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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에 나타난 민족의식과 통일사상
. 서 설 이스라엘은 인류학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 즉 이방민족들 가운 데서 전위적(前衛的)인 위치에서 역사의식이 투철하며, 자기 민족이 이 방민족들의 가족들 과 함께 소속되었다는 전체성에서 고려된다(창 12:3). 그러나 민족이동 시기에서부터 그 는 주변 민족들과 다른 요소로 인하여 대 질관계에 있었으며, 제l차 노아세대가 아니라, 증 간 부류(창 11, 10-32)로 등장한다. 아브라함 계보(족보)는 지리적으로 상부 메소포타미아, 붇부 시리아 아라비아 반도 남부와 남서부 아카바만, 흥해바다 해안가, 북서 아라비아, 팔레스틴 남부와 남동쪽, 모압과 암몬과 서부 팔레스틴의 광활한 지역의 주민과 관련을 맺는다. 이것은 지정학적(地政學的)인 관점에서 계보화된 것이다. 그들은 족장시대에는 [하나님 의 가정] 공동체로 있다가, 모세의 출애굽 사건을 계기로 [야웨의 가족]이 되었으며, 해방 자 하나님이 준 [계명과 율법]으로써 계약을 체결하였 다. 이런 [역사]는 하나님의 주권통 치의 영역이 되 었으며, 고전적인 구원시대로 열렸던 역사이기도하다. 여기에서 왕국형성 이 전 시기의 출애굽전통과 시내전통, 그리고 광야전통과 땅점유 전통을 이루는 사건이 있다. 그 옆에 왕국형성 이후의 시온전통과 다윗전통은 다윗의 제국의 역사를 뒷받침하지만, 남 왕국과 북왕국이 이것을 다르게 받아들인 데에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통일체제는 처음부 터 [분단] 모티브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로 그 후 정치적인 통일의 시도에도 불구 하고, 남북은 [지파의 소속성의 의 식]을 남북의 분단으로 고정시켰으며 다윗이 세웠던 인 격 연 합체제-군합국(君合國, Personalunion) 을 회복시키지 못하였다. 이런 정치적인 결과는 이스라엘/유다의 정치목표와 공동체의 소속성이 이스라엘의 시초가 되는 [출애굽과 선택] 앞에서 임 시적이요, 자기해방( Selbetbefreiung) 및 해방(Emanzipation ) 의 과정이기 때문에 야웨의 주권통치를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1] 남북분단 시대에 있어서, 그들은 통일과 평화를 성취하기 위해서 때로는 군사동맹과 평 화조약을 맺고, 때로는 강대국을 등에 업고 분단된 형제의 땅을 차지하려고 하였으나, 이것 은 남붇의 두 왕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한 실현 불가능하였다. 때로는 남북이 서로 연합 이 되었다고 해도, 이것은 남과 북이 동등한 세력균형에서보다는 어느 한 쪽의 양보적인 자세에서 유지되었다. 그리고 남북이 두 정치체제를 내적으로 통합하여 강대국 앗수르나 다메섹과 전투를 하였으면서도 통일을 이를 수 없었다. 결국 주전 722년 이스라엘이 앗수 르에게 먼저 망하였고, 587년 유다가 바벨론에게 나중에 망하는 것으로 [분단의 역사]는 통일되지 못하고 끝장이 났다. 이스라엘의 시초인 출애굽 해방 이후부터 남북이 멸망할 때까지 신학적으로 성찰하자면, [하나님 통치 영역] 안의 하나님 백성의 전쟁들은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그의 통치 밖에 있었던 것이요, 그것은 하나님 면전에서 저질러졌던 죄악의 요인들로 규정된다: 1)남북간 의 주도권 쟁탈전, 교만, 우월감, 2)질투-자멸행위, 3)이적행위의 외교전-배신행위 등이 민 족의 평화와 남북의 통일을 저해하였기 때문이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정치상황은 분단 모 티브와 화해 모티브의 긴장관계에서 공전되었을 뿐 민족적인 관심과 지 파의식에서 벗어나 지 못하고 있었다. 분단을 화해모티브로 극복하려고 하였으나, 그런 동기는 정치적인 의도 에 블과하다는 인상만 남겼을 뿐이다. Ⅱ. 본론-민족형성 민족과 영토국가는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평면에서 일어난 것이다 특히 인간의 정 치적인 행동과 고난으로 인해서 민족의 역사는 결정된다. 그리고 재차 역사적인 사건의 폭 넓은 과정들을 산출시키면서 서로 서로 영향을 주고 받곤 한다. 이런 역사의 본질적인 의 미는 일찍이 중동-유럽문화권에서 창조되었으며[2] 특히 이스라엘인들에 의해서, 모든 동양 문화 민족들 가운데서 특수한 위치를 차지하였던 이들에게서 역사문학은 놀랍게도 초창기 에 이룩되었으며, 높은 의미를 지닌 독창성이 전개되었다. 실로 주목할 만한 것은 구약은 다양한 역사전승, 다양한 연대의 역사전승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문화사적으로나 종교사 적으로 상이(相異)한 주위 세계와의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분명히 구약에서 이스라 엘인들은 많은 역사적인 기술법, 문학의 평행 사상의 유사성을 주변 강대국에서 취했다고 해도, 이스라엘 역사와 이방의 세계 역사에 관한 이야기를 나열하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인들은 외부적인 사건보다는 역사의 내부에서 경 험되어진 하나님 활동을 진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특수한 관점에서 구약은 근본적으로 그의 주의세계와 구별된다. 고대중동 세계의 종교들은 항구적으로 반복되던 신적-초인간적인 통치와 그런 세력의 승 배, 말하자면 하늘과 지상, 별들과 믈체, 인생과 사망에 대한 것을 취급했지만, 구약에서는 주로 역사적이며 유일회적인 사건을 [하나님의 교시]로서 이해하였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인들은 역사에 관한 정확한 개념을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역사 사건과 본질을 층분히 논의 할 수 있었다. 역사에 관한 것은 유일무이한 대답을 내놓지 않는다. 