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시대에 관하여
1. 사사 시대
사사기는 히브리성경에서 7번째에 해당하며 유대인들의 성경에는 선지자 이전 선지서의 2번째로 나타난다. 초기 기독교 학자들은 사사기를 정경으로 인정하였다. 여호수아의 죽음에서 사무엘상 1장에서 밝히는 대로 이스라엘 왕국이 세워지기까지의 기간에 활동했던 사사들을 중심으로 나타난다. 사사기의 기록은 종교적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와 이를 해결하는 사사들의 노력이 중심으로 이룬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 (삿17:6, 21:25)." 사사라는 이름은 공적인 사역자들을 가리키며 그들의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 사사의 역할은 신의 역할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삿11:27). 사사의 범위가 지역적이든 국가적이든 간에 상관없이 사사는 하나님의 실추된 법을 집행하기도 하였다.
출애굽 사건 이후 계속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여호수아서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는 내용들을 사사기에서는 여호와 종교의 입장에서 가나안 상황에 적응하는 근본적인 어려운 부분을 담고 있다. 출애굽은 어떻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구원하였으며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산에서 계약을 체결하시고 모세의 중재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직접 그들을 다스리는 특별한 관계를 형성하였음을 잘 보여준다. 광야와 요단동편 남쪽지역 (민수기)을 지나고 모압평지 (신명기)에서 새로운 계약을 수립하였으며 여호수아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 정착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여호수아서의 마지막은 세겜에서 새로운 계약과 여호수아의 죽음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사사기는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정착하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그 소임을 해야하는가, 모세와 여호수아가 없는 상황에서 그들은 누구의 인도로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하는가 하는 문제들이 그들에게 직면해 있는 것이다.
사사기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히브리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그리고 같은 내용이 두번 기록된 것 (삿1:11-15, 수15:13-19)과 옷니엘 (대상4:13)과 에훗 (대상7:10, 8:6)의 간단한 계보와 사사기에 기록된 사사의 일부가 다른 성경에서 반영되기도 한다: 여룹바알 (삼상12:11, 삼하11:21), 입다 (삼상12:11), 베단 (아마도 압돈 또는 바락/ 삼상12:11), 그리고 야일 (민32:41, 신3:14, 수13:30, 왕상4:13, 대상2:22-23). 사무엘 역시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로 기억된다 (삼상7:15-8:3).
시대에서는 크게 벗어나지만 그러나 사사시대의 인물들이 성경 다른 부분에서도 발견된다: 시스라와 야빈 (시83:9) 세바와 살문나 (시83:11, 사9:4에서는 미디안의 날로 기록, 사8:1-3에서는 오렙에서 미디안인들이 크게 패함) 그리고 아비멜렉의 죽음도 나타난다 (삼하11:21). 히11:32은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의 순으로 사사들을 소개한다.
1) 사사시대의 배경
사사기의 연대를 결정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사사기에 기록된 사사들의 활동기간을 모두 합하면 모두 410년에 이른다. 이 기간은 왕상6:1에 기록된 출애굽 연대를 결정하는데 크게 기여하지 못한다. 사사들은 이스라엘 모든 지역을 다스렸다기 보다는 부분적인 활동을 했다는 견해가 옳으며 그들의 활동 역시 사사들 간에 겹쳤다는 이론이 지배적이다. 삿3:30-4:1은 에훗과 삼갈이 그리고 삿10:7은 입다와 삼손이 같은 시기에 활동했음을 시사한다. 덜 중요시되는 사사들일 경우에는 간단한 언급 (삿10:1-2, 3-5)이나 또는 기록에서 빠졌을 가능서도 배제할 수는 없다 (삼상12:11).
사사들이 활동했던 시대는 사사기, 룻기, 그리고 사무엘상1-8장을 걸쳐 이해할 수 있다. 시대적인 범위는 여호수아의 이후에서부터 이스라엘의 첫번째 왕인 사울이 등장하기까지의 시기를 가리킨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시던 대로 그들은 땅을 차지하였으며 이를 각 지파들에게 분배함으로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되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지방에서 부름을 받고 가나안에 첫 발을 들여놓은지 수세기가 지난 후였다. 이집트에서의 영광과 오욕의 세월 400년, 광야에서의 불안정한 방랑객으로 40년, 하지만 이제 그들은 약속의 땅에서 정착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신민국가로 이루어가는 과제가 남게 되었다. 이집트 또는 광야와는 다른 이제는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서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필요로 했던 기간이다. 우리는 이 기간에 대한 고고학적인 자료와 역사적인 자료 그리고 성경의 자료들을 근거로 사사시대를 조명하고자 한다.
(1) 고고학적인 자료를 통해 본 시대적인 배경
후기 가나안 시대의 팔레스틴은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요단 동쪽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 입성과 정착, 서쪽 지중해로부터는 블레셋인을 포함한 해양민족들의 침공이 있었으며 이집트의 패권 역시 가나안을 혼란에 빠뜨리는데 일조하였다. 게다가 요단 동편지역에서는 모압과 암몬, 그리고 소수 베두인들을 중심으로한 부족국가들이 출범하여 작은 가나안을 무대로 열국들의 각축장이 되었다. 성경은 사사시대의 혼란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 (삿17:6, 18:1, 19:1, 21:25). 여호수아의 죽음 이후 이스라엘은 좌표를 잃은 군인처럼 나침판을 상실하여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선박처럼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혼란을 거듭하였다.
유다산지와 쉐펠라에서의 고고학적인 자료들을 참고하면 주전 1250-1150년 당시 이 지역은 큰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학자들은 유다지파에 의해 점령된 산지 남쪽에 위치한 많은 성읍들은 사실은 주전 10세기 이전에는 세워지지 않은 성읍들로 주장하며 다윗이 강력한 왕국을 건설할 때에야 이런 지역들을 이스라엘의 영역 속에 포함한 것으로 이해한다. 예루살렘 북쪽 상황에 대해서는 사사기 1:22-26, 20:18, 21:2에 기록된 벧엘 (Beitin)을 통하여 일부 이해할 수 있다. 벧엘은 주전 13세기에 크게 파괴되었다. 사사기 2:1-5에 기록된 보김 (Bochim)을 벧엘과 동일한 장소로 여기는 학자도 있다. 여선지 드보라는 라마와 벧엘 사이 종려나무 아래에 거하며 백성들을 치리하였으며 (삿4:5) 같은 내용 가운데 하솔 왕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는 이스르엘 골짜기에 위치한 이방 하로셋에 거하면서 이스라엘을 위협하였다. 갈릴리지역 역시 변화의 물결에 온전하지는 않았다. 하솔 (Tell el-Qedah)은 주전 13세기 중반에 파괴된 후기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성읍이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초기에 아마도 이스라엘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가나안 신전이 하솔에서 발견되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 정착 초기에 이미 가나안 종교에 노출되었음을 강력히 시사하는 부분이다. 최근의 고고학 발굴 결과 텔 단 (Tell Dan)은 주전 12세기 중반에 점령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갈릴리의 북쪽은 새로운 문화가 퍼졌고 성벽이 없는 높은 산지에 위치한 성읍에서 생활하였으며 경작지를 확보하기 위한 계단식 농경지가 처음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2) 역사적인 측면에서 이해한 사사기의 배경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와 점령한 성읍들에 대한 이해는 수2:7-24을 통하여 알 수 있다. 기록된 방법은 이집트의 바로가 군사적인 원정을 마치고 난 후 승리의 사실을 찬양하기 위해 신전 벽에 기록한 이집트의 점령성읍목록 (topographical list)과 흡사하다. 이집트의 기록을 참고하면 편집자들은 전쟁의 승리를 찬양하는 원정의 기사로부터 도시들의 이름들을 발췌하여 점령성읍목록들을 정리하였다. 이것은 지역 별로 기록한 것이 아닌 사건의 전개 순서에 따라 기록되었다. 같은 기록방식은 탈무드에도 나타난다. 수12:7-24에 기록된 내용 역시 이런 방식에 따라 기록되었다. 여기에 기록되 점령성읍들은 중앙산지 뿐만 아니라 갈릴리의 북쪽에 이르기까지 가나안의 매우 중요한 지역에 속하지만 평야보다는 산지에 치우쳐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여호수아가 죽은 후 사사기에 기록된 점령에 관한 기사는 유다, 베냐민, 므낫세, 에브라임, 스불론, 아셀, 납달리 그리고 단지파에 관하여 나타나며 일차 점령에 실패한 지역들을 중심으로 다시금 무력으로 점령에 나섰다. 이스라엘이 점령에 실패한 원인에 대해 성경은 밝히기를: 가나안 거민들은 철병거와 발달된 무기들을 소유하였기 때문이다 (수17:18, 삿1:19).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들이 여호와 사상을 버렸기 때문이다 (삿2:1-4).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차 점령했던 지역들은 가나안에 대한 이집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변방에 치우쳤다. 이런 이유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출현한 기록이 이집트에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이해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스라엘이 역사적인 기록에 처음으로 나타나는 것은 메르넵타 비문이다 (1219 B.C.).
2) 사사기의 내용
사사들의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들의 활동범위가 지엽적이든 국가적이든 실추된 하나님의 법을 집행하였으며 신을 대변하는 역활을 감당하였다. 아비멜렉, 엘리, 사무엘이 사사들에 포함되기도 한다.
사사기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가나안 정복과 정착 (1:1-3:6), 사사들의 활동 (3:7-15:20), 보충내용(16-21)이다. 사사들의 활동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다: 사사들의 초기 사역과 (옷니엘, 에훗, 드보라와 바락, 기드온, 돌라와 야일) 삿10:6-16에 나타나는 또 다른 국면을 해결하는 사사들의 활동을 담고 있다 (입다, 입산, 엘론, 그리고 압돈, 삼손). 그리고 보충적인 내용으로는 삼손에 대한 또 다른 내용 (삿16)과 미가의 성소와 미가와 레위 소년과의 이야기 (삿17-18) 그리고 에브라임 산지에 사는 레위 사람의 첩 사건 (삿19) 그리고 베냐민 지파와 다른 지파들 간의 전쟁 (삿20-21)이 그것들이다.
사사기에 기록된 여러 전쟁들은 특정한 지파와 지역에 한정되었다. 서로 다른 지역에서의 전쟁 기사는 다섯 사사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은 유다 지파에게 속하였으며 옷니엘과 관련된 지역은 드빌-기럇 세벨이었다 (수15:15-19, 삿1:11-15). 그와 전쟁을 치른 족속은 아람 (나하라임) 곧 메소포타미아의 구산 리사다임이었다. 게라의 아들 에훗은 모압 왕인 에글론으로부터 베냐민 사람들을 구원하였다. 모압은 아르논과 헤스본 사이를 가리킨다. 에글론은 여리고의 동편 모압 평지를 다스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요단 서편까지 진출하여 여리고를 자신의 수하에 넣었고 베냐민을 학대하였다. 에글론이 여리고 평지와 산지 어느 지역까지 진출하여 이스라엘을 학대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지 않지만 그러나 에훗이 에글론을 축출할 때의 상황을 고려하면 그는 에브라임 산지에서 나팔을 불어 소집된 이스라엘 백성들과 연합하여 전쟁을 수행하였다. 그러므로 베냐민과 에브라임이 연합하여 모압을 몰아내는데 전쟁을 치루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삿3:27).
