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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자료] ]고대 이스라엘 역사 개괄

작성자넓은가슴|작성시간11.07.18|조회수529 목록 댓글 0
고대 이스라엘 역사 개괄

족장 시대, 출애굽 시대, 가나안 정복 시대, 사사시대, 왕국시대로 누어 각 시대의 중요한 사건과 신학적 의미를 규명한다.
구약 성경에 나타난 역사는 동시대에 쓰여진 역사가 아니다. 역사가 어떤 시대에 쓰여졌냐에 따라 여사 서술 방법이 달라진다. 성경이 어떤 시대적 배경에 따라 쓰여졌냐? 기록된 역사가 역사의 전부가 아니라 기록된 역사 보다 감추어진 역사가 더 많다. 그리고 그 많은 시대, 그 많은 사건들을 다 쓴 것이 아니고 하나의 중심 주제를 가지고 하나의 맥으로 성경이 서술되고 있는데 이번 학기에는 왜 그렇게 했는지? 나아가서는 이 사건들은 왜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보도하지 않고 있을까?(역사적 관점의 차이이다) 등에 대해서 배우고자 한다. 이것은 역사를 왜곡하자는 것이 아니라 숨겨진 역사를 밝혀 보려는 학문적 연구임을 밝혀둔다.

1. 자료들 (이스라엘 역사를 공부하는데 필요한 자료들) - 이스라엘 역사를 위해서 문헌 자료와 고고학적 자료의 도움이 필요하다. 문헌자료가 더 직접적이고 살아있는 자료를 제공하지만 고고학적 자료는 문헌자료들을 보충, 설명하는 역할을 한다.

a.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자료는 구약성서이다. 그러나 우리가 구약 성서를 읽으며 겪는 어려움이 있다. 그것은 구약 성서가 실제적 사건 자체를 객관적으로 보도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지 않고 구약은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신학적 증언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으며 만나는 것이 실제 사건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신학적 사건을 만나는 것이다. 구약은 일어난 역사(history)가 아니라 해석된 역사(geschchite)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다시말해 성경은 일어난 역사 그대로를 서술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일어난 역사이 해석이 들어가 있다는 것이 구약의 독특한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실제 역사는 성서의 기록 속에 숨어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의 왕들 중에서 다윗과 사울에 대한 증언에 있어서 성경은 다윗을 훌륭한 왕으로 사울은 실패한 왕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런 평가는 신학적 평가이지 정치적 평가는 아니다. 그러면 다윗은 정말 아무런 실패도 없었고, 사울은 정말 긍정적인 부분이 하나도 없었냐하면 그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사울은 훌륭한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한 왕으로, 다윗은 부정적인 부분이 있으면서도 훌륭한 왕으로 기록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어려움에 빠진 역사가들이 이 방법에 대한 해답으로 BC1000-500년 사이에 많이 적용했던 신학적 해석 방법으로 전승에서 그들의 종말에서부터 거슬러 올라가서 해석된 역사를 취해서 성경을 기록하였다. 즉 사울은 종말에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여기에서 다윗은 하나님이 함께 하셨고, 사울은 하나님이 버리셨다는 것으로 역사를 해석하여 기술하였다.-다시 조사해보자)

b. 고대 근동의 여러 문헌들은 이스라엘 역사를 보충해 준다.
-애굽, 바벨론, 앗시리아, 페르시아 등 이스라엘 역사와 맥을 같이한 시대에 나온 문헌들을 말하는데 문헌이란 책 뿐만 아니라 외교문서, 석비, 보고서, 전쟁 승전비 등도 포함된다. 하나의 예로 성경에는 시삭이 예루살렘에 쳐들어온 이야기만 나오는데 다른 고대 근동 문헌에는 시삭이 예루살렘에 쳐들어와서 뺏어간 것까지가 나오고 있다.

c. 고고학적 자료들은 다양한 정보를 제공한다. 그러나 고고학적 자료들이 항상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는 것이 아님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예를 들어 성경에서는 여리고 성이 여호수아가 함락시킨 것으로 나오지만 고고학적 탐구는 여호수아 시대 이전에 여리고 성은 이미 무너져 있었다고 한다. 또한 아이성도 여호수아 시대에 나오는데 고고학적 자료에서 여호수아 시대 이전 수백년 이래로 사람이 살지 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데 고고학적 연구 결과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면 성경은 왜 이렇게 여호수아의 인도에 의해 멸망된 성이라 해석하고 있냐? (이러한 딜레마를 풀어야 성경을 믿을 수 있을텐데 이것은 우리의 고민의 결과물로 나와야 한다.)
일어난 역사와 해석된 역사의 차이를 성경기자는 분명히 알고 있었을텐데 왜 여호수아 시대와 결부시켰을까? 과거를 바라보는 해석- 성경 기자들이 무엇을 기초해서 풀어가는지 알아야된다. 이 소설같은 역사적 허구와 같은 이야기가 성경에서 해석된 역사로 기록되고 있나 알아야 한다. 이것에 대해 보수주의자들은 일어난 역사와 해석된 역사를 같다고 본다.
cf)햇빛은 프리즘을 통해 7가지 색이 나온다. 성경이 프리즘 역할을 하는 것이다. 프리즘을 통해서 역사를 조명해 보는 것이다.

1.1 문헌 자료들
구약은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안으로부터의 자료라고 정의할 수 있다. 반면에 고대 근동의 자료들(문헌, 고고학적 자료 등)은 밖으로부터의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밖으로부터의 자료는 직접적 자료와 간접적 자료로 분류할 수 있다. 직접적 자료란 이스라엘 역사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자료들로 사건과 관련된 외교 문서, 승전 기념물, 침략 보고서 등을 말한다. 간접적 자료란 역사적 사실과 관련되지는 않지만 생활 풍습, 종교적 풍습, 사고 방식 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자료들을 말한다.

a) 이집트
기원전(이후 생략) 3000년 경부터 문헌 자료들이 풍부하게 기록되기 시작했으며, 이스라엘 역사와 관련된 자료들은 2000년 경 이후부터 쓰여지기 시작했다. 이스라엘 역사는 빨라야 1200년인데 이스라엘 나라가 팔레스틴 땅(가나안 사람)에서 국가를 이루기전 애굽이 가나안 사람을 어떻게 통치했는지 등의 자료를 볼 수 있다.

① 웬 아문(Wenamun)의 여행보도 - 애굽의 21대 왕조인 1076년 경에 쓰여진 것으로 추측된 다. 웬아문은 AD 1891년 러시아 사람 골레니쉐프(Golenischef)에 의해 발견되어 지금 은 러시아 박물관에 보관되어있다. 내용은 웬아문이 신전을 세우기 위해 사용될 목재 를 찾으려고 여행을 다니며 쓴 글로 여기에는 팔레스틴 지역의 지형, 풍습등이 기록되 어 있다. (자세한 내용은 <고대근동의 역사와 종교>를 참조할 것)

② 아멘-엠-오페(Amen-em-ope)라는 지혜문헌 - 우리 잠언 22장 17절에서 24장 22절의 내용 과 유사한 형태이다. 아멘-엠-오페는 30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용에 있어서 우리의 잠언과 유사하여 잠언이 아멘-엠-오페를 참조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③ 아톤에게 보내는 찬송(The Hymn to the Aton) - 아톤은 태양신의 이름으로 이 문헌은 태 양신 찬송가라고 할 수 있다. 기원전 14세기에 기록되었으며 우리 성경에서는 시편 104편의 내용과 형식이 유사하다. 추측키로 시편 104편은 아톤에게 보내는 찬송이라는 애굽의 문헌을 상당 부분 참조했을 가능성이 많다.

④ 시삭의 질의 목록표(Sishak's geograpical) - 시삭은 애굽왕의 이름으로 이 문헌은 10세 기에 나온 문헌이다. 시삭이 이스라엘 왕국 초기에 남쪽 르호보암, 북쪽 여로보암의 시대에 이스라엘을 침범한 다음 가져갔던 물건들에 대한 리스트이다. 또 여기에는 그 당시 정복했던 도시들의 리스트도 기록되어 있다. 성경 왕상 14장 25절에서 26절에 보 면 두절에 걸쳐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시삭 목록표를 보면 그 당시 큰 피해가 있 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⑤ 두 형제 이야기(Tale
애굽의 19대 왕조인 1225년 작품으로 성경의 요셉이야기와 매우 유사하다. 두 형제 이 야기에서 동생은 매우 양심적인 청년으로 나오고 형의 아내 형수가 동생의 외모에 반 해 유혹을 했으나 동생이 형수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어떤 부 분에서는 동일하지 않지만 전체적인 흐름이 비슷한 것을 알 수 있다.
- - - 지금까지 것들이 이스라엘 역사와 이스라엘 문헌에 직접, 간접적 영향을 준 문헌들이다.

b) 메소포타미아 - 이스라엘 역사와 관련하여 우리에게 더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메소의 뜻은 사이에, 포타미아의 뜻은 두 강(티그리스, 유프라테스)이란 뜻인데 메소포타미아는 두 강 사이에 있는 비옥한 지역을 말한다. 지금의 이란, 이라크인 이 지역은 고대에는 세계의 문명을 탄생시킨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수메르, 아카드, 바벨론, 앗시리아, 페르시아 등 강대국들이 탄생된 지역이 바로 메소포타미아 지역이었다.

① 에블라 토서판(Ebla Tablets) - 수메르어로 기록된 문헌으로 3000년경 중반에 기록된 문 헌으로 수 천 개의 상업, 법률 문서이다. 우리에게 족장 시대 이전 고대 근동 사람들 이 살았던 정치, 문화적 정보를 제공하는데 좋은 역할을 한다.
cf> 토서판: 강이 범람하니까 진흙이 풍부하여 진흙을 이용한 기록이 사용되었다.

② 에누마 엘리쉬(Enuma Elish) - 3500년경에 쓰여진 문헌으로 7개의 서판으로 된 수메르 사람들이 가진 창조서사시를 기록한 것이다. 창세기 1장과의 깊은 관련성이 있는 문헌

③ 길가메쉬 서사시(Gilgamesh ipos) - 3000년경 문헌으로 수메르 사람들의 홍수설화이다.

④ 함무라비 법전(Hammurabi Code) - 중요한 발굴 문헌이라 할 수 있는데 18세기 정확히 1728년부터 1686년 43년간에 바벨론을 통치한 함무라비 왕이 공포한 법을 기록한 문헌 이다. 1901년에서 1902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에 프랑스 고고학자들에 의해 수사성에서 발견된 것으로 지금은 파리의 루우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282개의 법조문으로 되어있으며 모세 5경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차이점은 함무라비 법전의 282개의 법조문이 모두 다 “만일(if)...한다면”으로 시작된다면 성경에는 함무라비 법 전과 동일한 법조문(만일...한다면)과 이스라엘 유목민적 전통 속에서 나온 법조문인 “...하는 자는...에 처한다.”는 식의 법조문이 사용되었다는 점이며 이러한 점이 구약 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⑤ 누지 토서판(Nusi Tablets) - 2000년대 중반에 나온 문헌으로 여기에는 아들이 없는 경 우 노예를 양자로 삼는 권한이나 장자권을 파는 관습 등이 나온다.

⑥ 사르곤 전설 - 2300년 경의 것으로 추정되며 모세 이야기와 매우 유사하다. 갈대 상자의 모세를 공주가 건져서 성장한다는 내용이 유사한다. 사르곤은 아카드를 건설한 초대왕 이다.

c) 시리아와 팔레스틴 - 애굽이나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굴된 문헌들보다 비교적 적다.
cf> '팔레스틴‘이란 블레셋(philistor) 사람들의 땅이란 뜻으로 그들의 후예는 지금의 팔레스틴 난민들이다. 이 명칭은 로마시대부터 사용된 명칭이며 그 이전에는 586년 이스라엘이 망한 다음 주인없는 땅으로 유대땅이라 불렸다. AD 70년 유대전쟁으로 이곳이 로마에 의해 초토화된 이후 로마인들이 블레셋 사람들의 땅이라 명명한 것이다.

① 아마르나 서신(Amarna Letters) - 14세기 경에 나온 문헌으로 추측된다. 아마르나 서신 은 이집트 사람들이 한동안 가나안 사람들을 지배할 때 애굽왕과 가나안의 봉건 제후 사이에 오고간 편지들로 약 400여개의 토판이 발견되었다. 기원 후 1887년에 한 가나 안의 농부가 땅을 일구다가 우연히 발견하였다. 아마르나 서신이 주는 의미는 당시 가나안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나 정치, 종교, 문화적 상황들을 전해준다는 것이다.(아 직 가나안에 국가가 건설되기 전이다.)

②엘레판틴 파피루스(Elephantin Papyri) - 사람들 사이에 맺었던 경제 계약서와 편지로 구 성되어 있다. BC 5세기 후반(이스라엘이 완전히 멸망한 후)에 나온 문헌으로 포로기 (586년) 바벨론에 멸망된 후 남부 애굽지역(가나안 가장 끝 지역)으로 도망가서 살던 유대인의 삶을 전해주고 있다.

1.2 고고학적 자료들
고고학이 현재 남아있는 고대의 유물을 연구하는 학문인 반면 성서 고고학은 고고학의 일부로 성서 본문과 성서 시대의 배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분야라고 할 수 있다. 성서 고고학이란 성서와 관련된 땅에서 성서 본문과 관련있는 모든 자료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러나 성서 고고학은 성경의 내용을 증명하려는 학문이 아니라 성경의 내용을 올바르게 이해하느데 도움을 주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증명되지 않는 부분이 많고 성경과 서로 일치되지 않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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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f. 성서 고고학은 그렇게 오래되지 않은 학문이며, 방대한 연구 분야이다. 건축, 미술, 문화, 역사, 종교, 철학 등과 관련되어 있어 고고학 연구를 위해서는 엄청난 비용이 소요된다. 성서와 관련된 땅만 보더라도 팔레스틴, 애굽, 시리아, 레바논, 페르시아, 바벨론, 앗시리아, 그리스, 로마 등 엄청나게 많고 다양한 분야와 연결되기 때문에 굉장히 어려운 학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역사를 보존하는 나라는 선진국이며 후진국은 그 반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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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고고학의 출발은 799년 나폴레옹이 애굽을 점령하면서부터 성서 고고학에 대한 관심이 생겨났다. 나폴레옹이 애굽을 점령한 이후 고대 근동 유적에 대한 탐사와 발굴이 시작되었고 이스라엘지역(팔레스틴)에 대한 성서 고고학적 연구는 1890년 페트리(W.M.F.Petrie)가 Tell el Hessy(텔 엘 헤시:계곡) 지역을 발굴하면서부터 관심이 증폭되었다, 그러던 것이 미국이 손을 대면서 성서 고고학적 발굴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대표학자로는 알브라이트(W.F.Albright), 알트(A.Alt), K.갈링(K.Galling), 아하로니(이스라엘 사람으로 굉장히 유명한 사람이다-Aharonie) 등인데 이들이 서로 합작하면서 성서 고고학이 눈부신 발전을 하면서 1920-30년대 황금기를 맞이하면서 성서고고학에 관한 학문이 꽃을 피웠다. 이러한 연구 결과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를 제공하는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그 중에서 BC 1220년 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애굽의 왕 메르넵타 왕의 비문이 있는데 여기 비문에 문헌으로서는 최초로 “이스라엘”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어떻게 탄생되었고, 언제부터 생겼나? 등에 관한 문제는 베일에 가려져 있다. 애굽의 문헌에서 출애굽 이야기에 관한 기록을 살펴볼 때 이스라엘이라는 단어를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여타의 물음들에 대해 고고학적 유물로부터 많은 부분 도움을 받지만 아직도 미진한 부분이 많다.

1.3 고대 근동의 역사적 상황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역사는 독립적 역사가 될 수 없다. 고대 근동의 역사 속에 들어있다고 할 수 있다. 고대 근동의 국가들이 강성하면 이스라엘은 약할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고대근동의 국가들이 약하면 이스라엘은 강성했다. 다윗, 솔로몬 왕이 강대국을 만든 것도 이러한 관계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고대 근동 세력의 공백기일 때 이스라엘이란 나라가 탄생되었고 또한 가장 융성한 나라가 될 수 있었다. 즉, 이스라엘의 역사와 국가의 운명은 주변 국가들의 흥망성쇠에 의해 좌우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a. 이집트
이집트의 특징은 지형이 폐쇄적 지형이라는 것이다. 바다(지중해)와 사막(사하라와 리비아 사막)으로 둘러싸인 폐쇄적 지형을 갖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 역사는 오랫동안 통일국가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정권이 바뀌지만 애굽이라는 단일 국가를 유지하였다. 그들의 종교는 다신론이지만 최고신은 태양신이다. 그들의 사상은 영혼 불멸 사상을 갖고 있는데 미이라, 스핑크스, 피라미드가 이러한 사상 때문에 잉태된 문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영혼불멸 사상은 이스라엘에도 많은 영향을 미쳐 바리새인은 영혼불멸이 있음을 믿어 부활을 믿었음을 성경에서 볼 수 있다. 이들의 정치는 신정정치(정치종교하나)로 바로는 왕이면서도 동시에 태양신의 아들로, 신적 존재로 간주되었다.
문화적으로는 태양력, 그림문자를 사용하여 문화를 전달하였다. 파피루스 나일강 늪지대에서 나온 풀을 이용한 문헌을 전달하였다. 문자와 관련하여 세계 최초로 태양년(태양력-1년을 12부분으로 나눈 후 1달을 30일씩 나누고 매년 5일의 여유를 두었다.)을 발견하였는데 여기에서 고대 애굽인들이 자연 과학에 많은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의 종교적 공헌도 살펴보면 신을 위한 제단, 성상(聖像), 사원(신전)을 최초로 세운 민족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돌에 동물의 형상을 만든 것도 세계 최초이다.

ꂎ 이집트의 역사
후기 이집트의 제사장 마네토(Manetho)는 이집트의 역사를 30개의 왕조로 체계화 시켰다.
① 고대 왕국 시대 (1왕조~6왕조까지 : 2850~2200년)
② 제 1 왕국 시대 (7왕조~10왕조까지 : 2200~2050년)
③ 중간 왕국 시대 (11왕조~13왕조까지 : 2050~1780년)
④ 제 2 중간 왕국 시대 (일명 힉소스시대로 14왕조~17왕조 : 1780~1570년)
이 시기는 애굽의 예외적인 시기로 애굽인이 아닌 셈족(외국인)이 애굽을 지배한 시기이 다. 또한 셈족이 가나안을 지배한 시기이기도 하다.
⑤ 신 왕국 시대 (18왕조~20왕조까지 : 1570~1085년)
우리 이스라엘 역사는 이 시대와 아주 밀접한 시대이다. 이 시대는 힉소스 시대가 마감 된 시대이다. 힉소스 족을 물리치고 애굽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으며 힉소스 족들이 가나 안을 지배했던 세력을 그대로 지배, 점령, 유지한다. 가나안 점령한 때는 1200년까지만 이다.
(cf. 이스라엘 1200년 경 탄생)
-신왕국 시대 왕들 중에서 성경과 직, 간접적으로 연관되는 왕
* 19대 왕조 中 세토스 1세(1308~1270)
람세스 2세(1290~1223)
메르넵타 (1223~12100)
* 20대 왕조 中 람세스 3세 (1197~1165)
→ 출애굽기 1장에 보면 비돔과 라암셋 성을 건축하는 이야기가 나오는 데 라암셋은 람세스 라는 왕의 이름을 따서 성을 건축한 것인데 여기에 나오는 람세스가 19대 왕조의 람세스 2세인지 20대 왕조의 람세스 3세인지는 확실치 않다. 이처럼 출애굽과 관련해서 신왕국 시대는 성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람세스 3세 이후에는 애굽은 가나안 땅에 대한 지배령을 완전히 상실한다. 왜냐하면 람 세스 3세를 즈음해서 해양 민족들이 애굽을 침입하여 괴롭힘으로 애굽의 힘이 약화되었 기 때문이다. 여기에 일조한 사람들이 바로 블레셋 사람들이다.
⑥ 후기 왕국 시대 (21왕조~30왕조까지 : 1085~332년까지)

b. 메소포타미아
특징은 개방형이라는 것이고, 도시 국가를 형성하고 있다.

1) 수메르(Sumer) : 3500~1950년까지의 국가이다.
① 문자의 발견 : 세계 최초의 문자인 쐐기문자(설형문자-못처럼 생긴 글자라 쐐기문자라 지음)를 발견하여 사용하게 됨으로 그림문자의 시대를 마감하였다.
② 역사 시대(historic period)의 출발 : 이 문자로 법, 역사, 문화를 기록하기 시작하였 고, 이것을 역사시대의 출발이라고 이야기한다. 그 이전까지는 선사시대(prehistoric period)라고 한다.
③ 농사와 관련된 첨성술 : 농사를 지어야 하니까 천체 돌아가는데 관심이 많았다.
60진법, 태음력을 사용하였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달의 움직임과 관련된 태음력의 영 향을 많이 받았다. 이스라엘 절기가 다 달의 움직임과 관련이 있다.-월삭: 첫 번째 달 뜨는 날)

2) 아카드와 바벨론
ㄱ. 아카드(Akkad) : 수메르에 비해 크게 중요성을 갖고 있지는 않다.
2360~2180년까지의 국가로 셈족계통이다. 아카드어는 셈족어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셈족에 속한다. 아카드어는 가장 오랜 셈족어이고 셈족어의 원형으로 알려져 있다. 아카드 제국의 창시자는 사르곤으로 대왕국을 건설하였다. 사르곤은 성경의 모세 이야기 모티브와 관련이 있다. 아카드족들은 유목민들로 아모리족으로 간주된다.

ㄴ. 고대 바벨론 : 1830~1550년까지의 국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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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f. 신 바벨론 (626~539) : 남왕국을 멸망시킨 나라로 이스라엘 역사와 관련된 나라이다. 신바벨론은 페르시아 왕 고레스에 의해 539년 망한다. 페르시아 고레스 왕은 538년 고레스 칙령을 내려 바벨론 시대나 그 이전 앗시리아 때 잡혀온 나라들의 포로들을 다 귀환시키는 정책을 폈다. 식민지 나라의 종교, 문화 등을 인정해주는 유화정책을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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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바벨론은 셈족 계통의 사람들이다.
① 세계 최초의 성문법을 공포했다는데 의의가 있다. - 함무라비 법전을 말하는데 1728년부 터 1686년까지 제국을 통치한 함무라비는 바벨론에 가장 역사적인 공헌을 한 왕이다.
② 동태 복수법 - 똑같은 방법으로 복수하라는 의미의 이 법의 의미는 인류애적인 법이며 사회질서 유지를 위해 공헌한 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법은 특히 유목민적 그룹에게 는 상당히 영향을 미쳤으며 유목민적 문화의 종족 보존을 위해 공헌한 법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농경민들은 정착 민족이며 만약 이웃이 자기 집의 개를 훔쳤다면 가서 이웃 집의 소를 가져왔을지라도 계속 보는 얼굴이므로 뭔가 꺼림직하므로 복수의 범위 를 크게 넘을 수 없겠지만, 유목민들은 떠돌아 다니기 때문에 누군가가 만약 자기 아 버지를 죽였을 때 동태 복수법을 적용한다면 상대의 아버지만 죽이면 되지만 이 법이 없다면 아마 복수로 상대의 일가를 몰살 시키고 또 떠돌아 다니면 되기 때문에 복수의 선을 넘어 버릴 수 있는데 이 법이 있기 때문에 사회 질서 유지를 할 수 있었다.

