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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자료] ]기독교와 문화들

작성자넓은가슴|작성시간09.05.31|조회수60 목록 댓글 0

기독교와 문화들

김 경 재 **신학과 교수/조직신학

1. 동아시아 문화적 토양과 기독교 선교

이 발제의 초점은 동아시아 문화적 토양 속에서 기독교 선교는 어떤 종교-문화신학(theology of religio-cultures)의 관점을 가지고 접근해야 하며, 그러한 새로운 종교문화신학적 관점에서 어떻게 기존의 서구 선교신학의 패러다임이 보다 해석학적이고 성령론적 선교신학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 하는가를 모색하려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동아시아 문화적 토양'이란 지정학적으로는 중국, 한국, 일본, 베트남을 포함한 한자문화권으로서 2,000년 가까이 불교, 유교, 도교, 민족종교 등 위대한 종교문화적 유산을 향유하면서 종교다원사회를 형성하고 있는 문화공동체를 말한다. 인류 문명사회 안에는 다양한 문화와 종교들이 살아 숨쉬고 있고, 각 문화들은 문화를 이루는 핵심적 실체로서 종교들이 문화들 안에서 종교문화의 꽃들을 피어 왔지만, 종교유형학(typology of religion)적으로 보면 세 가지 커다란 흐름이 있어 왔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체로 공감한다.

첫째 흐름은 중근동지역에서 발생한 셈계의 예언자 종교들이다. 이 흐름은 중근동 유목민들의 삶을 모태로 하여 태동된 이른바 아브라함계 종교들로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그것이다. 셈계종교들 사이의 공통요소는 '신앙의 경건성'(piety of belief), 예언자 신앙, 초월적 창조주 신앙, 시간과 역사의식, 정의에 기초한 공동체 윤리 등이다.

둘째 흐름은 인도에서 발생한 신비종교 계통이다. 우파니샤트에서 절정에 도달한 브라마니즘의 베다종교, 마하비라의 창도로 일어난 자이나교, 불교, 그리고 힌두교가 그것이다. 이들 인도계 종교들의 총체적 특징을 신비적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우주의 궁극적 실재와 인간 본성사이에 존재론적 동일성을 강조하며, 만유와 자아의 근원적 일치를 신비적 명상에서 득증하려는 공통된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흐름은 중국에서 발생한 지혜의 종교로서 본질적으로 성인(聖人)을 지향하는 성인의 종교이다. 성인종교(聖人宗敎)의 특징은 인간성의 가능성을 함양하며, 중용을 강조하고, 자연과의 조화 및 일치를 도모하면서 예언가도 아니고 신비가도 아닌 성인을 이상적 인간의 목표로서 흠모하는 종교문화이다.

그런데 동아시아 문화의 특징, 특히 한국 종교문화의 특징은, 자생적인 무교나 동학 등 민족종교를 예외로 하고서라도, 위에서 언급한 세계종교의 세 가지 흐름들의 최종 정류지로서 세 가지 문화가 한국에서 만나 꽃피어 왔다는 사실이다. 그 대표적 종교로서 불교, 유교, 기독교는 한국인의 세계관, 도덕적 가치관과 행태, 예술적 미의식, 사생관, 사회윤리의식, 정치문화 등등에 막강한 영향을 끼쳐왔고 지금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다종교 문명사회 속에서 신학적으로 가장 심각한 문제는 기독교와 타종교와의 바른 관계정립이며, 기독교 복음의 선교과정에서 복음과 동아시아 문화와의 근본적 관계성이 무엇인가를 신학적으로 분명하게 규명하는 일이다. 유럽이나 브라질에서 온 친구들은 대체로 오랫동안 기독교 신앙전통과 그 종교적 문화적 유산속에서 자라왔던 친구들이다. 그러나 동아시아, 특히 선교역사가 대체로 짧은 한국의 선교현장에서 신학적 패러다임전환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며, 기독교와 타종교문화와의 관계정립은 매우 시급하고도 의미있는 과제로서 오늘을 살아가는 신학자들과 뜻있는 평신도들의 '뜨거운 감자'가 되어 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복음은 구체적인 문화적 삶과 정신 속에 육화(肉化)되는 과정 없이는 진정으로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생명의 떡과 생수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양한 문화의 언어, 예술, 전통 속으로 화육되어 들어가면서 복음은 문화를 창조적으로 변혁하고 심판하고 조명 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해석학적 순환' 원리에 따라서, 복음 또한 다양한 색깔로 조명되고 문화적 상황 속에서 재해석되면서 더 풍요로워진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문화란 인간공동체가 몸 위에 걸친 의상같은 것이 아니라, 공동체 몸을 이루는 살이요 피요 혼이기 때문이다. 살아 숨쉬는 문화를 통째로 부정하고 말살하면서 기독교를 '문화이식'(文化移植)시키는 방식으로 전파한다는 단순한 생각은 매우 피상적으로 문화를 단순한 의상쯤으로 생각하는 매우 일차원적 생각이다. 이 글에서 우리는 문화와 문화, 문화를 문화되게 하는 핵심 실체인 종교와 종교와의 만남에서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두려움 없이, 매우 솔직하고 담대하게 직시하고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2. 해석학적 지평융합(hermeneutical fusion of horizons) 과정 및 상보적 직조과정(comple- mental weaving of textiles)으로서 인간의 문화적 삶 인간의 삶이란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나 세 가지 가장 근원적 운동 속에서 영위되어 나간다.
그 첫째는 자기정체성을 지켜가는 '생명의 자기통적 운동'(self-integration movement of life),
그 둘째는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향유하면서 앞으로 전진하려는 '생명의 자기 창조운동' (self-creation movement of life)이며,
셋째로 유한성과 제약성을 초극하고 고양시키려는 '생명의 자기 초월 운동'(self-transcendence movement of life)이다. 그와 같은 생명의 세 가지 근본 운동이 인간생명 현상의 차원에서 창발적으로 꽃피어날 때, 세 운동의 극점에서 각각 도덕적 인격체험현상, 문화창조현상, 종교현상으로 나타난다.

