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부흥회를 원한다.
이의용<교회문화연구소장>
교회마다 일 년에 한 두 차례씩은 부흥회를 연다. 외국의 사례를 들지 않더라도 우리 나라 초대교회의 김익두 목사와 길선주 목사의 부흥회, 해방 후 이성봉 목사의 부흥회, 70년대의 빌리그레이엄 목사의 부흥회와 대학생선교회의 엑스플로운동 등은 우리 나라 교회의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이러한 부흥회는 개인적인 신앙의 각성에 초점을 맞추어 온 것이 특징이다. 특히 부흥사들의 순수성과 신실성, 그리고 체험성은 성도들의 잠자는 심령을 깨우고 회개와 각성운동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부흥회를 통해 예수님을 믿고, 부흥회를 통해 병을 고치고, 부흥회를 통해 성령 충만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부흥회는 이벤트성 ‘富흥회’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한 통계에 따르면 이에 따르면 68.1%가 부흥강사가 헌금을 강요한다고 응답했다. 또 51.5%는 부흥강사가 자기 자랑을 너무 많이 한다고 지적했다. 43.3%가 부흥강사의 언어가 거칠다며 순화를 지적했다. 48.5%가 부흥회의 형식이 단조롭다고 답했으며, 56.4%가 부흥회가 감정적이라고 지적했다.
어떻게 하면 부흥회를 회복시키고 그 역동성(Dynamics)을 개인의 삶에는 물론이고 교회, 가정, 직장, 사회로 연결되게 할 것인가? 부흥회의 회복을 위해 몇 가지를 제언해본다.
●목적이 바른 부흥회
부흥회가 회복되려면 부흥회의 목적부터 바르게 해야 한다. 부흥회는 오로지 성도의 영혼을 살리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부흥회는 영적으로 지쳐 있는 성도들, 병든 성도들, 해이해진 성도들을 하나님 말씀과 성령 충만함으로 새롭게 충전시키는 영적 각성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 기금을 모으기 위한 이벤트는 그만 두어야 한다.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가르치는 부흥회
부흥회를 회복시키려면, 부흥회를 주최하는 목회자들부터 바른 목회의식을 가져야 한다. 교인들에게 이 세상의 모든 복을 받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만을 가르치지 말고,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이며 이 세상을 어떻게 천국으로 가꿀 것인가도 균형적으로 가르쳐야 한다. ‘교회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만이 아니라,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서도 가르쳐야 한다.
●삶을 변화시키는 부흥회
우리 나라 같이 모이기에 힘쓰는 교회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교회처럼 변화가 없는 교회도 없을 것이다. 열심히 모여서 뭔가를 열심히 하기는 하는데, 정작 사람들은 변하지 않는다. 며칠씩 부흥회를 하지만, ‘화끈하게’ 열만 오를 뿐 거기에 참석한 사람들의 인격과 행동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는다. 말로 시작해서 말로 그칠 뿐, 가슴으로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부흥 강사의 메시지가 잘못 됐든가, 그 메시지가 전달이 되지 않았든가 둘 중의 한 가지 때문일 것이다.
상대방을 움직이게 하지 못하는 메시지는 죽은 메시지다. 강사는 원칙만 외치지 말고, 실천이 가능한 액션 플랜(action plan)을 제시해야 한다. 부흥회에도 실습 시간이 필요하다.
●복을 팔지 않는 부흥회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우리 사회에는 배금주의 사상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 가치관은 불행하게도 교회 안에까지 침투되기에 이르렀다. 더구나 정치적 암흑기를 거치면서 사람들은 종교를 통해 불안감과 억눌림에서의 탈출, 물질적인 복의 추구를 시도하게 되었다. 이 상황에서 정도를 걸으며 예언적 사명을 감당한 교회도 있지만, 많은 교회들이 침묵하며 오히려 물질적인 복을 추구하고, 현실을 탈피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심리에 편승하며 교회 성장의 길을 모색했다.
그 한 방법이 부흥회였다. 개인의 심령을 부흥한다는 의미의 부흥회가, 교회의 양적 성장과 개인의 물질적 복 추구라는 차원의 수단적 이벤트(Event)로 변질된 것이다.
