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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자료

[[기독자료] ]사도 바울의 로마선교

작성자넓은가슴|작성시간12.01.06|조회수86 목록 댓글 0
사도 바울의 로마선교

1) 로마 선교여행에 관한 사도행전의 흔적 / 21:27-28:31
(1)바울의 체포와 변호/21:27-22:29
(2)바울이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서게 됨/22:30-23:10
(3)바울을 가이사랴로 호송함/23:11-35
(4)벨릭스 앞에서의 바울의 변호/24:1-27
(5)베스도 앞에서의 바울의 변호/25:1-27
(6)아그립바 앞에서의 바울의 변호/26:1-32
(7)바울의 항해와 배의 파선/27:1-44
(8)말타에서의 바울과 로마 도착/28:1-16
(9)로마에서의 바울/28:17-31

2) 유대인들의 반란과 사도바울의 체포
사도 바울이 제 3차 전도여행 보고를 위해 예루살렘에 갔더니 본인이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에게 조상들의 규례와 율법을 폐기하도록 권했다는 오해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작은 소문이 꼬리를 물고 예루살렘 전역에 퍼져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바울을 잡고자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위기상황을 해결하기 위하여 예루살렘교회의 장로들과 야고보는 나실인의 서원을 한  네사람의 결례에 동참하는 것과 아울러 이들의 모든 비용을 사도바울이 지불하는것으로 결론을 맺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 자체에 대하여 신령한 것으로 보았습니다(로마서7:12)  그러나 율법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법으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으로 여기지는 않았습니다(로마서8:2, 갈라디아서3:24),   즉, 율법 자체의 형식에 사로잡혀 스스로 의롭게 되려는 시도 만큼은 용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이 지향하는 목적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형식주의, 습관적 유대주의의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는 유대인들에게 정확한 진리의 방향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러한 진리에 대한 오해로 인하여 발생한 사건은 아시아 지역 유대인의 예루살렘 방문으로 인하여 상황이 격화 되었고 결국 이일로 인해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투옥되어 로마감옥으로 이송되는 고초를 겪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오해를 해소 시키기 위해 나실인 규례에 참석하였던 바울의 노력은 아이러니하게도 또 다른 유대인들에 의해 결국 허사로 돌아간 것이었습니다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들어온 아시아 지역 유대인들은 바울이 이방인 드로비모를 성소에 데리고 들어갔다고 모함하여 무리를 선동하게 되었고,  이 소요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로마 천부장인 글라우디오 루시아(Claudius Lysias)는 장본인인 사도 바울을 체포하였던 것입니다(사도행전23:26)  이렇게 되어 사도바울은 이방인의 손에 넘기운채 5년간 감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의 설득력있는 변증과 논리적 전개는 동일한 유대교적 입장에 있는 아시아지역 유대인과 예루살렘 유대인들을 침묵하게 하였습니다 그로한 호소력은 영적인 측면에서 그의 메세지가 얼마나 진리를 갈구하고 있는가를 대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직전까지만 해도 사도 바울을 죽이기 위해 달려들었던 당사자들을 향한 변론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사도행전22:1~30)

사도행전 22장 4절에서 사도 바울이 전한 메세지는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핵심적인 원리들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첫째, 신앙생활이란 자신에게 향하고 있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발견하고 그것에 순종하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며(빌립보서212),  둘째, 성도들의 삶의 가장 큰 특징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관점에 있는 것이며(히브리서12:2),  셋째,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원리를 성경 말씀을 통하여 계시하고 보존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이방전도에 관한 복음을 증거하자 유대인들은 다시 광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우대인들에게 있어서의 하나님은 오직 유대인들만을 위한 하나님이라는 선민사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와같은 사도 바울의 메세지는 그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신성모독으로 여겨진 연유에서 였습니다

천부장인 글라우디오 루시아(Claudius Lysias)는 사도  바울을 중죄인으로 단정하고 고문을 통해 사건의 전말을 캐내려 하였으나 그가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라는 증거를 제시함으로서 결박을 해산시키고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 공회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문제삼아 5회에 걸친 재판을 개시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침착한 어조로 변증하려 하였으나 제사장인 아나니아의 험악한 반응으로 공회원들간에 시비가 일어나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로마 시민에 대한 정식 재판권은 총독에게 있었으므로 사도 바울이 가이사랴의 총독부로 이송되는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바울에 대한 살해의도가 노골화 되면서 글라우디오 천부장은 예루살렘 주둔 병력 절반을 대동하며 이송을 보다 빠르게 서두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예루살렘에서 안디바드리까지는 지형 자체가 험하고 유대인들의 거주 지역이 많았으므로 각별히 주의 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사도행전23:12~35)