도덕적 인격현상은 생명의 자기통전운동이 최고수준 상태로서 영글어 나타난 현상이다. 문화란 동일한 것을 본능체계 안에서 반복하기를 거부하고 보다 새로운 것을 창조해보려는 생명의 자기창조운동이 인간의식과 자유의지 차원에서 나타난 공동체적 현상이다. 종교란 수평적 평면차원에서 이뤄지는 전진적 창조운동만이 아니라, 보다 높은 차원 특히 거룩성과 불멸성을 추구하는 대각선적 초월운동에서 나타난 생명체험 현상이다. 그런데 인류역사를 뒤돌아보면, 보다 높은 인격적 도덕의식, 문화창조의 꽃피어남, 그리고 영적 우주적 보편종교의 출현은 문명간의 겨룸과 상호 교류를 통한 자기승화과정을 통하여 가능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생물학적으로도 근친교배에 의한 종(種)의 번식발달은 바람직하지 않듯이, 폐쇄적인 닫힌 문명과 그 문명발생을 뒷받침했던 종교는 시간의 흐름이 경과함에 따라 결국 점점 쇠퇴하여 지속적 창조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멸망하거나 굳어져 물화(物化)된 종교문화를 드러내고 만다.

그런데, 서구 선교신학사에서 가장 금기시하고 있는 점은, 비기독교 문화권의 다종교 사회 속에서 기독교 복음을 전파할 때, '혼합주의' (Syncretism)를 경계하라는 것이었다. 그 경고는 옳다. 그러나 혼합주의가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규정하는 합의된 개념 규정없이, 다문화 속에서 기독교 복음선교를 모색하려는 일체의 진지한 문화 종교신학적 노력을 '혼합주의' 공범자 내지 동조자로서 낙인찍는 정통적 보수신학 및 한국 교계의 반지성적 독단주의는 극복되어야 한다.

서구정신사에서 특히 기독교 신학영역에서 '혼합주의'(syncretism)를 매우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해 왔다는 것은 다 인정하는 사실이며, '혼합주의'라는 어휘가 함의하는 의미인즉 특히 기독교 선교역사 과정에서 토착종교나 문화 속에서 기독교 복음의 본질이 흐려지거나 상실되어 기독교의 자기정체성이 위태롭게 되는 현상을 의미하였다.

다른 한편, 선교사들이 지니고 있는 일정한 신학 교리형태, 한마디로 특정시대의 기독교 규범적 신학패러다임을 설정해 놓고, 선교지 문화나 종교를 규범적 신학패러다임 속으로 강제 귀속시키려 할 때, 선교지에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문화적 갈등과 고통이 심했다. 특정 시대상황 속에서 해석되고 형성된 기독교를 복음 그 자체와 구별하지 않고, 역사적 종교형태로서의 기독교를 절대시하면서 피선교지역 주민에게 개종을 강요하거나, 피선교지역 주민들의 주체적 신앙행태를 '혼합주의'라고 규정하는 잘못된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한국 가톨릭 전교시(1784) 로마교황청 당국이 한국인의 조상제사제도를 우상숭배적인 것으로 규정했을 때, 10,000명 가까운 순교자의 피가 흘려져야 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18-19세기 서구 기독교문명이 서구제국주의 식민정책의 물결에 편승하여 아시아 나라들에게 전파되었을 때, 서구신학은 지식사회학적으로나 이념비판적 측면에서 헤겔철학류의 변증법적 역사이해나 진보사관 자체가 당시대 서구인들의 탐욕과 이해관계의 반영결과로 이뤄진 문화제국주의적 선교신학 패러다임이었다는 것을 당시엔 인지하지 못했다.

