そう よしとし)平義智
란 者는 앞날을 내다보는 李之菡의 存在를 傳해 듣고, 三陟 고을에는 軍士를 들여보내지 말라고 하였다.

(7) 金蘭窟 傳說


먼 옛날 寶露國 임금의 외동딸이 病에 걸려 어떤 藥을 써도 낫질 않았다.
이에 골머리를 앓던 임금은 海東國의 神山 金剛山에 不老草가 있다는 생각이 떠올라 이를 求하기 爲해 盜賊團을 派遣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派遣된 盜賊떼가 金蘭窟로 소리 없이 기어들어 사다리를 놓고 不老草를 뜯으려는 瞬間, 갑자기 번개가 일고 우레가 울며 暴風이 휘몰아쳐 窟 안으로 밀려들더니 성난 波濤가 翣時에 盜賊떼들을 삼켜버렸다.
​現在 金蘭窟 入口 바닥 물밑에 엎어져 있는 ‘배바위’는 그때 沈沒된 盜賊배가 돌로 굳어진 것이라고 한다.

金蘭窟에 關한 또 다른 傳說로는 옛날 玉皇上帝의 딸 진경公主가 約婚式을 앞두고 重病에 걸렸는데, 醫員이 金剛山의 金蘭草를 내놓고는 百藥이 無效라고 했다.
이에 玉皇上帝는 藥草知識이 많은 보영仙女를 金剛山에 보냈다.
金蘭草를 찾아 山을 오르내리며 헤매던 仙女는 그만 벼랑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精神을 차렸을 때에는 自己가 어느 窟속에 누워있고 한 總角이 근심스레 自己를 지켜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總角은 바닷가 마을의 張釗라는 사람으로 張釗는 仙女가 金蘭窟에 찾아온 事緣을 알게 되자 먼저 自己 집에서 病治療를 하고 함께 金蘭草를 찾자고 하였다.
張釗와 張釗어머니의 極盡한 精誠으로 仙女는 이내 回復되었고 어느 窟 안에서 金蘭草도 찾게 되었다.
仙女는 張釗에게 고맙다는 人事를 하고 金蘭草를 캔 다음 하늘로 올라갔다.
仙女가 求해 온 金蘭草를 먹은 公主는 곧 蘇生되었고 仙女는 玉皇上帝의 許諾을 받아 金剛山에 내려 張釗와 義좋은 夫婦가 되어 아들딸 낳고 和睦하게 잘 살았다.

(8) 萬瀑洞 가마꾼 중과 惡毒한 官吏
옛날에 倨慢하고 毒煞스럽고 매정하기로 이름난 呂氏 姓의 벼슬아치가 있었다.
그는 百姓들을 苛酷하게 搾取하여 제 몸만 불리던 者로 몸집이 절구통만하였다.

어느 여름날 金剛山 旅行을 떠난 그는 가마꾼이야 어떻게 되든 제 몸이 便安하니 빨리
구경을 하자고 鐵領을 넘어서부터 다그쳤다.
普通 사람이면 長安寺에서 하룻밤 묵고 다음 날 萬瀑洞으로 구경 가는 것이 慣例였지만,
이 사나운 벼슬아치는 金剛山에 到着한 그 날로 萬瀑洞 구경을 하겠다고 서둘렀다.
長安寺의 가마꾼들은 그래도 比較的 平坦한 길을 가게 되어 좀 나았지만 苦生하게 된 것은 表訓寺 중이었다.
그 날 가마를 메게 된 중들은 이른 새벽부터 땔나무를 하고 方今 돌아온 참이었다.
가마를 準備해 가지고 三佛庵까지 내려가니 이미 그 벼슬아치를 태운 長安寺 가마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벼슬아치는 表訓寺 가마꾼을 보자 댓바람에 왜 늦었는가를 追窮하고 빨리 가자고 督促했다.
두 사람이 그를 가마에 앉히고 떠나는데 어찌나 무거운지 몇 걸음을 못가서 땀이 비오듯 하였다. 얼마 後 가마는 表訓寺 앞뜰에 到着하였는데
벼슬아치는 절간구경을 안해도 되니 빨리 萬瀑洞으로 가자고 要求하였다.
하는 수 없이 金剛門을 지나 險한 山길을 오르는데 때는 한여름이라 날씨는 무섭게 더웠다.
게다가 무거운 가마까지 멘 그들은 숨이 목에 턱턱 차는 것이었다.

靑龍潭, 白龍潭, 黑龍潭, 碧霞潭을 돌아 普德窟이 바라보이는 濆雪潭까지 갔는데, 벼슬아치는 그 좋은 구경을 鑑賞하면서 천천히 가자고 말하기는커녕 해가 지기 前에 오늘 八潭을 모두 보자고 하였다.
가마를 멘 두 중은 이제 발을 옮길 힘조차 없었다.
이대로 가마를 메고 가다가는 죽을 것 같았다.
하지만 惡毒한 管理의 命令을 어겨도 죽을 판이었다.
죽을 힘을 다해 한 걸음씩 올라가던 그들은 眞珠潭 옆 벼랑길에 이르렀다.
이때 중 한 사람이 그만 미끄러져 넘어졌다. 하마터면 가마가 곤두박질할 뻔하였다.
겨우 일어선 그는 다른 중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우리가 죽기는 매一般이니까 그럴 바에야 저 놈과 함께 물에 빠져 죽는거야"하자
"그렇게 하세"라며 同意했다.
모진 마음을 먹은 그들은 眞珠潭의 瀑布가 내리는 높은 벼랑에 이르자 失手하는 척하고 앗 소리를 지르며 그만 낭떠러지로 떨어져 물에 빠졌다.
이 消息을 들은 金剛山 중들은 가마꾼 중들의 行動을 깊이 同情했다.
그 뒤부터 兩班 官僚들은 가마를 탈 때마다 이 일이 생각나 行悖를 부리지 못했다고 한다.

(10) 明鏡臺 傳說


百川洞 溪谷의 明鏡潭은 本來 明鏡臺 밑에 있는 潭沼라는 데서 온 이름이다. 이 沼는 一名 黃泉潭, 黃流潭, 玉鏡潭으로도 불리는데 明鏡潭이 黃泉潭으로 불리게 된 것과 關聯한 傳說이다.
옛날 淮陽고을에 心術이 사나운 한 地主가 살고 있었다. 그는 農民들을 搾取하여 財産을 불리기에 餘念이 없어서
金剛山을 옆에 두고도 좀처럼 가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明鏡臺 앞에 가면 壽命의 長短과 罪의 有無, 貧富貴賤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景致도 매우 좋다는 所聞을 듣고 그도 마침내 金剛山 구경을 떠났다.
地主가 金剛山 入口에 到着하니 長安寺의 가마꾼들이 벌써 와서 待期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意中을 알 리 없는 가마꾼들은 “長安寺에 들러 하룻밤 묵고 내일 아침 萬瀑洞으로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다.
“아니다. 只金 當場 明鏡臺로 案內해라.” 하면서 地主는 가마에 올라 가마꾼들을 재촉했다. 地主를 태운 가마는 百川江 기슭을 따라 가다가 어느덧 明鏡臺와 마주하고 있는 拜石臺 近方에 當到하였다. 그러자 그의 눈앞에 마치 커다란 거울을 山에 기대어 세워 놓은 것 같은 바위가 나타났다.
이때 옆에서
“저것이 바로 사람들의 마음속까지 다 비추어 罪가 있는지 없는지를 가려내는 明鏡臺라고 하는 神靈한 바위입니다.” 하는 가마꾼의 말에 地主는 精神이 번쩍 들었다.
지난날 그는 남들에게 못할 짓을 많이 해서 內心 不安했지만 마음을 추스르고 拜石臺에 올라 거울 같은 바위壁을 有心히 바라보았다.
“金剛山 구경을 떠날 때 決心한 대로 내 壽命이라도 알아보고 가야지.”라고 생각한 地主는 偶然히 발밑의 明鏡潭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沼의 물은 누런 琉璃 빛이 나면서도 검푸른 色을 띤 가운데 明鏡臺와 뒤의 山봉우리 그림자가 비쳐 어른거리고 있었다.
그가 “아! 물속의 明鏡臺….” 하며 仔細히 들여다본 瞬間 그곳에는 무서운 惡鬼의 形象으로 變한 自身의 얼굴이 있었다. 그 모습에 큰 衝激을 받은 그는 견딜 수 없는 苦痛과 煩憫으로 괴로워하다가 그만 明鏡潭에 빠져 죽고 말았다.
그 後 사람들은 ‘明鏡臺’를 罪業을 밝히는 거울이란 뜻에서 ‘業鏡臺’라 하였고, 地主가 黃泉客이 된 ‘明鏡潭’을 ‘黃泉潭’으로 부르게 되었다.

