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교회의 기원과 역사
종교개혁 이후에 교회의 정치원리는 뚜렷하게 구분되어서 계승되고 있다. 적어도 감독주의, 회중주의 그리고 장로주의라고 하는 정치원리가 교회들에 의해서 각각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왜 장로교회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분명하고 확실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형성을 위해서 반드시 장로주의를 채택해야 하는 당위성과 확신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1) 성경적 정치원리로서 장로주의
장로주의 정치원리를 교회의 정치원리로 확인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성경적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장로교회는 성경적 교회이다. 이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만 장로교회를 세워가는 신자이고 지도자 일 수 있다. 교회의 정치형태는 필요에 의해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쉽게 한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지 못한다면 교회의 형성의 원리가 될 수 없다.
또한 그러한 의미에서 교회를 어떻게 형성할 것인지 그것은 자의적이거나 단지 유용성과 실용성에 근거해서 상황에 따라서 원리와 방법론이 만들어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유형교회의 일치는 단지 실용성과 유용성의 일치에 의해서만 가능하게 된다. 그러한 현실에서 그리스도가 머리되는 교회는 기대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장로교회의 헌법이 장로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것은 단지 필요에 의한 것이 아니다. 교회헌법이란 성경적 근거가 확실하게 담보되어야만 채택할 수 있다. 만일 성경적 근거를 확보할 수 없는 것이라면 헌법에 있다해도 그것을 수용하고 지켜야 하는 양심적인 의무는 없게 된다. 그러나 헌법적 규정이 성경적인 교훈과 일치한다면 누구를 막론하고 그 법은 지켜야하고, 그 규정을 통해서 교회를 형성시켜야 하는 책임을 가지게 된다. 그만큼 교회법과 성경적인 교훈은 필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교회법은 단지 형식적인 필요에 따라서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이 아니고 실용성에 근거해서 수용의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성경에서 대답을 얻어야 한다.
그러하다면 교회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정치원리가 장로주의를 받아들인 장로교회의 신자와 지도자들은 당연히 장로주의에 대한 성경적인 확신이 고백적으로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장로주의 정치원리에 대한 고백적 확신이 없이 장로교도라고 한다면, 그것은 양심을 속이는 것이다. 신앙양심을 통해서 자신이 장로교도이어야 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이에 대해서 양심상 고백할 수 없다면 그는 더 이상 장로교회의 회원이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신앙양심상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는 정치원리를 받아들여야 하고, 지도자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교회를 형성시켜야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한국의 장로교회들은 대부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표준문서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렇다면 이 문서가 고백하고 있는 장로주의에 대한 확실한 이해와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신앙고백은 받아들인다고 하면서도 그 고백서가 담고 있는 내용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이 고백서는 장로주의를 성경적인 정치원리로 확인하고 있다. 그리고 신앙고백서와 함께 작성된 정치조례는 이에 대한 해설과 적용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고백과 일치하도록 만든 것이 교회헌법이다.
그러므로 장로교회의 구성원인 장로교도들은 자신이 장로교도인 것에 대한 성경적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물론, 지도자들은 이에 대한 분명하고 확실한 가르침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장로주의 정치원리가 성경적이라는 확신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현실은 복음주의적인 영향을 크게 받고 있기에 교리나 교회정치에 대해서 매우 배타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한국 장로교회에 있어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부정하거나 희석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즉, 교회의 질서와 신앙의 순수성과 정통성을 잃어가게 하는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로 인해서 교회의 권위가 상실되는 현상은 신앙과 교회의 무질서를 동반되는데 이미 염려의 수준을 넘었다고 사료된다.
이미 전술했듯이 장로교회의 정치원리가 성경적이라는 것은 성경에 명시적, 구체적인 규범이 있고 그것과 일치한다는 의미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성경에는 교회의 정치원리에 대해서 직접적, 구체적으로 명시하여 교훈하고 있는 어떠한 것도 없다. 그럼에도 정치원리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말하는 것은 성경에 계시된 이스라엘의 역사와 기록된 교훈들을 통해서 연역해 낼 수 있는 교훈들이 장로주의를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의미이다. 즉, 성경이 역사적, 필연적으로 교훈하고 있는 교회의 정치형태로서 장로주의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성경을 신앙과 생활의 유일하고 완전한 규범으로 고백하는 개혁파신앙이 받아들이고 있는 중요한 신학적 이해의 전제이며 원리이다. 정치적인 원리를 확립하고 적용하는 데 있어서도 같은 견해이다.
성경을 떠나서 단순히 필요성과 합리성과 현실성, 유용성을 전제로 해서 착안해 낸 방법론적인 원리를 교회적인 현실에 맞게 만든 것이 장로주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전적으로 성경이 교훈하고 있는 신학적인 원리에 따라서 교회의 정치원리를 확립해야 한다는 것이 개혁파의 신학적 입장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정치원리를 찾는다면 그것은 당연히 장로주의 정치원리를 신적 제정(Jus Divinium)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성경 전체에서 장로주의 정치원리를 연역해 낼 수 있다는 데 대해서 이의를 제기한다면 그 외의 다른 정치원리들은 사실상 어떤 것도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상대적인 의미에서 비교하더라도 장로주의 정치원리를 부정한다면 교회에서 받아들이고 있는 다른 정치원리는 이미 부정되어야만 한다.
이것은 장로주의 정치원리를 부정하거나 수용을 거부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완전하고 구체적인 장로주의 정치원리를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장로주의 정치원리는 성경에서 확실하게 증거하고 있는 교회형성의 원리라는 것에 대해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성경 전체는 장로주의 정치원리를 찾을 수 있도록 교훈하고 있다. 구야시대에 출애굽하는 과정에서 모세는 장로들과 함께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고 있었고 하나님도 그렇게 허용하시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출3:16, 18:25-6, 민11:16).
물론, 이 때의 장로의 개념과 오늘날 장로의 개념은 많이 다르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끌어감에 있어서 “장로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고, “장로들”로 하여금 백성들을 통치해 가도록 하시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이러한 통치원리는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때문에 장로주의 정치원리는 어떤 시기에만 일시적으로 나타났거나 적용되었던 현상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신약의 교회에서도 여전히 장로주의 정치원리가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신약성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행14:23, 15: , 18:4, 딛:1:5, 벧전5:1, 약5:14)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교회형성의 실제적인 원리로서 장로주의 정치원리를 받아들이고 적용하는 것은 개인적인 생각에 의해서 결정될 문제가 아니다. 혹은, 처해있는 상황과 여건에 따라서 달리 받아들여질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이것은 신앙으로 받아들여야 할 성경적인 권위가 동반된 원리인 것이다. 따라서 장로교도들은 장로주의가 성경적인 것으로 확신하고, 신앙생활과 교회의 형성의 과정에서 자신의 신앙고백을 통해서 충실하게 이루어가야만 할 것이다.
2. 역사적 정치원리로서의 장로주의(2004-11-30)
장로주의 정치원리가 종교개혁 이후에 착안되어서 새롭게 등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여러 차례 강조해 왔다. 그럼에도 반복하는 것은 많은 경우가 장로교회는 칼빈이 창시자라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로교회는 종교개혁 이후에 새롭게 등장한 교파라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장로교도들 조차도 그러한 생각을 한다는 것은 장로교회에 대한 몰이해에 기인한 결과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장로교회라는 교파의 명칭이 등장하고, 하나의 고유명사로 사용되는 것은 17세기부터라고 할 수 있지만 장로주의 정치원리는 신구약 성경의 역사는 물론, 주후 2000년이라는 기독교회의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계승되어 온 것이라는 점에서 장로주의 정치원리는 역사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장로주의 정치원리는 성경적임과 동시에 역사적이라는 점에서 교회형성의 원리로서 받아들여야 하는 당위성을 가지고 있다.
장로주의는 단지 다른 정치원리에 비해서 합리적이거나 유용성이 많기 때문에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장로주의는 성경적이고 역사적인 교회의 정치원리이기 때문에 교회형성의 원리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만일 성경적인 것이 아니라면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이라면, 같은 원리에서 역사적이지 않는 것이라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회는 역사적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이라는 것은 단지 역사에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회의 신앙은 역사적으로 계승되는 종교라는 의미이다. 역사적이라는 말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 종교를 초역사적(超歷史的)인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만일 기독교회를 이렇게 이해한다면 신비주의적인 신앙이 되거나 아니면 역사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신흥종파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장로교회는 17세기 등장하는 신흥종파도 아니며 칼빈이라는 사람의 탁월한 깨우침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사상에 입각한 교회도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의 역사에서는 물론이고 기독교회의 2천년 역사를 통해서 일관되고 지속적으로 확인되고 계승되어온 교회라는 것이다.
때문에 장로주의 정치원리를 교회형성의 원리로 받아들여져야 하는 당위성을 말할 수 있게 된다. 쉽게 성경적이라는 논리에 대해서는 동의하면서도 역사적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수긍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역사적”이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서 충분한 이해가 동반되지 못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면 장로주의 정치원리가 역사적인 것이라는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그것은 기독교회의 2천년 역사를 통해서 장로주의 정치원리가 교회와 신앙을 통해서 계승되어왔다는 사실에 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사도적 교회(apostolic church)가 어떤 정치원리를 받아들였는가 하는 것이다. 즉, 사도들의 교회는 예수님 이후에 최초의 교회로서 어떤 정치원리를 통해서 교회를 형성했는지를 확인해 본다면 그 교회가 받아들인 정치원리는 사도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중요한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것은 성경적인 정치원리와 비교해서 더욱 권위있는 것이 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하고 필연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들이 형성했던 교회의 정치원리가 장로주의였다는 사실에 주목해야만 한다.
누차 강조했지만 장로주의는 17세기에 등장한 새로운 형태의 정치원리가 아니다. 이 원리는 사도적 교회에서 받아들여진 역사적인 정치원리이다. 사도시대에도 그들에 의해서 새롭게 도입된 것이 아니고 구약시대로부터 계승되어온, 하나님에 의해서 허용된 정치원리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성경적인 근거로서 모세시대에 이미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구약의 모세시대로부터 확인할 수 있는 정치원리는 이스라엘의 전역사(全歷史)를 통해서 계승되어왔다. 그리고 그것은 신약시대로 자연스럽게 도입되었다는 것을 사도행전 11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즉, 사도들은 자신들이 새로운 정치원리를 착안해서 교회형성의 원리로 삼은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역사를 통해서 계승되어온 장로주의를 교회형성의 원리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따라서 사도행전 14장에서 사도들은 장로를 세움에 있어서 유의해야 할 것에 대해서 교훈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미 수용되어진 장로주의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의식이 전제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장로주의는 2천년 전에 만들어진 2천년 전의 정치원리라는 주장도 아니다. 오히려 더 원시적인 의미를 가진다. 여기서 원시적인란 단지 발전적이라는 것을 넘어서 처음부터 지금까지라는 의미를 더 강조하는 것으로 사용하는 표현이다.
그리고 사도시대를 넘어서 중세로 이어지는 교회의 역사는 사실상 장로주의를 확인하기 어렵다. 이것은 기독교회의 역사에서 성경적 정치원리를 인위적으로 바꿔가는 역사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장로주의 정치원리였던 교회형성의 원리를 감독주의로 변질시켰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세의 교회는 감독주의를 극단적으로 발전시킨 교회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중세에는 장로주의 정치원리를 계승하는 교회가 없었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 또한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다.
중세의 교회가 비록 감독주의를 통해서 교회를 지배해 왔지만 중세의 역사 가운데서도 오히려 중세의 신앙이 변질된 것을 깨달은 교회와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복음신앙을 추구했으며, 장로주의 정치원리를 교회형성의 원리로 확인하고 받아들였다. 그러나 감독주의를 통해서 교회를 지배하고 있는 당시의 교권주의자들은 이러한 장로주의를 추구했던 사람들을 이단으로 정죄하여 처형시켰다.
따라서 중세의 역사에서 장로주의는 겉으로 보여지는 역사를 가지고 있지 못하지만 감독주의가 지배하는 역사에서도 변함없이 장로주의를 성경적 정치원리인 것을 확인시키면서 역사적으로 계승시키는 일은 계속되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중세에 있어서는 전교회적(全敎會的)으로 장로주의가 언급되거나 받아들여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중세를 지배했던 로마교회는 감독주의를 교회의 통치원리로 받아들였고, 그것을 절대화했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감독주의가 지배한 시대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로마교회가 지배한 시대라 할지라도 중세의 역사적 흐름 속에는 장로주의 정치가 지역 교회적으로 받아들여지거나 복음적 신앙의 원리를 깨우친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장로주의 정치원리를 성경적인 정치원리로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무리들은 중세교회의 역사에 있어서 대부분 이단으로 정죄되거나 오히려 이단으로 처형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중세교회에 있어서 주류를 이루지 못했다. 따라서 그들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이해하는 어려움이 있고, 연구할 수 있는 자료도 충분하지 않다는 어려움이 있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중세에는 장로주의를 교회의 정치체계로 받아들이는 자들이 없었다고 하는 것은 더욱 용납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비록 외적으로 보이는 교회는 감독주의를 통해서 교회와 역사를 지배했지만 그 주류를 이루고 있는 교회의 역사 안에는 장로주의 정치원리를 성경적인 것으로 깨달아 그것을 통한 교회형성을 사명으로 생각하여 장로주의에 입각한 교회를 이루려고 노력했던 많은 사람들과 교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일이다.
예를 들어 12세기말부터 13세기에 걸쳐서 상당한 세력을 이루었던 왈도파(waldensians)의 경우를 말할 수 있다. 이들은 중세에 있어서도 가장 교황의 권세가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에 로마교회 안에서 발생한 장로주의자들이었다.
또한 14, 15세기에 활동했으며, 개혁전 개혁자들이라고 하는 위클리프(John Wyclif)나 후스(John Hus)와 같은 경우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VI. 교회의 職員과 會議(2004-11-30)
여기서는 교회를 형성하는 직원들에 대한 이해와 대의정치를 기반으로 하는 장로교회가 교회의 자율성, 평등성, 연합성을 모두 충족시키면서 유형교회를 형성할 수 있는 원리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이에 대해서 한국교회에서는 일반적으로 법적인 개념으로만 이해하고 있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단지 법이기 때문이라는 전제에 의해서 성립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교회법도 신학적으로 성경적인 확인과 함께 일치되는 이해가 전제될 때 비로소 법으로서의 권위를 가지게 되는 것이며 모든 신자들이 그 법에 대해서 신앙으로 순종할 수 있는 것이 교회법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교회헌법에 적시(摘示)하고 있는 조항들을 살펴보기 전에 그러한 조항들에 대한 신학적, 성경적 입장이 일관되게 확인되고 이해되어야만 교회법이 적시하고 있는 조항들을 바르게 적용하고 그 직무를 충실하게 감당할 수 있는 신자가 될 수 있는 것이며, 각 교회는 이러한 이해를 통해서 건강한 교회를 형성시켜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1. 敎會의 職員
교회의 직원은 교회를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을 통치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해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일을 감당하도록 소명을 받아 교회에서 직원으로 세움받은 사람들을 말한다. 따라서 그 직원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위탁받아서 섬기고 관리하는 책임을 가진 자들이다. 그러므로 단지 인간적인 생각과 유용성과 실용성, 현실성, 합리성을 전제로 교회가 필요에 따라서 만들거나 가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즉, 교회를 허락하신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치하시기 위해서 교회에 직원을 두게 하셨기 때문에 교회를 통치하는 직원을 세우는 제도는 전적으로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야 한다. 즉, 그 제도를 있게 하신 이의 뜻을 따라서 세워야하며, 그 직무를 수행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성경이 적시하고 있는 직원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창립직원(temporary offices)과 항존직원(permanent offices)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직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아(召命) 그리스도의 일을 맡기신 것으로 이해한다. 이것을 위탁권(委託權)이라고 한다. 위탁에 의한 직분은 직원자신의 권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위탁하신 분의 권위를 가지고 그 직무에 임하는 것을 의미하며, 직원 자신은 이에 대해서 철저하게 위탁받은 입장에서 자신에 위탁된 직무를 감당해야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교회의 직원은 반드시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의 뜻을 섬기는 자세를 가져야만 한다. 즉, 교회의 직원이 통치권을 가진다는 것은 회중에 대한 치리권을 가진다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리스도의 뜻에 전적으로 순복해야 한다는 점을 간과하거나 소홀히 생각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러면, 교회의 직분은 어떤 것이 있는가? 신약교회에 있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사도직(使徒職)이다. 사도직은 창립직이라고 표현하는데 기독교회로의 창립이 사도들에 의해서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대신에 그 직분은 지속적으로 교회에 잔존하는 것이 아니라 창립 당시에 교회의 창립을 위해서 있었던 특별한 직분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도들은 말씀을 가르치는 일과 성례전을 집행하는 일, 그리고 권징을 시행하는 일 등에 대한 위탁된 직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이 밖에도 장로직과 집사직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장로직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계승되어온 직분이다. 이미 구약시대의 모세 때부터 장로제도는 이스라엘의 통치원리로서 확실한 기능을 해왔다.
이것이 신약의 기독교회로 시작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기독교회의 정치원리로 자리를 잡게 되어 사도들은 사실상 교회의 통치기구를 구성하는 직분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사도들이 받아들였다는 것은 새롭게 세우거나 만든 제도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있었던 직분을 기독교회의 직분으로 수용했다는 의미다. 즉, 이 직분은 사도들이 새롭게 만든 직분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집사직분은 사도행전 6장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직분은 구약에서 별도의 직분으로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순전히 봉사직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장로교회의 치리회를 구성할 때는 집사직은 포함되지 않는 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치리회를 구성할 때는 장로, 즉 가르치는 장로인 목사와 치리 장로들이 구성원이 된다. 직분에 대해서는 따로 다루겠기에 여기서는 논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집사직은 과부와 병든 자를 비롯해서 소외된 형제들을 살피는 일을 하는 봉사직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으로 여기서는 지나가려고 한다.
이렇게 기독교회에는 3직분이 있다(사도시대의 교회에는 교사-doctor-라는 직분이 별도로 있었으나 현재는 일반적으로 목사직의 기능 안에서 교사직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이 직분 외에 교회 안에 실존하는 직분들은 교회가 조직관리를 목적으로 필요해서 만든 직분으로서 교회형성을 위한 성경적인 직분으로 이해할 수는 없는 일이다. 따라서 이 3직분 이외의 것은 성경적 직분으로는 받아들이지 않지만 교회의 조직관리를 목적으로 필요한 직분을 허용할 수 있는 것은 교회헌법에서 별도로 생각하도록 하겠다. 따라서 이 부분도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고 지나갈 것이다.
이 3직분은 기독교회가 세상에 있는 한 반드시 있어야 하는 항존적(permanence)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교회의 형성을 위해서 필요한 직분을 목사 장로 집사로 이해하고 현실 교회에서 이것을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분명히 기독교회라고 한다면 이 3직분을 통해서 교회를 형성하고 치리하는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확인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직분들은 독자적인 권위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처음에 언급했듯이 교회의 직분은 그 기원(起源)이 그리스도께 있다. 또한 직분을 감당하는 것도 단지 자신이나 교회가 필요해서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 자체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탁받아서 감당하는 것이다. 따라서 직무에 임하는 사람은 자신의 일이기 전에 그리스도의 일로서 인식을 해야 하는 것이고, 그 직무를 감당할 때도 그것이 그리스도의 뜻인가를 확신하는 것과 함께 사명을 가지고 감당해야 한다.
또한 이 3직분의 직무는 사도들이 수행했던 것으로서 한 사람이 감당하는 것보다는 조금 더 효과적으로 그 일을 감당하도록 하기 위해서 새로운 직무를 설치한 것이다.
즉, 그리스도가 감당했던 직무를 분담해서 감당하도록 했던 것이다. 이 3직분은 사도들이 감당했던 직무를 분담해서 감당하도록 한 것이며, 이것은 모든 사도들에 있어서 통일적으로 감당되었던 것이다. 또한 이 직무들은 선지자, 왕, 제사장이라는 그리스도의 3직분에 상응하는 것인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1인격에 있어서 통합되어 구원을 위한 봉사였고, 이것이 사도들에게 위탁되었고, 그것이 다시 신약교회의 3직이 유래한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이 세 직분은 교회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쓰임받는 직분이다.
2. 職務와 恩賜(2004-11-30)
교회의 직원으로 세움을 받는 과정에서 반드시 확인하고, 신자들 전체가 받아들일 수 있는 공적인 확인이 필요한 것은 직무에 임하는 의미와 직무를 감당함에 있어서 소명의식(召命意識)이 분명한가 하는 것이다.
1절에서 서술했듯이 직분은 그리스도의 직무로부터 기인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직무를 위탁받아서 수행하는 직(職)이다. 따라서 어떤 직무에 임할 것인가 하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은사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을 가진다.
그러한 의미에서 직무에 임하고자 하는 사람 자신은 물론 그 직무에 합당한 사람인가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선출권을 가지고 있는 회중 역시 직무에 임하게 될 사람의 은사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공교회적으로 확인하는 과정이며, 이 과정을 통해서 직무에 임할 사람을 회중이 선출하고 세우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직무는 모두 봉사직임을 기억해야 한다. 봉사직이란 그 교회를 섬기고 통치해 가는 모든 과정에서 각 직분자들의 역할과 섬김의 수고를 통해서 교회적 기능과 사명을 감당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장로주의 정치는 교회의 직원들의 일(의무)과 봉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교회의 정치이다” 따라서 교회의 모든 직원은 자신의 직분을 봉사를 위한 직으로 이해하여야 하며, 그 직무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단지 자신의 일(의무)로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명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직과 그 직무에 대한 소명이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교회의 직무를 감당함에 있어서 봉사직으로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교회의 직원이라는 말은 영어에서 미니스터(minister)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런데, 이 말은 주로 목사를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이것은 장로나 집사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다. 본래 이 단어는 라틴어로부터 유래한 것으로서 라틴어의 미니스테리움(minsterium)이라는 말은 의무, 혹은 봉사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교회의 직원이란 봉사자인 것을 알 수 있다. 즉, 교회의 직원은 자신의 의무(일)를 수행함으로써 교회를 세우는 것을 의미한다. 현실적으로 교회에서도 직원들을 생각할 때 관리, 지도와 같은 말을 연상하지만 그 직무를 수행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고 통치해 가는 봉사자인 것이다.
직원들의 봉사를 통해서 실제적으로 교회형성이 가능해지는 것이라는 점에서 직원에 대한 이해는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모든 직원 자신들과 동시에 교회의 모든 회중은 주지해야 할 일이다.
따라서 은사와 직무는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은사가 확인되지 않은 가운데 직무를 고집하거나 반대로 은사가 공적으로 확인됨에도 불구하고 직무를 거부하는 것, 모두가 하나님 앞에 선 신실한 신자로서의 자세가 아니다.
우선 한국장로교회가 건강한 교회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직무에 앞서 직무에 임할 자의 은사를 충실하게 확인하는 일이 중요하다. 즉, 직분자를 세우는 과정에서 직무에 합당한 은사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판단을 신중하게 고려하여야 하는 책임과 의무를 가지고 있다.
만일, 이에 대한 의무를 충실하게 하지 못한다면 교회는 건강한 모습을 잃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섭리의 방편에 충실하지 못함으로써 교회를 형성하는 모든 회원들 스스로가 하나님의 배려를 왜곡, 변질시키는 결과를 초래시키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경우 이 과정에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은사를 확인하기보다는 혈연, 지연, 학연 등으로 일컬어지는 관계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자세라고 하기보다는 인간관계와 필요성에 기준을 두고 직무에 임할 자를 선택하는 경향이 많다는 점에서 건강한 교회의 모습을 기대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이것은 목사를 세우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다. 목사후보생으로 추천되는 과정에서 교회는(또는 추천하는 목사) 추천에 대한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
예를 든다면 얼굴을 안다고 하는 것과 역시 인간관계에서 체면 때문에 모르는 척할 수 없다는 이유로 마땅히 거부되어야 할 사람임에도 추천을 하는 경우인데, 이것은 역시 교회와 목사의 무책임한 일이라 할 수밖에 없다. 후보생을 추천하는 것은 단지 개인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의 일이고, 교회를 건강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중대한 책임이 동반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한국교회에서 이러한 경우는 다반사가 아닌가 생각한다. 오히려 후보생으로 추천해서는 안될 사람을 목사 자신이 권해서 추천하는 경우도 많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면, 이것을 더 큰 문제로 인식하지 않고서는 한국교회의 건강한 모습은 기대할 수 없다.
다음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은 직무에 임할 사람 자신의 문제이다. 그 자신도 같은 입장으로 준비되어야 한다. 자신의 은사를 확인하지 않고 직무에 대한 욕심이나 의욕만 가지고 덤빈다면, 이것 또한 교회의 평안과 건강을 잃게 하는 요소로 크게 작용하게 된다.
특히, 교회 안에서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이러한 경우에 처한다면 교회는 대단히 큰 혼란을 초래하게 되고, 비록 어떻게 진행되어간다 하더라도 대단히 왜곡된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게 됨으로써 많은 사람들의 염려를 사게 될 것이다. 때문에 신자 개인의 경우도 자신이 직무에 임하게 되는 것에 대한 하나님 앞에서의 확인이 반드시 필요하다.
자신이 허락받은 은사가 과연 교회의 직무를 감당하는데 적절한가 하는 대답이 분명하게 있어야 한다. 또한 이 판단을 겸손한 자세로 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의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이것을 소명이라고 할 수 있는데 개인은 은사의 확인과 함께 직무에 대한 소명을 확인해야 한다.