왜냐하면 구약의 오경 서와 역사서의 이야기체의 역사문학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행동을 일으키는 제한된 영역으 로서의 역사를 논의할 수 있기 때문이요, 또 현재와 미래에 집중적으로 개입해 들어오는 하나님을 감지하는 고전 예언자의 역사의식을 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른바 다니엘서와 같은 묵시문학은 구약묵시라는 최후의 명칭으로서 포착되며, 묵시문학 에서는 환상과 꿈의 매개체를 통해 하나님의 비밀의 무엇인가를 드러내 놓는 것들을 논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고대중동의 정치형태 고대중동에는 네 가지 형태의 국가체제가 있다: ①신정정치, ②군주정치, ③연방체제, ④ 입헌군주국이다. 이런 다양한 정치형태는 정치사적으로 이스라엘 국가형태에서 나타나기도 한다. ① 신정정치는 수메르인들이 세웠던 사원국가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은 [지고의 힘]을 믿 는 신앙에 기초한 세계관과 인생관의 실체화로서 사원을 증심으로 한 신국을 형성하였 다. 우룩 Ⅳ세 통치하에서는 신성의 소유물로 간주하였던 도시국가들이 존재하였으며, 그들은 사원으로부터 경작지를 분배받고, 창고에 곡물들을 저장하였다. 따라서 사원은 정신 적, 정 치 적, 그리고 경제적인 증심이 되었다. 신성의 지상적인 대표자는 [루갈 (Lugal), 즉 '위대한 인간'이었다. 그는 제사장적인 왕이요, 최고 제사장이며, 동시에 전쟁의 군주이기도 하였다. ② 군주정 체 : 주전 2350년경 옴마(Umma) 의 루갈자깃시( Lugalzaggisi) 는 수메르 도시를 수중에 넣었으며, 왕은 신성의 대리자가 아니요, 신(神) 자체였으며, 그러한 국정의 통 수권자요, 자기의 관리를 세워서 속국들을 다스렸고, 증앙집권적인 관료국가를 형성하 였다. 동시에 계급체제의 국가가 형성되었으며, 거기서 자유인과 노예, 부자와 가난한 자, 제사장과 군인, 상인들과 수공업자들이 분리되었다. ③ 연방체제 비샘족들 가운데 헷족은 유럽에서부터 내려와 함무라비 왕조를 무너뜨리 고, 시리아와 매소포타미아 북서쪽에서 후리트인들과 대치하였다. 이들은 독럽적인 도 시국가들을 합생하여 바빌론제국을 멸망시켰으며. 그의 목적은 대룩의 이방민족들의 통치에 대한 합법성을 구하는 데에 있었다. 그럼에도 블구하고 그의 후계자들은 거대 한 영토들과 고등문명의 민족들을 통치할 수 없었다. 이와 동일한 노선에서 힉소스족 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에집트의 부역노동에 징발되었으며, 민족적으로 통일이 안 되었 던 비셈족 집단이었다. [힉소스]라는 의미는 회랍어로 [이방나라의 통치자]라는 뜻이 다. 그들은 에집트 본토의 통치자들을 축출하고, 연맹집단을 형성하여 다른 소수민족들 을 수용하였다. 이상의 신 정정치, 군주정체와 연방체제는 이스라엘인들의 통치의 제도 에서도 나타난다. 주전 12-11세기 사사시대에 활동했던 사무엘 제사장이 왕을 임명하 였던 시대가 신정정치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 후 사울, 다윗, 솔로몬, 그리고 남북 분단 이후 정치는 왕이 제사장보다 우월권을 가졌던 하나님의 정치적인 대리자의 군주정체 가 있었다. 그리고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가 최초의 사사의 형태의 인물로서 서부 가 나안을 공략할 때와 가나안 점유 후 드보라와 가나안인의 전투에서 이스라앨인들은 지 파동맹을 결성하여 외부의 위협에 대처했던 것은 연방체제를 말해 주고 있다. ④ 입헌군주국 요시아왕은 을법을 발견하여 추밀원의 자문을 구했으며,국민회의를 소집 하여 울법시행의 인정을 받았으며, 예루살렘 성전을 증앙화하여 제사권을 단일화시켰 다. 이런 율법이 국가헌법이 되었다. 이런 을법 안에는 왕이 지켜야 할 법조문이 있다. 이것들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다윗왕조의 보존과 다른 하나는 전재군주 정 치에 대한 반대규정이다. 전자를 위한 것은 1.왕이 외국인일 수 없으며, 2.강대국에게 군사를 의존하지 말 것이며, 3.후궁과 재믈을 축적해서는 안 되며. 4.왕의 품위와 행실 에 대한 지침서를 지키는 일이다. 후자를 위한 것은 ①기병대와 전차를 축소시켜 공격 전을 저지, ②외국 여인을 후긍으로 맞이하여 외국풍조를 막는 일이며, ③사치를 제한 하여 세금을 내리는 일이다. 그리고 마지막 ④상비군대를 민병대로 편성하는 쟤도이다. 이런 견지에서 보건대 왕은 땅의 백성(암하아렛츠)을 존중하는 왕이요, 헌법에 구속되 는 백성의 왕이 되었다. 따라서 전제군주는 입헌군주제로 바뀌었다. 고로 하나님의 현 재성은 왕국과 동일시되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의 현재성은 국가와는 독럽적이요, [신앙]에 근거해서만 [하나님의 통치]가 가능했다. 거기서부터 이스라엘 국민은 '형제 들'이 되었다. 왕은 농부와 예언자와 같이 그런 '형제'에게서 나왔다. 유다의 노얘들도 그 주인의 '형제'였다. 여기에 본질적으로 예언자 정신이 함양된 국가의 도덕과 윤리가 추적된다. 이상 역사적인 개괄과 고대증동의 형태를 고찰하면서 이스라엘의 선사시대의 이방의 종 교적인 사상과 이스라엘의 종교와의 차이들, 그리고 이스라엘인들 특유의 역사의식을 논하 였다. 그 다음 고대증동의 정치형태들의 제 요소들이 이스라엘 정치사에도 시대적으로 시 행되 었으나, 결국 이스라엘은 신명기법을 국가헌법으로 받아들여 하나님의 통치와 왕국통 치의 분럽을 뚜렷하게 하였다는 점이다. 이런 주변 강대국이나 여러 이웃 나라와의 틈바구 니에서 이스라엘인들이 팔레스틴을 향하여 이동한 후, 그들이 하나님의 민족으로 형성되기 까지 역사적인 배경과 이방민족과의 지정학적인 관계를 세부적인 항목으로 나누어 고찰할 필요가 있겠다. 인류학적인 의미의 '고이'(민족)가 아니라, 하나님 백성 '암'(가정 혈통)으로 이스라엘이요, 일반 역사를 기록한 민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건과 교시를 경험하면서 구 속사적인 전통들(Traditionen)을 전승시켰던 민족임을 미리 말해 둔다. 그리고 왕국형성 이 전의 전통들과 왕국형성 이후의 다윗-시온전통이 어떠한 효력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제한 성을 가지고 있는가도 논의되어야 하겠다. 그들이 하나님민족으로서 남북을 통일시키지 못 했던 이유는 무엇이며 궁극적인 하나님통치는 어떻게 실 현되는가도 다루어질 것이다. 팔레스틴 땅에 이주해 왔던 블레셋, 가나안 시돈과 히위족속 등은 이스라엘인들과 같은 시기에 함께 이동하였으면서도 그들은 적들의 관계였다(삿 3, 1-3). 