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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에 대한 바른 이해 (1) 행 2:37~38 성부 성자 성령 시대에 따른 계시의 중점 우리가 하나님의 경륜을 공부하다보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하나님께서는 성령시대를 시대적으로 계획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성령 시대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는 일하실 때에 함께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계획을 세우셨고, 예수님께서 그것을 성취하셨으며, 이제 성령께서 우리 안에 적용케 하는 역사를 행하십니다. 예컨대 구약을 살펴보면 오직 성부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셔서 우리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구약에서 주요 등장하는 명칭들이 바로 “나 만군의 여호와가”라는 말입니다. 이처럼 구약의 주인공은 성부 하나님이셨으며, 우리 인간에게는 그 성부 하나님과의 관계가 몹시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이제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약속하십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그 메시아가 오실 것에 대한 예언들이 성부시대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언대로 예수님께서 오셔서 성자시대를 여셨습니다. 그래서 성자 시대를 이야기하는 4복음서를 중심으로 보면, 그곳에서 주로 강조되는 호칭이 “예수께서”입니다. 구약에서 “여호와가”라는 말이 강조 되었듯이, 이제 신약에 들어서 “예수께서”로 바뀐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역사의 주된 사역의 핵심이 성부에서 성자에게로 넘어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성자시대에는 성자와 옳은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성부 시대에는 성부 하나님이 전면에 나타나셨을 뿐만 아니라, 성부 하나님이 인간과 직접 관계를 맺기 때문에 우리는 그 성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몸을 입고 오셔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면서 성자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되 예수님을 통해서 관계를 맺도록 시대가 바뀐 것입니다. 성자시대에 예수님을 배제하고 “나는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겠다”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 당신을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아무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요 14:6) 그렇기 때문에 성부시대에 성부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야 했듯이, 성자 시대가 왔을 때는 성자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순종하고 따르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제 성령시대가 임하게 되는데, 오순절 성령강림 후부터 예수님의 재림의 날 때까지가 성령 시대입니다. 성령시대에는 은혜시대, 교회시대라는 여러 가지 명칭이 있는데, 그것은 성령시대의 성격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을 성자가 완성을 했고, 이 성자가 완성하신 일을 비로소 사람 안에서 적용케 하는 열매를 맺게 하는 분이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시대의 개막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의 생명으로 말미암아서 경륜을 이루시기 위해, 이미 창세전부터 성령의 시대를 계획하셨습니다. 성자 시대에 예수님께서 모든 사역을 완성하시고 난 이후에, 예수님께서 이루신 모든 내용이 실제가 되게 하시고 열매 맺게 하는 주된 역할을 성령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대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굉장히 중요한 시대로 자리 잡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성령이 우리 안에 임하고 개막되었다는 사실이 율법을 대체한 본래적 계획이었다는 것을 깨달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성령의 역사는 보편적 이여야 합니다. 다시 말해, 성령께서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주된 중심으로 자리를 잡아서, 하나님의 계획이 실제적인 열매를 맺게 하는 그 일이 많은 사람들에게서 보편적으로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성령시대가 개막되었고, 이제는 그 성령께서 중요한 역할을 하신다면, 성령의 역사는 특수한 사람들에게만 임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 14:16~17)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다른 보혜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이미 어떤 보혜사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보혜사 이전에 보혜사는 바로 예수님입니다. 보혜사라는 말은 “돕는 자”라는 말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보혜사를 진리의 영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성령이란 진리 가운데로 우리를 인도하실 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거하셨습니다. 이것을 임마누엘이라고 합니다. (마 1:23)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거하셨을지라도, 우리 안에 계시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시지만, 또한 동시에 우리 안에 거하길 원하시는데 말입니다. 성령시대의 필요성 하나님은 경륜 속에서 본질적인 계획으로 그분 자신의 생명을 우리 안에 두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시지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오시지 못했다는 측면에서 예수님만으로는 하나님의 경륜이 온전하게 완성될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사역을 불안정하게 하셨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계획의 모든 것을 예수님 안에서 다 완성하고, 다 이루셨습니다. 아멘. 하지만 인간을 구원할 계획들이 예수님 안에서 다 완성이 되어졌지만 문제가 남아 있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완성되어졌지만, 이 사실이 사람들에게 실제가 되게 하는 일은 부족한 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실제적인 적용에 대해서는 아직 온전한 완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 생명으로 거하시기 위해서, 우리 안에 또 다른 보혜사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요 14:16~17) 새 언약의 핵심은 돌비에 새겨진 말씀을 너희 심비에 새기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렘 31:33) 그런 면에서 볼 때 예수님을 통해서 새 언약의 시대는 열렸지만, 새 언약의 시대가 완성되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심비에 새겨진 법이 되지 못한 것이죠. 예수님이 우리 안에 마음속에 새겨진 법이 되는 것은 성령이 우리 안에 함께 거하실 때입니다.