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원본에도 오류가 있었을까?
지금까지 성경 영감설을 말할 때 일부 맹목적이고 극단적인 보수를 주장하는 분들은 맨 처음 기록된 원본에는 사소한 고장도 없이 완전했을 것이라 주장을 했습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하나님께서 성경을 기록하는 기자들에게 유기적 영감을 주셔서 축자적으로 오류 없이 기록하게 영감을 주셨을 것으로 믿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원본을 가지고 있지도 않으면서 하는 말이기 때문에 원본에 오류가 있었는지 확인할 수가 없고 확증 할 길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실재 하지도 않는 원본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교리를 만들 수가 없어서 그냥 ~~영감설 ~~ 영감설 하고 학설 정도로 주장하다가 그치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속성상 오류가 원본에 기록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아주 그럴듯한 이론이기는 하지만 오류가 없었다는 증명은 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 무오설을 주장하시는 분들이 근거로 제시하는 성경 구절은 사도 바울이 데모데에게 보낸 편지에 있었습니다.
(딤후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바울이 모든 성경이라는 글을 쓸 당시에는 일단 구약만을 두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바울이 이 말을 쓸 때로부터 최소한 300 년이나 지나서 신약의 기록들을 성경으로 공인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모든 성경이라고 한 말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66권 중에서 신약을 고려하지 않고 한 말이었습니다.
이 말은 신약을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바울이 모든 성경이라고 했을 때 그 말씀의 정확한 해석과 적용의 범위를 엄격하게 말하자면 그렇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말한 하나님의 감동(데오프뉴스토스)이란 도대체 어떤 감동이었을 것인가를 두고 이론들이 분분하였습니다.
성경이라는 말은 신약성경에서만 나오는 말인데 헬라어 성경에는 50가 나오지만 언제나 구약성만을 두고 한 말이었습니다.
마 21:42, 마 22:29, 마 26:54, 마 26:56, 막 12:10, 막 12:24, 막 14:49, 눅 4:21, 눅 24:27, 눅 24:32, 눅 24:45, 요 2:22, 요 5:39, 요 7:38, 요 7:42, 요 10:35, 요 13:18, 요 17:12, 요 19:24, 요 19:28, 요 19:36, 요 19:37, 요 20:9, 행 1:16, 행 8:32, 행 8:35, 행 17:2, 행 17:11, 행 18:24, 행 18:28, 롬 1:2, 롬 4:3, 롬 9:17, 롬 10:11, 롬 11:2, 롬 15:4, 롬 16:26, 고전 15:3, 고전 15:4, 갈 3:8, 갈 3:22, 갈 4:30, 딤전 5:18, 딤후 3:16, 약 2:8, 약 2:23, 약 4:5, 벧전 2:6, 벧후 1:20, 벧후 3:16
베드로 사도의 편지에 예언 나오는 한 구절을 인용하여 성경에 오류가 없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벧후 1: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여기서도 주목하실 것은 베드로가 모든 성경이라고 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정확하게 예언이라고 제한하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예언(프로페테이아)이라는 단어는 19번 사용되었지만 역시 베드로 사도의 말 속에 나오는 예언은 역시 구약 성경에서 예언되었던 말씀들을 두고 한 말씀이었고 혹 신약시대 사도들이 예언을 하는 일이 있었다 해도 어디까지나 베드로 사도는 예언을 두고 한 말씀이었습니다.
예언자들이 말한 예언은 누가 보아도 성령님의 감동을 받아서 기록했다는 것을 의심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정직하게 보려고 하는 분들이면 구약은 물론 신약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예언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서 말한 것임을 믿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예언이 아닌 부분이 많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특히 역사서를 기록했던 분들은 성령께서 한 글자씩 불러주는대로 쓰신 것이 아니라 자신보다 일찍이 기록되어 있는 여러 문서들을 참고하여 기록했습니다.
(민 21:14) 여호와의 전쟁기에 일렀으되
(수 10:13)야살의 책에 기록되기를 태양이
(삼하 1:18)야살의 책에 기록되었으되
(왕상 11:41) 솔로몬의 행장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왕하 15:21)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왕하 24:5)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대상 5:17) 족보에 기록되었더라
(대상29:29) 선견자 사무엘의 글
(대상29:29) 선견자 갓의 글
(대하 9:29) 선지자 나단의 글과
(대하 9:29) 실로 사람 아히야의 예언과
(대하 9:29) 잇도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에게 대하여 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대하 12:15) 선지자 스마야와 선견자 잇도의 족보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대하12:15) 잇도의 족보책
(대하13:22) 잇도의 주석책
(대하20:34) 예후의 글
(대하 25:26) 유다와 이스라엘 열왕기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대하 24:27)열왕기 주석에 기록되니라
(대하32:32) 이사야의 묵시책
(대하 33:18)이스라엘 열왕의 행장에 기록되었고
(대하33:19) 호세의 사기
(스 8:3) 함께 족보에 기록된 남자가 일백 오십명이요
(에 10:2) 메대와 바사 열왕의 일기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이와 같이 역사서를 기록했던 분들은 여러 왕실의 사초나 사기 그리고 그외 역사적인 사료를 면밀히 검토하여 기록했다는 사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예언서를 기록한 예언자들이 받은 영감과 역사서를 기록한 사람들의 영감을 꼭 같이 바라 볼 수 없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격을 가지신 분이시고 사람을 대할 때도 인격적으로 대하시기 때문에 인격적인 감동(inspiration) 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기록하게 하셨다고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한 표현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경기자들에게 실제로 어떤 영감을 주셨을까 하는 것을 고민합니다.
기계적 영감설이란 말은 아무런 근거도 없고 책임질 수도 없는 학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격을 기계처럼 취급하신 일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실 바에야 차라리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능력으로 성경책을 창조하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4 복음서을 대조 해 보면 하나님께서는 개인의 인격을 무시하지도 않으셨고 그렇다고 한자 한자 불러 주신 것이 아님을 누구든지 다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한자 한자 불러 주셨다면 이는 사실 기계적 영감설과 별로 차이가 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복음서 기자들의 기록을 좀 더 성실하게 읽어 보시게 되면 개인의 경험과 취향과 성품까지 그 기록된 문서에 배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는 사람들이 이러한 영감을 유기적 영감설이라고들 합니다.