3) 힛타이트 제국 (지금의 터키지역) : 1800년~1200년까지 있었던 제국이다.
① 인도 게르만족- 동양적인 민족으로 1400년부터 1200년에 융성한 제국으로 형성 시킨 것 이다.
② 고대 바벨론을 정복(1550년)했다는 사실이 역사적 의의이며 오리엔트 문명(고대 근동 문 명)에 최초로 철기 문명을 가져오는데 공헌을 한 종족이다. 바벨론 철기 문화가 블레셋 사람들에게 전수 되었고 이것이 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전수되었다. 성경의 사무엘상에 서 사사시대에 철공(철기 농기구)을 빌리거나 벼리기(날카롭게 갈다) 위해 이스라엘 사 람들이 블레셋 사람에게 가는 부분이 있다.
* 왕들 中 샤트 쉴리쉬 1세가 1550년에 바벨론 제국을 정복한 왕으로 전해지고 있다
* 샤트 쉴리쉬 3세는 1280년에 애굽의 람세스 2세와 평화 조약을 체결하여 전쟁을 하지 않 기로 약속한다. 이러한 공백기를 이용하여 평화지대에 블레셋이 들어와서 5개의 도시 국 가를 형성하게 되고 이스라엘도 이 때 들어온다.
* 힛타이트 제국은 1200년에 해양 민족(블레셋+프리거+미저 등이 연합공격)의 침입을 받아 서 멸망한다.
* 구약에서는 힛타이트는 헷족속으로 나온다.
-창25:10 아브라함이 헷족속으로부터 막벨라 굴을 구입함
-창27:46 이삭의 부인 리브가가 야곱이 결혼할 때 헷족속의 여인과 결혼할 수 없다고 반대 하는 부분이 나온다.
-다윗의 시대(헷제국이 없어진 시대)의 우리아도 헷족속 사람이다.

ꂎ 힛타이트 제국의 의미
① 1200년경 애굽과 힛타이트의 평화 조약을 통해 팔레스틴 지역의 정치적인 공백기를 만들 어 주었다.
② 이 기회를 이용하여 아람족들(암몬, 모압, 에돔, 이스라엘은 같은 종족이다. 신26:5절에 보면 내-이스라엘-조상은 유리하는 아람인이라는 부분이 나옴을 볼 수 있다.)은 팔레스 틴 땅에 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다. 아람족은 셈족 안에 들어간다.

4) 앗수르제국
* 고대 앗수르 1749년-1300년
* 중간 앗수르 1300년-900년
* 신 앗수르 900년-612년
-고대와 중간 앗수르 시기는 명맥만 유지하고 역사적 역할은 크게 없다. 이스라엘 역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시기는 신 앗수르시기이다.

ꂎ 앗수르 제국의 역사적 의미
① 최초로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통일한 제국이다.
② 722년 북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701년 남 유다를 봉신국으로 만들었다.
701년 대침입사건 때 예루살렘이 무너지지 않았는데 성경에는 앗수르 군대가 갑자기 퇴 각한 이유를 하나님의 천사가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여 그들이 자기들끼리 전쟁을 한 것 으로 나오는데 역사적으로 풀면 그때가 우기 때이므로 전염병(페스트일 것이라 추정)이 퍼져서 퇴각했다고 본다. 이때부터 예루살렘에 대한 평가가 높아지면서 엄청난 앗수르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은 무너지지 않았고,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성이라 는 선택신학, 시온전승이 탄생한 것이다.

c. 시리아와 팔레스틴 : 지역, 정치, 문화, 인종, 종교적으로 매우 다양한 구성체가 존 재했던 지역이라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농경민(가나안사람들)도 있었고 유목민(아람족- 이스라엘, 암몬, 모압, 에돔 등), 해양민족(블레셋)도 시리아와 팔레스틴을 중심으로 있 었다.

1) 가나안 사람들의 이동(3000~1700년으로 추측)
가나안 사람들이 이동하여 거대한 국가를 형성하지는 못했지만 주로 도시 국가를 형성시켰다. 도시 국가를 잠깐 살펴보면(print 참조) 카르케미쉬(Karkemisch), 알레포(Aleppo), 카트나(Qatna), 우가릿(Ugarit-많은 문헌이 발견되었기에 우리에게 많이 소개되었다.), 티루스(Tyrus), 시돈(Sidon), 비블루스(Byblus), 하마트(Hamat), 아워드(Arwad) 등이다.

이런 도시국가 중심으로 가나안 사람들이 살았던 삶을 살펴보면
① 도시국가들 중심으로 도시 중심의 생활을 했던 사람들이다.

② 도시 중심의 생활을 하면서 농경민으로 살았다. 그래서 이들의 대표적 농산물은 곡물(보 리, 밀), 포도, 올리브, 무화과 등을 주로 경작하는 농업 중심의 생활을 하였다.

③ 농업 중심의 생활과 관련하여 종교적 현상이 생겼다. 그것은 가을 신년 축제인데 수확물 가운데 맏물을 바치고 신에게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는 축제가 발달하였다. 가나안인의 이런 종교적 현상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많은 종교적 영향을 끼쳤다. 가나안인들은 가 을 신년 축제를 하면서 자연의 수확과 더불어 임재하는 신의 축복 개념이 발달했으며, 다산을 추구하는 종교 생활을 형성시켰다. 따라서 가나안 인들이 가진 바알 종교의 중요 주제는 다산이며 이것은 자연의 순환, 그리고 그러한 자연의 순환과 더불어 움직이는 신 의 손길 등과 관련하여 그들은 한 해의 결실이 적으면 신에게 저주를 받은 것이라 생각 하였기 때문에 자연의 움직임에 민감한 종교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④ 페니키아인들(북쪽 해양 도시인 두로와 시돈에 사는 사람들을 말한다.)을 중심으로 하여
ⅰ) 농업 이외의 상업(해상무역)도 발달시키며 지중해 해상권을 독점한다. 페니키아인들은 지중해 해상권을 솔로몬시대까지 독점한다. 솔로몬이 국제 무역을 하는데 있어 가장 의 존한 나라가 두로와 시돈임을 성경에서 볼 수 있다.
ⅱ) 유럽에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전수하는 역할도 했다.
ⅲ) 세계 최초로 표음 문자(알파벳)를 사용한 민족이다.
ⅳ) 상업을 중심으로 제 2차 경제 활동을 활발하게 하여 수공업자, 대장장이, 목수, 도공, 직업군인 등 2차 상업에 종사할 수 있는 직종을 탄생시켰다.

즉, 가나안 도시국가는 다양한 형태(농업, 상업, 지중해 해상 무역 등)를 탄생시켰다.
이들 1200년 경 되었을 때 애굽이 팔레스틴 지역에 지배권을 상실하게 되면서 가나안 사람들은 지배를 받지 않고 독자적 정치노선을 걸으며 문화를 형성시킬 수 있는 배경을 갖게 되었다. (cf.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삶, 종교, 문화 등-을 끼친 민족이 가나안 민족이다.)

2) 아람 사람들의 이동(1400~900년경) : 1400년경부터(청동기시대말기) 초원을 떠돌던 많은 유목민들이 농경지로 이동을 시작하였다. 아람 사람들은 두 부분으로 이동하였는데
①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이동한 아람들은 그곳에서 신 바벨론(626-539)을 탄생시켰다. 이 들을 칼데아 사람이라고 한다.
② 시리아, 팔레스틴 지역으로 이동한 아람인들은 암몬, 모압, 에돔, 이스라엘이란 4개의 중요 국가를 건설하였다. (신 26:5f) 이들은 원래 정착 생활을 했던 사람들이 아니라 유 목민들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의 원래 경제적 토대는 토지가 아니라 소규모의 가축이었 다. 이들 방목지를 바꾸면서 이동하는 생활이 삶의 주된 방법이었다. 때문에 대규모보다 는 친족관계 내지는 씨족관계의 소규모의 그룹이 이들에게 의미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하나의 종교 현상으로 “보호, 인도하는 신”이란 개념이 훨씬 강하다. 유목민적 생활한 사람들은 농경민적 생활보다 훨씬 단순한 사회조직을 가지고 있을 수 밖에 없다. 즉, 농경민적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도시 생활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지배자와 피지배 자라는 나름대로의 계급사회를 가졌을 것이지만 유목민들은 항상 이동하기 때문에 대장 만 한 명 있고 나머지는 평등한 입장이다. (이들의 이런 의식이 종교에서도 자유와 평등 을 부르짖기 때문에 이스라엘 야웨 종교의 모태가 된다.) 이런 유목민 들에게 있어서 최 대의 꿈은 땅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유목민적 그룹이 농경민들과 함께 살기 시작하며 유 목민적 그룹이 이 도시 안으로 서서히 침범하여 그들과 평화 공존의 삶을 시작한다.

3) 블레셋 사람들의 이동(1400-1200년 경)
① 크레타(Kreta)섬을 중심으로 해서 활동했던 해양민족인 이들은 다른 해양민족(프리거, 미저 등)과 연합해서 힛타이트 제국을 멸망시킨 사람들이었다. 이들 힛타이트를 멸망시 킨 후 애굽으로 내려갔다. 애굽에 내려간 사람들은 애굽 정착에 실패하고 팔레스틴 남서 부 지역에 정착하며 여기서 다섯 개의 도시 국가(에그론, 아스글론, 아스돗, 가사, 갓) 를 형성시켰다.
② 팔레스틴에 철기 문명을 소개한 사람들이다. 삼상13:19-22절을 보면 철공(철기로 된 농 기구, 무기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이스라엘에는 없었으며 무뎌진 철기구를 날카롭게 하려면 블레셋으로 가야했고, 이 시대에는 철 무기를 사울과 요나단만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③ 블레셋 사람들 애굽이 팔레스틴에서 후퇴한 다음 팔레스틴 전체 지역을 다스리려는 야망 을 가지고 팔레스틴지역에 확대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때 이스라엘은 사사시대이므로 이스 라엘 사람들과 끊임없는 싸움이 일어났다. 이러한 싸움은 사울 시대 초기까지 계속되다 가 다윗시대 이후에 소멸된다. 다윗시대에도 블레셋을 완전히 물리친 것은 아니고 속국 으로 만들었다.
④ 알트(Alt)는 이스라엘의 왕국 탄생의 결정적 공헌을 한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들이라 주 장한다. 지금 대부분의 학자들에게 이 주장이 받아들여진다. “한 나라에 왕국이란 제도 탄생할 때는 원인과 이유가 있다. 이스라엘은 고대 왕국들 중 가장 늦은 왕국을 만들었 다. 그 이유는 무엇이며 또 늦게 탄생되었을 때 왕국으로 발전시킨 주된 원인은 무엇일 까?”에 대한 질문에 알트는 철기 문명을 가진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조여왔기 때 문에 왕국을 건설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즉 이스라엘의 왕국은 내적 원인이 아닌 외적 원인 때문에 탄생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왕국과는 다른 이유이며 인류 역사 상 매우 희귀한 현상중 하나이다.

4) 히브리인의 이동(1400-1200년 경)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의 탄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복잡한 과정을 겪은 후 탄생되었다. 이스라엘이란 국호명은 엘신을 믿는 나라이다. 출애굽 그룹이 처음부터 이스라엘을 탄생시켰다면 이런 명칭이 나올 수 는 없을 것이다. 후발 출애굽 그룹이 정치적 주도권을 잡으며 정치, 종교, 문화를 이끌어가는 중추적 역할을 하며 야웨를 섬기는 국가가 되었을 것이다. 성서를 보면 이스라엘의 탄생이 간단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복잡한 과정을 겪었다. 이스라엘의 탄생은 다른 아람(모압, 암몬, 에돔) 민족보다 훨씬 복잡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탄생에 대한 여러 가지 주장이 많다. 몇 가지를 살펴보면

① 평화이주설/이동설/침투설/정착설- 알트(A.Alt)와 프릿츠(V.Fritz)
성경과는 달리 평화적으로 유목민들이 이주해서 이들을 주축으로 이스라엘을 탄생시켰다 는 주장이다. 이들은 “고대 시리아, 팔레스틴의 역사는 기후의 리듬과 밀접하게 관련된 다.”는 전제를 가지고 평화이주설을 주장하는 것이다. 팔레스틴의 기후는 아열대성 기후 로 여름에는 비가 오지 않는 건조기이므로 물을 찾아 농경지나 다른 목초지를 찾아 떠나 는 시기이지만 겨울에는 비가 오는 우기이므로 목초가 자라서 유목민과 가축들에게 양식 을 제공하므로 머무르는 시기이다. 이렇게 목장을 교환하며 이동하는 것은 매년 반복되 는 날씨와 현상 속에서 계속되었기 때문에 유목민들은 농경지에서 영구히 정착하려는 시 도를 하였다. 유목민들은 농경민들과의 관계에 따라 성공, 실패하면서 좋은 유대 관계나 농경민 세력이 약하면 정착에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정착을 위한 노력들이 계속 되면서 유목민들은 초원에서 농경지로 수백년의 시간에 걸쳐서 정착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평화 이주설이란 주장에서의 특징은 유목민들이 장기간에 걸쳐서 이동하였고, 결혼이나 좋은 유대관계에 의한 평화적인 이주, 자연의 순환과 맞물려 있고, 원주민의 세력에 성패 가 좌우된다는 것이다.

② 전쟁정복설/전쟁침략설- 알브라히트(W.M.Albright)와 카우프만(Y.Kaufmann)의 주장 으로 보수적입장이며 매우 성서적 해석이다.
이 주장의 특징은 전체 히브리인이 출애굽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전쟁을 통해서 그 들을 물리치고 단시간 안에 정착하여 국가를 건설했다는 성경을 토대로 해석한 것이다. 성경에는 60만 대군이 애굽에서 나갔다고 되어있는데 애굽의 어느 문헌에도 이런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역사적 해석은 불가능한 것이 많은 이론이다. 출애굽 그룹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동시에 전체 히브리인이 전쟁 통해 차지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라고 본다.)

③ 혁명설- 최근에 주장된 급진적 이론으로 갓월드(Gattwald)와 멘덴할(Mendenhall)이 주장
이들의 중요한 근거는 “히브리인”이란 단어를 인종, 민족으로 해석하지 않고 사회적 개 념으로 해석했다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하층 개념 노예, 땅이 없는 사람들을 총칭해서 히브리인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히브리인들은 민족이 아니라 고대 근동 전체가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로써 어떤 지 역의 토착민보다 더 낮은 사회적 계층에 속한 무리들을 일컬어서 부르는 말이다. 그리고 원주민이라 할지라도 토지가 없는 사람이나 사회적 권리를 상실한 사람들, 사회적 위치 가 열등한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히브리어- / 수메르어-합피루/ 우가릿어-입브림/ 애굽-푸르/ 아카드어-카삐루” 라는 말로 히브리인을 지칭한 것을 보면 히브리인을 지칭하는 단어는 성경에만 있는 것 이 아니고 고대 근동 지방에 다 나오는 단어이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탄생이 애굽의 노예(히브리인)들과 가나안 땅의 히브리인들이 결탁해 서 가나안의 상층 계급을 끌어내리고 권력을 잡은 것을 이스라엘의 건국으로 본다. 이 것을 일컬어 “내부에서 외부로 향한 운동”이라고 한다. 14세기 경 문서인 애굽 아마르나 서신에 보면 합비루라는 용병이 등장하고 있다. 람세스 2세(1290-1223년 통치)에 관한 문 헌에 보면 히브리인들이 성을 건축하기 위해서 돌을 운반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을 일 컬어 “히브리인”이라 칭하는 구절이 있다. 그래서 히브리인이란 사회적 천시 계급, 약탈 자, 강도떼로 살아야 했던 피지배 계급에 대한 사회적 개념으로 보았다.
-구약에서 히브리인이란 단어는 33번 나오는데 항상 이스라엘 사람들과 동일시 되는 것은 아니다. 동일시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이스라엘사람과 히브리인이 동일시 되지는 않는 다. 몇 몇 경우 이스라엘의 노예를 부를 때 지칭하는 말로 히브리인이란 말로 나오기도 하고,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싸울 때 그들의 사기를 꺽으려고 그들을 무시하는 말 을 할 때 히브리인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ex. 출21:2 / 렘34:9 / 삼상4:6,9 / 삼상13:19 / 삼상14:11,21 등)
이스라엘이란 단어는 2500번 나온다.

- - - -이 세 가지 이론 중 어느 것이 맞다고 할 수는 없지만 평화이주설, 전쟁정복설, 침략설의 이론을 숙고하면 이스라엘 탄생의 윤곽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2. 이스라엘의 전(前)역사- 이스라엘 탄생 이전의 역사를 말한다.
이스라엘 전역사에 대한 자료는 거의 구약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구약 중에서도 5경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자료의 한계가 있다.
이스라엘의 전역사를 다루고 있는 5경은 역사서가 아니기 때문에 5경을 읽을 때 역사로 읽으려고 하면 안된다. 이스라엘 탄생 이전의 역사의 기록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연대기적으로 사실에 가까운 기록을 위해 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의 지침서, 교훈을 주는 토대로써 거룩한 책의 의미가 더 강하다. 그렇다고 5경이 역사를 도외시한 것은 아니다. 역사적 핵심을 내포하며 역사적 신앙고백적 진술을 하고 있는 책으로 5경을 이해해야 한다. 여기에 기초해서 이스라엘의 전역사를 공부해야한다.

ꂎ 모세 5경 속에 있는 중요한 사건 5가지
1)족장들에 대한 이야기 2)출애굽사건 3)광야이야기 4)시내산이야기 5)가나안정복이야기

노트(M.Noth)는
① 원래 5경 내지 6경의 기본 테마가 5가지라고 보았다. (cf.창조이야기는 포로기때 중요한 신학 주제로 떠오른다)
② 5개의 주제들 원래는 서로 독립 전승되던 이야기군들이었다. (우리가 모세 5경을 읽을 때 연대기적 순서로 진해되고 있지만)
③ 구두 전승될 때 서로 다른 지파, 서로 다른 자리(sitz im lebe)를 갖고 있다.
cf. 모세 5경은 BC 400년(포로기 때)에 만들어지는데 그 전까지는 구두 전승되어 왔다. 계층(예언자, 제사장, 평신도 그룹)간에 있어서도 이런 주제들을 바라보는 견해가 다를 수 있다. 이런 수많은 고대인의 역사 이야기를 서로 다른 계층에서 전승시켰다 고 볼 수도 있다.

2.1 족장들에 대한 전승
창12-35장까지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내용을 읽다보면 역사에 대한 관심보다 가족사에 대한 관심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① 족장들의 보도 속에 들어있는 생활 양식은 정착민(농경민)의 생활이 아니라 유목민 내지 는 반유목민의 삶을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cf. 유목민은 낙타를 타고 돌아다니는 민족으로 이동 생활 반경이 훨씬 더 넓고, 반 유 목민은 목장만을 바꾸며 이동하는 민족이다.

② 고대 근동 사람들의 생활상을 많은 부분 반영함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아들이 없는 경우 아들 대신 노예에게 재산을 상속하는 것(창15장-아브라함이 엘리에셀에게)과 자식 을 못낳을 경우 부인이 자기 여종을 남편에게 주어서 대를 이으려고 하는 경우 등

③ 족장들의 활동 무대는 주로 중부, 남부 팔레스틴, 동요르단 지역으로 나타난다. 도시명 을 살펴보면 세겜, 벧엘, 마므레, 헤브론, 브엘세바, 그랄, 브니엘, 숙곳, 브엘라해로이 등이다. (그러나 이 도시들이 가나안의 도시 국가와는 일치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 다)
족장들은 특정 도시와 관련하여 등장하는데
-아브라함은 헤브론/ 마므레(남부)
-이삭은 브엘세바 (남부)
-야곱은 세겜, 벧엘, 동요르단, 얍복강 과 관련하여 나타난다.
*족장들이 거주했던 장소들에서 섬겨지던 신들에 관해 살펴보자.
-이삭이 거주했던 브엘세바(창21:33)에서 섬겨지던 하나님은 “영생하시는 하나님(엘 올람-םꗚוֹע לꔞ)”이다.
-야곱과 관련된 벧엘(창31:13/ 35:7)에서는 “벧엘의 하나님(엘 벧엘-לꔞ-תיꔪ לꔞ)”, 세겜(삿9:46)에서는 “언약의 하나님(엘 베리트-תיꙞꔶ לꔞ)”, 브엘라해로이(창16:13)에서는 “감찰하시는 하나님(엘 로이-יאּꙜ לꔞ)”, 예루살렘(창14:18f)에서는 “지극히높으신하나님(엘엘르욘-ןוֹיꗡ꘤ לꔞ)”, 세겜(창17:1)에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엘 샤다이-יꕐꚃ לꔞ)”, 세겜에서는 “이스라엘의하나님엘(엘엘로헤이스라엘-לꔞꙜꙺꖹ יꕚꗟꔤ לꔞ)”을 섬겼다.
그러나 족장들이 섬기는 신들의 이름이 엘(לꔞ)신과 관련되어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문제는 학문적으로 우리를 많이 괴롭히고 있다. 일반적으로 족장들을 하나님을 잘 섬기던 사람들이라 알고 있는데 족장들과 관련되어 섬기던 신이 왜 엘신이냐?는 질문이 생긴다. 여기에 대한 연구 알트가 했다.
A.Alt는 족장시대의 종교에 대한 연구로 1929년 「족장들의 하나님」이란 논문을 쓴다.
# 구약에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란 용어가 같이 엮여서 나오든지 아니면 따로 나오든지 자주 등장하는데 이 단어들을 알트가 연구했다.

* 종교사적 발전단계의 1단계.
원래 유목민들이 섬기던 족장신의 이름이었다. 즉,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이삭의 하나님은 이삭의 후손들이, 야곱의 하나님은 야곱의 후손들이 섬기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혈연관계라 생각하지만 알트는 이들을 특정 그룹들과 관련된 신의 이름이지 어느 특정 지역과 관련된 신의 이름(벧엘,예루살렘 등에서 섬기는 신은 지역과 관련된 신-가나안의 신이다. 신이 현현했던 거룩한 장소)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유목민의 신의 이름이지 정착민의 신의 이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신들은 어떤 고정된 장소 내지는 특별한 성소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그 신들을 숭배하는 집단과 관련되어 있다는 특징이 있다.
이 세 개는 신의 고유 명사(ex. 야웨)가 아니라 이것은 한 씨족의 최고 선조의 이름을 붙인 신의 이름이다. 그러다가 전승의 마지막 단계에서 씨족의 조상신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신의 명칭 앞에 사람의 이름을 붙여서 “~~~의 신”이란 고정문구를 만들어 신의 이름을 붙인 것은 고대 근동의 문헌에도 나타나는데 고대 근동 문헌에는 유명인 내지는 씨조의 이름을 붙인 신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

* 종교사적 발전단계의 2단계.
유목민들이 정착 생활을 하게 되면서 상황이 바뀌게 되었다. 아브라함은 마므레 지역, 이삭은 브엘세바, 야곱은 얍복강, 벧엘 등 어떤 특정 지역에 정착하게 되는데 정착의 장소가 이미 가나안 사람들에 의해서 성소화된 곳이다. 자기들이 섬기던 조상신과 가나안 사람들의 엘신이 갈등을 일으키게 되지만 오랜 시간 동안의 정착 과정 속에서 특정 지역에 사는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융화가 되었다.
-이들은 그들의 족장신과 엘신을 동일시(족장신과 엘신이 이름만 다를 뿐이라 생각하며 하나로 보는 현상)하면서 엘로힘이란 개념을 만들어 엘로힘이란 단어 안에 엘신과 족장신이 다 흡수시키며 다른 다양한 신들까지도 하나의 신으로 포함시킨다. 따라서 종교간의 마찰은 최소화시키고 서로간에 평화 관계를 유지하였다.
- 이런 정착단계 과정 속에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혈연관계로 형성되었다.
* 아브라함과 이삭의 후예들이 가진 전승들이 만나는 과정에서 아브라함의 전승이 이삭의 전승을 흡수하였는데 이 말은 이삭의 후예의 힘이 아브라함의 후예의 힘보다 약했음을 의미한다.
* 야곱의 전승은 지역적으로 떨어져있었기 때문에 아브라함과 이삭의 전승보다 훨씬 후에 만난다.
→ 이런 전승들의 만남은 문학적 기교를 통해서 하나로 만나게 되었고,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이 혈연관계로 형성되었다.

* 종교사적 발전단계의 3단계.
후에 출애굽 그룹이 가나안 땅에 들어오게 되면서 이미 존재했던 족장신과 엘신을 받아들여서 다시 그들이 섬기던 야웨를 동일시, 병렬화(족장신=엘신=야웨) 시키는 단계이다. 출애굽 그룹은 가나안 땅에 들어와 족장들의 전승을 자기들의 조상으로 받아들였다.
- - - - 알트의 이러한 이론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지만 족장 시대의 종교를 재구성하려는 노력과 구약에 나와 있는 몇 가지 의문점들이 있는 부분의 해석하려는 노력을 높이 평가해야할 것이다.

2.2 출애굽 전승
- 출애굽기 1장부터 15장 까지의 내용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로 있던 애굽에서 어떻게 탈출했는지 출애굽하는 이야기이다.

