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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자료] ]남왕국 유다와 바벨론 포로

작성자넓은가슴|작성시간07.05.14|조회수217 목록 댓글 0

남왕국 유다와 바벨론 포로
(왕상 12:1-왕하 25:30)
     
     

    1. 솔로몬의 계승자 르호보암
     

        솔로몬의 뒤를 이어 르호보암(926-908 B.C.E.)이 남유다의 왕위를 계승한다. 남왕국 유다는 북쪽과 달리 다윗과 솔로몬의 왕통을 이어 받아 적자(適者) 계승이 비교적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북쪽 지파들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억압정책을 유지함으로써 로호보암은 북왕국과 대치한다. 북왕국은 정치적·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서 출발한 반면 남왕국 유다는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부(富)를 이어받아 비교적 안정을 누렸다. 여로보암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한 때 이스라엘 공략을 계획 했던 르호보암은 예언자 스마야의 만류로 취소한다(왕상 12:21-24). 그러나 사실 르호보암에게는 이스라엘을 침략할 힘이 없었다. 솔로몬 통치 말기에 이미 민심이 이완되었으며 솔로몬은 이방 여인의 틈속에서 바알종교에 심취해 있었다(왕상 11:9-13). 건축사업으로 인해 국가의 재정은 고갈되고 백성들은 과중한 세금과 부역때문에 불만으로 가득찼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여로보암을 중심으로한 이스라엘의 10지파가 떨어져 나간 것이다. 르호보암 통치 5년째 이집트의 시삭(935-914)이 쳐들어와 남과 북은 상당한 피해를 본다(왕상 14:25-26). 특히 남왕국 유다의 피해는 심각해서 왕궁의 보물을 모두 빼앗기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924 BC). 새로 이집트의 왕이 된 시삭의 과시용 침략은 곧 사라지고 유다는 다시 평온을 되찾지만, 북쪽의 이스라엘과는 여전히 대적관계로 남는다(14:30).
     
     

    [지도: 시삭의 이스라엘 침공]
     
     

        르호보암의 뒤를 이은 아비얌(아비야; 909-907 B.C.E.)은 여로보암과의 전투에서 승리한다. 역대기서에 의하면 벧엘 동쪽 스마라임산 근처 에브라임 고지에서 벌어진 남과 북의 대결에서 아비얌(여기서는 아비야)은 40만의 군대로 80만의 여로보암 군대를 무찌른 것으로 전해진다(왕상 15:7; 대하 13:2-19).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열왕기서 저자(DH)에 의하면 아비얌이 죄를 행했다고 전해진 반면(왕상 15:3), 역대기사가는 야비얌이 야훼께 신실하여 여로보암의 군대를 무찔렀다고 증언하고 있다(대하 13:18). 아마 다윗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을 강조하는 역대기사가는 유다 왕인 아비얌에 대한 좋은 평가를 내리고자 했을 것이다(대하 13:5). 역대기사가의 관심은 다윗왕가를 계승한 유다의 입지를 강화함으로써 후기 유다인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있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볼 때 아비얌의 군대와 여로보암의 군대숫자는 터무니 없이 많다. 결국 현실성이 희박한 내용이 역대기사가에 의해 삽입되었다고 보여진다.

        아비얌의 왕위는 3년 만에 아사(906-878 B.C.E.)로 이어진다. 아사는 유다의 왕이 되자 아세라 신상을 제거하는 등 적극성을 띠지만 지방성소인 산당을 제거하지 않음으로써 성서기자의 빈축을 산다(왕상 15:13-14). 아사가 유다의 왕으로 있을 때 이스라엘의 바아사(903-882)가 공격해 내려온다. 바아사는 남북의 경계지점에 위치한 라마를 요새화하여 북쪽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순례가는 것을 금하고 남북도로와 동서도로를 통제하려 했다. 다급해진 아사는 아람왕 벤하닷에게 공물을 주어 원병을 요청하자, 이스라엘은 아람군대의 공격을 받게 된다. 바아사의 계획은 결국 수포로 돌아간다(15:16-22). 아람의 벤하닷이 이스라엘을 공격하자 그 틈을 이용해 유다의 아사는 라마를 점령하여 거기서 얻은 건축자재로 베냐민의 게바와 미스바를 요새화 한다(15:22).
     