유기적이란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생물학적이란 말과 거의 같은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더 정직하게 읽어 보시게 되면 유기적 혹은 생물학적 영감이 아니라 인격적인 영감을 부어 주셔서 성령으로 거듭난 인격이 각성된 정신을 가지고 성령의 감동을 입어 신앙 양심으로 기억을 되살려서기록하였고 어떤 때는 기자가 스스로 자세히 살피고 조사하여 기록한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눅1:1-4)
(누가 복음 1: 1-4)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
누가는 결코 한자 한자 불러주시는 대로 기록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먼저 기록된 복음서들과 여러 기록물들을 우선적으로 읽어 본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 보다 먼저 기록된 문서들에서 만족을 얻지 못하고 이에 스스로 조사를 하기 시작해서 자료를 수집했습니다. 자료를 수집할 때 누가는
첫째, 모든(파신) 일을 살피려고 했습니다.
이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누락 된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둘째, 근원(아노덴)부터 살피려고 노력했습니다.
이 말은 위에서부터 살폈다는 뜻입니다.
셋째, 자세히(아크리보스) 살피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세심하게(carefully & perfect) 살폈다는 것입니다.
넷째, 미루어(파라콜루데코티) 살피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이 말은 완전히 이해 되도록 살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제는 사본들을 대조 해 가면서 살펴 보는 수 밖에 없습니다.
신약은 사본들이 많아서 대조를 해 보면 그 안에서 문제가 발견되었을 때 사본들끼리의 사소한 차이 정도의 이상인지 아예 원본에서부터 문제가 발생한 것인지를 그리 어렵지 않게 분별할 수 있다는 것이 사본 대조학의 상식입니다.
1. 대문자 사본이 원전에 가까운 것이고 소문자 사본이 후대의 것입니다.
2. 뛰어 쓰기가 잘 된 것이 후대의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것이 연대가 앞선 것입니다.
3. 한 두 글자의 첨가와 누락의 차이는 사본들끼리의 차이로 보게 됩니다.
4. 이해를 돕기 위하여 한 절을 첨가한 한 흔적들은 거의 쉽게 드러나게 됩니다.
5. 한절 정도가 빠진 경우는 오히려 원본에 더 가까운 사본에서 보여지고 있습니다.
6. 아예 몇 절이 더한 경우도 후대 사본에서 발견되어 첨가로 보게 됩니다.
7. 이러한 고장들은 상당수가 있고 이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로써 규명되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 보이는 문제는 결코 사본에서 발생한 문제의 수준을 넘어서 원본에서부터 발생한 문제로 볼 수 밖에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목사님께서도 한 번 이에 대하여 살펴 주셨으면 해서 제시하는 바입니다.
지금부터 마태복음 안에 무리하게 인용된 구절을 제시해 보겠습니다.
1. 마태가 이사야 7장 14절을 인용하면서 심각한 오해를 했습니다.
마태는 이사야서 7장 14절을 그리스도께서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 탄생하시게 될 예언으로 오해하여 인용한 사실을 대부분은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전혀 그렇게 예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사야서 7장 14절 앞뒤를 잘 읽어 보시면 이사야 선지자는 수백년 후에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통하여 탄생하시게 될 것을 예언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누구든지 조금만 더 성실하게 읽으시면 분별할 수 있는 내용의 기록입니다.
이사야서 7장을 잘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읽어 보셨으면 이러한 성경을 해석하기 위하여 다음의 원칙을 한 번 적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해석하거나 인용하는 사람들은 이런 기본원칙을 유념하시고 조심하셔야 할 것입니다.
①언제, ②어디서, ③누가, ④누구에게, ⑤무엇을, ⑥어떻게, ⑦왜
그러한 말씀이 주어졌는지를 면밀하게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①언제 : 이 때는 아하스 왕 때의 일입니다.
②어디서 : 유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③누가 : 이사야 선지자가
④뉘에게 : 아하스 왕에게
⑤무엇을 : 아람왕 르신과 북왕국 왕 베가를
⑥어떻게 : 두려워 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⑦왜썼나 : 두려워 할 필요도 없는 것을 두려워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하스 왕 때에 북왕국 왕 베가와 아람왕 르신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와 공격을 시도했지만 예루살렘을 함락 시키지도 못하고 물러갔습니다.
그 때 어떤 사람들이 아하스 왕에게 말하기를 아람왕 르신과 북왕국 이스라엘 왕 베가가 동맹(同盟)하였다는 정보(情報)를 흘렸습니다.
그러자 왕의 마음과 백성들의 마음이 삼림이 바람에 떨림같이, 또는 사시나무 떨듯이 두려움이 사로잡혀 떨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어 아람왕 르신이나 북 왕국 베가가 아무리 큰소리 쳐도 연기 나는 두 부지갱이 수준 밖에 안되니까 전혀 두려워 하지 말고 염려 할 것이 없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도 아하스는 두려워서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하스 왕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지켜 주실 증거가 되는 징조라도 기도해 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하스는 또 나는 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 같은 짓은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 때 이사야 선지자가 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하나님께 징조(徵兆)를 구하지 않아도 주께서 친히 한 징조(徵兆)를 주실 것인데 자 보아라 ! 지금 한 젊은 여자(알마 ; 처녀가 아니었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아이를 낳거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인데 이 아이가 미쳐 선악(善惡)도 분별(分別) 못하고 겨우 젖 떨어져 버터와 꿀을 먹을 수 있을 때쯤에는 지금 아하스 왕이 두려워하고 미워하는 두 왕 즉 아람왕 르신과 북왕국 이스라엘 왕 베가의 땅이 폐한 바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은 앗수르 왕이 와서 아람과 북왕국 이스라엘을 쳐서 망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17절에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마리아가 잉태하여 예수님을 낳을 것을 예언한 것이라고 마태처럼 그대로 오해(誤解)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에서 말씀하시는 14절의 처녀라는 번역은 오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단어는 처녀(뻬툴라)가 아니라 그냥 젊은 여자(알마)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알마(젊은 여자)는 마리아를 예언한 것은 전혀 아니고 이사야 선지자와 아하스 당시에 살았던 임마누엘이란 아들을 낳았던 여인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씀하시던 그 여인은 동정녀를 말하는 것도 아니었고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를 예언한 것이 아니라 그 시대에 살았던 한 여인에 불과 했습니다.
그 때 이사야 선지자는 전혀 동정녀 탄생을 예언할 생각도 계획도 없었습니다.
또 하나님꼐서도 그러한 예언을 하라고 지시하신 아무런 근거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다만 지나치게 소심하여 벌벌 떨고만 있는 아하스 왕을 안심시킬 마음 밖에는 다른 어떤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본문의 배경을 다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이 말씀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해 보시게 되면 누구든지 꼭 같은 결론을 얻을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는 마태가 무리한 인용을 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한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사야 선지자가 무슨 말을 했던지 "마태가 그렇게 인용했으면 마태가 인용한 것이 맞는 것이지 뭐그리 말이 많으냐!?" 하는 식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이러한 자세는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잘 모르고 그냥 그 말씀을 동정녀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할 예언으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면밀하게 보지 않으면 일반인들이 잘 발견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또 이러한 문제를 제기 했다가는 괜한 구절수에 휘말리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어떤 사람들은 알면서도 그냥 어물쩡 말 없이 넘어가고 있는 현실입니다.