자신이 직무에 임하는 소명을 확신하지 못하면 직무에 임하는 자세가 소극적이거나 무책임한 의식을 가지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교회에 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인은 자신의 은사에 대한 확인과 함께 직무에 대한 소명을 분명히 함으로써 교회의 일이 원만하게 진행되도록 하는 책임을 다해야 하며 교회의 일에 거침이 되어서는 안된다.
이처럼 한 개인이 직무에 임하게 될 때 가져야하는 자세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때로는 직분을 탐하여서 자신의 은사와는 관계없이, 또한 준비되지 못한 여러 가지 여건들을 고려하지 않고 직무에 임하는 것만을 생각한다면, 이 또한 교회의 누가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직무에 임할 수 있는 은사를 공적으로 확인할 수 있음에도 직무를 거부하는 것 또한 하나님 앞에서 바른 자세가 아니다. 자신의 은사를 객관적으로 확인받을 수 있다면 당연히 그 직무에 임하는 것을 허락해야 하고, 그 직무에 충실하게 임하여야 한다.
만일, 이러한 경우가 있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소명, 즉 부르심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 된다. 지나친 겸손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러한 태도는 교회 전체를 위해서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역할과 일을 모른척하는 무책임과 방관에 대한 책임이 동반된다.
따라서 은사와 직무의 관계를 바르게 이해하고 적용함으로써 건강하고 바른 교회를 형성시키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라면 교회적으로 은사에 대한 공적인 확인과 소명에 대한 철저한 확인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러한 자세가 없이는 건강한 교회는 물론 질서있는 교회의 모습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은 자명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 책임은 목사에게만 있는 것도 회중에게만 있는 것도 아니다.
교회를 형성하고 있는 모든 구성원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형성한다는 책임의식을 철저하게 가지고 있어야 한다. 교회는 단지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이 형성하고 있는 것이기에 직무에 대한 소명과 은사는 공교회적으로 확인되어야 하고, 그 직무에 충실함으로써 건강한 교회를 만들게 되는 것이다.
3. 職務의 選出(2004-11-30)
직무의 선출권이 누구에게 있는가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교회정치원리에 있어서 커다란 분기점이 된다.
예를 들어 감독 한 사람에게 그 권한이 있다고 하는 입장은 감독주의이고, 신자들 모두에게 있다고 하면 회중주의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인간 누가 그 권한을 가졌는가 하는 문제에 머물지 않는다. 그 이면에는 하나님이 그 권한을 위임했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즉, 감독주의의 경우는 감독에게 하나님의 뜻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는 입장으로 사도적 계승권을 말한다. 또한 회중주의는 각 교회의 신자들에게 그 권한이 주어졌다고 하는 입장이다. 이 말은 감독, 혹은 회중의 뜻이 곧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는 방법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장로주의는 어떤 입장인가? 기본적으로는 회중주의적이다. 그러나 회중주의와는 다른 독특한 입장이다.
기본적으로 회중주의라는 것은 회중에 의해서 직무에 임할 자를 선출하는 체계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정치체계는 회중주의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실제로 직무에 임할 자의 권능이 어디서 오는가 하는 문제는 첨예한 입장의 차이를 가지고 있기에 극복되지 않는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 신비주의적인 입장이 통용되는 곳에서는 회중의 의사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교회와 신앙의 무질서가 싹트게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 이러한 현실이 한국교회의 신자들의 의식 가운데 있는 사정이 아닐까 생각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당신이 지으신 피조물, 그 가운데서도 피조물에 대한 관할권을 부여하신 인간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게 하신다는 원리를 충분히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이해는 단지 개인의 생활에서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국가를 통치의 수단으로 각각 허락하신 것으로 믿는다면 교회와 국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는 점을 깊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칼빈은 이에 대해서 말하길 직무에 임할 자(목사, 장로, 집사)들은 신자들에 의해서 선출되어야만 한다고 한다.
여기서 오해하게 되는 것은 목사의 선출에 대한 것이다. 장로와 집사의 경우는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반면에 목사는 특별하게 생각하려는 인식이다.
예를 들어 목사는 노회와 총회가 자격시험을 거쳐서 임명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장로주의는 기본적으로 각 교회의 신자들이 그 공동체(교회)의 목회자를 선출할 권한을 가진다.
따라서 목사는 개인적으로 소명을 통해서 목사로서 필요한 과정의 훈련을 통해서 양성되지만 결정적으로는 청빙을 받아야만 목사가 될 수 있다. 또한 목사가 된 후에도 목회지가 있어야 하고, 목사는 자신을 청빙한 교회에 한해서 목회권을 가진다. 만일, 임지(任地)가 없게 되면 헌법적으로 무임목사가 된다.
이것은 철저하게 성경이 교훈하고 있는 선출의 원리에 충실하려는 장로주의의 입장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 하나의 오해는 신자들의 선출권에 전적으로 기인한다면 인간의 뜻과 의지만 있으면 누구를 선출하든지 괜찮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인간의 주권이 전권으로 이해되는 경우이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 상고했듯이 여기서 인간은 하나님을 상실하거나 자신의 이성적 판단의 완전성을 확보하지 못한 존재라고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신자는 신앙을 통해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 뜻을 따르는 입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할 때 회의에 있어서도, 직무를 선출함에 있어서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하는 기본적인 자세를 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여기서 선출하는 신자들이든 피선출자, 즉 직무에 임하게 되는 자이든 모두가 하나님의 소명을 확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회중들은 자신의 이해관계나 인간관계, 혹은 현실적인 필요성에 매여서 선출권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가를 찾는 입장에서 자신의 선출권을 행사해야 하는 것이 바른 자세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가 이러한 심사숙고하는 판단보다는 현실적인 필요나 관계성에 매여서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을 행사하는 것이 일반적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것은 장로교회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문제점이다.
당사자는 물론이고 회중들도 함께 직무에 대한 하나님의 소명을 확인하는 자세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자세이며, 동시에 그것은 성령의 내적 조명에 따르는 신실한 자세이기도 하다. 결국, 하나님이 직접 임명해야 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신자(피조물에 대한 위탁권을 가진)들의 선출권과 소명감이라는 불가분리의 원리를 통해서 직무에 임하게 되는 확신이 양자 모두에게 있어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양자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며,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를 실제로 받게 되는 것이며, 교회와 신앙의 질서가 하나님의 통치에 의해서 유지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교회의 모습이 될 때 아름다움을 유지하게 되는 유형적 교회를 기대할 수 있게 된다.
만일, 이러한 의식이 준비되지 않았다면 결과적으로 교회는 단순히 인간들의 집단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모든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회중은 직무에 임하는 일꾼을 선택할 때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자세를 준비해야 한다. 기분이나 이해관계, 혹은 인간적인 관계에 매여서 선출하게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된다. 뿐만 아니라 세워진 일꾼에 대해서도 내가 뽑은 사람, 혹은 내가 세워준 사람이라는 의식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교회의 직무는 하나님의 임명권에 의해서 세워졌다.
다만, 그 직무에 임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역할을 사용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섭리방편이기 때문에 인간들의 역할이 동반되는 것이다.
따라서 선출권을 가졌다고 해서 자신의 마음대로 그 권한을 행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자세가 아니며 선출권에 대한 바른 시행이라고 할 수 없다.
어떤 경우이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자세로 자신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을 때 하나님의 뜻을 섬기는 것이 된다. 그럼에도 자신의 인간적인 의지가 앞서는 선택을 한다면 적극적인 의미로서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 된다.
또한 피선출자, 즉 직무에 임하는 자는 자신의 소명에 대한 확인이 있어야 한다. 자신이 허락받은 은사를 확인하며, 그 은사에 합당한 직무인가를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이에 대해서 불확실한 입장이거나, 여기서도 인간적인 감정에 치우쳐서 직무에 임하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역시 바른 것이라 할 수 없다. 직무에 임하는 것은 기분의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의 소명의 확인이다.
이것이 확인되지 않는다면 직무에 임하는 것까지도 재고할 수 있는 여유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또한 소명이 확인되었음에도 그 직무에 임하는 것을 부정하는 자세도 합당하지 않다. 그것 역시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선출권을 행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위탁권을 바르게 행사하여야 하는 책임이 있고, 직무에 임하는 자도 자신의 소명을 확인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 철저하게 순종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렇게 될 때 비로소 교회가 평화로우며, 하나님의 권위가 살아있는 교회가 되고, 질서가 있는 교회의 모습을 만들 수 있게 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은 지금도 하나님의 교회를 직접통치하고 계신 것이 된다. 이처럼 직무와 선출권을 행사함에 있어서 바른 자세와 살아있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자세는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가게 된다.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장로주의 정치원리를 채택한 교회가 취해야 하는 직무와 선출에 대한 이해이다. 즉, 직무에 대한 하나님의 임명권이 행사되는 것이다. 따라서 장로주의 정치원리에서 선출하는 원리와 소명감은 불가분리의 관계인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도리를 바르게 행사하여야 한다. 이것을 달리 표현한다면 소명은 주관적인 것이라 할 수 있고 선출(고정에 있어서는 시험)은 소명에 대한 객관적인 확인이라 할 수 있다.
4. 임시직과 항존직(2004-11-30)
교회의 직분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확인하려고 할 때 현재의 교회에서 경험할 수 없는 직분이 있기도 하고, 반면에 성경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은 직분을 현재의 교회에서 경험하게도 된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서 많은 궁금증을 가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반면에 이에 대한 아무런 생각이 없이 단지 역사적으로 교회에 있었던 직분이니까 전통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문제가 된다.
성경적인 확인이 없이 현실적인 필요에 따라서 직분을 받아들인다면, 이미 그 직분은 하나님의 원리를 벗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통을 가지고 있는 것이 로마교회와 루터파, 그리고 성공회와 같은 종교개혁 이후에 국교회주의(erastianism)를 채택한 교회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이다.
임시직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표현으로 창설직(創設職), 또는 특별직이라고 한다. 그러나 가장 적절한 표현은 창설직이라고 생각된다.
창설직원이란 사도시대에 기독교회를 처음으로 세우는 과정에서 있었던 직원들을 말한다. 이에 대해서 칼빈은 에베소서 4장 11절에 근거해서 전부 다섯 가지 직원을 말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처음 셋은 비상(임시)직원이라 했고 나머지 둘은 통상직원이라고 했다.
여기서 비상직원이란 교회를 창설하기 위해서 필요했던 직원을 의미하며, 통상직원이라함은 그 이후에 교회를 통치하는 직원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창설직원은 “전에 교회가 전혀 존재하지 않은 곳에 교회들이 형성되는 동안, 혹은 적어도 교회들이 모세로부터 그리스도에게로 이전되는 동안 지속하기 위한” 역할을 감당했던 직원을 말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임시직이라는 표현이 가능하다. 그러나 임시직원이라는 표현이 그 직무의 권위를 약화시키거나 부정하는 것일 수 없다는 것은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의 창설직원의 권위는 절대적인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고, 그 권위에 기초해서 신앙과 교회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창설직원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1) 使徒職(Apostoles)
사도라는 말은 신약교회에 있어서는 특별한 직무를 의미하며, 예수님에 의해서 불림을 받은 12명과 바울을 지칭한다. 그러나 이 외에도 성격에는 사도적(apostolic)인 인물들에게도 적용되는 경우도 있다(행14:4, 14. 고전9:5-6. 고후8:23. 갈1:19).
사도직의 특별한 임무는 신약교회의 기초를 놓는 것이었으며, 훗날 그리스도인들의 예수님과의 교제가 사도들의 말씀을 통해서 가능하게 된다는 점에서 말씀을 기록하여 남겨주는 역할이었다.
따라서 사도직은 특별한 자격조건이 요구되었다. 그러므로 현재의 교회에서 사도로서의 권한을 가지거나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직분과 그 권위는 예수님에 의해서 오직 사도들에게만 주어졌던 것이다.
그러면 사도직에 요구되었던 것은 무엇인가? 첫째, 예수님에게 직접 불림을 받은 자(막3:14, 눅6:13, 갈1:1). 둘째, 예수님의 생애와 부활의 목격자로서 그 것을 증거할 수 있는 자(요15:27, 행1:21-22, 고전9:1). 셋째, 자신들이 받은 영감(靈感) 자각하고 있는 자(행15:28, 고전2:13, 요일5:9-12, 살전2:4). 넷째, 선교를 행함에 있어서 신적인 보증을 위해서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받은 자(고후12:12, 히2:4). 다섯째, 사역의 결과에 대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그 표적으로써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고전9:1-2, 고후3:2-3, 갈2:8). 등을 말할 수 있다.
따라서 1세기의 교회에서 사역했던 사도들 외에 현 역사에서 사도를 말하는 것은 가당치 않은 일이다.
그러나 현실에 있어서도 사도직을 말하는 경우는 로마교회와 성공회와 같이 최고의 감독에게 사도권이 계승되고 있다고 믿는 그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이러한 주장은 성경적인 증거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의 주장대로 감독이 독자적으로 관할한 교구도 없었거니와 감독 개인이 주도하는 목사의 장립은 더더욱 없었다(행15장은 이를 잘 증명하는 말씀임).
또한 감독이란 칭호는 장로의 다른 명칭인 것을 성경에서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고, 목사의 장립은 노회가 시행했음도 알 수 있다(행20:28, 딤전4:14).
사도직을 가지고 있었던 이들에게 주어졌던 권능은 현재에 계속해서 나타나지 않는다. 그들에게 그러한 권능을 주신 데는 이유가 있다.
“진리를 받을 감동을 일으키기 위함, 전도자가 하나님의 사자임을 표시하기 위함, 전도자의 전언(傳言)이 진실함을 증거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교회가 설립되고 하나님의 계시로써 성경이 완성된 이후에 사도적 직분과 직무가 지금도 계속된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2) 先知者職
신약성경에는 선지자직을 말하고 있다(행11:27-28. 13:1-2. 15:32. 고전12:10. 13:2. 14:3. 엡3:5. 4:11. 딤전1:18. 4:14). 이들은 특별히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한 직무를 수행했으며, 미래에 대해서 예언하는 일도 했다.
따라서 이 직분은 신약의 계시가 최종적으로 완결되지 않았던 시대에 초자연적인 카리스마와 함께 하나님의 가르침을 계시하고, 그것을 증거하는 직무였다. 따라서 신약의 계시가 완결되고, 신약성경이 완성된 다음에는 이 직분이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 칼빈은 “...지금은 이 같은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으며, 혹은 그들이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에 대해서 하지(J. A. Hodge)는 “선지자의 직분이 폐지됨은 신구약이 완성되어 선지자의 존재가 필요하지 않은 때문”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또한 “예수님께서도 사도와 선지자의 직분을 존속시킬 방침을 지시하심이 없고, 그 후에는 특별한 권능을 주신 일이 없은, 즉 이 직분들을 폐지하기로 정하신 줄로 안다”고 설명하고 있다.
결국 선지자 직분은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성경이 완성됨과 함께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에 있어서는 성경에 대한 신앙과 바른 해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또한 자신을 선지자로 호칭하거나 새로운 선지자임을 자처하는 경우는 사이비 교주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주지해 두어야 할 것이다.
선지자직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하심과 그 사역을 통해서 스스로 완성하신 것이기 때문에 현재는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여 가르치는 것이 설교자의 직분이다. 바른 가르침은 설교자가 가지고 있어야 하는 가장 큰 책임이다.
3) 傳道者(Evangelists)
신약성경에는 전도자에 대한 언급이 많이 있다. 빌립(행 21:8), 디모데(딤후 4:5), 마가(딤후 4:11), 디도(고후 8:23) 등이 성경에서 전도자로 지칭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전도자라는 직분이 교회의 직무로 말하고 있는 것은 에베소서 4장 11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이 교회에서 감당했던 일은 사도들을 도와서 일하며, 가르치기도 하고, 사도들의 파견을 받아 지 교회에서 설교와 성례전, 권징도 시행했음을 알 수 있다(딛 1:5, 3:10. 딤전 5:22).
이렇게 볼 때 일반적인 설교자들 보다 권위나 사역의 범위가 넓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직분은 사도들을 보조하는 것이었기에 사도직의 폐지와 함께 폐지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직분은 사도들의 사역의 완성과 함께 끝난 것으로 이해함이 마땅하고, 전도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성하신 복음을 믿는 모든 신자들이 감당해야 하는 것으로 주어진 것이다.
5. 통상적 항존적 직무(2004-11-30)
사도적 교회는 교회형성을 위한 직제를 확립함으로써 오늘날 교회를 위한 제도의 원리를 제공하고 있다. 그렇다면 신약성경 증거하고 있는 사도적 교회가 보여주고 있는 통상적 항존적 직무들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한 성경적인 확인 필요 할 것이다.
로마서 12장 6-8절에서는 임시직을 제외하고 “섬기는 일과 가르치는 일” “권위하는 일” “구제하는 일과 긍휼을 베푸는 일”을 감당하는 일을 말하면서 세 가지의 직무를 말하고 있다.
여기서 섬긴다는 말은 문맥상 일반적인 의미의 봉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 즉 말씀의 봉사를 의미한다.
“권위하는 일”이라고 번역된 것은 지도하는, 곧 통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고린도전서 12장 28절에서는 역시 임시직을 제외하고 교회의 통상직원으로는 “교사” “돕는 자” “다스리는 자”를 말하고 있다. 여기서 돕는 자는 물질적인 도움을 나누는 자를 의미하고, 다스리는 자는 관리자로서 영적인 지도, 곧 통치권을 행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에베소서 4장 11절에서는 역시 임시직을 제외하고 본다면 “교사 혹은 목사”를 교회의 통상직원으로 증거하고 있다.
여기서 목사와 교사의 직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다시 다루겠지만 교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로서 이해하면 될 것이나 그러면 목사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동반한다. 목사는 교사와 같은 직분으로서 교회를 통치하는 제도적인 의미에서 당회의 의장직을 감당하고 있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이론이 있다. 즉, 당회장직을 수행하는 교사라고 할 수 있다. 결국, 그러한 의미에서 교사와 목사는 같은 직이라고 보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보면 신약성경에 나타난 교회의 통상적 항구적 직무는 셋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즉, 목사 장로 집사이다. 그러나 장로교회는 이 직분을 세 개의 직분으로 이해하지 않고 두 개의 직분으로 이해하는 것이 삼직분론을 주장하고 있는 감독주의 교회들과 다른 점이라 할 수 있고, 장로교회와 같이 이직분론을 주장하고 있으나 장로직에 대한 이해가 다른 재세례파와 회중주의자들과는 다른 목사직과 장로직은 같은 직으로 이해하되 직무의 다름을 인정하는 입장이다.
삼직분론자들은 직분을 계급으로 이해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고, 회중주의를 표방하는 이직분론자들은 장로나 목사 어느 한 쪽만 인정한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회중주의를 추구하는 교회에는 장로만 있고 목사가 없거나 반대로 목사는 있으나 장로가 없는 경우가 있다. 이렇게 이직분론을 주장하지만 장로교회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하나의 문제는 항존적 직분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견해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항존의 의미가 교회적인 것인가 아니면 개인적인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즉, 교회에 직분자가 항존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것인지 아니면 한 사람 개인이 직분에 임하게 될 때 그 개인이 그 직분에 항존적 신분을 가진다는 의미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에 대해서 한국교회는 대부분 개인이 임하게 되는 직분이 항존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따라서 교회법에 항존직이라고 하는 것은 안수를 통해서 세움받은 직분자 개인을 항존의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것은 성경에 대한 이해의 차이로써 교회적인 선택에 의해서 받아들이고 적용해야 하는 문제로 남겨져 있다.
칼빈도 앞에 열거한 성경구절을 해석함에 있어서 목사와 교사를 교회의 정치를 주관하는 통상직원이라 하고 교사의 직무를 목사의 직무에 포함된다고 했다. 그리고 장로와 집사를 통상직원으로 이해했다. 동시에 감독 장로 목사는 같은 직분의 다른 명칭이라고 이해했다. 그리고 한국 장로교회가 대부분 받아들이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도 “교회의 통상적 항존적 직원은 목사, 치리장로, 집사”로 밝히고 있다. 이 고백은 교회에 있어서 통상적 항존적 직분을 세 가지 직분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성경적인 입장이라는 것을 공적으로 확하는 것이라 하겠다.
하지(J. A. Hodge)도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교회에 항존해야 할 직분으로 이 세 가지 직분을 말하고 있다. 이 세 가지 직분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가운데 “전도하고 교육하는 것과 신령할 중에 치리하는 것과 구제하는 것인데, 이는 교회에 제일 필요한 일이므로 항상 있을 것이다. 또 성경이 이 삼직의 책임과 선거방법을 가르침을 보니 항상 존재할 것이다.” 이 말은 삼직은 교회가 역사를 통해서 필요한 이유들이 생겼기 때문에 그 때부터 만들게된 제도가 아니라 교회의 본질적인 필요와 그 필요를 아시는 하나님이 말씀과 역사를 통해서 이 직분을 교시하셨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의 입장에서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설명이다.
즉,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직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권면하며, 그 말씀에 의존해서 성례전의 집행이 위탁되어있는 목사의 직무다. 다음은 치리회의 구성원으로서 권징을 시행하는 것이다. 이 때에 장로든 목사는 모든 치리회의 구성원은 장로로서 그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나아가서 세 번째의 직무는 집사직이다. 집사직은 교회 안과 밖에서 예수님의 사랑으로 봉사하는 직이다. 이렇게 목사 장로 집사라고 하는 직분이 교회에 있어서 통상적 항존적 직무임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이렇게 통상적 항존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직분이 제도적으로 확립된 것은 어느 날 어떤 사람의 지혜나 경험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섭리를 통해서 역사의 과정 속에서 계승시켜 오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구약의 이스라엘과 유대교의 역사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교회 안에 이러한 제도가 만들어지는 것은 자연스럽게 구약과 유대교의 역사를 통해서 비록 그들이 왜곡된 신앙을 형성하는 역사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그들의 역사를 통해서 계승시킨 것은 하나님이셨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다. 따라서 역사의 연속성과 비연속성이라는 이해를 동반하지 않으면 쉽게 역사를 단절하는 오류를 범함으로써 교회적 역사성과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는 것에 대해서 유의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성경적으로, 역사적으로 교회의 통상적 항존적 직분을 이해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에 철저하게 따르고 있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역사를 통해서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입장을 부정하는 것이 될 것이다. 따라서 교회형성을 위해서는 여전히 성경에 충실하며, 그러한 신앙적인 전통이 계승되고 있는가에 대한 신앙적 확신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초대기독교회가 형성되는 과정에서는 많은 혼란이 있었다. 어떤 정확한 체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떤 모델이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교회형성을 위해서 어떻게든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역사를 통해서 계승되고 있었던 구약의 장로주의 제도를 사도들은 자연스럽게 교회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유대교의 회당이 모두 개종을 하게 되면 그들이 모였던 건물은 그대로 예배당이 되고, 회당장은 그대로 장로가 되었다. 그러나 전혀 새롭게 예배당이 개설될 때에는 목사 장로 집사를 택하여 세웠다. 이렇게 받아들여진 제도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자리매김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교회의 관리상 필요한 제도들이 현재의 교회들에는 많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직분들은 성경이 명시하고 있는 교회의 직분이 아니고, 교회의 현실적인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활용하는 것뿐이다.
따라서 그러한 직분들에 전적으로 교회의 통치와 운영을 맡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1) 치리장로의 起源과 역사(2004-11-30)
성경에서 치리장로의 기원을 찾는다면 먼저 신약의 교회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신약의 치리장로는 구약의 장로로부터 기인하는 것을 전제한다.
조금 더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로마서 12장 7-8절, 고린도전서 12장 12절, 디모데전서5장 17절, 데살로니가전서 5장 12절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성경구절들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장로는 교회의 영적인 지도와 관리를 포함해서 치리회에 있어서 직무를 수행하였다.
여기에 나타나는 장로(presbuteros), 혹은 같은 말로서 감독(episkopos)이라고 불리는 용어는 교환해서 사용하는 것으로서 3직분론을 말하고 있는 감독주의자들의 주장과 같이 다른 직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직분의 다른 명칭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은 사도행전 14장 23절, 15장 6, 22절, 16장 4절, 21장 8절, 디도서 1장 5-7절, 베드로전서 5장 1-2절 등이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서 직접적으로 치리장로를 세우라고 하는 말씀이 나오고 있지 않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 자신은 물론이고 사도들도 장로제도를 세우라는 말씀을 하지 않았다. 다만, 이미 교회 안에 받아들여진 장로제도에 대해서 어떤 사람을 세울 것인가 하는 교훈을 하고 있고, 이미 교회가 장로를 세우고 있어서 원리를 찾아볼 수 있다. 이것도 역시 교회가 시작되면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이미 교회안에 장로가 있는 상태에서 말씀하셨다는 데 그 기원을 생각할 때 항상 유의해야 하는 점이다.