1)출애굽 전승의 특징
① 족장 전승에 비해 훨씬 더 일관성있고, 짜임새있게 구성되어 있다
② 출애굽전승과 관련된 이야기는 더 이상 씨족 이야기, 가족 이야기가 아니라 민족 내지 국가에 대한 이야기로 범위가 확대되어 이스라엘 종족과 애굽이란 나라의 정치적 대결 이 주요 주제로 등장하고 있다. 출애굽 전승은 족장전승보다 훨씬 더 정치적 성격이 강 하다.

*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회자된 신앙 고백의 내용이다. 그러나 아래와 같은 의문점이 있다.
① 출애굽 사건이 그렇게 중요한 전민족적 사건이었다면 왜 8세기 예언자(특히 남쪽에서 예 언한 이사야, 미가 등)의 선포에는 출애굽 사건이 하나도 등장하지 않냐?
② 출애굽 사건과 관련된 시내산 사건(율법수여사건)에 대해 포로기 이전의 모든 예언자들 이 침묵하고 있는 이유는?
→여기에 대한 간단한 해답으로는 야웨 하나님의 기적 베풀어준 출애굽 사건은 북왕국 전승이므로 남왕국엔 없다. 출애굽 그룹은 주로 중부와 북부 지역에 자리를 잡았을 가능성이 많다. 출애굽 그룹은 요셉지파(므낫세, 에브라임 지파)가 중심 세력이었을 가능성이 크고 그 지파가 자리를 잡은 지역에서 북왕국 전승인 출애굽 전승이 강하게 남았을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 나라의 광주 항쟁이 광주 사람들에게는 뼈저린 사건이지만 다른 지역의 일반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2) 이스라엘 사람의 애굽 체류에 대한 역사적 보고(출애굽이 애굽 사람들에게 어떤 문헌으로 남겨져 있는지에 대한 자료)- 구약 이외에는 어떤 곳에서도 이스라엘 사람이 애굽에 체류했다가 탈출했다는 보도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출애굽 사건을 허구로 보지 않기 때문에 애굽 문헌 중에서 간접적으로 자료를 찾는다.

① <파피루스 아나스타지 Ⅳ>에 보면 에돔 지방에서 온 사막의 유목민들에게 애굽에 들어와 서 양을 쳐도 된다는 허락서가 나온다. 허락서의 전문은
“나의 왕에게 드리는 또 다른 보고
우리는 에돔 지방에서 온 샤수 지파들이 Tkw 에 있는 메르넵타 성을 통과해서 메르넵타의 비돔 늪지대(고센)에 까지 다다르게 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바로의 훌륭하신 뜻을 받들어 그들과 그들의 가축에게 좋은 햇빛을 주고 생명을 구원토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Tkw에 있는 메르넵타 성을 통고한 다른 이름들과 함께(샤수 지파 말고 다른 지파들) 나의 왕이 계신 곳으로 이 편지를 보냅니다. “
→ 이 허락서의 내용은 창세기, 출애굽기의 내용과 몇 가지 면에서 일치한다.
- 창47:1 / 출8:18, 9:26 등에서 메르넵타의 비돔 늪지대(고센)지역이 나오는 것이 일치한 다. 그러나 성경의 내용과는 상황이 다르다.
- 샤수의 지파들은 야웨를 숭배하는 유목민들을 말한다.
- 창50:20절의 내용 중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셨나이다.” 와 이 허락서의 부분 중 “생 명을 구원토록 하기 위해서입니다”라는 구절이 유사한 것을 알 수 있다.

② 람세스 2세(1290-1224년까지 통치) 시대에 성 건축하기 위해 히브리인을 썼다는 내용이 나온다. <멤피스에서 온 편지>가 있는데 “곡식 창고(비돔성)를 짓기 위해 군대들과 뿌르 (‘Pr-히브리인)들을 동원시켜 람세스 미아문의 커다란 돌문을 운반하도록 했다.”라는 기 록이 있다. 도시, 성전건축 현장에 히브리인들이ㅣ 노예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는 자 료로 성경의 내용과 일치한다.

③ 람세스 3세(1184-1153)
람세스 3세에게 바친 선물 목록에 보면 “전투용 수레, 외국 방백들의 자녀, 뿌르 2093명 을 왕에게 바칩니다.”란 내용이 나온다.
→ 람세스 2,3 세와 관련해서 출 1:11절의 내용(비돔, 라암셋 도성 건축 時 히브리인 강제 동원시킨 내용)과 연결이 된다.
→ 지금까지 살펴본 이런 자료들을 보면 성경의 출애굽 사건이 만들어진 사건이 아니라 역 사적으로 있었던 내용이 확실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언제, 어떻게 구체적으로 일어났 는지에 대한 기록은 성경 외에는 없다.
cf. 모세란 이름이 애굽 문헌에 왕자로 남아있어야 하는데 모세란 이름은 왕자로 남아있지 않다. 그리고 60만 이란 대군이 동시에 출애굽 했을 것이란 것은 무리가 있다. 출애굽은 1회적 사건이 아니라 수차례에 걸쳐서 반복되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3) 출애굽의 연대
출1:11절을 역사적 사실로 간주한다면 출애굽 연대를 추측할 수 있다. 람세스 2세 시대 때 곡식 창고인 비돔과 람세스 2세의 거주지인 라암셋을 지었다. 이 둘은 동부 나일강 삼각주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곳은 고센 땅에서 멀지 않다.

4) 홍해의 위치
출14:2에서 바다와 믹돌 사이에 비하히론, 바알스본 맞은 편에 장막을 치게 하라는 내용이 따온다. 여기에서 다른 지명은 어디인지 알 수 없다. 바알스본은 나일강 삼각주의 가장 동쪽에 있다. 홍해는 히브리어 원어 (ףוּס םꖸ )에서는 갈대바다란 뜻이다. 학자들이 바알스본을 조사한 결과 여기서는 갈대가 나지 않음을 알고 연구한 결과 왕상 9:26절에서 에돔 땅 홍해 물가, 엘롯 근처 에쉬온 게벨의 내용과 연결시켜 찾아보니 아카바 쪽에 갈대가 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경에서는 출애굽 직후에 홍해 사건이 있기 때문에 이 둘이 근거리 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갈대가 나지 않는다는 바알스본의 위치 때문에 아카바 만을 홍해바다 사건이 있었던 장소라고 생각하고 있다.

5) 출애굽과 갈대 바다(홍해) 사건
① 유월절 축제의 내용
무교병과 쓴 나물 먹으면서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사건을 현재화하는 축제인 유월절 축제 의 내용을 읽어보면 출애굽 이야기만 있지 갈대바다 이야기는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② 일명 미리암의 노래라고 알려진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오래된 히브리시가 나오는 출15:21 절에서는 출애굽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갈대바다 사건만 노래하고 있 음을 볼 수 있다.
③ 이스라엘의 역사를 짧게 고백하며 역사를 요약하고 있는 일명 credo(신앙고백)인 신 26:5-9절까지에서는 출애굽 사건만 언급하고 있다.

→ 출애굽과 갈대바다 사건이 연속선상에 일어난 것이 아니고 분리되어 있다. 이런 근거 때문에 이 두 사건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적으로 서로 두 개의 독립적 주제로 간주하게 되고 서로 독립적 사건으로 이해한다.

6) 출애굽 그룹(group)
이스라엘 전체가 출애굽을 경험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출애굽을 경험한 사람이 이스라엘 중요 정치의 주도권을 잡았을 것이다.
12지파에 대해서는 성경에서 세 번 등장하고 있으나 세 곳에 다 동일한 이름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창 49장에서는 갓 지파가 빠져서 등장하고 창 29-30장에서는 갓지파가 포함되어 나타난다. 그리고 민26장에서는 요셉이란 이름 대신 그의 아들들인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들어가 있고 레위 지파가 빠져서 등장하고 있다. 12지파는 야곱의 아들들의 이름으로 그 아들들의 이름을 그의 어머니들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레아에게서는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스불론이 나온다. 라헬의 몸종인 빌하에게서는 단과 납달리가, 레아의 몸종인 실바에게서는 갓과 아셀이, 라헬에게서는 요셉과 베냐민이 나온다.
12지파들 중에서 애굽과 관련해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사람은 요셉과 베냐민이다. 야곱과 그의 아들들을 애굽으로 데리고 가는 역할을 요셉이 했다. 따라서 12지파들 중에서 역사적으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지파는 요셉지파와 베냐민 지파였을 것이라 추측한다. (ex.이스라엘 초대왕인 사울은 베냐민 지파)
그러므로 출애굽 그룹은 이스라엘 12 지파 전체가 경험했다기 보다는 요셉과 베냐민 지파가 경험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 그룹들이 후에 역사에서 중요한 정치적 주도권을 잡았을 때 그들이 경험한 사건이 민족 전체가 경험한 사건으로 고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7) 야웨 종교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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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야웨 종교가 모세에게서 출발되었나? 아니면 모세 이전부터 있었냐? 모세이전의 이스라엘 백성은 야웨를 믿었냐? 아니면 다른 종족이 야웨를 믿었고 이것이 이스라엘에 들어와서 그들이 믿게 되었냐?는 질문들이 생긴다.
출6:2-3절에서 “너희 조상에게는 엘로 나타났고 너에게는 야웨로 나타났다.”고 말하는데 신학적으로 엘 종류의 신과 야웨와 동격화시키려고 한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알트의 이론을 빌리자면 족장신과 엘신과 야웨를 결합하고 있는 종교사적 발전 과정의 3단계로 이해할 수 있다.
출3:14절에서는 야웨의 이름에 대해 “스스로 있는 자”란 뜻이 있는 신으로 나온다. 만약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미 야웨를 믿었다면 이런 말이 필요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야웨가 아닌 다른 신에게 부르짖었다는 것을 말한다.
야웨종교는 일반적으로 출애굽 그룹에게 모세를 통해서 소개되었다. 애굽에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직 야웨를 모르고 있었고 그 신은 후에 야웨와 동일시 되었다.

*“야웨(הוהי)”의 뜻
히브리어 원어 הꖻꕞꔟ רꚆꔣ הꖻꕞꔟ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
① 존재론적 해석 (프리드만,
야웨는 존재의 근원이란 뜻이며, 타의에 의해 만들어지는 존재가 아니라 독립적 주체로 써 생겨난 것이란 뜻이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란 말은 존재의 근원이므로 다른 존재들 도 나를 통해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나는 존재케 하는 자란 뜻의 해석이다. הꖷꕗ(he was)를 힙필(사역형)로 번역하고 있다. 창조신학적 입장에서 맞아떨어지는 해석이다.

② 활동론적 해석(찜멀리, 슈미트가 주장)- 훨신 더 많이 인정받는 해석이다
이들은 히브리어 문법에서 הꖷꕗ가 사역형으로 쓰인 경우는 한 번도 없음을 주장하며 야 웨는 현재에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활동하기 때문에 미래에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질 존 재라는 뜻이라는 해석이다. 역사를 이끌어가시는 주체이며 미래의 역사에서 증명될 수 있는 그런 존재이다. 내가 활동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역사를 통해서 나란 존재를 알려주 겠다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이 해석과 관련해서 2계명은 활동하고 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 제조가 불가능함을 나타내는 계명이라고 본다. 고정되어 있는 분이라면 형상을 만들 수 있지만 활동하고 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형상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 활동론적 해석에 무게를 둔다면 야웨란 뜻의 구체적 의미는 고정되지 않는 야웨의 자유성을 말하는 것이다. 출33:19절에서 내가 은혜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란 말도 역사의 주권자로서 자유롭게 행동하신다는 의미에서 이 해석과 연결된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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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를 통해서 야웨 종교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소개되었다면 분명히 모세 이전에 야웨 종교는 있었다. 그러면 누가 야웨 종교를 믿고 있었냐?
* 출3:1-6절의 내용에서
① 애굽 밖 - 모세가 야웨를 처음 만난 곳(미디안)
② 가나안 땅은 아니다
③ 팔레스틴 남쪽 산악 지대에서 야웨를 만났다.
*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대 문헌 특히 詩에서 야웨의 현현을 이야기할 때 나오는 지명들
- 삿5:4 … 세일에서 나오시며 에돔 들에서 진동... 세일과 에돔은 미디안 북쪽지역으로 거 의 겹치는 지역이다.
- 신33:2 … 시내산에서 나오고, 세일산에서 일어나고 바란 산에서 비치시고...
- 합3:3 … 데만에서 오시고, 바란산에서부터 오시도다
- 왕상 19장 … 엘리야가 브엘세바에서 남쪽으로 40일동안 걸어서 호렙산에서 하나님 만나 서 한탄하는 장면

① 지금까지 살펴본 지역들이 공통적으로 이스라엘의 남쪽 산악 지대를 일컫는 곳임을 알 수 있다.
- 처음으로 모세에게 소개되기 이전에는 미디안사람들(성경에서는 겐족속)이 야웨를 믿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겐족속에게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야웨 종교가 소개되었다면 어떻게 그 들이 이스라엘과 지냈나?
② 14세기 초반 애굽을 통치한 왕 아멘오피스 3세의 기록에 보면 「 ‘jhw'의 샤수 땅」이라 는 표현이 나온다. 이는 야웨(Jahwe)를 신으로 섬기는 샤수(세일지역에 있는 땅)땅이란 뜻으로 모세 이전에 야웨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이미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아 마도 샤수 땅에 살며 유목민 생활을 했을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③ 출애굽기 2장에서 3장을 읽어보면 모세가 처음 야웨를 만난 장소는 미디안 광야이다. 모 세의 부인은 미디안 여인이며, 모세의 장인도 미디안 사람이며 미디안 제사장이다.
(cf.출18:12에 보면 출애굽 진행 후 사건으로 이 문구로 봐서 이드로가 제사장일 것이라 추측)
미디안은 아카바만 동편에 위치한 넓은 광야 지역이다. 모세와 관련된 이 사람들은 이미 야웨 종교의 숭배자였을거라는 생각이 농후하다.
④ 역사적인 증거들이 뒷받침하는데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과 미디안 사람들(겐사람 들)과의 관계는 매우 우호적이었다.
- 삼상 15:6 절에서 사울이 아말렉사람을 칠 때 겐사람에게 피하라고 말하며 겐사람들이 이 스라엘 모든 족속이 애굽에서 올라올 때 그들을 선대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 삿1:16절에서 모세의 장인은 겐사람이며 광야 유랑 후 땅 분배끝난 후 겐사람 일부가 이 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올라와 유대땅 일부 거주지를 찾았음이 나온다.
- 대상2:55절에서 야웨를 철저히 믿었던 이들인 레갑 자손들(가나안의 문명과 종교의 유혹 을 거부하고 땅을 일구며 야인 생활을 하며 신실하게 야웨만 섬긴 사람들)이 겐사람들로 나온다. (cf. 렘35장에서는 레갑자손을 극찬) 왕하 10:5f
- 삿5:24절은 일명 드보라의 노래인데 여기에서 겐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이 나온다. 야엘은 이스라엘 사람을 위해 싸운 야엘이 겐사람이라고 나온다.
- 삼상30:29절에서 사울과 다윗 시대 겐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살았다고 나온다.

➡ 이러한 증거 자료들을 통해 이스라엘 사람과 겐사람은 매우 우호적이었고 겐사람의 일부 는 귀화하여 이스라엘 사람과 같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겐사람들은 다른 사람보다 야 웨 종교에 투철했음을 알 수 있다.
cf. 성경에 보면 기드온 이야기에서는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을 물리치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면 위에서는 미디안사람(겐사람)과 이스라엘 사람과의 관계가 우호적이라고 한 것 과는 같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미디안 사람(겐사람)들은 광범위하게 퍼져 살았고 모든 미디안 사람과 우호적인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ꂎ 출애굽 전승에 대한 야웨 전승의 결론
① 야웨는 원래 미디안 사람(겐사람)들에 의해서 팔레스틴 남부 산악 광야 지역에서 숭배되 던 유목민들의 신이었다라고 볼 수 있다. 유목민들의 신이었다는 것은 제도나 정치에 얽 매이지 않는 자유의 신이었음을 암시한다. 그래서 구약에 나타나는 평등 사상, 인도하는 모습이 유목민의 신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② 모세는 미디안 사람과의 결혼을 통해서 야웨를 알게 되었고 출애굽 그룹에 야웨를 소개 했을 것이다. 출애굽 그룹이 쉽게 야웨 종교를 받아들일 수 있던 것도 노예 생활 하던 그들에게 평등 사상과 인도자의 모습인 유목민의 신의 모습은 쉽게 접근될 수 있었을 것 이다.
③ 야웨종교는 이스라엘 탄생 이전부터 섬겨지던 신이었다. 그러므로 야웨 하나님은 이스라 엘보다 오래되었다. 모세 이전에도 야웨는 숭배되고 있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2.3 광야 유랑 전승
ꂎ 광야 유랑 전승과 관련된 3가지 특징
① 출애굽 전승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등장하고 있다. 광야 유랑은 출애굽 전승에서 시작해 서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도중의 이야기이다.
② 5경에서 읽혀지고 있는 광야 유랑 전승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매우 부정적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불평하고 의심, 회의, 하나님께 대한 반역과 불평 의 연속적인 삶을 살았던 반면에 하나님은 이 부정하고 반역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끊임 없는 사랑과 은혜를 베풀었음이 대조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cf. 호세아서에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 가장 신실했던 때가 광야시대이며 이때 를 밀월의 관계로 묘사하고 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가장 타락한 시기는 땅 점유 시기였다고 주장한다.
★참고자료 <광야 유랑 전승에 대한 구약의 상이한 전승들-신학과 현장11집.>
③ 많은 개별 지역 전승들이 결합되어 있다. 많은 개별 지역 전승과 관련된 사건을 살펴보 면 출15:22절에서의 술광야 사건, 출15:23절의 마라의 샘, 출17:7절의 므리바(하나님과 논쟁했던 장소), 출15:27, 16:11절의 엘림 오아시스 등 이 지역들이 모두 애굽과 네겝 (남쪽의 메마른 사막)사이에 있는 지역들과 관련되어 있다.

2.4 시내산 전승
1. 범위 : 출19:1~민10:10절까지

2. 시내산 전승의 특징
① 출애굽 사건이란 커다란 테두리 안에 들어가 있으면서 시내산 전승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진을 멈추게 하며 가나안 땅으로의 행진이라는 사건의 흐름을 방해하고 있다.
→ 출19:1-2절에서 보면 시내산 앞에서 장막을 치고 움직이지 않음이 나온다. 이것이 출애 굽 첫해 세 번째 달로 나오는데 장막을 치고 움직이지 않던 이스라엘이 민10:11-12절에 보면 2년 2월 20일에 다시 출발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거의 1여년 정도 시내산에 멈춰있었 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행진을 멈춘 시기에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고 사람들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하는 일련의 사건이 생긴다.

② 시내산 전승은 이스라엘 초기 역사를 다루는 본문에 등장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신26:5-9절이나 수24장, 삿11:16-26절등 이스라엘 초기 역사를 회고하는 본문 들에서는 공통적으로 모세가 율법을 받는 부분은 나오지 않는다. 느9:13절에 가서야 비 로소 처음으로 시내산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것은 시내산 전승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 어서는 중요성이 떨어진 이야기였거나, 출애굽 이야기와 따로 분리되어 전승되었을 가능 성이 많다고 볼 수 있다.

3. 시내산 전승 안에 들어가 있는 중요한 사건 3가지
①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계약 체결(출24:1f /34:10f)

② 율법 수여- 여기에서 수여된 율법은
a. 출20:1-17 절에 나오는 10계명
b. 출20:22-23:19절의 언약서
c. 레17-26장의 성결법
d. 제사법전(P문서)

③ 하나님의 현현(출19장/24:16-18/33장)
→ 이 세 가지 중에서 시내산 전승과 역사적으로 가장 가까운 사건이 무엇이고 어떤 것이 후대의 첨가이냐를 학자들이 연구했다.
① 계약 체결 의식에서 תיꙞꔶ(계약) 란 단어가 구약에서 중요한 신학적인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은 호세아, 신명기, 신명기 사가로 연결된다. 계약이란 단어를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 님간의 주종관계로 사용한 것은 호세아에 와서야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시내산에서 계약 을 체결하여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가 된 것은 후대의 신학적 해석임을 알 수 있다.

② 율법 수여와 관련하여 율법의 내용을 분석해보면 농경지의 생활을 전제하고 있는 법들이 많다.
a. 출애굽기 23장에 나오는 무교절, 맥추절, 수장절 등은 농경민의 축제이다. 법들 중 가나 안 땅에 들어간 다음에 연결된 법이 이미 모세를 통해서 말해지고 있다.
b. 유목민에게 노예는 없다. 그러나 노예에 관한 법이 발견된다.
c. 안식년, 희년 의 관한 사건도 농경민과 관계된 제도이다.
→ 아직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않은 상태이다. 모세라는 사람의 입을 빌 어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선포되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③ 하나님의 현현에 관하여 살펴보면 출19:16절에서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임재하실 때 자연 현상이 동반되었음이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우레, 번개. 구름, 연기, 불, 산꼭대기, 땅 지진 등 화산 폭발을 연상시키는 단어들이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화산 폭발을 보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의 진노, 임재를 경험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여기에서 고대 인들의 종교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 그러면 시내산의 위치는 화산 폭발이 있었던 곳이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시내산에는 한번도 활화산이 없었다. 학자들이 조사한 결과 아카바만 동쪽 갈대바 다 근처에 있는 산(에돔 미디안 지역)에 활화산이 있었음을 밝혔다.

➡ 위의 세 가지의 사건 중에서 일어났을 가능성이 많은 것은 하나님의 현현 사건으로 화산 폭발과 동반된 시내산 사건이라 볼 수 있으며 시내산은 하나님이 거주하는 곳으로 생각 하며 하나님이 임재하는 곳으로 고백하고 있다.
* 신 33: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시내산에서 오시고, 시내산에 하나님이 거주한다.”는 내용 이 나온다.
* 삿5:5절에서는 “산들이 여호와 앞에서 진동한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화산폭발을 연상한다.
* 시68:8절에서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하나님 앞에서 떨어지며” 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 것도 화산 폭발 현상과 더불어 일어나는 자연 현상으로 진술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 왕상20:23,28 절에서 아람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신을 “산의 신”으로 고백하고 있다.

➡ 결론적으로 야웨 신은 시내산과 관련이 있다. 반면 이스라엘과 관련된 엘신은 농경지, 가나안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섬기던 신의 이름이다. 이처럼 서로 다른 뿌리를 지니고 있던 신의 모습이 출애굽 그룹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신이 단일화 되며 엘로힘(םיꕙꗟꔤ)이 등장하게 되었다.

ꂎ 시내산 전승의 결론
① 시내산 전승은 출애굽 전승과 독립적이었다. 시내산 전승은 출19:1-민10:10절의 내용으 로써 출애굽 사건을 방해하고 있다.
② 시내산 전승은 세 가지 중요한 사건과 결부되어 있다.
- 계약체결, 율법 수여, 신의 현현 사건
③ 이 세 가지 사건들 중 역사적 사건은 하나님의 현현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하나 님의 현현 사건은 시내산에서 일어난 사건으로서 화산 폭발 현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서 고백되고 있다. 이 시내산은 아카바만 근처에 위치하고 있었고 미디안 족속의 영역에 위 치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 산에서 숭배되던 신의 이름은 분명히 “야웨”였을 것이다. 화 산 폭발 있었던 이 시내산은 유목민들에게 거룩한 산으로 고백되었고 이 거룩한 산으로 의 순례 행진이 있었을 것이다. 이들은 거룩한 산으로 순례 행진을 하며 그곳은 하나님 의 산, 그곳은 거룩한 산이라 고백하며 전해졌을 것이다.
cf. 솔로몬의 성전 건축- 하나님이 시내산에 계시다(성경 곳곳에서 하나님은 세일, 바란 등 에 거주한다고 표현)는 표상을 완전히 뒤바꿔 버렸다. 그 다음부터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계시다고 고백된다.

3.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가나안 정착시기)
- 이스라엘의 정복과정 및 땅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일어나 사건을 여호수아 1-12장까지에 기록하고 있으며 다른 전승에 비해 매우 자세한 서술을 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수 1-12장까지의 내용은 모세가 죽은 후 여호 수아가 12지파를 이끌고 법궤를 앞세우고 요단 강을 건너는 이야기가 나온다.