신약 성경에 신약기자들이 구약을 인용한 구절에는 때로는 무리한 인용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 중에 마태복음에 주로 그러한 인용이 있습니다.
2. 마태가 기록한 족보에 몇 사람을 고의로 누락시킨 문제입니다.
마태는 족보를 기록하면서 세 사람의 왕을 의도적으로 누락시키고 있습니다.
1장 8절에 요람 다음에 ①아하시야(1년 통치) ②요아스(40년 통치) ③아마샤(29년 통치)
세 왕을 빼먹어서 결국은 14 대라는 이상한 틀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결국 마태는 14 대 이론에 맞추기 위하여 유대역사 중 세 사람이 다스린 중요한
①아하시야(1년 통치) ②요아스(40년 통치) ③아마샤(29년 통치) 70년을 무시해 버렸습니다.
그렇게 한 것까지도 성령께서 그렇게 하라고 지시하셨다고 끝까지 주장해도 괜찮을까요?.
성령께서 마태에게 3 명의 왕을 빼고 14씩 맞추라고 영감을 주셨을 것으로 믿어야 할까요?
아니면 거기에 대하여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 정통이고 보수이며 개혁주의가 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으면 또 사본을 만드신 필사자들에게 책임을 돌려야 하는데 아시겠지만 모든 사본들이 꼭 같을 때는 사본을 기록한 사람의 실수 문제로 보지 않습니다.
원본에 바르게 기록 되어 있는 것을 필사자들이 고의로 이렇게 엄청난 변조를 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한 두개의 사본에만 이렇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본이 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원본이 없지만 억지로라도 주장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가령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이 말해 보는 것입니다.
"마태는 그렇게 쓴 것이 아니고 성령의 감동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아무 하자나 오류가 없는 완전한 기록을 남겼는데 제 1차 사본의 기자가 이렇게 변조했을 것이다."하고 우기는 것입니다.
제 1차 사본의 기자가 변조하였고 그 후 필사본을 기록한 모든 분들이 변조된 사본에서 또 사본을 만들어 오늘날 마태복음에 그렇게 이상한 부분이 있다고 주장하게 되면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는 너무나도 단순한 생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태 한 사람을 감동하여 마태에게는 한 글자도 오류가 없는 완전한 복음서를 기록하게 하셨지만 제1차 사본를 필사하는 사람은 감동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에 이는 말이 되지 않습니다.
제 1차 사본이 변조 되었을 때 원본이 없어지고 나면 이는 회복 불능의 사태가 벌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본 하나를 기록하는 것을 돌아 볼 수 있었지만 사본 기록자들까지는 돌아 볼 수 없었다고 하면 도대체 원본을 오류 없이 기록하게 하신 것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원본에 오류가 없었다고 어떻게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것을 보면서도 오류가 있다고 말하면 안되고 무조건적으로 성경원본에서는 일점 일획도 오류가 없었다고 교리를 만들고 또 그렇게 주장만 한다고 해서 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3. 마태는 다시 바벨론 이거 후의의 역사에서 다시 한 대를 빼서 14대를 맞추었습니다.
마태의 족보 이야기에서 또 다른 문제는 3 번째 14 대 째라고 하는 데서도 브다야를 누락시켜서 마지막 14 대를 맞추었다는 것입니다.
역대상 3:17-20을 정밀하게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사로잡혀 간 여고냐(여호야긴 혹은 고니야)의 아들들은 그 아들 스알디엘과 말기람과 브다야와 세낫살과 여가먀와 호사마와 느다뱌요 브다야 (마태가 누락시킨 사람) 아들들은 스룹바벨과 시므이요 스룹바벨의 아들은 므술람과 하나냐와 그 매제 슬로밋과 또 하수바와 오헬과 베레갸와 하사댜와 유삽헤셋 다섯 사람이요 스알디엘과 스룹바벨 사이에 분명히 브다야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태가 14 대를 맞추기 위하여 브다야의 이름을 누락시키고 있습니다.
무슨 변명을 할 수도 없고 언제 어디서 누가 몇 번을 보아도 이러한 것은 잘 못된 것은 분명합니다.
첫째,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성령님의 실수라고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성령님께서 세 사람을 빼고 14대씩 맞추라고 감동하셨다는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14 대씩 맞춘다고 좋아질 것은 아무 것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둘째, 이러한 문제는 사본을 만드는 사람들의 단순한 실수에서 비롯된 문제도 아닌 것입니다.
사본을 만드는 사람들이 실수일 수 없는 이유는 이 부분을 모든 사본이 꼭 같이 기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만약 마태가 이런 것 없이 완전한 영감으로 아무 하자가 없는 복음서를 기록했었는데 제 1 필사본 기록자가 임의로 이렇게 고장을 낸 것이라고 하면 말은 되지만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원본을 기록하는 마태는 성령께서 오류가 없도록 감동과 감독을 하실 수 있었다면 왜 최초의 사본의 필사자가 이렇게 큰 변조를 하도록 하나님께서 방치하셨는지를 설명을 할 수가 없습니다.
셋째, 원본을 기록한 그 마태 한 사람의 무리한 기록으로 보는 것입니다.
마태는 다윗의 이름을 가지고 지나치게 상상력을 발휘하다가 히브리어로 [다비드]라는 다윗의 이름의 철자 즉 달렛(4) + 와우(6) + 달렛(4)으로 글자를 숫자로 고쳐서 더하면 14 가 된다고 하는 이상한 틀을 만들고 그 틀에 맞추기 위해서 억지로 세 왕을 빼버리고 14 대를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가 무슨 목적으로 3 왕의 이름을 빼먹고 14 대 + 14 대 + 14 대라는 틀에 맞추려고 했을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성령님의 실수는 아니어야 하고 사본을 기록하는 분들 수 천명이 같은 실수를 저지른다는 것은 더욱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은 마태의 실수라고 볼 수 있는데도 이를 실수로 말하면 안된고 그냥 무조건 원본에는 사람의 실수도 오류도 없었다고 해야하는 것인지 제가 오히려 반문해 보고싶습니다.
4. 마태가 인용한 구약의 구절들은 적절하지 않았던 구절이 그 외에도 상당히 있습니다.