그러면, 왜 그러한 언급이 없었던 것인가 하는 문제와 동시에 신약의 교회는 어떻게 장로제도를 받아들였는가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장로제도가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답할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예수님도 사도들도 교회의 통치원리를 새로운 것을 만들려 하지 않았고, 역사적으로 계승되고 있는 장로제도를 그대로 자연스럽게 신약의 교회에 받아들이게 했던 것이다. 따라서 새삼스럽게 교회에 장로를 세우라는 말씀이 없었던 것이고, 그와 더불어 누구의 특별한 명령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구약시대의 역사와 전통에서 계승되고 있는 장로제도를 그대로 수용한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장로주의 원리는 역사적이며 성경적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확실한 역사관을 가지지 않으면 구약과 신약의 역사적 단절이라는 문제를 낳게 한다는 점에서 충분하고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예수님과 사도들의 의식에 있어서 명시적으로 그 입장을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이것은 묵시적으로 구약의 계승이라는 차원에서 수용해서 처음 교회가 제도적으로 모양을 갖추도록 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의식이 있어야 한다. 만일, 이것을 부정한다면 신약의 교회가 수용하고 있는 장로제도는 잘못된 것이 분명하다. 예수님도 제자들도 말씀하지 않은 것을 교회에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구약의 제도를 직접적으로 계승시킨 것은 유대교로 변질된 이스라엘의 신앙이다. 그러나 유대교는 기독교로 계승되는 참 종교의 통로로서의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장로제도가 어떻게 발전되고 계승되었는지 하는 것을 유대교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고, 그 부분을 성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마 5:22, 26:3, 눅 7:3, 행 4:8, 23, 5:21, 6:12, 14, 24:1, 25:15)
그리고 유대교가 계승 발전시켰던 장로에 의한 통치원리는 교회 안으로 자연스럽게 전달되었기 때문에 초기에 형성된 교회들은 그것을 교회의 통치원리로 수용하는 데 어떠한 거부감도 느끼지 않았고, 예수님과 사도들도 그것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지 않았으며, 나아가서 사도들은 당연한 것으로 수용하고 오히려 장로를 세움에 있어서 주의해야 할 것에 대해서만 후에 교훈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장로제도를 통한 교회의 통치는 교회에로 유입되어 기독교의 형성을 위한 정치원리로 자리잡게 되었다(행 14:23, 20:17, 딤전 5:17, 19, 딛 1:5, 약5:14, 벧전 5:1, 5). 따라서 장로교회의 정치원리가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장로주의를 성경적 교회형성의 원리로 가지고 있는 자들로서 장로교회의 역사적인 기원을 확실하게 이해해야 하는 것과 바른 장로교회를 만들어 가는 책임의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 많은 경우가 장로교회의 창시자를 칼빈으로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적으로 보면 교회의 통치원리로서의 장로주의원리는 구약과 신약의 전 역사를 통해서 일관되게 증거되고 있다는 점에서 틀린 말이다. 만일, 칼빈이 장로교회의 창시자라고 한다면 칼빈 이전에는 장로주의가 없었어야 할 것이고, 또한 장로교회란 말도 칼빈이 가장 먼저 사용한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칼빈은 어느 경우에도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로교도들 조차 이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하는 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장로교회는 성경적 교회로서의 전통과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지 칼빈이 세운 교회가 아니다. 만일, 칼빈이 세웠다 할지라도 그것이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따를 수 없다는 것이 개혁파의 입장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장로주의 정치원리는 성경이 증거하는 역사적 전통적인 근거에 의한 교회형성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는 물론 장로교회나 장로주의라는 말이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장로주의에 의한 통치를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들을 확인하게 하는 것은 유대교로 변질된 역사를 넘어서 모세시대로 까지 거슬러 올라 갈 수 있다.
모세의 출애굽 이전에도 이미 포로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의 백성들 가운데는 장로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출 3:16, 4:29, 12:21). 더 거슬러 올라간다면 아브라함 시대에도 장로라는 용어는 나오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성격을 가진 직분인지 확인할 길이 없기에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모세가 지도자로서 활동하던 출애굽 이후에 이미 완전한 형태의 통치기구로서 장로제도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에는 장로들을 통한 통치기구를 완전한 형태로 구성했고 그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통치했으며, 이것을 하나님이 인정했다는데 또한 의미가 있다. 모세는 각 단계의 회의체(會議體)를 구성하여 백성을 통치하는 원리로 삼았다(출 18:21-25). 그리고 각 단계의 회의체 가운데 최고의 치리회는 70인 장로회였다(출 24:1, 민 11:16, 25). 70인 장로회는 이스라엘 최고의 법정(法庭)이며, 동시에 종교회의체였다. 이것은 오늘날 장로교회의 총회의 성격과 비슷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에도 장로제도는 계승되어서 이스라엘의 국가적인 정치원리로 그 기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사사시대(삿 8:16, 룻 4:2), 왕국시대(삼상 15:30, 16:4, 삼하 17:15 대상 11:3 왕상 8:3, 대하 5:4), 그리고 포로시대(렘 29:1 겔 8:1, 14:1, 20:1)를 거치면서 국가적인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변함이 없었던 것은 장로제도에 의한 통치였다(스 5:9, 6:7, 10:14).
국가가 분열을 하고 망하는 상황에서도 장로들의 회의체가 그 기능을 일관되게 했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의식 가운데 얼마나 확고하게 장로주의 원리에 의한 통치를 신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하는 것을 짐작하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구약의 장로와 신약의 장로 그리고 오늘날 장로들의 기능이나 신분이 똑같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구약시대에는 단지 종교적인 기능만 한 것이 아니고 국가적 정치적인 기능까지 감당했다.
그것은 제정일치라고 하는 시대적인 상황에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정교분리가 이루어지면서 현재는 교회 내에서만 직접적인 그 기능을 감당한다. 따라서 구약시대와 유대교의 회당시대까지는 장로들의 기능이 종교적인 것은 물론이고 정치적인 문제까지도 최종적인 권위를 가지고 결정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찌 되었든 이와 같이 장로주의 통치원리에 의한 교회의 형성은 그것이 성경적 기원을 가지며 역사적으로는 아브라함 이래로 지금까지 단절되지 않고 계승되어 오는 전통적인 통치원리라는 점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바른 장로교회를 형성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이다.
2) 치리장로의 職務 - ①(2004-11-30)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치리장로의 직무에 대한 교단의 헌법의 해설이 아니라 성경적인 원리를 찾아보는 것이다.
물론, 헌법을 간과하는 입장에서 해설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염두에 두고 쓰고자 한다. 헌법과 성경적 원리는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치리장로의 직무는 “치리”(rule)이라고 하는 말에 포함되어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면, 무엇을, 어떻게 “치리”하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하게 되는데, 그것은 성경이 명시하고 있는 것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 명시하고 있는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는가에 따라서 장로주의 정치원리의 성격이 달라질 수 있는 문제가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성경적 역사적 신앙을 추구하는 개혁파의 입장에서 성경이 교훈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제일 먼저 프로에스테미(proestemi)라고 하는 말에서 장로의 직무를 찾아볼 수 있다. 이 단어로 장로의 직무를 설명하고 있는 곳은 로마서 12장 7-8절, 데살로니가전서 5장 12절, 디모데전서 3장 5절, 5장 17절 등이다.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단어 프로에스테미라는 “지도하다” “다스리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rule”이라는 단어로 번역하였다. 그래서 영어성경(KJ)은 일관되게 같은 단어로 번역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 우리말 성경도 한결같이 “다스린다”는 말로 번역을 하고 있다. 그러면 여기서 다스린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권위를 가지고 관리하다 감독하다”는 의미이다.
즉, 여기서 권위라고 하는 것은 장로가 스스로 가지고 있는 사회적 개인적인 권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권위는 하나님이 맡겨주신 권위를 말하는 것이고, 이것을 우리는 위탁권(委託權)이라고 한다. 따라서 교회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위탁권에 대해서 인정할 수 있어야만 그 권위에 순종할 수 있다는 문제를 가지게 된다.
여기서 장로들이 가지고 있는 위탁권은 장로들의 내적인 소명과 회중(신자들)의 선출과정을 통해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위탁권에 대한 교회적 확인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에 대한 확인이 충분하지 못하고 그러한 인식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때문에 교회형성에 있어서 문제를 동반하고 있는 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적인 문제라고 지적할 수 있다.
그러면 장로들은 치리권을 가지고 무엇을 하는 것인가? 교회를 “관리” “감독”하는 일을 한다. 이것이 “rule”로 표현되는 장로의 직무이다. 즉, 장로의 직무는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신자들의 신앙을 관리하고 감독하는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이때의 장로의 직무에 대한 책임은 목사와 같은 책임을 가진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관할권이 치리회인 당회에 있기 때문이고, 당회의 구성원으로서 장로는 목사와 동등한 책임을 가진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현실에 있어서 치리회의 구성원들인 장로들이 실제로 그러한 책임을 의식하고 있으며, 그 책임을 다하기 위한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바른 교회가 세워지기 위해서는 치리회의 바른 의식과 직무에 대한 성실한 수행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그럼에도 실제로 한국교회는 그 관리와 감독하는 직무를 가지고 있는 장로들이 신자들의 신앙의 상태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은 물론, 거의 신자들에 대해서 책임있는 관리 감독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것은 이미 장로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이다. 신자의 신앙상태를 알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바른 장로의 직무를 수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므로 장로의 직무는 치리회를 통해서 신자들의 신앙에 대한 관리 감독에 충실해야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충실하지 못한 채 다른 일, 즉 행정적 정치적인 일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장로주의 정치원리에 충실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건강한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단지 외적인 것에 있지 않고, 그 이전에 지도자들이 장로교회의 형성원리에 대한 바른 이해와 그 원리에 충실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고린도전서 12장 28절의 큐베르네세이스(xuberneseis)라고 하는 말로서 관리자(Government, Governor)라고 번역되었다. 우리말 성경에는 “다스리는 것”이라고 장로의 직무를 번역하고 있다. 같은 말이 사도행전 27장 11절, 요한계시록 18장 17절에서는 “선장”이라는 단어로 번역되어 있다는 것도 주목할 일이다. 왜 같은 단어가 이곳에서는 선장이라는 단어로 번역이 되었고, 그렇게 받아들여도 괜찮다고 여기는가? 여기서 장로의 직무에 대한 해석이 가능해진다.
즉, 치리장로는 치리회인 당회를 통해서 신자들의 신앙과 생활의 방향을 제시하는 직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선장의 직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배가 나아가야 할 바를 결정하고 그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만일 선장이 이에 대한 판단을 하지 않거나 그 직무를 수행하지 않는다면 이미 그 자격을 상실한 사람이다. 교회의 선장은 예수님이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교회의 머리로 고백하는 신앙에서 이미 확인하고 있고, 예수님의 통치권을 이미 인정하는 신앙을 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장로들이 선장이라고 한다면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앞에서 사용한 용어에서 밝혔던 것처럼 위탁권을 통한 실제적인 통치를 하도록 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며, 그 책임 또한 막중하다.
따라서 장로의 직무는 신자들이 신앙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안내하며 이끌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장로(목사, 장로)는 선장으로서 준비된 자이어야 한다는 것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신자가 가야할 길을 제시할 수 있는 선견적 지식과 신실한 신앙이 있어야 한다. 또한 그것을 자신의 장로서의 직무로 확신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다음으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에피스코포스(episkopos)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사도행전 20장 28절에서 사용되고 있는 용어이다. 우리말 성경에는 “감독자”로 번역되어 있다. 여기서 감독이라는 말은 “돌보다” “보살피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말 뉘앙스는 권세자로서 지배하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는 표현이지만 이 말의 언어적 의미는 신자를 돌보고 살피는 것이다. 실제로 도움을 주고 보살피는 일을 하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렇다면 장로의 직무는 단순한 지배자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한 보살핌이라고 할 것이다. 여기서 보살핌은 단지 물질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적인 것을 중심으로 이해해야 한다. 신자들이 신앙으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살펴야 할 일들에 대한 직무를 말하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물질적인 것이 관계될 수 있다는 점에서 전혀 물질적인 것은 관계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교회에는 또 다른 직무를 맡은 자들인 집사들이 감당하는 일이다. 따라서 집사의 직무로서 맡겨져야 할 것이다.
즉, 치리권이라는 말을 통해서 단순한 지배자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은 장로의 직무에 대한 충분한 이해라고 할 수 없다. 장로의 직무는 신자들의 약함을 감당하고 살피는 일이다. 이것은 장로에게 위탁된 치리권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더 폭넓게 하는 것이다. 교회의 장로들에게 위탁된 치리권은 신자들을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인도하고 양육하며 가르치기 위한 권세이다.
따라서 장로는 신자들의 영적인 상태는 물론 실제적인 생활에 대해서도 충분히 살펴서 그들에게 실제적인 교훈과 도움이 되는 일을 감당해야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치리권은 분명히 하나님으로부터 위탁된 권세이나 동시에 섬김의 직무를 의미한다. 또한 교회의 직분은 단순한 계급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도 분명해야 한다.
2) 치리장로의 職務 - ②(2004-11-30)
한 가지 더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사도행전 20장 28절과 베드로전서 5장 2절에서 볼 수 있는데 “치라”(to shepherd)말 속에 장로의 직무가 무엇인지 나타나고 있다. 즉, 장로의 직무는 하나님의 교회를 치는 일이다. 이 말은 포이에메노(poiemeno)라고 하는데 이 말에서 4가지의 의미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 “배려하다”는 의미로서 목사와 회중과의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인격적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다. 달리 말하면 목자와 양의 관계에 비교할 수 있는 것으로서 예수님이 요한복음 10장 3-5절에서 말씀하셨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배려하다”는 말은 “한 마리 한 마리에 대해서 아는 것”을 말하며, 동시에 “한 마리 한 마리를 부르는 것”(요10:3)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장로의 직무가 무엇인가 하는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장로는 모든 신자들을 알아야 한다. 알되 그 상태를 알아야 하고, 모든 신자를 살펴서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실제로 그렇지 못할 경우 치리회의 기능을 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한국교회의, 특히 도시교회에서 장로의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과연 이 직무에 얼마나 충실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생각할 수 있다.
둘째, “먹이다”(요21:15-17) 혹은 “양육하다” 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먹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이고, 가르치는 것을 통해서 수행하는 직무를 의미한다. 치리장로의 경우 이 직무를 직접적으로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목사(교사)의 가르침을 통해서 공적으로 이 가르침이 실천되도록 하는 일은 치리회를 통해서 공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일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도록 하며, 그 권위에 따라서 모든 신자들이 생활과 신앙에 규범이 되도록 해야 한다.
셋째, “눈물로 각 사람을 깨우치다”(행20:31)고 하는 직무를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장로가 하나님의 계명을 바로 가르치며, 동시에 위로하는 것을 말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은 죄를 감추거나 덮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죄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는 것이고,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하여 그 죄로부터 자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죄를 깨달은 자가 애통하는 것을 함께 동참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사랑을 소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 같은 입장에서 긍휼과 애통한 마음으로 깨닫도록 가르치며 함께 눈물을 흘리는 일이다.
따라서 장로는 모든 신자들의 신앙상태를 파악하고 눈물로 격려하며 아픈 마음을 가지고 깨닫도록 하는 일에 전념할 수 있어야 한다. 단지 권위를 가지고 지배하는 의미가 아니고 하나님의 계명이 신자들의 삶에서 준행될 수 있도록 가르치고 격려하는 일이다. 이러한 자세는 장로로서 섬김의 직무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한다. 신자들은 이러한 장로의 모습을 통해서 더욱 격려받고 존경하게 된다.
넷째, “보호하다”(행20:29-30)는 말에서 확인할 수 있는 직무가 있다. 양무리를 내외의 적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을 의미하고, 동시에 “지키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지킨다는 의미는 내적인 적으로부터 지킬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외적인 적이란 불신앙이나 적그리스도에 대한 경계가 필요한 것이고, 내적인 적이란 게으름을 비롯해서 잘못된 신앙의식과 습관, 전통 등에 의해서 기독교 신앙으로부터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왜곡된 신앙이나 진리를 따르지 않는 생활의 습관을 파악하여 깨닫도록 가르치고, 돕고, 때로는 격려하며, 보호하는 일을 해야한다.
물론, 이러한 직무를 수행하는 것은 개인적인 것이기보다는 치리회를 통해서 하는 것이다. 치리장로의 직무수행은 전적으로 치리회를 통해서 한다는 것은 잊어서 안 될 일이다.
그러면 이러한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원리는 무엇인가? 개인적인 신앙이나 경험, 혹은 자신의 생각을 근거로 해서 수행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이 부분이 확실하게 정립되어야 하는 것은 직무 그 자체를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왜냐하면, 직무를 수행하는 원리가 무엇인가에 따라서 직무에 임하는 자세는 물론이고, 그 책임과 권위가 확립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교회의 직무는 그 출발이 인간 개인의 능력이나 인간들의 결정에 따라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직무를 수행하는 자는 물론이고 일반 신자들도 장로들의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전적으로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모든 신자들이 직무와 관련해서 하나님의 뜻과 권위를 확인할 수 있어야만 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 가르치고, 그 말씀에 따라서 회중을 양육하고 지키며, 말씀을 따라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회하는 일이지만 목회의 근본적인 요소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양(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하고,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요10:11, 15). 여기서 어떤 것도 소홀히 여기거나 하나만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과 원리가 없이 양을 돌보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만일, 이것을 잃어버린다면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양을 돌보게 될 것이다. 즉, 자신의 직무는 자신을 위한 것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장로직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심에 있어서 위탁된 직무를 수행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한다. 동시에 말씀에 대한 확신은 가지고 있으나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자세는 반드시 동반되어야 한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뜻으로 확인하고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자세를 동반하는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여기서 장로가 직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자세를 배울 수 있다. 장로의 직무는 단지 세상에서처럼 직분(position)에 의한 권위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장로의 직분은 그 직분이 계급적인 의미에서 권위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권위를 가진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는 직분을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에 의해서 확인하고, 그 말씀에 따라서 직무를 수행할 때 권위는 말씀에 의해서 보장된다. 이 때의 권위는 존경과 신뢰를 동반한다.
따라서 군림하는 권위가 아니라 신뢰와 존경을 동반하는 권위이다. 이러한 원리에 대해서 장로 자신은 물론이고 신자들 모두가 같은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에서도 세상과 같은 방법과 수단과 제도를 만들어서 그 권위를 유지하거나 확보하려는 노력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교회 안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은 이것을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렇게 볼 때 장로직은 교회 전체를 위해서 있는 직분이다. 장로(목사, 치리장로)는 개인을 위한 직분이 아니고, 개인의 명예를 위한 직분도 아니다. 장로직분은 하나님의 교회를 이 땅에서 형성하고 유지해 나아가는 막중한 책임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며,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기까지 유형교회 안에서 그 직무를 수행하여야 할 본분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 직분을 항존직이라고 한다.
그래서 장로라는 직분은 교회에서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직분이 아니다. 유형교회가 세상에 있는 한 장로직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시고 더 이상 인간의 통치원리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기까지는 있어야 하는 직분이다. 그만큼 이 직분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고 장로 자신은 물론이고 회중 모두가 이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땅에서 온전하고 건강한 교회를 이루어 가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렇게 장로의 직무는 교회를 섬기는 직으로서 유형교회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이고, 유형교회를 이루어 가는 원리인 것을 신자들 모두가 확인하고, 이 교시를 공유할 수 있는 이해와 신앙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직무가 바르게 수행되도록 신앙으로 격려하는 가운데 건강한 교회를 이루도록 교회의 구성원 모두가 힘써야 한다.
2) 치리장로의 職務 - ③(2004-11-30)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감독, 목사 등의 명칭은 오늘날의 치리장로를 나타내는 말이라고 하기보다는 교직(敎職)인 목사를 가르치는 말이며, 당회의 의장으로서의 목사에 대해서 사용하였다고 하는 역사적 사실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사도행전 20장 18절-35절, 그 가운데서 특별히 28절에서는 “장로와 감독과 목사”가 하나의 직무를 감당하는 것으로 설명되어있다. 그렇다고 혼동해서는 안되고, 여기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 하나는 직분에 있어서 동등성(계급이 아니라는 의미로서 치리회를 통한)을 교훈받을 수 있고, 또 하나는 치리장로가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양을 먹인다’ ‘보호한다’와 같이 목회자가 하는 일을 감당해야 하는 것처럼 말씀하고 있는 직무에 대한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게 하는 내용이다.
따라서 여기서 생각할 것은 직분의 동등성의 문제는 이미 살펴보았던 것이기에 생략하기로 하고 치리장로는 목회자가 아님에도 목회적인 직무를 말하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치리장로는 자신이 직접 목회자로서 ‘양을 먹이는’ 직무가 있다는 것이 아니다. 이 말씀 가운데서 25절을 주목하면 바울은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자신의 모범을 따르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단지 자신이 수행했던 말씀의 가르침과 전도의 행위에 대해서 따르라는 말씀으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가 가르친 말씀을 통해서 에베소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로서 세워지고 섬겨지기를 바라는 마음과 함께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에게 그 권한을 위탁하는 말씀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통해서 교회와 신자가 세워지고 양육되도록 하는 직무가 장로에게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치리장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알아야 하는 책임은 물론, 그 말씀에 대한 바른 적용을 주도하는 직무가 있다. 이것은 단지 목사의 말을 따른다는 의미를 넘어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의해서 교회와 신자가 지배되도록 하는 양육에 모범적이고 실제적으로 주도할 수 있는 권한을 치리회를 통해서, 그리고 치리장로 개인적으로는 신앙을 통한 말씀에 대한 신실한 순종에 의해서 직무수행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직무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말씀을 가르치는 일은 목사의 고유한 직무이다. 물론, 목사장로(가르치는 장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직무를 가지고 있지만 역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넘어서 자신의 직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목사도 자신이 가르치는 말씀의 권위에 순복해야 하고 말씀을 섬기는 입장에서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뜻이라는 것을 자신의 삶에서 모범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목사의 직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해서 매우 중요한 인식이다. 만일, 이에 대한 확고한 이해가 없게 되면 목사는 사제주의적 제사장이나 구약의 선지자와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되어서 스스로 모순됨에 처하게 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목사와 장로는 공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양을 먹이며 보호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하는 생활이 되도록 하는 것이며, 이 직무는 전적으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양을 사랑하고 양을 위해서 생명을 버릴 수 있어야 하는 것이며(요10:11, 15), 이것은 치리회를 통한 장로의 직무를 말하는 것이다.
즉, 치리장로는 치리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가 살아있게 하여야 하며, 그 말씀이 신자들 개인의 삶에서 그대로 적용되도록 해야 하는 직무를 가지고 있으며, 그러기 위해서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을 살며, 말씀을 섬기는데 있어서 모범이 되어야 한다.
이어서 생각할 수 있는 장로의 직무는 사도행전 11장 30절과 21장 18절의 말씀에 나타나 있다. 여기서 찾아볼 수 있는 장로의 직무 가운데 더 할 것은 재물을 관리하는 일이다. 물론, 여기서 재물에 대한 관리권을 말하는 것은 영적 통치권을 가진 자로서 재물에 대한 관리권도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재물의 문제라고 해서 단지 세속적인 것이라는 의식에서 이해해서는 안 될 일이다. 재물 역시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서 생활과 섬김의 방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에서 필요한 재물들을 관리하는 일 또한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직무를 바르고 충실하게 수행하지 않으면 교회와 신자들의 신앙이 왜곡되거나 많은 고통을 동반하게 된다는 사실이 현실이다. 때문에 재물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와 함께 하나님이 허락하신 도구로서 바르게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드러낼 수 있도록 관리해야 한다.
또한 야고보서 5장 14절의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는 장로의 직무는 병자를 방문하고 위로하며, 죄의 용서를 위해서 기도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르치고 권면하는(encourage) 일도 중요한 일로 말씀하고 있다. 이것은 장로의 직무가 종합적인 면이 있음을 알게 한다. 그렇다고 이러한 일은 오직 장로들만의 일인가 하면 그렇지 않고, 오늘날 모든 신자들이 각자가 자신의 신앙과 삶을 통해서 감당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장로는 이러한 일을 치리장로로서 감당하는 것이고, 거기에 장로로서의 직무와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직무는 외적인 제도와 직분에 의해서 억지로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소명에 의해서 감당해야 하는 일이다. 따라서 이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장로 자신은 당연히 자발적인 자세를 가져야 하며,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신자들도 같은 신앙과 의식(意識)을 가지고 자신의 장로들의 가르침을 통해서 신앙과 삶의 도리를 깨닫고, 그 가르침에 순종하여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성경이 교시(敎示)하고 있는 교회를 형성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섬기는 모든 일이 기쁨 그 자체가 된다.
여기서 치리장로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러한 직무를 개인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비록 장로의 직분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서는 개인의 자격으로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치리회(장로회의체)를 통해서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있다. 목사이기 때문에, 혹은 장로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점이 장로교회의 형성원리의 핵심이기도 하다. 물론, 평상시에 이미 위탁받은 직를 수행하는 것은 개인적이지만 이미 치리회의 허락을 받았기 때문에 행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치리장로는 그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치리회의 구성원으로서 교회의 영적인 통치권을 가지고 그 직무를 감당하는 것이다.
따라서 장로교도들 모두가 기억해야 할 것은 장로는 통치권을 가지고 있는 하나의 계급으로서의 직분이 아니라 “통치자는 곧 쓰임 받는 자”라는 동시적 신분을 가지는 직분이라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단지 계급적인 의미로서 지배자로 군림할 수 있는 것은 더 더욱 아니며,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일꾼으로서 그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여야 한다. 즉, 직무에 있어서 장로서 기능을 감당하는 것이고, 삶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한 사람의 신자로서 자신의 신앙과 일치하는 삶을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게 순종해 가는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자세는 신앙과 생활에 모범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치리권을 가지고 있는 자로서 권위를 가지게 된다. 장로의 권위는 공적으로 고백하는 신앙과 일치하는 자신의 신앙과 삶의 일치에서 확고해 지게 된다(마 20:25-8, 눅 22:25-7).