미디안을 대항하여 전쟁을 수행한 기드온 사건은 분명히 드보라의 사건 이후에 일어났다. 약탈을 목적으로 미디안 사람, 아말렉 사람, 그리고 동방 사람들은 시스라와 드보라 간의 전쟁에서 피폐해진 이스르엘 지역의 여러 성읍을 침략하였다.1 기드온 사건은 하롯 샘과 모레 산 사이의 이스르엘 골짜기 중앙에서 일어났다 (삿6:33, 삿7:1). 비록 이 지역은 잇사갈에게 할당된 지역이었지만 기드온은 갈릴리의 세 다른 지파인 아셀, 스블론, 납달리 사람들을 미디안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았다 (삿6:35). 기드온의 고향인 오브라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미디안과의 전쟁터에서 가까운 곳으로써 학자들은 그 위치를 현재의 아풀라 (Afula)로 주장한다.2 아풀라는 이집트의 Thutmose III의 원정 기록에 `-p-r (No. 53)로 기록되었으며 가나안 시대부터 이스라엘 시대까지의 주거층이 발견되었다. Eusebius의 기록 역시 아풀라를 오브라로 주장하였다 (Onomasticon 28:25). 사마리아 오스트라카에도 언급된 아비에셀 가문 (삿6:11)은 에브라임 산지에 거하였지만 그들이 북쪽 이스라엘 평야까지 이주하였음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성경은 잇사갈과 아셀의 기업 가운데 므낫세의 소유가 있음을 지적하는데 이는 지파들 가운데 일부는 타 기업 가운데 정착하여 생활하였음을 시사한다 (수17:11). 므낫세 기업은 납달리 지역까지 경계를 이루었다. 모레산 북쪽 엔돌 근처 (시83:9-10)에 진을 쳤던 미디안 군대를 무찌른 기드온에게 모여든 사람들은 납달리와 아셀과 그리고 므낫세 사람들이었으며 또 다른 므낫세 자손은 에브라임 산지에서 왔을 것이라는 것이 Y. Aharoni의 주장이다 (삿7:23). 미디안 사람들은 동쪽으로 도주하였다 (삿7:22). 하지만 기드온은 에브라임 사람들을 동원하여 미디안 사람들에 앞서 벧바라와 요단 나루턱을 점령하여 그들을 크게 응징하였다 (삿7:24).3
기드온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장막에 거한 자의 길 (삿8:11)을 따라 미디안을 추격하여 갈골까지 진격하여 세바와 살문나를 체포하였다.4 미디안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로부터 박대를 받은 기드온은 승리하고 돌아오는 길에 숙곳 장로들을 잡아 들가시와 찔레로 성읍 사람들을 징벌하고 브누엘 망대를 헐고 그 성읍 사람들을 학살하였다 (삿8:4-9, 13-17). 숙곳과 브누엘의 거민들이 정확히 누구인지에 대해 아는 바 없다. 하지만 브누엘의 망대는 세겜의 망대를 생각케 하며 아마도 이 숙곳과 브누엘의 거민들은 갓-길르앗 지역에서 생활하던 가나안 원주민일 것이다. 하지만 기드온이 숙곳 장로들을 사로잡고 그들을 응징한 내용으로 보아 갓 자손이란 주장도 전혀 반박할 수는 없다.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은 미디안 사람들로부터 이미 갖은 박해와 어려움을 충분히 겪었기에 기드온을 신뢰할 수 없었던 것도 이해할 만 하다.
사사들은 강력한 통치력을 가지고 억압 받는 백성들을 구원하였다. 그러나 사사들의 이런 일이 마무리되었을 때 그들의 임무 역시 끝났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생존할 당시 지속적으로 백성들을 다스렸다. 기드온의 활약 아래 오브라는 종교의 중심지 (삿8:27)가 되었으며 그의 통치가 자녀에게 세습된 유일한 경우이다. 기드온의 아들인 아비멜렉은 모친의 인척을 중심으로 세겜에서 왕정을 처음으로 꾀하였다. 세겜에서 아비멜렉은 친척의 도움으로 바알브릿 집에서 은 칠십을 가지고 용병을 사서 오브라에서 형제들을 모두 죽인 후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세겜 귀족들은 아마르나 시대의 Lab'ayu처럼 에브라임 산지 전체를 통치할 새로운 체제를 원했음이 분명하다. 아비멜렉은 세겜에 거하지 않았고 아루마 (삿9:41)에 거하였다.5 하지만 세겜 거민들과 아비멜렉과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급기야는 아비멜렉은 세겜 성을 함락하였으며 망대를 불에 태워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살육하였다 (삿9:34-49). 세겜 망대는 세겜 발굴 때에 발견되었는데 인위적으로 흙을 북돋운 터 위에 망대를 건축하였다. 아마도 이것은 바알 브릿의 집일 것이며 이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삿9:6의 밀로 사람들일 것이다. 이것은 주전 12세기 중반에 파괴되었다.
아비멜렉은 데베스를 대항하여 벌인 전쟁에서 종말을 맞았다. 가나안의 대표적인 도시 문화 중의 하나인 견고한 망대가 데베스에도 있었다. 데베스의 위치는 세겜의 북동쪽 약 14km 지점의 투바스 (Tubas)가 거론되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곳에서는 후기가나안시대의 유적이 발견되지 않은 점으로 인정하기 어렵다. 오히려 가나안의 중요한 성읍이었던 디르사가 보다 유력하다.6
트랜스요르단에서의 갈등은 길르앗 사람 입다의 기사에서 잘 드러난다 (삿11:1-40). 암몬 자손이 길르앗에 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자손들 역시 미스바 곧 길르앗의 미스베에 포진하였다 (삿10:17, 11:29). 이곳은 종교적인 중심지였다 (삿11:11). 이곳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수13:26의 헤스본, 브도님 그리고 마하나임과 함께 언급된 라맛 미스베와 동일 장소일 것이다. 얍복강 남쪽의 Jebel Jel 'ad와 Khirbet Jel 'ad 근처로 추정된다. 삿11:33의 아로엘, 민닛, 아벨 그라밈의 위치도 확실지 않다. 그러나 랍바 암몬의 지경에 속하였음은 분명하다. 일부 학자들 (G. E. Moore, Burney, Richter)은 입다의 사건을 암몬과의 충돌이 아닌 모압과의 갈등으로 이해한다.7 하지만 Vincent와 Boling은 모압이 아닌 성경에 기록된 암몬과의 충돌이 옳으며 모압 지경이 언급된 것은 암몬이 모압 지경을 침략하여 점령하였기 때문이며 모압의 신인 그모스가 언급된 것은 그들의 국가신을 채용한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 입다는 길르앗 한 성읍에 장사되었는데 LXX 입다가 장사된 곳을 스본 (oo ai)으로 번역하였다.
입다의 길르앗 사건은 에브라임과의 갈등을 빚은 기드온의 경우와 비교할 수 있다 (삿8:1-3). 하지만 기드온은 속담을 이용하여 에브라임의 노를 풀었지만 입다는 오히려 길르앗 사람들을 모아 에브라임 사람들을 크게 도륙하였다 (삿12:1-6). 에브라임은 입다에게 “너희 길르앗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로서 에브라임과 므낫세 중에 있다”고 말하여 입다의 노를 일으켰다 (삿12:4). 아마도 길르앗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에브라임 출신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입다는 같은 출신의 사람들이 서로 다른 장소에서 생활하므로 일어날 수 있는 언어의 차이로 길르앗 사람들 가운데서 에브라임 사람들을 색출하여 그들을 학살하였다.8
사사기의 마지막 장면은 에브라임 산지에 거하는 레위 사람의 첩이 베들레헴에서 에브라임 지로 돌아가는 길에 기브아의 비류들에 의해 겁탈당하고 결국은 사망에 이른 사건이 기록되었다. 이 사건은 베냐민 지파와 다른 지파들 간의 전쟁으로 이어졌으며 베냐민 한 지파가 이지러지는 비극적인 종말을 고하였다 (삿19-21). 첩의 남편 역시 죽은 부인의 시체를 열 두덩이로 나누어 각 지파들에 보내는 장면 역시 끔찍하기 그지 없다. 하지만 같은 사사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룻기를 보면 기브아의 상황과는 전혀 다르다. 룻은 모압 출신의 이방 여인이었다.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으로 곱게 단장한 룻 혼자서 한 밤 중에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을 걸어 다녔어도 그녀는 아무런 해를 입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는 시모 나오미가 이른 대로 그 밤을 보아스와 함께 보낼 준비를 갖추었다 (룻3:1-5).
베냐민을 응징하기 위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와 미스바 (삿20:1)와 벧엘 (삿20:26)에 모였으며 베냐민 사람들은 기브아에 소집하였다. 당시 하나님의 법궤 (aøai øe aaia ei)는 벧엘에 있었다 (삿20:27). 기브아를 발굴한 결과 성읍은 주전 12세기에 심하게 파괴되었으며 사울이 성읍을 견고히 쌓을 때까지 성읍은 황폐된 채 버려졌다.
사사기에는 중요한 사사들의 기록 뿐만 아니라 무용담이 전혀 언급되지 않은 다섯의 부 사사들 (minor judges)의 기록도 나타난다. 그들에 대한 것은 단지 활동했던 장소와 두드러진 사건 만을 겨우 기록하였을 뿐이다 (삿10:4, 12:9, 14). 여기에 언급된 사사들은 잇사갈 사람 부아의 아들 돌라 (삿10:1-2), 길르앗 사람 야일 (삿10:3-5), 베들레헴의 입산 (삿12:8-10), 스불론 사람 엘론 (삿12:11-12), 그리고 에브라임 산지의 비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 (삿12:13-15)이다.
사사기에서 이스라엘 각 지파들은 연합하여 주변 적대국들의 압제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였기에 이스라엘 사회는 불안전하였으며 전쟁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사사기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되었다: 그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그곳을 떠나 각각 그 지파 그 가족에게로 돌아가되 곧 각각 그곳에서 나와서 자기 기업으로 돌아갔더라.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 (삿21:24-25). 이것은 이스라엘 사회에 왕정이 필요하였음을 반증하는 것으로 사사시대는 지파 동맹 관계에서 왕정 체제로 돌아서는 과도기였던 것이다.