ꂎ 수 1-12장까지의 내용의 핵심
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정복해가는 묘사가 전쟁을 통해서 서요르단 땅을 점령하는 것으로 기술되어있다.
② 이 전쟁은 12지파의 공동 행위를 통해서 가나안의 도시들을 탈취했다. 그 대표적인 것 이 6장의 여리고성, 7-8장의 아이성 전투이야기이다.
③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땅을 점령하고 분배했다는 내용이 13-19장에 걸쳐서 나온다.

➡ 이러한 내용들에 대해 학문적 의문이 생기며 새로운 조사에 착수했다.
소위 “부정적 소유 목록”이라고 할 수 있는 삿1:19,21,27-35절 등에서 이미 정복 시기가 끝난 후 사사 시대로 연결되는 시점인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의 모든 곳을 다 정복하지 못했음을 나타내주는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학자들은 수1-12장까지 는 신학화된 내용으로 보며 사사기에 나타난 이 내용들이 역사적 상황 자체를 정밀하게 보도하고 있는 것이며 훨씬 더 역사적 상황에 가까운 보도라고 학자들은 본다. 이 본문 들을 조사해 보면
ⓐ 이스라엘 사람들은 산악 지역에서는 확고한 자리를 차지했다. 산악지대는 사회적 기득권 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살았음에 분명하다. 그래서 그들은 조직화된 군대가 없어서 이스 라엘 사람들이 쉽게 산악 지대를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 해안 평야 지역이나 평지 내지는 도시 부분들은 아직 점령하지 못하고 가나안 사람들과 블레셋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철제 무기와 조직화된 군대, 전차 부대같은 당시 발달된 무기로 무장되어 있으므로 물리치기 힘들었을 것이다.
ⓒ 아직 점령하지 못한 지역을 지파별로 살펴보면(삿1:27-35절 참조)
a. 베냐민 지파 사람은 아직 예루살렘을 점령하지 못했다.
b. 므낫세 지파 사람은 벧스안, 다아낙, 돌, 이블르암, 므깃도 같은 지역을
c. 에브라임 지파 사람은 게셀
d. 스불론 지파 사람은 기드론과 나할롤
e. 아셀 지파 사람은 악고, 시돈, 알랍, 악십, 헬바, 아빅, 르홉
f. 납달리 지파 사람은 벧세메스, 벧아낫
g. 단 지파 사람은 헤레스, 아얄론, 사알빔 등을 아직 점령하지 못했음을 볼 수 있다.

➡ 가나안 점령 초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차지했던 땅은 도시들 사이에 남아있는 땅 또는 산악지대라고 볼 수 있다. 후에 부강해지면서 조직을 정비하여 도시들을 겨냥해서 정복 해갔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 부정적 소유 목록과 동․서요르단에 살았던 이스라엘의 목록(민32:33,35 /수13-19), 창 세기 49장에 있는 야곱의 유언, 신명기 33장에 있는 모세의 유언, 사사기 5장에 있는 드 보라의 노래 등을 참고해 보면 지파들이 어떤 과정으로 어떤 곳을 정착했는지 알 수 있 다.
a. 남부 지역에 정착한 지파는 유다, 시므온 지파
b. 중부 지역에 정착한 지파는 요셉(므낫세, 에브라임-워낙 인구가 많았기에 땅 정착하는 과정에서 요셉의 두 아들의 이름의 지파로 나누어졌다.)+ 베냐민 +(단-처음에는 중부지 역에 정착했으나 후에 블레셋의 다섯 도시의 위협을 받아 북쪽으로 간다.)
c. 북부 지역에 정착한 지파는 스불론, 잇사갈, 아셀, 납달리 지파이다. 이렇게 북부 지역 에 많은 지파가 정착한 것은 이 지역에 기름진 평야가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을 흡입할 수 있는 조건이 있는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갈릴리 호수란 자원이 있으며 “이즈 르엘”이란 곡창지대가 있다. “이즈르엘”은 신이 씨를 뿌리는 땅이란 뜻을 가질고 있는데 그 정도로 기름진 땅임을 의미한다.
d. 동요르단 지역에 정착한 지파는 르우벤과 갓 지파이다.

4. 국가 형성 이전의 이스라엘 (사사시대)
4.1 마틴 노트(M.Noth)의 “12지파 동맹(Amphiktyonie)"가설
- 이스라엘은 왕국 탄생 이전 사사시대에 정치 구심점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몇 백년 동안 나라가 유지되었다. 어떻게 오랫동안 나라가 유지 될 수 있었을까? 라는 물음에 대한 가 설로 12지파가 동맹해서 하나의 사회를 형성했다는 가설이다.
- 12지파에 대한 보도들은 창29:31/ 30:24/ 민26:4-51절에서 나타나는데 12지파에 대한 보 도가 약간의 차이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레위 지파가 포함되는 경우에는 요셉지파가 한 지파로 나온다. 이때는 야곱의 열 두 아들이 12지파의 이름으로 나온다. 그리고 레위 가 빠지면 요셉 대신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포함되어 나오는데 이와 관련하여 노트는

① 레위 지파를 포함한 명단이 더 오래되었을 것이라 주장한다.

② 12지파를 노트는 레아 지파와 라헬 지파 두 부류로 나눈다.
*레아 지파는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스불론, 잇사갈 6명으로 나눈다.
*라헬 지파는 요셉(므낫세, 에브라임), 베냐민 과 라헬의 몸종인 빌하의 아들인 단과 납 달리, 레아의 몸종인 실바에게서 난 아들인 갓과 아셀을 포함하여 6명으로 나눈다.
(cf. 실바는 원래 레아의 몸종이지만 노트는 이렇게 6:6으로 맞추려고 인위적이긴 하지만 이렇게 실바를 라헬의 지파로 나누고 있다.)
→ 6+6 =12 로 12지파 동맹을 설명한다. 12명의 이름이 성경의 본문 내에서도 약간 유동적 이긴 하지만 어쨌든 초기 전승부터 후기 전승까지 고집하고 있는 것은 “12”라는 숫자이 다. 성경이 각 지파의 이름은 조금씩 다르지만 “12”를 고집한 이유는 허구적인 것이 아 니라 역사적으로 실재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노트의 주장이다. (레위지파는 왕국시대 이후(이스라엘 역사 후대)에는 땅을 갖지 못하고 성전 안에서 일하는 것으로 나오고 지 파의 이름에서 완전히 빠지게 된다.)
- 12지파는 모두 평화 관계를 가지고 어느 한 지파의 힘으로 주도해가는 관계는 아니었는데 이처럼 중앙집권적 헤게모니 없이 평화 관계를 가진 것은 이스라엘에만 있는 것이 아니 다. 노트는 헬라 그리스의 부족 동맹, 이탈리아의 부족 동맹, 필리핀 군도의 폴리네시아 부족 동맹 같은 원시 사회에서 부족 동맹 내지는 지파의 형태에서 힌트를 얻어 이스라엘 도 12지파가 연합되어 독특한 사회가 형성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노트는 이들중 가나안 땅에 먼저 들어온 것은 레아 지파였을 거라고 주장한다. 레아지파가 먼저 들어와 서 6지파 동맹을 맺어서 이스라엘 사회가 원시적으로 형성되었으며 이러한 6지파 동맹은 12지파 동맹의 원형 내지는 전신이며 토대였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여섯 지파는 유목 민 그룹으로 엘신을 숭배하던 공동체였으며 후에 출애굽을 경험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야 웨를 섬기던 그룹 여섯 지파가 들어와서 이미 존재하고 있던 여섯 지파와 연합해서 12지 파 동맹체가 탄생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③ 12지파의 연대 : 땅 점령 이전 시기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12지파의 연합적 역 할이 성경 내에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땅 점령 후부터 왕국 탄생 이전(이스라엘이 확고한 제도를 갖추지 못하고 있을 때이다)까 지가 12지파가 존재했던 시기이다.

④ 12지파 동맹의 성격-매우 중요하다
-12지파는 야웨를 섬기기 위해서 연합된 순수한 “종교적 제의 공동체”라는 것이다. 이들이 연합된 이유는 정치적, 군사적 제도 때문이 아니라 공동의 중앙 성소에서 야웨에게 제의를 드리기 위해 연합되었다. 그래서 12지파는 중앙 성소에서 모이게 되는데 중앙성소는 한 군 데로 고정된 것 아니고 길갈, 벧엘, 세겜, 실로 등의 도시들이 중앙 성소의 역할을 감당했 던 도시들이다. 중앙성소는 법궤(유목민적 전통 속에서 출애굽 그룹과 관계있다)가 있는 곳으로 정해지게 되었고, 법궤는 7년마다 옮겨 다녔을 것이다.(어느 한 지파에만 중앙 성 소 고정된 것 아니다)
- 한 지파가 한 달씩 돌아가면서 중앙 성소를 돌볼 책임이 있었다.
- 군사적 침입을 받았을 때가 사사 시대의 문제인데 이때는 각 지파가 스스로 힘으로 책임 을 지어야 했고, 자발적으로 영토 확장, 세력 강화, 전쟁을 수행하게 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에브라임 지파가 공격을 받았다고 므낫세 지파가 책임을 지는 것은 아니다. 단 자발 적 결단에 의해 도와줄 수는 있다.

⑤ 12지파 동맹체의 기원
노트는 수24장을 근거로 12지파 동맹의 창시자는 여호수아라고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호수아는 에브라임 지파로 라헬 지파에 속한다. 수24장은 세겜에서 열린 회의로 여호 수아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모두 야웨를 섬길 것을 권하고 있다.
cf. 이스라엘 역사상 이름에 “야웨”란 이름을 넣어 지은 이름은 여호수아(꘨Ꚉוֹהꖾ-야웨께서 구원해주신다)가 최초이다. ꘨Ꚉוֹהꖾ에서 וֹהꖾ는 야웨의 이름을 나타내는 축약형인데, 신앙 의 경건성을 나타내는 사람의 이름에 사용되었다.

⑥ 12지파 동맹의 제도들
구약 성경 자체는 12지파 동맹의 모양과 활동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는다. 즉 구약 성경에서 12지파 동맹의 직접적인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산발 적인 구절들을 재구성해보면 간접적인 정보는 얻을 수 있다.
-삼상1:3f에서 “매년, 실로” 등의 단어가 나오는데 이것은 특별 절기 때 정기적으로 희생 제사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매년 각 지파의 대표들이 축제일이나 특별한 날 에 가서 희생 제사를 드리고 돌아왔을 것이라 추측해볼 수 있다. 이 성경 구절은 노트의 가설과 상당 부분 연결됨을 알 수 있다.

- 노트는 중앙 성소를 돌보는 사람을 세 부류로 나누어 추측한다.
a. 두령(איꙶꗺ)- 각 지파의 대표들을 일컫는 말이다. 이들은 중요 사건 내지는 관심사를 토 론했을 것이라 본다. 민1:4-16/ 13:14-15/ 34:17-28절에 보면 12지파의 두령들의 목록이 들어가 있다. 출22:28절에 보면 “백성의 두령들에게 저주하지 말라”는 명령이 나오는 것 을 보아 이들은 특별한 법의 보호를 받았을 것이라 추측한다.
b. 제사장(ןꕛꗔ)- 중앙 성소 제사장으로 임명되면 영속적으로 안주했을 것이다. 이들은 중 앙 성소에서 희생 제사를 집례하고 공동의 예배를 인도하고 일련의 제의 행위들을 책임지 는 제사의 기능을 담당했을 것이다.
c. 소사사(ט꘭ꚇ)- 원래 대사사(6명)는 전쟁의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말하고 소사사(6명)는 재판 업무를 담당한 지도자를 말한다. 그러나 중앙 성소에서의 소사사들은 재판 업무를 담당했다기 보다는 율법의 낭독, 율법과 관계된 업무를 보았을 것이라 추측한다. 율법에 근거한 축복과 저주를 선포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계약을 갱신하 는 것을 주도했다. 소사사들은 “하나님의 율법의 수호자”라는 개념이 중앙 성소에서의 주 요업무였다. 다시말해 이들은 율법선포, 율법해석(적용의 기능), 율법을 지키는지 감시, 율법을 가르치는 등 모든 율법 업무를 총괄하는 기능를 담당했을거라 추측한다. 하나님의 율법에 있어서 율법은 단언법으로 시작되는 절대 금령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 특징 이다.

cf. 결의법과 단언법의 비교
<결의법과 단언법>
Alt는 1926년 「이스라엘 법의 기원」이라는 논문에서 성경에 특히 모세 5경에 많은 법이 나오는데 이 법의 기원의 결과가 2가지의 유래가 있다는 중요한 결과를 밝혔다.

① 결의법(Kasuistisch)은 농경 민족 전통으로 가나안족이나 메소포타미아 등의 고대 근동에서 흘러 들어온 법으로 형식은 “~יꗑ~מאּ”으로 나타난다. “만일 ~하면 반드시 ~할찌니라.”는 것으로 처음 문장에는 ‘경우’가 나타나고 뒷 문장에서는 ‘판결’이 등장한다. 이러한 결의법의 전승 내용은 다 세속적이고 일상적인 삶의 규정을 나타내고 있으며 결의법과 관련된 형식은 함무라비 법전에 많이 나온다.

② 단언법(Apodiktosch)은 순수한 이스라엘적 전통으로 우리가 아는 10계명은 다 단언법에 속한다. 형식은 “직설법 + אꗟ(~하지말라)”, “~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찌니라.”로 나타나며 고대 근동의 어느 나라에서도 나타나지 않는다.
- - - - 결론적으로 이스라엘의 법은 이중기원설이다. 이스라엘 전통과 가나안적 농경민적 법 전승을 가지고 구약의 법이 형성되었다.
즉, 12지파와 관련, 소사사와 관련된 법은 단언법이다.

ꂎ 노트의 12지파 정리
① 12지파는 종교적 공동체이다.
② 법궤를 중심으로 중앙 성소가 형성되었다. 여기에서 공동의 제의를 드리게 되었고 공동 의 제의를 통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계약 관계가 규칙적으로 갱신되었다.
③ 책임자는 세 그룹이 등장한다. 그중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 그룹은 소사사들로 단 언법의 수호자 내지는 전달자의 역할을 감당했다.
④ 최초의 회의는 세겜에서이고, 창시자는 여호수아였다. (수24장)

4.2 대사사들
대사사들에 대한 활동은 삿2:6-16:31절에 나온다. 대사사란 전쟁 영웅들을 말하는데 원래 대사사들은 지파를 구원하는 지파의 전쟁 지도자들이었다. 이 본문은 9세기 경(9세기 후반)에 문서화 되었다. 그래서 대사사들의 활동만 기록한 책으로 만들어지는데 “구원자책”으로 북왕국에서 만들어져 그들을 찬양하였으며 이것이 사사기의 토대를 이루었다.

- 등장 배경 : 가나안 땅을 점령한 이후부터 사무엘 이전까지 활동했던 사람들로 성경에는 열 두 명이지만 그보다 더 이상 있었을 수도 있다.

- 활동 내역 (지도 프린트 p22 참조)
a. 모압 - 사해의 동쪽에 위치하며 매우 일찍부터 왕국을 형성했던 나라이다. 갓 지파와 국 경을 맞대고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과 우호관계를 가질 수 없었다. 민25:1-5절을 참고 해보면 바알브올이란 성소가 있는데 갓지파 사람들이 모압 사람들의 영향으로 유혹을 받 아 바알 신에게 제사드리는 장면이 나온다. 모압과 싸우기 위해 등장한 사사는 에훗으로 에훗은 갓지파 출신이 아니라 베냐민 지파 사람이다. 모압의 영토가 확대되어 요단 계곡 까지 들어오면서 요단 너머까지 침공하여 여리고 지역까지 점령하였다. 그리고 베냐민 지역까지 침공하여 일부 베냐민 사람들이 이들에게 조공을 바쳤다. 그러자 베냐민 지파 출신 에훗이 일어나 모압왕 에글론을 죽이고 그 군대가 요단강 건너기 전에 다 멸절시킨 다. 에훗의 이야기를 통해 모압의 영토가 북서 방면으로 광범위하게 확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모압 사람들은 갓 지파가 약해지게 되면 끊임없이 괴롭혔고 북쪽으로 자기들 영토 를 확장하기 위해 갓지파를 침공했다. (삿3:12-30)

b. 암몬 - 모압의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 요르단 수도 암만이 있는 랍바가 그 수도 이다. 므낫세, 에브라임 지파가 먼저 길르앗 야베스를 점령하여 이 사람들을 식민지화 시킨다. 후에 암몬 사람의 세력이 성장하면서 북서쪽으로 확장하면서 길르앗 야베스를 차지하고 있던 므낫세, 에브라임 지파와 충돌을 일으킨다. 여기와 관련된 사사가 입다 (삿10:6-12:6)이다. 입다가 하나님의 신을 받고 길르앗 사람을 이끌고 들어가 암몬 사람 을 쳐죽이는 이야기가 나온다.
입다는 군대의 장관과 머리가 되는 유일한 인물로 길르앗의 지도자가 된다. 이스라엘 왕 국으로 발전하는 과정 속에서 세 번의 왕국 탄생의 시도가 있었다. (기드온, 아비멜렉- 스스로 세겜의 왕이 됨, 입다가 왕으로 추대되었다.) 입다는 왕으로 칭함을 받지 않고 장관과 머리로 칭함을 받았다. 백성들에게 사람이 왕이 되어도 나라를 잘 이끌 수 있다 고 인정을 받게되는데 이것이 왕국으로 나아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c. 아람- 암몬의 북쪽에 위치한다. 팔레스틴 땅에 정착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팔레스 틴 북쪽에 자기들의 자리를 차지한다. 정치적 구심점이 다른 민족에 비해 약했기 때문에 전쟁을 잘 할 수 있는 여건이 안되었다. 엘리사 시대(9세기)에 와서야 역사의 전면에 등 장한다. 아람 군대 장관 나아만 알지

d. 미디안- 당시의 신무기로 무장된 사람들로 요단 서편에 자리한 사람들이다. 이들의 신무 기는 낙타로 역사적으로 청동기 시대까지는 낙타를 활용할 줄 몰랐다. 낙타는 철기 시대 로 넘어가는 과정부터 이용되었고 사막을 횡단, 물 없이도 먼 지역을 왕래할 수 있는 기 능있기에 신무기로 활용되었다. 낙타가 무기로 활용되며 팔레스틴에 대변혁이 일어났다. 농경지 거주민들은 낙타를 보고 놀랐고, 대항할 방법을 찾지 못해 극도의 공포감을 조성 하는 신종무기로 낙타가 활용되었다. 삿6:2,5 절을 보면 낙타를 보고 산과 동굴과 산꼭 대기로 피신하는 장면이 나온다. 삿6-8장 까지에서 기드온은 미디안 족속의 낙타 유목민 들과 전쟁을 벌인다. 이 이야기를 살펴보면 미디안이 요단 서편을 다 정복하고 팔레스틴 내륙 깊숙한 곳까지 침투, 나아가 이즈르엘 평야가 있는 해안 지역까지 침투하는 내용이 나온다. 미디안 족속의 위협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를 알 수 있다. 기드온은 므낫 세 지파 출신으로 미디안 사람들과 싸울 때 300명을 이끌고 기습 공격을 해서 승리를 쟁 취한다. 이 전쟁의 승리가 얼마나 컸는지 미디안 사람들은 다시는 이곳을 침략하지 않았 다고 나온다. 이 이야기는 삿6-8장까지 방대한 분량으로 나오는데 이 설화의 양이 다른 부분보다 훨씬 많은 것은 이 전쟁의 중요성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 수 있게 하는 것이 다. 다시말해 미디안의 위협이 그만큼 컸고, 거기에 비례해서 기드온의 승리의 감격이 컸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사야 시대까지 몇 세기 전에 일어난 미디안의 사 건이 회자되고 있음을 사9:4절에서 살펴볼 수있다. 미디안 전쟁과 관련하여 중요한 정보 를 제공하는 것은 사사들의 활동이 자기 출신 영토를 벗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삿 7:23절에서 아셀, 납달리, 므낫세 지파가 연합해서 미디안에 대항하는 것이 나오는데 이스라엘 역사에서 처음으로 연합하여 군사적으로 대항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 에서 이스라엘의 정치 세력화의 서곡을 볼 수 있다.지파 동맹의 규율이 조금씩 깨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종교 공동체에서 정치 공동체로 움직이려는 태동이며 이스라엘 내부 에서 이스라엘 왕국 태동이 꿈틀거리는 흔적을 볼 수 있다.

e. 블레셋- 철기 문명을 가나안 땅에 소개한 민족이다. 잘 훈련된 직업 군인을 소유라고 있 으며 매우 강력한 군사력을 소유하고 있다. 이들과 싸운 사람이 삼손이다. 삿13-16장에 서 단지파와 블레셋간의 싸움 이야기가 나온다. 다른 사사는 다 이긴 것으로 끝나지만 삼손은 비극적인 죽음으로 끝난다. 이것은 블레셋의 세력을 극복하지 못했음을 의미한 다. 단지파가 블레셋의 침공을 적절하게 방어하지 못하고 최북단 지역으로 옮겨가서 자 리를 차지하는 비극을 맞게된다.
➡ 사사시대 이웃 국가의 침공이 이스라엘 왕국의 탄생 요인이 된 것이라 보는 것이 알트의 이론이다.

5. 사울 왕국 이스라엘 역사
5.1 사울 왕국 탄생의 시대적 상황
1400년~900년 사이 아람 인들의 대이동이 있었다. 이후 여러 나라가 건국되었으나 이때 이스라엘은 왕국을 건설하지 않았다. 왜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에 비해 왕국이 늦게 탄생되었냐?(200-300년 뒤에 생김)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의식 속에 전통적으로 흐르는 반왕권적 전통(야웨 전통-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국가) 때문이다. 다시말해 신정 통치 사상이 이스라엘의 사회, 종교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ꂎ 구약의 반왕권적 전통(신정통치사상)을 보여주는 몇 가지 본문
- 삿8:22-23
기드온에 대한 이야기에서 기드온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오자 백성들이 기드온을 왕으로 추대하는 장면에서 기드온이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너희를 다스리리라.” 라고 말하는 부 분에서 볼 때 전통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의식에 깊이 뿌리 박힌 신정통치사상을 엿볼 수 있다.
- 삿9:8-15
이 곳에서는 요담 우화에 대한본문으로 가시나무가 왕이 되는 것은 왕제도를 비판하거나 심지어 거절하는 강한 반왕권적 전통을 보여주는 본문이다.
- 삼상 7-12장 에서는 반왕권적 전통과 친왕권적 전통이 함께 나오고 있다.
- E문서 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문서 중의 하나로 여기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심부름 일 뿐이다.
- 아모스 + 호세아 의 왕국 비판 - 왕을 견제하고 비판하다.
- 신명기 전통

➡ 이처럼 이스라엘에는 반왕권적 전통이 흐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국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던 이유
1) 알트(Alt)의 가설 : 왕국 탄생의 외적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알트는 남서쪽에서는 블 레셋이, 요단강 동편에서는 암몬이 지속적인 군사적인 위협을 가하는 불가피한 정치적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스라엘에 왕국이 탄생되었다고 본다. 다시말해 이스라엘 왕 국 탄생 이란 것은 국내의 정치적인 동인으로 인한 자연 발생적 결과가 아니라 외부의 침임으로 인한 위급한 상황 속에서 탄생된 비상제도라고 보는 것이다. 그 이전 사사시대 까지만 해도 외부의 침입은 간헐적이거나 국지적인 공격이었으나 블레셋, 암몬의 힘이 강해지면서 협공을 하는 위급한 상황이 되어 지속적인 블레셋과 암몬의 군사적 위협으로 부터의 해방의 그리움 때문에 왕국이 탄생된 것이다. 이것을 바로 사울 왕국 탄생의 결 정적 요인으로 보는 것이 알트이다. 이 이론의 토대가 되는 것은 삼상 11장에 있다.