     
     

    [지도: 분열왕국 시대의 이스라엘과 유다]
     
     
     
     

    2. 오므리 왕조의 지지자 여호사밧

       여호사밧(877-853 B.C.E.)은 아사를 이어 25년간 유다를 다스린다. 그는 부왕의 뒤를 이어 야훼신앙을 확립코자 하였으나 산당을 아직까지 제거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왕상 22:43). 산당(high places)은 일종의 지방성소로서 민중들에게 예배처를 제공하기도 하고 예언자들이 집단으로 기거하면서 종교활동을 한 장소이기도 하다(삼상10:10). 이곳에서 사람들은 가나안의 신뿐만 아니라 야훼도 섬김으로써 배타적 야훼주의를 고수하는 신명기사가와 예언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역대기 사가는 여호사밧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 여호사밧은 어느 정도의 종교개혁에 성공했다.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을 지방도시에 파견하여 야훼의 율법을 가르치게 했으며(대하 17:7-9), 남색하는 자들을 쫓아냈다(왕상 22:46). 그는 또한 브엘세바에서 에브라임에 이르기까지 각 지역을 순회하면서 재판과정을 살피기도 했다(대하 19:4-11). 여호사밧은 모압, 암몬, 에돔의 동맹군을 무찔러 유다의 힘을 대외에 과시하기도 한다(대하 20:1-24). 여호사밧이 통치하는 동안 유다는 평화를 누렸으며, 그 이유는 그가 야훼를 잘 섬겼기 때문이란다(대하 20:30).

        그러나 당시 유다는 북왕국 오므리 왕조의 세력을 벗어나지 못했다. 오므리 왕조의 아합이 아람을 물리치기 위해 여호사밧에게 원병을 요청하자 여호사밧은 즉각 이스라엘로 달려온 적이 있지 않은가(왕상 22:1-4)? 여호사밧의 태평시대는 오므리 왕조와의 원만한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왕상 2:44). 이스라엘의 아합 왕과 이세벨 사이에서 난 아달랴는 후에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의 아내가 되어 남과 북이 결혼동맹으로 긴밀해지는 계기를 마련한다(왕하 8:18, 26-27; 대하 18:1; 22:2). 여호사밧은 아합이 죽자 독자적인 노선을 취한다. 그는 북왕국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새로 왕이 된 아하시야(853-852 B.C.E.)의 제의를 거절한다. 그 제의는 이스라엘이 유다와 더불어 홍해로 진출하는 해상무역에 공동 참여하는 것이었다(왕상 22:48-49). 여호사밧이 이 제의를 거절한 배경은 유다 단독으로 해상무역에 참여하려는 의도로 풀이될 수 있다.

        여호사밧의 뒤를 이은 여호람(852-841 B.C.E.)은 아합의 딸 아달랴와 결혼한 사람이다. 여호람은 왕이 되자마자 자기 형제 6인을 살해하고 그들을 동조한 사람까지도 죽이는 참혹한 일을 벌인다(대하 21:1-4). 그는 종교적으로도 타락했던 것 같다. 그가 예루살렘 주민에게 음행하게 했고, 유다 백성에게 잘못된 길을 걷게 했다는 성서의 보도는 여호람이 백성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음을 암시한다(대하 21:11). 대외적인 영향력도 상실하여 에돔과 립나가 반란을 일으켜 여호람이 위기에 처한 적도 있었다(왕하 8:20-22; 대하 21:8-10).

        유다의 아하시야(840 B.C.E.)는 아버지 여호람을 계승하여 일년도 채우지 못하고 왕위를 빼앗긴다.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853-852)와 이름이 같다. 유다의 아하시야는 이스라엘의 여호람과 함께 길르앗 라못에서 아람군과 싸우다 부상한다(왕하 8:28). 여호람 역시 아람과 싸우다가 라마에서 부상하여 이스라엘로 내려가 요양하고 있었다. 아하시야는 이스라엘에 있는 여호람을 위문하러 갔다가 예후의 칼에 맞아 객사한다(왕하 9:27).
     
     

3. 여걸 아달랴
 
        이세벨의 딸로 알려진 아달랴(839-833 B.C.E.)는 아들 아하시야가 이스라엘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재빨리 세력을 장악한다. 유다의 왕위를 계승할 왕자들을 살해하고 자신이 통치하게 된다(왕하 11:1-3). 고모 여호세바에 의해 구사일생으로 살아 남은 요아스는 그 후 6년 동안 성전에서 생활한다(11:3). 제사장 여호야다는 성전에서 요아스를 보호하면서 그를 가르쳤다(12:2). 요아스가 7세 되던 해 여호야다는 그를 왕으로 기름 붓는다(왕하 11:4-12). 여호야다의 손에 죽은 아달랴는 여걸이었음이 분명하다. 아합의 딸로 유다의 왕비가 되고 아들을 대신해서 왕노릇을 6년 동안 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녀가 백성들에게 상당한 지지를 받았음을 입증한다. 비록 유다 왕족을 살해하고 바알신앙에 심취했다고 전해지지만 그녀가 다스리는 동안 남과 북의 관계는 평화를 유지했다.