(마 1:22)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예수님의 탄생은 마태가 이사야 7장 14절을 이루려 하심이라" 고한 것은 누가 보아도 무리한 인용이었고 부적절한 적용이었습니다.
(마 2:15)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호세아 선지자는 예수님을 애굽에서 불러내게 된다는 예언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호세아 11장 1절)
(마 2:18)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렘 31:15)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이는 전혀 맞지 않는 무리한 인용이었습니다.
마태가 인용하는 예레미야 31장 15절은 전혀 베들레헴에서 아이들이 죽게 되고 그를 슬퍼할 베들레헴의 여인들을 예언한 것이라고 주장 근거가 없습니다.
(마 2:23)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이 부분도 무리한 인용이었습니다. 우리가 정경으로 인정하는 구약 39권 중에서는 메시야를 나사렛사람으로 예언한 구절이 단 한 구절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 27:9)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이 이루었나니 일렀으되 저희가 그 정가 된 자 곧 이스라엘자손 중에서 정가한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이 부분은 예레미야서에 예언 된 것이 아니라 스가랴서 11장 13절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마태가 무리한 인용을 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이런 정도의 문제는 사본에서만 문제가 아니라 원본에서도 그렇게 되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 본문이나 원어성경을 충분히 공부해 보시고 다시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자 이제는 한 번쯤 질문을 하고 넘어 갈 수 있습니다.
마태가 이렇게 한 것이 어떻게 되어서 문제가 발생한 것인지 살펴 보아야 합니다.
첫째 , 마태에게 성령께서 위의 구절들을 인용하여 기록하도록 마태를 감동하셨는지 ?!
둘째 , 마태가 메시야 예언이 성취된 점을 강조하려고 무리한 인용을 것인지 ?!
셋째 , 마태는 그렇게까지 한 것이 아닌데 사본을 만드는 수 많은 필사자들이 마태가 써 놓은 것을 보고 마음에 들지 않아서 마치 약속이나 한듯이 꼭 같이 수 천 명의 필사자들이 무리한 인용을 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지 ?!
어떤 이론이 사실이고 어떤 견해가 개연성이 있는 정직한 견해인지 스스로 정직하게 성경의 본문을 정확하게 읽어서 분별해 보기 바랍니다.
이렇게까지 보여 드려도 여전히 분별이 되지 않으시면 해당 본문에 대하여 보다 정밀한 조사를 더 해 보셔야 합니다.
성경을 정밀하게 읽어 보지도 않고 너무 어설프게 무슨 학설이나 무슨 교리니 하는 것을 들고 함부로 떠드는 사람들이야말로 교회를 어렵게 만드는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자신들 딴에는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답시고 분별없이 나서서 함부로 말하고 있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교회와 분별력이 모자라는 어린 영혼들을 이상한 미신에 빠지게 하고 있습니다.
성경 본문에 이러한 고장이 나 있다는 사실은 기독교에 대하여 반감을 갖고 떠드는 안티 크리스챤들까지도 다 알아 내 가지고 공격을 하고들 있는데 일부 보수 신학교에서 안일하게 무조건적으로 축자 영감설을 믿으라고 하면서 원본에는 일점 일획도 오류가 없었다고 하는 학설을 믿으라고 윽박지르기만 해서는 건전한 믿음이 생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이러한 공격이 끝없이 몰려 오게 될 때 감당하지 못하고 크게 흔들리게 될 것입니다.
5. 마태가 기록한 복음서에는 너무 많은 부분이 누락되었습니다.
성경에 이상하게 첨가 된 부분과 상당한 너무나도 많은 내용이 누락되었을 때 이를 단순히 사본하는 사람들만의 실수라고 볼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기계적 영감설로 주장하다가 이제는 한 걸음 물러서서 유기적 영감설과 축자적인 영감설을 주장하지만 성경 본문을 더 살펴 보시면 그러한 주장을 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바 성경을 기록함에 있어서 성령의 영감을 굳이 표현해야 한다면 인격적 영감(人格的 靈感)설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성경기자의 인격을 무시하고 기계적으로 감동하신 것이 아니라 인격적 영감(人格的 靈感 =인격적인 감동을 주셔셔)을 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기록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영감을 주셨다고 해서 그 사람이 완전한 사람이 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고 기억할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태가 기록한 복음서에는 위에 언급한 것 처럼 무리한 틀을 짜면서 세 왕들의 이름을 누락시킨 것과 스알디엘의 아들 브다야의 이름을 건너 뛰게 하여 14 대씩 맞추려고 한 것과 예수님을 구약성경에서 예언했던 그 예언이 성취된 것을 강조하려는 마음이 앞섰던지 무리하게 인용한 구절이 많이 있다는 것을 보시면 쉽게 아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는 그 보다 더 심각한 것은 문제를 발견한 것입니다.
마태가 쓴 기록에 무리한 기록이 있을 뿐만 아니라 너무 많은 것들은 놓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부득불 누가는 자신이 조사하고 인터뷰한 결과물을 가지고 약 30 가지 이상이 더 보완된 복음서를 기록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러하 일을 하게 된 것은 성령의 깊은 감동에 의한 것임을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이 때 성령님의 감동을 어떤 감동으로 볼 것인가 하는 것은 스스로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약 30년이 지나 80년대 90년대에 들어서자 12 사도들 중에서 대부분은 순교하여 세상을 떠나셨고 요한 사도만 남아 있었습니다.
요한은 자기보다 앞서서 기록한 모든 것을 성실하게 살펴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기만 알고 있는 소중한 자료들을 보완하는 요한 복음을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요한 복음서에는 다른 복음서에 없고 오직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기사가 18가지 이상 됩니다.
이렇게 요한이 뒤늦게 보완한 것과 누가가 일찍이 보완한 것을 다 합치면 마태복음에서 누락된 사건들이 약 50 가지나 된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저는 시간을 내어서 그 모든 것을 다 조사 해 보았습니다.
제가 평소에 강의하던 PPT 파일들 중에 신약 파일에는 누가가 보완한 내용과 요한이 보완한 제목을 다 수록해 놓았습니다.
읽어 보시고 견해가 다르시다든지 제가 드린 말씀 속에 실수나 무리한 주장이 있으면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도 하나님과 교회 앞에서 그리고 에스라하우스를 찾은 분들에게 정직하게 바르게 알고 바르게 전하고 싶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유명한 사람의 이론이나 학설이라도 검증없이 무조건 믿을 수는 없습니다.