즉, 장로의 권위는 장로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또한 직분 그 자체가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장로직은 하나님의 세우심에서 출발하며, 이것은 개인적으로 소명에 의해서 확인해야 하고, 교회적으로는 객관적인 과정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어야 하며, 여기서 하나님의 위탁된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이 장로로서 하나님의 교시와 일치하는 신앙과 삶의 모범이 될 때 치리장로로서의 직무를 온전하게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칭찬과 존경을 받는 자로 장로를 세울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3)治理長老의 資格 - ①(2004-11-30)
그러면 치리장로는 어떤 사람이 세워져야 하겠는가? 교회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인물이 바로 세워지지 못하게 되면 교회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것은 단순히 제도적인 문제가 아니라 교회를 구성하는 것이 인간이기에 어떤 사람이 장로로 세움을 받는가 하는 문제는 교회에 있어서 중대사가 아닐 수 없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장로의 자격에 대한 교훈은 디모데전서 3장 1-7절과 디도서 1장 6-9절에서 명확하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두 곳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 거의 동일하기 때문에 디모데전서를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여기서는 감독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감독은 장로의 직무상의 명칭임을 알 수 있고 그러한 입장에서 이해하려고 한다. 이러한 해석은 디도서에서 감독이라는 명칭과 장로라는 명칭을 동시에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더 확실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장로직 그 자체가 “선한 일”(딤전 1:1)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그러면 여기서 “선한 일”이란 어떤 것을 의미하는가 하는 생각을 한다면 장로의 자격으로서 어떤 것이 준비되어야 할 것인지 판단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선한 일”에 대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찾아보면 마태복음 5장 16절에서 “착한 행실”이라고 말씀하고 있고, 이와 관련해서 이해할 수 있는 면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선한 행실”을 통해서 신자들이 그리스도께 있는 영광을 사람들 앞에서 나타내며,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을 기뻐하고 찬양하는 것이라는 의미로서 “선한 일”인 것이다.
따라서 이 직무는 유형교회에서 인간의 믿음으로 행하는 선한 행실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직무인 것을 깨달아야 한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허락받은 직무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장로로 세움을 받을 자에게는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자격과 끝임없는 수련의 과정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소명과 함께 자신이 불림받은 일에 대해서 충실한 일꾼이 되기 위해서 준비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교회는 일꾼으로 세움받을 사람들을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자격에 합당한 사람이 되도록 양육하는 일에 대한 책임이 있다.
바울은 여기서 15가지 자격의 요건을 말하고 있다. 즉, “책망할 것이 없는 자”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 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 등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특별히 장로만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지 특정한 사람만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장로의 자격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은 장로는 본이 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장로직을 가진 사람만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기에 그것에 대한 본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장로의 권위는 소명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는 자신의 신앙과 생활이 있을 때 말씀과 함께 권위를 확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권위를 인위적으로 확보하려고 할 때 기독교는 세속화되거나 인본주의적인 권위에 의해서 지배되는 교회가 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바울이 가르쳐주고 있는 자격에 대해서 숙고하여 깨닫고 믿음으로 자신 안에 이러한 요소들을 준비함으로써 하나님의 뜻과 권위를 나타낼 수 있고 집행할 수 있는 장로가 되도록 해야 한다. 단지 자신이 확보하게 된 직분 그 자체가 권위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가톨릭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장로의 자격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상고하도록 하자. 이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서 장로의 자격은 “책망할 것이 없는 자”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것은 완전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누구도 완전한 할 수 있는 사람이 없기에 이 말씀은 칭찬을 받을 수 있는 덕과 인품을 소유한 자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장로는 단지 신앙에 대한 이해가 해박하기 때문에, 혹은 종교적인 열심이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성경이 말씀하는 신앙은 전인격인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신앙이 인격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거나 잘못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여기서 요구되는 장로의 자격은 전인격적인 신앙을 가지고 신앙과 생활에 있어서 “책망할 것이 없는 자”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장로는 교회 내에서만이 아니라 내외에서 책망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말씀의 순서대로 살펴보면 첫 번째부터 14번까지는 교회와 내적으로 갖추어야 할 요소이고, 마지막 15번의 요소만이 교회 외적인 요소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15가지 요소를 말하는 가운데 14가지 요소가 개인과 교회 안에서의 문제를 열거하고 있다. 그러면,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것이 어디에 있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시 관심을 가지고 보면 교회 안에서 갖추어야 할 요소들 가운데서 1부터 7까지는 긍정적인 표현을 통해서 말씀하고 있는 요소들이고, 나머지 8부터 마지막 14까지는 부정적인 표현을 통해서 말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짧은 말씀 가운데서도 강조하려고 하는 의도를 확실하게 두 영역으로 나누어 말씀하고 있다.
이제부터 한 가지씩 상고함으로써 교회형성을 위한 장로직에 임하는 자격에 대해서 확실한 이해와 확신을 가지도록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앞에서 열거했지만 “책망할 것이 없는 자”라는 말은 전인격적이고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다. 따라서 이 말은 뒤에 구체적으로 열거되고 있는 자격의 요소들을 동반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단지 “평판이 좋은” 것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내적인 면에서 실제로 진실하고, 그것의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어서 말씀하는 것은 결혼생활에 있어서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는 것으로 그 요소를 말하고 있다. 이것은 창조질서의 기본이다. 창조명령을 통해서 인간의 질서와 역할, 책임을 말하는 개혁파 신앙의 입장에서 이 말씀은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요즘 기독교회에서조차 동성간의 결혼을 허용하고, 나아가서 목회자의 신분을 가진 사람들까지도 동성연애자들이 허용되는 상황에서 이 말씀에 대한 확고한 깨달음과 믿음을 통한 신념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 한 구절의 말씀 가운데 담겨져 있는 의미는 매우 크다고 할 것이다. 이것은 창조질서의 기본이고, 만물의 관리권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 가지고 있어야 하는 기본적인 자세이다. 때문에 한 가정을 이루고, 또한 한 아내와의 관계에서 남편이어야 하며 그 책임을 다할 수 있어야 한다는 지극히 평범하고 일반적인 것이지만 이것을 장로의 자격 가운데 하나로 말씀하고 있다.
그만큼 일반적인 것이지만 그것은 가장 중요한 일이고 지켜져야 할 원리로 말씀하신 것이기에 교회의 장로로서 기본을 특별한 것으로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렇게 창조질서에 있어서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기독교의 독특한 면이다. 특히, 이교는 이 부분에 대해서 일부다처를 허용하는 경우와 이성간의 도덕적인 문제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관용적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재혼자나 독신자는 자격이 없다는 말로 단적인 해석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성적인 관계에 있어서 질서가 기본으로 지켜져야 할 것을 말하는 것이고, 이것은 자신을 관리하는 것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것이기에 자격으로 요구하는 것이다.
3) 治理長老의 資格 - ②(2004-11-30)
장로의 자격을 말하면서 “책망할 것이 없는 자”라고 한 것은 장로가 가지고 있어야 하는 내면적인 자질에 대한 총괄적인 의미로서 교훈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책망할 것이 없는 자”라는 것은 먼저 한 사람의 신자로서 일상생활 가운데서 자신의 도리와 책임을 다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포괄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말이다. 그 가운데 이미 앞에서 “한 아내의 남편”으로서의 도리를 잘 감당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성경의 교훈에 주목한다면 내적인 의미에서 장로의 자격을 교훈하는 말씀은 “절제하며”이다. 절제라는 말은 쉽게 금욕적, 혹은 참는다, 아낀다는 의미로 이해하기가 쉽다. 특히, 우리말이 주는 뉘앙스가 그렇다. 그러나 절제라는 말은 자신을 관리하는 것, 혹은 자기를 다스리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말은 단지 금욕적이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을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스스로 세워가는 것으로서 자신을 관리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 말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스스로 관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을 전제하는 말씀이다. 즉, 자신의 감정이나 생활, 시간, 일, 여가, 소유와 나눔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그리고 나아가서 하나님의 일꾼으로 불림을 받은 사람으로서 조절하고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교훈이다. 예를 들어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성격을 관리하지 못함으로써 지도자로서 결정적으로 실수를 하거나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들을 볼 수 있다.
또한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관리하지 못하는 것도 큰 문제로 경험할 수 있는 경우들이 있다. 그리고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서 생각없이 사용하거나 덕을 동반하지 않는 씀씀이는 역시 절제하지 못하는 모습이라고 할 것이다. 요즘에는 여가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까지도 생각할 수 있다. 자기에게 허락된 시간과 기회라고 해서 단지 자신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고 하는 생각은 성경적이지 않은 것이다. 그러한 기회까지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활용할 수 있도록 자기를 관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어지는 교훈은 “근신하며”이다. 여기서 근신한다는 말도 우리말 뉘앙스로서는 경건함과 함께 언행을 삼가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단지 조심스럽게 행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어떤 의미에서 조심스럽게 언행을 한다는 표현은 이 말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의미에 접근 할 수 있도록 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근신하며”라는 말속에 담겨진 본래의 의미와는 거리가 있는 표현이라는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근신이라고 하는 말이 단지 행동을 삼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표현한다면 바른 판단에 의해서 행동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판단의 건전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지도자로서, 특히 치리회의 회원으로서 일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갖추어야 할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지도자가 판단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회중을 바르게 이끌어간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는 일이고 나아가서 바른 신앙을 제시하는 것도 어렵게 될 것이다.
때문에 장로로서 가지고 있어야 하는 자격 가운데 신앙을 포함해서 모든 일에 대한 바른 판단과 기준을 제시할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특별히 치리회가 해야 하는 일 가운데 중요한 것은 신앙을 바르게 제시하는 것이고, 동시에 많은 거짓 가르침과 거짓 영의 활동이 현실적으로 교회를 혼란하게 만드는 상황에서 신자들을 바른 신앙의 길로 인도하고 바른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갖추고 있어야 할 덕목이다.
실제로 장로들의 직무를 바르게 수행하기 위해서 이것은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는 것은 각 교회에서는 물론 노회나 총회서 확인할 수 있는 일이다. 하나님이 교회에 위탁하신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결정하는 직무를 수행하게 되는 장로가 판단력이 없거나 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의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심각한 문제를 동반할 수밖에 없고, 이것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 전체의 문제가 된다는 점에서 대단히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요소이다. 단지 지도자에게 맹종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세워져서는 안 될 것이라는 이야기다.
다시 말하면 스스로의 판단력을 통해서 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지혜와 의지가 갖추어진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일 때 교회로 하여금 건전한 신앙과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가는 장로로서의 역할이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단순히 사람의 말에 맹종하는 것은 좋은 관계가 유지되거나 성경적으로 바른 상황이 유지 될 때는 더 효과적일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이 만들어지게 되면 심각한 문제를 동반하게 되고 오히려 더 감당할 수 없는 상태가 만들어 질 수 있다. 또한 교회는 스스로 현실적인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만일, 이렇게 된다면 정치적 원리에 있어서 장로주의의 장점을 살릴 수 없는 결과에 이르게 된다. 장로주의가 감독주의와 회중주의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성경적인 정치원리임을 고백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라고 하면 장로주의가 성공적, 효과적인 결과를 얻기 위해서 신중해야 할 것은 성경의 교훈에 따라서 바른 판단력을 가지고 있는 신실한 사람으로 세우지 않으면 안 될 것이고, 교회는 그러한 사람을 만드는 수고를 해야만 한다.
이러한 지도자를 만들고 세우는 일을 통해서 건전한 교회가 만들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의식(意識)이 준비된 자가 아닐 때 장로주의는 생명력을 잃어버릴 것이고, 인간적인 정치력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장로가 가지고 있어야 할 판단의 건전성이란 개인적으로는 성경의 교훈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서는 자세로 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자이어야 한다는 의미이고, 또 한 편으로는 개혁파 교회가 역사적으로 고백하여 내려온 역사적 신앙과 그 기준을 통해서 교회와 신앙의 현상과 문제들을 바르게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무엇을 가르치고 훈련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도 동시에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성경과 교리의 관계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하며 철저하게 공적으로 고백하는 교리에 대해서 확신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장로의 하는 일이 한국교회에서 일반적인 것과 같이 단지 교회의 재정의 집행과 행정상의 일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장로의 본분은 그러한 일이 아니라 신자들의 신앙상태를 살피고 건전한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섬겨 살고, 그것을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격려하고 안내하며 모범을 보이는 일이다.
또한 신앙의 왜곡이나 변질된 요소들이 신자나 교회에 들어오지 않았는지 살피고 바르게 깨달아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기뻐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왜곡된 신앙이나 도덕적으로 타락한 생활을 하는 신자가 있다면 깨닫게 해서 하나님 앞에 돌아오도록 하는 일이다.
이러한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건전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판단력이란 단순한 기능이 아니다. 종합적인 이해와 지혜, 그리고 바른 신앙의 기준에 대한 충분한 의식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따라서 많은 경험도 필요하고 치리회를 통해서 바른 신앙과 건강한 교회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도록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준비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준비가 단시간에 가능한 것이 아니기에 오랜 시간과 성숙한 신앙인격을 가질 수 있도록 훈련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는 장로를 양성하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다.
3) 治理長老의 資格 - ③(2004-11-30)
이어지는 말씀은 내적인 요소라고 하기보다는 외적으로 보여지는 태도에 대해서 교훈하고 있다. 이것은 넓은 의미에서 장로는 주관적인 확신이나 주관적인 면에만 충실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교훈하는 것이다. 온전한 지도자로서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외적인 면, 즉 객관적인 면에서도 인정을 받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개인적으로는 아무리 신실하게 사는 사람이라고 해도 동시에 객관적인 지도력과 신앙과 삶에 있어서 신실하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고 인격적인 덕망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본문에서 제일 먼저 생각하게 하는 말씀은 “아담하며”이다. 이 말은 예의가 바른 자이어야 한다는 말로서 이해할 수 있다. 직역하면 친절하다는 뜻도 담겨있는 말인데, 이것은 이웃과의 관계에서 가져야 할 태도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교훈하는 것이며, 동시에 장로의 삶의 자세가 어떤 것인지를 말씀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의가 바른 자이어야 한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말은 윗사람과의 관계에 국한된 이해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를 전제하는 말이다.
즉, 윗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예의가 있어야 할 것이고, 이웃과의 관계에서는 친절함이 있어야 하며, 아랫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배려와 이해를 통해서 존경을 받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관계를 전제하여 자신의 위치에서 갖추어야 할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 수직적인 관계에서는 확실한 사람이 수평적인 관계에서는 모순된 자세를 가지는 경우가 흔하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나아가서 더 가까운 관계, 즉 가족관계에 있어서도 예의와 질서와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사실을 전제할 때도 예의 바른 모습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다음으로 나오는 말씀이 “나그네를 대접하며”이다. 이것은 장로의 자격을 말하는 가운데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다.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신앙은 자신의 행위로서 표현되는 것인데, 여기서 대표적으로 예를 들고 있는 것이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표현은 대접의 대상이 자신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거나 알고 있는 사람들에 국한되어야 한다는 교훈이 아니다.
오히려 직접적으로 자신과 어떤 관계가 없는 사람들에게 나타내는 사랑까지도 포함하는 교훈이다. 일반적으로 지인(知人)이나 특별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친절할 수 있고, 대접하는 일은 쉽다. 그러나 여기서 교훈하고 있는 것은 전혀 관계가 없거나 모르는 사람에게 베풀어져야 하는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조금 더 넓은 의미에서 대접하는 행위와 자세의 일관성을 말씀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을 구별하거나 차별하여 대하여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신분에 따라서 민족에 따라서, 혹은 혈통이나 피부색깔에 따라서 차별하여 대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실제로 현실에서 보면 여러 가지 이유와 관계를 통해서 차별적인 관계나 대우가 달라지는 것을 경험한다. 교회 안에서조차도 이러한 경우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은 더 많은 인격적인 신앙의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시간적인 의미에서도 일관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시간에 따라서 그 자세와 입장이 바뀌거나 변한다고 하면 대접하는 아름다운 모습은 기대할 수 없다. 언제 만나도 한결같은 모습으로 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교훈이다.
그렇다고 완전한 사람을 요구하거나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의 기분에 따라서 사람을 대하는 것이 달라지거나 주어진 여건에 따라서 달라진다면 그 사람과의 관계는 물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사람이 가지게 되는 자세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는 일이다. 따라서 한결같은 모습과 자세로 이웃을 대하고 하나님을 대할 수 있는 자세를 가지고 있음으로 존경받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장로는 하나님의 통치권을 대행하는 치리회를 구성하는 사람으로서 존경과 신뢰를 받을 수 있어야 하고 그렇기 위해서 가지고 있어야 하는 신앙인격의 한 측면이다.
환경적인 의미에서도 그렇다. 기분에 따라서, 혹은 상황에 따라서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이게 되는데 이러한 자세는 장로로서 가져서는 안 될 일이다. 물론, 누구도 이성과 감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인간이기에 기분과 환경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인격으로 준비되어서 감성과 이성의 기능을 조절할 수 없다면 교회의 지도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다양한 상황에서도 신자들을 이끌어야 하며, 바른 신앙의 자세를 가르쳐주어야 할 사람에게는 냉정하면서도 따뜻함을 잃지 않는 그런 일관성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일관됨이란 단순히 냉정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을 나타냄에 있어서 일관됨을 말하고, 모든 사람과의 관계에서 언제나 변함이 없는 친절한 자세를 요구하는 것이다. 일관성을 말하다가 보면 차갑다는 소리를 듣게 되든지 융통성이 없다는 조금은 답답한 느낌을 가지게 하는 모습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진리가 변할 수 없는 것처럼 사랑이 진실한 것이라면 변할 수 없는 것이고, 어떤 상황에서도 일관된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
하지만 현실에 있어서 경험하게 되는 것은 환경과 상황에 따라서 달라질 수밖에 없는 모습이다. 따라서 교회의 장로로서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큰 신앙인격으로 자신의 신앙을 담아낼 수 있는 준비가 필요하다. 이렇게 인격이 준비되지 않았을 때 장로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많은 부작용과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 아버지가 가지고 있어야 하는 마음과 같은 준비된 인격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배려의 깊은 뜻을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
이어서 생각하게 하는 말씀은 “가르치기를 잘하며”이다. 이 말씀은 앞에서 언급했던 요소와는 다른 면을 교훈하고 있다. 이제까지 언급했던 것은 정적(情的)인 면에 속한 요소들이라면 여기서는 이성적인 면을 교훈하고 있다. 즉, 이것을 연결하여 이해하면 장로는 그 직무를 감당함에 있어서 인격적인 균형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지 정적인 면에 매이게 되면 판단을 그르치게 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지도자는 바른 교훈에 대한 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혜를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를 구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치리회의 권위를 확보할 수 있다. 장로주의(개혁파신앙을 채택한 교회)의 치리회는 단순히 직분이나 자리를 통한 권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고, 그 말씀에 일치하는 가르침과 삶을 자기 안에 가짐으로서 권위를 확보할 수 있는 원리를 주장한다.
물론, 여기서 직접적으로 교훈하고 있는 것은 가르치는 일을 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고 있다. 이것은 장로의 직무가 신자들을 바른 신앙과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하고 관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잘 가르칠 수 있는 준비가 없이는 그 직무를 온전히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잘 가르친다는 것은 단순히 말을 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가르칠 수 있기 위해서 간직하고 있어야 하는 많은 지식이 준비되어서 바른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하고, 주어진 상황에서 성경의 가르침을 바르게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교회를 치리하는 장로가 장로로서의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충분하고 바른 이해를 할 수 있어야만 한다. 이것을 장로교회에서는 교리로 표현한다. 단어적인 의미에서 교리와 성경은 다르다. 하지만 교리란 성경의 요약이라는 차원에서 성경신앙을 말한다. 여기서 장로는 교리에 대한 바르고 충분한 이해가 필요하며, 그것을 통해서 신자들의 생활과 신앙을 지도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지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만일, 이러한 지혜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장로는 자신의 직무를 충분히 감당하지 못하게 된다.
교회가 공적으로 고백하고 있는 신앙을 충분하고 바르게 이해하고 그것을 통해서 신자들을 지도할 수 있는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이고, 이것은 장로의 자격을 말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3) 治理長老의 資格 - ④(2004-11-30)
이어지는 치리장로의 자격은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내용들이다. 즉, 앞에서 언급한 내용들은 “해야만 하는 것”들로 표현된 자격이라면 디모데전저 3장 3절부터 언급하고 있는 내용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것”들로 표현되는 자격을 교훈하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 장로들이 “하지 말아야 하는 것”들이 어떤 것들로 교훈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제일 먼저 나오는 “술을 즐기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이것은 한국교회의 경우 금주금연과 관련해서 반복되는 문제 가운데 하나다. 실제로 한국교회를 형성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초기선교사들로부터 경건한 삶을 중요시하는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한국교회에는 여전히 금주와 금연문제는 신자의 도리로 고백을 요구하고 있다. 세례를 받을 때 이미 문답에서 이 고백을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그러한 고백을 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 것은 신자의 의무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세례받은 신자가 후에 얼마나 중요하게 자신의 고백에 대해서 의식하고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술을 즐기지 말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즐기지 않으면 된다는 논리로 먹어야겠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 현실이니 한국교회가 금주와 금연을 세례와 입교를 위한 고백으로 요구하고 있지만 아무런 의식이 없이 행동하는 신자들이 많은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는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이 말씀은 문자적으로 즐기지 않으면 된다는 해석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말씀은 오히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배제하는 자세를 가지지 말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로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기뻐하는 위치에 있다. 즉,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여기서 즐거워한다는 것은 기뻐하는 것은 물론이고, 모든 가치의 기준을 하나님께 둔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동시에 인격이신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궁극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의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인간이 하나님이 아닌 어떤 물질(돈, 마약, 담배, 술, 혹은 세속적 권력 등)을 의지하거나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위치에 있는 인간의 존엄성을 스스로 포기하거나 제한하는 것이 된다. 그렇게 될 때 의도적이 아니라 해도 인간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를 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즉, 인격이신 하나님께 인격을 가지고 서는 자세가 하나님 앞에 바른 인간의 태도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술이나 또 다른 물질에 의존하는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비인격적인 인간의 자세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만일 어려움이 있다면 어려움 그대로, 고통과 슬픔이 있다면 그것 그대로의 모습과 감정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는 자세가 필요하고, 그러한 자세로 하나님의 지혜와 인도하심을 구할 수 있는 순수한 자세가 하나님이 차라리 기뻐하시는 모습인 것이다. 어차피 인간 스스로 완전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을 인정한다면 하나님 앞에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가지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세인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환경의 지배 하에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현실이기에 쉽게 물질적인 의존심에 유혹을 받게 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으로서 특히 교회의 장로로서 직무를 수행할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대할 수 있고, 자신을 하나님 앞에 분명한 의식(意識)을 가지고 설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기본자세이다.
다음은 “구타하지 아니하며”라는 말씀에 주목하게 된다. 여기서 “구타”라는 말은 [violate]라고 번역되는데 이것은 단지 ‘폭행하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욕보이다’ ‘더럽히다’ ‘모독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구타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약한 자를 물리적으로 폭행하는 것을 금하는 것은 물론이고, 정신적 인격적으로도 욕보이거나 모독하는 폭행도 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다. 일반적으로 물리적인 폭행에 대해서는 의식을 하는 반면에 정신적인 폭행에 대해서는 주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주지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실제로 장로로서 갖추어야 할 요소 가운데 현실적으로 중요하다. 신자의 인격이란 거듭난 인격이어야 한다. 그런데, 신자로서 고백을 한 다음에도 왕년이라는 말로 대신할 수 있는 과거에 자신이 행했던 폭력적 행위를 자랑하거나 은근히 위협적인 과시까지 하는 경우들을 교회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적어도 그러한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거듭난 신자의 참된 모습일 것이다.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은 과거에 어떤 모습이었든 그것은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장사지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떠한 상황이라고 해도 폭력은 치명적 인격적 결격사유일 뿐이다. 특히 교회 안에서의 폭력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장로는 언어적, 정신적, 물리적 등의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되며, 자신의 인격적인 요소에서 순화되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이 성화의 과정을 살아가는 인생의 여정이고, 이 땅에서 교회를 통해서 성장해 가는 과정인 것이다. 따라서 신자는 교회생활을 통해서 성숙해 가는 과정을 사는 것이다. 그런데, 장로란 그 회중들 가운데서 가장 신앙적인 연륜이 있기도 하고 신자들에서 본이 되어야 하는 위치에 있는 자로서 성화된 인격을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폭력이란 음주와 관련을 가지는데 음주라는 의미를 단지 술에 취하는 것에 국한하지 않고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자신의 인격적인 통제를 스스로 하지 못하고 물질을 의지하든, 사람을 의지하든 하나님이 아닌 것에 의존해서 행동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통치하심에 순종하지 않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에 폭력은 절대도 버려야 할 요소이다.
다음으로 장로가 갖추어야 할 요소는 “오직 관용하며”(but gentle)이다. 3절에서 찾을 수 있는 장로가 갖추어야 할 요소를 교훈하는 가운데 긍정문으로 표현된 것은 이것이 유일하다. 모두 “하지 아니하며”라는 부정문으로 교훈하고 있는 반면 이것만은 “하라”는 긍정문으로 되어있다. 그 만큼 이 교훈은 장로가 적극적으로 가지고 있어야 하는 요소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면 관용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진리를 불의나 세속적인 것과 타협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진리 안에서 자신의 권리를 기쁨으로 포기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고전 6:7). 자신의 권리를 포기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있는 인격이라면 연약하거나 부족한 사람들도 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그 능력은 교회를 통솔해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할 것이다.
특히, 교회의 지도자는 철저하게 자신의 권리를 양보하거나 때로는 포기할 수 있을 때 존경받을 수 있는 위치를 확보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교회는 물리적인 구속력이 있는 권위를 가지고 통솔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고백적 동의에 의한 순종이 통치의 권위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장로는 신자들의 한계는 물론 연약함을 담당할 수 있는 성숙한 인격과 신앙적인 의식이 준비되어있어야 한다. 치리권을 가진 장로는 단지 권위를 행사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오히려 그 권위는 사랑으로 담아내어 베풀 수 있어야 하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되 말씀과 하나님 앞에 스스로 설 수 있도록 격려하는 직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장로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분내지 않으며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는 인격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교훈하고 있다.