구약전승에 의하면 가 나안인들은 노아에게서 저주를 받는 후(창 9,25 이하), 그의 영역은 서부 요르단 예즈레엘 평지 므깃도와 다아낙 상부 갈릴리(삿 4,2; 수 1,1)와 서부 지중해 해안의 블레셋 국경과 맞닿은 북부 해안지대로서 그것은 유다와 이스라엘 사이를 갈라 놓고 있다.[3] 그와 동시에 블레셋과 유다/이스라엘이 접경을 이루는 지정학적인 운명을 뗄 수 없었다. 즉, 가나안은 이스라엘 전체 덩어리를 북부지역과 증부지역으로써 양분(兩分)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종교적으로 가나안인들과 섞여 살아야 했고, 주민정책도 언제나 민족간의 정치 적인 평등정책의 긴장이 있었으며, 북다메섹으로부터 직접적인 위혐을 받아야 했다. 어학사적으로 이스라엘의 고대 언어와 문자는 가나안어와 동류였다(민 13,2; 시 136, 11; 신 32,49; 겔 16,3). 이들은 둘 다 북서 셈족어에 속해 있다. 예를 들면, 아모리어(주 전 2000년경), 우가리트어(=북시리아어 주전 14-13세기), 가나안어인데, 가나안어는 다 시 페니키아어(주전 1000년), 모압어, 암몬어와 히브리어 방언(方言)으로 갈라진다.[4] 이런 관점에서 이스라엘이 민족적으로는 북방 셈족계열에 속해 있으면서. 언어적으로는 남방 함 족의 가나안인의 언어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런 두 개의 다른 요소들이 이스라 엘인의 정치-문화-종교적인 친속성을 이루게 하였지만, 그와 동시에 정치 종교적인 갈등이 더 심 했다. 히브리인들의 기원을 찾는 것은 간단하지 않으며 매우 어렵다. 그의 기원은 구약 창세기 전승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창 10장의 노아의 세아들들 셈, 함과 야벳의 세대에서 이스라 엘민족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스라엘은 노아의 세 아들들보다 나중에 지엽적으로 나타 났던 중간기적(中間基的)인 부류에 속하기 때문이다(창 11, 10-32). 창 11, 10절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셈부류의 지체로서 그의 아버지는 데라였다. 데라의 세 아들들은 아브라함, 나 흘과 하갈이었다. 이런 인명들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있던 도시의 지명과도 일치하 는 데서 히브리인의 기원이 북부 셈족에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나증에는 인구 이동으로 여러 방향에서 들어온 종족들과 섞이고, 남방의 비셈족이 있지만 창세기 족장들 의 고향은 북방 셈족이 있던 메소포타미아이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땅][5]에서 나와서 이주민의 길을 떠난다. 시기적으로 [헷족속]이 유 럽쪽에서 내려와 북쪽 메소포타미아 남쪽 에집트 사이의 조정역할을 했던 시대에 그런 공 간-지역으로 밀고 들어왔던 부류에 속한다.[6] 족장시대에 그들은 주로 메소포타미아 반월지 대에 오래 머물면서 살았던 것 같다. 그곳에 있던 마리국가와 후리트인의 누지문서와 일치 하는 생활상(生活相)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그들의 어법과 생활방식과 일치 하는 데서 그것이 반영된다. 방위방향 표시에 있어서 동쪽은 [앞쪽](아라비아 사막 방향), 서쪽은 [뒷쪽](지증해 바다 쪽), 남쪽은 [오른쪽](사우디아라비아와 흥해와 인도양 쪽), 그 리고 북쪽은 [왼쪽](카스피해, 쏘련 남부지역)으로 불리우는 것이다. 또 지파명과의 관계에 서 바누야민, 베네 예미니를 [베냐민인]과 같은 표현이다. 그 외에 어원적인 유사성이 나타 난다. 가움(민족)이 [고이]로 표현되는 것 등이다. 마리국가의 법를용어들이 창세기에 자주 나오고 있다. 유산.장자권 매각행위 (민 36,7). 누지문서에 나오는 관습.관례 풍속들(자녀 대리 출산=씨받이)이 있다(창 25,27 이하). 그리고 야곱의 처 라헬이 친정에서 훔쳐가지 고 나왔다는 신상 데라빔(드라빔)은 단순한 예배의 대상이 아니라, 부모의 재산을 요구할 수 있는 상속 권리증(창 31,19 참고)이다. 이런 문화사적인 특색은 창세기의 족장시대에 제한되어 있으며, 그 후로는 다시 계속되는 풍습은 아니었다. 다만 역사적인 혼적으로 참고 될 뿐이다: a.주전 20-19세기의 메소포타미아 반월 문명지대의 족장 사회의 시 대상, b.주 전 18세기의 북메소포타미아의 족장 집단이 있는데, 그들은 신 26, 56-59 절의 이른바 소역 사적인 고백 신조에서 [유리하는 아람인]이 그 시대의 족장들의 모습과 일치하고 있다. c. 그 후 이스라엘 집단의 2차 이동은 에집트의 제2 중왕조(주전 1710-1570)시대에 있던 시 대, 말하자면 에집트 용병으로 에집트에 들어왔던 [힉소스] (Hyksos)가 에집트 본토인들을 제압하고 이방통치를 수행했던 시기와 관련된다. 이 때 에집트에는 북쪽 가나안 지역에서 쇄도해 왔던 셈족 부류의 집단이 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시기는 후에 에집트 신왕조 (주전 1570-1085) 가 힉소스 [이방인의 통치자]의 세력을 축출하기 이전 시대이기 때문이 다. 땅이 없는 자들이 다른 영토를 공격하여 지배자 노릇을 하였던 전형적일 정치형태를 힉소스에게서 발견할 수 있으며, 그들 틈바구니에서 이스라엘인들도 힉소스인들의 행동방 식을 터득하기에 충분했을 것으로 짐작이 간다. 훗날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 땅을 점유할 때 이런 징후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정확한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이나 계보는 성서전승 밖에서는 찾을 수 없다. 특히 족장시 대의 역사는 창세기를 근거로 해서 취급된다. 아브라함은 셈족의 대표자로서 그의 계보는 지역적으로 상부 메소포타미아와 북부 시리아, 아라비아 반도 남부와 남서부 아카바만 지 경과 흥해바다의 해안가 세바인, 그리고 드단인이 흩어져 사는 북서 아라비아, 에서와 관련 된 팔레스틴 남부와 남동쪽, 아브라함의 조카롯의 후손 모압과 암몬인의 땅 동부 요르단 (창 19, 30-38 참고), 그리고 서부 팔레스틴 등의 광팔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다. 개별적으로 나열하자면 다음과 같다:
위의 지 파계보는 매우 인위적이다. 이스라엘 계보와 그 주변지역은 실제적으로 접촉하기 힙들고 비현실적으로 구성된 것이요, 더군다나 이것은 후대의 지 정학적인 정치경험에서 산 출된 부가믈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상부 메소포타미아의 하갈 주민들이 남쪽 크투라와 이스라엘과의 접촉은 블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광대한 메소포타미아-시리아-아라비아 와 흥해바다 해안가와 괄레스틴 남부지역-동부 요르단 서부 팔레스틴 지역은 인종적-지리 적인 관계에서보다는 지정학적인 관계에서 창세기 전승의 계보와 관련된다. 따라서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야곱이 레아, 라헬, 실바와 빌하 본처 둘과 후처 둘 4부인을 통해서 얻은 12아들들을 이스라엘의 지파로 분류해서 본다(창 29, 13-30, 24). 전승사적으로 야곱의 전 승이 가장 오래된 것이라 해도, 12지파의 아들들의 계보는 훗날 핀집된 아브라함과 이삭 전승으로 소급되면서 전체적인 족장전승을 제시한다. 이스라엘 민족은 인류학적인 의미보 다는 팔레스틴 성소(聖所)에서 그들의 하나님을 만난 계시 체험자라는 관점에서 다루어진 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본질적으로 [민족, 고이 goy] 가 아니라, [암, 'am] 이라는 개념으 로 파악되는 특수한 혈연 공동체이다. 이스라엘 부류가 팔레스틴에 들어와 살면서 정착과정을 밟을 때, 그들은 처음에는 도시 주변과 산간지역에서 거류민으로 생활하였다. 그들은 땅(영토)이 없고, 왕이 없으며, 성문 법이 없었다. 그들은 유목민적인 장막촌에서 공동 연대의식을 가지고 생활하였으며, 동료 가운데서 제 일인자-연장자의 권유와 설득을 통해서 질서를 지켰고, 강권적인 명령이나 지 배보다는 인간-인격을 존증히 여기는 공동생활과 자유의식에 투철하였다. 그들이 사는 땅 은 하나님에게 예배드리는 땅으로서 하나님의 합법성을 얻어야 하는 땅이요, 왕과 법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서 계시받은 자의 지도력과 상응하는 것이었다. 특히 북부계열에서 남쪽으로 내려왔던 족장시대에는 정치보다는 종교공동체 의식이 더 지배적이 었으나, 나증 에 모세와 출애굽 부류가 남쪽에서 북부로 쳐올라 왔을 때는 족장의 기존 종교의식이 야웨 종교로 확대되었으며, 정치의식이 새로운 요소로서 작용하여, 그것이 종교와 결합되었다. 따라서 히브리인들의 역사의식이 정적인 종교를 개혁하고 팔레스틴을 점유하게 된다. 이런 족장종교는 그러나 계속해서 민족요소와 혈통의식을 보존하게 하였으며, 출애굽의 역사종 교는 하나의 후기적인 보층이 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모세가 마지막 족장으로서 그가 넘겨 받았던 족장종교에다가 하나님의 법의지를 확대시켜, 시내산에서의 이스라엘 하나님과 이 스라엘 민족이 그의 계약백성으로서 제의 공동체를 형성케 하였다.[12](출 3장; 19,23 참고) 이런 계시사건 배후를 종교사적으로 고찰하면, 원래 하나님의 계명은 미디안 사람들이 광 야에서 신봉하고 있던 미디안 산신(山神, Berggott) 의 법의지(法意志)와일치하는 것이요, 그런데서의 계시적인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과 같은 본래 조상신앙들 은 가나안적인 요소가 있었을 뿐, 어떤 고정된 제의적인 제도나 윤리적인 계율-계명이 결 핍되었기 때문이다. 시 대적으로 조상신들과 야웨신의 본질적인 차이가 모세에게서는 동일 한 신앙으로 해명되는 데서 족장종교가 야웨종교로 흡수된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 서 우리는 야웨 신앙 속에 두 개의 동인(動因)을 가진다. 반복해서 강조하자면 이스라엘 [씨족의 혈통]과 역사적인 힘을 가진 [야웨의 신앙]이다(출 3, 6-14 참고). 이것이 일반 인류 학적인 의미의 민족(Goy) 과 야웨백성의 혈통의식에 근거한 암( 'am) 의 차이다. [암, 'am] 의 지도자는 계시적인 종교의 체험자, 제단의 설럽자 그리고 영적인 지도자의 3기능을 한 인격에 통합시켰다. 이들은 야웨신앙에서 계명 을법과 윤리의 규정을 보층하여 역사를 의 식하며, 하나님이 인도하는 역사를 걸어 나갔다. 그들은 땅과 후손의 약속을 받기 위해서 출애굽했고, 광야진행 과정에서는 가나안 땅을 들어가기 위해서 종교적-정신적인 고행을 수행하면서 야성적인 생활에 길들여져야만 했다. 이것이 [암]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개 념이다. [암]의 집단은 동부 요르단에서 장막을 증심으로 지파조직과 야영생활을 하면서 영토점유를 계획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이웃 민족과 도시국가에 들어와서 그들의 시민이 되겠다는 서약이나 의존방식이 없었으며, 오히려 기존 원주민과는 다른 이질적인 요소, 시 대의 새기운 야웨의 신앙을 가지고 그들과 대결관계에 있었다. 그들은 때로는 평화적-지략 적으로, 때로는 전투적인 수단과 내부 혼란작전을 써서 땅을 차지하기 시 작하였다. 이런 땅 의 점유는 [식민화]나 [정복]이말 표현으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집단은 기존영토나 왕권적인 제도 없이 원주민들과 섞여 살면서 땅을 점유하였기 때문이다.[13] 가 나안 땅과 관련된 이스라엘인들의 [정복]이란 표현은 전용된 의미에서 전투자 야웨가 이스 라엘인들 앞에서 싸우신다는 구속사적인 맥 락에서나 가능할 뿐이다. [10] Clements, [Goy] Theologisches Worterbuch Zum Alten Testament hrsg. G.J. Botterwock und H. Ringgren, Bd I. 1973, Sp. 965-966: [고이]가 정치적 혹은 인종적인 관점에서 고찰된 민 족이요, 영토적인 소속성이라면, [암]은 혈연 가족이나 공동적인 혈통을 표시한다. 이스라엘 주변 강대국과 민족들은 이미 주전 3000-2000년경부터 역사를 서술하였으나, 이스라엘인들에게는 주전 1000년 다윗통치때까지는 역사기록이 별로 없다. 물론 극히 적은 분량이 단편적으로 사사시대의 기록-예를 들면 삿 9장, 아비멜렉 이야기와 요담우화-이 있지만, 그것은 논외의 것이다. 그러나 그 대신 이스라엘인은 왕국 형성시기 이전의 과거의 신앙경험에서 사실-사건을 해석하고, 설교형태를 반복 재연하고 있다. 이런 네용이 구약성 서에서는 [전통]이란 용어로 블리운다. 