이성과 양심에 맞지 않고 다른 성경과 모순되는 것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성경의 권위가 흔들리게 되는 것이 두려워서 그냥 쉬쉬 하는 것도 바른 자세라 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성경 영감설을 말할 때 일부 맹목적이고 극단적인 보수를 주장하는 분들은 맨 처음 기록된 원본에는 사소한 고장도 없이 완전했을 것이라 주장을 했습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하나님께서 성경을 기록하는 기자들에게 유기적 영감을 주셔서 축자적으로 오류 없이 기록하게 영감을 주셨을 것으로 믿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원본을 가지고 있지도 않으면서 하는 말이기 때문에 원본에 오류가 있었는지 확인할 수가 없고 확증 할 길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실재 하지도 않는 원본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교리를 만들 수가 없어서 그냥 ~~영감설 ~~ 영감설 하고 학설 정도로 주장하다가 그치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속성상 오류가 원본에 기록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아주 그럴듯한 이론이기는 하지만 오류가 없었다는 증명은 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 무오설을 주장하시는 분들이 근거로 제시하는 성경 구절은 사도 바울이 데모데에게 보낸 편지에 있었습니다.
(딤후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바울이 모든 성경이라는 글을 쓸 당시에는 일단 구약만을 두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바울이 이 말을 쓸 때로부터 최소한 300 년이나 지나서 신약의 기록들을 성경으로 공인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모든 성경이라고 한 말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66권 중에서 신약을 고려하지 않고 한 말이었습니다.
이 말은 신약을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바울이 모든 성경이라고 했을 때 그 말씀의 정확한 해석과 적용의 범위를 엄격하게 말하자면 그렇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말한 하나님의 감동(데오프뉴스토스)이란 도대체 어떤 감동이었을 것인가를 두고 이론들이 분분하였습니다.
성경이라는 말은 신약성경에서만 나오는 말인데 헬라어 성경에는 50가 나오지만 언제나 구약성만을 두고 한 말이었습니다.
마 21:42, 마 22:29, 마 26:54, 마 26:56, 막 12:10, 막 12:24, 막 14:49, 눅 4:21, 눅 24:27, 눅 24:32, 눅 24:45, 요 2:22, 요 5:39, 요 7:38, 요 7:42, 요 10:35, 요 13:18, 요 17:12, 요 19:24, 요 19:28, 요 19:36, 요 19:37, 요 20:9, 행 1:16, 행 8:32, 행 8:35, 행 17:2, 행 17:11, 행 18:24, 행 18:28, 롬 1:2, 롬 4:3, 롬 9:17, 롬 10:11, 롬 11:2, 롬 15:4, 롬 16:26, 고전 15:3, 고전 15:4, 갈 3:8, 갈 3:22, 갈 4:30, 딤전 5:18, 딤후 3:16, 약 2:8, 약 2:23, 약 4:5, 벧전 2:6, 벧후 1:20, 벧후 3:16
베드로 사도의 편지에 예언 나오는 한 구절을 인용하여 성경에 오류가 없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벧후 1: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여기서도 주목하실 것은 베드로가 모든 성경이라고 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정확하게 예언이라고 제한하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예언(프로페테이아)이라는 단어는 19번 사용되었지만 역시 베드로 사도의 말 속에 나오는 예언은 역시 구약 성경에서 예언되었던 말씀들을 두고 한 말씀이었고 혹 신약시대 사도들이 예언을 하는 일이 있었다 해도 어디까지나 베드로 사도는 예언을 두고 한 말씀이었습니다.
예언자들이 말한 예언은 누가 보아도 성령님의 감동을 받아서 기록했다는 것을 의심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정직하게 보려고 하는 분들이면 구약은 물론 신약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예언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서 말한 것임을 믿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예언이 아닌 부분이 많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특히 역사서를 기록했던 분들은 성령께서 한 글자씩 불러주는대로 쓰신 것이 아니라 자신보다 일찍이 기록되어 있는 여러 문서들을 참고하여 기록했습니다.
(민 21:14) 여호와의 전쟁기에 일렀으되
(수 10:13)야살의 책에 기록되기를 태양이
(삼하 1:18)야살의 책에 기록되었으되
(왕상 11:41) 솔로몬의 행장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왕하 15:21)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왕하 24:5)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대상 5:17) 족보에 기록되었더라
(대상29:29) 선견자 사무엘의 글
(대상29:29) 선견자 갓의 글
(대하 9:29) 선지자 나단의 글과
(대하 9:29) 실로 사람 아히야의 예언과
(대하 9:29) 잇도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에게 대하여 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대하 12:15) 선지자 스마야와 선견자 잇도의 족보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대하12:15) 잇도의 족보책
(대하13:22) 잇도의 주석책
(대하20:34) 예후의 글
(대하 25:26) 유다와 이스라엘 열왕기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대하 24:27)열왕기 주석에 기록되니라
(대하32:32) 이사야의 묵시책
(대하 33:18)이스라엘 열왕의 행장에 기록되었고
(대하33:19) 호세의 사기
(스 8:3) 함께 족보에 기록된 남자가 일백 오십명이요
(에 10:2) 메대와 바사 열왕의 일기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이와 같이 역사서를 기록했던 분들은 여러 왕실의 사초나 사기 그리고 그외 역사적인 사료를 면밀히 검토하여 기록했다는 사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예언서를 기록한 예언자들이 받은 영감과 역사서를 기록한 사람들의 영감을 꼭 같이 바라 볼 수 없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격을 가지신 분이시고 사람을 대할 때도 인격적으로 대하시기 때문에 인격적인 감동(inspiration) 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기록하게 하셨다고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한 표현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경기자들에게 실제로 어떤 영감을 주셨을까 하는 것을 고민합니다.
기계적 영감설이란 말은 아무런 근거도 없고 책임질 수도 없는 학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격을 기계처럼 취급하신 일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실 바에야 차라리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능력으로 성경책을 창조하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4 복음서을 대조 해 보면 하나님께서는 개인의 인격을 무시하지도 않으셨고 그렇다고 한자 한자 불러 주신 것이 아님을 누구든지 다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한자 한자 불러 주셨다면 이는 사실 기계적 영감설과 별로 차이가 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복음서 기자들의 기록을 좀 더 성실하게 읽어 보시게 되면 개인의 경험과 취향과 성품까지 그 기록된 문서에 배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는 사람들이 이러한 영감을 유기적 영감설이라고들 합니다.