2) 왕국 탄생의 내적인 이유 (Hee-hak Lee주장^^) : 계속된 사사들의 타락과 영적인 무능력 때문에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사 사를 믿을 수 없게되면서 다른 제도를 희망하게 되었다.
a. 엘리의 무능력으로 환상을 보거나 듣지 못했다.(사무엘은 들었으나)- 삼상3:1
→ 종교적, 제의적 측면의 영적인 고갈
b. 엘리의 아들들의 타락 … 삼상2:22-25 → 아버지로서, 영적 지도자로서의 권위 상실
c. 사무엘의 아들들(소사사의 역할)의 타락 … 삼상8:1-5 → 돈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함

3) 사회, 경제적인 이유 : 갓월드(Gottwald)가 주장
후기 청동기 시대에서 철기 문명으로 전환하는 시점에 일어난 사회 여러 가지 현상들 때 문에 왕국이 탄생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사회 여러 가지 현상이란 철의 독점적 소유 로 자본이 축적되는 현상이 생겼고, 거기에 따라 자본이 많은 곳으로 인구가 이동되거나 집중되는 현상이 발생했다. 따라서 계급 구조가 자연스럽게 탄생됨으로 왕국이 탄생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 1) + 2) + 3) 결합되며 이스라엘은 왕국이 탄생되었다.
ꂎ 알트의 이론 보충 - 삼상 4장
블레셋 군대와 이스라엘의 대규모 군사적 전투 있었음을 알려준다. 대략 1050년 경 사건 인데 아벡과 에벤에셀이란 지역이 나온다. 여기에서 두 번에 걸쳐서 전쟁을 하는데 1차는 블레셋이 승리(삼상4:2) 한다. 2차 싸움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법궤를 가지고 가면 승리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법궤를 가지고 전쟁에 나간다. 그러나 17절에 보면 전쟁의 결과는 법궤를 빼앗기고 전쟁에서도 패한다.

→ 갑자기 전쟁에 법궤가 등장한다는 것은 12지파 동맹과 괸련지어 볼 수 있다. 이것은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a. 지파 동맹 전체가 참여했을 가능성이 많다. 그 이전 단독지파가 전쟁을 했고 법궤는 중 앙 성소의 성물이었다. 그러나 법궤를 가지고 전쟁을 했다는 것은 한 지파가 아니라 거 의 지파 전체가 전쟁에 참여했을 가능성을 가진다.
b. 지파 동맹이란 것이 이제는 종교적 공동체가 아니라 12지파로 결합된 이스라엘이라는 공 동체라는 정치적 성격을 지닌 공동체로 변화, 전환되었음을 상징한다고 보아야 한다.

→ 이 전투 결과 생긴 일
a. 블레셋은 요단 서편 중부 산지(아벡과 에벤에셀)를 점령하였다.
b. 중부 산악 지역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무장 해제를 당하고 블레셋의 지배와 통치를 당했 다. 이스라엘 전체 운명을 위협하는 상황으로까지 블레셋이 공격

5.2 사울 왕국의 탄생
블레셋이 지속적으로 공격했으나 결정적으로 왕국을 탄생케 한 것은 암몬과의 전투였음을 말해준다.(삼상 11장)
암몬이 길르앗 야베스(에브라임 지파가 식민지화) 를 공격 - 암몬족의 침입은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공격으로 위축되었고, 이스라엘의 군사력은 서쪽으로 집중되어 있었다. 그 때 암몬이 동쪽을 공격했다. (암몬 자손과 싸운 사사는 입다이고 입다의 방어를 통해 좌절되었다.)
→ 암몬족의 등장과 관련하여 등장한 것이 사울이다.
- 5절 : 밭에서 소를 몰고 오다가 - 이 표현에 근거하여 사울은 토지를 소유한 자유 정착민 계층으로 본다.
- 6절 : 사울이 하나님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어 구원자로 나서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온 다. 이 이야기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다윗, 솔로몬은 하나님의 신에 감동 되어 왕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의 신을 받아 구원자로 나서고 왕이 된다. 하나님의 신은 대사사들을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로 탄생시키는 필수적인 요소이다. 군사적 지도자로 왕이 된 것이 사울이다. 사울 왕국의 특징은 군사 왕국 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있었던 사사들과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영을 받아 군사적 인 지도자로 되었다는 것이고 지금까지 있었던 사사들과의 차이점은 사울은 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울 왕국 탄생은 사사 전통의 연장선상(하나님의 영)에서 탄생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사울 왕국의 특징이자 한계점이다.
- 11:1~11절에서와 12~15절까지는 이미지, 내용이 다르게 등장한다.
a. 11:1~11절 까지에서는 용감무쌍한 사울로 나온다. 전쟁의 용사로서의 사울은 마치 대사 사처럼 행동한다. 이 구절에서 “구원하다-עꚃꖷ” 라는 중요한 단어로 사울이 군사적 지도 자 임을 설명하고 있다. 사울이 일으킨 전쟁은 거룩한 전쟁으로 묘사는 모티브이다. 하 나님이 이끄시는 거룩한 전쟁에서의 필수적 요소는 ① 하나님의 신에 감동받는 사건(6절 a) ② 하나님의 두려움이 임한다.(7절b) ③ 지파들이 소집 (7절 b) ④ 놀라운 승리- 새 벽: 하나님의 활동 시간(11절) 등이다.

b. 11:12~15절에서는 “ꗗꗛꗪ(왕이 되다, 다스리다, 통치하다)”이란 동사를 사용하여 사울이 왕이 되는 사건이 매우 중요하게 강조되고 있다.
➡ 1~11절까지는 사울의 승리, 그러나 12~15절까지는 하나님의 승리, 하나님의 역사 행위 를 찬양하고 있으며 사울은 매우 겸손한 사람으로 자기의 승리를 하나님께 돌리는 장면 이 13절에 나타난다. 이처럼 두 개의 서로 다른 모티브가 하나의 연장선상에서 우리에게 읽혀지고 있다.
15절은 매우 중요한데 여기에서 중요한 단어는 “모든 백성”, “여호와 앞에서”인데 12지 파의 동의하에 사울은 성소에서(여호와 앞에서-문학적 수사법) 왕이 되었다. 즉 왕등극 식을 성소에서 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현존, 권능을 인정하는 인간적, 신앙적 고백이라는 것이다.
cf. 다윗도 여호와 앞에서 왕이 된다. 그러나 솔로몬은 성소에서 왕이 되지 않고 골짜기에 가서 왕이 된다. 이것은 전통적 이스라엘 왕국의 색깔과 다른 고대 근동 왕국으로의 전환을 말한다. 즉 제도적 왕국으로의 변환을 의미한다.(교수님 책 머리말 참조)

ꂎ 사울 왕국의 성격(특징)
1. 사울 왕국은 고대 지파 전통의 연장선상(고대 지파 전통을 계승한 왕국-사사의 전통 간 직)에 있는 왕국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이란 단어가 나온다. 사울이 왕이 된 것은 12지파 동맹의 왕이라는 성격을 갖고 있다. 즉 12지파 동맹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는 성격을 말한다. 사울 왕국의 토대는 지파 동맹으로 사울은 12지파의 동의와 찬성을 통해 서만 인정될 수 있는 왕이므로 12지파가 부인하면 왕으로서의 권위 상실 당할 수밖에 없 다.

2. 군사왕국이며 카리스마적 왕국이다.
→ 이 말은 적들의 공격을 방어하면서 생긴 군사 왕국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울이 가진 왕으로서의 임무는 통치가 아니라 전쟁 수행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능한 통치자를 뽑은 것이 아니라 유능한 군인을 왕으로 뽑은 것이다. 그래서 사울 왕국은 카리스마적 왕국의 특징인 조직이나 제도가 체계화 될 필요가 없는 왕국이었다. 그러므로 사울은 전 쟁의 영웅이고 카리스마적 군사적 지도자로 그의 임무는 계속적인 전쟁 수행을 해야만 하는 사명을 가진 왕이었다.
cf. 카리스마 지도자가 빨리 세워나가야 할 것이 제도를 빨리 마련하여 행정, 조직을 체계화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울은 이것을 제대로 못해서 망하게 되는데 이것이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한계라고 할 수 있다. 다윗은 수도를 만들고 법궤를 이동하고 조직 정비를 잘했다.

3. 사울 왕국은 한 민족의 왕국이지 영토적 의미의 왕국은 아니다.(팔레스틴의 왕은 아니다)
→ 사울은 이스라엘 민족만의 왕이지 영토에 따른 왕은 아니다. 즉 사울 왕국은 ‘어디서부 터 어디까지다.’라고 말할 수 없다. 특별히 북쪽에 있는 가나안의 많은 도시국가들은 사울 왕국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래서 사울 왕국은 사울 왕국의 영토의 경계가 완성된 것 은 아니다.

5.3 사울 왕국의 종말
1. 사무엘서의 구조
- 삼상 1-6장 엘리와 사무엘
4-6장 법궤 이야기
- 삼상 7-12장 사무엘과 사울(사울이 왕위등극사)
- 삼상 16장- 삼하 8장 사울과 다윗(다윗의 왕위등극사)
- 삼하 16장- 왕상 2장 다윗과 솔로몬(다윗의 왕위계승사)

➡ 여기에서 사울 왕국의 종말에 대한 초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곳은 삼상16장부터 삼하 8장까지이다. 이곳은 다윗의 왕위 등극사가 적힌 부분으로 다윗 왕위 등극사 내에 사울 왕국의 종말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가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
삼상 16장부터 삼하 8장까지는 신학적인 역사작품이다. 즉, 역사적 사실이나 객관적 사 실을 보도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기록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한다는 것이 다. 또한 원래 초라한 목동이었던 초라한 주인공 다윗이 어떻게 왕으로 등극하게 되었냐 에 초점을 두고 있는 친다윗적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때문에 다윗이 자수성가한 후 왕 으로 등극하는 계급의 상승을 가져올 수 있었던 이유를 신학적 관점으로 풀이해나가기 때문에 다윗의 지혜로움, 용감무쌍등의 자질이 설명될 수밖에 없음도 기억해야한다. 반 면 주인공 다윗이 부각되기 때문에 사울이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들이 동시에 기록 되어 있다. 다윗의 상승은 곧 사울의 하락을 의미하는 이분법적 구조가 이 내용들 안에 서 골격을 이루고 있다. 결론적으로 사울 왕국이 망하게 된 이유가 객관적 사실이라기보 다 역사적 사실에 기초해서 신학적 해석을 통해 사울 왕국의 패망의 원인에 신학적 정당 성을 진술하고 있기 때문에 사울의 이야기를 다윗의 등극사 내에서 읽을 때 사울은 비관 적이고 부정적인 인물로 부각될 수밖에 없다. 이것과 대조하여 사울의 왕위 등극사가 기 록된 삼상 7-12장까지에서는 사울이 긍정적으로 평가되며 사울상이 다르게 나타나고 있 다.

ꂎ 다윗의 등극사에 대한 아트루 바이저(A.Weiser)의 평가
① 많은 통속적인 다양한 전승들을 내포하고 있다.
② 그러나 주제, 구조, 신학에 있어서 통일성있는 작품이다. 즉 저자가 한 사람에 의한 통 일된 구조이다.
③ 다윗 왕국 초기의 기록이며 기록의 목적은 다윗 왕국의 신학적 정당성을 위해 다윗 왕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왕임을 나타내기 위해 기록되었다.
④ 다윗을 왕으로 등극하기 위해 각인된 언어가 몇 가지 있다.
a. 하나님이 다윗을 선택하셨다.(רꖏꔯ) / 하나님이 사울을 버리셨다.(סאַꗪ) … 삼상16:8ff/ 삼하3:10/ 삼하6:21 에서 רꖏꔯ 와 סאַꗪ 가 계속 반복되어서 나온다. 이 각 인된 언어들의 반복을 통해서 독자들은 하나님이 다윗을 선택하셨고 사울은 버리셨음을 알 수 있다.
b.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하셨다. (וֹמꘟ:with him)
… 삼상 16:18/ 18:12,14,28/ 20:13/ 삼하5:10 절 등에서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하셨다는 주제를 지닌 단어들이 등장하고 있다.
c. 다윗은 사울의 죽음에 무관하다.
… 삼하 24장 / 26장 / 삼하1:11ff/ 2:4b-7
d.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겸손했다.
… 삼상 23:1-12 / 30:7 / 삼하2:1
➡ 이런 각인된 언어와 논조가 다윗의 왕위 등극사를 이끌어가는 주제이다. 그러므로 사울 은 언제나 부정적이고 다윗은 언제나 긍정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사울의 쇠퇴, 몰락은 역 사적 필연이었고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였음을 말하고 있다.

2. 사울의 실패 원인 (신학적 해석)
① 삼상 15장 : 아말렉 사람이 물건을 탈취한 이야기
… 사무엘이 사울에게 다 진멸하고 죽이라 명령했으나 사울은 좋고 기름진 것은 자기의 것 으로 취하였다. 이것은 사울이 성전(holy war: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 전통을 어김 으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개인의 용맹스러움을 자랑한 것이다.
② 삼상13장 : 사울의 제사 집례 사건
… 블레셋과 전쟁을 하려고 하는데 사무엘이 늦게 오자 조급한 사울이 길갈에서 제사를 집 례하였다.
③ 삼상28장 : 사울이 엔돌의 무당을 찾아가는 이야기로 우상숭배와 관련있다.

➡ 사울의 실패 원인이 종교 문제(역사적 관점의 문제가 아니다.)와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3. 사울 왕국의 파국에 대한 역사적 접근
① 블레셋의 군사적 우월성(발달된 무기와 군대조직)과 블레셋의 끊임없는 침입
** 사울 군대의 조직 : 군대라는 약간의 모양새만 갖추기 시작했다. 삼상14:52절에 보면 적은 수의 상비군과 힘있는 자만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울은 상비군을 창설하고 영속적인 군대 지휘관을 임명했는데 여기에서 중요한 인물은 요나단과 아브넬, 다윗등이 사울 군대 조직에서의 지휘자들이었다

… 사울에 관한 이야기를 보면 블레셋과의 전쟁이야기가 많다.
a. 삼상13:2-14:46 절에서 블레셋과의 1차 대규모 전쟁이 있었다. 이때 사울은 요나단을 군 대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길갈에 군인을 모아 기습 공격을 단행한 결과 블레셋은 패하여 달아났다.
b. 삼상 14:52/ 17:1f/ 18:6,7 / 18:17,21,25,27 / 23:1 절 등에서는 사울왕국과 블레셋 국 경 지대에 끊임없이 국지전이 있었음이 보도되고 있다.
c. 삼상28-31장에서 블레셋의 반격으로 2차 대규모 전쟁이 있었다. 블레셋은 아벡에 군대를 집결하고 기브아로 바로 진격하지 않고 이즈르엘로 진격한다. 이것은 하나의 군사적인 작전으로 이것의 의미는 블레셋 군대가 북쪽 지역에 살고 있는다른 해양 민족들과 연합 전선을 구축했음을 말하고 또 하나는 사울의 영토 중에서 가장 방위선이 취약한 지역을 선택해서 이스라엘이 갈릴리 지역의 지파들(잇사갈, 납달리, 스불론, 아셀 같은)과 연합 전선을 구축하지 못하도록 짠 치밀한 군사작전이었다. 이러한 블레셋의 공격은 지형적 문제를 최대한 활용한 블레셋의 공격이었다. 전투는 길보아 산(이즈르엘 지역에 있는 산)에서 발발하였는데 성경 본문에서 길보아 산에서의 전투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지만 전투 결과는 사울 군대가 완전히 패배하여 뿔뿔히 도망하였으며 사울의 세 아들은 전사 한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사울의 죽음에 대해서는 삼상31장에서는 자살로 나오고 삼하1 장에서는 사울이 요청하여 소년이 죽인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그리고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의 시체와 그 아들들의 시체를 취해서 벧산 성벽에 매달아 두는 것으로 나온다. 벧산 성벽에 매달아 준 시체를 후에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밤에 몰래 취해서 화장 시켜주는 장면이 삼상31장 마지막 부분에서 볼 수 있다. 이 부분은 사 울의 평가를 강하게 부각시키는 관점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화장이 란 흉악범이나 종교범죄자에게만 해당되는 방법이고 나머지는 매장하는 형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cf. 사울 죽음에 관한 보도- 서로 다르게 진술되고 있다.
대상10:12절에서는 장사지냈다./ 삼상31:12-13절에서는 화장이라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대상은 사 무엘상을 원본으로 썼기 때문에 화장한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장사지냈다고 보도하고 있 는지는 신대원에서 배우도록 하자.

2차 대규모 전쟁의 결과 블레셋 사람들은 영토를 많이 빼았았다. 특히 갈릴리, 요단 동 편 지역, 북부 지역의 영토를 획득하였다. 아마도 에브라임과 베냐민 지파의 일부 지역 까지 획득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② 12지파 동맹의 지지를 상실했다( 내적인 갈등 )
… 사울이 왕이 된 다음 많은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파 동맹과의 갈 등이 끊이지 않았었다. 구약 본문은 지파 동맹의 최고 지도자인 사무엘과 왕 사울간의 갈등, 결별 등의 사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다. 갈등의 이유는
a. 군대를 조직하는 과정에서 사울은 결혼한 남자도 징집했다. 이것은 결혼 사람은 징징의 대상이 아니라는 지파 동맹의 원칙을 왕이 파기한 것이므로 지파 동맹은 지원 세력이 아 니라 반대, 저항 세력으로 바뀌게 되었다. 사울은 강한 중앙 집권적 왕국을 만들려고 노 력하였으나 지파 동맹은 지파 동맹이란 테두리 안에 왕국을 만들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갈등이 생긴 것이다.
b. 거룩한 전쟁의 원칙을 사울이 지키지 않았다.
… 지파 동맹 시대의 전쟁 방법은 모든 탈취한 물건은 야웨의 것이라는 성전(holy war)사상 을 가지고 있었으나 삼상 15장에서 사울은 전쟁 후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며 값지고 좋은 것을 자기에게로 취했다.
c. 삼상13장에서 제사를 집례했다.
… 왕의 제의적 역할과 왕의 세속적 역할(전쟁 수행 및 통치)의 관계가 갈등을 일으킨 것이 다. 왕의 세속적 역할이 강화되면서 오랜 제의전통과 마찰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cf. 삼하 6장에서 다윗은 스스로 에봇입고 제사장 역할을 한다. 솔로몬도 일천번제를 자기가 드리며 제사장 역할을 한다. 후에 왕의 제의적 역할과 세속적 역할이 통합된 것을 알 수 있다.

➡ 사울은 지파 동맹을 근본으로 왕이 되었지만 지파 동맹의 테두리(한계)를 넘어서지 못하 고 쓰러지고 말았다. 다시말해 한발짝 더 나아가려고 하자(지파 동맹 테두리를 벗어나려 고 하자) 지파 동맹이 사울을 거부한 것이다. 지파 동맹 내에서의 왕국과 세속적 의미의 왕국 사이에서 사울 왕국은 난파당하고 말았다.

6. 다윗 왕국
6.1 다윗에 대한 전승들- 두 부분에 들어가 있다.
1. 두 부분의 다윗 전승
a. 다윗의 왕위 등극사 : 삼상 16장~ 삼하 8장
b. 다윗의 왕위 계승사 : 삼하 9장~왕상 2장
- 다윗의 왕위 등극사의 주제는 사울의 패망과 다윗의 성공이다. 다윗의 집권 과정이 체계 적으로 진술되고 있는 내용이다. 하나님이 다윗의 왕위 등극을 보이지 않게 인도하셨다는 메시지를 나타낸다.
- 다윗의 왕위 계승사에서는 솔로몬이 어떻게 왕이 될 수 있었냐는 이야기가 주된 주제로 등장한다.
➡ 다윗의 왕위 등극사와 왕위 계승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다윗에 대한 상이 통일적이지 못 하고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호 모순적 다윗상 제시)
다윗에 대한 긍정적인 상은 원수에 대한 호의적인 태도, 하나님을 향한 깊은 신앙심, 외 모가 준수, 전쟁의 용사 등으로 주로 왕위 등극사 내에서 각인된 언어로 이상적인 인물 로 등장되고 있다. 그러나 부정적인 상은 대표적으로 우리아를 죽인 범죄인으로 묘사되 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역사적 관점에서 엄밀히 보면 왕이 군사를 전쟁터로 보내서 죽 인 것이 왕이 그렇게 비난받을 만한 행동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우리아를 죽인 범죄인 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은 고대 역사 문헌에서 찾아볼 수 없는 왕의 범죄를 아주 자세히 부각시킨 본문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후계자 결정에 있어서 성격이 우유부단한 것(왕 의 계승권 문제로 결단력없는 왕의 모습을 부각), 블레셋의 용병 대장이 된 다윗은 민족 의 배신자같은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야웨 종교를 가나안화(혼합 종교화) 시키 는데 시발점이 된 다윗의 상, 다윗은 권모술수가 능한 타고난 전략가, 정치가로 묘사하 고 있는 상은 부정적인 다윗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상호 모순적 다윗 상에서 어떤 것이 신학적인 해석인지, 어떤 것이 역사적인 다윗상인지 구분할 수는 없다. 이런 모순 적이고 양면적인 다윗상으로 전하고 있지만 대체적으로 다윗의 왕위 등극사는 거의 다윗 의 긍정적 상만을 이야기하고 있는 친 다윗적 작품이고 다윗의 왕위 계승사는 다윗의 부 정적인 상이 계속 부각되고 있는데 특히 삼하 11장(우리아를 죽인 다윗), 13, 15장(압살 롬의 반란으로 인한 다윗의 초라한 모습 부각) 등에서 부정적 다윗상이 부각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다윗의 왕위 계승사가 기록된 부분을 친다윗적, 친 솔로몬적이라 부르기는 어렵다. 그동안 로스트는 다윗의 왕위 계승사를 친다윗적, 친솔로몬적이라고 평가하면서 솔로몬의 왕위 등극의 신학적 정당성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뷔르트 바인이란 신학자는 왕위 계승사 안의 반다윗적, 반솔로몬적 경향을 읽어내야만 된다는 것으로 전통적인 로스트의 주장에 반대하였다. D.M. 건이란 학자는 왕위 계승사가 단일 저자의 작품이 아니고 서로 다른 복합적인 전승의 결합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2. 다윗의 전승에 대한 특징
사울에 대한 전승은 설화적이고 전설적이고 일화적인 민담 전승의 특징을 갖고 있다. 즉 덜 역사화 되었음을 의미한다. 사울에 관한 이야기 들 중 역사적 사건을 진술하는 것은 매우 약하다.(예외-삼상11장) 반면 다윗의 전승은 역사적 사건에 대한 능동적 참여의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 다시 말해 다윗의 집권 과정, 다윗의 통치, 왕위 계승이라는 다양한 역사적인 주제가 비교적 연대기적으로 정확하게 기록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다윗이 어떻게 등장하고 통일 국가를 어떻게 세웠으며 다윗이 죽기까지의 사건을 역사를 바라보는 눈을 갖고 역사 의식을 갖고 접근하는 특징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다윗 시대에 와서야 처음으로 역사서가 기록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역사서의 등장은 역사를 만들어 가는 주체와 객체가 인간이라는 각성을 갖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으로 역사의 주체가 바뀌었으며 이것이 역사의 개념의 탄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부터 하나님은 인간 뒤에 숨어 계시는 분으로 고백하기 시작하였고 하나님은 더 이상 기적적, 초월적인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분이 아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직접적으로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분이 아니고 인간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역사를 만들어가고 역사에서 승리, 패배, 고난받는 주체 객체로서의 인간, 인간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고 하나님은 역사의 뒤에 숨어 계신 분으로 고백하고 있는 작품이 다윗의 왕위 등극사와 왕위 계승사의 특징이다. 즉 인간 자신이 역사를 만들어가지만 그 뒤에서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는 고백이다. 하나님을 잘 믿는 신앙인의 결단을 통해 하나님이 역사를 이끌어 가신다. 악한 자는 악한 자의 방법대로 살도록 두신다. 이것은 역사의 새로운 인식방법으로 인간의 본성에 대한 근본적인 파악과 아울러 하나님은 역사 뒤에 계신 분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이러한 다윗의 전승은 세계 최초 역사서인 헤로도토스의 <역사>보다 400-500년 앞선 역사 기술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6.2 다윗의 등장
1) 다윗의 고향
예루살렘 남쪽 5마일 정도 떨어져있는 유다 지파의 수도인 베들레헴으로 이곳은 후에 남쪽 지파에 위치한다. 참고로 사울의 고향은 베냐민 지파의 기브아인데 이곳은 후에 북쪽 지파에 위치한다. 1대왕인 사울은 북쪽 지역에 있는 사람이고 2대 왕은 남쪽 지역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남과 북의 갈등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2) 다윗과 사울의 만남 - 두 가지 전승이 있다.
① 다윗의 음악적 재능 때문에 사울과 만나게 된다는 전승 : 삼상16장14절부터 23절
이 부분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의 신이 임한 인물이고 사울은 악신이 들린 인물로 다윗이 부각되고 있다. 그러나 다음 부분 삼상 17장의 골리앗 이야기를 보면 사울이 다윗을 모르 게 나온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다윗과 사울의 이분법적인 도식은 후대의 신학적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② 다윗은 사울의 무기를 들고 다니는 사람으로 등장(삼상 16:21)하는데 이 전승이 더 역사 적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본다.
삼상 17장의 골리앗 이야기는 다윗의 용맹스러움을 찬양하고 있다. 그러나 삼하 21장 19 절을 보면 베들레헴 사람 엘하난이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를 죽였다고 나온다. 우리 성경 에서는 앞의 밑줄 친 부분이 작은 글씨로 기록(70인역을 보고 우리 성경에서 삽입)되어 있는데 히브리 성경에서는 갓 사람 골리앗 만 나온다. 히브리 성경에 의하면 엘하난이 골 리앗을 죽인 것으로 나온다. 이 본문 때문에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다윗이 전쟁의 용사였 던 것은 사실이지만 골리앗을 죽인 것은 엘하난일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두려움의 대상 인 골리앗을 죽인 엘하난을 향한 찬양이 후에 다윗의 찬양으로 소급된 것으로 본다. 다윗 을 더 신학적으로 미화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 결론적으로 ①과 ② 중에서 역사적인 사실은 ②가 더 역사적 사실로 다윗은 용사로서 사울의 최측근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사울 밑에서 군사적 업적을 남겼고 탁월한 군인으로서 인정받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울은 자기의 딸 미갈을 주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고대에는 위대한 장군에게 딸을 준 관습이 있다. 삼상 18장에서 20장을 보면 다윗과 사울 사이에 알력이 생기는 것을 볼 수 있고 결국 다윗이 사울을 떠난다. 구약에서는 사울과 다윗의 갈등의 원인이 다윗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사울에게 있는 것임을 말하고자 했다.