그런 전통은 유일회적인 사건의 신앙경험이 처음에 는 그 현장과 결부된 세대 또는 일부 사람들에게서 발생되었지만, 나중에는 후세대와 전체 적인 민족의 공동경험으로 수용된 것이다. 이런 전통은 시대적으로 구분될 수 있으며, 전달 방법은 구전형식이나 또는 이방문학의 평행문과 일치하는 표현과 서술로써 족장시대의 역 사와 풍습, 출애굽시기의 국제적인 정치상황과 관련된 출애굽 사건, 광야에서의 시내사건과 영토점유 사건에서 경험된 신 앙-신학적인 성찰과 해석들이다. 이런 전통은 다양한 사건을 해석하는 텍스트에 나타나며, 두 개 이상의 전승에 의해서 전달되고 있다. 전퉁들은 그의 형성에 있어서 적어도 네 가지 영역에서 가능하다 ①전통화된 내용이 합법성-정당성을 가질 때, 그것은 전통으로 인정된다(예 : 족장전통 창 12, 7-9; 28, 10-22; 신 6,10 등), ②예언자 학단이 하나님 행위에 대해서 회고하는 경우에 그것은 전통이 된다 (삿 6,13; 렘 2, 1-8; 호 11, 1-7; 암 2, 9-12), ③일반세속-종교영역에서 교양적인 지혜, 인 간의 축적된 경험적인 지혜가 전통이 된다(욥 14, 1-2.6; 시 103, 15-17), ④역사적으로 위 대한 행동과 정신적인 영향을 끼친 이들에 대한 내용이 전통이 된다(모세-, 다윗-, 예언 자 전통들). 이상 네 가지 영역에서 고찰된 전통들 가운데 ①과 ②는 왕국형성 이전 구속사 시대에 속하는 것이요-H. Donner에 의하면 이른바 고전적인 구원사 시대-, 종교 지도자 모세와 함께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통치하시던 시대라면, ③과 ④는 왕국형성 이후 하 나님의 주권통치가 세속의 왕국으로 이양되어 인간통치가 있었던 시대로 구별된다. 이런 전통들은 역사 속에서, 말하자면 주전 8세기 증엽 앗수르가 서남쪽 약소국을 향하여 그의 팽 창정치를 3단계로 수행하였을 때, 시온전통을 제치고 사용된 것이다. 예언자들은 다윗왕 조의 붕괴를 눈 앞에 보고, 인간왕권보다는 하나님 주권통치 아래서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 를 향해 회개를 촉구하는 데 쓰였다. 이런 의미에서 전통의 핵심은 하나님 통치와 하나님 공동체의 인격관계이다. 왕국형성시기 이전에 형성된 고전 구원시대의 전통들이 왕국시대의 남북동족들간의 반목 과 위협, 그리고 주변 강대국의 위협 아래서 설교되었으며, 민족이 공유하는 민족의식과 역사의 방향, 그리고 남북분단을 극복하려는 예언자적인 제시를 주목할 수 있다. 특히 신명 기적 역사가들(Deuteronomisten)이 포로기 동안 예언자의 전통을 가지고 왕국시대의 왕들 을 평가한 것에서 전통의 핵심은 지상나라의 힘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통치와 하나님 의 율법과 뜻을 올바르게 파악하는 자세의 가르침이라는 데에 있다. 신명기적 역사가의 설 교는 결코 통일을 위한 정치적인 대안이나, 사회개혁 또는 민중운동을 위한 이론을 체계화 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다만 하나님의 뜻을 전심으로 순종하는 생활을 본질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런 계명의 순종에 하나님 행위의 우주적인 목적이 있으며, 다른 이방민족들까지도 율법(=하나님 뜻의 계시)을 순종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데서 하나님의 주권통치가 실현 되고, 우주적인 통일이 이루어진다. [14] W. Richter, Exegese als Literaturwissenschaft, 1971, S. 152-153. 158에서 리히터는 "전통 은 유형의 측면과는 구별된다 유형비평이 형식상 비슷한 구조의 모범에 대해서 전심한 다면, 전통은 현재일 때 본문의 전역사(Vorgeschichte 를 밝혀 준다. 전통의 견해는 각 본문에서 착수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각 본문이 전통을 가지고 있다고 전제할 수는 없다. 전통들은 규칙적으로 내용에서부터 평가된다는 사실이 고찰된다; 전통은 증대한 역사적 또는 정신사적인 문제들을 가져오는 결과들을 화증할 수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족장들의 전통의 유래, 모세, 시내, 성전전통, 제사장의 전역사, 예언자와 레위인의 전역 사에 관한 전통의 유래이다"로 정의하고 있다. 이와 비슷한 견해는 H.Donner, Geschichte des Volkes Israel und seiner Nachbarn in Grundziigen, Teil, 1984, S. 72-73을 참고. R. Rendtorff, Litererkritik und Trachitionsgeschichte : Evih 27(1967), 138-153을 참 고, 특히 S.148에서 "전통은 현재 본문 안에서" 다루어짐을 진술하였다 사울의 국가가 형성된 이후 주전 1000 년경부터 다윗의 인 격연합(Personalunion, 계약 연 방제, 군합국(君合國) 형태의 통일국가는 고전 구원시기의 전통을 밀어내고 시온전통, 다윗 전통과 선택전통을 형성했다. 전자의 전통들이 [하나님 주권통치(Gottesherrschaft)]에 근 거를 둔 것이라면 후자는 세속왕국의 통치에 제한된 하나님의 대리자로 차원을 낮게 했던 전통에 속한다. 시온-다윗전통은 통일요인과 함께 모순된 분얼요인이 있기 때문에, 정치적 으로 북이스라엘은 이런 전통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했으며, 북왕국 예언자 엘리야 같은 이 는 언급조차 안 하고 있다. 또 남왕국 예언자들이나 신명기적인 역사가들조차도 다윗과 그 의 왕들의 예루살렘 성전과의 관계에서만 시온전통과 다윗전통을 언급할 뿐, [국가통일]은 예언자들이나 신명기적인 역사가들에게는 저차원적인 것이요, 정치적인 타당성에 블과한 것이었다. 오히려 이사야는 계약-법적인 다윗왕국보다는 인격적-개인적인 관계와 변화된 신앙에서 다윗왕국을 이상화(理想化)하였다.[18] 아모스는 남왕국 예언자로서 앗수르의 팽창 정치 위협 아래서 고대의 찬갈했던 다윗왕국의 졸속과 그의 전통을 의심하고, 다윗-시온 전통을 제쳐놓고, 출애굽 광야전통을 설교하기에 이르렀다. 요약하자면 전통은 절대적인 효 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국제 정치적인 역학관계와 국내 정치요인의 변수에 따라 언 제나 상황적인 해석을 가능하게 했으며, 특히 주전 8세기 증엽에 등장했던 예언자들은 정 치적인 영 역에서의 시온-다윗전통보다는 종교적-구원사 노선의 출애굽-광야-시내전통을 취 하여, 인간통치권의 한계상황을 알리고 하나님의 통치와 인간의 변화를 설교하였다. 