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신약시대 중에서도 특별히 성령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임마누엘의 하나님보다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왜 성령시대가 필요하냐?”라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필요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령시대가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오셔야 하나님의 경륜이 우리 안에서 비로소 완성되고 결실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겠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셔서 우리 안에서 성령으로 거하시겠다고 합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으로 오시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체적인 그림에서 볼 때,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함께 일하시는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의 창조역사가 있었고, 계획과 섭리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거하기 위해서 예수님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거하시기 위해서 성령으로 오셨습니다. (요 14:18) 성부시대에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성부시대에는 성자시대에 대한 예고가 있습니다. 그리고 성자시대에 대한 예고 안에는 성령에 대한 예고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자와 성령시대를 새 언약의 시대라고 합니다. 신약에는 성자시대와 성령시대가 함께 포함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제 성자시대에 오셔서는 성자께서 구원을 완성하시고, 성자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받습니다. 그런데 성자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의 말씀에서 이제 성령을 예고하십니다. 그리고 그 예고대로 드디어 오순절날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성령의 역할-예수님을 드러낸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 14:20~21)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날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리라 하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 안에 들어갑니까? 안에 거한다는 것은 교회를 말합니다. 교회에 연합되어,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몸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은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라”라는 말씀으로 14장 15절에서 하신 말씀을 다시 한 번 강조하시는데, 결국 이 계명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게 될 것을 말합니다. 성령이 오시면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신비한 체험을 했다하면 무조건 성령의 역사라고만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성령에 대한 사실들을 친히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보내실 보혜사가 어떤 성격이고, 무슨 일을 할 것인지를 우리에게 밝히 규정시켰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성령을 분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예수님 당신의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이라고 하셨습니다. (요 14:26) 즉 성령은 예수의 이름으로 오는 것입니다. 성령은 독자적인 이름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예수의 이름으로 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성령이 우리에게 모든 일을 가르치시고,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내용들을 생각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요 14:26) 그러므로 성령은 예수님을 조명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어진 사실들을 우리 안에서 적용하도록 오신분이 보혜사 성령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떠나는 것이 유익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가셔야만 보혜사 오시기 때문입니다. (요 16:7) 예수님은 당신이 우리와 함께 거하는 것보다, 보혜사가 오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의 모범을 보이시고, 말씀하신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일반 종교는 교주들이 삶의 모범을 보이고 나서 죽습니다. 이후 그의 정신과 업적과 삶의 모범들이 유지됩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주가 행한 업적이나 모범들로 사람들을 이끄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종교입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생명입니다. 다른 종교들은 교주가 가르친 계명들이나 율법들이 중요한데 반해, 기독교는 오히려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대신하는 보혜사가 약속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것이 많이 있지만, 그때 당시에는 제자들이 감당하지 못할 거라 하셨습니다. (요 16:2)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이끄시고,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알려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요 16:13)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떠나시는 것이 우리에게 더 유익하다는 말씀의 참 의미입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길 성령이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고 하셨습니다. (요 16:14) 예수님의 것을 가지고 우리에게 알리신다고 하십니다. (요 16:15) 소위 하나님의 교회라는 곳에서는 교주인 안상홍씨가 성령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성경을 보면 성령의 역할은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만약 안상홍씨가 정말 성령님이라면,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의 것이 아닌, 자신의 것을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틀린 것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고, 예수님의 것을 가지고 가르치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지금 살펴본 여러 말씀들을 통해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정리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대신해서 오시는 성령이 곧 예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오신다고 하십니다. (요 14:18) 이 말씀은 앞서 17절에서 성령을 약속하신 후에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성령을 자신과 같은 개념으로 말씀하십니다. 