        아달랴를 제거한 여호야다는 어린 왕 요아스(832-803 B.C.E.)를 대신하여 하나님과 백성사이의 언약을 체결한다. 유다는 야훼의 백성이 되고 백성들은 바알의 우상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다(왕하 11:17-20). 실권을 장악한 여호야다는 요아스에게 왕비를 선택해 주기도 한다(대하 24:3). 나이 어려 왕이 된 요아스는 제사장 여호야다의 섭정을 받는다. 요아스 통치시대에 시리아의 세력이 강대하여 예루살렘에 쳐들어온 시리아의 하사엘에게 왕궁의 보물을 바쳐야 했다(왕하 11:17-18). 나이가 들어 성전을 수리하고자 했으나 제사장 여호야다의 반대에 부딪친다. 제사장이 성전 수리를 반대한 이유는 제사장의 개인소득을 성전 수리에 투입해야 했고, 왕궁 뜰에 있는 성전이 수리되어 왕의 위용을 높여줌으로써 자신이 세도를 부리지 못할 것을 염려해서일 것이다. 요아스는 건축업자에게 성전수리와 자금관리를 맡기고, 속전제의 은만 제사장에게 돌렸다(11:9-16). 여호야다가 죽자 요아스는 그의 지지세력을 제거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여호야다의 아들 스갸랴를 성전 뜰에서 돌에 맞아 죽게 한다(대하 24:21). 역대기 사가는 여호야다가 살아 있을 때만 해도 주의 성전에서 번제가 끊이지 않았는데 그가 죽자 사람들이 다시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기기 시작했다고 보도한다(대하 24:15). 여기서 우리는 제사장 입장을 두둔하는 역대기사가의 의도를 살펴볼 수 있다.

        여호야다를 지지했던 부하들의 반란으로 요아스는 죽고(대하 24:25), 그 아들 아마샤(802-786 B.C.E.)가 왕위에 오른다. 아마샤는 왕위에 오르자 부왕을 죽인 사람들을 처형하고 전권을 장악한다(왕하 14:5). 내정을 다스린 아마샤는 에돔을 공격하여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다(왕하 14:7; 대하 25:11-12). 당시는 시리아(아람)의 세력이 점차 기울고 있었고 아시리아의 영향력이 감소한 때였다. 아카바만으로 이어지는 국제무역로를 확보한 아마샤는 셀라를 쳐서 유다의 서편지역을 확보한다(왕하 14:7). 그 여세를 몰아 아마샤는 북왕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당시 이스라엘 왕 요아스(804-789 B.C.E.)와 벧세메스에서 전투를 벌이지만 결국 유다가 패배한다(왕하 14:8-12). 이스라엘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아마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그는 결국 반란자에 의해 라기스에서 죽는다(왕하 14:19).

     

4. 웃시야: 유다의 전성기
        아마샤의 뒤를 이어 아사랴(웃시야; 785-760 B.C.E.)가 유다의 왕이 된다. 성서는 아사랴가 웃시야 왕과 동일 인물임을 증거하고 있다(대하 26:1; 27:1; 사 1:1; 6:1). 열왕기서 저자는 아사랴 왕에 대해서 별로 언급하지 않고 있지만 역대기사가는 많은 자료를 제시한다. 역대기서에 의하면 웃시야(아사랴)는 엘랏을 재건하여 유다에 귀속시켰으며(대하 26:2), 블레셋 땅을 공략하고 아라비아와 마온까지 세를 확장하였다(대하 26:6-8). 그의 이름이 멀리 이집트에까지 알려졌다는 다소 과장된 표현까지도 성서에 등장하는 것을 보면 웃시야 시대에 유다는 전성기를 누렸던것 같다(대하 26:8). 웃시야는 예루살렘 성에 망대를 세우고 이곳을 요새화했으며, 목축과 영농을 위해 관개시설을 확충하였다(대하 26:9-10). 그에게는 강력한 군대가 있었으며 예루살렘에는 무기를 제조하는 기술자가 있어서 이들이 웃시야 군대의 힘을 지탱하는 초석이 되었다(대하 26:11-15). 역대기서는 웃시야를 강력한 왕으로 묘사하는데 주저하지 않지만 당시 정세로 보아 유다는 아직 북왕국 이스라엘의 힘에 미치지 못한것으로 여겨진다(참조. 왕하 14:28). 웃시야는 당시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788-748)의 후광을 업고 나름대로의 정치적 성과를 거둔 것 같다. 그러나 말년에 악성 피부병으로 인해 그 아들 요담이 정사를 처리한 것으로 전해진다(왕하 15:1-5). 역대기사가는 웃시야가 악성 피부병에 걸린 원인이 그가 제사장의 직임을 가로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웃시야가 성전안에 분향하러 들어갈 때 제사장들이 말렸건만 무시하고 강행하는 순간 문둥병에 걸렸다는 것이다. 제사장의 권위를 강조하는 역대기 사가의 관심이 또 한번 드러나는 셈이다(대하 26:16-21).
     
     
     


     

    [지도: 웃시야의 활동과 건축사업- BC8C 중엽]
     
     

        웃시야의 아들 요담(759-744 B.C.E.)에 관한 기사 역시 열왕기서에는 빈약하다. 요담은 예루살렘 성전의 윗문을 건축하였고 예루살렘 성을 증축했다(왕하 15:35; 대하 26:6-15). 요담은 유다의 산간지방에도 요새를 건축해서 암몬과 싸워 이겼다고 전해진다(대하 27:3-5). 그러나 요담 말기에는 대지진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이 막대했으며 사회적 불안이 증가되고 종교적으로 타락하여 이사야, 미가 등의 예언자들로부터 강력한 비판을 받았다(사 1장; 미 3장).

