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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후산 강인구 선생 영암신문 기사 내용중 ( 후정리 병재 형님댁)

작성자망호정|작성시간11.09.14|조회수175 목록 댓글 0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선도농업으로 가난극복

 

   
망호리 후정부락의 강인구·조복심 부부의 생전모습. 이들은 가난 속에서도 7남매를 모두 훌륭하게 키워 주위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망호리 후정부락에 들어서니 포근한 겨울을 뒤로하고, 무자년(戊子年) 새해맞이 대설을 흠뻑 둘러쓴 300년 된 큰 팽나무가 그립던 가족들을 맞이하고 있다. 큰 팽나무집의 자손들은 부모님의 얼이 깃든 보금자리에서 뜻있는 연말연시를 보내기 위한 가족모임 행사를 갖고자 경향 각지에서 눈길을 마다하고 달려왔다. 아마도 우리 모두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인연은 바로 부모와 가족간의 인연이리라! 누구나 때때로 지난날 부모님과 가족간의 값진 추억이나 부모님에 대한 잊을 수 없는 애틋한 그리움에 잠못 이루고 회한에 젖곤 한다.

 

큰 팽나무집의 자손들도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바로 엊그제인 듯 선명히 각인되어 있는 부모님과의 옛 추억에 애틋한 그리움으로 회상에 젖는다.

 

후정리 강인구 선생은 유난히도 장남만을 선호하였던 선친의 슬하에서 5남매 중 차남으로 1920년 태어나 영암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강진농업학교에 재학 중인 형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서당에서 한문수학을 했다. 이후 일본에 징용으로 끌려가 탄광에서 노역을 하던 중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 1942년 무사히 귀향했다.

 

부인 조복심 여사는 강진군 칠량면 송정리 부농의 집안에서 1924년 장녀로 태어나 조부의 교육관 때문에 학교는 문턱에도 디뎌보지 못했지만 육십갑자(六十甲子)는 훤하고 사소한 일까지 정확히 기억할 뿐 아니라 석·박사인 자녀를 능가하는 뛰어난 지능을 갖춘 분이었다.

 

두 분(나중에 후산댁)의 신혼생활은 마을 중심에 위치한 대문안댁 문간방에서 품팔이로 시작되었다. 이후 슬하에 4남3녀를 두고 자녀교육과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농한기와 밤에는 새끼를 꼬고, 무명베를 짜서 살림을 불려나갔다. 배마태에 있는 문중소유의 토담집으로 이사한 뒤에도 부근 화물선의 하역작업에도 뛰어들어 5년 만에 1천평의 논을 장만했다.

 

자신의 토지를 갖게 되자 퇴비를 만들어 지력을 높이고 농사법을 개량하여 다수확 농사를 선도해나갔다. 별을 보고 들에 나가 달을 보고 귀가하는 세월이 수년간 이어지다보니, 큰팽나무집도 소유하게 되었다. 1960년에는 비로소 4천여 평의 농경지를 소유한 부농의 꿈을 이루게 되었다. 하지만 이들 내외는 자신의 안위 보다는 자식들의 교육에 더욱 혼신을 다했다. 자녀들의 학비라면 어렵고 고된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7남매 교육에도 혼신

그러나 7남매의 교육비를 감당하기에는 쌀·보리농사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이에 일찍이 원예·채소재배에 눈을 돌리고 일본 농업서적을 구해 밤낮으로 공부했다. 토질을 개량하고, 그에 맞는 우량품종을 구하여 온상재배 및 터널재배법을 도입했다. 밭 700여 평에는 배추, 오이, 토마토, 호박, 당근, 생강, 대파 등을 생산하면서 또 1천여 평의 밭에는 배, 사과, 복숭아, 감 등 과수를 심어 미래를 대비했다.

 

그리고 추울 때나 더울 때, 궂은 날씨를 가리지 않고 달빛, 별빛을 벗삼아 가며 1등 상품을 만들어 냈다. 이윽고 영암읍 5일시장, 매일시장에서는 후산댁 채소만 찾게 되었다. 이처럼 채소가 인기리에 고가에 팔리게 되자 이들 부부는 새벽 3~4시부터 채소를 머리에 이고, 리어카에 싣고 2km가 넘는 백년동 가파른 고갯길을 하루에도 몇 번씩 넘나들면서 배달하기를 수년째 되풀이했다. 결국 이들 부부는 일찍이 채소, 과일농사로 고소득을 창출하는 새 농민상이 되었다. 그리고 항상 몸에 밴 근검절약의 생활 때문에 음식점 등에는 가서는 안될것인 양 여기고 맛있는 음식 한번 변변하게 먹어보질 못했다. 더구나 외국여행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무에서 유를 창출한 일생, 그리고  7남매 모두를 고등교육을 시켜 성공한 인생으로 마을에서는 각인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 잠시 멈춘 듯 고즈넉한 옛 정취를 간직한 큰 팽나무집에서 7남매는 부모님의 애틋한 정이 스며온다. 부모님의 근검절약하는 습관이 이제는 자신들의 몸에 배여 생활력이 강하게 만들어 살아가고 있음이 언뜻 부모님 모습인 것을 깨닫게 된다. 모두가 우수한 성적으로 국립대학을 졸업하고 모범적인 사회생활과 유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었던 밑거름은 오직 부모님께서 몸소 보여준 생활이었기 때문이다. 그분에게 한없는 존경심과 감사한 마음 끝 간 데 없다. 그리고 후산의 자손이라는 긍지로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그렇지만 회한으로 남는 건 일에만 묻혀 사시던 후산 선생께서 회갑을 갓 넘기자 갑작스럽게 영면하시고, 부인마저 수년 전 손쓸 겨를도 없이 세상을 뜨니 천붕지통(天崩之痛)의 아픔이 가실 날 없다. 무자년 새아침, 자손들은 큰 팽나무집 뒷동산에 모신 부모님 산소에 머리숙여 기도하고 있다. 활성산 너머 국사봉 위로 찬란한 해가 떠오른다.    /명예기자단 자문위원=서부현