많은 심령 부흥회가 열렸지만, 사실은 개인의 심령을 부흥하기보다는 교인 수를 확장하고 교회당을 건축하기 위한 목적이 숨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부흥회도, 부흥회 참석 교인도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한 수단에 불과했다.
교회의 양적 성장과 개인의 물질적인 ‘축복’이라는 절묘한 양자의 필요성은 기독교의 전통적인 ‘복’, ‘은혜’, ‘성령’, ‘헌금’ 등의 개념까지도 미신적인 것으로 변질시키게 되었다. 그후 교회는 여전히 양적인 성장을 추구해왔고, 개인은 그 가운데에서 물질적인 복을 추구해왔다. 그러면서 교회 내외에서 많은 병리현상을 드러내게 되었다.
대표적인 병리현상의 하나가 ‘복(福)’의 개념을 크게 오도해온 것이다.
사이비 부흥사들은 이른 바 ‘존재형(Being mode)’이 아닌 ‘소유형(Having mode)’의 복만을 강조한다. 이것은 다분히 현세적인 복을 희구하는 신자들의 심리를 노린 것으로 보인다.
소유형 복의 대명사가 되고 있는 ‘축복’이란 말은 어법으로 볼 때에는 잘못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이비 부흥사들은 “축복을 받으라”며 강단에 서서 축복을 남발하고 축복을 파느라 목이 쉬고, 신도들은 거기에 화답하느라 열광적으로 ‘아멘’을 외쳐댄다. ‘가공의 단어’인 이 ‘축복’의 개념을 바르게 정립해야 기독교가 당면한 중요한 문제가 풀릴 것이다.
●헌금 순서가 없는 부흥회
부흥회가 이처럼 오염되고 왜곡된 원인은 부흥회를 교회가 돈을 모으는 데 있다. 열광적인 분위기를 이용하여 헌금을 작정하도록 하고, 때로는 헌금을 강요하는 잘못된 부흥회는 많은 후유증을 남기며 교회를 병들게 하는 ‘不흥회’로 전락하고 말았다.
부흥회 때 헌금을 하지 말고 주일 예배시에 하면 좋겠다. 부흥회에서 은혜와 복을 받기 위해 돈을 바친다든지, 일시적인 충동으로 은혜를 돈으로 환산하여 바치겠다는 발상이 여간 위험한 것이 아니다. 부흥회 때 얼마를 작정하였는데 하루하루 날이 지나면서 그것이 후회스럽다면, 그가 받았다는 은혜란 사흘도 못 가는 일순간의 감정적인 충동에 불과하다 할 것이다. 부흥회가 끝난 후 주일예배 때에, 맨 정신으로 차분한 마음으로 감사를 표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다.
●건강한 강사를 초빙하는 부흥회
어떤 부흥사를 초청하느냐가 부흥회의 성과를 좌우한다. 부흥사를 잘못 초청해 교회가 어려움을 겪는 수가 있다. 자신이 담임하고 있는 교회에서 훌륭하게 목회를 하고 있고, 훌륭한 인격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 좋은 강사다.
보따리 장사같이 전국 교회와 기도원을 순회하며, 교회와 교우들에게 고통을 주고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는 부흥사는 피해야 한다. 자신이 담임하고 있는 교회는 제대로 돌보지 않으면서, 예약을 받아가며 전국을 무대로 뛴다. 1년에 거의 100곳을 뛰는 이도 있다.
담임하고 있는 교회와 신도들을 내팽개쳐 놓고, 밖으로만 나도는 부흥사라면 담임목사로서 이미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이들은 담임목사직에서 사임시켜야 하며, 재산도 공개시켜야 gkis다.
●강사 접대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부흥회
부흥회의 주인은 강사가 아니라 교인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부흥회를 준비하면서, 또는 진행하면서 교회의 관심은 온통 강사 접대에 가 있다. 강사료, 식사, 숙소, 간식, 심지어 속옷에까지 관심을 갖는 일이 많다. 지나친 접대를 하려는 교인들도 문제지만, 그걸 은근히 기대하는 강사들의 처신도 문제가 많다.
