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기독교 자료

[[기독자료] ]동방의 기독교

작성자넓은가슴|작성시간11.04.24|조회수155 목록 댓글 0
동방의 기독교

예수님의 탄생지가 가나안 땅이며, 기독교회가 처음 생겨난 곳이 소아시아의 안디옥이다. 처음으로 기독교가 국가종교로 공인을 받은 곳도 메소포타미아의 에뎃사이다. 주후 2세기 에뎃사의 타티안은 기독교를 동방인의 종교라 했다. 기독교는 시리아어를 쓰는 에데사와 희랍어를 쓰는 콘스탄티노플에서 각기 자라났다. 4세기 초에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정치질서와 타협하면서 라틴 지방에서 급속히 전파되었다. 하지만, 기독교의 동방전통은 없어지지 않았다. 1054년 성 소피아 성당의 결별로 서방 기독교와 동방 기독교는 각각 제 나름의 길로 갔는데, 동방 기독교는 동방정교회, 동방독립교회(네스토리우스파), 동방귀일교회(동방가톨릭)로 분립되어 오늘날까지 동방기독교의 맥을 잇고 있다.

기독교의 동전(東傳)은 전도의 주역과 대상지에 따라 11세기 기독교 동서 분리 이전과 이후의 두 단계로 구분한다. 전자를 고대 기독교의 동전 단계, 후자를 근대 기독교의 동전 단계라 할 수 있다. 전자의 전도 주역은 서아시아에서 흥기한 여러 교파들로 후일 동방기독교권의 구성원이 된 동방독립교회와 동방귀일교회의 전신들이다. 전도 대상지는 고대 기독교의 발상지와 인접한 페르시아 등으로부터 인도와 중국으로 확장되었다. 중국의 당(唐)에서 발견되는 경교(景敎)가 그것으로 고대기독교의 성격을 고스란히 갖고 있다. 동방정교회로 분류되는 오늘날의 그리이스정교회와 러시아 정교회는 불행히도 기독교의 동전에 기여한 것이 없다. 이들이 사용하는 동방이란 의미는 라틴교회의 동쪽에 있는 희랍어를 사용하는 지역이란 의미다.

동방독립교회와 동방귀일교회가 기독교를 동전시키던 시절은 기독론 논쟁을 포함한 교리 논쟁이 만연했던 때로 교세확장과 교권확립을 위한 배타적 경쟁이 횡행했었다. 그리하여 정통과 이단이 엎치락 뒤치락 하며 경쟁과 갈등을 증폭시켰고 그 소산이 기독교의 동전으로 나타났다. 아무튼 동방독립교회와 동방귀일교회를 통칭하는 고대 동방기독교는 페르시아에서 인도와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까지 그리고 이 한반도까지 기독교의 여파를 보냈다. 사산조 페르시아(226-651)는 지정학적으로 고대 동방기독교 동전의 필수 경유지였다. 그러나 이 나라는 로마와의 대결 구도 속에서 국내 사정에 따라 수용과 박해, 관용과 제한의 순환을 거듭했다.

페르시아의 기독교는 1세기 말부터 5세기 중엽까지의 아르벨라 교회의 활동기와 5세기 중엽부터 7세기 중엽까지의 네스토리우스파의 활동기로 나눌 수 있다. 아르벨라 교회는 에데사 교회와 더불어 시리아 문화권에서 생성했고, 네스토리우스파는 안디옥의 희랍어 문화권에서 생성했다. 그런데 안디옥의 네스토리우스파가 박해를 피해 페르시아에 피신하면서 아르벨라 교회와 합쳐지게 되었다. 그러나 페르시아의 집권자들은 네스토리우스파를 편의대로 대했고 651년에 이슬람 세력이 페르시아에 들어오자 네스토리우스파는 인도로 중앙아시아로 그리고 중국으로 새로운 활로를 찾아 나섰다.

기독교의 인도 전파는 사도 도마의 전설적인 전도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2-3세기에 알렉산드리아 교회가 인도 전도를 했고, 3-4세기에는 페르시아의 교회가 박해를 피해 인도로 이민을 했다. 인도에서는 4세기부터 교세가 급상승해서 전국에 36개의 교구가 생겨나기도 했다. 6세기 이후에는 페르시아로부터 박해를 피한 네스토리우스파가 들어왔다. 이들은 생사를 걸고 전도를 해서 인도의 교회가 융성했다. 그러자 인도 당국이 기독교인들에게 특혜를 주었다. 이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오히려 세속에 빠져 축재욕에 불타게 되고 교회는 쇠퇴하고 말았다.