한便 이 地域 스님들은 百川江을 사람이 죽어 저승에 가는 黃泉길과 같다고 하여 ‘黃泉江’이라 하였고 黃泉潭에 돈을 던져야 閻羅大王이 黃泉길을 無事히 가게 한다는 所聞을 퍼뜨렸다.
그 後 金剛山 구경을 오는 많은 富裕한 兩班들이 이 黃泉江을 따라 가다가 黃泉潭에 이르면 저마다 閻羅大王을 부르며 銀錢이나 葉錢을 던지곤 하였다.
그러자 이를 본 사람들은 平素에 善業을 쌓지 않고 閻羅大王에게 賂物을 주어 自身들의 罪를 免하려는 兩班들의 行態를 비웃었다고 한다.

다음은 慶尙道 東萊府 梵魚寺에서 上佐로 있던 靈源祖師가 道를 닦기 위해 金剛山으로 찾아갔을 때의 일이다. 그가 百川洞 골짜기 안으로 들어가는데 明鏡潭에서 한 白髮老人이 낚시질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靈源은 그를 본체만체하고 老人의 옆을 지나 더 깊은 골짜기 안으로 들어가서 工夫를 始作했다. 그는 거기서 여러 해 동안 풀뿌리와 나무껍질을 먹으며 熱心히 修道했지만 이렇다 할 뚜렷한 成果가 없었다.
結局 그는 이곳에서의 工夫를 그만두고 들어왔던 길을 따라 다시 나가기로 마음먹고 길을 나섰다.
그런데 몇 해 前 明鏡潭에서 낚시질을 하던 白髮老人이 只今도 그 자리에 앉아서 낚시질을 하고 있었다.
이를 異常하게 여긴 靈源이 그 老人 곁으로 다가가 仔細히 살펴보니, 미끼를 꿰지 않은 채 빈낚시질을 하며 念佛을 외우고 있었다.
靈源은
“老人丈, 이렇게 빈낚시질을 하고 있으니 고기가 잡힐 리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老人은
“사람이 마음을 燥急하게 가지면 무엇을 하든 失敗하기 마련이지. 이제 道가 차면 고기는 빈낚시에도 절로 잡힐 게야.”라고 對答하면서 繼續 念佛을 외웠다.
그의 말에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던 靈源은 自身의 燥急했던 마음을 뉘우치고 다시 돌아가 修道에 더욱 精進하여 有名한 스님이 되었다고 한다.

(11) 白도라지꽃의 傳說


옛날 金剛山 깊은 골안에 도선학이라는 가난한 農夫이 살고 있었다.
그는 일찍 아내를 잃고 외동딸 하나를 愛之重之 키우며 살고 있었다. 그 딸의 이름은 '라지'라고 하였다.
라지는 偏父의 膝下에서 母情을 모르고 외롭게 자랐다. 處女로 成長한 그 女는 늘 고요한 웃음을 짓고 있었으며 밝은 顔色으로 아버지와 周圍에 있는 사람들을 對할 줄 알았다.
그의 얼굴은 동산에 今時 떠오른 보름달처럼 환하고 고왔으며 孝誠이 至極하였다.
가난한 집에서 자란 處女는 궂은 일, 진일을 가리지 않았으며 언제나 홀로 된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려고 애를 썼다.
베를 짜기도 했고 때로는 품팔이도 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일손을 도와드리면서 明朗한 웃음으로 즐거움의 香氣 그윽한 꽃을 피워놓곤 하였다.

라지는 이처럼 아버지를 至誠으로 섬기며 海棠花 마냥 싱싱하고 귀엽게 자라 어느덧 비녀를 꽂을 나이가 되었다.
라지의 이웃집에는 마음씨 착하고 부지런한 나무꾼 總角이 살고 있었다.
處女와 總角은 철없는 어린 시절에 소꿉장난을 하며 같이 뛰어놀았고 다 자라서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處女는 길가에서 總角을 마주칠 때면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종종걸음으로 그 앞을 스쳐 지나곤 했으나 自己가 오래지 않아 그의 알뜰한 아내가 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두 집 父母들은 한 두 해 힘껏 일하여 살림살이가 좀 펴게 될 때 아들과 딸의 婚禮式을 남부럽지 않게 치르자고 굳게 言約하였으며 이러한 事情은 둘 다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成熟期에 들어선 處女는 生氣 있는 꽃망울이 今時 벌어져 활짝 피어나려 할 때처럼 淸楚하고 아름다웠으며 總角 亦是 凜凜한 大丈夫였다.
밭갈고 씨뿌려 貴重한 구슬땀의 열매를 거두어들이는 보람, 草家三間이나마 지어놓고 넉넉하지는 못해도 조촐한 살림을 꾸려가는 즐거움을 그들은 벌써 마음속에 누리고 있었다. 그것은 봄날의 아지랑이마냥 總角의 눈앞에 하늘거렸다.
이 아지랑이는 純眞하고 善良하며 孝誠이 至極한 두 젊은이의 기쁨이었으며 한껏 부풀어오르는 人生의 봄꿈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天眞한 꿈과 希望은 順調롭게 이루어질 수 없었다.
金剛山 골안에서 첫째가는 富者인 黃哥가 偶然한 機會에 人物고운 라지를 한 番 보고 제 妾으로 삼으려는 凶心으로 품었던 것이다. 黃哥의 땅을 부치고 있는 라지의 아버지 도선학은 몇 해 傳에 黃氏집에서 長利쌀을 가져왔는데 그것이 새끼를 쳐 엄청나게 불어났으므로 아무리 땀흘려도 그 빚을 다 갚을 수 없을 만큼 어려운 地境에 있었다.

黃哥는 도선학의 이같은 弱點을 거머쥐고 라지를 빚값으로 빼앗아가려 하였다.
도선학은 設或 돈과 權勢가 판을 치고 있는 世上이라고 해도 黃哥의 이 要求에 應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하여 그 무슨 뾰족한 數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라지는 말없이 근심에 싸여있는 아버지의 어두운 顔色을 보고 尋常치 않은 일이 있음을 斟酌하였다. 그는 언젠가 陰險한 눈길로 自己를 바라보던 凶한 몰골을 想起했던 것이다. 도선학은 벗어날길 없는 커다란 근심을 안은 채 자리에 눕고 말았다.
라지를 限없이 사랑하는 이웃의 나무꾼 總角도 이 事實을 언제까지나 모르고 있을리는 없었다. 總角은 不遠間에 이런 일이 있을 것을 豫想하고 미리 한푼 두푼 모아둔 돈이 적지 않았으므로 도선학이 진 빚을 남김없이 다 갚을 생각을 하며 있는 힘을 다 해 일하였다.
이럴때 黃哥는 라지가 나무꾼 總角과 因緣을 맺은 것을 어떻게 알고선 總角이 손을 못 쓰게 할 속셈으로 그를 世尊峰 너머 범골로 보냈다.
이놈은 總角을 떠나보내는 날 아침에 大門 밖에까지 따라 나오며 百 年 以上 묵은 山蔘을 적어도 세 뿌리는 캐와야 한다고 단단히 다짐을 두었다.

總角은 黃哥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그도 마을의 여느 사람들과 다름없이 黃哥의 땅을 부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黃哥는 總角을 보내면서 그의 잔등에 감쪽같이 生피를 발라 놓았다.
이것은 나무꾼 總角의 옷에 피를 묻혀 놓으면 山蔘이 눈에띄지 않을 것이며 또 범골에 들어서자마자 依例히 百 年 묵은 白虎에게 잡혀 먹히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總角은 그것도 모르고 世存峰을 넘었다.
山蔘을 찾아 범골에 들어서 險한 골짜기를 타고 내리기를 數十 番, 總角은 진이 빠져 老松이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바위 곁에 기대 땀을 닦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온 山川이 振動하는 소리와 함께 웬 白髮老人이 나타났다. 總角은 너무도 놀라 온몸을 벌벌 떨며 바위뒤로 몸을 숨기려 하였다.
老人은 總角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허리까지 드리운 흰 鬚髥을 쓰다듬으며
“너는 어쩌자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고 물었다.
잔뜩 怯을 집어먹었던 總角은 白髮老人의 多情한 물음에 마음이 鎭靜되었다.
精神을 收拾한 總角은 黃富者가 빚값으로 라지를 데려가려고 하는 事實과 山蔘을 찾아 이 깊은 골안에 들어오게 된 自初至終을 차근차근 이야기 하였다.