이종전 목사
종교개혁 이후에 교회의 정치원리는 뚜렷하게 구분되어서 계승되고 있다. 적어도 감독주의, 회중주의 그리고 장로주의라고 하는 정치원리가 교회들에 의해서 각각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왜 장로교회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분명하고 확실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형성을 위해서 반드시 장로주의를 채택해야 하는 당위성과 확신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1) 성경적 정치원리로서 장로주의
장로주의 정치원리를 교회의 정치원리로 확인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성경적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장로교회는 성경적 교회이다. 이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만 장로교회를 세워가는 신자이고 지도자 일 수 있다. 교회의 정치형태는 필요에 의해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쉽게 한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지 못한다면 교회의 형성의 원리가 될 수 없다.
또한 그러한 의미에서 교회를 어떻게 형성할 것인지 그것은 자의적이거나 단지 유용성과 실용성에 근거해서 상황에 따라서 원리와 방법론이 만들어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유형교회의 일치는 단지 실용성과 유용성의 일치에 의해서만 가능하게 된다. 그러한 현실에서 그리스도가 머리되는 교회는 기대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장로교회의 헌법이 장로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것은 단지 필요에 의한 것이 아니다. 교회헌법이란 성경적 근거가 확실하게 담보되어야만 채택할 수 있다. 만일 성경적 근거를 확보할 수 없는 것이라면 헌법에 있다해도 그것을 수용하고 지켜야 하는 양심적인 의무는 없게 된다. 그러나 헌법적 규정이 성경적인 교훈과 일치한다면 누구를 막론하고 그 법은 지켜야하고, 그 규정을 통해서 교회를 형성시켜야 하는 책임을 가지게 된다. 그만큼 교회법과 성경적인 교훈은 필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교회법은 단지 형식적인 필요에 따라서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이 아니고 실용성에 근거해서 수용의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성경에서 대답을 얻어야 한다.
그러하다면 교회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정치원리가 장로주의를 받아들인 장로교회의 신자와 지도자들은 당연히 장로주의에 대한 성경적인 확신이 고백적으로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장로주의 정치원리에 대한 고백적 확신이 없이 장로교도라고 한다면, 그것은 양심을 속이는 것이다. 신앙양심을 통해서 자신이 장로교도이어야 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이에 대해서 양심상 고백할 수 없다면 그는 더 이상 장로교회의 회원이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신앙양심상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는 정치원리를 받아들여야 하고, 지도자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교회를 형성시켜야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한국의 장로교회들은 대부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표준문서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렇다면 이 문서가 고백하고 있는 장로주의에 대한 확실한 이해와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신앙고백은 받아들인다고 하면서도 그 고백서가 담고 있는 내용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이 고백서는 장로주의를 성경적인 정치원리로 확인하고 있다. 그리고 신앙고백서와 함께 작성된 정치조례는 이에 대한 해설과 적용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고백과 일치하도록 만든 것이 교회헌법이다.
그러므로 장로교회의 구성원인 장로교도들은 자신이 장로교도인 것에 대한 성경적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물론, 지도자들은 이에 대한 분명하고 확실한 가르침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장로주의 정치원리가 성경적이라는 확신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현실은 복음주의적인 영향을 크게 받고 있기에 교리나 교회정치에 대해서 매우 배타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한국 장로교회에 있어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부정하거나 희석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즉, 교회의 질서와 신앙의 순수성과 정통성을 잃어가게 하는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로 인해서 교회의 권위가 상실되는 현상은 신앙과 교회의 무질서를 동반되는데 이미 염려의 수준을 넘었다고 사료된다.
이미 전술했듯이 장로교회의 정치원리가 성경적이라는 것은 성경에 명시적, 구체적인 규범이 있고 그것과 일치한다는 의미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성경에는 교회의 정치원리에 대해서 직접적, 구체적으로 명시하여 교훈하고 있는 어떠한 것도 없다. 그럼에도 정치원리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말하는 것은 성경에 계시된 이스라엘의 역사와 기록된 교훈들을 통해서 연역해 낼 수 있는 교훈들이 장로주의를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의미이다. 즉, 성경이 역사적, 필연적으로 교훈하고 있는 교회의 정치형태로서 장로주의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성경을 신앙과 생활의 유일하고 완전한 규범으로 고백하는 개혁파신앙이 받아들이고 있는 중요한 신학적 이해의 전제이며 원리이다. 정치적인 원리를 확립하고 적용하는 데 있어서도 같은 견해이다.
성경을 떠나서 단순히 필요성과 합리성과 현실성, 유용성을 전제로 해서 착안해 낸 방법론적인 원리를 교회적인 현실에 맞게 만든 것이 장로주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전적으로 성경이 교훈하고 있는 신학적인 원리에 따라서 교회의 정치원리를 확립해야 한다는 것이 개혁파의 신학적 입장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정치원리를 찾는다면 그것은 당연히 장로주의 정치원리를 신적 제정(Jus Divinium)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성경 전체에서 장로주의 정치원리를 연역해 낼 수 있다는 데 대해서 이의를 제기한다면 그 외의 다른 정치원리들은 사실상 어떤 것도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상대적인 의미에서 비교하더라도 장로주의 정치원리를 부정한다면 교회에서 받아들이고 있는 다른 정치원리는 이미 부정되어야만 한다.
이것은 장로주의 정치원리를 부정하거나 수용을 거부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완전하고 구체적인 장로주의 정치원리를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장로주의 정치원리는 성경에서 확실하게 증거하고 있는 교회형성의 원리라는 것에 대해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성경 전체는 장로주의 정치원리를 찾을 수 있도록 교훈하고 있다. 구야시대에 출애굽하는 과정에서 모세는 장로들과 함께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고 있었고 하나님도 그렇게 허용하시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출3:16, 18:25-6, 민11:16).
물론, 이 때의 장로의 개념과 오늘날 장로의 개념은 많이 다르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끌어감에 있어서 “장로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고, “장로들”로 하여금 백성들을 통치해 가도록 하시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이러한 통치원리는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때문에 장로주의 정치원리는 어떤 시기에만 일시적으로 나타났거나 적용되었던 현상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신약의 교회에서도 여전히 장로주의 정치원리가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신약성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행14:23, 15: , 18:4, 딛:1:5, 벧전5:1, 약5:14)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교회형성의 실제적인 원리로서 장로주의 정치원리를 받아들이고 적용하는 것은 개인적인 생각에 의해서 결정될 문제가 아니다. 혹은, 처해있는 상황과 여건에 따라서 달리 받아들여질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이것은 신앙으로 받아들여야 할 성경적인 권위가 동반된 원리인 것이다. 따라서 장로교도들은 장로주의가 성경적인 것으로 확신하고, 신앙생활과 교회의 형성의 과정에서 자신의 신앙고백을 통해서 충실하게 이루어가야만 할 것이다.
2. 역사적 정치원리로서의 장로주의(2004-11-30)
장로주의 정치원리가 종교개혁 이후에 착안되어서 새롭게 등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여러 차례 강조해 왔다. 그럼에도 반복하는 것은 많은 경우가 장로교회는 칼빈이 창시자라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로교회는 종교개혁 이후에 새롭게 등장한 교파라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장로교도들 조차도 그러한 생각을 한다는 것은 장로교회에 대한 몰이해에 기인한 결과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장로교회라는 교파의 명칭이 등장하고, 하나의 고유명사로 사용되는 것은 17세기부터라고 할 수 있지만 장로주의 정치원리는 신구약 성경의 역사는 물론, 주후 2000년이라는 기독교회의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계승되어 온 것이라는 점에서 장로주의 정치원리는 역사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장로주의 정치원리는 성경적임과 동시에 역사적이라는 점에서 교회형성의 원리로서 받아들여야 하는 당위성을 가지고 있다.
장로주의는 단지 다른 정치원리에 비해서 합리적이거나 유용성이 많기 때문에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장로주의는 성경적이고 역사적인 교회의 정치원리이기 때문에 교회형성의 원리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만일 성경적인 것이 아니라면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이라면, 같은 원리에서 역사적이지 않는 것이라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회는 역사적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이라는 것은 단지 역사에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회의 신앙은 역사적으로 계승되는 종교라는 의미이다. 역사적이라는 말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 종교를 초역사적(超歷史的)인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만일 기독교회를 이렇게 이해한다면 신비주의적인 신앙이 되거나 아니면 역사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신흥종파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장로교회는 17세기 등장하는 신흥종파도 아니며 칼빈이라는 사람의 탁월한 깨우침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사상에 입각한 교회도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의 역사에서는 물론이고 기독교회의 2천년 역사를 통해서 일관되고 지속적으로 확인되고 계승되어온 교회라는 것이다.
때문에 장로주의 정치원리를 교회형성의 원리로 받아들여져야 하는 당위성을 말할 수 있게 된다. 쉽게 성경적이라는 논리에 대해서는 동의하면서도 역사적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수긍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역사적”이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서 충분한 이해가 동반되지 못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면 장로주의 정치원리가 역사적인 것이라는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그것은 기독교회의 2천년 역사를 통해서 장로주의 정치원리가 교회와 신앙을 통해서 계승되어왔다는 사실에 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사도적 교회(apostolic church)가 어떤 정치원리를 받아들였는가 하는 것이다. 즉, 사도들의 교회는 예수님 이후에 최초의 교회로서 어떤 정치원리를 통해서 교회를 형성했는지를 확인해 본다면 그 교회가 받아들인 정치원리는 사도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중요한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것은 성경적인 정치원리와 비교해서 더욱 권위있는 것이 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하고 필연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들이 형성했던 교회의 정치원리가 장로주의였다는 사실에 주목해야만 한다.
누차 강조했지만 장로주의는 17세기에 등장한 새로운 형태의 정치원리가 아니다. 이 원리는 사도적 교회에서 받아들여진 역사적인 정치원리이다. 사도시대에도 그들에 의해서 새롭게 도입된 것이 아니고 구약시대로부터 계승되어온, 하나님에 의해서 허용된 정치원리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성경적인 근거로서 모세시대에 이미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구약의 모세시대로부터 확인할 수 있는 정치원리는 이스라엘의 전역사(全歷史)를 통해서 계승되어왔다. 그리고 그것은 신약시대로 자연스럽게 도입되었다는 것을 사도행전 11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즉, 사도들은 자신들이 새로운 정치원리를 착안해서 교회형성의 원리로 삼은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역사를 통해서 계승되어온 장로주의를 교회형성의 원리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따라서 사도행전 14장에서 사도들은 장로를 세움에 있어서 유의해야 할 것에 대해서 교훈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미 수용되어진 장로주의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의식이 전제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장로주의는 2천년 전에 만들어진 2천년 전의 정치원리라는 주장도 아니다. 오히려 더 원시적인 의미를 가진다. 여기서 원시적인란 단지 발전적이라는 것을 넘어서 처음부터 지금까지라는 의미를 더 강조하는 것으로 사용하는 표현이다.
그리고 사도시대를 넘어서 중세로 이어지는 교회의 역사는 사실상 장로주의를 확인하기 어렵다. 이것은 기독교회의 역사에서 성경적 정치원리를 인위적으로 바꿔가는 역사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장로주의 정치원리였던 교회형성의 원리를 감독주의로 변질시켰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세의 교회는 감독주의를 극단적으로 발전시킨 교회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중세에는 장로주의 정치원리를 계승하는 교회가 없었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 또한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다.
중세의 교회가 비록 감독주의를 통해서 교회를 지배해 왔지만 중세의 역사 가운데서도 오히려 중세의 신앙이 변질된 것을 깨달은 교회와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복음신앙을 추구했으며, 장로주의 정치원리를 교회형성의 원리로 확인하고 받아들였다. 그러나 감독주의를 통해서 교회를 지배하고 있는 당시의 교권주의자들은 이러한 장로주의를 추구했던 사람들을 이단으로 정죄하여 처형시켰다.
따라서 중세의 역사에서 장로주의는 겉으로 보여지는 역사를 가지고 있지 못하지만 감독주의가 지배하는 역사에서도 변함없이 장로주의를 성경적 정치원리인 것을 확인시키면서 역사적으로 계승시키는 일은 계속되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중세에 있어서는 전교회적(全敎會的)으로 장로주의가 언급되거나 받아들여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중세를 지배했던 로마교회는 감독주의를 교회의 통치원리로 받아들였고, 그것을 절대화했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감독주의가 지배한 시대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로마교회가 지배한 시대라 할지라도 중세의 역사적 흐름 속에는 장로주의 정치가 지역 교회적으로 받아들여지거나 복음적 신앙의 원리를 깨우친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장로주의 정치원리를 성경적인 정치원리로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무리들은 중세교회의 역사에 있어서 대부분 이단으로 정죄되거나 오히려 이단으로 처형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중세교회에 있어서 주류를 이루지 못했다. 따라서 그들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이해하는 어려움이 있고, 연구할 수 있는 자료도 충분하지 않다는 어려움이 있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중세에는 장로주의를 교회의 정치체계로 받아들이는 자들이 없었다고 하는 것은 더욱 용납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비록 외적으로 보이는 교회는 감독주의를 통해서 교회와 역사를 지배했지만 그 주류를 이루고 있는 교회의 역사 안에는 장로주의 정치원리를 성경적인 것으로 깨달아 그것을 통한 교회형성을 사명으로 생각하여 장로주의에 입각한 교회를 이루려고 노력했던 많은 사람들과 교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일이다.
예를 들어 12세기말부터 13세기에 걸쳐서 상당한 세력을 이루었던 왈도파(waldensians)의 경우를 말할 수 있다. 이들은 중세에 있어서도 가장 교황의 권세가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에 로마교회 안에서 발생한 장로주의자들이었다.
또한 14, 15세기에 활동했으며, 개혁전 개혁자들이라고 하는 위클리프(John Wyclif)나 후스(John Hus)와 같은 경우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VI. 교회의 職員과 會議(2004-11-30)
여기서는 교회를 형성하는 직원들에 대한 이해와 대의정치를 기반으로 하는 장로교회가 교회의 자율성, 평등성, 연합성을 모두 충족시키면서 유형교회를 형성할 수 있는 원리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이에 대해서 한국교회에서는 일반적으로 법적인 개념으로만 이해하고 있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단지 법이기 때문이라는 전제에 의해서 성립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교회법도 신학적으로 성경적인 확인과 함께 일치되는 이해가 전제될 때 비로소 법으로서의 권위를 가지게 되는 것이며 모든 신자들이 그 법에 대해서 신앙으로 순종할 수 있는 것이 교회법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교회헌법에 적시(摘示)하고 있는 조항들을 살펴보기 전에 그러한 조항들에 대한 신학적, 성경적 입장이 일관되게 확인되고 이해되어야만 교회법이 적시하고 있는 조항들을 바르게 적용하고 그 직무를 충실하게 감당할 수 있는 신자가 될 수 있는 것이며, 각 교회는 이러한 이해를 통해서 건강한 교회를 형성시켜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1. 敎會의 職員
교회의 직원은 교회를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을 통치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해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일을 감당하도록 소명을 받아 교회에서 직원으로 세움받은 사람들을 말한다. 따라서 그 직원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위탁받아서 섬기고 관리하는 책임을 가진 자들이다. 그러므로 단지 인간적인 생각과 유용성과 실용성, 현실성, 합리성을 전제로 교회가 필요에 따라서 만들거나 가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즉, 교회를 허락하신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치하시기 위해서 교회에 직원을 두게 하셨기 때문에 교회를 통치하는 직원을 세우는 제도는 전적으로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야 한다. 즉, 그 제도를 있게 하신 이의 뜻을 따라서 세워야하며, 그 직무를 수행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성경이 적시하고 있는 직원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창립직원(temporary offices)과 항존직원(permanent offices)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직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아(召命) 그리스도의 일을 맡기신 것으로 이해한다. 이것을 위탁권(委託權)이라고 한다. 위탁에 의한 직분은 직원자신의 권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위탁하신 분의 권위를 가지고 그 직무에 임하는 것을 의미하며, 직원 자신은 이에 대해서 철저하게 위탁받은 입장에서 자신에 위탁된 직무를 감당해야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교회의 직원은 반드시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의 뜻을 섬기는 자세를 가져야만 한다. 즉, 교회의 직원이 통치권을 가진다는 것은 회중에 대한 치리권을 가진다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리스도의 뜻에 전적으로 순복해야 한다는 점을 간과하거나 소홀히 생각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러면, 교회의 직분은 어떤 것이 있는가? 신약교회에 있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사도직(使徒職)이다. 사도직은 창립직이라고 표현하는데 기독교회로의 창립이 사도들에 의해서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대신에 그 직분은 지속적으로 교회에 잔존하는 것이 아니라 창립 당시에 교회의 창립을 위해서 있었던 특별한 직분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도들은 말씀을 가르치는 일과 성례전을 집행하는 일, 그리고 권징을 시행하는 일 등에 대한 위탁된 직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이 밖에도 장로직과 집사직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장로직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계승되어온 직분이다. 이미 구약시대의 모세 때부터 장로제도는 이스라엘의 통치원리로서 확실한 기능을 해왔다.
이것이 신약의 기독교회로 시작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기독교회의 정치원리로 자리를 잡게 되어 사도들은 사실상 교회의 통치기구를 구성하는 직분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사도들이 받아들였다는 것은 새롭게 세우거나 만든 제도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있었던 직분을 기독교회의 직분으로 수용했다는 의미다. 즉, 이 직분은 사도들이 새롭게 만든 직분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집사직분은 사도행전 6장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직분은 구약에서 별도의 직분으로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순전히 봉사직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장로교회의 치리회를 구성할 때는 집사직은 포함되지 않는 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치리회를 구성할 때는 장로, 즉 가르치는 장로인 목사와 치리 장로들이 구성원이 된다. 직분에 대해서는 따로 다루겠기에 여기서는 논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집사직은 과부와 병든 자를 비롯해서 소외된 형제들을 살피는 일을 하는 봉사직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으로 여기서는 지나가려고 한다.
이렇게 기독교회에는 3직분이 있다(사도시대의 교회에는 교사-doctor-라는 직분이 별도로 있었으나 현재는 일반적으로 목사직의 기능 안에서 교사직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이 직분 외에 교회 안에 실존하는 직분들은 교회가 조직관리를 목적으로 필요해서 만든 직분으로서 교회형성을 위한 성경적인 직분으로 이해할 수는 없는 일이다. 따라서 이 3직분 이외의 것은 성경적 직분으로는 받아들이지 않지만 교회의 조직관리를 목적으로 필요한 직분을 허용할 수 있는 것은 교회헌법에서 별도로 생각하도록 하겠다. 따라서 이 부분도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고 지나갈 것이다.
이 3직분은 기독교회가 세상에 있는 한 반드시 있어야 하는 항존적(permanence)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교회의 형성을 위해서 필요한 직분을 목사 장로 집사로 이해하고 현실 교회에서 이것을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분명히 기독교회라고 한다면 이 3직분을 통해서 교회를 형성하고 치리하는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확인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직분들은 독자적인 권위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처음에 언급했듯이 교회의 직분은 그 기원(起源)이 그리스도께 있다. 또한 직분을 감당하는 것도 단지 자신이나 교회가 필요해서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 자체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탁받아서 감당하는 것이다. 따라서 직무에 임하는 사람은 자신의 일이기 전에 그리스도의 일로서 인식을 해야 하는 것이고, 그 직무를 감당할 때도 그것이 그리스도의 뜻인가를 확신하는 것과 함께 사명을 가지고 감당해야 한다.
또한 이 3직분의 직무는 사도들이 수행했던 것으로서 한 사람이 감당하는 것보다는 조금 더 효과적으로 그 일을 감당하도록 하기 위해서 새로운 직무를 설치한 것이다.
즉, 그리스도가 감당했던 직무를 분담해서 감당하도록 했던 것이다. 이 3직분은 사도들이 감당했던 직무를 분담해서 감당하도록 한 것이며, 이것은 모든 사도들에 있어서 통일적으로 감당되었던 것이다. 또한 이 직무들은 선지자, 왕, 제사장이라는 그리스도의 3직분에 상응하는 것인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1인격에 있어서 통합되어 구원을 위한 봉사였고, 이것이 사도들에게 위탁되었고, 그것이 다시 신약교회의 3직이 유래한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이 세 직분은 교회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쓰임받는 직분이다.
2. 職務와 恩賜(2004-11-30)
교회의 직원으로 세움을 받는 과정에서 반드시 확인하고, 신자들 전체가 받아들일 수 있는 공적인 확인이 필요한 것은 직무에 임하는 의미와 직무를 감당함에 있어서 소명의식(召命意識)이 분명한가 하는 것이다.
1절에서 서술했듯이 직분은 그리스도의 직무로부터 기인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직무를 위탁받아서 수행하는 직(職)이다. 따라서 어떤 직무에 임할 것인가 하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은사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을 가진다.
그러한 의미에서 직무에 임하고자 하는 사람 자신은 물론 그 직무에 합당한 사람인가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선출권을 가지고 있는 회중 역시 직무에 임하게 될 사람의 은사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공교회적으로 확인하는 과정이며, 이 과정을 통해서 직무에 임할 사람을 회중이 선출하고 세우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직무는 모두 봉사직임을 기억해야 한다. 봉사직이란 그 교회를 섬기고 통치해 가는 모든 과정에서 각 직분자들의 역할과 섬김의 수고를 통해서 교회적 기능과 사명을 감당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장로주의 정치는 교회의 직원들의 일(의무)과 봉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교회의 정치이다” 따라서 교회의 모든 직원은 자신의 직분을 봉사를 위한 직으로 이해하여야 하며, 그 직무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단지 자신의 일(의무)로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명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직과 그 직무에 대한 소명이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교회의 직무를 감당함에 있어서 봉사직으로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교회의 직원이라는 말은 영어에서 미니스터(minister)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런데, 이 말은 주로 목사를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이것은 장로나 집사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다. 본래 이 단어는 라틴어로부터 유래한 것으로서 라틴어의 미니스테리움(minsterium)이라는 말은 의무, 혹은 봉사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교회의 직원이란 봉사자인 것을 알 수 있다. 즉, 교회의 직원은 자신의 의무(일)를 수행함으로써 교회를 세우는 것을 의미한다. 현실적으로 교회에서도 직원들을 생각할 때 관리, 지도와 같은 말을 연상하지만 그 직무를 수행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고 통치해 가는 봉사자인 것이다.
직원들의 봉사를 통해서 실제적으로 교회형성이 가능해지는 것이라는 점에서 직원에 대한 이해는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모든 직원 자신들과 동시에 교회의 모든 회중은 주지해야 할 일이다.
따라서 은사와 직무는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은사가 확인되지 않은 가운데 직무를 고집하거나 반대로 은사가 공적으로 확인됨에도 불구하고 직무를 거부하는 것, 모두가 하나님 앞에 선 신실한 신자로서의 자세가 아니다.
우선 한국장로교회가 건강한 교회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직무에 앞서 직무에 임할 자의 은사를 충실하게 확인하는 일이 중요하다. 즉, 직분자를 세우는 과정에서 직무에 합당한 은사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판단을 신중하게 고려하여야 하는 책임과 의무를 가지고 있다.
만일, 이에 대한 의무를 충실하게 하지 못한다면 교회는 건강한 모습을 잃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섭리의 방편에 충실하지 못함으로써 교회를 형성하는 모든 회원들 스스로가 하나님의 배려를 왜곡, 변질시키는 결과를 초래시키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경우 이 과정에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은사를 확인하기보다는 혈연, 지연, 학연 등으로 일컬어지는 관계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자세라고 하기보다는 인간관계와 필요성에 기준을 두고 직무에 임할 자를 선택하는 경향이 많다는 점에서 건강한 교회의 모습을 기대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이것은 목사를 세우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다. 목사후보생으로 추천되는 과정에서 교회는(또는 추천하는 목사) 추천에 대한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
예를 든다면 얼굴을 안다고 하는 것과 역시 인간관계에서 체면 때문에 모르는 척할 수 없다는 이유로 마땅히 거부되어야 할 사람임에도 추천을 하는 경우인데, 이것은 역시 교회와 목사의 무책임한 일이라 할 수밖에 없다. 후보생을 추천하는 것은 단지 개인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의 일이고, 교회를 건강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중대한 책임이 동반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한국교회에서 이러한 경우는 다반사가 아닌가 생각한다. 오히려 후보생으로 추천해서는 안될 사람을 목사 자신이 권해서 추천하는 경우도 많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면, 이것을 더 큰 문제로 인식하지 않고서는 한국교회의 건강한 모습은 기대할 수 없다.
다음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은 직무에 임할 사람 자신의 문제이다. 그 자신도 같은 입장으로 준비되어야 한다. 자신의 은사를 확인하지 않고 직무에 대한 욕심이나 의욕만 가지고 덤빈다면, 이것 또한 교회의 평안과 건강을 잃게 하는 요소로 크게 작용하게 된다.
특히, 교회 안에서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이러한 경우에 처한다면 교회는 대단히 큰 혼란을 초래하게 되고, 비록 어떻게 진행되어간다 하더라도 대단히 왜곡된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게 됨으로써 많은 사람들의 염려를 사게 될 것이다. 때문에 신자 개인의 경우도 자신이 직무에 임하게 되는 것에 대한 하나님 앞에서의 확인이 반드시 필요하다.
자신이 허락받은 은사가 과연 교회의 직무를 감당하는데 적절한가 하는 대답이 분명하게 있어야 한다. 또한 이 판단을 겸손한 자세로 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의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이것을 소명이라고 할 수 있는데 개인은 은사의 확인과 함께 직무에 대한 소명을 확인해야 한다.