한국 신학사 속에서 제2바티칸 공의회(1962-1965) 이후, 한국 가톨릭교회의 신학적 패러다임전환은 참신하고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큼 파격적 전환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현대 한국 가톨릭교회의 신학적 패러다임전환을 개신교 근본주의적 보수신학의 관점에서 평가한다면, 오늘날 한국 가톨릭 신학의 '우리신학' 형성시도와 관혼상제례의 토착화 허용, 개신교의 문화종교신학 운동은 모두 신학적 '혼합주의'라고 매도하게 될 것이다.

발제자는 이런 오해투성이로 점철된 '혼합주의'라는 단어를 당분간 폐기 처분하고 사용하지 말 것을 제안한다. 그 대신 현대 정신과학의 중심주제로서 철학적 해석학에서 말하는 삶체험의 '지평융합과정' (Gadamer) 또는 발제자의 표현을 새롭게 제시한다면 진리체험의 '상보적 織造과정'이라는 은유를 사용하자고 제안하려는 것이다.

인간의 삶이란 딜타이가 적절하게 묘사한 것처럼, 특유하고 고유한 가치와 의미를 체험하는 창조적 삶의 과정이요, 체험한 것을 표현하는 행위이며, 표현된 것을 이해하는 과정이다. 삶의 내면적 질을 체험하고, 그 감동과 영향을 표현하고, 표현된 작품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연속동작으로서의 인간적 삶을 우리는 '해석학적 삶'이라 부른다. 인간은 해석학적 존재이며, 그러기에 인간은 역사적 존재요 문화적 존재이다. 이러한 해석학적 존재로서 인간은, 의식을 하든지 안하든지, 일정한 '이해의 지평'을 갖고서 살아간다. 해석학적 이해의 과정을 통해서 인간은 끊임없이 삶의 이해지평이 확대심화 되는 경험을 추구해 가는데, 이러한 해석학적 현실을 일컬어 삶체험의 '지평융합'(Fusion of horizons)이라고 가다머는 은유적으로 말했다.

인간의 기존 이해지평의 구성요인들은 다양하다. 형이상학적 구성요인으로서는 진리를 진리로서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삶 속에서 끊임없이 의미있고 가치있고 아름답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초월경험을 지향하도록 하는 선험적인 '하나님의 자기양여'(Selbst-mitteilung Gottes/ K. Rahner) 또는 '하나님의 인간성'(Menschlichkeit Gottes/ K. Barth)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형이하학적으로는 전이해 곧 기존 이해의 지평을 구성하는 요소로서는 전통이 가르쳐준 세계관, 언어구조, 지질학적 기후풍토, 생산분배 시스템, 종교제의와 신화 등 상징체계가 있을 것이다.

이상의 것들은 분리할 수 없이 어울려져서 자기와 세계를 이해하면서 인간으로 하여금 살아 있다는 자의식을 갖게 한다. '이해지평'이란 매우 그리시아적인 시각적 은유이다. 기독교라고 하는 새로운 종교가 18-19세기에 한국인의 삶 속에 전파되었을 때, 복음을 통하여 한국인은 새로운 진리를 이해하는 지평에 눈이 뜨인 것이다. 내가 기독교에로 개종한다는 것은, 그 신앙적 결단의 과정이야 어떠했든지 간에, 성서를 통해서 보게 된 진리의 지평이 훨씬 넓고 크고 명료해져서 나의 삶에 복음이 결정적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인간의 삶의 체험, 문화적 다양성 체험, 세계관의 만남, 하나님 체험 속에는, 서양의 철학적 해석학자가 말하는 '지평융합'의 개념으로서 쉽게 설명되지 않는 갈등을 우리 동아시아 사람들은 자각하고 있다. '지평융합'의 은유는 동질문화 속에서 살고 있는 다양한 삶의 지평들이 서로 만나고 경험을 나누게 될 때 적절한 은유이다.

그러나 한국인처럼 불교문화, 유교문화, 기독교문화, 도교문화, 민족종교문화 등 서로 다른 세계관적 패러다임을 지닌 종교들이 한 그리스도인의 심령 속에서 합류될 때, 쉽사리 지평융합되지 않고, 다름이 다름으로서, 거리가 거리로서, 차이가 차이로서, 더욱 분명하게 자각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런 경우, 사람들은 두 가지 입장을 택하게 되는데, 그 중 하나를 택하고 다른 것은 모두 버리는 배타적 선택을 하든지(배타주의), 아니면 자기 나름대로 다양한 것들의 우열순위를 부여하면서 기독교를 최고 성취적 종교로 삼고 다른 이전의 종교 속에 있는 선한 요소들을 기독교 안으로 비판적 선별작용을 통해 포용하는 경우이다(포용주의).

그러나, 다양한 문화와 문화, 종교와 종교가 만나고 대화하면서 가질 수 있는 제3의 입장이 있는데, 흔히 다원주의라는 가장 잘못된 이름으로 회자되지만, 나는 그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하여 진리체험의 '상보적 직조과정', 나무와 나무간의 '접목과정'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이 은유는 직조물 공정과 나무 접목 과정을 은유로 삼은 것이다.