그랬더니 老人은 새옷 한 벌과 활을 내주며 말했다.
“너는 이 옷을 갈아입은 後 遲滯밀고 孝養고개로 달려가거라. 孝養고개에 올라서면 라지가 있느니라. 그러니 빨리 가서 救援하여라.”
老人의 우렁찬 목소리는 골안에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總角이 두 손으로 恭遜히 옷을 받고 절을 한 다음 고개를 드니 老人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總角은 老人에게 고맙다는 人事 한마디 못한 것을 後悔하며 옷을 재빨리 갈아입고 孝養고개로 向했다. 그런데 神奇하게도 그의 周圍에는 山蔘꽃이 활짝 피어 바람결에 간들거렸다. 山蔘은 그가 손을 대자마자 저절로 뽑히어 자루에 들어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山蔘 한 자루를 다 채운 總角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孝養고개 方向으로 줄달음을 놓아 瞬息間에 고개마루에 거의 이르렀다.
바로 그 瞬間 라지는 가마를 타고 孝養고개로 올라서고 있었다.

저 때문에 앓아누운 아버지를 爲해 팔려갈 것을 決心한 處女는 빚文書를 찢어버린 다음 黃哥가 下人들을 앞 세우고 온 가마에 躊躇없이 올랐던 것이다. 아버지가 내 딸을 못데려 간다고 팔을 허우적거리며 悲痛하게 부르짖었으나 黃哥의 下人들은 그를 事情없이 밀쳐버리고 가마를 메고 달아났던 것이다. 黃哥는 말을타고 그 뒤를 따랐다.
이윽고 一行이 孝養고개 마루에 이르자 라지는 가마를 세우고 땅에 뛰어 내렸다. 라지는 어머니 山所가 있는 東쪽과 아버지가 있는 집方向을 向하여 깊이깊이 허리굽혀 절을 하고 누가 어쩔새도 없이 아찔한 벼랑밑으로 몸을 던졌다.
뒤늦게 當到한 나무꾼 總角은 絶痛한 가슴을 부여안고 라지가 서있던 벼랑위에 쓰러졌다. 헤아릴 수 없는 슬픔과 憤怒로 그의 눈에서는 거센 불길이 이글거렸다. 暫時 지나 精神을 차린 그는 활을 들어 黃哥를 쏘아죽이고 라지처럼 벼랑에서 뛰어 내렸다.
이로부터 얼마간 지난 뒤 벼랑 밑에는 두 떨기의 꽃이 피였으니 그 하나는 라지의 넋이 담긴 하얀 꽃이요, 다른 하나는 나무꾼 總角의 넋이 깃든 藍色 꽃이었다.
사람들은 이 꽃에 抑鬱하게 죽은 아름다운 處女의 이름을 붙여 도라지라고 불렀다.
初期에는 藍色 꽃에도 總角의 이름이 붙어있었으나 漸次 色깔만 다르고 模樣은 꼭 같은 이 꽃을 하나의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12)百鼎峰 溪谷 傳說 (倭寇를 쳐부순 쌀뜨물)


只今부터 約 700年 前의 일이다. 千 數百 名이나 되는 倭寇가 通川으로 들어왔다. 通川 百姓들은 倭寇를 물리치려고 하였으나 倭寇에 比해 數가 적어 形勢는 우리에게 不利해졌다. 百姓들은 敵과의 正面對決을 避하기 爲해 어둠을 타서 百鼎峰으로 避身하였다.
날이 밝아서 이 事實을 알게 된 倭寇들은 허겁지겁 뒤따라 왔으나 雲田里에서 더는 追擊하지 못하였다. 우리 兵力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고,百鼎峰 골짜기가 깊고 鬱蒼했기 때문이다.

百鼎峰에 陣을 친 百姓들은 主力을 雲田江 左右 안에 埋伏시키고 나머지 人員들에겐 白土와 灰를 파오도록 해서 點心 때 개울물에 풀어 雲田江에 흘려보냈다. 翣時間에 江물은 희어졌고 뿌연 물은 江줄기를 따라 쉼없이 흘러갔다.
아래 倭寇의 골짜기에서는 큰일이 일어났다.
"어! 이 뿌연 것이 무슨 물이지, 꼭 쌀뜨물 같네."
倭將은 不安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하여 雲田里에 남아 있는 老人들을 끌어오게 했다.
倭將은 老人에게 물어 왜 이렇게 뿌연지 물었다.
老人은 머리를 들어 百鼎峰을 쳐다보았다. 到處에서 點心 짓는 煙氣가 무럭무럭 피어오르고 오른便에 서 있는 바리峰(鉢峰)은 꼭 낱알을 쌓아둔 것 같아 보였다.
老人은 泰然自若하게 이렇게 말했다.

"저 百鼎峰으로 數千 名의 軍士가 들어갔소. 이 물은 軍士들이 點心을 지으려고 쌀을 씻은 뜨물인가 보오. 저 百鼎峰 옆에 둥그렇게 쌓여 있는 것은 쌀섬 낱가리오."
倭將은 이 말을 듣고 怯에 질렸다.
이 물이 쌀뜨물이면 이렇게 江이 미여지도록 내려오는 것으로 봐서 百鼎峰에 大軍이 駐屯하고 있는 것은 事實인 것 같았다.
더 생각할 餘地 없이 倭將은 어둡기 前에 골짜기를 빠져 通川邑 쪽으로 退却할 것을 命令하였다.
그런데 이때 난데없이 북소리가 울리더니 四方에서 "와"하는 喊聲과 함께 화살이 비오듯 날아오고 兩쪽의 山마루로부터 高麗 軍士들이 沙汰처럼 밀려들었다. 伏兵의 不意의 襲擊을 받은 倭寇는 삼대같이 쓰려졌다.
겨우 살아남은 敗殘兵들은 고개를 넘어 艱辛히 바다로 逃亡쳤다. 그 後 이고개를 '되넘이 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와 비슷한 傳說은 楸池嶺, 九成洞, 三億洞 一帶에도 있다고 한다.

(13) 上八潭


옛날 金剛山에 마음씨 착한 總角이 살고 있었다. 어느날 그는 사냥꾼에게 쫓기는 사슴을 救援하여주었다.
사슴은 그 恩惠를 갚기 爲하여 八潭에 沐浴하러 하늘에서 내려온 仙女의 날개 옷을 감추었다가 그에게 주었다.
八仙女中 옷을 잃어버린 仙女는 하늘로 올라갈 수 없게되었다. 總角은 仙女와 因緣을 맺었다.
總角은 사슴의 勸誘대로 아들,딸 셋을 낳은 다음에 仙女의 날개 옷을 주어야 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었다.
그리하여 仙女는 두 아이를 데리고 하늘로 올라갔다. 그러나 仙女는 金剛山이 그리워 다시 하늘에서 내려왔다.
그 後 夫婦는 아들,딸과 함께 오래오래 幸福하게 살았다고 한다.

(14) 玉皇上帝에게 罰 받은 토끼
옛날 옛적, 金剛山이 天下絶勝이라는 所聞이 하늘나라에까지 퍼져 갔다.
그 所聞은 仙女들이 八潭에 내려와 沐浴을 하기 始作하고서 부터 더욱 널리 퍼져 나갔다.
그리하여 하늘나라에서는 누구나 金剛山 구경 한 番 가는게 所願처럼 돼 버렸다. 하루는 性味 急한 토끼가 그 所聞을 듣고 안달이 나 달에 가서 더 以上 절구를 찧을 생각이 나지 않았다.
但 한 番만이라도 金剛山 구경을 하고 와야 일이 손에 잡힐것 같았다.

그래서 토끼는 참다 못해 玉皇上帝를 찾아가 自己의 切切한 所願을 아뢰었다.
"玉皇上帝님, 듣자온데 韓半島 땅에 金剛山이라는 所聞난 名勝地가 있다고
하온데 이 못난 토끼도 한 番 보고 왔으면 平生 所願이 없겠사옵니다.
바라옵건데 단 한 番만이라도 金剛山에 내려 보내 주옵소서."
玉皇上帝는 토끼의 所願이 하도 懇切한 것 같아 快히 承諾해 주었다.
그러나 보름이 되기 前에 반드시 돌아와야 된다고 다짐을 해두었다.
玉皇上帝의 承諾을 얻은 토끼는 너무 좋아서 洞네坊네 뛰어 다니며 자랑을 하였다. 다음날 토끼는 모두에게 羨望어린 歡送을 받으며 金剛山에 내려왔다.