자신이 직무에 임하는 소명을 확신하지 못하면 직무에 임하는 자세가 소극적이거나 무책임한 의식을 가지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교회에 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인은 자신의 은사에 대한 확인과 함께 직무에 대한 소명을 분명히 함으로써 교회의 일이 원만하게 진행되도록 하는 책임을 다해야 하며 교회의 일에 거침이 되어서는 안된다.
이처럼 한 개인이 직무에 임하게 될 때 가져야하는 자세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때로는 직분을 탐하여서 자신의 은사와는 관계없이, 또한 준비되지 못한 여러 가지 여건들을 고려하지 않고 직무에 임하는 것만을 생각한다면, 이 또한 교회의 누가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직무에 임할 수 있는 은사를 공적으로 확인할 수 있음에도 직무를 거부하는 것 또한 하나님 앞에서 바른 자세가 아니다. 자신의 은사를 객관적으로 확인받을 수 있다면 당연히 그 직무에 임하는 것을 허락해야 하고, 그 직무에 충실하게 임하여야 한다.
만일, 이러한 경우가 있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소명, 즉 부르심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 된다. 지나친 겸손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러한 태도는 교회 전체를 위해서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역할과 일을 모른척하는 무책임과 방관에 대한 책임이 동반된다.
따라서 은사와 직무의 관계를 바르게 이해하고 적용함으로써 건강하고 바른 교회를 형성시키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라면 교회적으로 은사에 대한 공적인 확인과 소명에 대한 철저한 확인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러한 자세가 없이는 건강한 교회는 물론 질서있는 교회의 모습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은 자명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 책임은 목사에게만 있는 것도 회중에게만 있는 것도 아니다.
교회를 형성하고 있는 모든 구성원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형성한다는 책임의식을 철저하게 가지고 있어야 한다. 교회는 단지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이 형성하고 있는 것이기에 직무에 대한 소명과 은사는 공교회적으로 확인되어야 하고, 그 직무에 충실함으로써 건강한 교회를 만들게 되는 것이다.
3. 職務의 選出(2004-11-30)
직무의 선출권이 누구에게 있는가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교회정치원리에 있어서 커다란 분기점이 된다.
예를 들어 감독 한 사람에게 그 권한이 있다고 하는 입장은 감독주의이고, 신자들 모두에게 있다고 하면 회중주의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인간 누가 그 권한을 가졌는가 하는 문제에 머물지 않는다. 그 이면에는 하나님이 그 권한을 위임했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즉, 감독주의의 경우는 감독에게 하나님의 뜻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는 입장으로 사도적 계승권을 말한다. 또한 회중주의는 각 교회의 신자들에게 그 권한이 주어졌다고 하는 입장이다. 이 말은 감독, 혹은 회중의 뜻이 곧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는 방법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장로주의는 어떤 입장인가? 기본적으로는 회중주의적이다. 그러나 회중주의와는 다른 독특한 입장이다.
기본적으로 회중주의라는 것은 회중에 의해서 직무에 임할 자를 선출하는 체계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정치체계는 회중주의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실제로 직무에 임할 자의 권능이 어디서 오는가 하는 문제는 첨예한 입장의 차이를 가지고 있기에 극복되지 않는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 신비주의적인 입장이 통용되는 곳에서는 회중의 의사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교회와 신앙의 무질서가 싹트게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 이러한 현실이 한국교회의 신자들의 의식 가운데 있는 사정이 아닐까 생각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당신이 지으신 피조물, 그 가운데서도 피조물에 대한 관할권을 부여하신 인간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게 하신다는 원리를 충분히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이해는 단지 개인의 생활에서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국가를 통치의 수단으로 각각 허락하신 것으로 믿는다면 교회와 국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는 점을 깊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칼빈은 이에 대해서 말하길 직무에 임할 자(목사, 장로, 집사)들은 신자들에 의해서 선출되어야만 한다고 한다.
여기서 오해하게 되는 것은 목사의 선출에 대한 것이다. 장로와 집사의 경우는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반면에 목사는 특별하게 생각하려는 인식이다.
예를 들어 목사는 노회와 총회가 자격시험을 거쳐서 임명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장로주의는 기본적으로 각 교회의 신자들이 그 공동체(교회)의 목회자를 선출할 권한을 가진다.
따라서 목사는 개인적으로 소명을 통해서 목사로서 필요한 과정의 훈련을 통해서 양성되지만 결정적으로는 청빙을 받아야만 목사가 될 수 있다. 또한 목사가 된 후에도 목회지가 있어야 하고, 목사는 자신을 청빙한 교회에 한해서 목회권을 가진다. 만일, 임지(任地)가 없게 되면 헌법적으로 무임목사가 된다.
이것은 철저하게 성경이 교훈하고 있는 선출의 원리에 충실하려는 장로주의의 입장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 하나의 오해는 신자들의 선출권에 전적으로 기인한다면 인간의 뜻과 의지만 있으면 누구를 선출하든지 괜찮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인간의 주권이 전권으로 이해되는 경우이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 상고했듯이 여기서 인간은 하나님을 상실하거나 자신의 이성적 판단의 완전성을 확보하지 못한 존재라고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신자는 신앙을 통해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 뜻을 따르는 입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할 때 회의에 있어서도, 직무를 선출함에 있어서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하는 기본적인 자세를 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여기서 선출하는 신자들이든 피선출자, 즉 직무에 임하게 되는 자이든 모두가 하나님의 소명을 확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회중들은 자신의 이해관계나 인간관계, 혹은 현실적인 필요성에 매여서 선출권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가를 찾는 입장에서 자신의 선출권을 행사해야 하는 것이 바른 자세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가 이러한 심사숙고하는 판단보다는 현실적인 필요나 관계성에 매여서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을 행사하는 것이 일반적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것은 장로교회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문제점이다.
당사자는 물론이고 회중들도 함께 직무에 대한 하나님의 소명을 확인하는 자세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자세이며, 동시에 그것은 성령의 내적 조명에 따르는 신실한 자세이기도 하다. 결국, 하나님이 직접 임명해야 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신자(피조물에 대한 위탁권을 가진)들의 선출권과 소명감이라는 불가분리의 원리를 통해서 직무에 임하게 되는 확신이 양자 모두에게 있어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양자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며,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를 실제로 받게 되는 것이며, 교회와 신앙의 질서가 하나님의 통치에 의해서 유지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교회의 모습이 될 때 아름다움을 유지하게 되는 유형적 교회를 기대할 수 있게 된다.
만일, 이러한 의식이 준비되지 않았다면 결과적으로 교회는 단순히 인간들의 집단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모든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회중은 직무에 임하는 일꾼을 선택할 때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자세를 준비해야 한다. 기분이나 이해관계, 혹은 인간적인 관계에 매여서 선출하게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된다. 뿐만 아니라 세워진 일꾼에 대해서도 내가 뽑은 사람, 혹은 내가 세워준 사람이라는 의식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교회의 직무는 하나님의 임명권에 의해서 세워졌다.
다만, 그 직무에 임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역할을 사용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섭리방편이기 때문에 인간들의 역할이 동반되는 것이다.
따라서 선출권을 가졌다고 해서 자신의 마음대로 그 권한을 행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자세가 아니며 선출권에 대한 바른 시행이라고 할 수 없다.
어떤 경우이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자세로 자신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을 때 하나님의 뜻을 섬기는 것이 된다. 그럼에도 자신의 인간적인 의지가 앞서는 선택을 한다면 적극적인 의미로서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 된다.
또한 피선출자, 즉 직무에 임하는 자는 자신의 소명에 대한 확인이 있어야 한다. 자신이 허락받은 은사를 확인하며, 그 은사에 합당한 직무인가를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이에 대해서 불확실한 입장이거나, 여기서도 인간적인 감정에 치우쳐서 직무에 임하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역시 바른 것이라 할 수 없다. 직무에 임하는 것은 기분의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의 소명의 확인이다.
이것이 확인되지 않는다면 직무에 임하는 것까지도 재고할 수 있는 여유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또한 소명이 확인되었음에도 그 직무에 임하는 것을 부정하는 자세도 합당하지 않다. 그것 역시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선출권을 행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위탁권을 바르게 행사하여야 하는 책임이 있고, 직무에 임하는 자도 자신의 소명을 확인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 철저하게 순종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렇게 될 때 비로소 교회가 평화로우며, 하나님의 권위가 살아있는 교회가 되고, 질서가 있는 교회의 모습을 만들 수 있게 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은 지금도 하나님의 교회를 직접통치하고 계신 것이 된다. 이처럼 직무와 선출권을 행사함에 있어서 바른 자세와 살아있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자세는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가게 된다.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장로주의 정치원리를 채택한 교회가 취해야 하는 직무와 선출에 대한 이해이다. 즉, 직무에 대한 하나님의 임명권이 행사되는 것이다. 따라서 장로주의 정치원리에서 선출하는 원리와 소명감은 불가분리의 관계인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도리를 바르게 행사하여야 한다. 이것을 달리 표현한다면 소명은 주관적인 것이라 할 수 있고 선출(고정에 있어서는 시험)은 소명에 대한 객관적인 확인이라 할 수 있다.
4. 임시직과 항존직(2004-11-30)
교회의 직분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확인하려고 할 때 현재의 교회에서 경험할 수 없는 직분이 있기도 하고, 반면에 성경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은 직분을 현재의 교회에서 경험하게도 된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서 많은 궁금증을 가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반면에 이에 대한 아무런 생각이 없이 단지 역사적으로 교회에 있었던 직분이니까 전통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문제가 된다.
성경적인 확인이 없이 현실적인 필요에 따라서 직분을 받아들인다면, 이미 그 직분은 하나님의 원리를 벗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통을 가지고 있는 것이 로마교회와 루터파, 그리고 성공회와 같은 종교개혁 이후에 국교회주의(erastianism)를 채택한 교회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이다.
임시직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표현으로 창설직(創設職), 또는 특별직이라고 한다. 그러나 가장 적절한 표현은 창설직이라고 생각된다.
창설직원이란 사도시대에 기독교회를 처음으로 세우는 과정에서 있었던 직원들을 말한다. 이에 대해서 칼빈은 에베소서 4장 11절에 근거해서 전부 다섯 가지 직원을 말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처음 셋은 비상(임시)직원이라 했고 나머지 둘은 통상직원이라고 했다.
여기서 비상직원이란 교회를 창설하기 위해서 필요했던 직원을 의미하며, 통상직원이라함은 그 이후에 교회를 통치하는 직원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창설직원은 “전에 교회가 전혀 존재하지 않은 곳에 교회들이 형성되는 동안, 혹은 적어도 교회들이 모세로부터 그리스도에게로 이전되는 동안 지속하기 위한” 역할을 감당했던 직원을 말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임시직이라는 표현이 가능하다. 그러나 임시직원이라는 표현이 그 직무의 권위를 약화시키거나 부정하는 것일 수 없다는 것은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의 창설직원의 권위는 절대적인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고, 그 권위에 기초해서 신앙과 교회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창설직원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1) 使徒職(Apostoles)
사도라는 말은 신약교회에 있어서는 특별한 직무를 의미하며, 예수님에 의해서 불림을 받은 12명과 바울을 지칭한다. 그러나 이 외에도 성격에는 사도적(apostolic)인 인물들에게도 적용되는 경우도 있다(행14:4, 14. 고전9:5-6. 고후8:23. 갈1:19).
사도직의 특별한 임무는 신약교회의 기초를 놓는 것이었으며, 훗날 그리스도인들의 예수님과의 교제가 사도들의 말씀을 통해서 가능하게 된다는 점에서 말씀을 기록하여 남겨주는 역할이었다.
따라서 사도직은 특별한 자격조건이 요구되었다. 그러므로 현재의 교회에서 사도로서의 권한을 가지거나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직분과 그 권위는 예수님에 의해서 오직 사도들에게만 주어졌던 것이다.
그러면 사도직에 요구되었던 것은 무엇인가? 첫째, 예수님에게 직접 불림을 받은 자(막3:14, 눅6:13, 갈1:1). 둘째, 예수님의 생애와 부활의 목격자로서 그 것을 증거할 수 있는 자(요15:27, 행1:21-22, 고전9:1). 셋째, 자신들이 받은 영감(靈感) 자각하고 있는 자(행15:28, 고전2:13, 요일5:9-12, 살전2:4). 넷째, 선교를 행함에 있어서 신적인 보증을 위해서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받은 자(고후12:12, 히2:4). 다섯째, 사역의 결과에 대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그 표적으로써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고전9:1-2, 고후3:2-3, 갈2:8). 등을 말할 수 있다.
따라서 1세기의 교회에서 사역했던 사도들 외에 현 역사에서 사도를 말하는 것은 가당치 않은 일이다.
그러나 현실에 있어서도 사도직을 말하는 경우는 로마교회와 성공회와 같이 최고의 감독에게 사도권이 계승되고 있다고 믿는 그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이러한 주장은 성경적인 증거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의 주장대로 감독이 독자적으로 관할한 교구도 없었거니와 감독 개인이 주도하는 목사의 장립은 더더욱 없었다(행15장은 이를 잘 증명하는 말씀임).
또한 감독이란 칭호는 장로의 다른 명칭인 것을 성경에서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고, 목사의 장립은 노회가 시행했음도 알 수 있다(행20:28, 딤전4:14).
사도직을 가지고 있었던 이들에게 주어졌던 권능은 현재에 계속해서 나타나지 않는다. 그들에게 그러한 권능을 주신 데는 이유가 있다.
“진리를 받을 감동을 일으키기 위함, 전도자가 하나님의 사자임을 표시하기 위함, 전도자의 전언(傳言)이 진실함을 증거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교회가 설립되고 하나님의 계시로써 성경이 완성된 이후에 사도적 직분과 직무가 지금도 계속된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2) 先知者職
신약성경에는 선지자직을 말하고 있다(행11:27-28. 13:1-2. 15:32. 고전12:10. 13:2. 14:3. 엡3:5. 4:11. 딤전1:18. 4:14). 이들은 특별히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한 직무를 수행했으며, 미래에 대해서 예언하는 일도 했다.
따라서 이 직분은 신약의 계시가 최종적으로 완결되지 않았던 시대에 초자연적인 카리스마와 함께 하나님의 가르침을 계시하고, 그것을 증거하는 직무였다. 따라서 신약의 계시가 완결되고, 신약성경이 완성된 다음에는 이 직분이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 칼빈은 “...지금은 이 같은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으며, 혹은 그들이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에 대해서 하지(J. A. Hodge)는 “선지자의 직분이 폐지됨은 신구약이 완성되어 선지자의 존재가 필요하지 않은 때문”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또한 “예수님께서도 사도와 선지자의 직분을 존속시킬 방침을 지시하심이 없고, 그 후에는 특별한 권능을 주신 일이 없은, 즉 이 직분들을 폐지하기로 정하신 줄로 안다”고 설명하고 있다.
결국 선지자 직분은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성경이 완성됨과 함께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에 있어서는 성경에 대한 신앙과 바른 해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또한 자신을 선지자로 호칭하거나 새로운 선지자임을 자처하는 경우는 사이비 교주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주지해 두어야 할 것이다.
선지자직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하심과 그 사역을 통해서 스스로 완성하신 것이기 때문에 현재는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여 가르치는 것이 설교자의 직분이다. 바른 가르침은 설교자가 가지고 있어야 하는 가장 큰 책임이다.
3) 傳道者(Evangelists)
신약성경에는 전도자에 대한 언급이 많이 있다. 빌립(행 21:8), 디모데(딤후 4:5), 마가(딤후 4:11), 디도(고후 8:23) 등이 성경에서 전도자로 지칭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전도자라는 직분이 교회의 직무로 말하고 있는 것은 에베소서 4장 11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이 교회에서 감당했던 일은 사도들을 도와서 일하며, 가르치기도 하고, 사도들의 파견을 받아 지 교회에서 설교와 성례전, 권징도 시행했음을 알 수 있다(딛 1:5, 3:10. 딤전 5:22).
이렇게 볼 때 일반적인 설교자들 보다 권위나 사역의 범위가 넓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직분은 사도들을 보조하는 것이었기에 사도직의 폐지와 함께 폐지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직분은 사도들의 사역의 완성과 함께 끝난 것으로 이해함이 마땅하고, 전도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성하신 복음을 믿는 모든 신자들이 감당해야 하는 것으로 주어진 것이다.
5. 통상적 항존적 직무(2004-11-30)
사도적 교회는 교회형성을 위한 직제를 확립함으로써 오늘날 교회를 위한 제도의 원리를 제공하고 있다. 그렇다면 신약성경 증거하고 있는 사도적 교회가 보여주고 있는 통상적 항존적 직무들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한 성경적인 확인 필요 할 것이다.
로마서 12장 6-8절에서는 임시직을 제외하고 “섬기는 일과 가르치는 일” “권위하는 일” “구제하는 일과 긍휼을 베푸는 일”을 감당하는 일을 말하면서 세 가지의 직무를 말하고 있다.
여기서 섬긴다는 말은 문맥상 일반적인 의미의 봉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 즉 말씀의 봉사를 의미한다.
“권위하는 일”이라고 번역된 것은 지도하는, 곧 통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고린도전서 12장 28절에서는 역시 임시직을 제외하고 교회의 통상직원으로는 “교사” “돕는 자” “다스리는 자”를 말하고 있다. 여기서 돕는 자는 물질적인 도움을 나누는 자를 의미하고, 다스리는 자는 관리자로서 영적인 지도, 곧 통치권을 행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에베소서 4장 11절에서는 역시 임시직을 제외하고 본다면 “교사 혹은 목사”를 교회의 통상직원으로 증거하고 있다.
여기서 목사와 교사의 직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다시 다루겠지만 교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로서 이해하면 될 것이나 그러면 목사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동반한다. 목사는 교사와 같은 직분으로서 교회를 통치하는 제도적인 의미에서 당회의 의장직을 감당하고 있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이론이 있다. 즉, 당회장직을 수행하는 교사라고 할 수 있다. 결국, 그러한 의미에서 교사와 목사는 같은 직이라고 보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보면 신약성경에 나타난 교회의 통상적 항구적 직무는 셋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즉, 목사 장로 집사이다. 그러나 장로교회는 이 직분을 세 개의 직분으로 이해하지 않고 두 개의 직분으로 이해하는 것이 삼직분론을 주장하고 있는 감독주의 교회들과 다른 점이라 할 수 있고, 장로교회와 같이 이직분론을 주장하고 있으나 장로직에 대한 이해가 다른 재세례파와 회중주의자들과는 다른 목사직과 장로직은 같은 직으로 이해하되 직무의 다름을 인정하는 입장이다.
삼직분론자들은 직분을 계급으로 이해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고, 회중주의를 표방하는 이직분론자들은 장로나 목사 어느 한 쪽만 인정한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회중주의를 추구하는 교회에는 장로만 있고 목사가 없거나 반대로 목사는 있으나 장로가 없는 경우가 있다. 이렇게 이직분론을 주장하지만 장로교회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하나의 문제는 항존적 직분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견해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항존의 의미가 교회적인 것인가 아니면 개인적인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즉, 교회에 직분자가 항존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것인지 아니면 한 사람 개인이 직분에 임하게 될 때 그 개인이 그 직분에 항존적 신분을 가진다는 의미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에 대해서 한국교회는 대부분 개인이 임하게 되는 직분이 항존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따라서 교회법에 항존직이라고 하는 것은 안수를 통해서 세움받은 직분자 개인을 항존의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것은 성경에 대한 이해의 차이로써 교회적인 선택에 의해서 받아들이고 적용해야 하는 문제로 남겨져 있다.
칼빈도 앞에 열거한 성경구절을 해석함에 있어서 목사와 교사를 교회의 정치를 주관하는 통상직원이라 하고 교사의 직무를 목사의 직무에 포함된다고 했다. 그리고 장로와 집사를 통상직원으로 이해했다. 동시에 감독 장로 목사는 같은 직분의 다른 명칭이라고 이해했다. 그리고 한국 장로교회가 대부분 받아들이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도 “교회의 통상적 항존적 직원은 목사, 치리장로, 집사”로 밝히고 있다. 이 고백은 교회에 있어서 통상적 항존적 직분을 세 가지 직분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성경적인 입장이라는 것을 공적으로 확하는 것이라 하겠다.
하지(J. A. Hodge)도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교회에 항존해야 할 직분으로 이 세 가지 직분을 말하고 있다. 이 세 가지 직분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가운데 “전도하고 교육하는 것과 신령할 중에 치리하는 것과 구제하는 것인데, 이는 교회에 제일 필요한 일이므로 항상 있을 것이다. 또 성경이 이 삼직의 책임과 선거방법을 가르침을 보니 항상 존재할 것이다.” 이 말은 삼직은 교회가 역사를 통해서 필요한 이유들이 생겼기 때문에 그 때부터 만들게된 제도가 아니라 교회의 본질적인 필요와 그 필요를 아시는 하나님이 말씀과 역사를 통해서 이 직분을 교시하셨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의 입장에서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설명이다.
즉,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직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권면하며, 그 말씀에 의존해서 성례전의 집행이 위탁되어있는 목사의 직무다. 다음은 치리회의 구성원으로서 권징을 시행하는 것이다. 이 때에 장로든 목사는 모든 치리회의 구성원은 장로로서 그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나아가서 세 번째의 직무는 집사직이다. 집사직은 교회 안과 밖에서 예수님의 사랑으로 봉사하는 직이다. 이렇게 목사 장로 집사라고 하는 직분이 교회에 있어서 통상적 항존적 직무임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이렇게 통상적 항존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직분이 제도적으로 확립된 것은 어느 날 어떤 사람의 지혜나 경험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섭리를 통해서 역사의 과정 속에서 계승시켜 오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구약의 이스라엘과 유대교의 역사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교회 안에 이러한 제도가 만들어지는 것은 자연스럽게 구약과 유대교의 역사를 통해서 비록 그들이 왜곡된 신앙을 형성하는 역사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그들의 역사를 통해서 계승시킨 것은 하나님이셨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다. 따라서 역사의 연속성과 비연속성이라는 이해를 동반하지 않으면 쉽게 역사를 단절하는 오류를 범함으로써 교회적 역사성과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는 것에 대해서 유의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성경적으로, 역사적으로 교회의 통상적 항존적 직분을 이해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에 철저하게 따르고 있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역사를 통해서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입장을 부정하는 것이 될 것이다. 따라서 교회형성을 위해서는 여전히 성경에 충실하며, 그러한 신앙적인 전통이 계승되고 있는가에 대한 신앙적 확신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초대기독교회가 형성되는 과정에서는 많은 혼란이 있었다. 어떤 정확한 체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떤 모델이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교회형성을 위해서 어떻게든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역사를 통해서 계승되고 있었던 구약의 장로주의 제도를 사도들은 자연스럽게 교회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유대교의 회당이 모두 개종을 하게 되면 그들이 모였던 건물은 그대로 예배당이 되고, 회당장은 그대로 장로가 되었다. 그러나 전혀 새롭게 예배당이 개설될 때에는 목사 장로 집사를 택하여 세웠다. 이렇게 받아들여진 제도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자리매김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교회의 관리상 필요한 제도들이 현재의 교회들에는 많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직분들은 성경이 명시하고 있는 교회의 직분이 아니고, 교회의 현실적인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활용하는 것뿐이다.
따라서 그러한 직분들에 전적으로 교회의 통치와 운영을 맡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1) 치리장로의 起源과 역사(2004-11-30)
성경에서 치리장로의 기원을 찾는다면 먼저 신약의 교회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신약의 치리장로는 구약의 장로로부터 기인하는 것을 전제한다.
조금 더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로마서 12장 7-8절, 고린도전서 12장 12절, 디모데전서5장 17절, 데살로니가전서 5장 12절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성경구절들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장로는 교회의 영적인 지도와 관리를 포함해서 치리회에 있어서 직무를 수행하였다.
여기에 나타나는 장로(presbuteros), 혹은 같은 말로서 감독(episkopos)이라고 불리는 용어는 교환해서 사용하는 것으로서 3직분론을 말하고 있는 감독주의자들의 주장과 같이 다른 직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직분의 다른 명칭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은 사도행전 14장 23절, 15장 6, 22절, 16장 4절, 21장 8절, 디도서 1장 5-7절, 베드로전서 5장 1-2절 등이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서 직접적으로 치리장로를 세우라고 하는 말씀이 나오고 있지 않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 자신은 물론이고 사도들도 장로제도를 세우라는 말씀을 하지 않았다. 다만, 이미 교회 안에 받아들여진 장로제도에 대해서 어떤 사람을 세울 것인가 하는 교훈을 하고 있고, 이미 교회가 장로를 세우고 있어서 원리를 찾아볼 수 있다. 이것도 역시 교회가 시작되면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이미 교회안에 장로가 있는 상태에서 말씀하셨다는 데 그 기원을 생각할 때 항상 유의해야 하는 점이다.