2. 룻기의 역사적인 배경 (룻기)
룻1:1에 룻기의 시대적인 배경은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라고 기록한다. 룻기서의 중심인물은 다윗의 증조모인 모압 여인 룻 (룻4:17)으로서 이 때는 아마도 기드온 사사 시대로 추정한다. 룻기서의 사회적인 배경은 흉년시기이다. 흉년은 종종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징계의 도구로 사용되곤 하였다. 흉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명사형태로 MT에 적어도 100회 이상 사용되었다. 같은 기원의 동사는 Ugarit text에도 나타난다. 흉년이라 함은 일정한 자연의 질서에 변화가 생김으로 사람들의 양식이 될 곡물 생산이 중단되는 것을 의미한다. 일차적으로 그 의미는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음으로 곡식 소출이 중단 또는 현격한 감소를 뜻한다. 이런 흉년이 계속되면 곳곳에서 기아자가 발생하며 성경에도 그 사례가 여러차례 나타난다 (창12:10, 26:1, 41:54-57, 왕상17:1).
1) 흉년의 역사적인 이해
고대 근동 특히 이집트에서는 1차 중간기시대 (1st Intermediate Period/ ca. 2150-2000 B.C.)당시 큰 흉년이 있었으며 이에 대한 기록이 여러 문서에서 발견된다. 당시 이집트 여러 지역의 토호들은 나일강의 수위가 급격히 낮아 짐으로 곡물생산이 감소되어 불평하는 내용들이 있다.
병충이나 해충 특히 메뚜기로 인한 피해로 가뭄, 흉년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 (욜1-2장). 아모스 선지자 역시 역병으로 인한 흉년을 이야기한다 (암4:9).
정치의 혼란이나 전쟁으로 말미암아 곡물 생산이 중단되고 양식이 빈곤한 예도 있다. 성이 적에 의해 포위되었을 때 성 안의 사람들이 기근에 처하게 된 대표적인 예는 다메섹의 벤하닷이 사마리아 성을 포위한 경우에서 볼 수 있다 (왕하6:24-7:20). 극심한 기근으로 인해 자녀를 양식으로 취하는 극단적인 일도 발생하였다 (왕하6:29). 느부갓네살에 의해 예루살렘 성이 함락될 때 발생한 심각한 기근에 대해서도 성경은 기록한다 (왕하25:3, 렘애2:11-12, 4:9-10). 적의 공격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기근은 성경외 고대 문서에도 여러차례 발견된다. Thutmose III의 7개월간 므깃도를 포위하여 공격한 사건 (c. 1468 B.C. cf. ANET 238), 앗수르 산헤립이 라기스를 침공할 당시의 모습을 담은 산헤립 비문에는 사로잡힌 사람들보다 더 야윈 동물들이 성으로부터 도망하는 그림이 있다. 이 동물들은 성안 주민들의 양식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요세푸스 역시 로마인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발생한 성 안의 기근에 대해 이야기한다 (JW 5:424-438, 571, 6:1-3, 193-213).
정치적으로 사회가 혼란스러울 때 발생하는 기근도 있다. 이는 중앙 통제가 무너지고 나라는 무질서를 형성하며 사회 불안이 조성될 때 농부들은 경작하는 일에 전념할 수 없어 발생하는 기근이다. 이런 정치적인 요인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기근의 대표적인 예가 이집트에서 두 차례 발견된다 (1st Intermediate Period- ca. 2200-2000 B.C., 2nd Intermediate Period- ca. 1200-1100 B.C.). 첫번째 기근은 the Admonitions of Ipu-wer의 비문에 생생히 묘사되어 있다 (ANET 441-444).
2) 이상 기후로 인한 흉년
이는 고대 근동의 사막과 바다를 접한 지역에서는 흔히 발생하는 기후적인 현상으로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는 큰 강을 끼고 있음으로 흉년과 같은 심각한 자연 재난을 발달된 수로시설을 이용하여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가나안과 같은 비에 의존하여 농사를 짓는 지역은 기후의 변화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아 왔다. 곧 가나안 지역의 우기 때에 비가 적게 내리면 이는 곧 기근으로 직접 이어졌다. 이런 기후적인 여건으로 말미암아 빚어진 대표적인 기근은 이집트의 9th-11th Dynasties의 famine texts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
3) 성경에 언급된 기근의 예
족장들의 시대에 나타난 기근/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이 생존하였던 시대는 대략 주전 2000-1800년 경으로 당시 이집트에는 약 20개 정도의 기근 문서들(famine texts)이 남아있다. 가장 오래된 문서는 the Admonitions of Ipu-wer으로써 이는 아마도 주전 22세기 초의 것으로 생각된다 (c. 7th or 8th dynasty). 가장 최근의 기근 문서는 12th dynasty 의 Sesostris I (c. 1950 B.C.)통치시대에 해당하는 기근 문서이다. 이 문서들을 참고하면, 기근은 고대 근동의 매우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아브라함과 야곱은 기근을 피해 이집트로 피난했으며, 이삭은 강수량이 약 50mm정도의 네게브 지역에서 강수량이 약 200mm에 달하는 그랄 지역으로 피신한 경우를 볼 수 있다 (강수량의 수치는 현대 통계에 근거함 것임).
후기 가나안 시대 (c. 2000-1550 B.C.)/ 후기 청동기 시대 말 힛타이트 제국 내에 발생한 심각한 기근 기록이 있다. 그것은 Mursilis의 비문으로써 그 비문에는 20년간 계속되는 역병으로 인한 기근으로 storm god에게 탄원하는 내용이 그의 비문에 나타난다 (ANET 394-396). 아마르나 시대 역시 가나안의 여러 도시 국가들 간의 전쟁으로 인한 사회적인 혼란, 기근을 적고 있다. 뿐만 아니라 Ramses II와 Merneptah의 통치시 힛타이트 내에 발생한 심각한 기근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는데 그 때에 이집트는 식량원조를 통하여 힛타이트를 도운 경우를 볼 수 있다. 비슷한 시기에 성경 역시 말씀을 거역할 경우 저주의 수단으로 기근을 언급한 경우가 있다 (레26:18-26, 신11:17, 28:23-24, 32:24).
이스라엘 초기 시대 (c. 1200-1000 B.C.)/ 이 때에는 후기 가나안 시대에 비해 기근의 발생률이 더 많았다. 근동 전체 지역에서 기근에 관한 많은 기록들이 발견된다. 이 시대에 발생한 이집트의 기근에 관한 기록은, royal tomb을 만들기 위해 돌을 다듬는 인부들이 폭동을 일으킨 사실을 기록한 문서에서 당시의 사회적인 기근을 엿볼 수 있다. 정한 삯으로 양식을 제 때에 지불하지 않음으로 발생한 이 폭동은 나라의 국고가 고갈되었기 때문에 일어났다. 이집트의 어려운 상황은 Ramses III-Ramses X까지 계속되었다. 당시 이집트는 중앙 통제력을 상실하고 권력이 지방으로 분산되었음으로 말미암아 야기된 사회적인 기근을 형성하였다.
메소포타미아/ 기상학적인 연구결과 주전 약 1200-900년 당시 고대 근동과 유럽은 지금보다 건조하고 온도가 더 높았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Neumann and Parpola 1987). 당시 앗수르와 바벨론은 정치적인 암흑기로써 유목민들의 잦은 침입, 곡식 소출의 감소 등과 같은 사회 전반에 걸친 어려움들을 그들의 문서를 통해 알 수 있다 (Brinkman 1968:280, 389). 하지만 습하고 시원한 기후 조건은 주전 9세기 이후에 다시 회복된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 비슷한 시기에 이스라엘 역시 세차례 기근에 관한 기록이 있다. 대략 12세기 경의 미디안 사람들의 침입으로 인한 기근 (삿6:2-11), 주전 11세기 초로 생각되는 룻기서에 나타난 기근 (룻1:2-), 그리고 주전 10세기 초 다윗 당시의 3년 기근 (삼하21:1)이 있다.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 가운데에서도 YHWH께 미래의 어느 잠재적 기근으로부터 백성들을 구원해 주실것을 염원하고 있다 (왕상8:33-40).
이스라엘 후기 시대/ 주전 9세기 중반에 해당하는 엘리야 시대의 3년 기근 (왕상17:1)과 엘리사 때의 7년 기근 (왕하8:1-3)이 있다. 하지만 당시의 기근에 관한 성경외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10 엘리야 시대는 건조한 사막화 현상에서 벗어나 습한 시대로 접어든 시기에 해당한다. 아모스 때에 발생한 기근은 전쟁으로 인한 기근을 염두에 두고 있다 (암4:6-8). 벤하닷의 사마리아 침공 (왕하6:24-29), 그리고 느부갓네살의 예루살렘 침공 (왕하25:3, 렘애4:7-10)때 발생한 기근 등이 있다.
고고학과 성경의 기록과의 의견을 좁히는데 문제가 많이 제기되곤 한다. 만약 사사기 1장을 두 사건이 서로 반복되어 나타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여호수아가 사망한 후에 가나안의 상황은 매우 악화되었으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의 성읍들을 다시금 점령하는 수고를 해야 했다. 사사기 서두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성경의 내용과 고고학적인 증거를 서로 일치시키는 노력은 매우 어렵다. 유다 산지와 쉐펠라에서의 고고학적인 자료들은 주전 1250-1150 당시 이곳에 대변화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다른 한편 여호수아서와 사사기서에 점령된 것으로 나타난 남쪽에 위치한 많은 성읍들은 사실은 주전 10세기 이전에는 세워지지 않은 성읍들이 대부분이다. 주전 10세기는 다윗이 이스라엘 왕국을 수립하고 다스릴 때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민족들이나 많은 성읍들의 이름들은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차지했던 근처 지역들에서 비롯된 이름 또는 주변 민족들의 이름으로 대치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아마도 이것들을 사사기 1장에서 찾는 일은 무의미할 수도 있다.