第一 먼저 外金剛 入口에 到着한 토끼는 世尊峰 줄기를 타고 기어오르다가
金剛門 近處에 이르러 完全히 어리둥절해 버리고 말았다.
눈 앞에 펼쳐진 景致가 너무나 아름다워 昏絶할 地境이었다.
天花臺. 玉流瀑布. 舞鳳瀑布. 飛鳳瀑布. 銀絲流. 九龍淵 等 어느것 하나도 하늘나라에서는 보지도 못했고 想像도 못할 絶景이었다.
그것은 어디를 가도 모두 한가지였다. 가면 갈수록, 보면 볼수록 漸入佳境이었다.
마침내 恍惚境에 陶醉된 토끼는 날짜가 흘러가는 것도 잊어버리게 되었다.
어느날 밤 토끼가 東海바다 위를 보니 휘영청 둥근 보름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제야 토끼는 '아차!'하고 精神이 번쩍 들었으나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그때 하늘에서부터 玉皇上帝의 怒氣 띤 목소리가 울려 왔다.

"요 괘씸한 토끼야! 너는 예前에 달리기에서 거북이에게 지더니 이番에 또 거북이 보다 느리게 行動했구나.
그러니 너는 그 罰로 앞으로 아예 거북이가 되거라!"
玉皇上帝의 命이 떨어지자 토끼의 몸뚱이는 서서히 거북이로 變해갔다.
그러나 토끼는 玉皇上帝의 處罰이 두렵지도 않았고 싫지도 않았다.
오히려 달에서 절구질이나 하고 있는 것보다 이 아름다운 金剛山에서 실컷 구경하며 사는 게 낫다고 생각되었다.
그러자 토끼는 金剛山 絶景에 感歎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 漸漸 돌로 굳어져 갔다.
나중에 보니 몸은 거북이, 머리는 토끼가 되어 있었다. 이 바위는 展望 좋은 世尊峰 中턱에 있다고한다.

(15) 溫井嶺 고개 (甘露水)


溫井嶺 고개에서 西쪽으로 얼마가지 않은 곳에 '찬샘'으로 불리우는 고장이 있다.
14世紀 末葉 어느 해 여름이었다. 東海안쪽으로 侵入하는 倭敵을 막기위하여 高城郡에 駐屯해있던 高麗軍은 뜻밖에도 淮陽쪽에 倭寇가 쳐들어왔다는 急報를 받았다.
이 消息을 들은 우리 軍士들은 卽時 싸울 準備를 갖추고 길을 떠났다.
高城고을에서 아침 일찍 出發하였으나 溫井里까지 30如 里 길을 숨가쁘게 달려온데다가 다시 溫井川과 그 上流를 따라 뻗어 오른 35里 程度 되는 가파른 山길을 힘들게 높이 올라가야 했다. 休息도 따로 없는 强行軍을 해왔지만 그들이 溫井嶺 고개마루까지 오른 것은 한낮이 거의 다 되어서였다.
部隊를 引率하는 將帥는 그날안으로 淮陽邑에 當到할 計劃이었다. 그렇지 안으면 軍令을 어
기고 戰鬪任務를 遂行할 수 없게 되는것이다. 그는 軍士들이 暫時 숨을 돌리게 한다음 다시
出發信號 깃발을 들었다.
한 여름의 뙤약볕에 땀은 빗물이 흐르듯하여 軍士들의 옷은 흠뻑젖었다.
그들은 모두 목이 말라 죽을 地境이었다.

溫井洞에서 行軍中 한 處女가 물동이를 이고 오는 것을 보자 그를 불러세워 물을 좀 마시고자 하였다.
處女는 동이를 내려놓고 바가지에 한가득 물을 뜨더니 길섶에서 큼직한 나무잎 하나를 따서 물위에 뛰워 먼저 將帥에게 恭遜히 올리는 것이었다.
異常스럽게 생각한 將帥는 나뭇잎을 왜 띄웠는지 물었다.
處女는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고
"이 물은 저기 香나무 밑에 있는 샘물인데 차기가 얼음같습니다.
한창 더운 때 갑자기 이 물을 많이 마시면 臆이 막히고 체할 수 있습니다. 나뭇잎을 불면서 천천히 마셔야 합니다" 라고 對答했다.
將帥는 이 말을 듣고
"참으로 奇特한 處女로다."라고 稱讚하면서 軍士들에게 單숨에 물을 많이 마시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주었다.
軍士들이 샘터로 찾아가니 바위 그늘 틈에서 맑은 샘물이 졸졸 흐르는데 자그마한 우물을
정갈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 물은 眞짜 찬 얼음과 같아 이가 시렸다.
그들은 나뭇잎을 따서 국자를 만들어 샘물은 조금씩 貪스러이 마셨다. 샘물은 참으로 목마른 사람에게 힘을 주는 藥水와 같았다.
軍士들은 새로운 氣運을 내어 敵軍을 치는 싸움터로 씩씩하게 行軍해 나갔다.

이 때부터 그 샘물은 '찬샘', '寒泉'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찬샘 이야기가 傳播되자 內金剛, 外金剛을 드나드는 길손들이 溫井嶺길로 많이 다니면서 찬샘물을 마시고 가곤 하였다.
그리하여 附近에는 길손들이 쉬고 가는 酒幕과 旅人宿들이 생겨났고 한 個의 마을이 形成되었
다. 그 마을 이름도 찬샘마을이라 불렀다.
將帥이름이 李成桂라는 說도 있지만 그는 한 番도 溫井嶺을 넘은 적이 없었다.
옛날 어느 길손이 말을 타고 溫井嶺에 들어서는데 목이 말라 물을 찾으니 웬 處女가 쪽바가지에 '甘露水'를 떠주면서 버들잎새를 띄워주었다는 傳說도 있다.

(16) 楡岾寺 創建 傳說 (鐘을 타고 온 53부처)


楡岾寺에는 印度에서 온 53基의 佛像과 한 個의 鐘이 있는데, 다음과 같은 傳說이 傳해진다.
옛날 釋迦牟尼가 살았을 때 印度에 9億戶의 집이 있었다. 그 中 3億戶의 사람들은 부처를 만나 說敎를 들었고, 3億戶의 사람들은 뵙지는 못했지만 듣기는 했으며, 나머지 3億戶의 사람들은 보도 듣도 못하였다. 釋迦牟尼가 涅槃에 든 後 그의 首弟子인 文殊菩薩이 여러 弟子들과 함께 佛敎 敎理를 說敎하였다.

그러자 마지막 3億戶의 사람들이 한 番 모습만이라도 보았으면 하고 恨歎하여 마지 않았다. 文殊는
"너희들이 萬若 부처님을 믿는다면 그 形像을 만들고 供養을 드려야 할 것"이라 하였다. 그러자 3億戶의 사람들은 佛像 하나씩을 만드니, 어떤 것은 크기가 한 자 만하였고, 어떤 것은 몇 치밖에 안 되었다. 그리고 난 後 한 個의 鐘을 만들었다.

여러 佛像들 가운데 얼굴과 몸 模樣이 제대로 갖추어진 53個의 佛像을 鐘 안에 넣고, 이 같은 作業을 하게 된 經緯를 써 넣었다. 마지막으로 뚜껑을 덮고 바다에 띄우면서 祝願하기를
"나의 스승인 釋迦牟尼의 53像을 바다에 띄우노라. 因緣이 있는 나라에 到着하게 되면 나도 뒤따라가서 敎理를 說破하리라"하였더니 神靈스런 龍이 나타나서 鐘을 등에 업고 떠나갔다. 이때가 中國의 周나라 默王 53年 이라 傳한다.
53佛을 태운 배는 바다를 흘러 印度半島 南쪽에 位置해 있는 月支國에 到着하게 되었다. 月支國의 혁치왕은 그 鐘에 새겨진 글을 보고 기쁜 나머지 큰 法堂을 짓고 53佛을 모셨다. 그러나 갑자기 大闕에 火災가 나서 法堂이 다 타버렸다. 王이 다시 法堂을 지으려 하자 그날 밤 꿈에 53佛이 나타나서 '여기 머무르지 않겠으니 붙잡으려들지 말라' 하는 게 아닌가. 王이 놀라 깨어나서 53佛을 鐘에 넣고 바다에 띄우면서 盟誓하기를
"좋은 因緣이 있는 나라에 갈 것이니 그 때 나는 眷屬 數千 名을 데리고 가서 佛法을 지키는 착한 神이 되어 늘 부처를 擁護하리라" 하였다. 그는 銀으로 된 솥뚜껑 하나를 더 만들고는 自身의 所願을 써서 바다에 띄웠다. (楡岾寺 月支王 祠堂은 그래서 생긴 것이다.)