3) 다윗의 부각
군사적 업적으로 인해 대중의 인기를 독차지 하였다. 삼상 18:7절에서 사울이 죽인 수는 천익 다윗이 죽인 자는 만이라고 백성들이 찬양하고 당시 백성들에게 회자되었던 소문이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의 미움을 사게 되고 다윗이 왕궁을 떠나서 자신의 친족, 가족, 혈족 중심의 개인 용병대를 조직했다. 또 세 부류 환란당한 자,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윗을 따랐는데 환란당한 자는 억압당한 사람이란 뜻이고, 빚진 자는 사기를 당한 사람, 마음이 원통한 자는 한 맺힌 사람을 뜻하는 것으로 즉 이들은 죄없이 억울한 일은 당한 사람들로 법적, 경제적인 기반이 없는 사람들이 다윗을 따라갔다는 동정적인 표현이다. 이 무리가 400-600명 정도 된다고 얘기하고 있는데 삼상 22:1-5절에서는 다윗이 아둘람 지역의 굴로 도망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굴이란 곳은 사람이 살지 않는 곳으로 어떠한 민족도 자기의 소유로 내세울 수 없는 곳을 말한다. 삼상 23:13절을 보면 다윗을 따른 처음의 400명이란 숫자가 600명으로 증가되었음도 볼 수 있다. 다윗을 따라 다닌 사람들이 용병이 되었고 다윗은 장군이 되었다. 여기에서 다윗 왕국 탄생의 기초(태동)를 볼 수 있다. 다윗을 따라 다닌 군대는 다윗의 개인 군대로 (cf.사울은 지파 동맹에서 파견된 군사) 다윗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개인 군대라는 것은 지파 동맹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으로 다윗 왕국의 기초는 지파 동맹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다윗 왕국의 의미는 지파 동맹의 완전한 붕괴를 뜻하는 것이다.

4) 다윗과 남쪽 유다와의 관계
삼상25:42-43절을 보면 다윗이 두 여인과 결혼하는 내용이 나온다.
a. 42절에서는 헤브론(남쪽 수도 된다.)에서 남쪽으로 10마일 정도 떨어진 갈멜 지방 출신 의 나발 부인 아비가일과 결혼
b. 43절에서는 헤브론 남동쪽 13-16 마일 지점에 위치한 이즈르엘(북쪽 이즈르엘이 아님을 유의하라) 출신의 아히노암과 결혼
➡ 남부 유다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기 위해 정략 결혼을 하여 남쪽 유다 사람들과 밀접한 관계를 취하는 다윗의 모습으로 후에 다윗은 블레셋의 용병으로 가있었지만 사울이 죽은 후 남쪽 사람들이 왕을 선택할 때 유다 지역을 보호할 수 있는 용사로 다윗을 생각하여 왕으로 삼게되는데 중요한 작용을 한다. (다윗 본인도 유다 출신이고 부인도 남쪽 출신)

5) 블레셋의 성 가드(Gat)의 왕 아기스의 수하에 들어간 다윗 : 삼상 27장
- 블레셋의 군사 제도는 돈을 주고 용병을 고용하는 제도이다. 블레셋 다섯 도시 중의 하나인 가드(Gat)의 왕 아기스의 용병이 된 다윗은 시글락과 인근 영토를 그 대가로 받고 필요할 때 군역을 제공하게 된다. 이것의 의미를 사울과 비교해보면 사울은 고향 기브아에서 거주했지만 자기 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미 다윗은 왕이 되기도 전에 한 도성의 군주가 되었다는 의미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아기스의 수하에 들어간 사건은 약간은 이해가 되지 않는 사건이다. 다윗이 아무리 사울에게 쫓겨 다닌다고 해도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원수지간인데 이것이 역사적으로 가능했을까? 라는 물음이 생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기에 역사적으로 가능한 사건이라고 본다. 다윗과 사울의 갈등관계를 블레셋에서는 이용하여 사울을 대항할 수 있는 인물로 다윗을 십분 활용한 것이다. 반대로 다윗에게 있어서 도망자의 신분을 접고 적군이기는 하지만 사울의 공격을 피할 수 있는 최고의 조건이었고 자신의 세력을 확대, 강화 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고 볼 수 있다. 또 하나 플러스 요인은 블레셋 사람들의 발달된 군사 조직, 전술, 무기 등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다윗에게 제공된 것이기 때문에 블레셋과 다윗의 관계는 형성될 수 있었다.
- 삼상 30:26-30절에 보면 다윗이 전쟁에서 얻은 탈취물을 유다 장로들에게 보낸다. 다윗은 유다 남쪽 지방 장로들을 중심으로 계속해서 접근하여 그들에게 환심을 샀고 배신자가 아니고 계속적으로 유다 장로들과 좋은 관계를 가진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다윗이 조국을 배반한 사람이 아님을 말하려는 신학적 메시지이다.
- 삼상 30:16절에서 유다 지역에 있는 남쪽 네겝 지역(사막 지역)을 공격하였는데 여기에서 다윗이 공격한 도시는 블레셋 사람들과 동맹 관계를 맺은 지역을 중심으로 공격한 것으로 이것은 블레셋을 친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의미는 아기스를 속이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또 한편으로 유다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공격을 말한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아기스에게 들키면 안되니까 다윗이 모든 사람을 다 죽이고 공격한 사실이 밖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철저히 증거를 남기지 않는 다윗의 주도면밀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적군의 수중에 와있지만 조국을 위해 일한 다윗의 입장을 진술하고 있다.

6) 블레셋과 사울의 전쟁
삼상 29-31장까지는 1차 전쟁을 기술하고 있는데 삼상 28장에서 아기스는 다윗을 친위 대장으로 임명하며 전쟁에 참여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만약 아기스 생각대로 다윗이 사울을 공격했다면 민족의 배신자라는 오명을 벗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후에 왕으로 등극할 자격을 상실했을 것이다. 그러나 삼상 29:1-11절 사이에 다행히 블레셋 다른 방백들이 다윗을 불신하고 사울과의 전쟁에서 다윗이 배제되어야 한다고 결정하므로 다윗이 위기를 탈출하는 기회가 생긴다. 그래서 아기스는 할 수 없이 다윗을 배제하고 다윗은 시글락으로 내려가서 시글락을 공격했던 아말렉을 치는 내용이 삼상 30:1-6절에 기록되어 있다. 아말렉 공격에는 다윗의 이중적 계획이 들어가 있었다. 하나는 시글락은 블레셋의 영토이므로 블레셋 땅을 공격한 아말렉을 공격한 것은 한편으로 블레셋을 위한 전쟁이었다. 또 하나의 의미는 아말렉은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괴롭힌 이스라엘의 원수이기도 하므로 아말렉 공격은 이스라엘을 돕는 전쟁이었다는 의미도 있다. 결과적으로 구약의 본문에서 강조하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가 택한 사람을 위기에서 보호하신다는 신학적 메시지가 들어가 있다. 이것이 다윗의 왕위 등극사 저자가 말하려는 신학적 메시지의 핵심이다.

7) 블레셋과 사울의 전쟁의 결과 : 삼상 31장
① 사울과 그의 부하들과 그의 자녀들은 모두 죽었다. 이말은 다윗의 모든 경쟁자는 제 3자 의 손으로 제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② 블레셋 사람의 입장에서는 전쟁이 극심했으므로 큰 타격을 받고 구사력의 쇠약을 가져온 다. 이것은 다윗의 등극을 쉽게 만들어주는 결과가 되었다. 이 전쟁 후 유다 사람들이 다윗을 유다의 왕으로 옹립할 때 블레셋에서는 이들을 막을 힘이 없어서 다윗의 행동에 직접적인 간섭을 할 수 없게 되었다.
③ 다윗의 입장
삼하 1장을 참고해보면 사울의 죽음을 전달한 자를 살해하는 다윗을 볼 수 있는데 다윗 은 사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다윗을 옹호하고 보호해주려 는 의도가 있는 사건이다. 삼하 2장1-4절에서 이 전쟁 후 다윗은 시글락에서 헤브론으로 이동하여 여기서 바로 왕으로 등극한다. 그리고 헤브론에서 7년 6개월 정도 통치한다. 헤브론은 남쪽 유다의 중심 도시이다. (이스라엘의 왕이 아니라 남 유다의 왕)

ꂎ 삼하 2:1-4를 통해 본 역사적 추측
① 역사적으로 보면 다윗은 블레셋의 허락을 받고 헤브론으로 갔을 가능성이 많다.
블레셋은 다윗이 남유다의 왕이되는 것을 반블레셋적 경향으로 보지 않았다. 블레셋의 봉신이 남유다의 왕이 되었다고 생각하여 자신들의 통치 영역이 넓어졌을거라 생각하였 을 것이다)
② 유다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선택의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았다.
다윗을 왕으로 세울 수밖에 없었다. 블레셋은 북쪽을 공격하여 전쟁의 승리하였고 북쪽 과 중부지역의 남쪽 유다의 땅까지 공격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기에 블레셋의 봉신이며 남 유다 출신인 다윗을 왕으로 세우면 블레셋의 침입을 막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였기에 다윗을 왕으로 추대할 수밖에 없었다.

ꂎ 삼하 2:1~4를 통해 본 신학적 추측 :다윗은 신실한 믿음을 소유했을 것이다. 그가 헤브 론으로 간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었고 하나님이 다윗을 인도하셨다. 다윗은 하나님께 헤 브론으로 갈 것인지를 물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다윗은 곧바로 왕이 되었다. 그래 서 왕 등극 기사가 매오 간단하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자가 받는 축복에 대한 신학 적 메시지가 삼하 2:1~4절까지에 기록되어 있다.

8) 유다의 왕이 된 다윗 - 삼하 2:5~4:12절의 내용
a. 남쪽 유다의 왕이 된 이후 다윗은 길르앗 야베스(사울을 장례시켜줌)사람들과 1차 접촉 을 시도하면서 북 이스라엘과의 연합을 모색했다. 다윗은 먼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 게 사절단을 보내고 그들이 사울을 장례시켜준 것에 대해 격려하고 위로해주었다. 이것 은 사울왕과의 접촉점을 찾고 북이스라엘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행동이며 결단으로 철저히 계산된 다윗의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b. 다윗과 이스바알(이스보셋이라고도 한다.)과의 전쟁 - 삼하 2:8~17
cf. 이스바알은 히브리어로 לꘞꔨ שׁיאּ 이고 그 이름의 뜻은 “바알의 사람”이란 뜻이다.
이스보셋은 히브리어로 תꚏꔴ שׁיאּ 인데 그 이름의 뜻은 “수치의 사람”이란 뜻이다.
아마도 원래 이름은 이스바알이라 생각된다. 야웨 종교가 들어오면서 이스보셋으로 개 명되어 본문에 들어왔을 것이라 추측된다.
- 이스바알은 북쪽에 이스라엘 잔당(패잔병)들을 모아 왕국을 건설했다.
① 북쪽 지파 사람들과 남쪽 지파 사람들이 갈등을 예고하는 사건이다. 북쪽 지파는 사울의 사촌이며 동시에 군대 장관인 아브넬(삼상14:51)과 사울의 아들 중 병약한 아들 이스바 알이 결합하여 요르단 건너편 동쪽(강을 건너야 되니 블레셋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지 역)에 위치한 마하나임이란 지방에서 왕국을 건설하였다.
실제 실력자는 군대 장관인 아브넬이었지만 병약한 이스바알을 왕으로 세운 의미는 고대 근동 사상에 영향을 받았겠지만 북쪽 지역은 이미 왕조 계승 사상(세습)이 나름대로 형 성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② 에브라임과 유다의 국경선인 기브온에서 군사적 충돌이 일어난 전쟁의 사건은 다윗의 영 향력이 북쪽 지역까지 미치게 되었다는 것이고 사울 왕국은 왕권을 곤고히 하기 위해서 방어해야되는 상황을 말해주는 것이다.

③ 이스라엘과 유다로 나눠졌다. 사울 시대는 이스라엘 하나뿐인 왕국이지만 종교 공동체라 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이제부터 이스라엘은 유다와 대치되는 정치적 의미를 띄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c. 아브넬과 요압의 적대 관계 (삼하 2:18~3:1)
전쟁을 하는 도중 아브넬이 요압의 동생 아사헬을 죽이는 사건이 생기게 되어 이들 형식 적 2인자들 사이는 피의 복수의 관계가 형성되었다.
삼하 2:7 / 2:17/ 3:1 절을 읽어보면 각 단락의 마지막 문장이 신학적 편집 의도를 보이 고 있음을 볼 수 있다.

① 사울은 죽었고 다윗은 왕이 되었다(2:7)
→ 단순한 역사적 상황을 진술하는 것 같지만 이면에는 하나님이 다윗을 새로운 왕으로 선 택한 것이라는 신학적 메시지가 내포되어 있다.
② 아브넬이 다윗 사람들에게 패하니라(2:17)
→ 이 문장에서도 역사적 진술인 동시에 하나님이 다윗 왕국을 이끌고 계시다는 선언이며 사울 왕국은 다윗 왕국을 이길 수 없다는 신학적 메시지가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③ 다윗은 점점 강해지고 사울은 점점 약해갔다.(3:1)
→ 다윗의 상승을 말하려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 다시 말해 각 단락의 마지막 진술에는 역사적 상황을 요약해주는 것 같지만 그 이면에는 다윗이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상승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d. 다윗에게 투항한 후 살해당한 아브넬(삼하 3:6~39)
① 북왕국에서 아브넬과 이스보셋 사이의 관계가 멀어진다. 아브넬이 죽은 사울의 첩들 중 하나를 취하는 사건이 나오는데 이것은 단순히 개인적 갈등의 사건이 아닌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이스보셋이 아브넬을 비난한다. 왜냐하면 고대 근동 사람들 풍속에 의하면 왕의 첩들 중 하나를 취해 아내로 삼는 것은 왕위 계승권을 소유했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후에 압살롬도 예루살렘에 진격해서 가장 먼저 행한 행동이 아 버지의 후궁들과 동침함으로 자신이 왕권을 계승할 수 있는 자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 여준다.)

② 아브넬이 이스보셋 왕국의 붕괴를 위해 남쪽으로 내려가 다윗과의 비밀 협상을 시작한 다.(삼하 3:12~16)
아브넬이 다윗을 도와줘서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게 해주겠다고 제의한다. 그러자 다 윗은 먼저 사울의 딸 미갈을 자신에게 보내라고 제의한다. 다윗이 정치적으로 뛰어난 발 상을 하는 사람임을 알 수 있는데 사울 가문에 대한 보살핌을 외적으로 보여주려는 치밀 한 계획인 것이다. 즉 사울 가문에 대한 동정적 자세를 취함으로 북 이스라엘 사람들의 환심을 사고 사울 가문과의 관계(사위라는 것)를 강조해서 북쪽에 대한 주장권을 대내외 적으로 암시하려는 의도가 있음을 읽어내야 한다.

③ 요압이 전쟁에서 돌아와서 아브넬과 다윗 간의 협상이 있었음을 알고 신하들을 보내서 아브넬을 다시 소환하여 헤브론 성문에서 살해한다. 그래서 아브넬은 목적 달성을 못하 고 죽음을 당한다. 요압이 아브넬을 죽인 이유는
1) 피의 복수로 동생을 죽인 원수를 갚은 일이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정당한 복수라는 것 을 강조하지는 않는다. 다윗과 요압의 인품을 대비하기 위해서 신학적으로 진술했기에 요압을 잔인무도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2) 다윗과 아브넬의 밀착 관계로 인해 자신이 위태로움을 느껴서 죽였을 가능성이 많다.

- 31절을 보면 다윗은 죽은 아브넬의 시신을 거두어서 모든 예의를 갖추어서 장사 지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브넬을 죽였다고 요압을 질타하지는 않는다. 다윗의 이 런 행동의 의미는 자신이 아브넬을 죽이도록 배후에서 조정했다는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서이다. 본문에서 강조하는 것은 잔인한 요압과는 달리 다윗의 행동에는 흠잡을만한 행동 이 나타나지 않는다. 즉 아브넬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요압에게만 있는 것임을 말하려는 것이다.
- 27절을 보면 요압이 아브넬을 죽인 후 아브넬의 시신이 발견된 곳은 성문 밖이다. 이스라 엘에서 손님의 안전 사고가 성밖에서 생겼을 때는 초청한 사람이 책임이 아니다. 다윗이 뒤에서 조정했거나 손님에 대한 책임은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 33~34절을 보면 다윗이 그를 위한 애가까지 지어주고 금식까지도 한다. 이것은 아브넬의 죽음과 다윗과는 정말로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한번 더 강조하기 위한 행동이다.

e. 이스바알의 죽음 (삼하 4:1~12)
① 이스바알의 피살 : 왕국의 결정권자였던 이스바알이 피살되었기에 북왕국은 무너질 수밖 에 없었다. 이스바알은 낮잠을 자다가 2명의 신하에게 피살을 당했다. 2명의 신하는 칭 찬을 받고 상급을 받기 위해서 이스바알의 머리를 잘라 헤브론의 다윗 왕에게 찾아갔다, 그러나 다윗은 이 두 사람을 처형하였고 이스바알의 머리를 헤브론에 있는 아브넬의 옆 에 묻어주었다. 이것은 다윗은 살해자를 멀리함으로써 살인을 교사했다는 의심을 떨쳐버 리기 위한 행동이었다. 사울왕과 관련된 모든 사람에게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므로 다윗 은 결코 사울 사문을 향해 무력을 사용한 인물이 아님을 강조하는 것이다.
cf. 이스바알의 피살을 보며 염두에 둘 것은 인간 사이에 나타나는 배반과 배신은 가장 가 까운 사람에게서 시작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② 므비보셋에 대한 이야기 (삼하4:4)
이스바알이 죽는 와중에 아무 연관도 없을 것 같은 요나단의 생존한 절름발이 아들 므비 보셋에 대한 이야기가 짧게 언급된다. 므비보셋의 이 이야기는 나중에 9:10절과 긴밀히 연결되고 있다. 므비보셋은 사울의 손자지만 다윗에게 순종했기에 미래를 보장받았지만 이스바알은 다윗에게 대적했기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대비적으로 강조하려 는 신학적 메시지이다.

6.4 이스라엘의 왕 다윗 (삼하5:1~3)
북쪽 장로들이 다윗을 찾아와서 그에게 기름을 붓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시켜 주었다. (전쟁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 아니다.) 북쪽 사람들 입장에서는 사울 집안이 완전히 몰락하게 되자 북쪽을 맡을 인물이 없게 되고 대안이 없게 되었다. 북쪽 사람들이 다윗을 선택한 이유기 삼하 5:1~3절 본문에 설명되어 있다.

① 친족적 결합(1절) - 본문의 “골육”이란 단어의 히브리어는 רꙴꔧ (육체, 몸뚱아리)이다. 이스라엘 장로들이 다윗에게 찾아와서 다윗이 사울과 관련된 사람임을 내세운다. 친사울 적 다윗의 계획이 성공을 거두고 있다. 그의 친 사울적 계획을 대략 살펴보면 사울의 딸 미갈을 취한 것,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환대한 것, 사울을 장사시켜준 길르앗 야베 스 사람들에 대한 감사의 표시, 아브넬의 죽음을 애도한 것, 이스보셋이 죽었을 때 애 도․ 애가․ 금식한 것,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에 슬퍼한 것 등 다윗은 계속적, 반복적으 로 친사울적 행동을 보여준 것이 인정된 것이다.

② 군사적 이유(2절) - 다윗을 위대한 용사 내지 무사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본문 에서 “이스라엘을 거스려 출입하게 한 자”란 말은 이스라엘을 좌지우지한 사람이란 뜻으 로 블레셋의 공격을 물리치고 블레셋으로부터 그들의 압박을 해방시켜줄 사람으로 다윗 을 지목하고 있다.

③ 신앙적 이유(2b) - 다윗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왕이라는 고백이다. 야웨 하나님께서 이스 라엘의 통치권을 다윗에게 위임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a. 본문 2b에서 다윗을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며”로 설명하는데 “목자”란 고대 근동의 일반 적 표상에 의하면 왕을 목자로 표현한다. 수메르 문헌에서 “나는 머리가 검은 짐승의 목 자이다.”란 표현이 있다. 그러나 구약에서는 왕을 목자로 표현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오히려 시23편, 시 28:9, 80:1절 등에서처럼 하나님을 목자로 표현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그만큼 하나님을 왕으로 생각하는 신정 통치에 따르고 있음 을 알 수 있다. 본문에서는 유일하게 다윗을 목자로 표현하는데 하나님의 전권을 위임받 은 대리자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과 가까이 서있는 왕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b. 2b에서 다윗을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며”로 표현하고 있는데 ‘주권자’란 히브리어로 ‘דיꔹꗺ’이다. 이 단어는 단순히 세속적 지도자란 의미가 아닌 종교적 단어로 “하나님의 대리인”이란 뜻이다.

c. 기름부음을 받고 계약을 체결하여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다윗의 모습(3절)
ⅰ)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라는 어구에서 “모든(히브리어 לꗏ)”이란 단어는 문학적 표현으 로 전 북쪽 이스라엘의 만장 일치에 의한 등극이라는 표현이다.
ⅱ) “여호와 앞에서(הꕯꕜꖾ יꗽ꘰ꗜ)”란 어구는 야웨께 제의를 드리는 성소에서 하나님을 증인 으로 삼아서 왕으로 등극시켰다는 내용이다. 즉 하나님의 승인, 하나님의 보호하심 가 운데 왕이 되었음을 말한다.
ⅲ) “언약을 체결하다(תיꙞꔶ תꙝꗏ)”는 어구가 나오는데 이것은 특별한 사건이다. 다윗이 유 다의 왕이 될 때는 없엇던 사건이며 이스라엘의 왕이 될 때만 언약을 체결하는 사건이 나온다. 왕을 세우는데 왜 “언약”이란 단어가 등장하는가? 북쪽 장로들과 다윗이 계약을 체결해서 다윗이 왕이 되었다는 의미는 유다와 이스라엘이 합쳐져서 한 나라가 되었다는 것이 아니고 한 왕 밑에 두 개의 독립 국가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즉 유다와 이스라엘이 통합된 것은 아니다. 다윗은 두 개의 독립적인 정치 조직을 통합하는 인물이다. 그래서 다윗 왕국은 이중왕국이라고 말한다. 두 개의 별개의 정치 조직의 결합이다. 이것은 제 도적인 결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적인 결합을 말한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음에도 유다와 이스라엘은 나란히 공존하는 것이다. 두 개의 서로 다른 국가 형태가 유지되는 것이다. 다윗은 두 개의 통치 영역을 혼자서 다스리는 것이다. 다윗은 먼저 유 다의 왕이 된 후 다음에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이다. 각각의 왕권은 독자적인 법적 토대 를 갖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통일된 정치 조직 속에 통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계약 관계를 알면 후에 세바의 반란의 근본적인 동기가 다윗이 계약을 불이행했기에 반 란을 일으킨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유다 사람들은 삼하 2:4절에서 유다 사람들 이 와서 다윗을 왕으로 세웠기에 다윗과 유다 간에는 주종관계가 형성된다. 그러나 이스 라엘은 삼하 5:3절에서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들이 다윗을 왕으로 삼으로 다윗과 이스라 엘은 계약 관계가 형성된다. 이것을 알고 있으면 후에 남북의 갈등 관계를 이해할 수 있 다.)
ⅳ) “기름을 부어” (3b)
삼하 3:1 사울이 왕이 될 때, 2:4 다윗이 왕이 될 때, 5:3 다윗이 왕이 될 때 기름을 부 어서 세운다. “기름”의 뜻은 번영과 권위, 정결의상징이다.
- 이집트에서는 바로가 봉신들에게 명령하기를 기름을 바른 후에 직무를 수행할 것을 요청 하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정결 의식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 고대 근동의 관습 중 하나는 신의 형상에게 기름을 붓는 행위를 하는 것을 보는데 이것은 경의, 존경을 표하는 권위 의식이다.
- 신약 마 26:6절에서 한 여자가 향유 한 옥합을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것은 예수님의 왕권을 인정한다는 행위이다.
- 구약 창28:18절에서 야곱이 돌베게했던 돌에 기름을 붓는데 이것은 정결의 의미이며 이곳 이 후에 벧엘 성소가 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고대의 사람들은 번영, 권위, 정결의 상징으로 기름을 부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장로들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은 것은 정치적으로 다윗이 북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왕권에 대한 권위를 인정하는 의미인 것이다. 그리고 종교적으로 하나님이 선택한 거룩한 사람이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다.