성령은 예수의 영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우리 안에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은 곧 예수의 영이라는 사실을 밝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성령이 오심을 기다렸을 뿐이다 성령에 대해 명확히 알아야 할 두 번째 사실은 성령은 위에서부터 능력으로 부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이죠.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 거하는 주님으로써 성령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요 14:17) 성령은 소위 말하는 뜨끈뜨끈한 것이 위에서 부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성부께서는 구약에서 예수님을 보내주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결국 오셨습니다. 그런데 약속해주신 예수님이 오실 때 어떻게 오셨습니까? 사람들이 “예수님 오소서”라고 집회를 했습니까? 예수님이 맞이하기 위해서 특별한 성회를 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냥 때가 차매 오셨습니다. 약속되어진 예수님은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해서 오셨습니다. 사람의 어떠함으로 해서 온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요청을 강하게 하고, 열심히 예수님을 보내달라고 간청을 했기 때문에 보내주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들을 보냈지만, 백성은 배척하고 못 알아봤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했을 때 따르는 일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 성령시대에도 성령이 오는 것이 사람의 어떠한 것으로 오겠습니까? 아니면 때가 차면 하나님의 경륜의 시기에 따라서 오시겠습니까? 성령을 받기 위해서 솔뿌리를 뽑고, 금식기도를 하고, 철야기도를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해야 성령을 받습니까? 우리가 그 약속한 성령을 어떻게 하면 받습니까? 사도행전 1장 4절과 5절에서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는 법을 말씀해 주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기다리면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이 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성령을 받기위해서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성령을 받기 위해서, 마가의 다락방에서 열심히 기도를 했기 때문에 성령이 임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을 자세히 보십시오. 사도행전 2장 전체에서 기도할 때 성령이 임했다는 말씀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그런 말씀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성령은 오순절에 맞춰서 오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 저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누워있어도 성령은 임합니다. 저들이 그냥 떡을 떼고 앉아 있어도 성령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령이 임할 때에 있었던 불의 혀와 같은 현상들은 성령강림의 개막식이기 때문에 화려하게 임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가시적으로 눈에 보이는 분이었기 때문에, 오순절과 같은 화려한 개막식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면 오시면 보이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사람들로서는 성령이 오셔서 성령시대가 개막되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실 때, 사람들로 하여금 “정말로 약속하신 성령이 오셨구나”라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불의 혀와 같은 것,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 방언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개막식으로서의 의미에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 것이지, 누구에게나 성령이 임하면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깨닫지 못하니까,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성령 충만을 불이 임하고 방언이 터지는 것으로 확인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들이 성령이 임했다는 증거이며, 성령 충만의 증거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해서 기도를 열심히 해야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말씀을 보십시오.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령이 오는 것은 사람들의 요청이나 사람들의 상태와 무관합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성부시대에 예수님을 보내겠다는 하나님의 언약과 경륜의 때에 맞춰서 이루어진 것처럼, 오순절에 임한 성령도 하나님의 경륜의 때에 맞춰서 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이 성령을 받기 위해서 무언가를 열심히 했기 때문에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과 성령의 임함은 전혀 무관한 일입니다. 저들이 만약 기도를 열심히 해야만 성령이 임하는 것이라면 사도행전 1장 4절과 5절은 이렇게 기록되었어야 합니다. “내가 너희를 떠나고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겠는데 너희들에게 하나님이 보내주시되 구해야 간절히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주실 것이다. 열광적으로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주실 것이다. 그러니 믿음으로 성령을 달라고 기도해라.” 그러나 기록된 말씀은,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몇 날이 못 되어서 성령을 받을 것이라고 예고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성령이 임할 때가 되었기 때문에 기다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여서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앞서 말씀 드린대로 사람들로 하여금 성령이 임한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사도행전 2장 2절~4절의 현상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니 이 현상은 “너희들이 기다리던 그 성령이 임했다”라고 깨닫게 하기 위한 현상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이후로 능동적으로 “성령을 받으라”라는 말은 성경에 단 한곳도 없다는 것을 아십니까?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성령 받으라”라고 말씀하시며, 그 자리에서 숨을 내쉬어 성령을 준 사건이 한번 있습니다. 사실 그것도 성령을 받기위해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숨을 내쉬어 성령을 줄테니까 받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요한복음의 말씀 외에는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이 성경에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성령을 받으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삽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그런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에 성령 충만함을 받으라는 말은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도 원어적으로 보면, 성령에 철저하게 사로 잡혀서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살라는 말입니다. 성령이 부어지는 것처럼 받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성령은 이제 이미 임한 것 입니다. 보혜사 성령시대로 말미암아서 성령이 임한 것 입니다.