鐘은 큰 바다에서 東方을 向해 흘러가며 漂流하다가 印度를 떠난 지 500年 만에 金剛山 東쪽 海岸인 高城郡 安昌縣 浦口에 到着하였다. 그때가 只今으로부터 1900如 年 前 新羅 第2代 南海王 元年이었다고 傳한다.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異常하게 여겨 官家에 가서 알렸다.
고을 員이었던 盧椿이 이 말을 듣고 뛰어나가 보니 부처가 머물렀던 자리는 뚜렷한데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仔細히 살펴보니 나뭇가지들과 풀들이 모두 金剛山 쪽으로 쏠려 있었다. 盧椿이 그 方向으로 30里쯤 가니 풀밭에 鐘을 내리고 쉰 자리가 있었다. 只今'偈房'(쉰房)이라고 부르는 곳으로 길가에 있는 돌에 鐘 痕跡이 뚜렷이 남아 있다고 한다.

盧椿이 다시 千如 걸음을 더 가니 文殊菩薩이 중차림을 하고서 부처들이 간 곳을 일러주었다. 또 千 걸음을 더 가니 앞에 높은 고개가 가로막았다. 고갯마루에 채 오르기 전에 한 女子 중이 돌에 걸터앉아 있는데 부처들은 못보았느냐고 물으니 西쪽을 가리키면서 막 떠나갔다고 하였다. 그 女도 亦是 文殊菩薩의 變身이었다. 只今 그 바위를 '니유바위' 或은 '尼臺'라고 한다.
盧椿 더 앞으로 가노라니 높은 山봉우리로 한 가닥 길이 빙빙 돌았다. 문득 흰 개 한마리가 꼬리를 저으면서 나타나더니 盧椿 一行을 引導하였다. 只今의 狗嶺(開殘嶺)이 이곳이다. 고개를 지나서 목이 몹시 말라 땅을 파고 샘물을 찾아내니 只今의 盧椿 우물이다.
다시 6百 걸음쯤 가니 개는 없어지고 노루가 나타났다. 또 4百 걸음쯤 가니 노루도 자취를 감추었다. 사람들이 險한 山길을 가느라 暫間 둘러 앉아 쉬고 있는데 갑자기 鐘소리가 들려왔다. 노루가 나타난 곳을 노루목이라 하고 鐘소리 듣던 고을을 '歡喜嶺'이라 한다.
작은 고개를 하나 더 넘고 개울을 따라 들어가니 소나무 잣나무가 빽빽하게 들어 섰는데, 한 가운데 큰 못이 있고 그 北쪽에 큰 느릅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이 나무에다 鐘을 걸어두고 부처들은 못 가에 줄지어 서 있었는데, 異常한 香氣가 자욱하고 祥瑞로운 구름이 떠돌았다.

盧椿과 官屬들은 너무나 기뻐서 부처들을 바라보며 끝없이 머리를 조아렸다. 盧椿은 그 길로 돌아가서 國王에게 아뢰니 王도 놀라고 異常히 여겨 直接 그곳으로 갔고 스스로 佛敎信者가 되었으며, 그 蓮못 一帶를 메우고 다듬어 53佛을 모시는 절을 세웠다. 느릅나무 가지에 鐘을 걸어두었다고 하여 절 이름을 '楡岾寺'라고 한다.

그런데 그때 그 蓮못 속에는 심술 사나운 아홉 마리의 龍이 살고 있었는데 九龍은 53佛이 들어오자 자리를 讓步하려 들지 않았다. 그리하여 서로 才주를 부려 지는 便이 떠나기로 하였다.

먼저 龍이 造化를 부려 雷聲霹靂을 일으키고 暴雨가 쏟아지게 하였는데 부처들은 如前히 느릅나무 위에 앉아 있었다. 그 다음 부처가 '火'字를 써서 못에 넣어 물이 끓게 하니 九龍이 견디다 못하여 西쪽의 九龍沼로 옮겨 가서 살았다. 부처가 다시 그들을 排斥하므로 九龍은 오늘의 九龍淵으로 옮겨갔다.
九龍沼의 돌이 우묵우묵 패어 있어 크고 작은 독을 물 속에 넣은 것 같기도 하고 돌확을 깊이 파놓은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을 九龍이 살던 자리라고도 하고 九龍이 달아날 때 돌을 뚫고 나간 자리라고도 한다.
이 곳에는 本來 우물도 샘도 없어서 중들이 날마다 쓰는 물을 우물에서 길어와야 했는데 매우 힘이 들었다. 어느 날 수많은 까마귀들이 절의 東北쪽 모서리에 모여서 까욱까욱 떠들면서 땅을 쪼아대니 샘물이 터져 나왔다. 只今 '烏琢井'이라 불리우는 우물이다.

뒷날 중 한 사람이 53佛이 오랫동안 香불에 그을려 시커멓게 된 것을 딱하게 여기고 金빛 바탕을 드러내기 위하여 잿물을 끓여서 부처들을 씻었더니, 갑자기 우뢰가 울고 暴雨가 쏟아지면서 五色구름이 充滿된 가운데 53佛은 모두 들보 위에 날아올라가 줄지어 섰다. 그 中 3個의 부처는 空中 높이 날아갔는데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중은 너무나 얼이 나가서 精神病者가 되어 죽고 말았다.
그 後 연충이라는 중이 모자라는 부처들을 補充하려고 부처 셋을 鑄造하였는데, 그 前부터 있던 부처들이 모두 排斥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부처들은 밤中에 꿈에 나타나 다른 佛像을 우리들 사이에 두지 말라고 일렀다.

훗날 사라진 세 부처의 行方을 알게 되었다.
둘은 九淵洞(楡岾寺 뒷골)의 萬 길이나 되는 絶壁에 올라가 있었는데, 사람의 힘으로 올라갈 만한 곳에 있던 부처는 本자리에 갖다 두었으나 올라가지 못하는 곳에 있던 부처는 그냥 두는 수 밖에 없었다. 부처 하나는 水晶寺 뒤 絶壁에 있었는데, 중들이 사다리 몇개를 이어 가지고 올라가려다가 그만두었다고 한다.

이밖에 楡岾寺 鐘이 靈驗하다는 얘기도 여러가지가 있다. 큰 가뭄이 들 때마다 이 鐘을 물로 씻으면 비가 내렸다고 한다. 그러나 鐘에서 津液이 나오면 나라에 災殃이 닥치는 等 祥瑞롭지 않은 일이 생겼다고 한다. 한때 山불이 나서 그 불길이 楡岾寺 절間까지 번져 왔는데 鐘에다 물을 끼얹었더니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 불길이 꺼졌다는 이야기도 傳한다.


(17) 二十 年 고개 傳說


옛날 아주 먼 옛날 高麗王朝가 끝나고 朝鮮時代로 넘어갈때쯤 高麗에서 官職을 지낸 한 夫婦가 金剛山의 內金剛을 오르고 있었다.
그들은 亡한 高麗 땅을 를 떠나 俗世를 등지고 恨 많은 政治판을 뒤로하고 夫婦 둘이서 오손도손 살기 爲해 깊은 江原道 金剛山을 찿아 올랐다.
險한 山길을 헤치고 繼續 나아가던 그들이 어느 程度 깊숙히 들어 갔을때 였다.
갑자기 앞에서 구름을 탄 老人이 나타나
"너희들은 너무깊이 들어 왔노라, 當場 山을 내려가라"
老人은 그들이 高麗王朝에 對한 忠心으로 俗世를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여긴 너무 깊은 곳이니 當場 내려가라 하고는 사라졌다.

老人의 말에 아내는 그만 돌아가자고 하였으나
男便은 拒絶하여 結局 움幕을 짓고 열매와 山나물을 캐먹으며 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나물을 캐던 夫婦였다.
" 여보, 이것 보세요! 異常한 꽃이에요."
아내가 소리치는 쪽으로 달려갔다.
"아니, 이건 童蔘인것 같아. 어릴 때 말로만 듣던 童蔘..." 그랬다.
因緣이 없는 사람에게는 나타나지 않는다던 童蔘이었던 것이다.
男便은 곧 캐내려 했다.
"여보 不吉해요. 캐지 맙시다. 우리가 只今 急히 必要한 것도 아니잖아요."
그렇게 아내가 가로막았으나 男便은 寶藥이라도 하자며 結局 캐내기 始作했다.
그런데 異常한 일이 벌어졌다.
童蔘을 캐내기 始作하자 童蔘에서 피가 흐르는 것이었다. 그들은 疑訝해 했다.
"내가 千年이나 기른 童蔘을 파 내다니!"
우렁찬 소리와 함께 옛날 그 老人이 나타났다. 老人은 怒氣를 띠며 말하였다.
"피를 흘리는 童蔘은 이제 살릴 수 없는데 어쩌겠는가!"
夫婦는 엎드려 빌기 始作하였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며 謝罪하는데도 老人의 火는 풀릴 줄 몰랐다. 얼마가 지났을까...
老人은 容恕를 求하는 그들에게 말하였다.