유기적이란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생물학적이란 말과 거의 같은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더 정직하게 읽어 보시게 되면 유기적 혹은 생물학적 영감이 아니라 인격적인 영감을 부어 주셔서 성령으로 거듭난 인격이 각성된 정신을 가지고 성령의 감동을 입어 신앙 양심으로 기억을 되살려서기록하였고 어떤 때는 기자가 스스로 자세히 살피고 조사하여 기록한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눅1:1-4)
(누가 복음 1: 1-4)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
누가는 결코 한자 한자 불러주시는 대로 기록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먼저 기록된 복음서들과 여러 기록물들을 우선적으로 읽어 본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 보다 먼저 기록된 문서들에서 만족을 얻지 못하고 이에 스스로 조사를 하기 시작해서 자료를 수집했습니다. 자료를 수집할 때 누가는
첫째, 모든(파신) 일을 살피려고 했습니다.
이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누락 된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둘째, 근원(아노덴)부터 살피려고 노력했습니다.
이 말은 위에서부터 살폈다는 뜻입니다.
셋째, 자세히(아크리보스) 살피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세심하게(carefully & perfect) 살폈다는 것입니다.
넷째, 미루어(파라콜루데코티) 살피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이 말은 완전히 이해 되도록 살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제는 사본들을 대조 해 가면서 살펴 보는 수 밖에 없습니다.
신약은 사본들이 많아서 대조를 해 보면 그 안에서 문제가 발견되었을 때 사본들끼리의 사소한 차이 정도의 이상인지 아예 원본에서부터 문제가 발생한 것인지를 그리 어렵지 않게 분별할 수 있다는 것이 사본 대조학의 상식입니다.
1. 대문자 사본이 원전에 가까운 것이고 소문자 사본이 후대의 것입니다.
2. 뛰어 쓰기가 잘 된 것이 후대의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것이 연대가 앞선 것입니다.
3. 한 두 글자의 첨가와 누락의 차이는 사본들끼리의 차이로 보게 됩니다.
4. 이해를 돕기 위하여 한 절을 첨가한 한 흔적들은 거의 쉽게 드러나게 됩니다.
5. 한절 정도가 빠진 경우는 오히려 원본에 더 가까운 사본에서 보여지고 있습니다.
6. 아예 몇 절이 더한 경우도 후대 사본에서 발견되어 첨가로 보게 됩니다.
7. 이러한 고장들은 상당수가 있고 이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로써 규명되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 보이는 문제는 결코 사본에서 발생한 문제의 수준을 넘어서 원본에서부터 발생한 문제로 볼 수 밖에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목사님께서도 한 번 이에 대하여 살펴 주셨으면 해서 제시하는 바입니다.
지금부터 마태복음 안에 무리하게 인용된 구절을 제시해 보겠습니다.
1. 마태가 이사야 7장 14절을 인용하면서 심각한 오해를 했습니다.
마태는 이사야서 7장 14절을 그리스도께서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 탄생하시게 될 예언으로 오해하여 인용한 사실을 대부분은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전혀 그렇게 예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사야서 7장 14절 앞뒤를 잘 읽어 보시면 이사야 선지자는 수백년 후에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통하여 탄생하시게 될 것을 예언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누구든지 조금만 더 성실하게 읽으시면 분별할 수 있는 내용의 기록입니다.
이사야서 7장을 잘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읽어 보셨으면 이러한 성경을 해석하기 위하여 다음의 원칙을 한 번 적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해석하거나 인용하는 사람들은 이런 기본원칙을 유념하시고 조심하셔야 할 것입니다.
①언제, ②어디서, ③누가, ④누구에게, ⑤무엇을, ⑥어떻게, ⑦왜
그러한 말씀이 주어졌는지를 면밀하게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①언제 : 이 때는 아하스 왕 때의 일입니다.
②어디서 : 유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③누가 : 이사야 선지자가
④뉘에게 : 아하스 왕에게
⑤무엇을 : 아람왕 르신과 북왕국 왕 베가를
⑥어떻게 : 두려워 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⑦왜썼나 : 두려워 할 필요도 없는 것을 두려워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하스 왕 때에 북왕국 왕 베가와 아람왕 르신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와 공격을 시도했지만 예루살렘을 함락 시키지도 못하고 물러갔습니다.
그 때 어떤 사람들이 아하스 왕에게 말하기를 아람왕 르신과 북왕국 이스라엘 왕 베가가 동맹(同盟)하였다는 정보(情報)를 흘렸습니다.
그러자 왕의 마음과 백성들의 마음이 삼림이 바람에 떨림같이, 또는 사시나무 떨듯이 두려움이 사로잡혀 떨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어 아람왕 르신이나 북 왕국 베가가 아무리 큰소리 쳐도 연기 나는 두 부지갱이 수준 밖에 안되니까 전혀 두려워 하지 말고 염려 할 것이 없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도 아하스는 두려워서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하스 왕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지켜 주실 증거가 되는 징조라도 기도해 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하스는 또 나는 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 같은 짓은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 때 이사야 선지자가 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하나님께 징조(徵兆)를 구하지 않아도 주께서 친히 한 징조(徵兆)를 주실 것인데 자 보아라 ! 지금 한 젊은 여자(알마 ; 처녀가 아니었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아이를 낳거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인데 이 아이가 미쳐 선악(善惡)도 분별(分別) 못하고 겨우 젖 떨어져 버터와 꿀을 먹을 수 있을 때쯤에는 지금 아하스 왕이 두려워하고 미워하는 두 왕 즉 아람왕 르신과 북왕국 이스라엘 왕 베가의 땅이 폐한 바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은 앗수르 왕이 와서 아람과 북왕국 이스라엘을 쳐서 망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17절에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마리아가 잉태하여 예수님을 낳을 것을 예언한 것이라고 마태처럼 그대로 오해(誤解)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에서 말씀하시는 14절의 처녀라는 번역은 오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단어는 처녀(뻬툴라)가 아니라 그냥 젊은 여자(알마)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알마(젊은 여자)는 마리아를 예언한 것은 전혀 아니고 이사야 선지자와 아하스 당시에 살았던 임마누엘이란 아들을 낳았던 여인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씀하시던 그 여인은 동정녀를 말하는 것도 아니었고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를 예언한 것이 아니라 그 시대에 살았던 한 여인에 불과 했습니다.
그 때 이사야 선지자는 전혀 동정녀 탄생을 예언할 생각도 계획도 없었습니다.
또 하나님꼐서도 그러한 예언을 하라고 지시하신 아무런 근거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다만 지나치게 소심하여 벌벌 떨고만 있는 아하스 왕을 안심시킬 마음 밖에는 다른 어떤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본문의 배경을 다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이 말씀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해 보시게 되면 누구든지 꼭 같은 결론을 얻을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는 마태가 무리한 인용을 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한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사야 선지자가 무슨 말을 했던지 "마태가 그렇게 인용했으면 마태가 인용한 것이 맞는 것이지 뭐그리 말이 많으냐!?" 하는 식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이러한 자세는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잘 모르고 그냥 그 말씀을 동정녀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할 예언으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면밀하게 보지 않으면 일반인들이 잘 발견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또 이러한 문제를 제기 했다가는 괜한 구절수에 휘말리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어떤 사람들은 알면서도 그냥 어물쩡 말 없이 넘어가고 있는 현실입니다.