필자가 아는 어느 부흥사는 이미 수 십년 전부터 자비량 부흥회를 인도한다. 작은 규모이지만 교회는 목사의 순회 부흥회를 교회의 중요한 선교활동으로 인식하고 출장비를 제공하며 목사를 파견한다. 그러니 부흥회를 여는 교회에 아무런 부담을 주지 않아도 된다.
●성경말씀만 푸는 부흥회
사람을 진정 변화시키는 건 부흥강사의 말솜씨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 부흥회는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삶에 적용시키도록 풀어주는 기회가 돼야 한다. 성경 한 구절만 인용한 뒤 자신의 주관적 얘기로 만담을 하거나, 개그 콘테스트에 출연한 연예인처럼 쇼만 하다가 끝나는 부흥회도 있다.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No!' 할 수 있는 부흥회
우리 나라 신자들은 지나치게 목회자에게 의존하려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신앙관을 스스로 정립하지 못하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목회자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려 한다. 부흥회다 기도원이다 부지런히 좇아다닐 뿐, 스스로 하나님을 만나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 디모데후서의 말씀대로,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해야 하며, 그것에 반하는 경우에는, 결연히 항의(protest)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정신이다.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부흥사가 부흥회를 열광적으로 이끌어나가다가 갑자기 재정담당 장로를 불러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담임목사에게 무엇 무엇을 당장 사주라고 강압적으로 요구했다. 사실 이런 일은 가끔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러자 이 장로가 이렇게 당당히 말했다. “그 문제는 저희 교회 당회와 제직회가 의논하여 결정할 일이지, 다른 교회에서 강사로 초청된 부흥사가 관여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담임목사님께서 그런 것을 부탁하셨을 리도 없고... 부탁 받으신 설교만 하고 다른 문제는 거론하지 말아주셨으면 한다.” 부흥회가 어떻게 됐겠는가? 부흥회는 그날로 끝났다. 부흥사가 그냥 가버리고 말았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부흥회 중에 사이비 부흥사가 “백만원!”, “2백만원!”을 외치며, 헌금할 교인들에게 손을 들게 했다. 그때 부흥사 뒤 단상 의자에 앉아 있던 담임목사가 황급히 부흥사 옆으로 달려나갔다. 그는 귓속말로 뭐라고 하더니 부흥사를 제자리로 돌아가 앉도록 했다. 그리고는 단에 올라 이렇게 말했다. “부흥회를 이런 식으로 할 계획은 아니었습니다.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번 부흥회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
부흥회의 진정한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 있다가 그 말씀 위에 바로 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앞서 예를 든 두 부흥회는 정말 잘 된 부흥회, 은혜스러운 부흥회였다고 생각한다.
부흥사의 잘못된 행위에 대해 당당히 지적하고 잘못된 부흥회를 중단시킨 목사와 장로야말로 교회를 바르게 이끌 수 있는 바르고 훌륭한 지도자라고 생각한다.
잘못 된 것을 바로 잡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며,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잘못된 것을 바르게 회복시키는 데에는 아픔과 용기가 필요하다. 모든 새로운 것은 저절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 ‘예’ 할 때에는 ‘예’라고 말만 하고 ‘아니오’ 할 때에는 ‘아니오’라고 말만 하여라. 이보다 더 지나치는 것은 악에서 나온 것이다.” (마 5:37) ‘No'라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절실하다. ’Yes' 못지 않게 'No'라고 말하는 것도 중요하다.‘No’라고 말해야 할 때에 ‘No'라고 제대로 말하지 못하면 무엇이든 본질에서 멀어지게 되며, 발전하지 못하고 정체하기 쉽다.
이단, 사이비 종교는 ‘맹목적인 Yes'에서 서식된다. 이단, 사이비는 대부분 기성 정통교단에서 출발한다. 뭔가 잘못 되어가고 있을 때, 아무도 'No'라고 말하지 못하고 ’Yes'를 남발할 때 이단도 되고 사이비로 전락하고 만다.