"그대들은 앞 개울 맑은 물을 길러 童蔘이 있는 곳에 20年 동안 물을 부어라.
그러면 20年 뒤 童參은 다시 살아날 것이고 그대들에게도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그 後 그들은 꼬박 꼬박 시키는 대로 하였다. 눈이 오든 비가 오든 相關하지 않았다.
그리고 20年째 되던 날 正말로 童蔘은 다시 살아나 꽃을 피우는게 아닌가...!
그리고 胎氣가 없던 그 女에게 아기가 생기게 되었다.
훗날 아기는 커서 朝鮮으로 國號가 바뀐 나라에 큰 벼슬을 하게 되었다 한다.
이런 일이 있은 後 金剛山에있는 그 고개를 二十年 고개라 붙여졌다 한다.

(18) 正陽寺 木針을 잃어버린 龍의 아들


高麗 忠肅王 13年(1326) 王師 祖衡이 正陽寺의 藥師殿을 다시 세우는 工事를 始作했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어린 少年이 일터에 찾아와 일하기를 請했다. 이에 중들이 따져 물으니 少年은 이렇게 對答했다.
"저는 龍華라고 하는 16歲 少年으로 江陵에 살고 있습니다. 듣자 하니 이곳에서 藥師如來의 殿閣을 다시 짓는다고 하기에 저도 木手일을
돕고자 이렇게 왔습니다. 저에게 木針(나무못) 깍는 일을 맡겨 주십시오."

여러 중들은 나이가 어린 것을 憂慮하여 木針 깍는 일을 맡겨주려 하지 않았다.
그는 正 그렇다면 自己 솜씨를 한 番 보고 나서 시켜달라며, 큰 통나무 하나를 골라와 暫間 사이에 몇 個의 토막을 내고 다시 손질하여
木針 덩이 만한 것을 척척 깎아 내는 것이었다.
그 솜씨가 실로 날래고 익숙하여 몇十 年 동안 大木일을 한 사람에 決코 뒤떨어지지 않았다.
"어디서 배웠는지 정말 훌륭하구나. 그럼 일을 맡아 보아라."
少年은 날마다 數十 個의 木針을 보기 좋고 正確하게 만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少年이 만든 木針은 산더미를 이룰 만큼 많아졌다.
너무나 感歎한 王師와 중들은 슬그머니 장난기가 돌아 議論하기를,
"저 애가 만든 것을 하나만 슬쩍 감추어 봅시다.
正말 똑똑한 아이라면 알 것이요 그렇지 않다면 넘어갈 것이 아니오"
하고는 實行에 옮겼다.

며칠 後 殿閣을 지을 部材가 모두 마련되었다.
이젠 그것들을 造立만 하면 되었다.
少年은 自身이 만든 木針을 用途와 模樣에 따라 分類하기 始作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큰 소리를 내며 엉엉 우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왜 그러느냐"고 하자 少年은 이렇게 對答했다.
"저는 只今까지 여러 劫年(佛敎에서 한 劫은 數 千, 數 萬億年이 된다는 오랜 時間)을 두고 부처를 爲해 일해 왔습니다.
그 동안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도 失手를 한 적이 없지요. 그런데 오늘 나의 誠意가 모자랐는지 分明히 數效를 따져가며 만들었거늘 木針 한 個가 보이질 않아요."
王師와 중들은 혀를 내두르며 木針을 가져다주고는 事實대로 말해 주었다.
그러자 소년은
"나는 南海에 사는 龍의 아들인데 龍王의 命令을 받들고 여기 왔었죠"라는 말만 남긴채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다.
아무리 찾아도 그의 行方을 찾을 수 없었다.
只今도 正陽寺 藥師殿 天障을 짜올린 構造物 가운데 나무토막 部材 하나가 비어 있는데, 그것은 少年 木手가 한 番 잃어버린 것은 不淨탄 것이라며 다시 쓰지 않아서 그렇다고 전해져 온다.

(19) 貪慾스러운 중 明學의 後悔


內金剛 明鏡臺區域의 靈源洞은 造塔場에서 靈源洞 골짜기 막바지인 白馬峰에 이르는 地域을 말한다. 金剛山에서 가장 깊고 고요한 곳으로 알려진 靈源洞에는 개울 물 흐르는 소리, 이름 모를 새들이 우짖는 소리만 잔잔하게 들려온다. 그런 가운데 우뚝 솟은 地藏峰(1,381m)을 背景으로 탁 트인 곳에 ‘靈源庵 터’가 자리하고 있다. 靈源庵 터 西쪽에는 여기저기 높이 솟은 봉우리들이 있고 奇妙한 돌기둥들도 들쑥날쑥 서 있다. 只今은 燒失되고 없지만 靈源庵은 金剛山 一員에서도 가장 맑고 고요한 修道處로 알려졌었다. 新羅 때 靈源祖師라는 스님이 이곳에 살면서 道를 닦았는데 그와 그의 스승인 明學에 關한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傳해오고 있다.

옛날 慶尙道 東萊郡 梵魚寺에는 明學이란 스님이 寺刹의 방앗간과 田畓 管理의 責任을 져서 數千 石이 넘는 財産을 管理하고 있었다. 그의 勤勉으로 寺刹의 財産이 많이 늘었고, 그도 補酬로 받은 것과 방앗간 바닥에 떨어진 쌀을 주워 모아 貯蓄한 것이 적지 않았다. 明學은 僧侶의 身分이었지만 이렇게 모은 쌀을 빌려주고 利子를 놓아 私有財産이 많아졌다. 그래도 그는 物慾을 버리지 못하고 財産을 늘리는 데 재미를 붙이고 있었다.
明學은 비록 學問과 知識이 없었으나 百如 名이 넘는 行者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 中에 靈源이란 上佐 (스승의 代를 이을 여러 僧侶 가운데 가장 높은 사람)가 있었는데, 그는 스승과 달리 財物에 대한 慾心을 超越한 채 오직 參禪工夫에만 專念하였다. 明學도 이를 奇特하게 여겨 恒常 말하기를,
“나는 行者가 百如 名이 되어도 쓸 만한 者는 우리 靈源이 하나밖에 없어….” 하고 稱讚하였다. 그리고 가끔 靈源이 찾아오면,
“내가 나이가 많아 언제 죽을지 모르니 내가 죽거든 자네가 薦度를 잘해주게….” 하고 付託했다.

그러던 어느 날 靈源은 佛道를 깨치려면 깊은 山 속에 들어가 道를 닦아야겠다고 決心하고 스승인 明學에게 金剛山으로 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明學은 그를 挽留할 수 없어서 그렇게 하라고 許諾해주었다. 이에 靈源은 혼자서 金剛山 깊은 골짜기인 靈源洞에 들어가서 景致 좋은 곳에 庵子를 짓고, 十如 年 동안 마음 修養에 힘쓴 結果 佛法을 깨닫게 되었다.

하루는 靈源祖師가 靈源庵에서 參禪하던 중 禪定에 들었는데, 明鏡臺 앞의 시왕봉(十王峯) 밑에서 罪人을 다스리는 소리가 天地를 震動하듯 들려왔다. 살펴보니 閻羅大王이 座定하고 判官들이 늘어선 가운데,
“이番에는 梵魚寺의 중 明學을 데려오너라.” 라고 하였다. 그러자 地獄使者가 “네이!”하고 對答하더니, 明學을 끌어내어 뜰 앞에 꿇어앉혔다.
閻羅大王이,
“너는 일찍이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으면 戒行을 잘 지키고 道를 닦아 衆生을 救濟해야 하거늘 어찌 이를 忘却하고 財物을 貪하다가 罪를 지어 이곳에 왔느냐?” 하고 問招하였다.
“저는 비록 工夫는 못하였으나 罪를 지은 일은 없습니다.”
“네가 僧侶의 身分으로 財物을 모아 千石꾼이 되었는데도 罪가 없다고 하겠느냐?”
“그것은 제가 財物을 모으는 데 재미를 붙여서 쓸 것 안 쓰고 먹을 것을 먹지 않아 모은 財産일 뿐입니다. 決코 남의 것을 빼앗거나 害코지를 하여 富者가 된 것은 아니 오니 저는 罪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놈, 잔소리 마라. 너는 부처님이 說한 戒律을 지키지 않았을뿐더러 財物을 모으고자 남에게 不當한 處事를 하였으니, 어찌 罪가 없다고 하겠느냐!”
“저의 財産은 寺刹을 管理하고 布施하기 爲한 것일 뿐이옵고, 다른 罪들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自白을 아니하고 버티는 것이냐! 여봐라 明鏡을 가져오너라.”