그러면, 왜 그러한 언급이 없었던 것인가 하는 문제와 동시에 신약의 교회는 어떻게 장로제도를 받아들였는가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장로제도가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답할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예수님도 사도들도 교회의 통치원리를 새로운 것을 만들려 하지 않았고, 역사적으로 계승되고 있는 장로제도를 그대로 자연스럽게 신약의 교회에 받아들이게 했던 것이다. 따라서 새삼스럽게 교회에 장로를 세우라는 말씀이 없었던 것이고, 그와 더불어 누구의 특별한 명령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구약시대의 역사와 전통에서 계승되고 있는 장로제도를 그대로 수용한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장로주의 원리는 역사적이며 성경적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확실한 역사관을 가지지 않으면 구약과 신약의 역사적 단절이라는 문제를 낳게 한다는 점에서 충분하고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예수님과 사도들의 의식에 있어서 명시적으로 그 입장을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이것은 묵시적으로 구약의 계승이라는 차원에서 수용해서 처음 교회가 제도적으로 모양을 갖추도록 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의식이 있어야 한다. 만일, 이것을 부정한다면 신약의 교회가 수용하고 있는 장로제도는 잘못된 것이 분명하다. 예수님도 제자들도 말씀하지 않은 것을 교회에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구약의 제도를 직접적으로 계승시킨 것은 유대교로 변질된 이스라엘의 신앙이다. 그러나 유대교는 기독교로 계승되는 참 종교의 통로로서의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장로제도가 어떻게 발전되고 계승되었는지 하는 것을 유대교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고, 그 부분을 성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마 5:22, 26:3, 눅 7:3, 행 4:8, 23, 5:21, 6:12, 14, 24:1, 25:15)
그리고 유대교가 계승 발전시켰던 장로에 의한 통치원리는 교회 안으로 자연스럽게 전달되었기 때문에 초기에 형성된 교회들은 그것을 교회의 통치원리로 수용하는 데 어떠한 거부감도 느끼지 않았고, 예수님과 사도들도 그것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지 않았으며, 나아가서 사도들은 당연한 것으로 수용하고 오히려 장로를 세움에 있어서 주의해야 할 것에 대해서만 후에 교훈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장로제도를 통한 교회의 통치는 교회에로 유입되어 기독교의 형성을 위한 정치원리로 자리잡게 되었다(행 14:23, 20:17, 딤전 5:17, 19, 딛 1:5, 약5:14, 벧전 5:1, 5). 따라서 장로교회의 정치원리가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장로주의를 성경적 교회형성의 원리로 가지고 있는 자들로서 장로교회의 역사적인 기원을 확실하게 이해해야 하는 것과 바른 장로교회를 만들어 가는 책임의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 많은 경우가 장로교회의 창시자를 칼빈으로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적으로 보면 교회의 통치원리로서의 장로주의원리는 구약과 신약의 전 역사를 통해서 일관되게 증거되고 있다는 점에서 틀린 말이다. 만일, 칼빈이 장로교회의 창시자라고 한다면 칼빈 이전에는 장로주의가 없었어야 할 것이고, 또한 장로교회란 말도 칼빈이 가장 먼저 사용한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칼빈은 어느 경우에도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로교도들 조차 이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하는 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장로교회는 성경적 교회로서의 전통과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지 칼빈이 세운 교회가 아니다. 만일, 칼빈이 세웠다 할지라도 그것이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따를 수 없다는 것이 개혁파의 입장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장로주의 정치원리는 성경이 증거하는 역사적 전통적인 근거에 의한 교회형성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는 물론 장로교회나 장로주의라는 말이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장로주의에 의한 통치를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들을 확인하게 하는 것은 유대교로 변질된 역사를 넘어서 모세시대로 까지 거슬러 올라 갈 수 있다.
모세의 출애굽 이전에도 이미 포로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의 백성들 가운데는 장로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출 3:16, 4:29, 12:21). 더 거슬러 올라간다면 아브라함 시대에도 장로라는 용어는 나오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성격을 가진 직분인지 확인할 길이 없기에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모세가 지도자로서 활동하던 출애굽 이후에 이미 완전한 형태의 통치기구로서 장로제도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에는 장로들을 통한 통치기구를 완전한 형태로 구성했고 그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통치했으며, 이것을 하나님이 인정했다는데 또한 의미가 있다. 모세는 각 단계의 회의체(會議體)를 구성하여 백성을 통치하는 원리로 삼았다(출 18:21-25). 그리고 각 단계의 회의체 가운데 최고의 치리회는 70인 장로회였다(출 24:1, 민 11:16, 25). 70인 장로회는 이스라엘 최고의 법정(法庭)이며, 동시에 종교회의체였다. 이것은 오늘날 장로교회의 총회의 성격과 비슷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에도 장로제도는 계승되어서 이스라엘의 국가적인 정치원리로 그 기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사사시대(삿 8:16, 룻 4:2), 왕국시대(삼상 15:30, 16:4, 삼하 17:15 대상 11:3 왕상 8:3, 대하 5:4), 그리고 포로시대(렘 29:1 겔 8:1, 14:1, 20:1)를 거치면서 국가적인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변함이 없었던 것은 장로제도에 의한 통치였다(스 5:9, 6:7, 10:14).
국가가 분열을 하고 망하는 상황에서도 장로들의 회의체가 그 기능을 일관되게 했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의식 가운데 얼마나 확고하게 장로주의 원리에 의한 통치를 신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하는 것을 짐작하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구약의 장로와 신약의 장로 그리고 오늘날 장로들의 기능이나 신분이 똑같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구약시대에는 단지 종교적인 기능만 한 것이 아니고 국가적 정치적인 기능까지 감당했다.
그것은 제정일치라고 하는 시대적인 상황에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정교분리가 이루어지면서 현재는 교회 내에서만 직접적인 그 기능을 감당한다. 따라서 구약시대와 유대교의 회당시대까지는 장로들의 기능이 종교적인 것은 물론이고 정치적인 문제까지도 최종적인 권위를 가지고 결정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찌 되었든 이와 같이 장로주의 통치원리에 의한 교회의 형성은 그것이 성경적 기원을 가지며 역사적으로는 아브라함 이래로 지금까지 단절되지 않고 계승되어 오는 전통적인 통치원리라는 점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바른 장로교회를 형성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이다.
2) 치리장로의 職務 - ①(2004-11-30)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치리장로의 직무에 대한 교단의 헌법의 해설이 아니라 성경적인 원리를 찾아보는 것이다.
물론, 헌법을 간과하는 입장에서 해설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염두에 두고 쓰고자 한다. 헌법과 성경적 원리는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치리장로의 직무는 “치리”(rule)이라고 하는 말에 포함되어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면, 무엇을, 어떻게 “치리”하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하게 되는데, 그것은 성경이 명시하고 있는 것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 명시하고 있는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는가에 따라서 장로주의 정치원리의 성격이 달라질 수 있는 문제가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성경적 역사적 신앙을 추구하는 개혁파의 입장에서 성경이 교훈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제일 먼저 프로에스테미(proestemi)라고 하는 말에서 장로의 직무를 찾아볼 수 있다. 이 단어로 장로의 직무를 설명하고 있는 곳은 로마서 12장 7-8절, 데살로니가전서 5장 12절, 디모데전서 3장 5절, 5장 17절 등이다.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단어 프로에스테미라는 “지도하다” “다스리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rule”이라는 단어로 번역하였다. 그래서 영어성경(KJ)은 일관되게 같은 단어로 번역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 우리말 성경도 한결같이 “다스린다”는 말로 번역을 하고 있다. 그러면 여기서 다스린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권위를 가지고 관리하다 감독하다”는 의미이다.
즉, 여기서 권위라고 하는 것은 장로가 스스로 가지고 있는 사회적 개인적인 권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권위는 하나님이 맡겨주신 권위를 말하는 것이고, 이것을 우리는 위탁권(委託權)이라고 한다. 따라서 교회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위탁권에 대해서 인정할 수 있어야만 그 권위에 순종할 수 있다는 문제를 가지게 된다.
여기서 장로들이 가지고 있는 위탁권은 장로들의 내적인 소명과 회중(신자들)의 선출과정을 통해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위탁권에 대한 교회적 확인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에 대한 확인이 충분하지 못하고 그러한 인식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때문에 교회형성에 있어서 문제를 동반하고 있는 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적인 문제라고 지적할 수 있다.
그러면 장로들은 치리권을 가지고 무엇을 하는 것인가? 교회를 “관리” “감독”하는 일을 한다. 이것이 “rule”로 표현되는 장로의 직무이다. 즉, 장로의 직무는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신자들의 신앙을 관리하고 감독하는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이때의 장로의 직무에 대한 책임은 목사와 같은 책임을 가진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관할권이 치리회인 당회에 있기 때문이고, 당회의 구성원으로서 장로는 목사와 동등한 책임을 가진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현실에 있어서 치리회의 구성원들인 장로들이 실제로 그러한 책임을 의식하고 있으며, 그 책임을 다하기 위한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바른 교회가 세워지기 위해서는 치리회의 바른 의식과 직무에 대한 성실한 수행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그럼에도 실제로 한국교회는 그 관리와 감독하는 직무를 가지고 있는 장로들이 신자들의 신앙의 상태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은 물론, 거의 신자들에 대해서 책임있는 관리 감독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것은 이미 장로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이다. 신자의 신앙상태를 알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바른 장로의 직무를 수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므로 장로의 직무는 치리회를 통해서 신자들의 신앙에 대한 관리 감독에 충실해야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충실하지 못한 채 다른 일, 즉 행정적 정치적인 일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장로주의 정치원리에 충실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건강한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단지 외적인 것에 있지 않고, 그 이전에 지도자들이 장로교회의 형성원리에 대한 바른 이해와 그 원리에 충실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고린도전서 12장 28절의 큐베르네세이스(xuberneseis)라고 하는 말로서 관리자(Government, Governor)라고 번역되었다. 우리말 성경에는 “다스리는 것”이라고 장로의 직무를 번역하고 있다. 같은 말이 사도행전 27장 11절, 요한계시록 18장 17절에서는 “선장”이라는 단어로 번역되어 있다는 것도 주목할 일이다. 왜 같은 단어가 이곳에서는 선장이라는 단어로 번역이 되었고, 그렇게 받아들여도 괜찮다고 여기는가? 여기서 장로의 직무에 대한 해석이 가능해진다.
즉, 치리장로는 치리회인 당회를 통해서 신자들의 신앙과 생활의 방향을 제시하는 직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선장의 직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배가 나아가야 할 바를 결정하고 그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만일 선장이 이에 대한 판단을 하지 않거나 그 직무를 수행하지 않는다면 이미 그 자격을 상실한 사람이다. 교회의 선장은 예수님이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교회의 머리로 고백하는 신앙에서 이미 확인하고 있고, 예수님의 통치권을 이미 인정하는 신앙을 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장로들이 선장이라고 한다면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앞에서 사용한 용어에서 밝혔던 것처럼 위탁권을 통한 실제적인 통치를 하도록 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며, 그 책임 또한 막중하다.
따라서 장로의 직무는 신자들이 신앙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안내하며 이끌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장로(목사, 장로)는 선장으로서 준비된 자이어야 한다는 것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신자가 가야할 길을 제시할 수 있는 선견적 지식과 신실한 신앙이 있어야 한다. 또한 그것을 자신의 장로서의 직무로 확신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다음으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에피스코포스(episkopos)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사도행전 20장 28절에서 사용되고 있는 용어이다. 우리말 성경에는 “감독자”로 번역되어 있다. 여기서 감독이라는 말은 “돌보다” “보살피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말 뉘앙스는 권세자로서 지배하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는 표현이지만 이 말의 언어적 의미는 신자를 돌보고 살피는 것이다. 실제로 도움을 주고 보살피는 일을 하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렇다면 장로의 직무는 단순한 지배자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한 보살핌이라고 할 것이다. 여기서 보살핌은 단지 물질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적인 것을 중심으로 이해해야 한다. 신자들이 신앙으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살펴야 할 일들에 대한 직무를 말하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물질적인 것이 관계될 수 있다는 점에서 전혀 물질적인 것은 관계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교회에는 또 다른 직무를 맡은 자들인 집사들이 감당하는 일이다. 따라서 집사의 직무로서 맡겨져야 할 것이다.
즉, 치리권이라는 말을 통해서 단순한 지배자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은 장로의 직무에 대한 충분한 이해라고 할 수 없다. 장로의 직무는 신자들의 약함을 감당하고 살피는 일이다. 이것은 장로에게 위탁된 치리권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더 폭넓게 하는 것이다. 교회의 장로들에게 위탁된 치리권은 신자들을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인도하고 양육하며 가르치기 위한 권세이다.
따라서 장로는 신자들의 영적인 상태는 물론 실제적인 생활에 대해서도 충분히 살펴서 그들에게 실제적인 교훈과 도움이 되는 일을 감당해야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치리권은 분명히 하나님으로부터 위탁된 권세이나 동시에 섬김의 직무를 의미한다. 또한 교회의 직분은 단순한 계급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도 분명해야 한다.
2) 치리장로의 職務 - ②(2004-11-30)
한 가지 더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사도행전 20장 28절과 베드로전서 5장 2절에서 볼 수 있는데 “치라”(to shepherd)말 속에 장로의 직무가 무엇인지 나타나고 있다. 즉, 장로의 직무는 하나님의 교회를 치는 일이다. 이 말은 포이에메노(poiemeno)라고 하는데 이 말에서 4가지의 의미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 “배려하다”는 의미로서 목사와 회중과의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인격적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다. 달리 말하면 목자와 양의 관계에 비교할 수 있는 것으로서 예수님이 요한복음 10장 3-5절에서 말씀하셨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배려하다”는 말은 “한 마리 한 마리에 대해서 아는 것”을 말하며, 동시에 “한 마리 한 마리를 부르는 것”(요10:3)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장로의 직무가 무엇인가 하는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장로는 모든 신자들을 알아야 한다. 알되 그 상태를 알아야 하고, 모든 신자를 살펴서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실제로 그렇지 못할 경우 치리회의 기능을 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한국교회의, 특히 도시교회에서 장로의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과연 이 직무에 얼마나 충실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생각할 수 있다.
둘째, “먹이다”(요21:15-17) 혹은 “양육하다” 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먹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이고, 가르치는 것을 통해서 수행하는 직무를 의미한다. 치리장로의 경우 이 직무를 직접적으로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목사(교사)의 가르침을 통해서 공적으로 이 가르침이 실천되도록 하는 일은 치리회를 통해서 공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일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도록 하며, 그 권위에 따라서 모든 신자들이 생활과 신앙에 규범이 되도록 해야 한다.
셋째, “눈물로 각 사람을 깨우치다”(행20:31)고 하는 직무를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장로가 하나님의 계명을 바로 가르치며, 동시에 위로하는 것을 말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은 죄를 감추거나 덮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죄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는 것이고,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하여 그 죄로부터 자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죄를 깨달은 자가 애통하는 것을 함께 동참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사랑을 소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 같은 입장에서 긍휼과 애통한 마음으로 깨닫도록 가르치며 함께 눈물을 흘리는 일이다.
따라서 장로는 모든 신자들의 신앙상태를 파악하고 눈물로 격려하며 아픈 마음을 가지고 깨닫도록 하는 일에 전념할 수 있어야 한다. 단지 권위를 가지고 지배하는 의미가 아니고 하나님의 계명이 신자들의 삶에서 준행될 수 있도록 가르치고 격려하는 일이다. 이러한 자세는 장로로서 섬김의 직무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한다. 신자들은 이러한 장로의 모습을 통해서 더욱 격려받고 존경하게 된다.
넷째, “보호하다”(행20:29-30)는 말에서 확인할 수 있는 직무가 있다. 양무리를 내외의 적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을 의미하고, 동시에 “지키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지킨다는 의미는 내적인 적으로부터 지킬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외적인 적이란 불신앙이나 적그리스도에 대한 경계가 필요한 것이고, 내적인 적이란 게으름을 비롯해서 잘못된 신앙의식과 습관, 전통 등에 의해서 기독교 신앙으로부터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왜곡된 신앙이나 진리를 따르지 않는 생활의 습관을 파악하여 깨닫도록 가르치고, 돕고, 때로는 격려하며, 보호하는 일을 해야한다.
물론, 이러한 직무를 수행하는 것은 개인적인 것이기보다는 치리회를 통해서 하는 것이다. 치리장로의 직무수행은 전적으로 치리회를 통해서 한다는 것은 잊어서 안 될 일이다.
그러면 이러한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원리는 무엇인가? 개인적인 신앙이나 경험, 혹은 자신의 생각을 근거로 해서 수행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이 부분이 확실하게 정립되어야 하는 것은 직무 그 자체를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왜냐하면, 직무를 수행하는 원리가 무엇인가에 따라서 직무에 임하는 자세는 물론이고, 그 책임과 권위가 확립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교회의 직무는 그 출발이 인간 개인의 능력이나 인간들의 결정에 따라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직무를 수행하는 자는 물론이고 일반 신자들도 장로들의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전적으로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모든 신자들이 직무와 관련해서 하나님의 뜻과 권위를 확인할 수 있어야만 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 가르치고, 그 말씀에 따라서 회중을 양육하고 지키며, 말씀을 따라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회하는 일이지만 목회의 근본적인 요소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양(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하고,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요10:11, 15). 여기서 어떤 것도 소홀히 여기거나 하나만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과 원리가 없이 양을 돌보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만일, 이것을 잃어버린다면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양을 돌보게 될 것이다. 즉, 자신의 직무는 자신을 위한 것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장로직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심에 있어서 위탁된 직무를 수행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한다. 동시에 말씀에 대한 확신은 가지고 있으나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자세는 반드시 동반되어야 한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뜻으로 확인하고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자세를 동반하는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여기서 장로가 직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자세를 배울 수 있다. 장로의 직무는 단지 세상에서처럼 직분(position)에 의한 권위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장로의 직분은 그 직분이 계급적인 의미에서 권위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권위를 가진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는 직분을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에 의해서 확인하고, 그 말씀에 따라서 직무를 수행할 때 권위는 말씀에 의해서 보장된다. 이 때의 권위는 존경과 신뢰를 동반한다.
따라서 군림하는 권위가 아니라 신뢰와 존경을 동반하는 권위이다. 이러한 원리에 대해서 장로 자신은 물론이고 신자들 모두가 같은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에서도 세상과 같은 방법과 수단과 제도를 만들어서 그 권위를 유지하거나 확보하려는 노력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교회 안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은 이것을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렇게 볼 때 장로직은 교회 전체를 위해서 있는 직분이다. 장로(목사, 치리장로)는 개인을 위한 직분이 아니고, 개인의 명예를 위한 직분도 아니다. 장로직분은 하나님의 교회를 이 땅에서 형성하고 유지해 나아가는 막중한 책임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며,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기까지 유형교회 안에서 그 직무를 수행하여야 할 본분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 직분을 항존직이라고 한다.
그래서 장로라는 직분은 교회에서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직분이 아니다. 유형교회가 세상에 있는 한 장로직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시고 더 이상 인간의 통치원리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기까지는 있어야 하는 직분이다. 그만큼 이 직분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고 장로 자신은 물론이고 회중 모두가 이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땅에서 온전하고 건강한 교회를 이루어 가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렇게 장로의 직무는 교회를 섬기는 직으로서 유형교회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이고, 유형교회를 이루어 가는 원리인 것을 신자들 모두가 확인하고, 이 교시를 공유할 수 있는 이해와 신앙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직무가 바르게 수행되도록 신앙으로 격려하는 가운데 건강한 교회를 이루도록 교회의 구성원 모두가 힘써야 한다.
2) 치리장로의 職務 - ③(2004-11-30)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감독, 목사 등의 명칭은 오늘날의 치리장로를 나타내는 말이라고 하기보다는 교직(敎職)인 목사를 가르치는 말이며, 당회의 의장으로서의 목사에 대해서 사용하였다고 하는 역사적 사실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사도행전 20장 18절-35절, 그 가운데서 특별히 28절에서는 “장로와 감독과 목사”가 하나의 직무를 감당하는 것으로 설명되어있다. 그렇다고 혼동해서는 안되고, 여기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 하나는 직분에 있어서 동등성(계급이 아니라는 의미로서 치리회를 통한)을 교훈받을 수 있고, 또 하나는 치리장로가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양을 먹인다’ ‘보호한다’와 같이 목회자가 하는 일을 감당해야 하는 것처럼 말씀하고 있는 직무에 대한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게 하는 내용이다.
따라서 여기서 생각할 것은 직분의 동등성의 문제는 이미 살펴보았던 것이기에 생략하기로 하고 치리장로는 목회자가 아님에도 목회적인 직무를 말하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치리장로는 자신이 직접 목회자로서 ‘양을 먹이는’ 직무가 있다는 것이 아니다. 이 말씀 가운데서 25절을 주목하면 바울은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자신의 모범을 따르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단지 자신이 수행했던 말씀의 가르침과 전도의 행위에 대해서 따르라는 말씀으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가 가르친 말씀을 통해서 에베소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로서 세워지고 섬겨지기를 바라는 마음과 함께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에게 그 권한을 위탁하는 말씀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통해서 교회와 신자가 세워지고 양육되도록 하는 직무가 장로에게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치리장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알아야 하는 책임은 물론, 그 말씀에 대한 바른 적용을 주도하는 직무가 있다. 이것은 단지 목사의 말을 따른다는 의미를 넘어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의해서 교회와 신자가 지배되도록 하는 양육에 모범적이고 실제적으로 주도할 수 있는 권한을 치리회를 통해서, 그리고 치리장로 개인적으로는 신앙을 통한 말씀에 대한 신실한 순종에 의해서 직무수행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직무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말씀을 가르치는 일은 목사의 고유한 직무이다. 물론, 목사장로(가르치는 장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직무를 가지고 있지만 역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넘어서 자신의 직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목사도 자신이 가르치는 말씀의 권위에 순복해야 하고 말씀을 섬기는 입장에서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뜻이라는 것을 자신의 삶에서 모범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목사의 직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해서 매우 중요한 인식이다. 만일, 이에 대한 확고한 이해가 없게 되면 목사는 사제주의적 제사장이나 구약의 선지자와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되어서 스스로 모순됨에 처하게 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목사와 장로는 공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양을 먹이며 보호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하는 생활이 되도록 하는 것이며, 이 직무는 전적으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양을 사랑하고 양을 위해서 생명을 버릴 수 있어야 하는 것이며(요10:11, 15), 이것은 치리회를 통한 장로의 직무를 말하는 것이다.
즉, 치리장로는 치리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가 살아있게 하여야 하며, 그 말씀이 신자들 개인의 삶에서 그대로 적용되도록 해야 하는 직무를 가지고 있으며, 그러기 위해서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을 살며, 말씀을 섬기는데 있어서 모범이 되어야 한다.
이어서 생각할 수 있는 장로의 직무는 사도행전 11장 30절과 21장 18절의 말씀에 나타나 있다. 여기서 찾아볼 수 있는 장로의 직무 가운데 더 할 것은 재물을 관리하는 일이다. 물론, 여기서 재물에 대한 관리권을 말하는 것은 영적 통치권을 가진 자로서 재물에 대한 관리권도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재물의 문제라고 해서 단지 세속적인 것이라는 의식에서 이해해서는 안 될 일이다. 재물 역시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서 생활과 섬김의 방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에서 필요한 재물들을 관리하는 일 또한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직무를 바르고 충실하게 수행하지 않으면 교회와 신자들의 신앙이 왜곡되거나 많은 고통을 동반하게 된다는 사실이 현실이다. 때문에 재물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와 함께 하나님이 허락하신 도구로서 바르게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드러낼 수 있도록 관리해야 한다.
또한 야고보서 5장 14절의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는 장로의 직무는 병자를 방문하고 위로하며, 죄의 용서를 위해서 기도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르치고 권면하는(encourage) 일도 중요한 일로 말씀하고 있다. 이것은 장로의 직무가 종합적인 면이 있음을 알게 한다. 그렇다고 이러한 일은 오직 장로들만의 일인가 하면 그렇지 않고, 오늘날 모든 신자들이 각자가 자신의 신앙과 삶을 통해서 감당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장로는 이러한 일을 치리장로로서 감당하는 것이고, 거기에 장로로서의 직무와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직무는 외적인 제도와 직분에 의해서 억지로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소명에 의해서 감당해야 하는 일이다. 따라서 이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장로 자신은 당연히 자발적인 자세를 가져야 하며,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신자들도 같은 신앙과 의식(意識)을 가지고 자신의 장로들의 가르침을 통해서 신앙과 삶의 도리를 깨닫고, 그 가르침에 순종하여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성경이 교시(敎示)하고 있는 교회를 형성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섬기는 모든 일이 기쁨 그 자체가 된다.
여기서 치리장로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러한 직무를 개인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비록 장로의 직분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서는 개인의 자격으로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치리회(장로회의체)를 통해서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있다. 목사이기 때문에, 혹은 장로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점이 장로교회의 형성원리의 핵심이기도 하다. 물론, 평상시에 이미 위탁받은 직를 수행하는 것은 개인적이지만 이미 치리회의 허락을 받았기 때문에 행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치리장로는 그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치리회의 구성원으로서 교회의 영적인 통치권을 가지고 그 직무를 감당하는 것이다.
따라서 장로교도들 모두가 기억해야 할 것은 장로는 통치권을 가지고 있는 하나의 계급으로서의 직분이 아니라 “통치자는 곧 쓰임 받는 자”라는 동시적 신분을 가지는 직분이라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단지 계급적인 의미로서 지배자로 군림할 수 있는 것은 더 더욱 아니며,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일꾼으로서 그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여야 한다. 즉, 직무에 있어서 장로서 기능을 감당하는 것이고, 삶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한 사람의 신자로서 자신의 신앙과 일치하는 삶을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게 순종해 가는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자세는 신앙과 생활에 모범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치리권을 가지고 있는 자로서 권위를 가지게 된다. 장로의 권위는 공적으로 고백하는 신앙과 일치하는 자신의 신앙과 삶의 일치에서 확고해 지게 된다(마 20:25-8, 눅 22:25-7).