부흥회도 그렇다. 군중 심리에 휩쓸려 뭔가 잘못 되어가고 있는데도 눈을 딱 감고 ‘아멘!’만 부르짖을 때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맹목적으로 ’아멘!‘만 부르짖지 말고 ’No!'라고 크게 외칠 수 있는 용기가 오늘 목회자들에게, 교인들에게 참으로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맹목적인 순종이 아니라 주 안에서의 'Yes', 무조건적이고 감정적인 비판이 아니라 주 안에서의 'No'라야 한다. 그래야 부흥회가 회복된다.
●예언의 말씀을 외치는 부흥회
예언자 말라기는 종교적으로 부패하여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견책과 경고를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 우리 나라 교회의 강단에서는 달콤한 말씀만 선별하여 선포하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설교자들의 목소리는 커졌고 강단은 높아졌지만 그 목소리에 자신감이나 진정한 용기가 없는 것 같다. 강단 아래에서 설교를 듣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라 말라기, 이사야, 예레미아가 외쳤던 예언의 말씀을 제대로 선포하지 못하는 것 같다.
오히려 만사형통, 소원 성취, 만병 통치, 사업 성공, 건강 장수, 행복 보장 등 기복적인 데 치중되고 있다. 또 이런 식의 부훙회가 자주 열리고 있다.
강단 아래에서도 마찬가지다. 곳곳에 쌓아올리고 있는 거짓된 제단, 가짜 십자가, 잘못 된 가르침을 빤히 바라보면서도 외면하거나‘순종’이라는 미명하에 맹종하고 있다. 시대를 향한 예언의 메시지가 회복되어야 한다.
●바르고 아름다운 언어를 사용하는 부흥회
부흥강사 중에는 무례한 언어, 어법에 맞지 않는 언어를 함부로 사용하는 이들이 있다. 심지어는 강단에서 욕을 하기도 하고 반말을 하기도 한다. 도대체 이런 분위기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전달할 수 있으며, 이런 분위기가 과연 성령 충만한 분위기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사람들의 혼을 빼놓고 군중 심리를 이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주입한다는 게 말이 되질 않는다. 오히려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도록 해야 옳다고 생각한다. 거룩한 메시지는 거룩한 표현으로 전달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후 5:17)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하고 그리스도인은 계속 새로워져야 한다. 부흥회도 당연히 새로워져야 한다.
이의용<교회문화연구소장>
교회마다 일 년에 한 두 차례씩은 부흥회를 연다. 외국의 사례를 들지 않더라도 우리 나라 초대교회의 김익두 목사와 길선주 목사의 부흥회, 해방 후 이성봉 목사의 부흥회, 70년대의 빌리그레이엄 목사의 부흥회와 대학생선교회의 엑스플로운동 등은 우리 나라 교회의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이러한 부흥회는 개인적인 신앙의 각성에 초점을 맞추어 온 것이 특징이다. 특히 부흥사들의 순수성과 신실성, 그리고 체험성은 성도들의 잠자는 심령을 깨우고 회개와 각성운동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부흥회를 통해 예수님을 믿고, 부흥회를 통해 병을 고치고, 부흥회를 통해 성령 충만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부흥회는 이벤트성 ‘富흥회’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한 통계에 따르면 이에 따르면 68.1%가 부흥강사가 헌금을 강요한다고 응답했다. 또 51.5%는 부흥강사가 자기 자랑을 너무 많이 한다고 지적했다. 43.3%가 부흥강사의 언어가 거칠다며 순화를 지적했다. 48.5%가 부흥회의 형식이 단조롭다고 답했으며, 56.4%가 부흥회가 감정적이라고 지적했다.
어떻게 하면 부흥회를 회복시키고 그 역동성(Dynamics)을 개인의 삶에는 물론이고 교회, 가정, 직장, 사회로 연결되게 할 것인가? 부흥회의 회복을 위해 몇 가지를 제언해본다.
●목적이 바른 부흥회
부흥회가 회복되려면 부흥회의 목적부터 바르게 해야 한다. 부흥회는 오로지 성도의 영혼을 살리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부흥회는 영적으로 지쳐 있는 성도들, 병든 성도들, 해이해진 성도들을 하나님 말씀과 성령 충만함으로 새롭게 충전시키는 영적 각성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 기금을 모으기 위한 이벤트는 그만 두어야 한다.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가르치는 부흥회
부흥회를 회복시키려면, 부흥회를 주최하는 목회자들부터 바른 목회의식을 가져야 한다. 교인들에게 이 세상의 모든 복을 받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만을 가르치지 말고,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이며 이 세상을 어떻게 천국으로 가꿀 것인가도 균형적으로 가르쳐야 한다. ‘교회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만이 아니라,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서도 가르쳐야 한다.