사사기에서 두드러진 하나의 성읍은 길갈 (삿2:1) 이다. 길갈은 여리고 근처에 위치한다.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텔단 (Tell Dan)은 주전 12세기 중반에 점령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사사기 1:22-26, 20:18, 21:2에 기록된 벧엘 (Beitin)은 아마도 사사기 2:1-5에 기록된 보김 (Bochim)과 동일한 장소일 것이며 17장의 미가 이야기에서 에브라임 산지에 위치한 미가의 집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벧엘은 주전 13세기에 크게 파괴되었다. 여선지 드보라는 라마와 벧엘 사이 종려나무 아래에 거하며 백성들을 치리하였으며 (삿4:5) 같은 내용 가운데 하솔 왕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는 이스르엘 골짜기에 위치한 이방 하로셋에 거하면서 이스라엘을 위협하였다. 하솔 (Tell el-Qedah)은 주전 13세기 중반에 파괴된 후기청동기시대의 성읍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초기에 아마도 이스라엘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가나안 신전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 정착 초기에 이미 가나안 종교에 노출되었음을 강력히 시사하는 부분이다. 당시 갈릴리의 북쪽은 새로운 문화가 퍼졌고 성벽이 없는 성읍에서 높은 산지에서 생활하였으며 계단식 경작이 처음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여호수아 11장을 참고하면 갈릴리 지역에 심각한 변화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삿4:11에 모세의 장인 호밥의 자손 중 겐 사람 헤벨이 갈릴리 지역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으며 사사기 4-5장에서 언급된 야엘은 므깃도 물가 다아낙에서의 큰 승리를 찬양하는 장면에서 언급되었다. 므깃도는 주전 1125에서 1100-1050까지는 사람이 살지 않았든지 또는 유목민들이 겨우 계절별로 생활을 했든 정착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다아낙 역시 주전 12세기에 하솔처럼 성읍은 없었으며 주전 1125년 경에 파괴되었다. 드보라와 바락의 활동은 이런 자료들을 근거할 때 주전 12세기의 말기에 해당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세겜의 아비멜렉도 상황은 비슷하다. 정확한 이유는 알수 없지만 그러나 후기청동기시대의 세겜은 주전 14세기에 파괴되었지만 곧 성은 다시 회복되었고 열악한 성읍은 주전 12세기의 말에 파괴되기까지 약 200년간 공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2세기에 파괴된 원인은 아마도 삿9장에 기록된 아비멜렉으로 인한 것으로 보인다.
세겜에서의 공백기간 동안 남쪽 헤브론에서부터 북쪽 세겜에 이르기까지 성벽이 없는 촌락이 팔레스틴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이런 상황은 갈릴리의 북쪽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사람들은 경사진 지역들을 계단식으로 개간하여 경작지를 확보하여 생활하였다. 중앙산지의 중심에 위치한 세겜의 이런 상황이 전개되던 당시는 이집트의 속국으로써 라바유와 그의 아들들이 다스리던 때였다. 세겜이 14세기에 파괴되었다할 지라도 세겜의 영향력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실로와 미스바의 서쪽은 이런 상황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세겜이 무너질 당시 실로와 미스바는 산지에서 가장 두드러진 성읍으로 발돋음하였다. 미스바 (Tell en-Nasbeh)는 13세기 말에서 12세기에 산지에 세워진 발달된 성읍 가운데 하나였다. 후기가나안시대의 실로는 사람이 살지 않은 상태로 황폐된 채 남아 있었다. 블레셋으로 인한 실로의 멸망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과 사울 때에 다시금 길갈을 중심으로 회집하게 되었다.
삼손의 기사에서 나타나는 블레셋의 위기는 사울과 다윗 그리고 솔로몬으로 인한 이스라엘 왕국이 서쪽 지역을 차지하고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당시까지는 여전히 기세가 등등하였다. 사울은 블레셋과의 길보아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이런 혼란의 기간동안 요단 동편지역에서의 이스라엘은 발달이 상당히 지연되었다. 요단 동편지역에서 이미 강력한 세력을 형성한 모압은 아르논지역 남쪽까지 강력한 힘을 형성하였으며 암몬족속들은 길르앗까지 확장하였다. 암몬 모압 그리고 이스라엘과의 갈등은 아르논의 북쪽에서 일어났으며 삿11장에 나타난 입다의 사건은 인구의 변화가 있었으며 이것은 이 지역들을 발굴한 결과를 통해서 이해할 수 있다.
3. 사사기에 대한 최근의 연구자료들
사사기서에는 많은 복잡한 문제들이 얽혀있다. 수세기간 이루어진 사실들에 대한 증거들을 어떻게 이해하며 원래의 사건과 마지막으로 편집된 내용 간의 편집자들에 의해 정리된 역사적인 사실들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옳은가. 화자와 편집자가 여러 성읍들에 관심을 기울이게 한 요인은 무엇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공적인 회집을 가진 장소나 신탁과는 관계없는 다른 성읍들에 관한 의문이다). 고고학적인 설명과 이스라엘 고대 사회의 비평적인 내용 그리고 문서에 비친 해석 간에 서로 상충되는 부분들에 대한 이해는 어떻게 하겠는가. 이런 직접적인 사건들을 경험한 세대들은 누구인가 그리고 최종적으로 편집되기까지 이런 이야기들이 이스라엘 사회에서 회자되었는데 그것은 도대체 무엇을 이야기하기 위함이었는가 하는 이런 여러가지 문제들이 성경을 연구하는데 의문시된다.
1) 문학적인 측면에서의 사사기
사사기의 내용을 구성하는 서로의 이야기 사이들을 연결하는 매개점은 다소 떨어지기는해도 본문의 전체적인 흐름은 서론과 본론이 극명하게 나타나는 문학적인 면이 분명하다. 이것은 다른 성경과는 다르게 편집된 흔적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 책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이스라엘의 고대 문학 가운데 순수한 이야기체를 사사기서에서 찾는다. 사사기서에 기록된 이야기들은 역사적으로 낭만이 깃들여 있으며 이야기들은 이념과 희극 두가지 요소들이 규치적으로 나타난다. 이념적인 요소는 교훈과 함께 대중적인 언어로 이미 잘 알고 있는 이야기의 틀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희극적인 요소는 궤변적이며 불규칙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보다 세심한 주의를 필요로 한다. 사사기서의 중심 축이 되는 이야기의 틀은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다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외부적인 틀은 희극적인 시각의 많은 증거들을 제시한다.
2) 고고학을 통한 사사기 이해
13세기의 팔레스틴은 혼란의 시기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 유입과 고고학과 성경의 기록과의 의견을 좁히는데 문제가 많이 제기되곤 한다. 만약 사사기 1장을 두 사건이 서로 반복되어 나타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여호수아가 사망한 후에 가나안의 상황은 매우 악화되었으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의 성읍들을 다시금 점령하는 수고를 해야 했다. 사사기 서두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성경의 내용과 고고학적인 증거를 서로 일치시키는 노력은 매우 어렵다. 유다 산지와 쉐펠라에서의 고고학적인 자료들은 주전 1250-1150 당시 이곳에 대변화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다른 한편 여호수아서와 사사기서에 점령된 것으로 나타난 남쪽에 위치한 많은 성읍들은 사실은 주전 10세기 이전에는 세워지지 않은 성읍들이 대부분이다. 주전 10세기는 다윗이 이스라엘 왕국을 수립하고 다스릴 때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민족들이나 많은 성읍들의 이름들은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차지했던 근처 지역들에서 비롯된 이름 또는 주변 민족들의 이름으로 대치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아마도 이것들을 사사기 1장에서 찾는 일은 무의미할 수도 있다.
사사기에서 두드러진 하나의 성읍은 길갈 (삿2:1) 이다. 길갈은 여리고 근처에 위치한다.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텔단 (Tell Dan)은 주전 12세기 중반에 점령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사사기 1:22-26, 20:18, 21:2에 기록된 벧엘 (Beitin)은 아마도 사사기 2:1-5에 기록된 보김 (Bochim)과 동일한 장소일 것이며 17장의 미가 이야기에서 에브라임 산지에 위치한 미가의 집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벧엘은 주전 13세기에 크게 파괴되었다. 여선지 드보라는 라마와 벧엘 사이 종려나무 아래에 거하며 백성들을 치리하였으며 (삿4:5) 같은 내용 가운데 하솔 왕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는 이스르엘 골짜기에 위치한 이방 하로셋에 거하면서 이스라엘을 위협하였다. 하솔 (Tell el-Qedah)은 주전 13세기 중반에 파괴된 후기청동기시대의 성읍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초기에 아마도 이스라엘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가나안 신전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 정착 초기에 이미 가나안 종교에 노출되었음을 강력히 시사하는 부분이다. 당시 갈릴리의 북쪽은 새로운 문화가 퍼졌고 성벽이 없는 성읍에서 높은 산지에서 생활하였으며 계단식 경작이 처음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여호수아 11장을 참고하면 갈릴리 지역에 심각한 변화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삿4:11에 모세의 장인 호밥의 자손 중 겐 사람 헤벨이 갈릴리 지역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으며 사사기 4-5장에서 언급된 야엘은 므깃도 물가 다아낙에서의 큰 승리를 찬양하는 장면에서 언급되었다. 므깃도는 주전 1125에서 1100-1050까지는 사람이 살지 않았든지 또는 유목민들이 겨우 계절별로 생활을 했든 정착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다아낙 역시 주전 12세기에 하솔처럼 성읍은 없었으며 주전 1125년 경에 파괴되었다. 드보라와 바락의 활동은 이런 자료들을 근거할 때 주전 12세기의 말기에 해당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세겜의 아비멜렉도 상황은 비슷하다. 정확한 이유는 알수 없지만 그러나 후기청동기시대의 세겜은 주전 14세기에 파괴되었지만 곧 성은 다시 회복되었고 열악한 성읍은 주전 12세기의 말에 파괴되기까지 약 200년간 공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2세기에 파괴된 원인은 아마도 삿9장에 기록된 아비멜렉으로 인한 것으로 보인다.
세겜에서의 공백기간 동안 남쪽 헤브론에서부터 북쪽 세겜에 이르기까지 성벽이 없는 촌락이 팔레스틴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이런 상황은 갈릴리의 북쪽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사람들은 경사진 지역들을 계단식으로 개간하여 경작지를 확보하여 생활하였다. 중앙산지의 중심에 위치한 세겜의 이런 상황이 전개되던 당시는 이집트의 속국으로써 라바유와 그의 아들들이 다스리던 때였다. 세겜이 14세기에 파괴되었다할 지라도 세겜의 영향력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실로와 미스바의 서쪽은 이런 상황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세겜이 무너질 당시 실로와 미스바는 산지에서 가장 두드러진 성읍으로 발돋음하였다. 미스바 (Tell en-Nasbeh)는 13세기 말에서 12세기에 산지에 세워진 발달된 성읍 가운데 하나였다. 후기가나안시대의 실로는 사람이 살지 않은 상태로 황폐된 채 남아 있었다. 블레셋으로 인한 실로의 멸망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과 사울 때에 다시금 길갈을 중심으로 회집하게 되었다.
삼손의 기사에서 나타나는 블레셋의 위기는 사울과 다윗 그리고 솔로몬으로 인한 이스라엘 왕국이 서쪽 지역을 차지하고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당시까지는 여전히 기세가 등등하였다. 사울은 블레셋과의 길보아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이런 혼란의 기간동안 요단 동편지역에서의 이스라엘은 발달이 상당히 지연되었다. 요단 동편지역에서 이미 강력한 세력을 형성한 모압은 아르논지역 남쪽까지 강력한 힘을 형성하였으며 암몬족속들은 길르앗까지 확장하였다. 암몬 모압 그리고 이스라엘과의 갈등은 아르논의 북쪽에서 일어났으며 삿11장에 나타난 입다의 사건은 인구의 변화가 있었으며 이것은 이 지역들을 발굴한 결과를 통해서 이해할 수 있다.