신약 성경에 신약기자들이 구약을 인용한 구절에는 때로는 무리한 인용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 중에 마태복음에 주로 그러한 인용이 있습니다.
2. 마태가 기록한 족보에 몇 사람을 고의로 누락시킨 문제입니다.
마태는 족보를 기록하면서 세 사람의 왕을 의도적으로 누락시키고 있습니다.
1장 8절에 요람 다음에 ①아하시야(1년 통치) ②요아스(40년 통치) ③아마샤(29년 통치)
세 왕을 빼먹어서 결국은 14 대라는 이상한 틀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결국 마태는 14 대 이론에 맞추기 위하여 유대역사 중 세 사람이 다스린 중요한
①아하시야(1년 통치) ②요아스(40년 통치) ③아마샤(29년 통치) 70년을 무시해 버렸습니다.
그렇게 한 것까지도 성령께서 그렇게 하라고 지시하셨다고 끝까지 주장해도 괜찮을까요?.
성령께서 마태에게 3 명의 왕을 빼고 14씩 맞추라고 영감을 주셨을 것으로 믿어야 할까요?
아니면 거기에 대하여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 정통이고 보수이며 개혁주의가 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으면 또 사본을 만드신 필사자들에게 책임을 돌려야 하는데 아시겠지만 모든 사본들이 꼭 같을 때는 사본을 기록한 사람의 실수 문제로 보지 않습니다.
원본에 바르게 기록 되어 있는 것을 필사자들이 고의로 이렇게 엄청난 변조를 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한 두개의 사본에만 이렇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본이 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원본이 없지만 억지로라도 주장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가령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이 말해 보는 것입니다.
"마태는 그렇게 쓴 것이 아니고 성령의 감동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아무 하자나 오류가 없는 완전한 기록을 남겼는데 제 1차 사본의 기자가 이렇게 변조했을 것이다."하고 우기는 것입니다.
제 1차 사본의 기자가 변조하였고 그 후 필사본을 기록한 모든 분들이 변조된 사본에서 또 사본을 만들어 오늘날 마태복음에 그렇게 이상한 부분이 있다고 주장하게 되면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는 너무나도 단순한 생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태 한 사람을 감동하여 마태에게는 한 글자도 오류가 없는 완전한 복음서를 기록하게 하셨지만 제1차 사본를 필사하는 사람은 감동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에 이는 말이 되지 않습니다.
제 1차 사본이 변조 되었을 때 원본이 없어지고 나면 이는 회복 불능의 사태가 벌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본 하나를 기록하는 것을 돌아 볼 수 있었지만 사본 기록자들까지는 돌아 볼 수 없었다고 하면 도대체 원본을 오류 없이 기록하게 하신 것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원본에 오류가 없었다고 어떻게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것을 보면서도 오류가 있다고 말하면 안되고 무조건적으로 성경원본에서는 일점 일획도 오류가 없었다고 교리를 만들고 또 그렇게 주장만 한다고 해서 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3. 마태는 다시 바벨론 이거 후의의 역사에서 다시 한 대를 빼서 14대를 맞추었습니다.
마태의 족보 이야기에서 또 다른 문제는 3 번째 14 대 째라고 하는 데서도 브다야를 누락시켜서 마지막 14 대를 맞추었다는 것입니다.
역대상 3:17-20을 정밀하게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사로잡혀 간 여고냐(여호야긴 혹은 고니야)의 아들들은 그 아들 스알디엘과 말기람과 브다야와 세낫살과 여가먀와 호사마와 느다뱌요 브다야 (마태가 누락시킨 사람) 아들들은 스룹바벨과 시므이요 스룹바벨의 아들은 므술람과 하나냐와 그 매제 슬로밋과 또 하수바와 오헬과 베레갸와 하사댜와 유삽헤셋 다섯 사람이요 스알디엘과 스룹바벨 사이에 분명히 브다야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태가 14 대를 맞추기 위하여 브다야의 이름을 누락시키고 있습니다.
무슨 변명을 할 수도 없고 언제 어디서 누가 몇 번을 보아도 이러한 것은 잘 못된 것은 분명합니다.
첫째,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성령님의 실수라고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성령님께서 세 사람을 빼고 14대씩 맞추라고 감동하셨다는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14 대씩 맞춘다고 좋아질 것은 아무 것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둘째, 이러한 문제는 사본을 만드는 사람들의 단순한 실수에서 비롯된 문제도 아닌 것입니다.
사본을 만드는 사람들이 실수일 수 없는 이유는 이 부분을 모든 사본이 꼭 같이 기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만약 마태가 이런 것 없이 완전한 영감으로 아무 하자가 없는 복음서를 기록했었는데 제 1 필사본 기록자가 임의로 이렇게 고장을 낸 것이라고 하면 말은 되지만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원본을 기록하는 마태는 성령께서 오류가 없도록 감동과 감독을 하실 수 있었다면 왜 최초의 사본의 필사자가 이렇게 큰 변조를 하도록 하나님께서 방치하셨는지를 설명을 할 수가 없습니다.
셋째, 원본을 기록한 그 마태 한 사람의 무리한 기록으로 보는 것입니다.
마태는 다윗의 이름을 가지고 지나치게 상상력을 발휘하다가 히브리어로 [다비드]라는 다윗의 이름의 철자 즉 달렛(4) + 와우(6) + 달렛(4)으로 글자를 숫자로 고쳐서 더하면 14 가 된다고 하는 이상한 틀을 만들고 그 틀에 맞추기 위해서 억지로 세 왕을 빼버리고 14 대를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가 무슨 목적으로 3 왕의 이름을 빼먹고 14 대 + 14 대 + 14 대라는 틀에 맞추려고 했을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성령님의 실수는 아니어야 하고 사본을 기록하는 분들 수 천명이 같은 실수를 저지른다는 것은 더욱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은 마태의 실수라고 볼 수 있는데도 이를 실수로 말하면 안된고 그냥 무조건 원본에는 사람의 실수도 오류도 없었다고 해야하는 것인지 제가 오히려 반문해 보고싶습니다.
4. 마태가 인용한 구약의 구절들은 적절하지 않았던 구절이 그 외에도 상당히 있습니다.