●삶을 변화시키는 부흥회
우리 나라 같이 모이기에 힘쓰는 교회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교회처럼 변화가 없는 교회도 없을 것이다. 열심히 모여서 뭔가를 열심히 하기는 하는데, 정작 사람들은 변하지 않는다. 며칠씩 부흥회를 하지만, ‘화끈하게’ 열만 오를 뿐 거기에 참석한 사람들의 인격과 행동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는다. 말로 시작해서 말로 그칠 뿐, 가슴으로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부흥 강사의 메시지가 잘못 됐든가, 그 메시지가 전달이 되지 않았든가 둘 중의 한 가지 때문일 것이다.
상대방을 움직이게 하지 못하는 메시지는 죽은 메시지다. 강사는 원칙만 외치지 말고, 실천이 가능한 액션 플랜(action plan)을 제시해야 한다. 부흥회에도 실습 시간이 필요하다.
●복을 팔지 않는 부흥회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우리 사회에는 배금주의 사상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 가치관은 불행하게도 교회 안에까지 침투되기에 이르렀다. 더구나 정치적 암흑기를 거치면서 사람들은 종교를 통해 불안감과 억눌림에서의 탈출, 물질적인 복의 추구를 시도하게 되었다. 이 상황에서 정도를 걸으며 예언적 사명을 감당한 교회도 있지만, 많은 교회들이 침묵하며 오히려 물질적인 복을 추구하고, 현실을 탈피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심리에 편승하며 교회 성장의 길을 모색했다.
그 한 방법이 부흥회였다. 개인의 심령을 부흥한다는 의미의 부흥회가, 교회의 양적 성장과 개인의 물질적 복 추구라는 차원의 수단적 이벤트(Event)로 변질된 것이다.
많은 심령 부흥회가 열렸지만, 사실은 개인의 심령을 부흥하기보다는 교인 수를 확장하고 교회당을 건축하기 위한 목적이 숨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부흥회도, 부흥회 참석 교인도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한 수단에 불과했다.
교회의 양적 성장과 개인의 물질적인 ‘축복’이라는 절묘한 양자의 필요성은 기독교의 전통적인 ‘복’, ‘은혜’, ‘성령’, ‘헌금’ 등의 개념까지도 미신적인 것으로 변질시키게 되었다. 그후 교회는 여전히 양적인 성장을 추구해왔고, 개인은 그 가운데에서 물질적인 복을 추구해왔다. 그러면서 교회 내외에서 많은 병리현상을 드러내게 되었다.
대표적인 병리현상의 하나가 ‘복(福)’의 개념을 크게 오도해온 것이다.
사이비 부흥사들은 이른 바 ‘존재형(Being mode)’이 아닌 ‘소유형(Having mode)’의 복만을 강조한다. 이것은 다분히 현세적인 복을 희구하는 신자들의 심리를 노린 것으로 보인다.
소유형 복의 대명사가 되고 있는 ‘축복’이란 말은 어법으로 볼 때에는 잘못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이비 부흥사들은 “축복을 받으라”며 강단에 서서 축복을 남발하고 축복을 파느라 목이 쉬고, 신도들은 거기에 화답하느라 열광적으로 ‘아멘’을 외쳐댄다. ‘가공의 단어’인 이 ‘축복’의 개념을 바르게 정립해야 기독교가 당면한 중요한 문제가 풀릴 것이다.
●헌금 순서가 없는 부흥회
부흥회가 이처럼 오염되고 왜곡된 원인은 부흥회를 교회가 돈을 모으는 데 있다. 열광적인 분위기를 이용하여 헌금을 작정하도록 하고, 때로는 헌금을 강요하는 잘못된 부흥회는 많은 후유증을 남기며 교회를 병들게 하는 ‘不흥회’로 전락하고 말았다.
