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중
폴란드에서의 '마리' 의 삶 1
김: 뭐든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장면이나 느낌이 있으면 그대로
이야기합니다...
신: ..제 이름은 '마리'예요.
김: 어디에 있나요? 어떤 사람인가요?
신 : 저는 열일곱 살이고
여기는 폴란드예요... 남부의 플로낙?..
그 비슷한 이름이에요.
김: 자기에 대해 느껴지는 것들을
뭐든 이야기해보세요..
신: 앞머리 한가운데에
긴 가르마를 탔고 짙은색 금발을
양갈래로 땋아내렸어요...
동그랗고 통통한 얼굴에 주근깨가
조금 있는. 순진하고
멍해 보이는 표정을 하고 있어요..
사람들의 말을 알아듣기는 하는데
저 스스로 말을 하는 일은 거의 없어요..
가벼운 집안일을 하거나
창가에 앉아 길을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아요 ...
나는 학교에 다니지 않고,
아버지가 집에서 저의 선생님이에요 ..
아버지는 유쾌하고 활발한
사람이고 ..저의 완벽한 보호자예요 ...
어릴 때부터 저는 어머니가 없었어요..
어린 시절 어느 날인가 아버지가,
죽은 친구의 어린 아들을 집으로
데려오셔서 같이 살게 되었어요...
그 아이가 저의 새 가족이 되었는데,
이름은 '레온' 이고 저보다
세 살 정도 많았어요 ...
그가 저의 두 번째 보호자가 된거죠 ...
저는 두 사람의 절대적인
애정과 보살핌 안에서 조용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어요 ...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해서
거의 집 안에서 생활해 왔고,
꼭 필요한 경우에만
아버지나 레온과 함께 외출했다
되도록 빨리 돌아오곤 했어요..
집 밖에서 가끔 들리는 커다란
소음은 저를 몹시 괴롭혔어요..
말은 안 했지만 저도
아버지와 레온을 깊이 사랑해요..
레온은 아버지처럼 활동적이진
않았지만 따뜻하고 자상한 사람이었고.
저를 측은해하고 사랑했어요...
아버지는 우리가 좀 더 자라면
결혼시키고 싶어 하셨고..
우리 역시 그렇게 알고 자랐어요...
집 밖의 세상을 무서워했지만
그 두 사람만은 저의 작은 세계를
완벽하게 지켜주는 보호자들이었어요 ...
두 사람과 함께 있을 땐
이따금 웃고 말을 하기도 했어요...
어느 날 밤, 제게 들리지 않도록
목소리를 낮추어 아버지와
레온이 테이블 앞에서
무언가를 의논하는 모습을 보았어요 ....
그무렵 집 안으로 천이나 가죽에
싸인 종이 한 자루씩 들어왔고,
낮선 남자들이 늦은 밤에 조용히
찾아와 아버지와 레온을 중심으로
무언가를 의논하는
일이 점점 잦아졌어요 ..
밤늦게 이층에 있는 제 방에서
나와 어두운 계단 난간에 기대어
아래층에 모여 있는 남자들의
모습을 구경하곤 했어요..
집 안 어딘가에 여러 종류의 무기가
계속해서 모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무엇에 쓰려는 것인지 궁금했어요
낮이 되면 아버지와 레온은
제가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알고
한밤의 심각했던 표정을 감추고
유쾌하고 다정하게 저를 대했죠..
어느 깊은 밤 레온이
제 방문을 두드렸어요..
'어딜 좀 다녀오려고 해.
지금 출발해야 해서 깨웠어.
며칠 걸릴 거야. 곧 돌아올게'
그는 잠을 자다 일어나
잠옷 차림에 긴 머리를 풀고 맨발로
서 있는 저를 꼭 안아주였어요..
(긴장한 목소리로)
레온이 떠나고
며칠 지난 어느 날 아침,
현관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한 무리
의 군인이 집 안에 들이닥쳤어요...
그들은 저항하는 아버지의 머리를,
거꾸로 세워 든
총으로 사정없이 내리쳤어요..
저는 피 흘리는 아버지를 보며
질식할 것 같은 공포에 휩싸였어요...
무언가 말하고 싶은데
입만 벙긋거릴 뿐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아요 ...
아버지는 끌려가시며
제게 소리쳤어요..
'괜찮아, 금방 돌아올 거야 꼼짝 말고
집에서 기다려. 밖으로 나가지 마..'
저는 식탁 밑으로 들어가 웅크리고
숨었어요..두 팔로 무릎을
끌어안은 채 움직이지 않았어요...
밤이 오고, 다시 날이 밝고,
또다시 밤이 되었어요..
저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어요..