터키인들의 카펫융단,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옷감짜기, 티벳불교인들의 숄더백의 다양한 색깔과 무늬, 중국인과 한국인들의 아름다운 무늬있는 실크옷감들을 생각해 보자. 옷감의 직조물은 다양한 색감과 문양과 자료를 가지고 한폭의 옷감을 직조하지만, 거기엔 다름이 다름으로 드러나면서 통일성과 조화와 보색의 색상대비 조화를 통해 한결 더 높은 수준에 도달한 미적 감각을 연출해낸다.

진리체험이란 근원적으로 아름다움의 느낌이다. 그런데 아름답다는 체험은 동질성을 획일적으로 배치한 상태에서보다는, 대조되고 심지어 도저히 조화되지 않는 대극물을 적절한 위상에 배치함으로써 전체적으로 더 온전한 미를 연출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원리는 음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동아시아 문화를 거시적으로 뒤돌아보고 또 앞으로 내어다 볼 때, 동아시아 문화란 한가지 재료를 가지고 단색무늬의 직조물을 짜아가는 그런 단조로운 문화가 아니다.

동아시아문화야말로 세계 어느 문화권에서 경험해 보지 못한 진리체험의 '상보적 직조과정'이 진행되는 역사이며, 유교, 불교, 도교, 이슬람교, 기독교같은 우주적 종교들이 아시아적 민중들의 마음속에 아름다운 무늬를 놓아가며 생명의 옷감을 직조해 가는 과정으로서 동아시아적 문화사는 이해되어야 한다. 흔히 지배적 정치권력이 새로운 국가를 세우고서, 새로운 통치이념으로서 새로운 종교를 내세우면서 이전시대의 지배적 영향을 미치던 종교를 급격히 대치하곤 했지만, 문화를 실질적으로 창조해가고 담지해가는 사람들(중생, 민중, 민초, 백성)의 마음속에는 전(前) 역사의 창조적 과정들이 용해되어 있고 퇴비처럼 문화를 창조해가는 유기질 비료로서 민중들의 마음 밭에 양분으로서 남아 있는 것이다.

선교과정을 설명하는 신학적 관점을 범주화하여 발제자는 세 가지 모델을 제시한 바 있다.

'파종모델'은 피선교지역의 문화와 인간의 마음을, 복음이라는 씨앗이 떨어져 발아하고 성장하는 밭으로 비유하는 발상법이다. 복음이라는 씨앗이 지닌 생명력을 강조하는데 적합하지만, 밭의 기능이 거의 무시될 뿐만 아니라 ,밭에서 자라던 기존의 생명체들을 불태워 버려야 순순한 씨앗의 발아와 성장이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에 문화정복론적 선교신학이 되고 결과적으로 종교간의 만남의 태도로서 배타주의를 택하게 된다.

'효소모델'은 밀가루 반죽 속에 효소가 들어가 변화시키는 은유로서 모델의 기초를 삼는데, 리차드 니버(Richard Niebuhr)의 문화변혁설이 이에 해당한다. 피선교지의 문화-역사적 실재는 일단 긍정되지만 변화의 주체자리에서 제외되고, 창조적 변화의 주체는 복음 또는 기독교일 뿐 피선교지의 모든 생명실재는 변화받아야 되는 피동적 대상으로서만 규정되기 때문에 해석학적 원칙에 위배되는 모델이다. 그러나 이러한 효소모델은 기존의 배타주의를 극복하고 포용주의 또는 성취론의 입장을 지지하기 때문에 최소한 종교다원사회 속에서 타종교들과 갈등이나 종교전쟁같은 분쟁의 소지를 없애면서 선교사역을 가능하게 한다. 대체로 제2차 바티칸 공의 이후 가톨릭 선교신학의 입장이 그러하며, 한국 개신교에서 김재준을 비롯한 진보적 개신교 선교신학의 입장이 그러한 입장이다.