閻羅大王이 明鏡으로 明學을 비추니 그가 生前에 行했던 잘못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그림처럼 나타났다. 이를 본 明學은 하는 수 없이 머리를 숙였다.
“네가 只今 똑똑히 보았겠지. 이래도 딴 말을 하겠느냐!”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네가 중이었던 것을 考慮해서 무서운 地獄에 보내지 않고 구렁이의 形體를 씌워 보낼 것이니, 千 年 동안 엎드려서 反省해 보아라.”라고 하였다. 그러자 明學은
“우리 上佐 靈源의 行實을 本받았다면 내가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인데…, 이제 와 後悔한들 무슨 所用이 있겠나! 靈源아, 부디 네가 나를 잘 薦度해다오.”
이런 스승의 목소리가 靈源祖師의 귓전에 生生하게 들려왔다.
그는 急히 十王峯 아래에 가서 念佛과 讀經을 하였고, 그 길로 바랑을 메고 數百 里나 떨어진 梵魚寺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가 梵魚寺에 가보니 스승은 이미 世上을 떠났고, 明學의 49齋날을 맞아 百如 名의 行者들을 비롯해 寺刹의 스님과 田畓地의 小作人까지 모여 奔走했다.

靈源祖師가 슬피 울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절間에 있던 여러 스님이 입을 모아 하는 말이, “너는 남의 上佐인데 어디 가서 떠돌다가 十 年 넘게 돌아오지 않았느냐. 只今 비로소 돌아온 것을 보니 分明히 스승의 財産을 나누어 가지려는 속셈인게로구나.” 하고 빈정거렸다.
하지만 그는 그런 소리에 開議치 않고 自身의 잘못을 謝罪했다. 그리고 쌀을 求해 멀겋게 죽을 쑤어서 큰 그릇에 담아 倉庫 앞에 두고, 明學의 魂魄이 나오기를 바라며 祝願하였다. 그랬더니 큰 구렁이 한 마리가 倉庫에서 기어 나왔다.

靈源祖師는
“스님, 이러한 業報을 받은 것은 前生에 佛·法·僧 三寶와 戒行을 지키지 않고 貪心으로 財物을 모은 까닭입니다. 이 죽을 잡수시고 속히 解脫하여 허물을 벗으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구렁이가 눈물을 흘리며 죽을 다 먹은 뒤에 靈源에게 말했다.
“슬프도다! 스님이여! 헛된 것들을 사랑하고 執着하지 말았어야 했거늘…. 나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 이 허물에서 벗어나고자 하오이다.”
말이 끝나자 구렁이는 스스로 머리를 들어 땅에 세 番 곤두박고 죽었다.
이를 지켜본 僧侶들이 매우 놀라는 渦中에 구렁이 밑에서 파랑새가 나오더니 어디론가 날아갔다.
靈源祖師가 이것을 놓치지 않고 뒤쫓아 가니 어떤 마을의 全氏 집 안房으로 들어간다.
다음 날 靈源祖師가 그 집에 가서 말하기를
“이 宅에서 열 달만 지나면 반드시 貴한 童子를 낳을 것이니, 愛之重之 잘 키워 7歲가 되거든 나에게 맡겨 道를 닦게 하시오.”라고 當付하였다. 그 집主人은
“스님의 말을 銘心하여 꼭 그대로 하겠나이다.” 하고 對答하였다.
열 달이 되니 果然 아들을 낳았는데 얼굴이 端正하였다. 그 집主人은 이 아이를 잘 키워 7년 후에 찾아온 靈源祖師에게 맡겼다. 그는 아이를 靈源庵으로 데려가서 房안에 가두고 밖에서 門을 잠갔다.
그리고 門에 작은 구멍을 뚫어놓고 이 門구멍으로 門 앞에 있는 황소가 들어올 때까지 熱心히 精進하라고 일러주었다.
童子는 똑바로 앉아 밤낮으로 工夫하더니 門구멍으로 황소가 뛰어드는 것을 보고 悟道하여 前生의 모든 事實을 깨닫게 되었다.

童子가 靈源祖師를 보고 말하기를,
“스님이 前生에 나의 上佐였구려! 그런데 이제는 스님이 나의 스승이 되어 내가 스님의 어린 上佐가 되었군요.”
“그렇다. 이것이 佛敎에서 말하는 因果라는 것이다. 참으로 多幸스러운 일이다.”
靈源祖師는 7歲 童子와 前生의 일을 얘기하며 웃음꽃을 피웠고, 두 스님은 같은 道人으로서 오랫동안 金剛山에 머물면서 修道에 精進하였다. 以後 明學의 後身인 이 스님을 後源祖師(다시 태어나 佛道에 通達한 스님)라 하였고, 靈源祖師가 지은 庵子를 靈源庵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20) 穴望峰 傳說

(內金剛의 穴望峰은 山봉우리 꼭대기에 큰 구멍이 나서 하늘이 내다보인다고 하여 생겨난 이름이다. 穴望峰 傳說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첫 째로,
아득한 옛날 땅이 생겨날 때 이 山은 完全히 바다 밑에 잠겨 있었다.
바다 밑의 山 속에는 큰 窟이 있었고 거기에는 큰 龍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바닷물이 줄어들면서 山은 陸地로 되고 窟은 막혀버렸으며 龍은 바다와 동떨어지게 되었다.
물 속에서 살던 龍은 바다로 나가기 爲하여 어느날 밤 벼락神을 불러다가 山을 꿰뚫어달라고 要請하였다.
천둥소리가 나자 龍은 벼락神과 合勢하여 죽을 힘을 다해서 山꼭대기 한 모퉁이를 뚫고 바다로 뛰어들어갔다. 穴望峰의 구멍은 이 때 龍이 뚫고 나간 자리라고 한다.

둘 째로,
옛날에 東海에는 다섯 個 山이 둥둥 떠 있었다. 그 中 두 個의 山은 큰 자라가 와서 업고 바다 속 깊이 들어가버렸다.
하늘의 玉皇上帝는 나머지 세 個의 山들도 내버려 두면 이렇게 잃어 질까봐 근심이 되었다. 그는 우뢰神에게 도끼를 가지고 山을 쪼아 구멍을 내고 별로 새끼를 꼬아 그 구멍을 꿰어 玉梁상원봉에 매어두게 하였다. 그 後 歲月이 흘러 바다는 물러가고 山의 밑뿌리는 땅바닥에 닿았다. 또 오랜 歲月이 지나는 동안에 새끼도 썩고 별도 흩어져 버렸는데 그 때에 내었던 구멍은 아직도 남아 있다.

셋 째로,
옛날 하늘 世界에 한 神仙 官吏가 있었는데 그는 玉皇上帝의 사람과 두터운 信任을 받았다. 그러다 보니 그는 漸次 驕慢해져서 眼下無人格으로 노는 일이 잦아졌다.
여러 神仙 官吏들이 憤慨하여 그를 내쫓자고 들고일어났기 때문에 玉皇上帝도 할 수 없이 그를 땅으로 보내 귀양살이를 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그를 至極히 사랑했던 玉皇上帝는 한便으로 그가 불쌍하게 생각되어 땅위에 내려보내면서
『宮殿 안에 있는 物件 가운데 무엇이든지 네 마음에 드는 것을 가져라.』고 하였다.
그는 王宮 안에 있는 돌로 만든 假山을 달라고 要請하였다. 그 假山으로 말하면 奇奇妙妙하게 만든 것으로서 王宮안의 寶物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貴重한 것이었다.
玉皇上帝는 매우 難處하였으나 一但 무엇이나 주겠다고 約束한 以上 안 된다고 말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크게 마음먹고 許諾하였다. 귀양가는 神仙 官吏는 承諾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그 假山의 한 봉우리에 구멍을 뚫고 끈을 꿰어 땅위로 가져왔는데 그것이 바로 奇妙한 金剛山의 穴望峰이다.

넷 째로,
옛날에 帝釋菩薩이 世上 萬物을 만들어낼 때 第一 아름다운 風景을 가진 山을 하나 創造하느라고 온갖 心血을 다 기울였다.
그것이 바로 金剛山이다.
金剛山을 다 만들어 놓고 보니 몇 數十 億萬 年이 지나면 다시 땅덩어리도 없어지겠는데 그때 이 山도 함께 破壞되어버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自己의 모든 才能과 精力을 다 들여서 만든 金剛山이 破壞되는 것을 차마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그래서 그러한 天地開闢이 다시 올 때 金剛山만은 도로 하늘에 끌어올려 그대로 保存하려고 마음먹고 山봉우리에 다 구멍을 뚫어두었다.
그 구멍 있는 봉우리가 다름 아닌 穴望峰이다.