옛전통 의 실효성(失效性)을 고발하였다. 이스라엘의 전무후무했던 국력을 바탕으로 형성된 전통은 다윗전통이요, 남왕국은 이런 전통에 의존하였으나, 남왕국 예언자들은 이런 전통을 포기하고, 북왕국의 전통들을 민족적 인 차원에서 택하였다. 그래도 우리는 통일국가와 하나의 민족 공동체 형성을 위해 기여했 던 시온전통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시온.다윗전통의 역사적인 배경은 다윗의 6단계 정치 에 있다. B. 분단 이후 정치상황과 통일정책 주전 722 년 이스라앨이 앗수르에게 망하고 주전 587년 유다가 바빌론에게 망할 때까지 이스라엘과 유다의 남북분단은 존속하였다. 여기서 필자는 앗수르가 주전 750년경 신흥세 력으로 등장하기까지 930 -750년 기간의 남북분단 시대를 다루겠다. 주전 930 -750년 근 180년 동안은 고대 중동국가가 시리아와 팔레스틴에 정치적인 영향을 행사하지 못했던 시 기이다. 그러나 유다와 이스라엘은 경쟁관계가 첨예화되어 적 대관계에 있었으며, 그 옆에 시리아-팔레스틴 국가안의 다른 세력들이 점증하는 때였다. 이런 시대의 정치상황은 분단 된 남북에 대해서는 3시대로 분류된다' ①솔로몬 이후 유다와 이스라엘 사이의 경쟁적인 투쟁들, ②다메섹 아랍인들 앞에서 위세 당당했던 오므리왕조의 융성기, ③아랍인들의 국력 신장으로 남북 양국가가 극도로 굴욕을 느끼던 시대요, 그 후 예후왕조는 다메섹이 북부 앗수르 위협에 직면하여 영향을 미치지 뭇했던 동안, 간접적으로 강대국의 보호를 받고 있 던 시대이기도 하다. 앞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되었지만, 팔레스틴 약소민족들은 주변 강대 국이 시리아 팔레스틴에 영향을 행사하지 못했던 정치적인 공백기에 독럽할 수 있었으며, 강대국이 다메섹 아랍인을 견제하는 동안, 팔레스틴은 안정을 구가하면서 국력을 신장시킬 수 있었던 것도 알았다. 그럼에도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은 자체의 힘으로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남북의 적대의식과 민족전쟁으로써 자체의 힘을 소진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B. 분단 이후 정치상황과 통일정책 역사적으로 이스라엘과 유다의 통일을 저해하는 요인은 영토점유 초기부터 나온다. 드보 라의 노래에서 이스라엘이 가나안인들과 전투하였을 때, 그 전투의 참전지파는 6지파에 불 과했다. 그와 반대로 르우벤, 길르앗, 단과 앗세르는 참전하지 않았다. 이런 전쟁과 관련해 서 남부지역의 유다와 시므온 지파는 언급조차 없다. 이스라엘의 지파들은 때때로 자기끼 리 을법준수의 문제를 놓고 반목하여 전투하였다(삿 12.1-6 에브라임 지파와 길르앗의 동족상잔). 예를 들면, 베냐민인들의 부도덕한 죄악을 탄핵하기 위해서 다른 지파들은 베냐 민 지파와의 전투를 불사했다(삿 19-21장 참조). 이런 [반목의 모티브(motiv)]는 나중에 여러 설화를 통해서 이야기식으로 설교되었지만 그것은 얼마만큼의 영향과 설득력이 있었 을까?(예 요셉의 이야기와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에 반영된 화해의 동기들). 더 나아가서 남과 북의 우월감과 주도권 쟁취를 위해서 남부는 다윗의 영응설화를 편집했으며 언제나 다윗의 승리만을 고취시켰다. 그와 반대로 사울은 어두운 가운데 패색이 짙게 묘사되었다.[19] 남부전승과 직면했던 증부지파는 여호수아라는 인물을 가나안 영토 점유를 위해 전 승에 끌어들여, 그의 공적을 편 집하였다. 남북 분단 후 여로보암은 예루살렘 성전의 위치를 약화시키고, 북의 국가성소의 합법성을 위해 야곱전통과 벧엘의 성소전설을 편집하였다(창 28장 참고). 일련의 이런 사화와 전설은 지파의 우월성과 성소의 합법성을 위해 작성되었 지만, 민족의 화해와 사랑 또는 피차 인정의 모티브보다는, 반목의 모티브를 두드러지게 했 으며, 동시에 남북의 자의식, 지파소속 의식, 그리고 정치적인 우월감에서 벗어나지 못하였 다. 따라서 우리는 남북의 제왕들이 남북통일의 명제를 걸고 통일을 성취하려고 했던 노력 들을 세 가지 유형-전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1)주도권 쟁탈전과 교만-우월감, 2)질투, 갈 등과 자멸행위,3)이적행위의 외교전,형제민족에 대한 배신행위-불신 등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통일정책에 나타난 각인된 증후군들(die gepragte Syndrome)은 남북왕 조의 제왕들의 통일정책에 대한 시도들에서 밝혀진다. 제왕들은 남북의 통일을 시도하는 군주이었으나, 남북의 동족상잔을 야기시켰던 장본인이요, 때로는 남북간의 평화를 실현시 키는 실행자요, 마지막으로는 남북관계를 외국힘에 의존하여 상대방을 공격하는 자로서 나 타났다. 그러나 그런 정치적인 행위에 대해서 동조하는 파당적인 예언자 또는 비판적인 예 언올 선포하는 심판 예언자들의 등장이 주목할 만하다. 파당적인 예 언자들은 덜 신학적인 과도기적인 예언자[20] (선지자)인데 반하여, 고전적인 예언자[21], 이른바 문서 예언자[22]는 심판 예언자 또는 참된 단독자로 분류된다. 후자에 속한 예언자들은 정치적인 통일보다는 하 나님의 전권(Vollmacht Gottes)과 하나님의 통치(Gottesherrschaft)를 선포하여 백성들이 죄에서 떠나 회개할 것과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라는 권면을 역설하였다. 그러므로써 제왕 들의 통일정책과 예언자들의 하나님 주권통치는 서로 화합할 수 없는 평행선을 달렸으며, 처음부터 이원화(二元化)되어 있다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 타당하다. [19] 상게서, S. 238-239를 참고. 더 나아가서 동저자, Geschichte Israels 1982. S, S. 8S을 보라. B. 분단 이후 정치상황과 통일정책 2. 남북의 정책대결 이 단락에서는 다윗왕을 비릇하여 남북분단의 장본인들과 그 후의 유다와 이스라엘의 왕 들이 통일을 겨냥하면서, 적대관계 또는 상호 협조체제를 모색하면서 세력의 우열을 겨루 었던 예들을 다루겠다. 통일왕국과 남북분단의 왕들 가운데 11왕들을 택하여 남북 정치의 긴 장, 대 결, 그리고 혐 력행위를 살펴보겠다. 