1. 사사 시대
사사기는 히브리성경에서 7번째에 해당하며 유대인들의 성경에는 선지자 이전 선지서의 2번째로 나타난다. 초기 기독교 학자들은 사사기를 정경으로 인정하였다. 여호수아의 죽음에서 사무엘상 1장에서 밝히는 대로 이스라엘 왕국이 세워지기까지의 기간에 활동했던 사사들을 중심으로 나타난다. 사사기의 기록은 종교적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와 이를 해결하는 사사들의 노력이 중심으로 이룬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 (삿17:6, 21:25)." 사사라는 이름은 공적인 사역자들을 가리키며 그들의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 사사의 역할은 신의 역할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삿11:27). 사사의 범위가 지역적이든 국가적이든 간에 상관없이 사사는 하나님의 실추된 법을 집행하기도 하였다.
출애굽 사건 이후 계속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여호수아서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는 내용들을 사사기에서는 여호와 종교의 입장에서 가나안 상황에 적응하는 근본적인 어려운 부분을 담고 있다. 출애굽은 어떻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구원하였으며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산에서 계약을 체결하시고 모세의 중재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직접 그들을 다스리는 특별한 관계를 형성하였음을 잘 보여준다. 광야와 요단동편 남쪽지역 (민수기)을 지나고 모압평지 (신명기)에서 새로운 계약을 수립하였으며 여호수아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 정착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여호수아서의 마지막은 세겜에서 새로운 계약과 여호수아의 죽음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사사기는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정착하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그 소임을 해야하는가, 모세와 여호수아가 없는 상황에서 그들은 누구의 인도로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하는가 하는 문제들이 그들에게 직면해 있는 것이다.
사사기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히브리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그리고 같은 내용이 두번 기록된 것 (삿1:11-15, 수15:13-19)과 옷니엘 (대상4:13)과 에훗 (대상7:10, 8:6)의 간단한 계보와 사사기에 기록된 사사의 일부가 다른 성경에서 반영되기도 한다: 여룹바알 (삼상12:11, 삼하11:21), 입다 (삼상12:11), 베단 (아마도 압돈 또는 바락/ 삼상12:11), 그리고 야일 (민32:41, 신3:14, 수13:30, 왕상4:13, 대상2:22-23). 사무엘 역시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로 기억된다 (삼상7:15-8:3).
시대에서는 크게 벗어나지만 그러나 사사시대의 인물들이 성경 다른 부분에서도 발견된다: 시스라와 야빈 (시83:9) 세바와 살문나 (시83:11, 사9:4에서는 미디안의 날로 기록, 사8:1-3에서는 오렙에서 미디안인들이 크게 패함) 그리고 아비멜렉의 죽음도 나타난다 (삼하11:21). 히11:32은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의 순으로 사사들을 소개한다.
1) 사사시대의 배경
사사기의 연대를 결정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사사기에 기록된 사사들의 활동기간을 모두 합하면 모두 410년에 이른다. 이 기간은 왕상6:1에 기록된 출애굽 연대를 결정하는데 크게 기여하지 못한다. 사사들은 이스라엘 모든 지역을 다스렸다기 보다는 부분적인 활동을 했다는 견해가 옳으며 그들의 활동 역시 사사들 간에 겹쳤다는 이론이 지배적이다. 삿3:30-4:1은 에훗과 삼갈이 그리고 삿10:7은 입다와 삼손이 같은 시기에 활동했음을 시사한다. 덜 중요시되는 사사들일 경우에는 간단한 언급 (삿10:1-2, 3-5)이나 또는 기록에서 빠졌을 가능서도 배제할 수는 없다 (삼상12:11).
사사들이 활동했던 시대는 사사기, 룻기, 그리고 사무엘상1-8장을 걸쳐 이해할 수 있다. 시대적인 범위는 여호수아의 이후에서부터 이스라엘의 첫번째 왕인 사울이 등장하기까지의 시기를 가리킨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시던 대로 그들은 땅을 차지하였으며 이를 각 지파들에게 분배함으로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되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지방에서 부름을 받고 가나안에 첫 발을 들여놓은지 수세기가 지난 후였다. 이집트에서의 영광과 오욕의 세월 400년, 광야에서의 불안정한 방랑객으로 40년, 하지만 이제 그들은 약속의 땅에서 정착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신민국가로 이루어가는 과제가 남게 되었다. 이집트 또는 광야와는 다른 이제는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서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필요로 했던 기간이다. 우리는 이 기간에 대한 고고학적인 자료와 역사적인 자료 그리고 성경의 자료들을 근거로 사사시대를 조명하고자 한다.
(1) 고고학적인 자료를 통해 본 시대적인 배경
후기 가나안 시대의 팔레스틴은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요단 동쪽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 입성과 정착, 서쪽 지중해로부터는 블레셋인을 포함한 해양민족들의 침공이 있었으며 이집트의 패권 역시 가나안을 혼란에 빠뜨리는데 일조하였다. 게다가 요단 동편지역에서는 모압과 암몬, 그리고 소수 베두인들을 중심으로한 부족국가들이 출범하여 작은 가나안을 무대로 열국들의 각축장이 되었다. 성경은 사사시대의 혼란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 (삿17:6, 18:1, 19:1, 21:25). 여호수아의 죽음 이후 이스라엘은 좌표를 잃은 군인처럼 나침판을 상실하여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선박처럼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혼란을 거듭하였다.
유다산지와 쉐펠라에서의 고고학적인 자료들을 참고하면 주전 1250-1150년 당시 이 지역은 큰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학자들은 유다지파에 의해 점령된 산지 남쪽에 위치한 많은 성읍들은 사실은 주전 10세기 이전에는 세워지지 않은 성읍들로 주장하며 다윗이 강력한 왕국을 건설할 때에야 이런 지역들을 이스라엘의 영역 속에 포함한 것으로 이해한다. 예루살렘 북쪽 상황에 대해서는 사사기 1:22-26, 20:18, 21:2에 기록된 벧엘 (Beitin)을 통하여 일부 이해할 수 있다. 벧엘은 주전 13세기에 크게 파괴되었다. 사사기 2:1-5에 기록된 보김 (Bochim)을 벧엘과 동일한 장소로 여기는 학자도 있다. 여선지 드보라는 라마와 벧엘 사이 종려나무 아래에 거하며 백성들을 치리하였으며 (삿4:5) 같은 내용 가운데 하솔 왕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는 이스르엘 골짜기에 위치한 이방 하로셋에 거하면서 이스라엘을 위협하였다. 갈릴리지역 역시 변화의 물결에 온전하지는 않았다. 하솔 (Tell el-Qedah)은 주전 13세기 중반에 파괴된 후기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성읍이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초기에 아마도 이스라엘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가나안 신전이 하솔에서 발견되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 정착 초기에 이미 가나안 종교에 노출되었음을 강력히 시사하는 부분이다. 최근의 고고학 발굴 결과 텔 단 (Tell Dan)은 주전 12세기 중반에 점령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갈릴리의 북쪽은 새로운 문화가 퍼졌고 성벽이 없는 높은 산지에 위치한 성읍에서 생활하였으며 경작지를 확보하기 위한 계단식 농경지가 처음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2) 역사적인 측면에서 이해한 사사기의 배경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와 점령한 성읍들에 대한 이해는 수2:7-24을 통하여 알 수 있다. 기록된 방법은 이집트의 바로가 군사적인 원정을 마치고 난 후 승리의 사실을 찬양하기 위해 신전 벽에 기록한 이집트의 점령성읍목록 (topographical list)과 흡사하다. 이집트의 기록을 참고하면 편집자들은 전쟁의 승리를 찬양하는 원정의 기사로부터 도시들의 이름들을 발췌하여 점령성읍목록들을 정리하였다. 이것은 지역 별로 기록한 것이 아닌 사건의 전개 순서에 따라 기록되었다. 같은 기록방식은 탈무드에도 나타난다. 수12:7-24에 기록된 내용 역시 이런 방식에 따라 기록되었다. 여기에 기록되 점령성읍들은 중앙산지 뿐만 아니라 갈릴리의 북쪽에 이르기까지 가나안의 매우 중요한 지역에 속하지만 평야보다는 산지에 치우쳐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여호수아가 죽은 후 사사기에 기록된 점령에 관한 기사는 유다, 베냐민, 므낫세, 에브라임, 스불론, 아셀, 납달리 그리고 단지파에 관하여 나타나며 일차 점령에 실패한 지역들을 중심으로 다시금 무력으로 점령에 나섰다. 이스라엘이 점령에 실패한 원인에 대해 성경은 밝히기를: 가나안 거민들은 철병거와 발달된 무기들을 소유하였기 때문이다 (수17:18, 삿1:19).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들이 여호와 사상을 버렸기 때문이다 (삿2:1-4).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차 점령했던 지역들은 가나안에 대한 이집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변방에 치우쳤다. 이런 이유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출현한 기록이 이집트에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이해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스라엘이 역사적인 기록에 처음으로 나타나는 것은 메르넵타 비문이다 (1219 B.C.).
2) 사사기의 내용
사사들의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들의 활동범위가 지엽적이든 국가적이든 실추된 하나님의 법을 집행하였으며 신을 대변하는 역활을 감당하였다. 아비멜렉, 엘리, 사무엘이 사사들에 포함되기도 한다.
사사기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가나안 정복과 정착 (1:1-3:6), 사사들의 활동 (3:7-15:20), 보충내용(16-21)이다. 사사들의 활동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다: 사사들의 초기 사역과 (옷니엘, 에훗, 드보라와 바락, 기드온, 돌라와 야일) 삿10:6-16에 나타나는 또 다른 국면을 해결하는 사사들의 활동을 담고 있다 (입다, 입산, 엘론, 그리고 압돈, 삼손). 그리고 보충적인 내용으로는 삼손에 대한 또 다른 내용 (삿16)과 미가의 성소와 미가와 레위 소년과의 이야기 (삿17-18) 그리고 에브라임 산지에 사는 레위 사람의 첩 사건 (삿19) 그리고 베냐민 지파와 다른 지파들 간의 전쟁 (삿20-21)이 그것들이다.
사사기에 기록된 여러 전쟁들은 특정한 지파와 지역에 한정되었다. 서로 다른 지역에서의 전쟁 기사는 다섯 사사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은 유다 지파에게 속하였으며 옷니엘과 관련된 지역은 드빌-기럇 세벨이었다 (수15:15-19, 삿1:11-15). 그와 전쟁을 치른 족속은 아람 (나하라임) 곧 메소포타미아의 구산 리사다임이었다. 게라의 아들 에훗은 모압 왕인 에글론으로부터 베냐민 사람들을 구원하였다. 모압은 아르논과 헤스본 사이를 가리킨다. 에글론은 여리고의 동편 모압 평지를 다스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요단 서편까지 진출하여 여리고를 자신의 수하에 넣었고 베냐민을 학대하였다. 에글론이 여리고 평지와 산지 어느 지역까지 진출하여 이스라엘을 학대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지 않지만 그러나 에훗이 에글론을 축출할 때의 상황을 고려하면 그는 에브라임 산지에서 나팔을 불어 소집된 이스라엘 백성들과 연합하여 전쟁을 수행하였다. 그러므로 베냐민과 에브라임이 연합하여 모압을 몰아내는데 전쟁을 치루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삿3:27).