기독교의 중앙아시아 전파는 초기 동방교회와 네스토리우스파의 공이었다. 에뎃사를 중심으로 한 초기 동방교회에 속한 서아시아인들 특히 시리아교회 교인들은 오아시스 육로를 통해 중앙아시아와 교역을 활발히 하면서 유목민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하였다. 이후 네스토리우스파가 중앙아시아에 들어왔고, 이들은 메르브를 비롯한 중앙아시아 도처에 전도의 근거지를 마련하고 포교에 전념했다. 그래서 9세기 말에는 중앙아시아 전역이 10여 개의 대교구가 설치되었다. 지금까지 출토된 유물에 따르면, 고대 동방기독교는 중앙아시아의 박트리아와 소그디아나를 거쳐 톈샨 산맥의 북록과 타림 분지로 확산되었고 이어 중국으로 왔다.

중국에는 언제 기독교가 왔느냐는 문제는 단순치 않다. 635년에 네스토리우스파가 중국에 들어 왔지만, 그 이전에도 중국에는 기독교가 있었다. 그렇지만 그 증거는 모호한 전설과 단편적인 기록들 뿐이다. 당 태종이 네스토리우스파를 공인하면서 이후 250년 동안 중국의 기독교는 승승장구했다. 수 만 명의 신도를 모았지만, 845년의 회창법란과 878년의 황소의 난으로 기독교인들은 중원에서 멸적되고 잔존세력이 몽골과 한반도 인접지역인 만주 등 변방으로 흩어졌다.

기독교는 한반도에도 들어왔다. 그 근거는 유물들이다. 1965년 경주 불국사 경내에서 출토된 돌십자가와 역시 경주에서 발굴된 2점의 철제 십자문 장식과 성모마리아 소상을 말한다. 돌십자가는 좌우상하가 대칭적이며 십자가의 5형 중 초기 십자가형인 그리이스 형에 속한다. 2점의 철제 십자문 장식은 용도가 불분명하나 부착용 장식품인 듯 하다. 성모 소상은 양각으로 아기 예수를 품에 안은 구도가 마리아상을 말한다. 그리고 일부 연구가들이 불교 관련 유물에 나타난 기독교적 요소들을 증거물로 제시한다. 경주 석굴암 전실 내부에 부각된 십이면관음상과 십나한상, 범천과 제석천상 등의 옷 무늬나 신발은 고대 동방기독교의 일파인 네스토리우스파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말이다. 통일신라시대 능묘의 호석에 부조된 십이지상이나 능묘의 수호적 기능을 수행하는 무인석상의 의장은 경교적 모습이라는 것이다.