돌아온다고 했던 아버지와
레온의 말을 계속 생각하면서요..
이틀 혹은 삼 일 정도 지났을까..
문이 요란하게 열리면서 몇 명의
남자들이 집 안으로 들어왔어요..
여전히 테이블 밑에 웅크리고 있는
제 팔을 잡아 끌어낸 후 차에 실었어요 ..
그 사내들은 저택으로 보이는
큰 건물로 저를 끌고 갔어요..
군사용으로 지어진 것이 아닌,
커다랗고 제법 웅장한 저택이었어요 ...
그들에게 양팔이 잡힌 채로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거의
끌려 올라갔어요...
계단은 한 걸음을 올라갈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어요..
사내들의 걸음은 빠르고 거칠어서
저는 뛰다시피 끌려 올라가
어느 방 안에 밀어넣어졌어요..
캄캄한 그 방은
창가에 두꺼운 암막 커튼이 쳐 있어
빛이 전혀 들지 않았어요..
그들은 작은 알전구 하나가 켜져
있는 책상 앞 의자에 저를 앉혔어요
주위를 둘러보니 방안에
네 명의 남자가 있어요..
그중 한 명은
군인인 듯 장교 복장을 하고 있고
나머지 셋은 사복 차림이에요..
무섭고 혼란스러우면서도
어쩌면 그들에게 아버지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적인 생각도 잠깐 스쳤어요..
군복을 입은 장교가 군화 발소리를
크게 내며 천천히 다가왔어요..
그는 저에게 두 가지를 물었어요..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집에 차곡차곡 모았던 무기들을
싣고 떠난 레온의 행방,
그리고 깊은 밤이면 은밀히 집에
모여들어 아버지와 레온을
둘러싸고 수근거리던 사람들의
이름을 말하라고 했어요 ...
저는 몰라요..
모여들었던 사람들의 낯선 얼굴은
어렴풋이 기억하지만
이름은 몰라요... 아버지와 레온은
자신들이 하려는 일에 대해
제게 어떤 이야기도 해준 적이 없어요...
그들은 늘 제게 다정했고
제가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는
하지 않았어요..
집 밖으로 거의 나가본 적이 없는
저는 움직이는 정물처럼
그들 주위를 맴돌며 지내왔어요...
저는 멍한 표정으로
그 장교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어요.
잠시 후 세 남자가 다가와
옷을 모두 벗기고
몇 차례인가 채찍으로 때렸어요...
아픔과 공포때문에 몸이 얼어붙었어요.
이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뭐라도
말해야 하는데.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워요..
할 수 있는 말이 없어요.. 제가
대답할 수 없는 것들을 묻고 있어요..
사내들은 제 발목을 묶고 두 손목
을 등 뒤로 돌려 세게 묶었어요...
큰 방의 한구석에 도르래처럼
보이는 기계가 하나 놓여 있어요 ..
저를 그리 끌고 가 제 손목을 뒤로
묶은 밧줄에 고리를 걸고 도르래를
감아올려 제 몸을 공중에 매달았어요..
두 팔이 뒤로 꺾이면서 엄청난 통증이
덮쳤어요... 잠시도 견딜 수
없는 고통에 큰 소리로 울부짖었어요...
장교가 같은 내용을 다시 물어요 ..
대답하지 않으면 도르래의
줄을 풀겠다고 말해요 ...
저는 뭐라도 대답하고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아는 것이 없어요 ...
몸이 허공에서 흔들릴 때
초조함과 두려움이 마구 휘몰아쳐요...
허공에 매달린 마지막 1~2분,
그리고 마침내 밧줄이 휘리릭 소리를
내 풀리는 순간
나의 몸이 산산조각 난 유리창처럼
부서질 모습이 온 정신을 짓눌러요...
바닥으로 떨어질 때
몸을 최대한 웅크렸어요..
떨어지자마자 오른쪽 허리와
골반에 극심한 통증을 느끼며
정신이 아득해졌어요 ..
너무 아파 크게 소리를 질렀고 ..
잠시후...다리 사이로 따뜻한 피가
흘러나와 바닥에 고였어요
옆에 서 있던 장교가 독한 냄새를
풍기는 시가를 피워 물고 다가왔어요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그 불 붙은
시가를 천천히 제 다리에 눌러 지졌고..
바닥에 떨어진 채 움직이지 못하는
저는 그대로 기절해버렸어요..
시간은 계속 흐르는데.. 밤인지
낮인지 알수 없어요 ...꿈처럼 몽롱한
상태로 시간이 흘러가요...
며칠의 시간이 흐른 것같아요
갑자기 방문이 열리고
'끌어내라' 는 말이 들렸어요...