미디안을 대항하여 전쟁을 수행한 기드온 사건은 분명히 드보라의 사건 이후에 일어났다. 약탈을 목적으로 미디안 사람, 아말렉 사람, 그리고 동방 사람들은 시스라와 드보라 간의 전쟁에서 피폐해진 이스르엘 지역의 여러 성읍을 침략하였다.1 기드온 사건은 하롯 샘과 모레 산 사이의 이스르엘 골짜기 중앙에서 일어났다 (삿6:33, 삿7:1). 비록 이 지역은 잇사갈에게 할당된 지역이었지만 기드온은 갈릴리의 세 다른 지파인 아셀, 스블론, 납달리 사람들을 미디안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았다 (삿6:35). 기드온의 고향인 오브라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미디안과의 전쟁터에서 가까운 곳으로써 학자들은 그 위치를 현재의 아풀라 (Afula)로 주장한다.2 아풀라는 이집트의 Thutmose III의 원정 기록에 `-p-r (No. 53)로 기록되었으며 가나안 시대부터 이스라엘 시대까지의 주거층이 발견되었다. Eusebius의 기록 역시 아풀라를 오브라로 주장하였다 (Onomasticon 28:25). 사마리아 오스트라카에도 언급된 아비에셀 가문 (삿6:11)은 에브라임 산지에 거하였지만 그들이 북쪽 이스라엘 평야까지 이주하였음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성경은 잇사갈과 아셀의 기업 가운데 므낫세의 소유가 있음을 지적하는데 이는 지파들 가운데 일부는 타 기업 가운데 정착하여 생활하였음을 시사한다 (수17:11). 므낫세 기업은 납달리 지역까지 경계를 이루었다. 모레산 북쪽 엔돌 근처 (시83:9-10)에 진을 쳤던 미디안 군대를 무찌른 기드온에게 모여든 사람들은 납달리와 아셀과 그리고 므낫세 사람들이었으며 또 다른 므낫세 자손은 에브라임 산지에서 왔을 것이라는 것이 Y. Aharoni의 주장이다 (삿7:23). 미디안 사람들은 동쪽으로 도주하였다 (삿7:22). 하지만 기드온은 에브라임 사람들을 동원하여 미디안 사람들에 앞서 벧바라와 요단 나루턱을 점령하여 그들을 크게 응징하였다 (삿7:24).3
기드온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장막에 거한 자의 길 (삿8:11)을 따라 미디안을 추격하여 갈골까지 진격하여 세바와 살문나를 체포하였다.4 미디안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로부터 박대를 받은 기드온은 승리하고 돌아오는 길에 숙곳 장로들을 잡아 들가시와 찔레로 성읍 사람들을 징벌하고 브누엘 망대를 헐고 그 성읍 사람들을 학살하였다 (삿8:4-9, 13-17). 숙곳과 브누엘의 거민들이 정확히 누구인지에 대해 아는 바 없다. 하지만 브누엘의 망대는 세겜의 망대를 생각케 하며 아마도 이 숙곳과 브누엘의 거민들은 갓-길르앗 지역에서 생활하던 가나안 원주민일 것이다. 하지만 기드온이 숙곳 장로들을 사로잡고 그들을 응징한 내용으로 보아 갓 자손이란 주장도 전혀 반박할 수는 없다.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은 미디안 사람들로부터 이미 갖은 박해와 어려움을 충분히 겪었기에 기드온을 신뢰할 수 없었던 것도 이해할 만 하다.
사사들은 강력한 통치력을 가지고 억압 받는 백성들을 구원하였다. 그러나 사사들의 이런 일이 마무리되었을 때 그들의 임무 역시 끝났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생존할 당시 지속적으로 백성들을 다스렸다. 기드온의 활약 아래 오브라는 종교의 중심지 (삿8:27)가 되었으며 그의 통치가 자녀에게 세습된 유일한 경우이다. 기드온의 아들인 아비멜렉은 모친의 인척을 중심으로 세겜에서 왕정을 처음으로 꾀하였다. 세겜에서 아비멜렉은 친척의 도움으로 바알브릿 집에서 은 칠십을 가지고 용병을 사서 오브라에서 형제들을 모두 죽인 후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세겜 귀족들은 아마르나 시대의 Lab'ayu처럼 에브라임 산지 전체를 통치할 새로운 체제를 원했음이 분명하다. 아비멜렉은 세겜에 거하지 않았고 아루마 (삿9:41)에 거하였다.5 하지만 세겜 거민들과 아비멜렉과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급기야는 아비멜렉은 세겜 성을 함락하였으며 망대를 불에 태워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살육하였다 (삿9:34-49). 세겜 망대는 세겜 발굴 때에 발견되었는데 인위적으로 흙을 북돋운 터 위에 망대를 건축하였다. 아마도 이것은 바알 브릿의 집일 것이며 이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삿9:6의 밀로 사람들일 것이다. 이것은 주전 12세기 중반에 파괴되었다.
아비멜렉은 데베스를 대항하여 벌인 전쟁에서 종말을 맞았다. 가나안의 대표적인 도시 문화 중의 하나인 견고한 망대가 데베스에도 있었다. 데베스의 위치는 세겜의 북동쪽 약 14km 지점의 투바스 (Tubas)가 거론되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곳에서는 후기가나안시대의 유적이 발견되지 않은 점으로 인정하기 어렵다. 오히려 가나안의 중요한 성읍이었던 디르사가 보다 유력하다.6
트랜스요르단에서의 갈등은 길르앗 사람 입다의 기사에서 잘 드러난다 (삿11:1-40). 암몬 자손이 길르앗에 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자손들 역시 미스바 곧 길르앗의 미스베에 포진하였다 (삿10:17, 11:29). 이곳은 종교적인 중심지였다 (삿11:11). 이곳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수13:26의 헤스본, 브도님 그리고 마하나임과 함께 언급된 라맛 미스베와 동일 장소일 것이다. 얍복강 남쪽의 Jebel Jel 'ad와 Khirbet Jel 'ad 근처로 추정된다. 삿11:33의 아로엘, 민닛, 아벨 그라밈의 위치도 확실지 않다. 그러나 랍바 암몬의 지경에 속하였음은 분명하다. 일부 학자들 (G. E. Moore, Burney, Richter)은 입다의 사건을 암몬과의 충돌이 아닌 모압과의 갈등으로 이해한다.7 하지만 Vincent와 Boling은 모압이 아닌 성경에 기록된 암몬과의 충돌이 옳으며 모압 지경이 언급된 것은 암몬이 모압 지경을 침략하여 점령하였기 때문이며 모압의 신인 그모스가 언급된 것은 그들의 국가신을 채용한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 입다는 길르앗 한 성읍에 장사되었는데 LXX 입다가 장사된 곳을 스본 (oo ai)으로 번역하였다.
입다의 길르앗 사건은 에브라임과의 갈등을 빚은 기드온의 경우와 비교할 수 있다 (삿8:1-3). 하지만 기드온은 속담을 이용하여 에브라임의 노를 풀었지만 입다는 오히려 길르앗 사람들을 모아 에브라임 사람들을 크게 도륙하였다 (삿12:1-6). 에브라임은 입다에게 “너희 길르앗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로서 에브라임과 므낫세 중에 있다”고 말하여 입다의 노를 일으켰다 (삿12:4). 아마도 길르앗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에브라임 출신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입다는 같은 출신의 사람들이 서로 다른 장소에서 생활하므로 일어날 수 있는 언어의 차이로 길르앗 사람들 가운데서 에브라임 사람들을 색출하여 그들을 학살하였다.8
사사기의 마지막 장면은 에브라임 산지에 거하는 레위 사람의 첩이 베들레헴에서 에브라임 지로 돌아가는 길에 기브아의 비류들에 의해 겁탈당하고 결국은 사망에 이른 사건이 기록되었다. 이 사건은 베냐민 지파와 다른 지파들 간의 전쟁으로 이어졌으며 베냐민 한 지파가 이지러지는 비극적인 종말을 고하였다 (삿19-21). 첩의 남편 역시 죽은 부인의 시체를 열 두덩이로 나누어 각 지파들에 보내는 장면 역시 끔찍하기 그지 없다. 하지만 같은 사사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룻기를 보면 기브아의 상황과는 전혀 다르다. 룻은 모압 출신의 이방 여인이었다.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으로 곱게 단장한 룻 혼자서 한 밤 중에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을 걸어 다녔어도 그녀는 아무런 해를 입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는 시모 나오미가 이른 대로 그 밤을 보아스와 함께 보낼 준비를 갖추었다 (룻3:1-5).
베냐민을 응징하기 위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와 미스바 (삿20:1)와 벧엘 (삿20:26)에 모였으며 베냐민 사람들은 기브아에 소집하였다. 당시 하나님의 법궤 (aøai øe aaia ei)는 벧엘에 있었다 (삿20:27). 기브아를 발굴한 결과 성읍은 주전 12세기에 심하게 파괴되었으며 사울이 성읍을 견고히 쌓을 때까지 성읍은 황폐된 채 버려졌다.
사사기에는 중요한 사사들의 기록 뿐만 아니라 무용담이 전혀 언급되지 않은 다섯의 부 사사들 (minor judges)의 기록도 나타난다. 그들에 대한 것은 단지 활동했던 장소와 두드러진 사건 만을 겨우 기록하였을 뿐이다 (삿10:4, 12:9, 14). 여기에 언급된 사사들은 잇사갈 사람 부아의 아들 돌라 (삿10:1-2), 길르앗 사람 야일 (삿10:3-5), 베들레헴의 입산 (삿12:8-10), 스불론 사람 엘론 (삿12:11-12), 그리고 에브라임 산지의 비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 (삿12:13-15)이다.
사사기에서 이스라엘 각 지파들은 연합하여 주변 적대국들의 압제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였기에 이스라엘 사회는 불안전하였으며 전쟁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사사기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되었다: 그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그곳을 떠나 각각 그 지파 그 가족에게로 돌아가되 곧 각각 그곳에서 나와서 자기 기업으로 돌아갔더라.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 (삿21:24-25). 이것은 이스라엘 사회에 왕정이 필요하였음을 반증하는 것으로 사사시대는 지파 동맹 관계에서 왕정 체제로 돌아서는 과도기였던 것이다.