1) 다윗의 통일왕국 2)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3) 나답 4) 아사(남왕국, 주전 910-870년)와 베사(북왕국, 주전 909-886년) 5) 오므리(왕조, 주전 885 -874년) 6) 아합(묵이스라엘, 주전 874-853년)과 여호사밧(남유다, 주전 869-849년) 7) 요람(북이스라앨, 주전 853-842년)과 여호사밧 8) 예후(왕조)(주전 841-752년) 9) 요아스(북이스라엘, 주전 798-782) 와 아마샤(유다, 주전 796-768) 10) 여로보암 Ⅱ세(주전 782-753년) 11) 아사랴(유다왕, 웃시아로도 블리움, 주전 768-740년) C. 한국사의 두 노선 이스라엘들과 흡사하게 한국사도 제국적인 역사시대와 고난의 역사로 이루어졌다. 그러 나 한국의 고대사는 [삼정국가(三鼎國家)]라는 구조 속에서 [통일]보다는 [분단모티브]로 특징지어지며, 그 후 신라 고려 조선조가 한반도 영역에 통일영토를 고정시켰으나 강대국 에게 조공을 바치거나 지배당하였던 민족의 수난사로 특징지어 진다. 이런 역사들온 두 가 지 서술방법으로 편찬되었다. 한 편은 관찬사적인 역사기술(歷史記述)[26]로써, 그것은 왕실 의 권위, 전제왕권 응호, 지배층에 대한 합리화를 목적한 것이요, 그런 역사는 본질적으로 마키아벨리즘의 잔인성으로 일관하고 있으며, 국가도덕이 결여된 것이다. 다른 한 편은 사 찬사적인 역사서술[27]이 있다. 이런 역사는 인간응호 인간회복 사회계층의 평등권 및 주권 국가의 확립을 목적하고 있다. 이런 노선은 한더(恨)의 역사요 민중봉기의 역사이다. 그러나 우리가 국민적으로 읽어야 했던 것은 사찬사가 아니라, 관찬사였다. 우리가 이런 역사를 배 우며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동안, 우리에게는 민중의 저항은 '반역적'인 것으로 보였으며, 지배자의 힘만이 '신성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국제감각이나 역 사의식을 망각하게 되었다. 이런 의식 때문에 기독교가 전파되고 구약성서가 설교되어도, 우리는 역사적인 정황 속에 나타난 사건들을 영화(靈化) 시키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런 태도 를 '신앙적'이라고 정당화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역사인식을 가지고 있다. 이런 역사인식은 사찬사적인 역사기술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이런 역사기술은 지배계급에 의해서 억압-착춰만 당하였던 민증-민족의 저 항을 전해 주고 있다. 특히 그의 역사인식은 한반도 주변의 국제정세와 정변, 그리고 망국 의 위협 아래에서의 위 기의식 이요, 국가 사회적으로 전통화된 고정관념과 일정한 강대국에 의존했던 예속성에서 벗어나 다른 새로운 가치를 지닌 사상-정신운동이다. 예를 들면, 1198년 만적의 난 후에 1231년 약 30년 후에 이방 몽고의 침입의 역사이다. 그 당시 약 20만명이 포로가 되었으며, 수많은 회생자가 있었다. 이런 민족적인 수난과 비극의 경험은 일연(一然, 1206-1289)의 삼국유사에 실려 있디 이 작품은 고려의 국민적인 자각과 의식을 반영한다. 그것은 인간회복과 백성의 존중에 비 증을 둔 역사서이다. 이와 비슷한 경험은 그 후로도 계속된다. 16세기 정여립이 깊이 잠든 그 당시 지배계급의 안일무사주의에 대해 반주자학적인 사상을 외쳤으며, 민권사상을 부르 짖었다. 그런 운동은 지배자에 의해서 거절당하였다. 결국 16-17세기의 임진왜란과 병자 호갈은 잠든 역사와 잘못된 통치의 인과응보였다. 이런 국제적인 전쟁을 계기로 인해서 고 정화된 유교적인 가치 체계가 무너졌으며, 실학사상이 새롭게 대두되었다. 특히 안정복은 동사강목을 저술하여 기존역사인 관찬사적인 역사에 대해 비판을 가하였다. 그 후 외국의 위협은 강성해졌으며,한국의 국력은 급속도로 저하되었다. 1894년 동학혁명은 우리의 주권통치의 유지를 목적하고 국정쇄신을 외켰으나, 1910년 전쟁도 못 해 보고 개성항복하였다 이런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신채호는 민족 주체성과 자유하는 인간으로서 '나'의 역사를 제창하였다. 그는 역사상에 있던 민갈 민증봉기를 과감 하게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던 선구자였다. 이런 차원에서 [역사의 주체자]는 [자유하는 인 간-민증]이 되는 가능성이 제시된다. 여기에 민족공동체 의식이 있으며, 통일사상의 원천 이 있다. 한국의 민증은 정부의 억압과 부정 부패를 어느 선까지는 인내하면서 지켜본다. 그러나 그것이 위험수위를 넘을 때는 노도처럼 뚝을 무너뜨리고 자유-민권운동을 전개하여 왔다. 그럼에도 이런 민중운동은 결코 승리하지 못하고 관권에 의해서 진압되었으며 무수한 희생 제물로 자신들을 바쳐야 했던 역사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한(恨)의 역사이다. 이런 한의 역사는 두 가지 양상으로 표출되곤 하였다. 하나는 권모술수로 의인들을 회생시키 면서, 정 권을 유지하는 마키아벨리즘적인 무단정치요, 다른 하나는 이방 강대국의 개입으로 인한 조공국이거나 강대국에 예속 병탐되는 망국사(亡國史)였다. 이런 좌절의 역사 가운데서도 민중은 국가의 파수꾼 또는 감시자들로서 회생을 무릅쓰고 저항을 계속하고 있다. 따라서 지도자들과 지배계층은 이런 민증의 저항을 신적(神的)인 도전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어 느 면 하나님의 진노로 받아들여 [역사의 위기]를 의식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지배자들은 한껏 땅을 관리하는 자들이라면, 백성-민중은 땅을 지키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26] 삼국사기, 고려국사, 고대사, 동국사략, 동국통감. D. 이스라엘 왕권과 하나님의 통치권 이스라엘은 영토와 왕이 없던 시대에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 영토와 후손의 약속을 받 았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고로 그의 역사시초는 민족조상들의 땅의 약속에서 문제가 되었 으며, 구체적으로는 출애굽 주제의 틀 속에서 [해 방]이 역사의 원년이 되었다. 이런 하나님 으로부터의 선택은 본질적으로 이스라엘의 인간적인 자발성을 중지하게 하였다. 