        유다왕 아하스(여호아하스 1세; 743-728 B.C.E.)는 요담의 아들로 유다를 16년 동안 치리한다. 아하스의 정치적 능력은 아주 미미했던 것 같다. 이스라엘 왕 스가랴의 딸 아비와 결혼한 것으로 보이는 아하스는(왕하 18:2), 이방 민족의 종교를 비판없이 수용했다. 자기 아들을 불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산당의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지냈다(왕하 16:3-4). 게다가 다마스커스에 가서 그곳의 제단을 본떠다가 예루살렘 성전에 새 제단을 만들기도 했다(왕하 16:10-16). 아하스가 종교적으로 확고한 입장을 견지 할 수 없었던 이유는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당시 이스라엘 왕 베가(734-731 B.C.E.)가 시리아(아람)의 르신과 연합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하자, 아하스는 아시리아에 긴급 구원을 청함으로서 위기를 모면한다. 우리는 이 전쟁을 '시리아-에브라임 전쟁'(734 B.C.E.)이라고 부른다. 시리아-이스라엘-유다로 이어지는 연합전선을 펴서 아시리아에 대항하고자 했던 이스라엘의 베가는 아하스의 반대로 좌절하고 만다. 결과적으로 유다는 위기를 모면했지만 아시리아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된다(왕하 16:5-16). 이것은 마치 백제와 고구려를 물리치기 위해 당나라의 세력을 끌어들인 신라의 경우와 유사하다. 신라는 그 대가로 당의 세력을 반도에서 몰아내기 위해 8년 이상을 더 싸워야 했다(A.D. 676 신라통일).
     
     
     

    5. 히스기야의 독립운동

       히스기야(727-699 B.C.E.)가 유다 왕이 되면서 아시리아 세력을 물리치기 위한 운동이 전개된다. 그의 종교개혁은 야훼신앙을 회복함으로써 민족의 일체감을 조성하는 것이었다. 그 조치로 우선 산당을 부수고 아세라 목상를 제거한다(왕하 18:4). 모세가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놋뱀마저 깨부순다(민21:4-9). 사람들이 그때까지 놋뱀을 경배하였으며 주술적 도구로 사용했기 때문이다(18:4). 히스기야 시대에 유다는 정치적으로 긴박한 위기에 처한다. 아시리아의 살만에셀 5세(726-722 B.C.E.)에 의해 사마리아가 붕괴되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시리아로 대거 끌려가는 사건이 발생한다(722 B.C.E.). 남왕국 유다 역시 아시리아의 위협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었으며 그에 따른 대책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였다. 히스기야는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까지 친아시리아 정책을 고수하고 있었다. 때마침 아시리아의 살만에셀 5세가 사르곤 2세로 대체된 틈을 타서(722-721 B.C.E.) 지중해 연안에서 바벨론에 이르기 까지 대규모 반란이 일어난다.

        이때 히스기야도 반아시리아 정책으로 전환하면서 유다의 독립성을 찾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다. 앗시라아의 산헤립(704-681 B.C.E.)은 유다 주변국을 차례로 정복하고 유다에 침공하여 40개의 성을 점령한다. 성서는 야훼의 사자가 나타나 아시리아 군대 185,000명을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지만(왕하 19:35), 산헤립의 비문에 의하면 그가 유다의 도시들과 이집트의 군대를 무참히 격파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히스기야가 아시리아에 대항하기 위해 뚫은 '실로암 터널'(위 그림)은 당시 건축기술의 정교함을 자랑한다. 성밖의 기혼 샘에서 성안에 있는 실로암 못으로 물을 끌어들이는 통로로서 양쪽에서 작업을 하여 겨우 1.5m의 오차로 서로 만나게 했다니 놀라울 일이다.
     
     

    실로암 연못(히스기야 시대: 왕하 20:20)
     
     

    그 때 병이 든 히스기야는 선지자 이사야의 도움으로 병에서 낫게 되지만(왕하 20:1-7; 사 38:5-6), 아시리아에 패한 후 더이상 유다의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없게 되었다(ANET 287-288). 역대기사가에 의하면 히스기야가 북부의 달력을 사용하여 북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유월절을 지키라고 권유한 것으로 보도된다(대하 30:1-22). 그가 이스라엘 사람들을 예루살렘에 초청하여 유월절을 지키도록 권유한 것은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당한 북쪽의 영토를 다시 회복하고자 하는 의도로 짐작된다. 정치적으로 당장은 힘이 없지만 우선 종교적으로 남과 북을 하나로 맺는 일체감 형성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은 아시리아의 무력개입으로 좌절된다.
     

