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기독교 자료

[[기독자료] ]기독교적 관점에서 본 다원주의 사회 문제

작성자넓은가슴|작성시간09.03.11|조회수207 목록 댓글 0

기독교적 관점에서 본 다원주의 사회 문제

1.서론  

현대사회에 있어서 다원주의의 영향 때문에 사회 혹은 문화라는 개념이 모호해져 버렸다. 문회인류학자들에 의해 문화의 상대주의는 어느정도 이해되어 있는 부분이지만 사회라는 개념이나 문화라는 개념 혹은 그 영역 까지도 혼돈을 준 적은 일찍이 역사상에 없었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사회학이라는 학문도 타학문과 마찬가지로 그 시대정신에 영향 받는 바가 크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시대의 정신을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다원주의가 아닐까 한다. 다원주의는 철학 신학의 영역에서부터 시작되어 종교, 정치, 예술, 경제에 까지 그 영햐을 미치면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것의 긍정적인 측면도 없지않아 있지만 그 폐해도 엄청나다 아니할 수없다. 특히 절대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는 심각한 도전이 아닐 수없다

그러므로 이에 본 연구자는 기독교적 관점에서 사회와 문화를 살펴보되 성경적 관점에서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고 다원주의를 비판하려고 한다.

2. 문화의 일반적 정의

‘문화’라는 말은 ‘경작하다’ ‘개간하다’(‘to till’ or ‘cultivate’)라는 뜻의 라틴어 ‘colore’에서 온 말로써 ‘개화된다’(having culture) 또는 ‘문명인이 된다’는 말과 같이 협의로 사용된다.   문화의 개념을 규정함에 있어서 룩마커(H. Rookmaker)는 “문화란 용어는 지적이고 심미적인 탐구들에 제한되어져서는 안된다.   그러한 이중성은 우리의 근대 문명의 부조화의 기초가 되고 있다.   생활은 하나여야 한다.   그리고 문화는 단순히 우리의 자연과 그 자원에 대한 이용뿐만 아니라 생활의 형식과 습관과 제도의 창조이다.   한 농부가 밭을 갈 때 그의 방법들과 도구들은 모두 문화의 부분이다”1)라고말한다.

Kluckhohn은 문화를 “한 백성의 총체적인 삶의 방법이요, 개인이 단체로 부터 얻는 사회적인 유산이요, 삶에 대한 인간의 설계”2)라고정의하며,  문화는 인간과 불가분리의 관계이며 인간의 자발적 영역에서 오는 인간 본연에 심어진 영적 충동에 의하여 산출되는 것이다.3)   문화인류학적(Cultural Anthropology) 정의로는 “문화는 모든 역사적으로 창조된 인간의 삶과 경험의 형태와 시나리오의 통전적인 체계라고 할 수 있는데, 한 사회나 집단의 구성원이 이 체계를 공유한다”4)이며 간결하면서도 일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전적 정의로는 「뉴 브리태니카 백과사전(The New Encycolpaedia Britannica)」 (1977)의 ‘문화’항목으로 “문화란 행위의 일부인 물질적 객체들과 아울러 특별히 인간에게 행해진 행위(begavior)이다.   문화는 언어, 이상, 신념, 습관, 규범, 제도, 도구, 예술 작품 등등으로 구성된다”고 정의하고 있다.

이상의 몇 가지 정의에서 문화는 인간활동의 총체적 과정과 결과로서 자연적이고 원초적인 것을 개량 내지 연단하는 활동이며 인위적이고 이차적 환경이라5) 할수 있다.