양쪽에서 남자 둘이 제 팔을 끼워
질질 끌다시피 데리고 나갔어요..
내려가는 계단 하나하나마다
저의 꺽인 무릎이
쿵쿵 소리를 내며 부딪혀요..
저택의 밖은 캄캄한데..
밤인지 새벽인지 알 수 없어요....
저택 입구에 포장을 친
트럭이 한 대 서 있어요...
저는 이미 올라탄 사람들 사이로
내던져지다시피 태워졌어요 ...
바람이 차갑고.. 색이 변한 잎사귀
들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어요 ...
1942년 10월경으로 느껴져요.
정해진 치료 시간을 10분 이상
넘기며계속 진행되는 그의 이야기를
나는 끊지 않고 들어주었다.
몇 번 숨을 고르기 위해 멈춘 것을
제외하고는 일사천리로
여기까지 이야기가 이어졌다.
나는 치료를 마무리하며
"순덕을 치료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마리를 치료해주세요.
집에서 혼자 틈날 때마다 자주 하면
혼자서도 많은 부분을
치료할 수 있어요." 라고 말해주었다.
최면에서 깨어난 그는 무척
지친 모습으로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 시간에 치료 시작 전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마리가 그런 모습이었던 것은
순덕이 삶의 영향이 컸다고 생각돼요.
현실에 적응하기 힘들고, 모르는
사람들이 두려워
밖으로 나가는 것을 몹시 싫어하고,
수시로 몽롱한 상태에
빠져드는 것이 아주 비슷해요.
지금의 저까지, 세 개의 삶이
모두 얽혀 영향을 받는 것같아요.
마리의 아버지는
지금의 제 아버지이고,
레온은 순덕이 삶에서 의성이 오빠
예요...그냥 단번에 알 수 있었어요...
혼자 꾸준히 치료했는데도
마리의 두려움과 고통이 수시로
올라와서 며칠 동안 좀 힘들었어요 ..
매년 가을이 되면 별 이유 없이
아랫배가 아파서 산부인과
진료를 받은 적이 여러 번 있었어요...
검사해도 이상은 없었고요..
소변에 피가 섞여 나오는 출혈성
방광염도 그 계절에 걸려
비뇨 기과에 다닌 적이 있고
허리가 심하게 아파
정형외과에도 여러 번 갔어요...
마리가 바닥에 떨어지면서 골반뼈가
부러졌고 .. 부러진 뺏조각에
몸속을 찔려 출혈도 많았어요...
그 상처들은 치료받지 못한 채 방치
되었고, 마리가 죽을 때까지 제대로
낫지 않고 계속 고통을 주었어요."
이어서
진행된 최면 치료의 무대는
폴란드의 아우슈비츠에 있던
나치독일의 강제수용소였다.
신: (체념한 듯 힘 없는 목소리로)
여기는 수용소예요..
우리는 줄지어 유령처럼
걷고 있어요.. 차갑고 습한 안개가
가득 낀 이른 아침이에요 ..
똑같은 모습을 한 사람들이
고개를 숙인 채 줄지어 걸어가요..
식당 앞을 지나갈 때 저만치
안개 속에 뭔가 축 늘어진 채
매달린 것이 보여요...
임시로 설치한 듯 보이는 엉성한
교수대예요 .. 그리 높지 않게
만들어진 교수대를 향해
우리 대열이 조금씩 가까워져요...
교수대에 매달린 사람들의
형상이 점점 더 분명해져요...
앞으로 숙여진 목에는 커다란
나무판이 걸려 있어요..
나무판에 휘갈겨 쓴
하얀 글자들을 읽을 수 있어요..
'제국의 적' 이라고 적혀 있어요..
대열이 교수대에 점점 가까워져
그 밑을 천천히 지나갈 때
저는 고개를 들어
죽은 이들의 얼굴을 봤어요...
(울기 시작한다.)
시퍼렇고 검게 변한 얼굴의
아버지가 그들 중에 있어요..
교수대 밑을 천천히 지나가는
대열 속에서 저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너무 놀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 얼굴을 다시 봐요...
아버지의 시퍼렇고 검게 변한 얼굴과
두 개의 맨발이 안개 속에 떠있어요..
마치 벼락을 맞은 것처럼 저는
정신이 아득해져서 주저앉았어요...
옆에서 바짝 붙어 걷던 사람이
얼른 제 팔을 붙들어 일으켜 세워요 ...
저는 허덕거리며 간신히 걸어요...
'떠나면 다시 돌아올 수 없어' 라는
말이 계속 마음속에 맴돌며...
아버지가 죽었다.... 이제
다시는 내 곁으로 오지 못한다...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다..
나도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 라고
입 속으로 계속 말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