    [그림: 아시리아의 산헤립이 유다를 공략한 사건(701 B.C.E.)이 기술되어 있는 원통형 비문. 기원전 691년 경에 새겨진 것으로 보인다(BAR91-1-60).]
     
     
     

    6. 므낫세: 아시리아의 하수인

        히스기야의 패배로 유다는 정치적 힘을 상실했으며 종교적으로도 아시리아의 종교가 자연스럽게 유다로 유입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왕위를 이어받은 므낫세(698-644 B.C.E.)는 친아시리아 정책을 견지할 수 밖에 없었다. 므낫세는 히스기야가 헐어버린 산당을 다시 세우고, 바알과 아세라 상을 만들고, 아시리아의 일월성신(日月星辰)을 섬겼다고 성서는 전한다(왕하 21:3). 또 야훼의 성전에 일월성신을 섬기는 제단이 만들어지고, 자녀를 불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등 이방종교의 관행이 예루살렘에서 공공연히 행해진 때가 므낫세 치하로 여겨진다. 므낫세가 아시리아의 눈치를 살필 수 밖에 없었지만 아시리아의 종교관행을 지나치게 신봉했다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당시 아시리아는 점령지의 종교적 관행을 비교적 자유롭게 용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므낫세는 아시리아에 아부하기 위해 강요받지도 않는 그들의 종교를 스스로 수입한 것이다. 이로 인해 당시 유다의 상류층에는 아시리아의 문화와 풍습이 널리 성행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현상은 고려가 몽고(원나라)의 속국으로 있을 때 원의 풍습인 '몽고풍'이 고려의 중·상류층에 유행했던 것과 유사하다. 아시리아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므낫세는 야훼신앙을 지킬 능력이 없었으며 내치도 소홀해서 죄없는 자들이 많은 피를 흘린 것으로 전해진다. 국가의 경제는 피폐해졌으며 아시리아에 바칠 조공을 조달하기도 힘들었다. 므낫세를 부정적으로만 평가하는 신명기사가와는 달리 역대기 사가는 므낫세가 아시리아 군대에 의해 바벨론에 끌려갔다가 다시 돌아와 종교개혁을 단행했다고 보도한다(대하 33:1-20). 그러나 열왕기서를 비롯한 아시리아 문헌에도 그와 같은 기록은 발견되지 않고 있는 것을 볼 때 므낫세를 동조하는 역대기사가의 의도적인 첨가로 여겨진다.

        므낫세의 뒤를 이어 아몬(643-642 B.C.E.)이 유다의 왕이 되지만 2년만에 부하들에 의해 암살당한다. 아몬을 죽인 사람들은 반아시리아 운동을 전개한 세력으로 보인다. 그러나 '땅의 백성들'(지방인들, 공동번역)이 아몬을 죽인자들을 죽이고 그 아들 요시야를 왕으로 세운다. 이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아몬시대에 두 정파가 첨예하게 대립한 것 같다(왕하 21:19-24). 아몬을 죽인 사람들을 제거한 '땅의 백성들'은 아시리아 편에 섰던 유다의 지주들로 구성된 보수파 인물로 보는 시각이 있다. 이들은 아직 8세 밖에 안된 요시야를 왕위에 세우고 반아시리아 세력을 제거한 것으로 보인다. 기득권층은 언제나 급격한 사회변혁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므낫세와 아몬 시대에 아시리아 치하에서 누렸던 경제적인 부를 지속시키고자 했을 것이다. 부정적인 평가외에는 아몬에 대한 그 밖의 정보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7. 요시야:유다의 마지막 성군
 
        요시야(641-610 B.C.E.)는 유다 말기의 가장 훌륭한 성군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아시리아가 약해진 틈을 타서 요시야는 히스기야의 전례에 따라 종교개혁을 단행한다. 야훼의 성전을 수리하다가 율법서를 발견하는데(621 B.C.E.) 이것은 현재 신명기의 일부(12-26장)로 여겨진다(왕하 22:8). 요시야는 '원신명기'라고도 불리는 그 율법서를 백성에게 공포하고 이를 준수할 것을 명한다(왕하 23:1-3). 요시야의 종교개혁은 성전에서 율법서를 발견하기 이전부터 시작되었는데, 율법서가 발견된 이후 더 가속화된 것으로 생각된다(대하 34:3-7).
     
     
     


     

    [그림: L(의자) 모양의 기념석(기원전 7세기 경). 숯에 그을린 어린양의 뼈들이 동기둥 밑에 저장되어 있다. 어린아이 대신 동물을 제물로 바친 흔적일 것이다. 후대에 들어 북아프리카의 칼타고에서 어린 아이의 뼈가 많이 발견되었다(BAR84-1-39).]
     