즉, 장로의 권위는 장로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또한 직분 그 자체가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장로직은 하나님의 세우심에서 출발하며, 이것은 개인적으로 소명에 의해서 확인해야 하고, 교회적으로는 객관적인 과정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어야 하며, 여기서 하나님의 위탁된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이 장로로서 하나님의 교시와 일치하는 신앙과 삶의 모범이 될 때 치리장로로서의 직무를 온전하게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칭찬과 존경을 받는 자로 장로를 세울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3)治理長老의 資格 - ①(2004-11-30)
그러면 치리장로는 어떤 사람이 세워져야 하겠는가? 교회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인물이 바로 세워지지 못하게 되면 교회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것은 단순히 제도적인 문제가 아니라 교회를 구성하는 것이 인간이기에 어떤 사람이 장로로 세움을 받는가 하는 문제는 교회에 있어서 중대사가 아닐 수 없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장로의 자격에 대한 교훈은 디모데전서 3장 1-7절과 디도서 1장 6-9절에서 명확하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두 곳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 거의 동일하기 때문에 디모데전서를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여기서는 감독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감독은 장로의 직무상의 명칭임을 알 수 있고 그러한 입장에서 이해하려고 한다. 이러한 해석은 디도서에서 감독이라는 명칭과 장로라는 명칭을 동시에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더 확실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장로직 그 자체가 “선한 일”(딤전 1:1)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그러면 여기서 “선한 일”이란 어떤 것을 의미하는가 하는 생각을 한다면 장로의 자격으로서 어떤 것이 준비되어야 할 것인지 판단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선한 일”에 대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찾아보면 마태복음 5장 16절에서 “착한 행실”이라고 말씀하고 있고, 이와 관련해서 이해할 수 있는 면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선한 행실”을 통해서 신자들이 그리스도께 있는 영광을 사람들 앞에서 나타내며,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을 기뻐하고 찬양하는 것이라는 의미로서 “선한 일”인 것이다.
따라서 이 직무는 유형교회에서 인간의 믿음으로 행하는 선한 행실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직무인 것을 깨달아야 한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허락받은 직무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장로로 세움을 받을 자에게는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자격과 끝임없는 수련의 과정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소명과 함께 자신이 불림받은 일에 대해서 충실한 일꾼이 되기 위해서 준비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교회는 일꾼으로 세움받을 사람들을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자격에 합당한 사람이 되도록 양육하는 일에 대한 책임이 있다.
바울은 여기서 15가지 자격의 요건을 말하고 있다. 즉, “책망할 것이 없는 자”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 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 등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특별히 장로만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지 특정한 사람만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장로의 자격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은 장로는 본이 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장로직을 가진 사람만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기에 그것에 대한 본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장로의 권위는 소명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는 자신의 신앙과 생활이 있을 때 말씀과 함께 권위를 확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권위를 인위적으로 확보하려고 할 때 기독교는 세속화되거나 인본주의적인 권위에 의해서 지배되는 교회가 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바울이 가르쳐주고 있는 자격에 대해서 숙고하여 깨닫고 믿음으로 자신 안에 이러한 요소들을 준비함으로써 하나님의 뜻과 권위를 나타낼 수 있고 집행할 수 있는 장로가 되도록 해야 한다. 단지 자신이 확보하게 된 직분 그 자체가 권위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가톨릭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장로의 자격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상고하도록 하자. 이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서 장로의 자격은 “책망할 것이 없는 자”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것은 완전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누구도 완전한 할 수 있는 사람이 없기에 이 말씀은 칭찬을 받을 수 있는 덕과 인품을 소유한 자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장로는 단지 신앙에 대한 이해가 해박하기 때문에, 혹은 종교적인 열심이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성경이 말씀하는 신앙은 전인격인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신앙이 인격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거나 잘못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여기서 요구되는 장로의 자격은 전인격적인 신앙을 가지고 신앙과 생활에 있어서 “책망할 것이 없는 자”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장로는 교회 내에서만이 아니라 내외에서 책망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말씀의 순서대로 살펴보면 첫 번째부터 14번까지는 교회와 내적으로 갖추어야 할 요소이고, 마지막 15번의 요소만이 교회 외적인 요소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15가지 요소를 말하는 가운데 14가지 요소가 개인과 교회 안에서의 문제를 열거하고 있다. 그러면,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것이 어디에 있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시 관심을 가지고 보면 교회 안에서 갖추어야 할 요소들 가운데서 1부터 7까지는 긍정적인 표현을 통해서 말씀하고 있는 요소들이고, 나머지 8부터 마지막 14까지는 부정적인 표현을 통해서 말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짧은 말씀 가운데서도 강조하려고 하는 의도를 확실하게 두 영역으로 나누어 말씀하고 있다.
이제부터 한 가지씩 상고함으로써 교회형성을 위한 장로직에 임하는 자격에 대해서 확실한 이해와 확신을 가지도록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앞에서 열거했지만 “책망할 것이 없는 자”라는 말은 전인격적이고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다. 따라서 이 말은 뒤에 구체적으로 열거되고 있는 자격의 요소들을 동반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단지 “평판이 좋은” 것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내적인 면에서 실제로 진실하고, 그것의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어서 말씀하는 것은 결혼생활에 있어서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는 것으로 그 요소를 말하고 있다. 이것은 창조질서의 기본이다. 창조명령을 통해서 인간의 질서와 역할, 책임을 말하는 개혁파 신앙의 입장에서 이 말씀은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요즘 기독교회에서조차 동성간의 결혼을 허용하고, 나아가서 목회자의 신분을 가진 사람들까지도 동성연애자들이 허용되는 상황에서 이 말씀에 대한 확고한 깨달음과 믿음을 통한 신념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 한 구절의 말씀 가운데 담겨져 있는 의미는 매우 크다고 할 것이다. 이것은 창조질서의 기본이고, 만물의 관리권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 가지고 있어야 하는 기본적인 자세이다. 때문에 한 가정을 이루고, 또한 한 아내와의 관계에서 남편이어야 하며 그 책임을 다할 수 있어야 한다는 지극히 평범하고 일반적인 것이지만 이것을 장로의 자격 가운데 하나로 말씀하고 있다.
그만큼 일반적인 것이지만 그것은 가장 중요한 일이고 지켜져야 할 원리로 말씀하신 것이기에 교회의 장로로서 기본을 특별한 것으로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렇게 창조질서에 있어서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기독교의 독특한 면이다. 특히, 이교는 이 부분에 대해서 일부다처를 허용하는 경우와 이성간의 도덕적인 문제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관용적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재혼자나 독신자는 자격이 없다는 말로 단적인 해석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성적인 관계에 있어서 질서가 기본으로 지켜져야 할 것을 말하는 것이고, 이것은 자신을 관리하는 것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것이기에 자격으로 요구하는 것이다.
3) 治理長老의 資格 - ②(2004-11-30)
장로의 자격을 말하면서 “책망할 것이 없는 자”라고 한 것은 장로가 가지고 있어야 하는 내면적인 자질에 대한 총괄적인 의미로서 교훈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책망할 것이 없는 자”라는 것은 먼저 한 사람의 신자로서 일상생활 가운데서 자신의 도리와 책임을 다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포괄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말이다. 그 가운데 이미 앞에서 “한 아내의 남편”으로서의 도리를 잘 감당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성경의 교훈에 주목한다면 내적인 의미에서 장로의 자격을 교훈하는 말씀은 “절제하며”이다. 절제라는 말은 쉽게 금욕적, 혹은 참는다, 아낀다는 의미로 이해하기가 쉽다. 특히, 우리말이 주는 뉘앙스가 그렇다. 그러나 절제라는 말은 자신을 관리하는 것, 혹은 자기를 다스리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말은 단지 금욕적이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을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스스로 세워가는 것으로서 자신을 관리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 말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스스로 관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을 전제하는 말씀이다. 즉, 자신의 감정이나 생활, 시간, 일, 여가, 소유와 나눔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그리고 나아가서 하나님의 일꾼으로 불림을 받은 사람으로서 조절하고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교훈이다. 예를 들어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성격을 관리하지 못함으로써 지도자로서 결정적으로 실수를 하거나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들을 볼 수 있다.
또한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관리하지 못하는 것도 큰 문제로 경험할 수 있는 경우들이 있다. 그리고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서 생각없이 사용하거나 덕을 동반하지 않는 씀씀이는 역시 절제하지 못하는 모습이라고 할 것이다. 요즘에는 여가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까지도 생각할 수 있다. 자기에게 허락된 시간과 기회라고 해서 단지 자신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고 하는 생각은 성경적이지 않은 것이다. 그러한 기회까지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활용할 수 있도록 자기를 관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어지는 교훈은 “근신하며”이다. 여기서 근신한다는 말도 우리말 뉘앙스로서는 경건함과 함께 언행을 삼가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단지 조심스럽게 행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어떤 의미에서 조심스럽게 언행을 한다는 표현은 이 말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의미에 접근 할 수 있도록 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근신하며”라는 말속에 담겨진 본래의 의미와는 거리가 있는 표현이라는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근신이라고 하는 말이 단지 행동을 삼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표현한다면 바른 판단에 의해서 행동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판단의 건전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지도자로서, 특히 치리회의 회원으로서 일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갖추어야 할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지도자가 판단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회중을 바르게 이끌어간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는 일이고 나아가서 바른 신앙을 제시하는 것도 어렵게 될 것이다.
때문에 장로로서 가지고 있어야 하는 자격 가운데 신앙을 포함해서 모든 일에 대한 바른 판단과 기준을 제시할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특별히 치리회가 해야 하는 일 가운데 중요한 것은 신앙을 바르게 제시하는 것이고, 동시에 많은 거짓 가르침과 거짓 영의 활동이 현실적으로 교회를 혼란하게 만드는 상황에서 신자들을 바른 신앙의 길로 인도하고 바른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갖추고 있어야 할 덕목이다.
실제로 장로들의 직무를 바르게 수행하기 위해서 이것은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는 것은 각 교회에서는 물론 노회나 총회서 확인할 수 있는 일이다. 하나님이 교회에 위탁하신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결정하는 직무를 수행하게 되는 장로가 판단력이 없거나 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의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심각한 문제를 동반할 수밖에 없고, 이것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 전체의 문제가 된다는 점에서 대단히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요소이다. 단지 지도자에게 맹종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세워져서는 안 될 것이라는 이야기다.
다시 말하면 스스로의 판단력을 통해서 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지혜와 의지가 갖추어진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일 때 교회로 하여금 건전한 신앙과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가는 장로로서의 역할이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단순히 사람의 말에 맹종하는 것은 좋은 관계가 유지되거나 성경적으로 바른 상황이 유지 될 때는 더 효과적일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이 만들어지게 되면 심각한 문제를 동반하게 되고 오히려 더 감당할 수 없는 상태가 만들어 질 수 있다. 또한 교회는 스스로 현실적인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만일, 이렇게 된다면 정치적 원리에 있어서 장로주의의 장점을 살릴 수 없는 결과에 이르게 된다. 장로주의가 감독주의와 회중주의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성경적인 정치원리임을 고백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라고 하면 장로주의가 성공적, 효과적인 결과를 얻기 위해서 신중해야 할 것은 성경의 교훈에 따라서 바른 판단력을 가지고 있는 신실한 사람으로 세우지 않으면 안 될 것이고, 교회는 그러한 사람을 만드는 수고를 해야만 한다.
이러한 지도자를 만들고 세우는 일을 통해서 건전한 교회가 만들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의식(意識)이 준비된 자가 아닐 때 장로주의는 생명력을 잃어버릴 것이고, 인간적인 정치력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장로가 가지고 있어야 할 판단의 건전성이란 개인적으로는 성경의 교훈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서는 자세로 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자이어야 한다는 의미이고, 또 한 편으로는 개혁파 교회가 역사적으로 고백하여 내려온 역사적 신앙과 그 기준을 통해서 교회와 신앙의 현상과 문제들을 바르게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무엇을 가르치고 훈련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도 동시에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성경과 교리의 관계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하며 철저하게 공적으로 고백하는 교리에 대해서 확신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장로의 하는 일이 한국교회에서 일반적인 것과 같이 단지 교회의 재정의 집행과 행정상의 일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장로의 본분은 그러한 일이 아니라 신자들의 신앙상태를 살피고 건전한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섬겨 살고, 그것을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격려하고 안내하며 모범을 보이는 일이다.
또한 신앙의 왜곡이나 변질된 요소들이 신자나 교회에 들어오지 않았는지 살피고 바르게 깨달아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기뻐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왜곡된 신앙이나 도덕적으로 타락한 생활을 하는 신자가 있다면 깨닫게 해서 하나님 앞에 돌아오도록 하는 일이다.
이러한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건전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판단력이란 단순한 기능이 아니다. 종합적인 이해와 지혜, 그리고 바른 신앙의 기준에 대한 충분한 의식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따라서 많은 경험도 필요하고 치리회를 통해서 바른 신앙과 건강한 교회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도록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준비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준비가 단시간에 가능한 것이 아니기에 오랜 시간과 성숙한 신앙인격을 가질 수 있도록 훈련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는 장로를 양성하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다.
3) 治理長老의 資格 - ③(2004-11-30)
이어지는 말씀은 내적인 요소라고 하기보다는 외적으로 보여지는 태도에 대해서 교훈하고 있다. 이것은 넓은 의미에서 장로는 주관적인 확신이나 주관적인 면에만 충실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교훈하는 것이다. 온전한 지도자로서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외적인 면, 즉 객관적인 면에서도 인정을 받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개인적으로는 아무리 신실하게 사는 사람이라고 해도 동시에 객관적인 지도력과 신앙과 삶에 있어서 신실하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고 인격적인 덕망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본문에서 제일 먼저 생각하게 하는 말씀은 “아담하며”이다. 이 말은 예의가 바른 자이어야 한다는 말로서 이해할 수 있다. 직역하면 친절하다는 뜻도 담겨있는 말인데, 이것은 이웃과의 관계에서 가져야 할 태도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교훈하는 것이며, 동시에 장로의 삶의 자세가 어떤 것인지를 말씀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의가 바른 자이어야 한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말은 윗사람과의 관계에 국한된 이해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를 전제하는 말이다.
즉, 윗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예의가 있어야 할 것이고, 이웃과의 관계에서는 친절함이 있어야 하며, 아랫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배려와 이해를 통해서 존경을 받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관계를 전제하여 자신의 위치에서 갖추어야 할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 수직적인 관계에서는 확실한 사람이 수평적인 관계에서는 모순된 자세를 가지는 경우가 흔하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나아가서 더 가까운 관계, 즉 가족관계에 있어서도 예의와 질서와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사실을 전제할 때도 예의 바른 모습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다음으로 나오는 말씀이 “나그네를 대접하며”이다. 이것은 장로의 자격을 말하는 가운데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다.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신앙은 자신의 행위로서 표현되는 것인데, 여기서 대표적으로 예를 들고 있는 것이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표현은 대접의 대상이 자신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거나 알고 있는 사람들에 국한되어야 한다는 교훈이 아니다.
오히려 직접적으로 자신과 어떤 관계가 없는 사람들에게 나타내는 사랑까지도 포함하는 교훈이다. 일반적으로 지인(知人)이나 특별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친절할 수 있고, 대접하는 일은 쉽다. 그러나 여기서 교훈하고 있는 것은 전혀 관계가 없거나 모르는 사람에게 베풀어져야 하는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조금 더 넓은 의미에서 대접하는 행위와 자세의 일관성을 말씀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을 구별하거나 차별하여 대하여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신분에 따라서 민족에 따라서, 혹은 혈통이나 피부색깔에 따라서 차별하여 대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실제로 현실에서 보면 여러 가지 이유와 관계를 통해서 차별적인 관계나 대우가 달라지는 것을 경험한다. 교회 안에서조차도 이러한 경우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은 더 많은 인격적인 신앙의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시간적인 의미에서도 일관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시간에 따라서 그 자세와 입장이 바뀌거나 변한다고 하면 대접하는 아름다운 모습은 기대할 수 없다. 언제 만나도 한결같은 모습으로 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교훈이다.
그렇다고 완전한 사람을 요구하거나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의 기분에 따라서 사람을 대하는 것이 달라지거나 주어진 여건에 따라서 달라진다면 그 사람과의 관계는 물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사람이 가지게 되는 자세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는 일이다. 따라서 한결같은 모습과 자세로 이웃을 대하고 하나님을 대할 수 있는 자세를 가지고 있음으로 존경받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장로는 하나님의 통치권을 대행하는 치리회를 구성하는 사람으로서 존경과 신뢰를 받을 수 있어야 하고 그렇기 위해서 가지고 있어야 하는 신앙인격의 한 측면이다.
환경적인 의미에서도 그렇다. 기분에 따라서, 혹은 상황에 따라서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이게 되는데 이러한 자세는 장로로서 가져서는 안 될 일이다. 물론, 누구도 이성과 감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인간이기에 기분과 환경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인격으로 준비되어서 감성과 이성의 기능을 조절할 수 없다면 교회의 지도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다양한 상황에서도 신자들을 이끌어야 하며, 바른 신앙의 자세를 가르쳐주어야 할 사람에게는 냉정하면서도 따뜻함을 잃지 않는 그런 일관성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일관됨이란 단순히 냉정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을 나타냄에 있어서 일관됨을 말하고, 모든 사람과의 관계에서 언제나 변함이 없는 친절한 자세를 요구하는 것이다. 일관성을 말하다가 보면 차갑다는 소리를 듣게 되든지 융통성이 없다는 조금은 답답한 느낌을 가지게 하는 모습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진리가 변할 수 없는 것처럼 사랑이 진실한 것이라면 변할 수 없는 것이고, 어떤 상황에서도 일관된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
하지만 현실에 있어서 경험하게 되는 것은 환경과 상황에 따라서 달라질 수밖에 없는 모습이다. 따라서 교회의 장로로서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큰 신앙인격으로 자신의 신앙을 담아낼 수 있는 준비가 필요하다. 이렇게 인격이 준비되지 않았을 때 장로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많은 부작용과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 아버지가 가지고 있어야 하는 마음과 같은 준비된 인격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배려의 깊은 뜻을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
이어서 생각하게 하는 말씀은 “가르치기를 잘하며”이다. 이 말씀은 앞에서 언급했던 요소와는 다른 면을 교훈하고 있다. 이제까지 언급했던 것은 정적(情的)인 면에 속한 요소들이라면 여기서는 이성적인 면을 교훈하고 있다. 즉, 이것을 연결하여 이해하면 장로는 그 직무를 감당함에 있어서 인격적인 균형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지 정적인 면에 매이게 되면 판단을 그르치게 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지도자는 바른 교훈에 대한 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혜를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를 구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치리회의 권위를 확보할 수 있다. 장로주의(개혁파신앙을 채택한 교회)의 치리회는 단순히 직분이나 자리를 통한 권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고, 그 말씀에 일치하는 가르침과 삶을 자기 안에 가짐으로서 권위를 확보할 수 있는 원리를 주장한다.
물론, 여기서 직접적으로 교훈하고 있는 것은 가르치는 일을 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고 있다. 이것은 장로의 직무가 신자들을 바른 신앙과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하고 관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잘 가르칠 수 있는 준비가 없이는 그 직무를 온전히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잘 가르친다는 것은 단순히 말을 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가르칠 수 있기 위해서 간직하고 있어야 하는 많은 지식이 준비되어서 바른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하고, 주어진 상황에서 성경의 가르침을 바르게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교회를 치리하는 장로가 장로로서의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충분하고 바른 이해를 할 수 있어야만 한다. 이것을 장로교회에서는 교리로 표현한다. 단어적인 의미에서 교리와 성경은 다르다. 하지만 교리란 성경의 요약이라는 차원에서 성경신앙을 말한다. 여기서 장로는 교리에 대한 바르고 충분한 이해가 필요하며, 그것을 통해서 신자들의 생활과 신앙을 지도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지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만일, 이러한 지혜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장로는 자신의 직무를 충분히 감당하지 못하게 된다.
교회가 공적으로 고백하고 있는 신앙을 충분하고 바르게 이해하고 그것을 통해서 신자들을 지도할 수 있는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이고, 이것은 장로의 자격을 말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3) 治理長老의 資格 - ④(2004-11-30)
이어지는 치리장로의 자격은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내용들이다. 즉, 앞에서 언급한 내용들은 “해야만 하는 것”들로 표현된 자격이라면 디모데전저 3장 3절부터 언급하고 있는 내용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것”들로 표현되는 자격을 교훈하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 장로들이 “하지 말아야 하는 것”들이 어떤 것들로 교훈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제일 먼저 나오는 “술을 즐기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이것은 한국교회의 경우 금주금연과 관련해서 반복되는 문제 가운데 하나다. 실제로 한국교회를 형성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초기선교사들로부터 경건한 삶을 중요시하는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한국교회에는 여전히 금주와 금연문제는 신자의 도리로 고백을 요구하고 있다. 세례를 받을 때 이미 문답에서 이 고백을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그러한 고백을 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 것은 신자의 의무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세례받은 신자가 후에 얼마나 중요하게 자신의 고백에 대해서 의식하고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술을 즐기지 말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즐기지 않으면 된다는 논리로 먹어야겠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 현실이니 한국교회가 금주와 금연을 세례와 입교를 위한 고백으로 요구하고 있지만 아무런 의식이 없이 행동하는 신자들이 많은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는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이 말씀은 문자적으로 즐기지 않으면 된다는 해석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말씀은 오히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배제하는 자세를 가지지 말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로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기뻐하는 위치에 있다. 즉,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여기서 즐거워한다는 것은 기뻐하는 것은 물론이고, 모든 가치의 기준을 하나님께 둔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동시에 인격이신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궁극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의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인간이 하나님이 아닌 어떤 물질(돈, 마약, 담배, 술, 혹은 세속적 권력 등)을 의지하거나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위치에 있는 인간의 존엄성을 스스로 포기하거나 제한하는 것이 된다. 그렇게 될 때 의도적이 아니라 해도 인간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를 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즉, 인격이신 하나님께 인격을 가지고 서는 자세가 하나님 앞에 바른 인간의 태도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술이나 또 다른 물질에 의존하는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비인격적인 인간의 자세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만일 어려움이 있다면 어려움 그대로, 고통과 슬픔이 있다면 그것 그대로의 모습과 감정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는 자세가 필요하고, 그러한 자세로 하나님의 지혜와 인도하심을 구할 수 있는 순수한 자세가 하나님이 차라리 기뻐하시는 모습인 것이다. 어차피 인간 스스로 완전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을 인정한다면 하나님 앞에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가지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세인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환경의 지배 하에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현실이기에 쉽게 물질적인 의존심에 유혹을 받게 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으로서 특히 교회의 장로로서 직무를 수행할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대할 수 있고, 자신을 하나님 앞에 분명한 의식(意識)을 가지고 설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기본자세이다.
다음은 “구타하지 아니하며”라는 말씀에 주목하게 된다. 여기서 “구타”라는 말은 [violate]라고 번역되는데 이것은 단지 ‘폭행하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욕보이다’ ‘더럽히다’ ‘모독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구타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약한 자를 물리적으로 폭행하는 것을 금하는 것은 물론이고, 정신적 인격적으로도 욕보이거나 모독하는 폭행도 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다. 일반적으로 물리적인 폭행에 대해서는 의식을 하는 반면에 정신적인 폭행에 대해서는 주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주지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실제로 장로로서 갖추어야 할 요소 가운데 현실적으로 중요하다. 신자의 인격이란 거듭난 인격이어야 한다. 그런데, 신자로서 고백을 한 다음에도 왕년이라는 말로 대신할 수 있는 과거에 자신이 행했던 폭력적 행위를 자랑하거나 은근히 위협적인 과시까지 하는 경우들을 교회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적어도 그러한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거듭난 신자의 참된 모습일 것이다.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은 과거에 어떤 모습이었든 그것은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장사지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떠한 상황이라고 해도 폭력은 치명적 인격적 결격사유일 뿐이다. 특히 교회 안에서의 폭력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장로는 언어적, 정신적, 물리적 등의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되며, 자신의 인격적인 요소에서 순화되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이 성화의 과정을 살아가는 인생의 여정이고, 이 땅에서 교회를 통해서 성장해 가는 과정인 것이다. 따라서 신자는 교회생활을 통해서 성숙해 가는 과정을 사는 것이다. 그런데, 장로란 그 회중들 가운데서 가장 신앙적인 연륜이 있기도 하고 신자들에서 본이 되어야 하는 위치에 있는 자로서 성화된 인격을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폭력이란 음주와 관련을 가지는데 음주라는 의미를 단지 술에 취하는 것에 국한하지 않고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자신의 인격적인 통제를 스스로 하지 못하고 물질을 의지하든, 사람을 의지하든 하나님이 아닌 것에 의존해서 행동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통치하심에 순종하지 않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에 폭력은 절대도 버려야 할 요소이다.
다음으로 장로가 갖추어야 할 요소는 “오직 관용하며”(but gentle)이다. 3절에서 찾을 수 있는 장로가 갖추어야 할 요소를 교훈하는 가운데 긍정문으로 표현된 것은 이것이 유일하다. 모두 “하지 아니하며”라는 부정문으로 교훈하고 있는 반면 이것만은 “하라”는 긍정문으로 되어있다. 그 만큼 이 교훈은 장로가 적극적으로 가지고 있어야 하는 요소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면 관용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진리를 불의나 세속적인 것과 타협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진리 안에서 자신의 권리를 기쁨으로 포기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고전 6:7). 자신의 권리를 포기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있는 인격이라면 연약하거나 부족한 사람들도 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그 능력은 교회를 통솔해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할 것이다.
특히, 교회의 지도자는 철저하게 자신의 권리를 양보하거나 때로는 포기할 수 있을 때 존경받을 수 있는 위치를 확보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교회는 물리적인 구속력이 있는 권위를 가지고 통솔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고백적 동의에 의한 순종이 통치의 권위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장로는 신자들의 한계는 물론 연약함을 담당할 수 있는 성숙한 인격과 신앙적인 의식이 준비되어있어야 한다. 치리권을 가진 장로는 단지 권위를 행사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오히려 그 권위는 사랑으로 담아내어 베풀 수 있어야 하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되 말씀과 하나님 앞에 스스로 설 수 있도록 격려하는 직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장로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분내지 않으며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는 인격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교훈하고 있다.
이종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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