3. 문화의 성경적 근거

      a. 문화주체로서의 인간

         1) 인간과 문화적 책임 : 창세기 1,2장

에덴동산에서의 ‘인간의 문화적 책임’은 ‘다스리다’(dominion),6) ‘정복하라’(subdue),7) ‘다스리고 지키라’8)는 것에 표현되어 있다.   여기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는 첫째로 인간이 문화적 책임을 지닌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땅으로부터 만들어졌으며 땅에 대한 특별한 책임을 가지는 ‘문화적 존재’이다.   둘째로 인간의 이 문화적 책임은 하나님의 뜻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는 것은 인간의 모든 삶과 관련이 있는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실존구조 안에서 구체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세째로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바른 반응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문화적 책임을 ‘문화명령’(cultural mandate)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땅에 대한 인간의 의무가 하나님 뜻에 근거한 종교적 의무라는 의미이다.9)

         2) 타락과 인간의 문화사역 : 창세기 3장

창세기 3장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인간의 모습과 그 저버림이 문화사역에 미친 영향이 나타나 있다.   문화적인 존재인 사람에게 미친 이 언약파기의 결과는 심판이다.10)  그러나 두 가지 희망의 표적(sign)이 있는데 첫째는 여자가 ‘모든 산 자의 어미’란 뜻에서 ‘하와’라고 이름지어진 것이며 둘째로 하나님께서 겉옷을 지어 남자와 여자를 입히신 일이다.11)  이것은 죄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이 왜곡되긴 하였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말씀(창 9:6, 약 3:9)은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가 이 땅과 피조물에 대한 청지기직을 감당할 것(창 9:1-3,7)을 기대하시며, 일반은총을 허락하셔서 모든 인간들이 노력을 통해 발명을 하고 능력을 보이고 결실을 보게 하신다.12)  인간은 아직도 인간적인 기능을 발휘할 수 있으며 인류에게 유익이 되는 건설적이고 창의적인 선행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 주는 것이다.13)

         3) 문명과 문화의 시작 : 창세기 4장

4장에서는 인류가 처음에 어떻게 온 땅에 퍼져 나갔는가 하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즉 인간의 문화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관한 풍성한 통찰력을 제공한다.14)  즉 카인은 하나님의 앞을 떠나갔고, 셋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두 계열의 인류와 문화 발전으로부터 우리는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율적으로 문화를 발전시켜 보려고 하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뜻에 따라 문화를 발전시켜 보려는 사람들 간의 지속적인 긴장을 찾아 볼 수 있다.15)

         4) 인간의 부패와 문화의 파멸 : 창세기 6-8장

여기에서는 ‘여호와 앞을 떠나 나간’문화의 건설이 어떤 결과를 맞게 되었는지를 볼 수 있다.   창세기에 나타난 홍수 이야기에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했다고 표현하면서 죄가 인간 전 실존의 구조 속에 아주 깊숙이 침투했음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무시함으로써 인간에게 닥쳐온 이 나쁜 상황에 대한 책임이  인간에게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 죄의 결과로 인간은 자기 파멸적인 역사의 경로를 향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등을 돌리시지 않으신다.   바로 거기서 다시 시작하시며 새 창조하시기를 준비하셔서 인간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주는 것이다.16)

         5) 인간의 문화적 책임의 갱신 : 창세기 9-11장

인간은 다시금 “생육하여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창 9:1)는 명령을 받게 된다.   여기에 모든 피조물이 “매우 좋았더라”(창 1:31)하는 처음의 ‘가치판단’은 생략되었다.   이미 창조의 질서(Hamony of creation)가 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반역과 스스로를 즐겁게하려는 인간의 욕망은 이 새로운 시작에서도 그의 본질적인 성향으로 남아 있게 된다.17)  결국 인간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문화를 발전시킬 수 없음을 보여준다.  단지 이 세상에 희망을 가져다 주는 하나님의 백성인 셋(지금은 셈)의 계열을 통해서만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18) 

      b. 성경에서 계시하는 문화

성경에서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그 계시를 듣는 사람 자신의 문화를 통해서 주어졌다.19)