2. 룻기의 역사적인 배경 (룻기)
룻1:1에 룻기의 시대적인 배경은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라고 기록한다. 룻기서의 중심인물은 다윗의 증조모인 모압 여인 룻 (룻4:17)으로서 이 때는 아마도 기드온 사사 시대로 추정한다. 룻기서의 사회적인 배경은 흉년시기이다. 흉년은 종종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징계의 도구로 사용되곤 하였다. 흉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명사형태로 MT에 적어도 100회 이상 사용되었다. 같은 기원의 동사는 Ugarit text에도 나타난다. 흉년이라 함은 일정한 자연의 질서에 변화가 생김으로 사람들의 양식이 될 곡물 생산이 중단되는 것을 의미한다. 일차적으로 그 의미는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음으로 곡식 소출이 중단 또는 현격한 감소를 뜻한다. 이런 흉년이 계속되면 곳곳에서 기아자가 발생하며 성경에도 그 사례가 여러차례 나타난다 (창12:10, 26:1, 41:54-57, 왕상17:1).
1) 흉년의 역사적인 이해
고대 근동 특히 이집트에서는 1차 중간기시대 (1st Intermediate Period/ ca. 2150-2000 B.C.)당시 큰 흉년이 있었으며 이에 대한 기록이 여러 문서에서 발견된다. 당시 이집트 여러 지역의 토호들은 나일강의 수위가 급격히 낮아 짐으로 곡물생산이 감소되어 불평하는 내용들이 있다.
병충이나 해충 특히 메뚜기로 인한 피해로 가뭄, 흉년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 (욜1-2장). 아모스 선지자 역시 역병으로 인한 흉년을 이야기한다 (암4:9).
정치의 혼란이나 전쟁으로 말미암아 곡물 생산이 중단되고 양식이 빈곤한 예도 있다. 성이 적에 의해 포위되었을 때 성 안의 사람들이 기근에 처하게 된 대표적인 예는 다메섹의 벤하닷이 사마리아 성을 포위한 경우에서 볼 수 있다 (왕하6:24-7:20). 극심한 기근으로 인해 자녀를 양식으로 취하는 극단적인 일도 발생하였다 (왕하6:29). 느부갓네살에 의해 예루살렘 성이 함락될 때 발생한 심각한 기근에 대해서도 성경은 기록한다 (왕하25:3, 렘애2:11-12, 4:9-10). 적의 공격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기근은 성경외 고대 문서에도 여러차례 발견된다. Thutmose III의 7개월간 므깃도를 포위하여 공격한 사건 (c. 1468 B.C. cf. ANET 238), 앗수르 산헤립이 라기스를 침공할 당시의 모습을 담은 산헤립 비문에는 사로잡힌 사람들보다 더 야윈 동물들이 성으로부터 도망하는 그림이 있다. 이 동물들은 성안 주민들의 양식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요세푸스 역시 로마인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발생한 성 안의 기근에 대해 이야기한다 (JW 5:424-438, 571, 6:1-3, 193-213).
정치적으로 사회가 혼란스러울 때 발생하는 기근도 있다. 이는 중앙 통제가 무너지고 나라는 무질서를 형성하며 사회 불안이 조성될 때 농부들은 경작하는 일에 전념할 수 없어 발생하는 기근이다. 이런 정치적인 요인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기근의 대표적인 예가 이집트에서 두 차례 발견된다 (1st Intermediate Period- ca. 2200-2000 B.C., 2nd Intermediate Period- ca. 1200-1100 B.C.). 첫번째 기근은 the Admonitions of Ipu-wer의 비문에 생생히 묘사되어 있다 (ANET 441-444).
2) 이상 기후로 인한 흉년
이는 고대 근동의 사막과 바다를 접한 지역에서는 흔히 발생하는 기후적인 현상으로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는 큰 강을 끼고 있음으로 흉년과 같은 심각한 자연 재난을 발달된 수로시설을 이용하여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가나안과 같은 비에 의존하여 농사를 짓는 지역은 기후의 변화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아 왔다. 곧 가나안 지역의 우기 때에 비가 적게 내리면 이는 곧 기근으로 직접 이어졌다. 이런 기후적인 여건으로 말미암아 빚어진 대표적인 기근은 이집트의 9th-11th Dynasties의 famine texts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
3) 성경에 언급된 기근의 예
족장들의 시대에 나타난 기근/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이 생존하였던 시대는 대략 주전 2000-1800년 경으로 당시 이집트에는 약 20개 정도의 기근 문서들(famine texts)이 남아있다. 가장 오래된 문서는 the Admonitions of Ipu-wer으로써 이는 아마도 주전 22세기 초의 것으로 생각된다 (c. 7th or 8th dynasty). 가장 최근의 기근 문서는 12th dynasty 의 Sesostris I (c. 1950 B.C.)통치시대에 해당하는 기근 문서이다. 이 문서들을 참고하면, 기근은 고대 근동의 매우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아브라함과 야곱은 기근을 피해 이집트로 피난했으며, 이삭은 강수량이 약 50mm정도의 네게브 지역에서 강수량이 약 200mm에 달하는 그랄 지역으로 피신한 경우를 볼 수 있다 (강수량의 수치는 현대 통계에 근거함 것임).
후기 가나안 시대 (c. 2000-1550 B.C.)/ 후기 청동기 시대 말 힛타이트 제국 내에 발생한 심각한 기근 기록이 있다. 그것은 Mursilis의 비문으로써 그 비문에는 20년간 계속되는 역병으로 인한 기근으로 storm god에게 탄원하는 내용이 그의 비문에 나타난다 (ANET 394-396). 아마르나 시대 역시 가나안의 여러 도시 국가들 간의 전쟁으로 인한 사회적인 혼란, 기근을 적고 있다. 뿐만 아니라 Ramses II와 Merneptah의 통치시 힛타이트 내에 발생한 심각한 기근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는데 그 때에 이집트는 식량원조를 통하여 힛타이트를 도운 경우를 볼 수 있다. 비슷한 시기에 성경 역시 말씀을 거역할 경우 저주의 수단으로 기근을 언급한 경우가 있다 (레26:18-26, 신11:17, 28:23-24, 32:24).
이스라엘 초기 시대 (c. 1200-1000 B.C.)/ 이 때에는 후기 가나안 시대에 비해 기근의 발생률이 더 많았다. 근동 전체 지역에서 기근에 관한 많은 기록들이 발견된다. 이 시대에 발생한 이집트의 기근에 관한 기록은, royal tomb을 만들기 위해 돌을 다듬는 인부들이 폭동을 일으킨 사실을 기록한 문서에서 당시의 사회적인 기근을 엿볼 수 있다. 정한 삯으로 양식을 제 때에 지불하지 않음으로 발생한 이 폭동은 나라의 국고가 고갈되었기 때문에 일어났다. 이집트의 어려운 상황은 Ramses III-Ramses X까지 계속되었다. 당시 이집트는 중앙 통제력을 상실하고 권력이 지방으로 분산되었음으로 말미암아 야기된 사회적인 기근을 형성하였다.
메소포타미아/ 기상학적인 연구결과 주전 약 1200-900년 당시 고대 근동과 유럽은 지금보다 건조하고 온도가 더 높았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Neumann and Parpola 1987). 당시 앗수르와 바벨론은 정치적인 암흑기로써 유목민들의 잦은 침입, 곡식 소출의 감소 등과 같은 사회 전반에 걸친 어려움들을 그들의 문서를 통해 알 수 있다 (Brinkman 1968:280, 389). 하지만 습하고 시원한 기후 조건은 주전 9세기 이후에 다시 회복된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 비슷한 시기에 이스라엘 역시 세차례 기근에 관한 기록이 있다. 대략 12세기 경의 미디안 사람들의 침입으로 인한 기근 (삿6:2-11), 주전 11세기 초로 생각되는 룻기서에 나타난 기근 (룻1:2-), 그리고 주전 10세기 초 다윗 당시의 3년 기근 (삼하21:1)이 있다.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 가운데에서도 YHWH께 미래의 어느 잠재적 기근으로부터 백성들을 구원해 주실것을 염원하고 있다 (왕상8:33-40).
이스라엘 후기 시대/ 주전 9세기 중반에 해당하는 엘리야 시대의 3년 기근 (왕상17:1)과 엘리사 때의 7년 기근 (왕하8:1-3)이 있다. 하지만 당시의 기근에 관한 성경외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10 엘리야 시대는 건조한 사막화 현상에서 벗어나 습한 시대로 접어든 시기에 해당한다. 아모스 때에 발생한 기근은 전쟁으로 인한 기근을 염두에 두고 있다 (암4:6-8). 벤하닷의 사마리아 침공 (왕하6:24-29), 그리고 느부갓네살의 예루살렘 침공 (왕하25:3, 렘애4:7-10)때 발생한 기근 등이 있다.
고고학과 성경의 기록과의 의견을 좁히는데 문제가 많이 제기되곤 한다. 만약 사사기 1장을 두 사건이 서로 반복되어 나타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여호수아가 사망한 후에 가나안의 상황은 매우 악화되었으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의 성읍들을 다시금 점령하는 수고를 해야 했다. 사사기 서두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성경의 내용과 고고학적인 증거를 서로 일치시키는 노력은 매우 어렵다. 유다 산지와 쉐펠라에서의 고고학적인 자료들은 주전 1250-1150 당시 이곳에 대변화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다른 한편 여호수아서와 사사기서에 점령된 것으로 나타난 남쪽에 위치한 많은 성읍들은 사실은 주전 10세기 이전에는 세워지지 않은 성읍들이 대부분이다. 주전 10세기는 다윗이 이스라엘 왕국을 수립하고 다스릴 때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민족들이나 많은 성읍들의 이름들은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차지했던 근처 지역들에서 비롯된 이름 또는 주변 민족들의 이름으로 대치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아마도 이것들을 사사기 1장에서 찾는 일은 무의미할 수도 있다.