세 번째 모델은 선교과정을 살아 있는 두 나무의 접목과정으로 은유되는 모델이다. '접목과정'의 은유로서 말하자면 동아시아 문명은 살아 있는 하나의 생명나무와 같은 것이며, 본래 대목(臺木)이 접순(接荀)이라고 볼 수 있는 복음의 수용과정과 변화과정에서 상호 공동주체가 된다. 선교과정이란 다른 토양에서 성장하던 이질적 나무를 흙을 묻혀 뿌리째 옮겨놓는 나무의 移植過程이라기 보다는, 피선교지 문화실재를 대목(臺木, stock)으로 비유하고, 복음은 대목에 접목시키는 접순이나 접가지로서 이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문화들의 세계사적 전개과정은 결국 어떤 종교가 생명을 살리고 더 풍성히 하는가의 '진리의 자증력'으로써 어떤 종교의 참됨과 아름다움이 판별되고 걸러지는 과정이다. 다양한 진리체험의 종교들은 더 큰 지평융합과정을 거치면서 보다 아름답고 다양하면서도 통일성을 지녀 궁극적으로는 진리의 님에게 드릴 아름다운 한편의 직조물을 짜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 말은 종교사란, 종교사학파 학자들이 경솔하게 판단했던 것 같은 섣부른 고등종교 저등종교의 구별은 곤란하지만, 어떤 종교가 종교의 모호성과 우상성을 더 분명하게 극복하여 '영과 진리로서 예배하며' '생명을 살리고 더 풍성하게 하는가'의 사실 여부로서 알곡들과 가라지들이 종말의 날 이전에라도 판별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리체험의 '지평융합', '직조과정', '접목과정' 등 그 표현이야 어떻든 간에, 그 과정 속에서 보편적 구원능력의 담지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안에 나타난 계시의 유일성(Uniqueness)은 구원패러다임의 유형적 특성이 다른 문화 속의 사람들에게 의미를 지니는가? 성령의 보편적 창조활동 및 구원활동 안에서 볼 때, 복음의 메시지 자체는 동아시아의 타종교문화와 어떤 관계와 의미를 가지는가? 역사적 단위공동체 속에는 그 단위공동체를 근원적으로 규정하는 어떤 종교적 영성이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그것이 기독교 선교과정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3. 구원패러다임의 유형론적 특징과 예수 그리스도

유일성의 해석문제

동아시아 문화권의 지정학적 중심지에 위치한 한국문화는 정치, 경제, 군사, 스포츠면에서는 작은 나라일지 모르나, 종교문화적 측면에서는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성을 지닌 사회공동체이다. 왜냐하면 서론에서 말한 종교유형학적으로 볼 때, 세계 삼대 종교문화를 대표할 만한 불교문화, 유교문화, 기독교문화가 종교문화 구성요소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 이러한 외래적 세계 고등종교를 능히 '지평융합'시키거나 상보적 '직조과정'이 되도록 촉매하는 놀라운 고유한 민족영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신학적으로 기독교와 타종교간의 대화를 유형론적 접근법(typological approach)의 시각으로 해명해 들어간 학자는 지금부터 33년 전 일본에 와서 동아시아 불교문화를 심층적으로 이해하고 작은 책을 쓴 금세기 문화신학의 거장 폴 틸리히이다. 그리고 오늘 발제자의 신학적 관점도 결코 폴 틸리히의 견해를 넘어서지 못한다는 솔직한 고백을 하고자 한다. 폴 틸리히는 세계 모든 위대한 종교들의 진리체험은 거룩한 존재자체의 계시적 진리현현의 체험에 뿌리박고 있으며, 각각의 종교문화를 가능하게 하는 유형적 특징은 시공을 넘어서 거룩한 것이므로 존경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이점에 있어서 틸리히는 성취론적 기독교 우월주의, 피상적이고도 평면적인 포용주의를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우선 틸리히의 유형론적 접근방법에 의한 기독교와 불교, 또는 기독교문화와 불교문화의 유형론적 특성을 대조해보자. 그는 기독교를 기독교답게 하는 가장 포괄적이고 근원적 상징은 '하나님의 나라'이고, 불교의 그것은 '니르바나'라고 본다. 전자는 보다 정치적, 사회적, 인격적 상징이고, 후자는 보다 존재론적 상징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서로 상반되는 유형적 특성 때문에, 두 위대한 세계종교는 서로 같다고 말할 수 없는 본질적 '차이성'이 드러나며,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열린 통함'을 지닌다고 말한다.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살고 있는 한 그리스도인, 신앙적으로 진지하고 지적으로 정직하고, 실천적으로 신실한 삶을 살아가는 한 그리스도인이, 왜 서구 그리스찬 형제들이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종교-문화신학적 과제를 가지고 씨름하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발제자는 틸리히가 그의 유형론적 접근법에 의해 분석 대조한 불교적 구원패러다임과 기독교의 그것과를 우선 대비하고자 한다. 종교유형론적으로 전혀 다른 두 가지 보편적 우주종교인 불교와 기독교를 그리스 철학용어인 내재적 목적(telos)이라는 어휘를 차용하여 두 종교의 '내재적 목적 명제'(telos- formula)를 다음과 같이 총괄적으로 틸리히는 규정하였다:

기독교에서는 만인과 만유의 본디 갖추어진 목적이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통일되고, 불교에서는 만유와 만인의 본래 갖추어진 목적이 니르바나 안에서 성취된다.(In Christianity the telos of everyone and everthing united in the Kingdom of God; in Buddhism the telos of everything and everyone fulliled in the Nirvana)

특히 위 인용문에서 만인과 만유라는 글자의 순서만이 아니라 두 글자를 고딕체로 강조하면서 두 종교의 유형적 특징을 암시하였다. 무엇보다도 기독교는 궁극적 실재를 인격적 상징으로부터 끌어오고, 불교는 無나 空과 같은 비인격적 또는 초인격적 상징으로부터 끌어온다. 기독교에서는 구원패러다임의 유형적 특징에 있어서, '참여의 원리'가 관통되면서 개인의 인격적 책임과 응답적 참여, 개체의 가치 보존과 개체의 참여를 통한 공동체 구현, 정의와 당위의 신성한 윤리성 강조, 몸의 부활신앙, 역사의 과정과 미래지향적 역사의식, 정의를 갈급해하는 개혁 저항정신, 아가페적 사랑같은 특성을 나타낸다고 말한다.