     

     요시야는 산당을 폐쇄하고, 바알과 일월성신을 섬기는 제사장들을 몰아내는 등 일대 혁신을 단행한다(왕하 23:4-14). 특별히 주목할 만한 것은 예루살렘성 근처에 있었던 산당을 폐쇄한 것이다. 유다의 역대왕들이 부분적인 종교개혁을 했을지라도 산당만은 제거하지 못했다고 종종 전해지는데 예루살렘 근처 산당은 솔로몬에 의해 건립된 것이었다(왕하 23:13). 시돈의 아스다롯, 모압의 그모스, 암몬의 밀곰, 그리고 아세라 목상들과 사람의 해골이 그곳을 채우고 있었다는 것을 볼 때, 산당은 왕조 초기부터 유다가 멸망당하는 순간까지 거의 유다와 함께 해온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방종교가 야훼종교와 함께 그 명맥을 유지한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아시리아로부터 독립하는 것이요, 정신적으로 유다백성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야훼종교의 개혁이 시급히 요청되는 시기였다. 요시야의 개혁정치는 다음 네 가지로 요약된다: 1)솔로몬 이후 이방종교가 침투한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고; 2)지방성소인 산당을 제거하고; 3)율법(신명기법) 정신을 강화하고 예배의 중앙집권화를 추진하고; 4)해안평야와 북쪽의 사마리아에 이르기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정치의 중앙집권화를 도모하는 것이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요시야의 종교개혁에 직·간접으로 참여한 것으로 여겨진다. 예레미야의 신탁가운데 상당부분이 신명기사가의 정신을 반영하고 있으며 신명기의 문체와 병행되는 구절이 많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시야 왕과 예레미야는 서로 모르는 사이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열왕기서가 예레미야를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예레미야 역시 요시야 왕에 대한 언급을 회피한다. 그러나 서로 동시대에 활동했다는 점을 상기할 때 어떤 형태로든 두 사람사이에 연관성이 있었을 것이다. 어떤 이는 요시야의 종교개혁이 광범위하게 진행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요시야의 치적은 다윗에 버금갈 정도였다. 당시 신흥 바벨론이 세력을 키우고 있었고 아시리아가 약화된 틈을 타서 요시야는 잃었던 영토를 되찾고 유다의 홀로서기를 시도한 것이다.
     
     
     


    [그림: 에그론에서 발견된 석회석으로 만든 이집트 악기. 기원전 630년경에 에그론은 잠시 이집트 영향력 아래 있었다. 그 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에그론을 장악했으며 결국 예루살렘은 바벨론에 의해 함락된다(586 B.C.E.). BAR90-2-41]
     
     
     

        그러나 그의 종교개혁과 정치력 다지기가 어느 정도 성공할 무렵 뜻하지 않은 사고가 발생한다. 바벨론에 대항하기 위해 이집트의 느고 2세(610-595 B.C.E.)가 아시리아를 지원하러 올라갈 때 요시야가 그를 맞아 싸운다. 요시야는 이집트의 군대를 막아 보급로를 차단하고자 했다. 그러나 요시야는 므깃도에서 이집트의 느고에게 목숨을 잃는다(609 B.C.E., 왕하 23:29-30). 요시야가 죽음으로써 그의 종교개혁과 정치적인 독립은 수포로 돌아가고 유다의 장래는 암울해진다. 이후 유다는 이집트의 속국이 되지만 결국 신흥 바벨론에 의해 함락된다(586 B.C.E.).
     
     
     
     

    [지도: 이집트 느고의 필레스틴 진군(주전 609년)]
     
     
     

        요시야를 이은 여호아하스(2세; 610 B.C.E.)는 3개월의 단명으로 끝난다. 요시야를 제거한 이집트 왕 느고는 여호아하스를 3개월 만에 폐위시키고 대신 여호야김을 왕으로 세운다(왕하 23:31-33). 여호아하스는 이집트로 끌려가 죽고 여호야김은 이집트의 봉신이 되어 조공을 바치기 위해 백성들에게 과중한 부담을 안겨 준다(왕하 23:35).

        이집트의 봉신으로 있던 여호야김(608-598 B.C.E.)은 신바벨론이 이집트 세력을 가나안에서 몰아내자 방향을 전환해서 느부갓네살 2세(604-562 B.C.E.)에게 충성을 다짐한다. 그러나 그는 즉위 3년 만에 예언자 예레미아의 경고를 무시하고 바벨론에 반기를 든다. 예레미야는 여호야김에게 친바벨론 정책을 펴서 백성들을 보호할 것을 촉구하지만 무시당하고 만다(렘 27:2-11). 여호야김은 예레미야를 제거하려고 하지만 그의 친구들의 도움으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렘 26:24; 36:26).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군대는 아시리아, 이집트, 불레셋을 점령하고 난 후에(렘 47:5-7) 유다를 공략한다(603 B.C.E.). 유다는 바벨론의 속국이 되고 여호야김은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된다(대하 36:5-6).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제의도구들을 바벨론으로 가져다가 자기 신당에 두었다(대하 36:7).
     