 

 

 

 

#형제들 우애도 남달라

 

   
망호리 후산 강인구 선생의 부인 조복심 여사(사진 중앙)의 고희연에서 직계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망호리 후산 강인구 선생 내외를 떠올리면 “가난의 대를 끊는 것은 농사와 교육에 힘쓰는 것이다”라며 혼신을 다한 일생은 가슴 뭉클한 감동과 함께 이 사회에 귀감이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교육문제로 고민하는 이 시대 모든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의 길을 암시한다.


후산선생의 일생은 “일하는 것이 기도하는 것이다”라는 실사구시의 신념을 세워 이를 철저하게 실행했던 삶이었다. 이 신념과 구체적인 실천들은 바로 자녀들에게 “학행일치는 기도하는 것”으로 체득되어 대물림되었다.


후산선생은 평소 “농사와 자식을 기르는 것은 단순히 생활의 방편으로만 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생명을 가진 식물이나 자식은 생기(生氣)를 불어 넣는 작업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 생기(生氣)는 진실하고, 선하며, 아름다운 사랑이다.


이의 구체적인 사랑만이 훌륭한 열매를 맺는다고 했다. 그 구체적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첫새벽부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눈발이 날리나’ 우물에서 떠온 정화수로 자식들을 위해 빌고 또 빌었던 새벽정성을 시작으로 억척스런 모습으로 한없는 인고의 모습을 지녔던 모정(母情), 술잔의 절반은 한숨과 눈물로 채워도 끝내 자식들의 진로를 위해 묵묵히 피땀을 쏟았던 부정(父情),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꿈과 희망을 잃지 않도록 격려해준 심성 착한 형제애는 오늘의 후산家를 이룬 밑거름이 되었다.


7남매는 부모의 바램과 우애 속에 자라서 모두가 영암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장남 병욱씨(62)는 광주농고와 전남대학교를 졸업하고 고흥, 장흥, 영암군산림과장과 전라남도 산림환경연구소에서 임업서기관으로 재직하다 농림부 이사관으로 퇴직하고, 지금은 후배들에게 기술을 지도하고 고향마을 가꾸기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차남 병우씨(58)는 광주일고, 전남대학교를 졸업하고 화공기술사 자격을 받아 삼성(그룹)엔지니어링에서 부장으로 퇴직한 뒤 협력업체에서 전무로 근무하고 있으며, 3남 병종씨(49)는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유학중 부친의 갑작스런 별세의 충격이 늘 가시지 않자 모든 것을 접고 일생지망구세(一生之望救世) 구료(救療)의 꿈을 안고 경희대 한의대에서 한의학 박사를 취득한 뒤 서울에서 한방병원을 개업,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막내 병재씨(47)는 광주고등학교와 전남대학교를 졸업하고 수자원관리기술사 자격을 획득, 현재 한국수자원공사 감사실장으로 재직 중이다.


#장조카 고향서 유업계승

장녀 금심씨(60)는 광주여고와 광주교육대학을 졸업하고 현재 서울에서 교직에 몸담고 있는데, 급성으로 생명이 위독한 외아들에게 자신의 간을 이식시켜 생명을 구한 헌신적인 어머니상으로 귀감이 되고 있다. 차녀 금희씨(56)는 공무원시험에 합격하여 재직 중 문단에 등단한 후 지금은 서울에서 창작활동에 전념하고 있으며, 3녀 금초씨(43)는 고향인 영암여자중고등학교에서 과학교사로 재직 중에 있다.


특히 큰 며느리 류헌자씨(60)는 영암초등학교 부장교사로 재직 중이던 2000년부터 악성 김창조 가야금산조의 맥을 잇기 위해 교육을 통한 인재육성이 매우 중요한 과제임을 인식하고 학부모, 학생과 협의하여 초등학생 30~45명으로 가야금부를 창단, 방과 후 열심히 수련하여 가야금산조 보급은 물론 각종 경연대회에서 우수한 실적을 내고 있다. 지금은 해남동초등학교에 재직 중이다. 이처럼 자녀 모두가 각계에서 열심히 활동하면서 사회에 이바지하고 있다. 이와함께 6명의 손자와 4명의 손녀를 두어 큰손녀는 연세대학교를 졸업한 후 LG  IT개발팀에서 근무하다 경희대학교 한의대에 재학 중이며, 큰 외손녀는 서울 아산중앙병원에서 전문의로 재직 중에 있다. 손자·손녀 모두 대학과 중·고등학교에 재직 중이다.


이처럼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일생을 희생적으로 살아온 후산 강인구 선생 내외의 후손들이 사회 저변에서 활동하기까지 자녀들을 향한 그의 교육적 사랑이 빛을 발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한편 후산선생의 유업을 계승한 큰조카 병원씨 등은 모범적인 독농가를 이루었다. 이들은 월출산 산조마을 권역(회문, 망호, 송평리)에 전통문화, 관광, 생물환경농업을 중심으로 개발할 꿈을 가지고 각자가 가진 재능과 자원을 투입할 것이라 한다.  <다음호 계속>                      /명예기자단 자문위원=서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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