부흥회 때 헌금을 하지 말고 주일 예배시에 하면 좋겠다. 부흥회에서 은혜와 복을 받기 위해 돈을 바친다든지, 일시적인 충동으로 은혜를 돈으로 환산하여 바치겠다는 발상이 여간 위험한 것이 아니다. 부흥회 때 얼마를 작정하였는데 하루하루 날이 지나면서 그것이 후회스럽다면, 그가 받았다는 은혜란 사흘도 못 가는 일순간의 감정적인 충동에 불과하다 할 것이다. 부흥회가 끝난 후 주일예배 때에, 맨 정신으로 차분한 마음으로 감사를 표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다.
●건강한 강사를 초빙하는 부흥회
어떤 부흥사를 초청하느냐가 부흥회의 성과를 좌우한다. 부흥사를 잘못 초청해 교회가 어려움을 겪는 수가 있다. 자신이 담임하고 있는 교회에서 훌륭하게 목회를 하고 있고, 훌륭한 인격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 좋은 강사다.
보따리 장사같이 전국 교회와 기도원을 순회하며, 교회와 교우들에게 고통을 주고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는 부흥사는 피해야 한다. 자신이 담임하고 있는 교회는 제대로 돌보지 않으면서, 예약을 받아가며 전국을 무대로 뛴다. 1년에 거의 100곳을 뛰는 이도 있다.
담임하고 있는 교회와 신도들을 내팽개쳐 놓고, 밖으로만 나도는 부흥사라면 담임목사로서 이미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이들은 담임목사직에서 사임시켜야 하며, 재산도 공개시켜야 gkis다.
●강사 접대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부흥회
부흥회의 주인은 강사가 아니라 교인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부흥회를 준비하면서, 또는 진행하면서 교회의 관심은 온통 강사 접대에 가 있다. 강사료, 식사, 숙소, 간식, 심지어 속옷에까지 관심을 갖는 일이 많다. 지나친 접대를 하려는 교인들도 문제지만, 그걸 은근히 기대하는 강사들의 처신도 문제가 많다.
필자가 아는 어느 부흥사는 이미 수 십년 전부터 자비량 부흥회를 인도한다. 작은 규모이지만 교회는 목사의 순회 부흥회를 교회의 중요한 선교활동으로 인식하고 출장비를 제공하며 목사를 파견한다. 그러니 부흥회를 여는 교회에 아무런 부담을 주지 않아도 된다.
●성경말씀만 푸는 부흥회
사람을 진정 변화시키는 건 부흥강사의 말솜씨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 부흥회는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삶에 적용시키도록 풀어주는 기회가 돼야 한다. 성경 한 구절만 인용한 뒤 자신의 주관적 얘기로 만담을 하거나, 개그 콘테스트에 출연한 연예인처럼 쇼만 하다가 끝나는 부흥회도 있다.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No!' 할 수 있는 부흥회
우리 나라 신자들은 지나치게 목회자에게 의존하려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신앙관을 스스로 정립하지 못하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목회자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려 한다. 부흥회다 기도원이다 부지런히 좇아다닐 뿐, 스스로 하나님을 만나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 디모데후서의 말씀대로,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해야 하며, 그것에 반하는 경우에는, 결연히 항의(protest)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정신이다.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부흥사가 부흥회를 열광적으로 이끌어나가다가 갑자기 재정담당 장로를 불러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담임목사에게 무엇 무엇을 당장 사주라고 강압적으로 요구했다. 사실 이런 일은 가끔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러자 이 장로가 이렇게 당당히 말했다. “그 문제는 저희 교회 당회와 제직회가 의논하여 결정할 일이지, 다른 교회에서 강사로 초청된 부흥사가 관여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담임목사님께서 그런 것을 부탁하셨을 리도 없고... 부탁 받으신 설교만 하고 다른 문제는 거론하지 말아주셨으면 한다.” 부흥회가 어떻게 됐겠는가? 부흥회는 그날로 끝났다. 부흥사가 그냥 가버리고 말았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부흥회 중에 사이비 부흥사가 “백만원!”, “2백만원!”을 외치며, 헌금할 교인들에게 손을 들게 했다. 그때 부흥사 뒤 단상 의자에 앉아 있던 담임목사가 황급히 부흥사 옆으로 달려나갔다. 그는 귓속말로 뭐라고 하더니 부흥사를 제자리로 돌아가 앉도록 했다. 그리고는 단에 올라 이렇게 말했다. “부흥회를 이런 식으로 할 계획은 아니었습니다.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번 부흥회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
부흥회의 진정한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 있다가 그 말씀 위에 바로 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앞서 예를 든 두 부흥회는 정말 잘 된 부흥회, 은혜스러운 부흥회였다고 생각한다.