그에 비하여 '동일성의 원리'위에 서 있는 불교는 만유가 이미 존재론적으로 존재자체의 창조적 지반이면서 영원한 중도(中道)로서 인연생기적 존재생성 속에 있다. 그러므로, 깨달은 중생은 존재 그 자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如如한 실재' 또는 空(Sunyata)과 존재론적으로 하나가 이미 된 해탈한 자의 충만, 자유, 걸림없음, 생사초월, 중도, 초탈, 만물과 同根同體意識, 무명 속에 있는 존재자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큰 슬픔(大悲心) 등이 특징으로 드러난다.

두 종교는 아주 이질적으로 달라서 아무런 통함이 없는가? 그렇지 않다고 틸리히는 본다. 기독교 안에 흐르는 신비주의 전통과 부정신학의 전통, 불교안에 흐르는 대승불교의 사회윤리의식과 아미타부처의 공덕에 귀의하는 귀의심 등은 얼마든지 서로 통함의 여백이 있다. 두 종교의 유형적 특징은 학자들의 이론체계 속에서는 양립이 불가능하듯이 보이지만, 살아 있는 신앙을 체험적으로 살아가는 신앙인 에게는 상호보완적이 되어 보다 온전한 진리체험의 지평확대를 경험하게 한다.

지난 90년대 초, 한국 신학계에는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 발생한 적이 있었다. 감신대학장을 지낸 저명한 신학자 변선환 교수가 "타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신학적 발언이 빌미가 되어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목사직의 출교를 당해야만 했다. 이것은 매우 불행하고도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었다. 문제가 되었던 "타 종교 안에도 구원이 있다"는 말을 할 때, 그 발언을 하는 변선환 교수와 듣는 사람들의 '구원'에 대한 이해가 너무나 달랐던 것이다. 불트만과 프릿츠부리의 실존론적 신학영향을 많이 받았던 변교수는 구원의 이해를 매우 실존론적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변교수에게 있어서는 '구원'개념은 비본래적 상태의 인간으로부터 전환하여 본래적 존재의 사람으로 변화하는 것 곧 아집이나 죄의식에서 해방되고, 생사의 두려움에서 자유하고, 사랑이나 자비심같은 자기희생적 봉사적 삶을 살아가는 힘을 얻게 되는 사건을 구원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한 인간의 본래적 존재에로의 변화가 불교 신앙인에게 있어서도 실재함을 경험과 이론으로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전통교회와 목회자들과 신도들의 구원이해는 변교수의 그것과 전혀 다르게 전통적 기독교의 구원패러다임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 패러다임의 특징은 십자가의 대속적 속량으로 인한 죄의 용서, 성령으로 인한 중생경험과 하나님과의 바른 인격적-영적 교통, 몸의 부활과 개체생명의 영원한 삶, 하늘나라에서의 영생복락 등이 구원개념의 필요불가결한 구성요소로서 포함되어야 한다고 확신한다. 그런 구원이 아니고서는 구원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확신하는 신념체계이다.

그러나, 해석학적 눈으로 동아시아 불교문화의 중국전래와 경전번역과정, 그리고 대승불교의 토착화과정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중국불교는 인도에서 발생한 이후 중국의 문화와 사회 속에 문화-사회적으로 육화되면서 받아들여지고 더 심화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산스크릿어나 팔리어로서 기록된 불교의 본래 경전들이 중국 한자언어로 번역된다는 사실자체는 인도불교가 중국화한 불교로 토착화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노장사상에서 말하는 無爲, 無, 空, 寂滅, 中道, 충만과 비움, 무욕, 무위자연 등의 개념과 영성이 없고서야 불교가 중국에 뿌리내릴 수 없었고 천태종, 화엄종, 선종 등 동아시아 대승불교의 위대한 꽃을 피워 낼 수 없었다.

불교라고 하는 보다 존재론적이고 우주적인 종교가 중국에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중국 사상의 사유지평이 확대심화된 것이다. 형식상으로는 불교와 도교와 유교가 서로 다투면서 중국 사회를 이념적으로 지배하려고 경쟁했지만, 사상 내용적으로 보면 신유학(Neo-Confusianism) 자체도 불교나 노장철학없이 발생할 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신유학의 양명학적 "마음이 곧 理다"(心卽理)고 보는 이론이나, 존심양성(存心養性)의 핵심적 유교적 영성 훈련은 '내재적 초월경험'을 강조한 것으로서 불교, 유교, 기독교의 매개적 고리역할을 할 수 있다.