6.5 다윗의 예루살렘 정복(삼하5:6~9)
a. 예루살렘 도시
- 고고학적 연구 결과에 의하면 3000년경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측한다. 이 때는 요 새화되지 않는 거주지의 형태에서 사람들이 살았다.
- 19,18세기부터는 애굽의 문서에 “예루살렘”이 도시명으로 등장하고 있다.
- 기원전 14세기 아마르나 서신에는 반복, 구체적으로 등장한다. 이 문서에서는 ‘urusalim' 이란 도시명으로 기록되어 있고, 이 도시의 통치자인 압디히바의 거주지로 소개되고 있 다.
- 19세기경부터 요새화된 거주지로 이 도시가 형성된다.
➡ 3000년경부터 900년경까지 있었던 민족(아람+블레셋+히브리)의 대이동 시기에도 한번도 정복되지 않은 도시였다. 예루살렘의 히브리어는 ‘םꗝꚂוּרꖾ’ 또는 ‘םꖹꗛוּרꖾ’ 이다. 이 단 어는 ‘םꗝꚂ + וּרꖾ’ 의 합성어로 ‘ םꗝꚂ ’은 ‘perfect(완전한)의 의미로 완전한 것은 평 화의 상태’이다. ‘ וּרꖾ ’ 는 ‘토대를 놓다. 기초를 놓다.’ 라는 뜻으로 ‘예루살렘’의 뜻 은 ‘평화에 기초를 놓은 도시 , 평화의 토대’ 라는 뜻이다. 예루살렘은 천연의 요새로 구성되어있다. 경사가 가파른 골짜기로 둘러싸여 있다. 동쪽으로는 기드론 골짜기로 서 쪽 남쪽으로는 힌놈 골짜기로 둘러싸여 있다. 해발 760m에 이르는 도시로 예루살렘은 정 복되기에는 여러 가지로 어려운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삼하5:6f에 보면 “소경과 절뚝발 이”가 나가서 싸워도 우리는 이길 수 있다고 말하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말은 그만큼 전 쟁을 통해서는 예루살렘을 정복하기가 어렵다는 여부스 사람들의 자신감의 표현이다.

b. 다윗의 정복 이유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원주민 여부스 족속이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다, 다윗은 유다의 왕이 된 후 예루살렘을 정복하려고 하는데 정복하고자 하는 이유는
① 지리적으로 남과 북의 자연스러운 왕래를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② 헤브론이 유다의 성읍으로는 적합하지만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까지 다윗이 통치하기가 부적합하기 때문이다.
다윗은 헤브론에서 7년 6개울동안 남과 북을 통치하는데 엄밀히 말하면 2년 정도는 이스바알 왕국 시대에 남쪽 유다만 헤브론에서 통치했고 5년 6개월 정도 남과 북을 동시에 통치한 것이다.
③ 예루살렘이란 도시는 아직 남과 북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중립적인 위치에 놓여있다. 이 두 왕국의 영토 사이에 위치한 정치적 중립지대인 동시에 종교적 중립지대였던 것이다. 종교적 중립 지대란 말은 예루살렘에서는 아직 야웨 종교의 전통이 존재하지 않고 이 지역은 가나안의 종교 전통이 남아있던 곳이다. 기득권자가 없으므로 다윗이 나름대로의 종교 정책을 실시할 수 있는 도시였다.

c. 다윗의 예루살렘 정복
삼하 5:6절에 보면 “왕과 그의 종자(졸병)들이” 예루살렘을 정복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여기에서 “그의 종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ויꚂꗺꔣ 이다. 종자-םיꚄꗺꔣ(שׁיאּ의 복수)-란 말은 다윗의 개인 용병을 말한다. 즉 왕국의 군인이 아니고 개인 용병을 데리고 예루살렘을 정복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은 국가의 소유가 아니고 다윗 개인의 소유이다. 그래서 다윗은 예루살렘을 정복한 후 그 성의 이름을 “다윗성”이라고 바꾼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정복 후 초기에는 이곳에 아무나 거주할 수 있는 권한을 주지 않았다. 철저히 개인의 친족, 왕의 측근, 용병들만 살 수 있도록 권한을 주었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했다는 의미는 예루살렘을 개인의 소유로 만들었다는 의미이며, 도시 국가 예루살렘의 새로운 통치자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다윗은 남쪽과 북쪽의 왕이 된 이후 세 번째로 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할 때 그곳에 살고 있던 가나안 원주민 여부스 족속에 대한 관용 정책(?)
이 문제에 대한 학자들의 논란이 많다. 대표적으로
① H.J.Stoebe(스토에베) 와 C.Shafer-Lichten berger (쉐퍼 리히텐 베르거)는 본문을 근거 로 해서 다윗의 평화스러운 예루살렘 정복을 주장하며 피흘림의 사건이 없었다고 주장한 다. 이들은 다윗이 처음부터 예루살렘을 자기 거주지로 생각했기에 피흘림의 사건을 원 하지 않았음을 주장한다.
② Hee-hak Lee 교수님은 군사적인 충돌을 암시하는 구절이 있는데 “수갱(물수로)을 통해서 예루살렘을 정복했다”는 것은 피흘림의 사건을 전제로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왜 본문은 피흘림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지 않았냐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아마도 예루살렘은 후에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거룩한 도시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기에 예루살렘 정복 기사에서 의도적으로 피흘림의 사건을 삭제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6.6 다윗의 종교 정책
예루살렘은 지리적으로도 남과 북 두 왕국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었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자신의 거주지로 삼고 정치적 수도로 삼는다. 정복 후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의 정치적 중심지로 변모시키고 이곳에서 다윗은 남과 북을 큰 어려움 없이 통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윗에게는 예루살렘을 종교적 중심지로 만들어야 한다는 중요한 과제가 남아 있었다. (고대 사회는 정치, 종교 중심지가 분리되면 통치하기 힘들다. 대표적인 예가 사울왕국이었다.)

- 다윗이 예루살렘을 종교적 중심지로 만드는 작업을 크게 두 가지로 하였다.
1.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작업을 하였다. (삼하 6장) - 다윗은 예루살렘을 정복했으 나 그때까지는 야웨 전통과는 무관한 도시였고 가나안의 종교 전통이 흐르고 있었다. 법 궤는 이스라엘 전체를 하나로 묶는 종교적 상징물이었다. 광야 시대동안 법궤와 이스라 엘 백성들은 운명을 같이하였고, 법궤는 곧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의 상징이었다. 가나안 땅 점령 이후에도 법궤가 있는 곳이 이스라엘의 중앙 성소 역할을 하였음을 볼 때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는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겼다는 것은 매우 의미있고 중요한 결정으로 예루살렘을 하나님이 영원히 임재하시는 도시로 만드는데 결정적으로 공헌한 작업이었 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법궤가 있는 예루살렘의 의미를 살펴보자.

① 야웨 신앙 전통과 예루살렘이라는 도시가 연결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예루살렘이 종 교적 중심지로써의 토대가 되었다. 법궤가 있는 곳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이라는 신 학적의미가 있고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선택하셨고 임재, 거주하는 도시라는 의미가 있 다.

② 다윗 왕조의 영원성을 보장한다는 의미이다. - 다윗의 도시에 하나님이 임재, 하나님이 선택하신 도시에서 통치하는 다윗 왕조는 영원히 축복을 받을 것이라는 통치 이데올로기 를 탄생시키는 토대가 되었다. (사울은 블레셋 도시에 법궤를 빼앗겼으므로 법궤와 아무 관련이 없다.) 통치 이데올로기는 고대 근동 사람들이 가진 고대 왕권신수설(왕은 신이 내린 것이다.)을 말한다. 가나안의 왕권 이데올로기와 야웨 종교가 결합되며 다윗 왕조 의 영원성을 보증하는 역할을 한 것이 바로 법궤이다. 시편 2, 20, 21, 25, 42, 71, 101, 110, 131, 135편 등을 제왕시편이라고 한다. 특히 시편 2편에서 “하나님이 너를 낳 았도다.”라는 구절은 왕권신수설과 관련된 모티브이다. 이것이 사울과 다윗의 결정적 차 이인데 즉 사울은 고대 근동의 제왕이념인 통치 이데올로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러 나 다윗은 고대 근동의 제왕 이념과는 다르기는 하지만 육체적 출생에 의한 선택은 아니 지만, 의미상 양자설에 가까운 이념을 근거로 하여 다윗 왕조는 강력한 세력 구축을 위 한 이론적 근거를 얻게 된 것이다. 즉 고대 근동의 제왕 이념을 받아들이면서 신학적 재 해석을 낳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③ 국가 제의의 탄생 - 법궤를 옮겼으므로 왕위(정치)와 제의(종교)는 이제 밀접하게 관련 될 수밖에 없었다. 제의는 이제 국가 통치 조직 안으로 예속될 수밖에 없었다. 만약 법 궤가 다른 곳에 있었다면 법궤와 관련된 대제사장의 역할이 아주 컸을 것이다. 그러나 왕이 대제사장을 임명하는 시대에서 대제사장은 국가의 공무원일 뿐인 존재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왕은 성소의 주인이 되었고, 성소의 법적, 재정적인 책임자가 되었다. 그러므 로 제의란 것은 왕의 통치의 정당성과 안녕을 보증해주는 수단이 되어 제의는 국가 제의 가 된 것이다.
cf. 사울은 제사를 집례하다가 멸망의 원인이 된다. 그러나 다윗은 삼하 6:14절에 보면 에 봇을 입었고 13, 17, 18절에서는 제물을 드렸고, 18절에는 백성들을 축복하는 것이 나 온다. 즉 다윗이 제사장의 역할을 수행했음에도 별다른 문제가 없는 것을 본다. 그것은 국가 제의의 탄생으로 왕은 신의 영역을 대리하였고, 고대근동의 제왕 이데올로기가 다 윗 왕국 안으로 들어오게 되는 효과를 보여주는 것이다.

④ 시온신학의 탄생의 모태가 되었다. - 시편46, 48, 76편이 시온과 관련된 시편으로 시온 은 예루살렘을 말하는 다른 말로 야웨의 거주지이다. 시온신학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 영 원히 보호, 보존될 것이라는 강한 이념이다. 예루살렘(시온)은 세계의 중심지이므로 이 스라엘 뿐만 아니라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순례해야 할 것이다. (사2장) 다 른 모든 도성들이 멸망해도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지키실 것이다는 이념이다. 시온전승은 처음부터 전승된 것-출애굽, 광야, 시내산 전승 등-이 아니라 남왕국의 신학이다. 즉 다 윗 왕국 탄생 이후 새롭게 야웨 종교 안에서 탄생된 신학으로 701년 산헤립이 예루살렘 을 침공한 사건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왕하 18:13-16) 산헤립이 이끄는 앗시리아 는 예루살렘을 침공하려고 노력했고 유다 모든 도시들이 초토화되었으나 예루살렘은 무 너지지 않았다.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앗시리아의 침입에서도 하나님은 예루살렘 을 지키신다는 것을 찬양하는 시온신학이 생긴 것이다. 이러한 시온신학의 뿌리가 된 것 은 법궤 전승 신앙이다. 다시말해 법궤가 있는 곳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고 하나님이 계 신 곳이므로 하나님이 그 장소를 보호하시고 그 백성을 인도하신다는 이념을 시온 신학 이 그대로 가져간 것이다. 법궤는 움직이는 것일 때 그 의미가 있었다. 그래서 법궤 신 학이 탄생된 것이다.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법궤를 옮길 때까지는 법궤의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솔로몬이 솔로몬 성전을 건축한 곳 성전의 어두운 곳으로 법궤를 넣어둔 후에는 법궤의 의미는 사장되었다고 할 수 있다. 대속죄일에 딱 한 번 지성소에서 대제사장만이 볼 수 있었으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현장과 격리된 법궤는 더 이상 법궤로서의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던 것이 앗시리아의 침입으로 다시 예루살렘이 위기를 겪으면서 법 궤의 의미는 발견할 수 없지만 이전의 법궤의 의미를 받아 시온신학이 탄생되었다.

⑤ 926년(남북의분리, 솔로몬 죽은 연대) 이후 남왕국의 신앙적 자존심, 국가의 우월성을 제공하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왕상 12:25-32절을 보면 왕국 분리 후 북쪽 여 로보암이 행한 제의, 정치적인 조처들이 등장하는데 먼저는 벧엘과 단에 국가 성소를 건 립한다. 이것은 예루살렘을 대항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다. 벧엘은 예루살렘으로부터 북 쪽 17km에 위치한 곳으로 야곱(족장 전승과 관련된 성소)과 관련된 장소로 예루살렘보다 더 오랜 야웨 종교 전통이 있는 곳이다. 이렇게 두 곳에 국가 성소를 만든 이후에는 법 궤를 대항한 제의적 상징물로 두 금송아지를 만든다. 그리고 남유다는 유다와 시므온 지 파라는 두 지파만 있고, 북이스라엘은 주요한 므낫세, 에브라임 지파를 속한 10지파가 있다. 또한 비옥한 이즈르엘 평야가 있다. 이처럼 남쪽은 여러 가지 면에서 북이스라엘 에 종교적 열등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지만 법궤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남왕국의 신앙적 자존심과 국가의 우월성을 가질 수 있는 요인이 되었음을 말한다. 예를 들어 예레미야 41:4-10절을 보면 예루살렘이 파괴된 다음에 북왕국에 살고있던 80명의 순례자가 예루살 렘을 찾아가는 이야기가 나온다. 남과 북이 분리되었고, 예루살렘이 파괴된 이후에 북쪽 사람들조차도 정치적 이유 때문에 남쪽으로 갈 수는 없지만 ‘법궤가 있던 예루살렘은 중앙 성소이다.’라는 생각이 남아 있을 정도였음을 보여준다.

2. 아비아달과 사독의 대제사장으로 임명하는 작업을 한다.
아비아달은 실로의 제사장이었던 엘리의 후손이고, 사독은 구약에서는 출신 배경을 자세하게 언급하지는 않지만 학자들은 아마도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이었을 가능성이 많은 것으로 본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기 전 여부스족속의 대제사장이었을 가능성이 크며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한 후에 예루살렘 유화정책으로 그들의 대장인 사독을 다윗의 치아로 들어오게 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렇게 아비아달은 야웨 종교 전통의 소유자이고 사독은 가나안 종교 전통의 소유자라는 서로 다른 이질적 종교 전통이 예루살렘 정복 후 하나로 융합되며 나라를 하나로 만드려는 작업을 다윗은 시도한 것이다. (삼하 15:24-29절) 다윗은 아비아달을 통해서는 이스라엘의 전통 종교를 고수하며 이스라엘 사람들을 흡수하려고 하였고, 사독을 통해서는 가나안의 종교 전통과 가나안 사람들을 흡수하려는 생각을 가졌다. 이렇게 하여 다윗 시대에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가나안 사람들도 이스라엘 나라 안의 한민족이 되었다. 이것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종교 혼합주의의 시발점이 되게 한 사건이었다.
cf. 솔로몬은 종교 혼합 주의를 꽃피운 사람이다.
솔로몬 시대에는 아비아달은 요압과 함께 아도니야를 따르게 되어 후에 솔로몬이 왕이 되 며 아비아달은 아나돗으로 추방당하고 아도니야와 요압은 숙청된다. 그리고 사독은 나단 과 함께 솔로몬을 따라 후에 유일한 대제사장이 되어 제의의 독점권을 소유하게 된 것이 다. 그러므로 솔로몬 이후 예루살렘 제사장은 사독 계열만이 임명된다. 이것은 솔로몬의 바보같은 선택으로 이스라엘 종교사에 있어서 혁명적인 사건이다.- 이것을 통해 이스라엘 종교 전통의 맥이 차단되었다.
다윗, 솔로몬은 종교 혼합 정책을 시도한 인물이다. “가나안의 제의 전통이 합법적인 과정을 거쳐, 야웨 신앙의 전통 속으로 들어왔다. 이스라엘과 가나안의 종교적 대립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다윗의 사독 임명, 솔로몬의 아비아달 추방 사건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통일과 안정을 위해 야웨 종교적 전통을 희생시킨 사건이었다.”라고 볼 수 있다.

6.7 전쟁을 통한 영토의 확장 (교수님 책 p157-162)
다윗은 전쟁을 통해 대제국을 형성하였다. (cf. 솔로몬은 외교 정책으로 왕국을 부흥)
a. 블레셋과의 전쟁 (삼하 5:17-25절에 두 번에 걸친 전쟁이 있었다. )
두 번 다 기습공격을 통해서 승리했는데 전쟁 승리의 의미는
①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가장 강력하고 중요한 적군에 대한 승리이다. 더 이상 블레셋은 역 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팔레스틴의 지배권을 완전히 상실한다.
② 이 전쟁 후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작은 이웃 국가로 전락하고 말았다.

b. 가나안의 도시국가들
사울 시대 대부분의 영토에서 가나안사람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인접하여 살았으므로 영토 구분이 불확실하였다. 그러나 다윗이 가나안의 도시 국가들을 모두 합병시키는 작업을 한다. 그러면서 다윗은 영토의 통일성을 일으켜 놓았다. 삼하 24:5-7절을 보면 다윗 왕국의 국경선이 정확하게 기록되어있다. 여기에서 보면 북쪽 지역의 영토을 크게 확장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나안의 도시 국가들을 정복했다는 것의 의미는 “튼튼한 민족적인 결집을 약화시키는 역효과를 가지고 왔다.”는 부정적인 역할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가나안 도시 국가들이 다윗 왕국 안에 들어오며 가나안인과 이스라엘인들이 한 국가의 같은 민족이 되었으므로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풍습, 종교, 문화, 제도, 법 전통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영토는 엄청나게 커졌지만 야웨 종교 전통으로 보면 순수 야웨 전통 약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c. 모압, 암몬, 에돔, 아람-속국으로 만듬. 직접적 영향은 없다.

d. 다윗의 영토 확장의 의미 및 결과
① 다윗은 모든 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에 예루살렘의 왕, 가나안의 도시국가들을 합병, 그 이전의 유다와 이스라엘의 왕, 암몬에서도 왕(네번째 왕이 되는 것임-북,남,예루살렘의 왕이되었었음), 아람․에돔의 통치자, 모압의 봉신왕, 블레셋의 통치자가 되었다.
➡ 다윗 왕국은 복잡한 정치 조직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다윗 왕국은 이질적인 요소가 결합되어 있는 왕국이다. 수많은 서로 다른 민족, 정치체계, 종교, 문화가 결합된 왕국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종교적인 통일성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② 팔레스틴과 시리아 지역 전체를 포함한 최초의 거대한 독자적인 세력을 이루어냈다는 공 헌도 있다. ➡ 산악 지역뿐 아니라 평야지역, 도시국가들 모두를 총괄한 거대한 왕국이 탄생된 것이다.

③ 이러한 다윗의 거대한 왕국은 다윗이라는 비상한 개인이 만들어 놓은 위대한 업적이었다 는 점이다. 다윗이 이룩해 놓은 거대한 왕국 내지는 정치 조직은 이스라엘 왕국이라는 개념으로 보기보다는 ‘다윗 왕국-다윗이 정치, 군사적 천재적 기질을 발휘하여 이룬 왕 국’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더 적합할 정도이다.
④ 이러한 거대한 다윗 왕국의 탄생에는 역사적 상황이 매우 유리하게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다윗 시대에는 강대국이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 애굽은 21왕조 시대로 국내 문제 로 서로 분열되어 밖으로 세력을 펼치지 못하는 시기였다. 앗수르는 1300년경-900년경의 중간 앗수르 시기로 다윗 당시 1000년 경에는 이미 쇠퇴기에 접어든 때이다. (후에 북이 스라엘을 점령한 것은 신앗수르임을 유의할 것) 그리고 소아시아는 힛타이트(1800-1200 년 경)가 무너진 이후 아직 대체 강대국이 등장하지 못한 시기이다. 즉 다윗, 솔로몬 시 대의 역사적 상황은 세력의 공백기로 다윗, 솔로몬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여 이들은 이것 을 아주 교묘히 잘 이용하여 내적으로는 거대한 왕국을 이루었다. 그러나 종교적으로는 종교가 훼손되고 가나안화하는데 기여한 것이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6.8 압살롬과 세바의 반란 두 반란의 의미 비교 -두 반란의 공통점, 차이점

6.9 다윗의 왕위 계승 투쟁- 왕상 1-2장까지 기술되어 있다.
다윗이 압살롬과 세바의 반란을 어렵게 진압하고 다윗의 통치권이 회복되는 상황에서 다윗이 늙어가며 후계자의 결정이 되어있지 않았다.

6.9.1 왕위 계승 투쟁의 원인
1) 왕위 계승자 임명의 지연 때문이다. - 왕궁 안에는 여러 당파가 존재하고 있었다. 각기 자신들이 추종하는 왕자를 왕위로 옹립하려는 시도가 있었기에 갈등이 존재할 수밖에 없 었다.
2) 왕위 계승 원칙이 불확실했기 때문이다. -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한 번도 왕을 계승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계승원칙이 없었다.

6.9.2 왕위 계승 투쟁의 경과 및 과정
헤브론과 예루살렘에서 난 왕자들 사이에 많은 갈등 속에서 아도니야와 솔로몬이라는 두명의 아들로 왕위 계승자가 압축된다.

1) 아도니야당
헤브론에서 태어난 아들로 이 당의 핵심 인물들은 전통적으로 다윗과 함께 한 보수계열 로 옛 이스라엘 전통을 고수한 사람들이므로 일명 “보수 이스라엘당”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다윗의 오랜 협력자들로 다윗과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사람들이다. 아도니야는 다윗 말기에 자신이 적법한 왕위 계승자라고 주장하기 시작하며(다윗에게 반역하여 왕위 를 계승하려는 것은 아님을 유의할 것) 자신의 친위병을 증가시킨다. 아도니야의 추종자 들은 군대장관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엘리의 후손이며 삼상 22장을 읽어보면 사울이 놉의 제사장들이 다윗을 숨겨줬다는 이유로 그들을 몰살시킬 때 아비아달은 다윗에게 피 했고 다윗이 보호해준 사람이다.) 중심의 사람들이었다.