     
     

    [지도: 바벨론 느부갓네살의 첫 팔레스틴 진군 (주전 605-604)]
     
     
     

        여호야긴(597 B.C.E.)이 왕위를 잇지만 그 역시 3개월만에 바벨론으로 끌려간다. 이 때 여호야긴은 많은 정부 관리들과 함께 끌려감으로써 유다는 사실상 바벨론에 패망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우리는 서기전 597년에 일어난 이 포로행렬을 '제 1 차 바벨론 포로'라고 부른다.
     
     
     


     

    [그림: 대영제국 박물관에 소장된 토판으로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이집트 군사를 격퇴한 내용을 담고 있다(605 B.C.E. 카르케미쉬 전투). 시리아를 공략한 내용이 소록되었으며 느부갓네살 왕의 등극을 보여준다(BAR90 -5-62).]


     

        바벨론은 시드기야(596-586 B.C.E.)를 왕으로 세우지만, 즉위 11년째 시드기야는 이집트의 지원을 받아 바벨론에 반기를 든다(왕하 25:1). 이에 바벨론은 다시 유다를 침공하여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바벨론으로 끌고 간다(왕하 25:2-7). 이로써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고 유다 지도자들은 바벨론으로 대거 끌려간다(586 B.C.E.). 유다가 멸망하고 지도층이 포로로 끌려가자 유다 땅은 바벨론의 직할령이 되었다. 바벨론 왕이 그달랴를 그 지역의 총독으로 삼자 왕족 이스마엘이 그를 살해하고 이집트로 피신한다. 그 사이 바벨론으로 끌려간 여호야긴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유다 사람들을 감독하는 지위를 부여받았으며 바벨론 왕궁의 배려로 잘 지낸 것으로 전해진다(왕하 25:27-30; 렘 52:31; 겔 1:2; 8:1). 다니엘서는 유다백성이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면서도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단 2:48).
     
     

    [지도: 느부갓네살의 유다침공(주전 587년)]
     


     

    [지도: 유다인의 바벨론 포로행(597-582 B.C.E.)]

 
 
 
    8. 신명기사가의 역사관

        신명기사가는 이것으로 열왕기하를 끝맺는다. 여호수아서부터 열왕기하에 이르는 역사서를 기록한 것으로 여겨지는 신명기사가(DH)는 줄곧 신명기(D) 정신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야훼의 율법을 준수하고 그 법도를 행할 때 축복을 받고 땅에서 장수할 것이며, 그렇지 않을 때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명기 정신은 야훼와 모세가 시내산에서 맺은 계약(covenant)을 근거로 하고 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조건부 계약이었다. 그런데 이 조건부계약이 다윗왕가를 지지하는 왕조신학(시온신학)에 의해 무조건적 계약으로 변질된다(삼하7장). 이미 다윗의 행위가 의로우니 야훼는 유다를 영원히 지켜주신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신명기사가가 다윗왕국이 무조건적으로 영화를 누릴 것이라고 단언하지 않는다. 야훼는 솔로몬과 다시 언약을 체결함으로써 율법을 지켜 행할 때만 다윗에게 약속한 언약을 지키겠다고 천명한다(왕상 6:12). 신명기사가는 예루살렘 중심주의와 다윗계약을 근거로 역사를 서술하였고 그 결과 역사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야훼신앙의 빛에서 '해석'하였다. 야훼의 율법을 지킨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요, 그렇지 못한 사람은 늘 죄인이요 그 결과는 패망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이방종교가 난무했던 북왕국 이스라엘은 신명기사가에게 늘 부정적으로 비춰졌으며 여간해서는 잘했다는 말을 듣지 못한다.

        에브라임전승을 이어받은 신명기사가는 예언자사상에 영향을 끼친다. 아직도 왕조신학을 받들고 다윗왕국의 무한한 영광를 주장하는 이들이 유다를 지배하고 있을 때 예레미야는 정통 신명기 주의자로 등장한다. 아무리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든자라고 할지라도 그 후손이 악을 행하면 심판을 면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렘 7:1-29). 북왕국이 멸망한 후에(722 B.C.E.) 유다 백성과 예언자들사이에 첨예한 대립이 야기되는데 그것은 다윗계약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된다. 유다 사람들은 북쪽이 멸망한 것은 그들이 야훼를 섬기지 않은 당연한 결과이며, 남왕국 유다는 다윗계약에 의해 영속할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여기에 대항하여 예언자들은 유다 백성들이 꿈에서 깨어나길 촉구했고 다윗계약을 무조건적인 계약에서 조건부 계약으로 재해석하기에 이르렀다. 그 대표적인 예언자는 이사야(1-39장), 미가, 예레미야 등이었다. 예언자들의 지적대로 유다는 결국 패망하고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한다면 유다의 지도층(약 4,600명)만 바벨론으로 갔을 뿐이지 백성 전부가 간 것은 아니었다. 강제 이송된 왕족, 국가관리, 제사장, 그리고 군대지도자와 기술자를 다 합쳐도 전 인구의 5% 미만이라는 것이다. 민중들은 여전히 그 땅에서 서러움을 받고 살고 있는 동안 유다의 지도층들은 바벨론에서 포로 아닌 포로생활을 했다.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던 포로민들은 자치적인 유다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으며 바벨론이 망하자 페르시아를 등에 업고 다시 유다 땅으로 귀환한다(539 B.C.E.; 대하 36:22-23)). 신명기사가나 역대기사가 모두는 바벨론 포로기의 상황을 역사로 남겨두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는 포로기의 상황을 예언서(에스겔, 제 2 이사야 등)에서 찾을 수 밖에 없으며 바벨론이나 페르시아가 남긴 문헌을 통해 간접적으로 추적할 수 밖에 없다.
     