신약성경의 언어와 사고형태는 유대적, 헬라적 문화에 깊이 물들어 있고, 바울에게도 또한 희랍철학의 어휘로부터 뽑아낸 것이 있다.   그러나 성경기자들이 자신들의 문화적 배경으로부터 단어와 비유들을 빌려서 창조적으로 사용하는 과정은 성경에 의해 인도되었으므로, 성경기자들은 그릇되거나 악한 의미들은 씻어내고 진리와 선을  전달하는 매체로 변형시켰다.20)

4. 그리스도와 문화

하나님과 문화와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이 문화를 창조하는 인간을 지으셨기에, 그에게 문화가 전혀 무관한 것일 수 없고, 무책임할 수도 없다.  하나님을 문화에 초월하신 분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은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 인간의 문화를 매개체로 삼는 사실을 볼 때, 문화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의 매개체가 된다.   그렇다고 해서 초월자이신 그 분을 인간 문화에 속박시키는 것도 불가할 것이다.

그리스도와 문화와의 관계21)에 이어서 H. Richard Niebuhr는 다음과 같이 견해를 말하고 있다. 


        a. 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Christ Against Culture)

이것은 하나님은 문화를 반대한다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전적인 권위를 단호히 긍정하는 것과 문화에 대한 충성의 요구를 단호히 거부하는 것이다.22)  타문화를 거부하는 것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지 말라......”23)고  성경 말씀에 입각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세상과 문화를 동일시하고 있다.   그리고 복음 또는 문화의 양자 택일이 강조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세상 가운데서 양자택일을 말하고 있다.24)

그러나 신약의 세상이라는 “kosmos”라는 말은 악의 세력에 감염된 특수한 문화의 어떤 면을 언급함이지, 결코 전체문화를 말함은 아닌 것이다.  즉, 하나님보다 문화적인 삶의 원리에 고착되는 것을 세상을 사랑함이라 할 수 있고, 그것을 버려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위하여 문화를 사용하고 그에게 더 가까이 나아간다면 문화를 송두리째 버릴 필요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문화의 종목을 그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해야 할 것이다.25) 

        b. 문화 안의 그리스도(Christ in Culture)

이 주장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문화를 해석하는데 문화 안에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들은 그리스도의 사업과 인격에 가장 일치되는 것이라고 설명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문화를 통하여 그리스도는 이해하는데 그리스도의 교훈과 행동, 그리고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 등에서 문명 안에 있는 최선의 것과  일치된다고 보이는 것들을 선택하여  그것을 그리스도와 조화시킨다.26)   여기서 그리스도는 “인간문화의 최고의 개화”이며 “휴메니티의 교육가”가 된다.   즉 하나님이 인간의 자기형상대로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자기들의 형상대로 신을 만들었다고 주장한다.27)

이렇게 되면 하나님을 초월적인데서 상대적인 곳으로 떨어뜨리는 것이 된다.   하나님에 대해서 자신의 방법, 세계관에 의하여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일부분 옳을지 모르나 온전하지는 못한 것이다.28) 


        c. 문화 위에 있는 그리스도(Christ above Culture)

신은 세계를 창조한 후에 인간문화 밖에 초월해 있으면서 인간문화속에 일어나는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견해이다.29)  이러한 견해는 성서에 기록된 인간에 관심을 가지시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을 구원하며 그 문화까지 새롭게 하시겠다고 하시는 하나님과는 너무 거리가 멀며,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한 성서의 증언과도 거리가 멀다. 

        d. 문화와 역설관계에 있는 그리스도

             (Christ and Culture in Paradox)

니버의 신과 문화사이의 관계개념은 “신은 문화를 초월한 존재”로 보며 또한 ”그러나 신은 문화를 신과 인간과의 상호관계의 매개체로 사용하고 있는 분“으로 보고 있다.30)  이 견해는 그리스도나 문화가 다같이 순종되어야 할 권위이며, 믿는 자는 두가지의 원리를 함께 존중해야 함으로 긴장 가운데 처한다는 것이다.31) 

        e. 문화의 변혁자이신 그리스도

           (christ and Transformer of culture)