불교가 한반도에 들어 오기 전에 불상의 제작을 비롯해 간다라 미술 등 불교 문화가 그리이스 문화에 바탕한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았으므로 불교의 유물 가운데 순수 서역적 요소가 있음을 간과하면 안 된다. 따라서 통일신라 유물에서 기독교적 요소가 발견된다면 우리는 다른 방증적 유물이나 기록을 첨가해야 한다. 삼국유사에 보면 기독교적 용어와 구약성서의 전설이나 신화와 비슷한 내용들이 들어가 있다. 신라 신문왕 (재위 681-691) 때의 고승 혜통에 대한 찬문에 "마귀와 외도(外道)를 모두 서울에서 멀리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서 외도는 기독교일 가능성이 있다. 혜통은 일찍이 당나라로 들어가 밀교의 선무외삼장에게 사사한 후 그의 천거로 당 고종 (재위 650-683) 딸의 병을 주술로 치유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고종이 고대 동방기독교 즉 경교를 공식으로 받아들인 태종의 후계자로 중국 기독교 부흥의 주인공이다. 그는 중국 모든 주에 경교사를 건립하여 수 많은 성읍에 경교사원이 충만하게 되게 했다. 이런 고종과 친분을 맺은 혜통은 당연히 기독교와 접하게 되었다. 그러던 그가 기독교를 외도로 인지한 것은 신라 땅에 기독교가 들어와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삼국유사에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전설이나 신화와 비슷한 이야기들이 들어 있다. 사량리의 알영정 가에 계룡이 나타나 왼쪽 갈비에서 어린 계집애를 낳았다거나, 29대 태종대왕 5년 4월에 청개구리 수 만 마리가 나무 위에 나타나 서울 시민들이 놀라 달아나다 100여 명이 죽고 많은 재물을 잃었다는 이야기 등이다. 창세기의 여자 창조기사와 출애굽기의 개구리 재앙을 연상시킨다. 조선조 헌종(재위 1835-1849) 때 소운거사 이규경이 찬술한 '오주연문'에 따르면 땅속에서 '경교유행중국비'란 액제가 있는 비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는 다름아닌 781년에 건립된 '대진경교유행중국비'이다. 1928년 6월,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한반도와 인접한 중국 만주지방의 안산 부근에서 요나라의 성종(983-1031) 때의 것으로 추정되는 기와로 만든 7점의 십자가가 출토되고 동방박사의 아기 예수 경배도를 방불케 하는 암각화가 발견되었다. 문헌에 따르면 이 지역에 상당 수의 경교 신도들이 있었다. 이 때는 고려 초기다. 그 후에도 안산 일원에서 여러 점의 기독교 관련 유물들 즉 십자가와 장식품 등이 발굴되었으니 발해와 요와 거란에 경교가 유행했었다는 말이다. 일본에는 8세기 초에 기독교인이 일본에 왔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속일본서기에 따르면, 천평8년 (738)에 일본 고승 홍법대사가 페르시아의 의사 이밀을 데리고 귀국했는데 그는 천황으로부터 작위까지 받았다. 의사 이밀은 페르시아 출신의 의사로 경교신자였다.

중국 당대에 경교가 성행하던 시기인 태종부터 덕종까지의 150년 동안은 많은 신라승들이 입당구법하여 자연스럽게 경교와 접했다. 이들에 의해 신라에 기독교가 전파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통일신라는 중국 뿐만 아니라 비잔틴을 비롯한 서역의 여러 나라와 교역하였으므로 기독교가 신라에 들어왔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불교의 기독교적 요소도 우리가 간과하면 안된다. 극락정토사상이나 미래와의 관계에서 현재를 파악하는 미륵불 사상은 원시불교에 기독교적 요소가 가미된 것이다. 특히 대승불교는 중국 당대에 이르러 기독교 즉 경교와 때로는 융화관계에, 때로는 경쟁관계에 있으면서 기독교 전파에 관련했다. 불교와 경교는 애당초 친구였다.

경교는 그 이름 자체가 융화와 타협의 산물이다. 경교는 처음에는 페르시아에서 왔다고 해서 '파사교'라 했고, 현종 때 칙령으로 로마교란 의미에서 '대진교'라 했으며 후에 '커다란 광명'이란 의미에서 '경교'라 했다. 경교의 적지 않은 교리적 개념이 불교를 비롯한 유교나 도교의 대응어로 표현된다. 삼위일체는 '삼위묘신' 동정녀는 '실녀' 부활승천은 '청오승진' 구원은 '제도' 주교는 '법주' 하느님은 '건'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래서 경교를 사경사불 즉 '기독교 같기도 하고 불교 같기도 하다'라 했다.

경교의 실체를 입증하는 대표적 유물인 '대진경교유행중국비'의 의장은 다종교의 합성품이다. 거북좌대 위에 세워진 비의 상부에는 반룡이 큰 여의주를 받쳐들고 있고, 그 밑에 바로 십자가가 연꽃과 부운 속에 명각되어 있다. 연꽃과 여의주는 불교, 부운은 도교,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물이다. 현존하는 대진사들이의 유물들은 대개 이런 형태이다. 또한 경교는 예배 시간에 목탁을 쳤고, 사원 내에 초상을 걸어 놓고 효양주의적으로 조상을 숭배했다. 중국의 경교가 이러했다면 한반도에 유입된 경교도 당연히 이런 다종교 합성이었을 것이다.