부흥사의 잘못된 행위에 대해 당당히 지적하고 잘못된 부흥회를 중단시킨 목사와 장로야말로 교회를 바르게 이끌 수 있는 바르고 훌륭한 지도자라고 생각한다.
잘못 된 것을 바로 잡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며,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잘못된 것을 바르게 회복시키는 데에는 아픔과 용기가 필요하다. 모든 새로운 것은 저절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 ‘예’ 할 때에는 ‘예’라고 말만 하고 ‘아니오’ 할 때에는 ‘아니오’라고 말만 하여라. 이보다 더 지나치는 것은 악에서 나온 것이다.” (마 5:37) ‘No'라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절실하다. ’Yes' 못지 않게 'No'라고 말하는 것도 중요하다.‘No’라고 말해야 할 때에 ‘No'라고 제대로 말하지 못하면 무엇이든 본질에서 멀어지게 되며, 발전하지 못하고 정체하기 쉽다.
이단, 사이비 종교는 ‘맹목적인 Yes'에서 서식된다. 이단, 사이비는 대부분 기성 정통교단에서 출발한다. 뭔가 잘못 되어가고 있을 때, 아무도 'No'라고 말하지 못하고 ’Yes'를 남발할 때 이단도 되고 사이비로 전락하고 만다.
부흥회도 그렇다. 군중 심리에 휩쓸려 뭔가 잘못 되어가고 있는데도 눈을 딱 감고 ‘아멘!’만 부르짖을 때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맹목적으로 ’아멘!‘만 부르짖지 말고 ’No!'라고 크게 외칠 수 있는 용기가 오늘 목회자들에게, 교인들에게 참으로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맹목적인 순종이 아니라 주 안에서의 'Yes', 무조건적이고 감정적인 비판이 아니라 주 안에서의 'No'라야 한다. 그래야 부흥회가 회복된다.
●예언의 말씀을 외치는 부흥회
예언자 말라기는 종교적으로 부패하여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견책과 경고를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 우리 나라 교회의 강단에서는 달콤한 말씀만 선별하여 선포하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설교자들의 목소리는 커졌고 강단은 높아졌지만 그 목소리에 자신감이나 진정한 용기가 없는 것 같다. 강단 아래에서 설교를 듣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라 말라기, 이사야, 예레미아가 외쳤던 예언의 말씀을 제대로 선포하지 못하는 것 같다.
오히려 만사형통, 소원 성취, 만병 통치, 사업 성공, 건강 장수, 행복 보장 등 기복적인 데 치중되고 있다. 또 이런 식의 부훙회가 자주 열리고 있다.
강단 아래에서도 마찬가지다. 곳곳에 쌓아올리고 있는 거짓된 제단, 가짜 십자가, 잘못 된 가르침을 빤히 바라보면서도 외면하거나‘순종’이라는 미명하에 맹종하고 있다. 시대를 향한 예언의 메시지가 회복되어야 한다.
●바르고 아름다운 언어를 사용하는 부흥회
부흥강사 중에는 무례한 언어, 어법에 맞지 않는 언어를 함부로 사용하는 이들이 있다. 심지어는 강단에서 욕을 하기도 하고 반말을 하기도 한다. 도대체 이런 분위기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전달할 수 있으며, 이런 분위기가 과연 성령 충만한 분위기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사람들의 혼을 빼놓고 군중 심리를 이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주입한다는 게 말이 되질 않는다. 오히려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도록 해야 옳다고 생각한다. 거룩한 메시지는 거룩한 표현으로 전달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후 5:17)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하고 그리스도인은 계속 새로워져야 한다. 부흥회도 당연히 새로워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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