이 견해는 문화란 타락한 인간의 산물이므로 분명히 죄성을 나타내며, 그리스도로 인간이 속량받을 때, 문화 역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도록 그리고 그의 뜻을 실현시키겠끔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문화를 통하여 역사하신다.   문화는 통로(Vehicle)로 서 인간에 의해서만 아니고 하나님, 그리고 사탄에 의해서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문화의 형태를 가지고 기독교적인 것과 비 기독교적인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거룩한 형태가 따로 없는 것이다.   그것을 기독교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면 되는 것이다.32) 


  5. 종교다원주의와 사회 


  종교는 모든 문화의 토대가 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언어가 없는 민족은 있어도 종교가 없는 민족은 지구상에 없다는 것은 모든 문화는 종교적 토대위에 형성되며 모든 문화는 종교적 성향을 띠고있다는 말이 된다. 그러한 면이 오늘날 다원주의라는 시대정신으로 나타났다


a.종교다원주의.

일반학자들과 신학자들은 각각 다른 근거에서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한다.   일반적인 입장이 기초하고 있는 토대는 세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모든 종교는 상대적이라는 신념이다.   기독교 절대주의를 거부하고 종교의 상대주의를 주장한 19세기 종교사학파의 트릴치(Ernst Troeltsch)가 이를 대변한다.   그에 따르면, 모든 종교는 상대적이며 제각기 진리의 요소를 가지고 있음으로 어느종교나 다른 종교보다 더 훌륭하다고 말할 수는없다.  동양인에게는 불교와 힌두교가 동일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계시가 모든 사람, 모든 종교에 주어졌다는 것이 트릴치의 근본 신념이었다.33)

  둘째, 모든 종교는 동일하다는 신념이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신다면 당연히 시간과 공간적으로 다른 문화와 상황속에서 이일을 수행하실 것이기 때문에, 깊이에서 보면 모든 종교는 동일하며 길은 다르더라도 동일한 목표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간의 차이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우연적인것, 문화적인것, 시대적인것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한다.   그리고 모든 문화성과 우연성 배후에는 하나의 신, 즉 공동의 본질이 있다고 주장한다.   영국의 역사학자 토인비, 스미스 등이 이를 대변한다.34)

  셋째, 모든종교는 공동의 심리학적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신념이다.   이것은 모든 종교가 각 개인에게 공동으로 존재하는 심리학적과정으로 부터 시작된다는 견해이다.  하나님의 계시를 무의식 속에 기원을 가진 심리학적 사건으로 취급하여 그리스도의 유일회성과 절대성을 부정한다.   이것은 종교를 심리학으로 환원시키려는 일부 현대 심리학자들의 시도로써 스위스의 심리학자 칼 융(Carl Gustav Jung)이 그 대표자이다.35)

  종교의 다양성을 주장하는 이 일반적인 견해는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과 일치하지 않는다.   모든 종교를 상대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이류 역사상 하나님의 유일회적인 성육신이요 전 인류의 구원자라고 믿는 기독교의 핵심적인 진리와 모순된다.   모든 종교가 공동의 본질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은 기독교의 본질인 예수그리스도아네 주어지 계시의 유일회성과 규범성 및 궁극성에 대한 신앙을 포기하거나 부정한 것이다.   그리고 모든 종교가 공동의 심리적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융의 주장은 종교를 지나치게 부관주의적으로 해석한 것이며 예수의 유일회서을 부정하고 단지 여러 구원자 중 하나로 간주했다.

  이와 같은 비기독교적이며 비성서적인 요소에도 불구하고, 종교의 다양성에 대한 상식적인 견해는 일반대주을 비롯하여 자유주의적 성향의 신학자들에게 직접,간접으로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 중에서 가장 극단적인 유형의 종교 다원론을 주장한 개신교신학자는 영국출신의 장로교회목사로 현재 미국 클레마운트 신학대학원 교수로 활동하고 있는 존 힉(John Hick)을 들 수 있다.   그는 다른 종교를 판단하는 규범과 모든 종교의 중심을 그리스도에서 하나님으로 전환하는 “신학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주장했다.   그는 성육신과 그리스도의 신성을 신화로 이해하고, 하나님은 “오직”예수안에서만 만나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참으로” 만나질 수 있다는 식으르 기독교 전통신앙을 재 해석했다.36) 그ꁹ고 세계의 다양한 종교들은 동일한 신을 섬기고 있다는 극단적인 견햬를 제시했다.