고로 출애 굽은 인간의 자기해방(Selbstbefreiung) 이나 해방(Emanzipation)의 과정과는 다르다. 그럼 에도 정치사적으로 몇 가지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정 치-경제적, 그리고 문화적인 강대국에서 탈출해야 했던 히브리 민족들은 역사의 기원 을 [굶주림으로부터의 해 방]이 아니라, [억압에서부터의 자유]에서 시작하였다. 이것이 해 방이요, [새로운 실존]의 삶이었다. 고로 이런 출애굽은 현대적인 의미에서 민주화의 원형 적인 틀이 되었다. 약소국민을 압제하는 인재(人災)는 이스라엘 편을 위해 싸우신 야웨의 10가지 재앙이란 천재(天災)로써 심판을 받게 되지만, 에집트 정부는 초기 단계에는 제한 된 종교의 자유(출, 8, 2l), 말하자면 외국의 노동자들의 출국을 허용(출 10, 10-11)한다. 그러다가 중간 단계에서 에집트는 히브리인에게 가족들의 종교.정치적인 자유를 허용하 나, 경제권을 허용하지 않는다(출 10, 24). 그러나 결국 후기단계에서 에집트의 장자들이 죽었을 때, 종교-정치, 그리고 경제적인 자유를 허용한다(출 12, 32). 이와 같이 히브리인들 은 출애굽하기까지 이방의 정치세력 (=무신론자)과의 대질관계에서 대 결 - 조건부 약속과 회유 - 간청 - 약속의 변경 - 참패라는 과정이 숨막히게 전개되었다(출 8, 6-7,8, 15; 14, 5- 9; 14, 26-28 참고). 이런 출애굽 사건 속에서 나타난 종교-정치적인 자유를 위한 투쟁과 경제권을 위한 투쟁이 단계적으로 표출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하나의 민주화의 분수령임을 인식할 수 있다. 히브리인들의 출애굽과 야웨에 의한 선택(Exodus und Erwahlung)은 그 후 가나안 점유 후 지파들의 정세에서 형성되었던 인간 공동체의 속성이나 임시성과 구별된다. 이런 맥락 에서 이스라엘의 시초는 야웨의 주도권에서 결 정되었으며, 따라서 이스라엘의 거룩한 하나 님은 이스라엘을 [거룩한] 민족이 되도록 결정하였다. 출애굽 사건 이후 이스라엘은 야웨 의 통치구역이 되었다(삿 8. 23) "야웨만이 너희를 다스리신다"는 논제가 기본논제 이다. 그럼으로써 이스라엘(인)에게는 인간이 통치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통치자요, 하나님이 통 치 자체이다. 하나님은 해방의 힘 이요, 해방자의 통치(die Herrschaft des Befreiers) 를 수행 하신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왕들이 다스리지 않는다.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는 정치적인 목표와 민족적인 관심이 통치하지 못한다. 야웨가 왕으로서 통치할 뿐이다: "야곱 가운데서 야웨가 땅끝까지 다스리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시 59,4). 이런 야웨는 언제나 국민-민족에게 [현재적으로] 활동 간섭하고, 그들의 보증 이 된다. 야웨는 이스라엘인의 탄원의 상대역이 된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은 자기의 말씀을 야곱(지파)에게 알렸으며, 그의 계명과 율례는 이스라엘에게 알렸다(시 147, 19); 당신은 야곱에게서부터 법과 공의를 만드셨다(시 99,4). 이스라엘이 이런 야웨의 법과 공의를 준 수하는 데서 하나님의 구원의 의지가 유출된다. 그럼으로써 출애굽 사건과 야웨의 계명은 블가분의 관계이며 , [계명]은 [해방사건]의 담보이다. 여기에 이스라엘 민족의 위치가 있 다. 야웨의 통치가 이스라엘에서 [법과 공의]를 관철시킨다면, 모든 이방민족들 가운데서 하나님 민족은 새로운 공동생활의 전위(前衛)가 된다. 이스라엘은 말씀과 계명을 듣고 순 종하면서 갱신 변화되어야 하며, 하나님을 관망하거나 대망하여야 했다(시 115,9; 130,7 참고).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이런 야웨와의 계약이 되는 기본규례와 올법을 수행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기본논제를 현실화시키지 못하였다. 따라서 예언자들은 그들의 과거, 하나님의 광원의 역사를 회상하면서 이스라엘의 [의무] (Verpflichtung)를 인식케 한 다: 하나님이 민족을 출애굽시켰고, 그들이 광야를 통과하였으며, 하나님이 목자처럼 양떼 앞에 계셨다. 그는 거기서부터 이스라엘을 약속된 땅으로 인도하셨다; 이런 하나님의 인도 는 이스라엘이 이방민족 가운데서 [선택됨]을 말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왕 권적인 통치만이 이스라엘에게 유업을 준다. 야웨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천평과 평강을 즐 기게 한다(시 37,11 참고). 이런 하나님의 역사가 이스라엘에게서 성장-번영, 행운과 성공 으로 확장된다. 이런 것은 지상의 역사와 관계될 수 없다. 야웨의 축복은 하나님이 이스리 엘을 해방시키며 구원하는 행위를 전제하는 데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축 복! 이 축복은 인간이 결코 소유할 수 없다. 차지할 수도 없다. 가진 자에게는 과잉된 축복 이 협오와 권태가 된다. 축복은 그런 자에게는 월권, 블손, 그리고 이기적인 자만이 된다. 그러나 축복은 본질적으로 [쌓이는 것],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주고 받음]의 관계 이다. 그런 측복은 감사와 간구-간청으로 지속된다. 축복은 예배 형식상의 미사여귀가 아니 라, 필요함과 곤궁함을 암시하는 생활의 필수적인 표명이요, 축복은 평강과 펑화를 허용한다. 이런 맥닥에서 인간 지평상의 [민족]은 예배하는 [하나님 공동체]로, 인간의 정치적인 계획 속에 든 [통일]정책은 [하나님 주권통치] 영역으로 넘겨진다. 여기에 인간의 자유-평 등성과 믈질의 공정분배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을 준수하는 사회양심이 본질적으로 고찰된다. Ⅲ. 결론 :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공동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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