종교문화사적 측면에서 볼 때, 동아시아 나라들 중에서 한국의 타종교문화 수용과정은 매우 독특하여 선교신학적 측면에서 집중적으로 연구할 만한 대상이 된다. 이 분야에서 한국의 선교신학자 유동식의 연구는 선구자적 업적을 남겼다. 유동식에 의하면 한민족의 집단적 무의식 속에는 최치원이 말한바 '풍류도'라 일컫는 일종의 원형적 영성이 내재하는데, 불교, 유교, 도교, 기독교 등 어떤 외래 고등종교이든지 한 민족의 마음속에 신토불이 형태로 받아드려지고 생명적 종교로서 토착하기 위해서는 외래종교들은 이 풍류도적 영성을 타고서(乘) 자기를 전개하게 되고, 역으로 풍류도적 영성은 외래종교의 내용을 구체화시키고 그것을 매개로 하여 한국종교문화를 풍요롭게 전개시킨다는 해석학적 선교신학이론이다.

풍류도는 한민족의 종교적 심성의 '원형'이라고 말했는데, 이 때 말하는 원형이라는 개념은 칼 구스타브 융의 '원형론'에서 차용한 것이다. 원형은 '정신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여러 조건', '지적인 개념이 아니라 미증유의 에너지를 방출할 수 있는 능력', '반복되어 갈 공동체의 행동유형을 가능하게 하는 선험적 조건', '그 자체로서는 비어 있는 形態的 要素' 같은 개념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유동식의 선교신학의 기초이론을 해석학 적으로 볼 때, 발제자가 앞에서 언급한 '접목모델'과 그 신학적 발상법이 서로 상통한다.

한국문화 속에 기독교의 전래와 토착화는 불교, 유교, 무교, 토착 민족종교 등의 문화종교적 토양속에 복음이 떨어지고 받아들여진 것이다. 선교초기가 문화사회학적으로 한국의 개화기였고, 이미 역동적 생명력을 상실하여 한국의 근대화과정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갈 만한 창조적 에너지를 당시 한국종교였던 불교, 유교, 무교 등에서 기대할 수 없었다. 기존 전통종교의 도덕적 지도력 상실이나 영적 능력의 경직화 때문만이 아니다. 본질적으로 아시아 사회의 근대화란 근대과학문명을 핵심으로 하는 자연의 통제제어능력 강화, 세속화과정으로서 세계의 역사화, 혈연과 지연공동체로서 머물던 인간관계를 인격성에 기초한 사회계약적 관계구조에로 전환, 공학기술과 의학기술을 동반한 인간화 과정 등을 의미하는 것 등이었다. 그 모든 근대화, 세속화, 역사화, 기술화, 사회화 과정이 기독교라는 종교를 모태로 하는 세계관 안에서 더 능률적으로 작동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한국 사회는 기독교를 개화의 촉매로서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성경을 통해서 전해지는 영적 종교로서의 복음의 진리가 한국인의 종교심성 원형인 풍류도적 기질과 서로 상통하는 공명반응을 일으켰다고 볼 수 있다. 기회는 기독교에게 주어졌고, 성경이 한글로 번역되고 민중의 심령 속에 영적 에너지가 부어넣어지고, 그들의 영적 눈이 진리의 자유하게 하시는 능력 안에서 밝아지고 변화되었을 때, 한국에는 새로운 기독교 선교시대가 열리고, 새로운 지평이 확대심화된 것이다. 동아시아 여러 나라 중, 왜 한국에서만이 기독교 선교는 역동적 모습을 띄면서 성공적으로 선교가 이뤄지는가를 해명하는 여러 가지 차원에서의 설명이 가능하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종교-문화신학적 해명을 놓쳐서는 아니될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한국 근대화과정과 기독교의 관계를 동아시아 전체에로 확대 해석할 수 없다. 일본과 한국을 제외한 대부분 아시아 국가들은 기독교문명권과 기독교 국가들의 식민 통치를 받은 경험이 있고, 그 과정 속에서 아시아적 문화와 종교의 황폐화를 경험했기 때문에, 서구 제국주의적 수탈정책과 야합하거나 그것을 묵인동조한 기독교라는 역사적 종교형태를 무의식적으로 거부하고, 의식적으로는 비판할 수밖에 없다. 오늘 문화정보가 투명하게 개방되어 있는 지구촌 시대에서, 19세기와 20세기 초까지 선교신학의 신념체계였던 종교문화 정복론, 東道西器論, 포용주의적 성취론 등은 바람직하지도 않거니와 받아들여지지도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이러한 동아시아인들의 각성된 종교다원사회 속에서 기독교 선교는 어떤 신학적 이론근거 위에서 마련되어야 하는가? 다시 한 번 발제자는 폴 틸리히의 통찰을 빌리고자 한다.