  특히(하나님은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 God Has Many Names. 1980)라는 저서의 제목이 시사하듯이, 힉은 세계의 모든 종교들은 다른 신이 아닌, 동일한 신을 예배하며, 그 신은 여러가지 별명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모든 종교의 배후에는 하나의 궁극적 실재가 있으며, 기독교는 그것을 여호와 하나님(God)으로, 유대교는 아도나이(Adonai)로, 모스렘교는 알라(Allah)로, 힌두교는 라마(Rama)날 크리슈나(Krishna)로 부른다.   그러므로 힉은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전통적인 교리로부터 “교회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새로운 주장에로의 일대 전환을 제안했다.37)

  이러한 힉의 견해는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예배현상의 유사성으로 부터한 하나님의 개념을 이끌어 낸 것으로 다른 종교와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었다.38)

  힉 이외에도, 종교적 다원주의에 가까운 인물로 틸리히(Paul Tillich),스미쓰(Wilfred Cantwell Smith), 레이스(Alan Race), 사마르타(Stanley Samartha)등이 있다.   가톨릭 신학자로는 니터(Paul F. Knitter),파니카, 라너,큉을 들 수 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제 2차 비티칸공의회(1965)선언문을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지 못했으면서도 진실로 하나님을 찾는 신도를 포함시키려 함으로써 포괄주의적인 입장을 공시적으로 천명했다.   “어쩔 수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지 못했으면서도 하나님을 진실로 찾고 하나님의 은혜로써 자기 양신의 소리에 귀를 귀울임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고 애쓰는 사람은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선언한 것이다. 

b. 종교적 다원주의의 오류성 


  종교다원주의는 기독교를 유일한 참 종교가 아닌 여러 종교 가운데 하나로 간주한다.   그렇다면 종교 다원주의의 문제점과 결정적인 오류는 무엇인다?

  종교다원주의는 비성서적인 것이 가장 큰 문제점인 동시에 오류이다.   그것은 인도주의적인 관점에서 출발하여 이성적 방법으로 문제 해결을 시도한 끝에 그리스도와 교회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비성서적 결론에 도달했다.  기독교 안에만 구원이 있다면 세셰 인구의 70-80%에 달하는 비 기독교인의 운명은 어떻게 될것인가 하는 인도주의적 관심에서 종교 다원주의가 일어났다.   이것은 한스 큉이나 감신대의 변선환, 홍성수 의 글에서도 입증된다.  큉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비기독교 민족이 서구의 기독교 민족을 수적으로 훨씬 앞질러 각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통계를 생각할때도 당신들은 여전히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까?39) 라ꁹ 반문했다.   변교수는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면 인류의 대다수는 신의 저주를 받고 영원한 지옥형벌을 받아야 함으로, 기독교인만 구원 받는다는 기독교 전통적인 견해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큉의 주장을 너무나도 자명하다고 했다.   홍교수는 ”우리의 신은 제 자식만 사랑하는 편협한 인간의 마음을 가진 신인가?  아니면 악인에게도 비를 내리고 자비를 베푸는 가없는 은총의 신인가?... 하나님께서 만일 무신론자나 이교도까지 사랑한다고 하면 우리는 당연히 그들을 포용하고 사랑해야 한다.“

  이와 같이 종교 다원주의자들은 인도주의적인 관점으로부터 기독교와 다른 종교 문제에 접근하여 합리적으로 구원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의 진리에 배치될 뿐만 아니라 성경을 오도하는 것이다.