3) 사도 바울의 가이사랴에서의 변론과 송사
사도 바울이 체포된지 만 5일만에 헤롯궁으로 호송되었으며,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장로들과 변사로 유명한 더둘로와 함께 동행하여 변론을 계속하였습니다  변사인 더둘로의 송사를 통하여 사도 바울을 끝끝내 죽이고자 하는 강한 음모를 드러내었습니다  더둘로의 고소내용은 첫째, 바울이 로마제국을 대항하여 정치적 선동을 도모하려 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사도행전24:5).  그것은 폭군 벨릭스총독이 유대통치 기간중 소요주동자는 물론 단순가담자들도 십자가에 처형하는 등 로마의 평화를 해친다는 죄목을 걸어 무자비한 숙청을 거듭해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둘째, 사도바울이 거짓 메시야가 출현하였다고 민심을 속여 혹세무민케 한 이단(하이레시스) 세력의 괴수라고 모략하였습니다  셋째, 성전 모독죄를 들고 나왔습니다(사도행전24:1~9)

사도 바울은 변론에서 학식과 능변에 능한 변사 더둘로의 논리를 하나하나 항변하며 반박하였습니다  첫째,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은 복음전파에 관한 보고를 위함이었을 뿐, 어떠한 음모와 계략도 없었고 그러한 조직도 갖추고 있지 않으며,  둘째,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머무는 기간은 모두 12일로서 그 가운데 5일은 죄수로 감옥에 있어서 단기간에 반란을 꾸민다는 것은 어불성설에 불과한 것이며,  셋째, 사도바울이 잡히기 직전까지 성전에서 결례의식에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동적 사례가 불가능하며,  넷째, 더둘로의 고소는 조작된 것일뿐 어느 것 하나 신빙성있는 주장이 없다는 것입니다(사도행전24:10~21)

뇌물과 여색, 살인과 협박으로 유대를 통치하던 벨릭스 총독(주후52~58년)은 사도 바울의 변호에는동조하였으나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정치적 선택으로 사도 바울을 또다시 구금시켰습니다   사도 바울의 2년여에 걸친 구금 생활은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었으며 기회가 닫는대로 복음을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그 가운데에 벨릭스 총독의 아내 드루실라는 사도바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대표적인 기독교인이었습니다(사도행전24:22~27)

유대총독 벨릭스가 퇴임하고 베스도(Porcius Festus)가 부임하자 유대 지도자들은 또 다시 사도 바울에 대한 처형을 계획하고 음모와 공작을 꾸몄으나,  베스도의 정치적 판단에 저항을 받게 되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사도 바울을 산헤드린 공회로 이송하여 처리할 것을 계획하고 베스도에게 정치적 접근을 시도하였으나 베스도는 사도 바울이 로마 시민권을 가진자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존중하여 유대 지도자들의 요구에 불응하였습니다

가이사랴의 법정에서 재판이 다시 속개 되었으나 베스도 총독은 사도 바울에게서 정치적, 법률적 죄목을 찾지 못하여 난처한 입장이 되자,  사도 바울이 로마 황제에게 항소를 함으로서 결과적으로는 베스도에게 면죄부를 주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 황제에게 항소를 결정한 것은 죽음이 두렵거나 목숨을 구걸하기 위함이 아니라 주의 명령을 따라 로마에 가서 복음을 증거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사도행전25:1~12)

로마 황제에게 상소한 사도 바울로 인해 베스도 총독은 해당사건의 전모를 로마로 보내기 위해 유대인의 풍습과 신앙등에 관한 지식을 섭렵하고 있었던 아그립바 왕에게 논의를 청하였습니다  아그립바 왕은 아그립바 1세의 아들이며 헤롯대왕의 증손이었습니다  아그립바 1세가 주후 44년경 별세를 하였을때 아그립바는 17세에 불과하여 팔레스타인의 전권을 이어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팔레스타인은 로마의 행정관의 통치에 들어갔고, 주후 50년경 글라우디오 황제에 의해 갈기스 왕에 임명되었으며, 빌립과 루사니아의 분봉왕들의 영지를 비롯하여 갈릴리와 베레아 등지를 유산으로 이어 받았습니다  이로서 아그립바와 로마 총독과으 관계는 정치적으로 종속관계를 이어가며 밀착되어 있었습니다

아그립바왕의 앞에서 변론하는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대로 그에게 주의 복음을 증거하게 되었습니다(사도행전9:15)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가난하고 눌린자를 주요 대상으로 하고 있었지만 그 뿐만 아니라 임금과 통치자들에게도 전파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계급과 신분을 타파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아그립바왕과 베스도총독의 권위와 세력앞에서 당당하게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 바울의 모습은 상상만 해도 감격스럽고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어떠한 확신도 없었다면 사도 바울은 그렇게 당당하게 선포할 수 는 없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25장 23절에서 26장 23절에 이르기 까지 비교적 긴 구절로 구성되어 있는 아그립바왕과의 변론에서 사도 바울의 신앙의 위대성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사도행전25:23~26:23)

재판정의 분위기는 처음의 상황과 대조적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당당하고 진지한 복음의 메세지는 아그립바와 베스도와 수많은 회중들과 청중들을 압도하였습니다 그들은 바울에게서 그 어떤 특정죄목을 찾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대하여 신앙적 결단을 해야 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에 당황한 베스도는 사도 바울을 향하여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사도행전26:24) 라고 선언하며 황급히 심문을 종료해 버렸습니다   이것으로서 사도 바울은 가이사랴에서의 2년간의 구금생활을 마치고 비록 죄수의 몸으로 가지만 복음을 들고 로마로 향하여 전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사도행전26:24~32)