사사기에서 두드러진 하나의 성읍은 길갈 (삿2:1) 이다. 길갈은 여리고 근처에 위치한다.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텔단 (Tell Dan)은 주전 12세기 중반에 점령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사사기 1:22-26, 20:18, 21:2에 기록된 벧엘 (Beitin)은 아마도 사사기 2:1-5에 기록된 보김 (Bochim)과 동일한 장소일 것이며 17장의 미가 이야기에서 에브라임 산지에 위치한 미가의 집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벧엘은 주전 13세기에 크게 파괴되었다. 여선지 드보라는 라마와 벧엘 사이 종려나무 아래에 거하며 백성들을 치리하였으며 (삿4:5) 같은 내용 가운데 하솔 왕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는 이스르엘 골짜기에 위치한 이방 하로셋에 거하면서 이스라엘을 위협하였다. 하솔 (Tell el-Qedah)은 주전 13세기 중반에 파괴된 후기청동기시대의 성읍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초기에 아마도 이스라엘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가나안 신전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 정착 초기에 이미 가나안 종교에 노출되었음을 강력히 시사하는 부분이다. 당시 갈릴리의 북쪽은 새로운 문화가 퍼졌고 성벽이 없는 성읍에서 높은 산지에서 생활하였으며 계단식 경작이 처음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여호수아 11장을 참고하면 갈릴리 지역에 심각한 변화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삿4:11에 모세의 장인 호밥의 자손 중 겐 사람 헤벨이 갈릴리 지역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으며 사사기 4-5장에서 언급된 야엘은 므깃도 물가 다아낙에서의 큰 승리를 찬양하는 장면에서 언급되었다. 므깃도는 주전 1125에서 1100-1050까지는 사람이 살지 않았든지 또는 유목민들이 겨우 계절별로 생활을 했든 정착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다아낙 역시 주전 12세기에 하솔처럼 성읍은 없었으며 주전 1125년 경에 파괴되었다. 드보라와 바락의 활동은 이런 자료들을 근거할 때 주전 12세기의 말기에 해당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세겜의 아비멜렉도 상황은 비슷하다. 정확한 이유는 알수 없지만 그러나 후기청동기시대의 세겜은 주전 14세기에 파괴되었지만 곧 성은 다시 회복되었고 열악한 성읍은 주전 12세기의 말에 파괴되기까지 약 200년간 공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2세기에 파괴된 원인은 아마도 삿9장에 기록된 아비멜렉으로 인한 것으로 보인다.
세겜에서의 공백기간 동안 남쪽 헤브론에서부터 북쪽 세겜에 이르기까지 성벽이 없는 촌락이 팔레스틴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이런 상황은 갈릴리의 북쪽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사람들은 경사진 지역들을 계단식으로 개간하여 경작지를 확보하여 생활하였다. 중앙산지의 중심에 위치한 세겜의 이런 상황이 전개되던 당시는 이집트의 속국으로써 라바유와 그의 아들들이 다스리던 때였다. 세겜이 14세기에 파괴되었다할 지라도 세겜의 영향력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실로와 미스바의 서쪽은 이런 상황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세겜이 무너질 당시 실로와 미스바는 산지에서 가장 두드러진 성읍으로 발돋음하였다. 미스바 (Tell en-Nasbeh)는 13세기 말에서 12세기에 산지에 세워진 발달된 성읍 가운데 하나였다. 후기가나안시대의 실로는 사람이 살지 않은 상태로 황폐된 채 남아 있었다. 블레셋으로 인한 실로의 멸망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과 사울 때에 다시금 길갈을 중심으로 회집하게 되었다.
삼손의 기사에서 나타나는 블레셋의 위기는 사울과 다윗 그리고 솔로몬으로 인한 이스라엘 왕국이 서쪽 지역을 차지하고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당시까지는 여전히 기세가 등등하였다. 사울은 블레셋과의 길보아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이런 혼란의 기간동안 요단 동편지역에서의 이스라엘은 발달이 상당히 지연되었다. 요단 동편지역에서 이미 강력한 세력을 형성한 모압은 아르논지역 남쪽까지 강력한 힘을 형성하였으며 암몬족속들은 길르앗까지 확장하였다. 암몬 모압 그리고 이스라엘과의 갈등은 아르논의 북쪽에서 일어났으며 삿11장에 나타난 입다의 사건은 인구의 변화가 있었으며 이것은 이 지역들을 발굴한 결과를 통해서 이해할 수 있다.
3. 사사기에 대한 최근의 연구자료들
사사기서에는 많은 복잡한 문제들이 얽혀있다. 수세기간 이루어진 사실들에 대한 증거들을 어떻게 이해하며 원래의 사건과 마지막으로 편집된 내용 간의 편집자들에 의해 정리된 역사적인 사실들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옳은가. 화자와 편집자가 여러 성읍들에 관심을 기울이게 한 요인은 무엇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공적인 회집을 가진 장소나 신탁과는 관계없는 다른 성읍들에 관한 의문이다). 고고학적인 설명과 이스라엘 고대 사회의 비평적인 내용 그리고 문서에 비친 해석 간에 서로 상충되는 부분들에 대한 이해는 어떻게 하겠는가. 이런 직접적인 사건들을 경험한 세대들은 누구인가 그리고 최종적으로 편집되기까지 이런 이야기들이 이스라엘 사회에서 회자되었는데 그것은 도대체 무엇을 이야기하기 위함이었는가 하는 이런 여러가지 문제들이 성경을 연구하는데 의문시된다.
1) 문학적인 측면에서의 사사기
사사기의 내용을 구성하는 서로의 이야기 사이들을 연결하는 매개점은 다소 떨어지기는해도 본문의 전체적인 흐름은 서론과 본론이 극명하게 나타나는 문학적인 면이 분명하다. 이것은 다른 성경과는 다르게 편집된 흔적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 책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이스라엘의 고대 문학 가운데 순수한 이야기체를 사사기서에서 찾는다. 사사기서에 기록된 이야기들은 역사적으로 낭만이 깃들여 있으며 이야기들은 이념과 희극 두가지 요소들이 규치적으로 나타난다. 이념적인 요소는 교훈과 함께 대중적인 언어로 이미 잘 알고 있는 이야기의 틀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희극적인 요소는 궤변적이며 불규칙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보다 세심한 주의를 필요로 한다. 사사기서의 중심 축이 되는 이야기의 틀은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다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외부적인 틀은 희극적인 시각의 많은 증거들을 제시한다.
2) 고고학을 통한 사사기 이해
13세기의 팔레스틴은 혼란의 시기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 유입과 고고학과 성경의 기록과의 의견을 좁히는데 문제가 많이 제기되곤 한다. 만약 사사기 1장을 두 사건이 서로 반복되어 나타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여호수아가 사망한 후에 가나안의 상황은 매우 악화되었으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의 성읍들을 다시금 점령하는 수고를 해야 했다. 사사기 서두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성경의 내용과 고고학적인 증거를 서로 일치시키는 노력은 매우 어렵다. 유다 산지와 쉐펠라에서의 고고학적인 자료들은 주전 1250-1150 당시 이곳에 대변화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다른 한편 여호수아서와 사사기서에 점령된 것으로 나타난 남쪽에 위치한 많은 성읍들은 사실은 주전 10세기 이전에는 세워지지 않은 성읍들이 대부분이다. 주전 10세기는 다윗이 이스라엘 왕국을 수립하고 다스릴 때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민족들이나 많은 성읍들의 이름들은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차지했던 근처 지역들에서 비롯된 이름 또는 주변 민족들의 이름으로 대치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아마도 이것들을 사사기 1장에서 찾는 일은 무의미할 수도 있다.
사사기에서 두드러진 하나의 성읍은 길갈 (삿2:1) 이다. 길갈은 여리고 근처에 위치한다.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텔단 (Tell Dan)은 주전 12세기 중반에 점령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사사기 1:22-26, 20:18, 21:2에 기록된 벧엘 (Beitin)은 아마도 사사기 2:1-5에 기록된 보김 (Bochim)과 동일한 장소일 것이며 17장의 미가 이야기에서 에브라임 산지에 위치한 미가의 집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벧엘은 주전 13세기에 크게 파괴되었다. 여선지 드보라는 라마와 벧엘 사이 종려나무 아래에 거하며 백성들을 치리하였으며 (삿4:5) 같은 내용 가운데 하솔 왕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는 이스르엘 골짜기에 위치한 이방 하로셋에 거하면서 이스라엘을 위협하였다. 하솔 (Tell el-Qedah)은 주전 13세기 중반에 파괴된 후기청동기시대의 성읍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초기에 아마도 이스라엘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가나안 신전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 정착 초기에 이미 가나안 종교에 노출되었음을 강력히 시사하는 부분이다. 당시 갈릴리의 북쪽은 새로운 문화가 퍼졌고 성벽이 없는 성읍에서 높은 산지에서 생활하였으며 계단식 경작이 처음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여호수아 11장을 참고하면 갈릴리 지역에 심각한 변화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삿4:11에 모세의 장인 호밥의 자손 중 겐 사람 헤벨이 갈릴리 지역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으며 사사기 4-5장에서 언급된 야엘은 므깃도 물가 다아낙에서의 큰 승리를 찬양하는 장면에서 언급되었다. 므깃도는 주전 1125에서 1100-1050까지는 사람이 살지 않았든지 또는 유목민들이 겨우 계절별로 생활을 했든 정착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다아낙 역시 주전 12세기에 하솔처럼 성읍은 없었으며 주전 1125년 경에 파괴되었다. 드보라와 바락의 활동은 이런 자료들을 근거할 때 주전 12세기의 말기에 해당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세겜의 아비멜렉도 상황은 비슷하다. 정확한 이유는 알수 없지만 그러나 후기청동기시대의 세겜은 주전 14세기에 파괴되었지만 곧 성은 다시 회복되었고 열악한 성읍은 주전 12세기의 말에 파괴되기까지 약 200년간 공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2세기에 파괴된 원인은 아마도 삿9장에 기록된 아비멜렉으로 인한 것으로 보인다.
세겜에서의 공백기간 동안 남쪽 헤브론에서부터 북쪽 세겜에 이르기까지 성벽이 없는 촌락이 팔레스틴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이런 상황은 갈릴리의 북쪽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사람들은 경사진 지역들을 계단식으로 개간하여 경작지를 확보하여 생활하였다. 중앙산지의 중심에 위치한 세겜의 이런 상황이 전개되던 당시는 이집트의 속국으로써 라바유와 그의 아들들이 다스리던 때였다. 세겜이 14세기에 파괴되었다할 지라도 세겜의 영향력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실로와 미스바의 서쪽은 이런 상황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세겜이 무너질 당시 실로와 미스바는 산지에서 가장 두드러진 성읍으로 발돋음하였다. 미스바 (Tell en-Nasbeh)는 13세기 말에서 12세기에 산지에 세워진 발달된 성읍 가운데 하나였다. 후기가나안시대의 실로는 사람이 살지 않은 상태로 황폐된 채 남아 있었다. 블레셋으로 인한 실로의 멸망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과 사울 때에 다시금 길갈을 중심으로 회집하게 되었다.
삼손의 기사에서 나타나는 블레셋의 위기는 사울과 다윗 그리고 솔로몬으로 인한 이스라엘 왕국이 서쪽 지역을 차지하고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당시까지는 여전히 기세가 등등하였다. 사울은 블레셋과의 길보아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이런 혼란의 기간동안 요단 동편지역에서의 이스라엘은 발달이 상당히 지연되었다. 요단 동편지역에서 이미 강력한 세력을 형성한 모압은 아르논지역 남쪽까지 강력한 힘을 형성하였으며 암몬족속들은 길르앗까지 확장하였다. 암몬 모압 그리고 이스라엘과의 갈등은 아르논의 북쪽에서 일어났으며 삿11장에 나타난 입다의 사건은 인구의 변화가 있었으며 이것은 이 지역들을 발굴한 결과를 통해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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