모든 살아 있는 종교들 깊이 속에는, 개별종교 자체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하나의 점'이 있는 것이며, 바로 그 한 점을 향하여 개별종교들은 자기의 (역사적)특수성을 돌파하여 지양(止揚)하는 것이고, 개별종교로 하여금 영적 자유에로 고양시키는 것이다. 동시에 그와 더불어 인간실존의 궁극적 의미에 대한 다른 표현들 안에서 '성령의 현존'을 볼 수 있도록 고양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세계종교들과 현재 만나고 있는 기독교가 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위 인용문장에서 폴 틸리히가 말하려고 하는 요점은, 기독교가 역사적 종교로서 자신이 지닌 유한한 가치들을 절대화하려는 우상화의 유혹을 극복하고, 도리어 자기를 초월함으로써 영적 종교로서의 절대자유와 초월경험을 담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 역사적 실존인물로서의 자신을 망실함 없이 자기를 부정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님으로 인하여 그가 메시아로 고양되고, 하나님으로부터 "내 사랑하는 자"로 인정받은 것처럼, 역사적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기독교의 자기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동시에 역설적으로 자기를 부정하는 영적 능력을 지닐 때라야만 복음의 절대성과 예수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구원능력의 유일성을 지켜갈 수 있다. 그것이 십자가와 부활신앙의 참다운 역설적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동아시아 속에서 기독교와 타종교와의 만남에서 종교적 혼합주의도 철저히 경계해야 하지만 동시에 역사적 과정에서 형성된 신학체계나 교리를 절대화하는 상대적인 것의 우상화도 '프로테스탄트 원리' 정신으로써 철저히 경계해야만 한다. 틸리히가 말하는 "모든 살아 있는 종교들 깊이 속에 있는 하나의 점"이란 진리의 영으로 임재하시는 영이신 하나님의 지성소 바로 그것이며, 신비자 하나님 자신이며, 예수그리스도가 아버지라고 불렀던 햇빛과 단비를 선한 이와 악한 이에게 고루 내리시는 하나님(마 5:45)이기 때문이다. 지금이야말로 '프로테스 원리' 곧 종교개혁자들의 근본정신으로 돌아가야 할 때인데, 그 근본정신이란 "하나님만이 하나님이게 하라"는 정신 곧 일체의 상대적인 것들을 우상화하려는 유혹에 대한 참다운 예언자적 비판정신이었던 것이고 유일신앙이 의미하려는 바의 그 정신을 관철하려는 것이다.

4. 에필로그

발제자는 제한된 지면과 시간을 고려하여 지금까지 이야기 한 내용을 기초로 하여 몇 가지 선교신학적 테제를 정리함으로 발제를 마치려고 한다.

첫째, 동아시아 문화 특히 한국의 종교문화사는 민족 고유의 종교유산을 기초로 세계종교의 삼대흐름이 모두 함께 흘러들어와 종교적 융합과 교체를 이뤄가는 다종교문화 사회이다.

둘째, 선교과정을 정밀분석해 볼 때, 문화공동체가 복음을 진리로서 수용하고 변화될 때, 해석학적 과정을 거치게 된다. 해석학적 과정이란 복음을 진리로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이해와 신앙고백적 수용의 과정으로서 '지평융합', '직조과정', '접목과정'을 거친다.

셋째, 피선교지역의 문화속에 융화되지 않는 복음은 진정한 생명력을 발휘할 수 없으므로, 복음과 문화와의 관계는 전자가 후자를 조명 비판 변혁하며, 동시에 후자가 전자를 조명하고 재해석하고 더욱 풍성하고 다양하게 한다.

넷째, 선교되어야 할 복음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새로운 존재로서의 의미와 능력' 그 자체로서 십자가사건과 부활사건에서 나타난 아가페적 절대사랑,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나라이다.

다섯째, 역사적 종교로서의 기독교의 신학체계, 교의체계, 상징의례 체계는 기독교의 유형적 특성을 나타내는 귀중한 것이므로 보존되어야 하지만 절대화될 수 없다. 세계종교들 속에 신비이신 하나님의 구원사적 경륜과, 생명의 영이신 성령의 역사가 이뤄져 왔음을 고백해야 한다. 그러므로 세계종교들의 유형론적 특성을 서로 이해하고 상보적 관계로서 파악하되 배타주의나 혼합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여섯째, 한국의 종교문화사는 풍류도라고 하는 단일민족 고유한 종교적 영성을 타고서, 세계고등종교들이 자신을 전개해갔다. 풍류도적 영성의 특징은 전일성을 지향하는 포월적 성격, 신명성과 예술성을 지향하는 자유의 성격, 구체적 삶을 긍정하는 생명론적 성격이 그것이다. 한국종교문화사에서 기독교의 토착화도 복음과 풍류도의 상관관계 안에서 전개되고 있다.

일곱째, 예수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진리의 절대성, 구원계시의 유일성이란 정식화된 교의체계 내용이라기보다는 역설적으로 "자신을 망실함 없이 자기를 부정할 수 있는 힘" 속에서만 유효하다. 그것은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자"(요 4:23)와 "생명을 살리고 더 풍성하게 하는 일"(요 10:10)에 정진하는 정행(正行, orthopraxis)을 통해서만이 바르게 득증되는 기독교 신앙의 영원한 '공안'(公案, koan)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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