한반도 안에서 기독교 유물로 한때 큰 관심을 불러 일으킨 '도마 분처상'을 소개한다. 1987년 8월 경북 영풍군 평은면 강동2리 왕유동 속칭 왕머리의 분처바위에서 두부가 떨어진 암각상이 발견되었다. 분처상이라고 하는 이 상의 높이는 5미터, 가슴 너비는 3.3미터, 상면과 암면에 음각한 3점의 명문이 있다. 상의 좌측 암면에는 '도마'란 히브리어 문자와 상면 하단에는 '야소화왕인도자' 및 '명전행'이란 한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결코 불교의 것이 아니다. 당연히 경교의 유물인 것이다. 그런데, 히브리어가 현대 히브리어라는 주장이 있다. 11세기에 동서교회가 결별할 때까지만 해도 고대 히브리어가 사용되었으므로 이 히브리어는 후에 새겨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현대히브리어는 20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것을 감안하면 이 주장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야소화왕'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존칭이며 인도자는 사도나 전도자로 풀이 된다. 여기서 '야소'가 문제로 되는데, 781년에 건립된 '대진경교유행중국비'에서 예수는 '미시가' 즉 메시야로 표기되었다. 야소란 말은 중국 명대 중기에 로마가톨릭교회가 유입되면서 나타난 말이다. 우리의 원효문집에서는 예수를 불교식으로 '법왕자'라고 칭했다. 야소로 역칭한 예는 없다. '명전행'이란 명문은 순흥면 읍내리 고분의 서벽에 고구려인 '전행'이라는 동명의 석장이 등장하는 점을 들어 당대의 명장인 전행이 분처상을 제작하였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런 분처상도 기독교의 한반도 전래의 시기를 밝혀주지 못하고 있다. 한반도에는 불교가 남해로를 따라 기원 1세기에 들어왔다. 이것은 북로를 통한 유입보다 훨씬 앞선다. 이 당시 불교는 기독교와 혼합되어 있었다. 따라서 남해로를 통한 기독교 전래에 관심을 갖고 연구를 해야 할 것이다. 증빙사료는 아직 불충분한 형편이지만, 고대동방기독교가 신라에 들어왔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명확한 증빙자료가 751년에 건립된 불국사에서 출토된 돌십자가이다. 아직 분명히 규명되지 않았지만, 이것만 따져도 1,200년 전에 기독교가 한반도에 들어왔다는 말이 된다.

신라에 전해진 기독교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이 기독교는 중국에서 약 250년 동안 유행했던 경교였을 가능성이 많다. 그런데 적어도 '대진경교유행중국비'에 따르면, 이 경교는 고대 기독교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네스토리우스파가 아니라 정통 고대 동방기독교의 일파임을 알 수 있다. 비문에 따르면, 하느님의 유일성과 창조성과 영원성에 관련한 신관, 예수관과 마리아관, 구원관은 정통 교리와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네스토리우스파에서 문제를 삼은 그리스도의 신인양성론이나 마리아의 신성론에 있어 비문은 정통파를 따른다. 그래서 당나라 조정은 경교를 로마교란 의미에서 '대진교'라 불렀던 것이다.

경교는 불교를 비롯한 타종교와 여러 면에서 융화하고 타협함으로써 경교도 아니고 불교도 아니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당나리 조정과 깊은 관계를 맺고 세력을 확대해 갔다. 하지만 결국 착근하지 못하고 845년의 회창법란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이후 멀리 몽골을 비롯한 변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일부 경교도들이 한반도와 인접한 만주 동남부 일대에 정착했고 안산 일대에서 출토된 기독교 유물은 바로 이들의 것이었다. 이들이 신라에 영향을 주었던 것은 자명하다.

대진경교유행중국비는 781년 장안에서 서남쪽으로 150리쯤 떨어진 지금의 저우 현 우췬 성 대진사 경내에서 건조되었다가 1633년 집을 짓기 위해 땅을 파던 인부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었다. 한때 이 비문에 예수의 기적이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없고, 한자가 현대적이란 이유에서 위조품으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이것이 이유없음이 밝혀졌다. 기독교 동전의 역사 연구의 권위자인 골든 여사는 1917년 금강산 장안사에 대진경교유행중국비의 모조품을 세웠고, 일본 고우야 산에도 똑 같은 모조비를 세워 고대 동방기독교의 동전을 기념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