오순절 이후 성령은 구원과 관련된 사건 그런데 사실 사도행전을 보면 오순절 다락방 외에 성령이 임한 사건이 많습니다. 그럼 그 말씀들은 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행 2:37~38)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후 베드로가 모인 사람들 앞에서 설교를 합니다. 그리고 그 설교가 36절에 끝납니다. 그리고 나서 오늘 본문인 이 말씀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38절에서 베드로의 말을 잘 살펴보십시오. 여기 보면 성령은 선물이고 죄사함을 받은 결과입니다. 이제 성령강림이 이루어지고, 성령시대가 개막되어진 후로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성령을 받기 위해서 기다린 것처럼, 어떤 현상에 의해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고, 죄사함 받고, 구원받으면, 성령은 선물로 오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 안에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가 내주하시는 영으로 임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구원과 관련된 사건이 되었습니다. 오순절은 개막식과 관련된 사건이었고, 그 이후에 사건에서 성령을 받는다는 개념은 구원받는다는 말과 동격의 단어가 되었습니다. 구원받으면 성령이 임한 것 입니다. 사도행전 10장에서 백부장 고넬료가 베드로를 집에 청하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베드로를 초청을 합니다. 베드로는 환상을 보고 고넬료의 집에 가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베드로가 이 말 할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행 10:44~46) 이 말씀들을 보면 고넬료 식구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구원받고 난 이후에, 성령을 받기 위한 또 다른 집회가 없었습니다. 그냥 베드로가 복음을 전할 때에 성령님이 오신 것입니다. 이것은 오순절의 개막식과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왜냐면 지금까지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베드로는 환상을 보고, 결국 고넬료의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서 저들에게 안수를 하고 세례를 준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저들이 마음에 그것을 받아들이니까, 성령이 오순절 현상과 비슷하게 임하십니다. 그것은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이 임한다는 것을 저들이 가시적으로 알아야만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즉 사도행전 10장에서 오순절 현상이 이곳에서는 동반되어져야 하는 이유는 이방인에게 성령이 임했다는 것은 사도들이 깨닫고, “저들도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게 되는구나”를 알아야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행 10:47, 11:15~18) 결국 이 고넬료 사건에서도 성령이 임하시는 것과 구원을 받은 것이 하나의 개념으로 이야기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순절 이후의 성령시대에는 구원받았다는 것이 곧 성령 받았다는 것이고, 성령 받았다는 이야기는 곧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구원 외에 성령을 따로 받아야 되는 현상적 사건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고넬료 사건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더니, 할례자들이 베드로를 비난을 합니다. 이때 베드로는 요한의 세례를 이야기하며, 고넬료가 성령을 받은 것을 말합니다. (행 11:16) 요한의 세례는 지금까지는 죄를 지으며 자신의 마음대로 살았던 사람이 요한에게 와서 세례를 받고 하나님 나라에 연합이 된다는 개념입니다. 즉 세례는 연합의 개념이라는 말입니다. 사실 당시의 유대인들도 이방인에게 세례를 주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것은 세례를 통해서 “너는 이제 유대인에게 연합이 되었다”라는 의미였습니다. 입교식의 의미가 강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들로 11장 16절 말씀을 살펴볼 때, 이 말씀은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어서 너희들을 입교시켰으니,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서 하나님 나라에 입교하게 되리라”라는 개념입니다. 능력이 쏟아지는 개념이 세례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세례는 연합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니 오순절에 임한 성령의 현상이 고넬료 집안에도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저들이 이방인을 무시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에게는 하나님 나라가 임할 수 없다는 관념을 철저히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똑같은 현상이 있어야 “그렇다면 이방인에게도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셨구나”라는 것에 유대인에게 이해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서 이제 교회가 공식적으로 이방인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성령은 구원과 별개로 능력을 체험하기 위한 또 다른 현상이 아닙니다. 성령이라는 것은 구원의 증거로서 받아야 합니다. 에베소서에는 우리의 구원을 성령이 인치시고 보증하신다고 하신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엡 1:13~14) 또 많은 오해를 주는 말씀이 사도행전 19장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18장 24절부터 살펴봐야 합니다. 바울이 에베소에 복음을 전하러 3차 전도 여행을 왔을 때, 이곳에 유명한 아볼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학문이 많은 자로서 예수님에 대한 것을 자세히 말하긴 했는데, 다만 그는 요한의 세례만 알았습니다. (행 18:24~25) 즉 예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정확하지 못한 정보였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아는 것은 부족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풀어 말했습니다. (행 18:26) 이것이 그 당시 에베소 지역에 있었던 예수님을 믿는 다는 사람들에게 나타난 공통된 모습들 이었습니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19장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 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로라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행 19:1~6) 바울이 어떤 제자들을 만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라고 묻자, 그들은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의 이 질문은 “믿은 다음에 따로 성령을 받았느냐”하고 묻는 것 입니까? 