  첫째, 모든 종교의 신이 이름만 다를 뿐이지 실제로 동일한 신이라는 주장은 비성서적이다.   여호와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곤 한 성경말씀이 이를 입증한다(출 20:3, 23:24-25, 시 96:5,사 44:6-8).

  둘째, 종교다원주의는 하나님의 계시 대신에 인간의 이성과 인도주의에 근거했다.  인간의 구원문제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다원주의자들은 이를 합리적으로 해결하려 한 것이다.   성경은 세상적인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명시하고 있다(고전 1:21).

  셋째, 종교다원주의는 영생에 이르는 유일한 길과 좁은 문을 넓히려는 인간적인 시도이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영생에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며(요 14:6),“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고 하였다.   따라서 종교다원주의는 성경의 진리를 거부하고 이를 다른 복음으로 대치하려는 인간적인 노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6.다원화시대의 우리의 자세 

오늘 우리는 포스트 모더니즘(Post - Modernism)을 타고 들어오는 다원화 시대에 살고 있다.   교회에까지도 혼합주의와 다원주의가 물밀듯이 들어오고있다.   이러한 싯점에서 과연 우리는 어떠한 자세를 취해야 하겠는가?

  오늘의 한국의 신학 현실도 목회 현실 못지 않게 신학 아닌 신학이 난무하고 있을 뿐 아니라 무분별한 수입신학의 사조에 얼마나 교회가 오염되고 있는가?  오늘 20세기 후반 미국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난 포스트모더니즘(Post- Modernism)을 타고 다원주의(Pluralism)가 물밀듯이 밀려오고 있다.   그 현상은 영국, 불란서, 남미 그리고 제 3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분야에 있어서도 건축양식, 문학, 예술, 미술, 음악, 연극, 영화, 무용 등 문화 전반에 퍼지고 있다.   그리고 그 저변에 흐르는 철학이나 비평양식들은 우리 삶의 방식에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절대 이념의 와해, 개성의 중시, 논리의 다원화, 다국적 기업 소수 민족 운동, 여성운동, 소유로부터 탈출 등, 이제 우리는 자칫 잘못하면 성경의 하나님 신앙을 저버리는 배교가 되기 쉽고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종교혼합주의(Sy - Mcretism)에 빠질 수도 있다는 것을 경계해야 된다.   종교다원론 주장자들은 ‘기독교는 기독교로서, 불교는 불교로서 그 독특한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특성을 드러내고 유지할 것을 강조하는 것이지 결코 종교혼합주의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게 권능한 존재가 아니며, 삼손처럼 머리가 깍이지 않는다는 보장도 할 수 없다.

  왜 확실한 길을 두고도 희미한 길을 가야 하는가?  왜 밝고 빛나는 길이 있는데도 어둡고 희미하여 분간할 수 없는 길을 갈려고 하는가?  예수께서 그런 길을 가라고 말씀하셨는가?  목회자는 정신을 차려야 한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일찍이 예언적인 말씀을 하셨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 4:7).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벧전 4:11).  그러면서 또 이렇게 말씀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 4:14)

7.결론

  사회와 문화는 끝임없이 발전한다는 진화론의 영향 때문에 많은 세속학자들은 사회도 발전한다는 가설을 세웠다. 그리고 변증법적 이론의 영향으로 오늘날 종교다원주의의 출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인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적 다원주의와 문화적 상대주의는 다른 것이다. 이는 마치 여성들이 아무리 페미니즘을 외쳐도 여성 그 자체가 바뀔 수없고 부모의 역할과 기능이 다른 그 어떤 것으로도 대치될수 없음과 같다. 즉 세상에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가치혹은 진리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문화적 속성이 후천적인 면이 있지만 또 그것은 생득적인 것이듯이 인간의 모든면에는 이러한 절대적인 가치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독교적 관점에서 사회와 문화를 올바르게 이해해서 세상에 대한 창조와 문화명령을 정당하게 수행해야 한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