(마 1:22)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예수님의 탄생은 마태가 이사야 7장 14절을 이루려 하심이라" 고한 것은 누가 보아도 무리한 인용이었고 부적절한 적용이었습니다.
(마 2:15)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호세아 선지자는 예수님을 애굽에서 불러내게 된다는 예언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호세아 11장 1절)
(마 2:18)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렘 31:15)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이는 전혀 맞지 않는 무리한 인용이었습니다.
마태가 인용하는 예레미야 31장 15절은 전혀 베들레헴에서 아이들이 죽게 되고 그를 슬퍼할 베들레헴의 여인들을 예언한 것이라고 주장 근거가 없습니다.
(마 2:23)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이 부분도 무리한 인용이었습니다. 우리가 정경으로 인정하는 구약 39권 중에서는 메시야를 나사렛사람으로 예언한 구절이 단 한 구절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 27:9)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이 이루었나니 일렀으되 저희가 그 정가 된 자 곧 이스라엘자손 중에서 정가한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이 부분은 예레미야서에 예언 된 것이 아니라 스가랴서 11장 13절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마태가 무리한 인용을 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이런 정도의 문제는 사본에서만 문제가 아니라 원본에서도 그렇게 되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 본문이나 원어성경을 충분히 공부해 보시고 다시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자 이제는 한 번쯤 질문을 하고 넘어 갈 수 있습니다.
마태가 이렇게 한 것이 어떻게 되어서 문제가 발생한 것인지 살펴 보아야 합니다.
첫째 , 마태에게 성령께서 위의 구절들을 인용하여 기록하도록 마태를 감동하셨는지 ?!
둘째 , 마태가 메시야 예언이 성취된 점을 강조하려고 무리한 인용을 것인지 ?!
셋째 , 마태는 그렇게까지 한 것이 아닌데 사본을 만드는 수 많은 필사자들이 마태가 써 놓은 것을 보고 마음에 들지 않아서 마치 약속이나 한듯이 꼭 같이 수 천 명의 필사자들이 무리한 인용을 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지 ?!
어떤 이론이 사실이고 어떤 견해가 개연성이 있는 정직한 견해인지 스스로 정직하게 성경의 본문을 정확하게 읽어서 분별해 보기 바랍니다.
이렇게까지 보여 드려도 여전히 분별이 되지 않으시면 해당 본문에 대하여 보다 정밀한 조사를 더 해 보셔야 합니다.
성경을 정밀하게 읽어 보지도 않고 너무 어설프게 무슨 학설이나 무슨 교리니 하는 것을 들고 함부로 떠드는 사람들이야말로 교회를 어렵게 만드는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자신들 딴에는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답시고 분별없이 나서서 함부로 말하고 있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교회와 분별력이 모자라는 어린 영혼들을 이상한 미신에 빠지게 하고 있습니다.
성경 본문에 이러한 고장이 나 있다는 사실은 기독교에 대하여 반감을 갖고 떠드는 안티 크리스챤들까지도 다 알아 내 가지고 공격을 하고들 있는데 일부 보수 신학교에서 안일하게 무조건적으로 축자 영감설을 믿으라고 하면서 원본에는 일점 일획도 오류가 없었다고 하는 학설을 믿으라고 윽박지르기만 해서는 건전한 믿음이 생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이러한 공격이 끝없이 몰려 오게 될 때 감당하지 못하고 크게 흔들리게 될 것입니다.
5. 마태가 기록한 복음서에는 너무 많은 부분이 누락되었습니다.
성경에 이상하게 첨가 된 부분과 상당한 너무나도 많은 내용이 누락되었을 때 이를 단순히 사본하는 사람들만의 실수라고 볼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기계적 영감설로 주장하다가 이제는 한 걸음 물러서서 유기적 영감설과 축자적인 영감설을 주장하지만 성경 본문을 더 살펴 보시면 그러한 주장을 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바 성경을 기록함에 있어서 성령의 영감을 굳이 표현해야 한다면 인격적 영감(人格的 靈感)설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성경기자의 인격을 무시하고 기계적으로 감동하신 것이 아니라 인격적 영감(人格的 靈感 =인격적인 감동을 주셔셔)을 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기록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영감을 주셨다고 해서 그 사람이 완전한 사람이 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고 기억할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태가 기록한 복음서에는 위에 언급한 것 처럼 무리한 틀을 짜면서 세 왕들의 이름을 누락시킨 것과 스알디엘의 아들 브다야의 이름을 건너 뛰게 하여 14 대씩 맞추려고 한 것과 예수님을 구약성경에서 예언했던 그 예언이 성취된 것을 강조하려는 마음이 앞섰던지 무리하게 인용한 구절이 많이 있다는 것을 보시면 쉽게 아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는 그 보다 더 심각한 것은 문제를 발견한 것입니다.
마태가 쓴 기록에 무리한 기록이 있을 뿐만 아니라 너무 많은 것들은 놓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부득불 누가는 자신이 조사하고 인터뷰한 결과물을 가지고 약 30 가지 이상이 더 보완된 복음서를 기록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러하 일을 하게 된 것은 성령의 깊은 감동에 의한 것임을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이 때 성령님의 감동을 어떤 감동으로 볼 것인가 하는 것은 스스로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약 30년이 지나 80년대 90년대에 들어서자 12 사도들 중에서 대부분은 순교하여 세상을 떠나셨고 요한 사도만 남아 있었습니다.
요한은 자기보다 앞서서 기록한 모든 것을 성실하게 살펴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기만 알고 있는 소중한 자료들을 보완하는 요한 복음을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요한 복음서에는 다른 복음서에 없고 오직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기사가 18가지 이상 됩니다.
이렇게 요한이 뒤늦게 보완한 것과 누가가 일찍이 보완한 것을 다 합치면 마태복음에서 누락된 사건들이 약 50 가지나 된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저는 시간을 내어서 그 모든 것을 다 조사 해 보았습니다.
제가 평소에 강의하던 PPT 파일들 중에 신약 파일에는 누가가 보완한 내용과 요한이 보완한 제목을 다 수록해 놓았습니다.
읽어 보시고 견해가 다르시다든지 제가 드린 말씀 속에 실수나 무리한 주장이 있으면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도 하나님과 교회 앞에서 그리고 에스라하우스를 찾은 분들에게 정직하게 바르게 알고 바르게 전하고 싶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유명한 사람의 이론이나 학설이라도 검증없이 무조건 믿을 수는 없습니다.
이성과 양심에 맞지 않고 다른 성경과 모순되는 것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성경의 권위가 흔들리게 되는 것이 두려워서 그냥 쉬쉬 하는 것도 바른 자세라 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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