아니면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하는 것입니까?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묻습니다. 고넬료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던 것처럼, 너희도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너희들의 믿음이 진짜라면 믿음과 동시에 성령을 받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쉽게 말해 바울의 이 질문은 “너희들 구원받았느냐”하는 질문입니다. “너희들은 구원을 받았는데 능력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말인데, 예수님 믿고 난 다음에 혹시 성령을 받았느냐?”하는 질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요한의 세례만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볼로와 상황이 똑같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아볼로에게 도를 다시 풀어서 가르쳐 준 것처럼, 이 사람들도 그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구원의 개념과 연관되어진 사건입니다. 특히 여기서 세례요한과의 고리를 완전히 끊는 사건입니다. 세례요한이 처음에는 에수님을 보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선포합니다. (요 1:29) 그러나 세례요한은 감옥에서 죽게 되었을 때에 제자들을 시켜 예수님께 묻기를, “오실 이가 당신이 맞습니까?”라고 합니다. (마 11:3) 마지막 순간에 세례요한은 믿음이 흔들린 것입니다. 결국 그의 제자들도 스승인 요한의 영향을 받아, 한편으로는 예수님에 대해서 긍정이지만 한편으로는 믿음이 흔들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시기로 하신 분이 당신입니까?”라고 묻을 때에, 그들에게 “너희들이 광야에 무엇을 하러 갔느냐? 흔들리는 갈대를 보러 나갔느냐?”라고 하셨습니다. (마 11:7)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흔들리는 갈대라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결국 흔들리는 갈대와 같던 세례요한의 제자들 중에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덜 정리가 되어 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줘야 했던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동일한 과정을 통해 저들에게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예수 이름으로 성령을 받게 했던 것입니다. 결국 사도행전 19장의 이 사건도 구원받고 난 이후에 따로 성령을 받아야 되는 개념의 설명이 아니고, 구원과 관련되어진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즉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라는 것은 “너희들의 구원이 진정한 믿음과 구원이었느냐?”라는 것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그래서 성경은 단 한구절도 성령 받으라는 말이 없는 것입니다. 성령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렇다면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는 성령문제가 어떻게 인식되었을까요? 성령을 어떤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을까요?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고전 3:1) 이 말씀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육신적인 성도들이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들을 두고 어린아이와 같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신령한 자를 대함과 같이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신령하다는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즉 신령한 자들을 대함같이 대할 수 없다는 것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성령 충만을 따로 받아야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그 주장에 의하면, 이들은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이미 받은 사람들입니까? 성령세례나 성령 충만을 구원받고 따로 받아야 된다고 하면, 이 사람들은 성령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뭐라고 말합니까? 육신적이고 어린아이라고 평가한 그 사람들의 몸이 성전이며, 그들의 속에 성령이 거하신다고 합니다. (고전 3:16) 바울은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하면서,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이미 그들 안에 성령이 있다고 합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려는 핵심은 성령은 성령시대를 주도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속에서 주도되어진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성령은 우리가 구원받은 이후에 따로 구해야할 특수한 현상이 아니며, 뭔가 특별한 개념으로 주워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성령은 보편적인 것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롬 8:14) 하나님의 아들은 그 안에 성령이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영은 양자의 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한다고 합니다. (롬 8:16) 성령이 우리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입증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에베소서에서는 성령으로 인치시고 보증하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엡 1:13~14) 성령은 성령시대의 개막과 더불어서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 안에 보편적으로 역사하십니다. 또 우리는 이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성령시대라고 합니다. 보편적으로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 안에 역사하시고 모든 사람들 안에서 성령이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세대 안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주도적인 역사 안에 집중하고 인식하며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시대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영의 인도함을 받아서 사는 사람들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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