2) 솔로몬당
예루살렘에서 출생한 솔로몬에게는 예루살렘 신진 세력들이 주로 추종자들이 되었다. 제 사장 사독과 궁중예언자 나단, 군대 장관 브나야를 중심으로 한 이들은 예루살렘적인 사 람들이므로 “예루살렘당”이라고 한다. 종교적으로는 가나안적 전통의 영향을 받은 사람 들이다. 이 추종 세력들은 다윗이 가장 총애했던 여인 밧세바를 철저히 이용한다.

6.9.3 왕위 계승 투쟁의 결과
먼저 칼을 뺀 사람은 아도니야이다. 공개적으로 세력을 규합하고 대세론을 확증시키려는 축제를 집에서 벌인다. 이것을 알고 솔로몬 당에서 긴급하게 반응을 보여서 다윗에게 찾아가 다윗을 설득시키고 솔로몬을 왕으로 공포하도록 만든다. 사독과 나단이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음으로 왕으로 삼게된다.
* 1단계 : 솔로몬은 왕으로 등극하였는데 아직 다윗이 살아있기 때문에 두 명의 왕이 공동 으로 통치한다. (고대 근동에도 이런 경우가 있다.)
* 2단계 : 아도니야를 추방하여 후에 살해시킨다.
* 3단계 : 아비아달은 제사장직을 박탈당하고 아나돗으로 추방당한다. (죽이지는 않음)
* 4단계 : 요압은 브나야가 살해하고 요압대신 브나야가 군대장관이 되는 결과를 낳는다.

6.9.4 솔로몬 왕위 등극의 의의 (왕위 계승 투쟁의 의의)
1) 그의 뛰어난 자질 때문이 아니고 왕위 계승 원칙이 마련되어서도 아니고 그의 어머니 밧 세바의 영향력 때문에 왕이 되었다. 그러면서 예루살렘 출신들을 중심으로 한 신진 세력 들이 세력을 규합해서 계략을 통해 다윗의 임명을 받아낸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 → 이 것은 정통성을 상실하는 사건이다. 왜냐하면 백성들의 후원을 받은 것도 아니고 왕자들 이 모두 인정할 만한 뛰어난 리더쉽이 있는 것이 아니라 왕궁 내에서의 암투 결과 솔로 몬이 왕이 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정통성을 상실했다는 것은 달리 말해 지도력을 상실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결과 솔로몬 왕국에 내재되어 있는 위기, 즉 언제 이것이 무너질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안게 된 것이다.

2) 솔로몬의 임명은 다윗 왕 혼자의 결정이다. → 사울, 다윗이 왕이 될 때의 성경 구절을 보면 “모든 백성”, “모든 장로”, “모든 유다 사람들이”와서 그들을 왕으로 삼았다는 기 사를 볼 수 있다. 삼하 2:4절에서는 유다 사람들이 와서 다윗을 왕으로, 삼하 5:3절에서 는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들이 와서 다윗을 왕으로, 삼상 11:15절에서는 모든 백성들이 사울을 왕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말은 곧 모든 사람(백성)들의 신임과 지지를 받아서 왕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솔로몬이 왕이 되었다는 기사에서는 이런 문구 가 한마디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백성들의 총애나 지지를 받지 못했음을 말하는 것 이다.

3) 왕위 등극 보도에는 “야웨가 임명했다.”는 말이 등장하지 않는다. 삼상 11:15절에 보면 “야웨 앞에서” 기름을 부어서 왕이 되는 내용이 나온다. 야웨 앞에서란 말은 성소에서,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란 의미이다. 그러나 솔로몬의 왕위 등극을 알려주는 기사가 나오는 왕상 1:43절에서는 “우리 주 다윗 왕이 솔로몬으로 왕을 삼았나이다. ”는 말이 나오고 왕 상 1:45절에서는 사독과 나단이 기혼에서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기혼은 예루살렘 물의 근원지로 가나안의 이방 성소가 많은 지역이다. “기혼에서 왕이 되 었다.”는 의미는 결론적으로 솔로몬 왕국은 이스라엘 야웨 종교 전통을 버리고, 고대 근 동의 왕국 형태로 완전히 변모하였음을 보여주는 사건임을 말하는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 다.

7. 솔로몬 왕국
7.1 전승 자료들 : 솔로몬의 행장
솔로몬의 통치에 관해서는 왕상3-11장까지 보도되고 있다. 이 부분은 서로 다른 유래를 지니고 있으며 서로 다른 시대에 쓰여진 여러 다양한 자료들의 모음집이다. 이 안에는 여러 개의 솔로몬에 관한 상이한 상(像)이 각인되어 있다. 다윗 왕국의 탄생과 발전에 대한 전승들은 “다윗의 왕위 등극사”와 “다윗의 왕위 계승사”라는 뛰어난 두 개의 역사신학적 작품 안에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하지만 솔로몬의 통치와 솔로몬 왕국의 번영된 모습을 체계적인 역사신학적 작품으로 집대성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솔로몬 시대의 통치에 관한 기록들 중에서 많은 부분은 소위 “솔로몬의 행장”으로부터 이용된 것들이다. 아쉽게도 솔로몬의 행장은 현존하지 않고 있다.

7.2 솔로몬의 정치
7.2.1 솔로몬의 대내정치
a. 아도니야당에 대한 제거 작업 -반대파 숙청
*1단계: 아도니야는 왕이 되려는 꿈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밧세바를 찾아가 자기 대신 솔로몬에게 아비삭(다윗의 첩)을 자신의 아내로 줄 것을 간청해 달라고 말한 다. 그는 선왕의 부인을 취함으로 자신이 왕위의 권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대 외적으로 과시하고자 했다. 밧세바는 아도니야의 간계를 눈치채지 못했으나 솔로몬 은 재빨리 아도니야의 계획의 배후를 파악하였다. 솔로몬은 아도니야가 자신에 대 한 충성을 배신했으며,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보고 추방 후 살해한다.
* 2단계 : 아비아달을 제사장 직에서 파면하고 아나돗으로 추방한다. 솔로몬은 제사장직에 대한 거룩함을 두려워하여 아비아달을 죽이지는 않았다. 이로 인해 사독만이 예루 살렘의 유일한 대제사장으로 남게 되었다.
* 3단계: 요압은 아도니야가 살해당하고 아비아달이 추방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무서워 야웨 의 장막으로 도망하지만 솔로몬은 성소의 특권을 무시하고 브나야로 하여금 요압을 살해하도록 한다.
➡ 솔로몬은 자신이 왕위에 등극할 때 반대편에 서있던 아도니야 당의 주요 지도자들을 이 런 잔인한 방법으로 제거하고 자신의 왕권을 확고히 다지는 데 성공한다. 솔로몬이 갖고 있는 잔인한 절대 군주로서의 모습은 사울과 다윗의 관대하고 따뜻한 모습과는 대조적이 다.

b. 사울 가에 대한 제거 작업 (친 예루살렘, 친 유다적 정책)
아도니야 당의 주요 인물들을 제거했지만 여전히 불안을 느낀 솔로몬은 또 다른 위협의 세력은 사울 집안의 세력이라고 느끼고 그 중에서 가장 부각된 인물인 시므이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고 시므이를 제거하는데 성공한다. 솔로몬은 자신의 부친에게 과거에 대항했던 사울 집안의 사람을 잠재적 적대 세력으로 간주하고 그를 죽여야만 했다. 남북 대결의 근원을 철저히 차단하려는 솔로몬의 계획이었던 것이다. 아도니야 당에 대한 조치가 보복행위였다면 시므이에 대한 제거 작업은 안전 조치라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c. 여로보암의 반란 진압 (왕상 11:26-28)
왕상 11:26-40절에서는 솔로몬에게 반란을 일으킨 주동자 여로보암에 대한 여러 가지 정보나 반란의 배후 세력에 대해 소개하고 있지만 본문은 우리에게 여로보암의 반란에 대해 너무 요약적으로 알려주고 있기 때문에 반란의 자세한 진행 과정을 파악해 내기는 매우 어렵다. 여로보암은 솔로몬이 죽고 르호보암이 왕이 된 후에 북왕국의 초대 왕으로 등극한 자이다. 여로보암은 에브라임 출신이며 원래 예루살렘의 밀로를 건축하고 다윗 성을 수축하는데 강제로 동원된 사람이다. 그런데 그는 힘이 센 용사이며 부지런한 사람이었기에 자기 지파의 운송 노역을 감독하는 자가 되었다. 여로보암은 자신에게 맡겨진 직무에 충실하다가 자기 지파 사람들에 대한 강한 동정심을 느끼고 왕에게 반역을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로보암은 반란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집트로 피신하였고 그곳에서 솔로몬이 죽을 때까지 체류하였다. 여로보암의 반란의 배후에는 북쪽 실로의 예언자 아히야가 적극 동조하였다.

7.2.2 솔로몬의 대외 정치 :
1) 다윗이 만들어 놓은 국가적인 체제를 유지(현상유지에 주력) - 솔로몬은 다윗의 통치 영 역을 확장하지 못했고 (군사확장하지 못했음) 다윗 영토의 쇠퇴의 시발점이 된다.

2) 솔로몬은 국가 방위력 증강을 위해 노력하였는데 주로 공격보다는 수비 위주였다.
1,400명의 병거, 12만의 마병, 요새의 건축등으로 방어적 군사정책을 펼쳤다.

3) 솔로몬 시대의 주변 상황
a. 에돔의 왕자 하닷
요압의 칼을 피해 이집트로 피신했던 에돔의 왕자 하닷이 돌아와 에돔의 왕이 되고 에돔 의 일부를 독립시키게 되었지만 솔로몬은 에돔을 장악하기 위한 어떠한 군사적 조처도 취하지 못했다. (왕상11:14-22)

b. 아람인 르신의 왕위 등극
아람인 르신이 다메섹을 점령하고 왕으로 등극하여 영토를 확장시켰다. 따라서 솔로몬은 아람인들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였다.

7.3 솔로몬의 건축 활동
솔로몬의 건축 활동에 대한 가장 자세한 보도는 왕궁과 성전의 건축에 관한 것이다. (왕상6:1-7:51)

7.3.1 성전과 왕궁의 건축 (20여년간의 공사)
왕궁의 건축에 대한 보도는 왕상 7:1-12절에서 볼 수 있는데 짧고 대략적으로 기록되어있는 반면, 성전 건축에 대한 보도는 왕상 6:1-36, 7:13-51절에 길고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a. 왕궁의 건축 : 예루살렘 북쪽 지역 확대
솔로몬의 왕궁은 12년 동안에 걸쳐 건축되었으며, 여러 개의 궁으로 구성되어 있는 종합 건물의 형태를 지닌다.
*궁
ⅰ) 레바논 궁 (7:2-5) - 3층 구조로 되어있고, 각 층은 15개의 칸막이 방을 갖고 있다.
이 궁의 용도는 창고, 병기고로 사용되었다.
ⅱ) 기둥 홀 (7:6) - 왕이 공무, 집무
ⅲ) 재판 홀(7:7) - 왕의 옥좌가 있고 거기에서 판결을 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ⅳ) 기타(7:8) - 왕비들

b. 성전의 건축 (7년에 걸쳐서 건축)
솔로몬이 등극한지 4년 째되는 해부터 건축하기 시작하였다. 솔로몬은 964년내지는 965 년에 등극하였으므로 대략 960경부터 건축하기 시작하였다. 성전의 건축은 독립적인 프 로그램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왕궁과 함께 공동으로 계획된 건축물이다. 원래 솔로몬의 의도는 왕궁에 속한 부속건물로 계획되었고 왕과 왕궁의 기도처, 예배처로 계획된 작품 이었다. (성경에는 신학적으로 확대되어 기록되어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위대한 인물 로 기록되어 있다.)
- 성전은 현관-성전-지성소 3개의 방으로 구성된 길다란 직사각형 구조이다. 이 구조는 후 기 청동기 시대의 시리아 성전 건축 양식이다. 이스라엘은 한 번도 성전을 만든 적이 없 었으므로 모델도 없었다. 따라서 시리아 성전 건축 양식을 두로의 왕 히람과 계약을 맺고 두로에서 목재를 가지고 오고 기술공들을 데리고 오는 대신 두로에 있는 사람들에게 솔로 몬은 밀과 올리브 기름을 정기적으로 제공하여 두로의 건축 기술자들이 와서 만든 작품이 다.
- 현관 : 세로5m×가로10m×높이15(그리 크지 않다.)
성소 : 세로20×가로10×높이15 - 성전의 중심홀, 즉 본당을 가리킨다.
지성소 : 세로10×가로10×높이10(정사면체의 구조가 만들어짐)
성전의 총길이는 35m, 높이 15m, 가로 10m의 크기로 만들어졌다.
- 성소와 지성소 사이는 나무벽으로 만들어져 있고 현관과 성소에도 나무는 아니지만 문이 있다. 현관 앞에는 두 개의 청동 기둥이 서있고, 지성소는 창문이 없어서 매우 어두웠다.
* 960년경부터 시작된 예루살렘 성전의 역사
- 587년(586) 바벨론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붕괴되었다.
- 포로에서 돌아온 후 520년경부터 515년까지 제 2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였는데 스룹바벨 과 예수아 중심으로 예언자 학개가 동참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축하였다.
- BC 20-19년 사이 헤롯 대왕이 제 2성전을 개축하여 전혀 다른 성전이 되었다.
높이 25m 가로 50m 세로 50m의 대규모 사이즈의 성전으로 일명 헤롯성전 또는 제 3성전이 라고 불렀다.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바로 이 성전이다.
- AD 70년에 로마 장군 티투스에 의해 완전히 붕괴되는 아픔을 가지고 있다.

7.3.2 이방 성소의 건축 (왕상11:7-8)
솔로몬은 야웨 성전인 예루살렘 성전 뿐만 아니라 이방 성소도 건축한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신명기 사가에 의해 솔로몬이 비판받게 되는 근거가 된다.
① 애굽, 헷족속, 암몬, 모압, 에돔 여인들을 데리고 와서 그들 자신의 신을 위한 성전을 만들어 주었다. 솔로몬은 결혼을 외교적 수단으로 활용하여 인접한 국가의 여인들을 다 데리고 와서 외교를 통해 국가의 안정을 도모하며 이스라엘을 국제 정치에 서게 하였다. 이것은 종교 혼합 현상이 팽배해지는 과정이다.
② 전쟁과 영토 확장을 통해서가 아니라 국제 외교를 통해서 강대국을 꿈 꾼 사람이다. 다 윗이 위대한 정복가였다면 솔로몬은 위대한 외교가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7.3.3 병거성과 마병의 성의 건축
왕상9:15-19절에 보면 말과 전차 부대를 위한 지정된 특구를 만들어 주었다. 므깃도는 수백 마리의 말을 수용할 수 있는 축사 단지가 있다. 공격형이 아닌 방어용이다. 이것은 다윗과 비교해보면 상당히 진일보한 면이라고 할 수 있다. 삼하8:4절에 보면 다윗이 아람과의 전쟁을 통해 수없이 많은 말과 병거를 포획했으나 말을 어떻게 사용할 지 몰라서 말의 뒷다리 힘줄을 끊어서 말들을 불구로 만드는 등 말을 활용을 하지 못한 부분이 나온다. 그러나 솔로몬 시대부터는 말을 활용하였다.

7.3.4 국고성의 건축 (왕상9:19)
솔로몬이 전국에서 거둬들이는 세금, 공물을 비치해놓을 수 있는 성을 만들었다. 왕실을 위한 공물을 비치하는 곳을 만들었다. 솔로몬은 북이스라엘 지역을 12지역으로 나누고 이 12지역의 각 지역에서 한달 동안 왕실에서 필요한 공물을 바치도록 하는 체계적인 조세제도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북쪽 이스라엘에게만 실시한 제도였고 남쪽사람들에게는 이런 부담을 주지않은 친 유다적 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7.3.5 요새지의 건축
국경지대나 주요 교역 도시에 요새지를 방어용으로 건축했다. 하솔(Hazor),므깃도(Megiddo), 게셀(Geser), 벧호론(Bet-Horon), 바알랏(Baalat), 타마르(Tamar)같은 지역에 요새지를 건축하여 견고한 국가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7.3.6 솔로몬 건축 활동의 부정적 결과
a. 대건축 공사에는 엄청난 노동력이 당연히 필요하게 되었고 이 노동력을 강제 노역 제도 를 통해서 감당했다. 다윗 시대 때에도 건축 활동이 있었지만 매우 소규모의 건축 활동 이었다. 그러나 솔로몬 시대에는 대규모의 건축 활동이 있었기 때문에 비이스라엘인 뿐 아니라 약 30,000명 정도의 이스라엘 사람들도 이 건축 활동에 시달렸다. 때문에 백성들 의 불만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b. 강제 노역은 원래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이스라엘 사람은 징집의 의무 는 갖고 있었으나 강제 노역의 의무는 없었다. 그런 가운데 강제적 노역으로 인한 엄청 난 자유가 억압당하고 피해 의식을 느끼며 불만이 팽배해졌다. 왕상 12:4절에 보면 솔로 몬이 죽은 다음 르호보암이 등극할 때 이스라엘 장로들이 와서 “왕의 부친이 우리의 멍 에를 무겁게 하였다.”고 불만을 털어놓는다. 여기에서 멍에란 세금도 해당되지만, 강제 노역도 여기에 속한다. 솔로몬이 이루어 놓은 건축은 겉으로는 화려하고, 위대한 건축물 이라는 기념비적 활동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솔로몬이 죽은 후 남과 북이 분리되 게 되는 부정적인 결과가 나타나게 하는데 일조를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c. 대건축 공사를 하며 엄청난 자원이 필요해다. 돌은 팔레스틴 산지에서 충당되었지만 산 림지역이 벼로 없고 사막과 평야지역인 이스라엘에서는 나무가 부족하여 수입할 수밖에 없었다. 두로의 히람 왕과 계약을 맺어 두로에서 목재를 가지고 오고, 기술공(장인)들을 데리고 오는 대신 솔로몬은 두로에 있는 사람들에게 밀과 올리브 기름을 정기적으로 제 공하였다.

d. 솔로몬은 왕국, 성전 만들고 왕궁의 생활이 매우 사치스러웠다. 백성들은 막대한 경비를 부담해야했다. 왕상 4:22-23절을 보면 솔로몬 성전(왕실)에서 필요한 하루동안의 육류, 곡물의 양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을 보면 얼마나 사치한 생활을 했는지 알 수 있다.

7.4 솔로몬의 국제 무역
솔로몬은 두로의 왕 히람(970-935)을 이용하였다. 솔로몬은 히람이 개척해 둔 지중해 해상권을 이용하였고 히람이 지중해를 독점하였기 때문에 지중해로는 나가지 않고 홍해로 진출하여 아프리카의 오빌에서 금,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왔다. 솔로몬은 이런 해상 무역뿐 아니라 육로 무역도 활발히 진척시켰다. 이스라엘의 독특한 위치를 100%활용하여 통행료를 받는 등 중개무역에도 힘썼다.

7.4.1 두로의 히람왕과의 무역
히람은 건축 자재로 쓰일 백향목, 측백나무를 이스라엘에 보내고 솔로몬은 곡물과 올리브 기름을 보내주기로 협약을 맺고 교역을 시작한다. 솔로몬은 이것을 통해서 국제 무역의 발판으로 삼는다.

7.4.2 아카바만의 에시온-게벨 항구의 건설
이것은 두로와의 합작품으로 더 큰 무역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왕상 9:26-28절을 보면 솔로몬이 두로와 합작하여 새 항구를 짓고 거기에 배를 건조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고고학적 발굴물에 의하면 항구와 배를 설계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두로의 히람은 기술자들을 파견하여 이 무역을 통해 얻어지는 이익의 일부를 얻어 더 큰 부를 획득하였고 솔로몬은 항구의 배 건조를 통해 홍해로 진찰하여 홍해의 해상 무역을 독점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왕상 10:11-22절에는 오빌이란 지역에서 자원들을 이스라엘로 가져온 것이 기록되어 있다.

7.4.3 통과무역(중개무역)
왕상 10:28-29절에 보면 “왕의 상고들”이란 단어가 나온다. 이 단어의 뜻은 대리인, 대상이란 뜻으로 왕의 상고들이 왕의 명령을 받고 병거와 말을 장사하여 이득을 남겨 더 큰 부를 창출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은 애굽사람들에게는 병거를 만들 수 있는 목재와 말들을 수입하여 팔고, 시리아와 소아시아 사람들에게는 수입해서 만든 병거를 또 팔아 이득을 취했다.

7.4.4 에시온-게벨에 구리 제련소의 건설
항구 근처에 구리, 철 같은 광산이 많이 있기 때문에 여기서 나는 풍부한 지하 자원을 제련할 수 있는 제련소를 건설한다. 홍해에서 독점적인 권한이 있으므로 홍해로 올라오는 자원들을 이 항구에서 구리, 철, 동 같은 것을 녹여서 무기, 생필품 등을 만들 수 있는 구리 제련소를 건설한다.

7.4.5 솔로몬의 국제 무역의 의의
a. 솔로몬은 위대한 외교가였을 뿐만 아니라 위대한 사업가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는 활 발한 외교 관계를 펼쳤지만 그것을 통해 국제 무역에 참여하였다. 아버지 다윗이 이룩한 엄청난 대륙을 이용하여 국제 무역을 통해 막대한 이득을 챙기고 국제적 명성을 갖게 되 었다.

b. 경제적인 이득이 솔로몬 왕국에 집중적으로 들어와 왕실은 부유해졌지만 일반 백성들에 게 이 부가 골고루 분배되지 않았다. 백성들 가운데 새로운 계층인 부의 계층이 탄생하 여 이들은 대 지주가 되고 갑부가 되었다. 그러나 나머지 계층은 부가 분배되지 않았으 므로 이들 사이에 빈부의 격차가 생겨 사회 계층의 심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런 국제 무역은 왕실이 있는 예루살렘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경제적 부 는 예루살렘 사람들이 지방 사람들보다 더 많은 혜택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도시민들이 수많은 토지들을 매입하여 지방민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하는 구조적 악순환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고, 예루살렘 사람들과 지방 주민들 간의 대립 관계가 형성되었다. 결론적으로 솔로몬의 국제 무역을 통한 경제적인 이득은 오히려 사회적 갈등을 야기 시키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c. 이런 세속적, 정치적인 솔로몬의 국제 무역이 전통적인 야웨 종교를 숭배하는 사람들에 게는 부정적인 인상을 가져다주었다. 그래서 왕정에 대한 근본적인 거부감을 갖게 되었 으며 후에 솔로몬 왕국이 무너지게 되는 토대를 제공해주었다고 할 수 있다.
➡ 솔로몬 왕은
① 경제적으로 많은 이득을 남기고 국제적으로 활발히 활동했으나 다윗 왕국을 더 이상 발 전시키지 못한 왕이었다.
② 이스라엘의 신앙 전통을 완전히 상실시켜버린 계승자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7.5 솔로몬 왕국의 특징과 의의
a.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활 방식의 변화가 일어난 시기였다.
* 가나안 사람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한 국가를 이룬 한민족, 동일한 국민이 되면서 가나 안 사람들로부터 많은 종교, 문화적 영향을 받으며 살게 되었으므로 야웨 종교의 전통이 훼손될 수밖에 없었다.
* 도시민들이었던 가나안 사람들에 비해 시골출신이며 유목민적 전통을 가진 이스라엘 사람 들은 국제화 물결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b. 이스라엘 사람들의 종교 생활의 변화
솔로몬 등극 이후 야웨 종교가 무시되는 상황에서 정치적 권력의 보호 하에 이방 종교가 이스라엘 안으로 흡입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종교는 자연스럽게 가나안화 되어갈 수밖 에 없었다. 이스라엘 종교는 혼합주의화 될 수밖에 없어 야웨 종교의 정통성이 위기를 맞이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전개되었다. 여로보암의 반란도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반란 의 배후에 북쪽 예언자 아히야를 중심 세력이 있었다는 것은 보수적인 야웨 전통의지지 자들이 이스라엘 종교가 가나안화, 혼합주의화 되려는 것을 막으려는 시도였으며, 여로 보암을 중심으로 해서 새로운 왕국을 세우려는 노력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김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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