사도 바울은 그의 이름에 관한 의미에서 주듯이 "작은자" 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는 길리기아 다소 출신으로 베냐민 지파의 소속이었습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을 배웠고,  랍비라는 칭호를 수여 받은 유대인의 명예였습니다   그는 신념에 투철한 바리새인이었으며,  그들과 다른 주장을 하는 기독교인들을 이단세력으로 규정하여 핍박을 일삼아 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 집사의 사망으로 인하여 심적으로 충격을 받게 되고, 뒤 이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서 그는 전후 일생일대의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고  세계 곳곳에 복음을 증거하는 불멸의 그리스도인으로 삶을 마감하기까지 그의 스승인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따라 살았던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4)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가는 사도 바울의 선교여행
사도행전 27장은 사도 바울 일행이 가이사랴를 떠나 지중해 서단의 멜리데 섬에 이르기까지의 긴 여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이 기록문에서 행선지에 관한 기록은 짧게 이어가면서도 "유라굴로"라는 동북풍의 광풍에 직면하였을때 사도 바울의 활약과 그로 인하여 수백명의 승객들이 안전을 지킬수 있었던 주요한 장면들은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타고 있던 배는 유라굴로 태풍으로 인해 주야 14일간,  미항에서 부터 멜리데 섬까지 800km를 표류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처럼 중대한 난관에 봉착하였을때 하나님께서는 초자연적 환상이나 계시를 통해 갈길을 주시거나 위로의 말슴을 베푸셨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와 함께 있던 사람들까지 사도 바울로 인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는 측면에서 그의 신앙에 대한 숭고함과 위대함을 바라 볼 수 있는 것입니다(사도전27:1~44)

멜리데에 도착한 사도 바울 일행은 그 섬의 주민들로 부터 융숭한 대접을받던 중 사도 바울이 독사에 물리는 위기가 발생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배에서 위기를 맞이한 그가 또 다시 이러한 위기에 봉착하자, 정령신앙(animism, 샤머니즘)과 같은 토테미즘적 사고를 드러내며,  결국 그가 죽을 것이라는 운명적 결론을 내었으나 사도 바울이 그 짐승을 불에 떨어 버리고 전혀 상함이 없슴을 보고 귀히 여겼습니다(사도행전28:1~10)

주후 60년 10월경, 멜리데섬에 도착하여 겨울을 보낸 후 이듬해인 61년 2월경, 로마제국의 교통중심지, 이달리야 반도의 보디올에 입항하였습니다  이로서 로마 제국의 수도를 방문하려던 바울의 간절한 소원은 드디어 성취되었습니다  비록 파수병의 감시하에 있는 죄수의 신분이었지만, 로마 시민권자였기 때문에 방문자들과 자유롭게 접할 수 있었습니다  이로서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로마서1:16) 라고 하는 바울의 선교정책은 로마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에서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데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이와같이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이 로마제국의 심장부에 이르기까지 살아있게 하신 것은, 성령의 역사를 신앙하는 사도 바울이라는 작지만 거대한 승리자를 통하여 증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로마에 도착한 사도 바울은 구류형식으로 2년동안 셋집에 기거하며 비교적 자유로운 몸으로 복음증거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디모데(빌립보서1:1)와 두기고(에베소서6:21),  에바브로(빌립보서4:18) 등 공동체의 동역자들이 그를 방문하여 위로를 하였습니다   2년이 지나도록 기소가 되지 않자 구류상태에서 자동 석방되었으며 그는 에베소와 마게도냐(디모데전서1:3), 드로아(디모데후서4:13), 그레데(디도서1:5), 니고볼리(디도서3:12)로 여행하며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주후 67년경, 네로 황제의 박해로 인하여 사도 바울은 또 다시 투옥되었고 디모데후서를 마지막으로 참수형을 당함으로서 그는 주님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그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품고 있을때, 결코 목숨을 두려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수많은 정치지도자와 권력자들 앞에서도 담대히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는 그 어떤 경우에도 진리를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고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자신이 가는곳 마다 고난이 있었고 질병을 달고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지치고 상한 몸으로 또 다시 몸을 추스려 선교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가지 않으면 나는 육신이 피로하지 않고 편하게 오래 살 수 있을 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가지 않는 곳의 사람들의 영혼이 죽는다  내가 가면 그들은 나를 죽일지 모른다  내가 죽는 것은 육신의 한조각 뿐이지만 그들이 죽는 것은 영혼의 전부이다 그러므로 나는 가지 않을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이 일에 하나님으로 부터 동역자의 허락을 받았고 그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사도 바울안에는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있고 그는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없었다면 오늘 우리는 어떤 삶의 희망을 가지며 살 수 있었을까요?  그러나 사도 바울의 힘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또 다른 사도 바울을 통하여 역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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