(21) 海金剛 夫婦바위 傳說 (高城 사람들 夫婦 사이가 좋은 理由)

海金剛의 叢石亭 아래에는 義좋게 나란히 서 있는 두 個의 叢石이 있다. 이 叢石을 夫婦바위라고 한다. 이 바위에는 사이가 나쁘던 夫婦가 和睦하게 살게 된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옛날 叢石亭 마을에는 사이가 나쁜 夫婦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몹시 다투고는 더는 함께 살 수 없다고 斷定하고 故鄕 마을을 떠났다.
그때 바닷가에서
"게 섰거라!" 호통치는 소리가 들렸다.
海金剛 夫婦바위가 크게 怒하여 마을을 떠나는 夫婦를 불러 세운 것이다.
男便바위는 男便과 헤어지려는 아내를 向해 섰고, 아내바위는 아내에게서 떠나는 男便을 向해 서게 되었다.
"當身네들이 그렇게 사이가 나쁘다니 오늘부터 나하고 사는 것이 어떠냐?"고 各各 묻는 것이었다.

어느덧 男便 앞에는 絶世의 美人이 微笑를 띠며 걸어가고 있었고, 아내 앞에는 風采좋은 美男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기쁜 마음으로 새로운 사람과 夫婦가 될 것을 期約하고, 마을로 돌아와 새 집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그런데 다음 날 깨어보니 집은 自己가 살던 집 그대로였고, 相對는 함께 살아온 男便과 아내도 그대로였다.
서로 놀라서 어쩔 줄 모르는데 夫婦巖 쪽에서 "듣거라. 父母가 定해준 配匹이 곧 하늘이 맺어준 配匹이니 義좋게 살지 않으면 天罰을 받을거다"고 嚴하게 꾸짖는 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해서 사이가 나빴던 夫婦는 그동안의 일을 後悔하고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오래 오래 幸福하게 살았다고 하며 以後 이 地方에는 사이 나쁜 夫婦가 없어졌다고 한다.

(22) 虹蜺橋 傳說 (慾心 많은 중을 곯려준 道士)


虹蜺橋 뒤에 鉢淵寺터가 있는데 이 절에 慾心 많은 중이 살고 있었다. 이 중을 곯려준 이야기는 오래 前부터 金剛山 周邊 사람들에게 널리 傳해져 온다.
鉢淵寺 중은 얼마나 慾心이 많았던지 마을 住民으로부터 한결같이 미움을 받고 있었다.
그는 財産을 모으기 爲하여 富者집 아낙네들 앞에서는 阿諂하면서 가난한 農民들에게는 自身의 財産을 통틀어 바치도록 온갖 權謀術數를 다 썼다. 그러면서 齋를 올리거나 佛供을 드린 뒤 남는 飮食은 但 한 조각도 나누어 먹지 않았다.

하루는 허술한 차림새의 白髮의 道士가 鉢淵寺 골짜기에 올라와 四方을 두루 살피며 山水를 보았다.
개울 건너편은 고양이 한 마리가 露積峯을 지키고 있는 形局이고 개울쪽 鉢淵寺터는 늙은 쥐가 穀食 밭에 앉은 形局이었다.
白髮 道士는 이것을 고양이가 다리 없는. 개울을 건너오지 못하므로 鉢淵寺의 쥐가 民家의 낟알과 밭에 흩어진 穀食들을 마음대로 훔쳐 먹어 배를 불리고 있는 것으로 解釋했다.
여기까지 생각한 道士는 그렇지 하고 무릎을 치고 滿足스러운 表情으로 흰 鬚髥을 쓰다듬었다. 山勢를 利用하여 鉢淵寺 중을 곯려 주리라 마음먹은 것이다. 道士는 천천히 발길을 돌려 鉢淵寺로 내려왔다.
이 날도 鉢淵寺 중은 盛大한 佛供 儀式을 끝내고 긁어모은 財産을 바라보며 恰足해 하고 있었다. 佛供에 쓴답시고 받아들인 낟알이 많은 데다가 푸짐한 飮食들이 수북히 쌓여 있었던 것이다.

이 때 중 앞에 나타난 道士가 療飢 좀 하고 가자고 請하였다. 그러나 慾心 많은 중은 道士의 허술한 옷차림을 보고 斷乎하게 拒絶해 버렸다.
道士는 이 말을 듣자 혼자서 무엇을 중얼거리며 중을 辱하였다.
"돌중놈 같으니라구. 길손을 迫待하면서까지 財物을 모아보라지. 절 앞 개울에 무지개 다리를 놓기 前까지는 富者가 되지 못할 걸..."
道士의 말에 口味가 당긴 중은 사라져 가던 道士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갑자기 뛰어가 道士의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方今 하신 말이 무슨 뜻인지 가르쳐 주겠소?"
道士는 못기는 척 하다가 이렇게 말한다.
"鉢淵寺터는 늙은 쥐가 人家에 내려와 앉은 形局인데 江 건너 고양이가 무서워 저 露積가리 낟알을 훔쳐오지 못하고 있소. 여기에 다리를 놓으면 고양이는 다리를 건너 어디로 가버릴 것이고 쥐는 다리를 건너가 낟알을 훔쳐오게 될 것이니, 그때는 富者가 될 것이 아니오."
중이 周圍를 살펴보니 맞는 것 같았다.

그래서 慾心 많은 중은 財産을 털어 石材를 사고 人夫를 사서 다리를 만들었다. 이것이 오늘날 '虹蜺橋'이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다리를 놓은 다음부터 道士의 말과는 다르게 되어갔다. 다리를 놓으니 고양이의 活動 領域이 넓어졌다. 고양이는 如前히 露積峯을 지키고 있을 뿐 아니라 番番히 다리를 건너와서 民家에 드나들게 되었으니 밭에 흩어져 있는 낟알조차 훔쳐 올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중은 속았구나 하며 恨歎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結局 중은 떠날 수 밖에 없었고, 鉢淵寺는 텅 비었다가 只今처럼 터만 남게 되었다고 한다.

(23) 孝養 고개 傳說 (眞表律師의 孝心어린 傳說 傳해져)


外金剛 바리소골에서 松林골「안새미」로 넘어가는 높은 고개가 바로 孝養고개이다. 이 고개의 이름이 생겨난 데는 다음과 같은 事緣이 있다.
8世紀 後半期에 眞表律師라는 스님이 있었다. 그는 原來 全羅道 碧骨郡(全羅北道 金堤) 사람이었는데 열 두 살에 집을 떠나 중이 되었고 佛敎 工夫를 많이 해서 當時에 이름난 學者 스님으로 되었다. 金山寺(全羅北道 金堤郡 琴山面), 俗離山 等地를 거쳐 金剛山에 들어와서 金剛山을 두루 살펴보고 난 그는 鉢淵沼골이 景致도 좋고 절터로도 安城맞춤이라 생각하고 여기에 鉢淵寺라는 절間을 처음 세웠다.

그는 後에 故鄕 땅에 가서 父母님을 金剛山으로 모셔왔다. 아버지는 함께 鉢淵寺에 있다가 얼마 後 돌아가셨다. 그런데 어머니는 女子이므로 절間에 모시지 못하고 고개 너머 안새미골에서 살게 하였다.
孝誠이 至極하였던 그는 어머니를 잘 奉養하기 爲하여 조금씩 생기는 쌀이 있게 되면 二十里 밖에 있는 어머니한테 가져갔다. 그뿐 아니라 어머니가 혼자서 외로워 한다고 하여 몹시 추운 날이나 더운 날에도 하루 세끼를 어김없이 險한 고개를 넘어가서 제 손으로 밥을 지어 奉養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世上에 보기 드문 孝子가 넘나들던 고개라고 하여 이 고개를 孝養고개라고 불렀다.

그 의 孝誠과 關聯하여 부처가 도와서 쌀을 보내주었다는 傳說도 傳한다. 鉢淵寺 附近에 帝釋佛像을 새긴 큰 바위가 하나 있었다. 이 바위는 '在米巖' (쌀을 가져다 주는 바위)이라는 別名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위 아래쪽에 작은 구멍이 하나 있는데 眞表律師가 너무도 至極하게 어머니를 섬기는데 感動된 부처께서 하루에 한 되씩 쌀이 흘러나오게 한 구멍이라 하여 그렇게 불렀다 한다.
또 하나의 傳說은 옛날 鉢淵寺 앞산 고개 너머 마을의 農家에 한 孝子가 가난한 살림에 홀어머니를 奉養하며 살고 있었다. 이 孝子는 끼니마저 이을 수 없게 되어 세끼 밥만 주는 鉢淵寺 심부름꾼으로 일하며 한 사람의 배도 채울 수 없는 飮食이지만, 어머니를 爲해 하루도 빠짐없이 세 番씩 이 고개를 오르내렸다 하여 이 고개이름을 孝養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
孝養고개 傳說은 父母에게 孝誠을 다하는 天倫과 民族의 美風良俗을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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