     


     

     
     
     [그림: 재구성된 바벨론시의 정경. 바벨론은 당시 최대의 국제도시였다. 느부갓네살 2세 치하(604-562BC)]

 
 
    9. 바벨론 포로의 유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바벨론 포로기는 제 1 차 이주가 시작된 서기전 597년부터 시작된다. 이 때부터 계산하면 포로기간은 페르시아에 의해 유다로 귀환한 해인 538년까지 약 60년이 된다. 바벨론으로 끌려간 유다인들은 대부분 개척이 필요한 지역에 정착했다. 폐허된 도시나 산 언덕에 새로운 공동체를 개척하고 나름대로 상업자본을 형성할 수 있었다. 서기전 5세기의 상업활동이 적힌 무라슈 토판에 유다인들의 이름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볼 때 당시 유다인들은 상당한 상권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유다인은 상당한 자치권을 누릴 수 있었고(겔 33:30-33), 사유재산과 노비를 가졌다(렘 29:5; 스 2:65). 나중에는 다른 민족과 마찬가지로 관직에도 오를 수 있었으며 자치공동체에는 유다의 장로들이 지도자로 활약하고 있었다(겔 8:1; 14:1; 20:1, 3). 그들은 바벨론의 유화정책으로 팔레스타인에서 지켜온 종교적 관습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유다의 지도층이 바벨론에 끌려온 사실을 중시하는 이들은 유다인들이 바벨론에서 회당중심으로 야훼신앙의 전통을 유지했던 것으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회당은 대체적으로 그 보다 수세기 후대에 설립된 것으로 밝혀졌다. 폐허된 옛 성전이 그들의 성전이 되었고 그곳에서 희생제사가 행해진 것으로 보도된다. 유다인은 정결의식을 행했으며 안식일과 할례를 중시했다. 특별히 안식일 준수와 할례는 유다인이 다른 민족과 어울려 살면서 자칫 잃어버리기 쉬운 민족적 정체성을 지켜주는 버팀목이 되었다.

        당시 국제도시인 바벨론은 유다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유다인은 그곳에서 나름대로의 자본과 생활터전을 이루게 되고 관직에도 오를 수 있어서 소위 살만한 세상을 누리고 있는 사람도 많아졌다. 바벨론을 멸망시킨 페르시아의 고레스는 서기전 538년에 유다인을 포함한 이주민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칙령을 반포하지만 그것을 달가와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 때는 이미 포로로 끌려온 1세대가 거의 죽고 없었을 때며 2세와 3세들은 팔레스타인보다는 바벨론의 상황에 더욱 익숙해져 있었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림: 포로기의 유다인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엘레판틴 파피루스(대영박물관 소장; Miller, 432).]
     
     
     

        이것은 마치 해외에 있는 우리 동포들의 경우와 비슷하다. 일제강점기에 중국과 러시아 등지로 이주한 많은 동포들이 있으며, 일본으로 강제노역차 끌려갔던 사람들도 많다. 그들의 후손들이 아직도 그 땅에 많이 남아 있지만 다시 우리나라로 오는 것은 쉽지 않다. 정치적 장벽도 있겠지만 우선 언어와 문화의 장벽으로 인해 다음세대가 생전 보지 못하고 말로만 듣던 고국을 찾기란 쉽지 않다. 특별히 선진국에서 살고 있는 사람은 더욱 그렇다. 일본이나 미국에 살고 있는 교포들 가운데 1세들은 아직도 고국에 대한 향수를 버리지 못하고 있지만, 2세나 3세들에게는 '고국'이라는 개념마저 희박하다. 그들은 일본인 처럼 살기를 원하며 미국 시민으로서의 꿈을 키우기에 여념이 없다. 바벨론에 살고 있었던 유다인의 후손들도 이와 비슷한 처지에 있었다. 그들에게 고향은 바벨론이지 폐허된 유다가 아니었을 것이다. 돌아가 봤자 반겨줄 이도 없고 먹고 살 재산도 없다. 그러니 누가 쉽게 귀향하겠는가? 이러한 현실을 직시한 제 2 이사야(사 40-55장 저자)는 유다로의 귀환을 제 2의 출애굽으로 묘사한다. 바벨론 생활에 익숙해진 유다인을 설득하고 달래서 고향땅 팔레스타인에로의 귀환을 촉구한 것이다.
     
     
     

    [지도: 바벨론제국의 영토(주전 6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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