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의미, 인생의 목적
사람은 어디서 와서, 무엇을 위해 살고, 어디로 가는 존재인가?
일반적으로 말할 때, 사람들은 위의 세 가지 가장 중요하고도 가장 근본적인 자기 자신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모르고 살아간다. 이에 대한 답을 인간 세상에서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사실상 사람들은 이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고 하지 않고 체념한 채 살아간다.
이 문제에 대해서 적어도 과학과 진화론은 절대적으로 만족할만한 답변을 제공해 주지 못한다. 인간의 근원은 곧 인간의 존재 의미와 목적을 설명해 주는 유일한 단서인데, 진화론에 바탕을 둔 과학은 인간의 근원을 불확실한 가설에서 시작하고 있다. 우주와 지구로부터 생명이 우연히 탄생하여 무한대의 진화 과정을 거쳐 인간이 되었으며, 결국 현재 존재하는 모든 미생물과 생물이 인간의 근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인간의 가치와 의미와 목적을 설명해 주기는 커녕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조차 무의미하게 만든다.
한편 사람들은 소유나 성취를 통해 삶의 의미를 발견하려고 한다. 다른 사람보다 더 좋은 것을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높은 지위에 올라가는 것을 삶의 목표로 정하고 거기에서 삶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소유와 성취는 사람의 생명만큼이나 매우 일시적인 것이고 유한한 것이며 덧 없이 사라지고마는 것들일 뿐이다. 결국에는 그러한 것들을 소유하고 성취하기 위해 시간과 에너지와 삶의 모든 것을 희생한 만큼 돌아오는 것은 허탈하고 공허한 결과 뿐이다.
1) 인간은 자신의 근원을 모르고 살아간다.
2) 인간은 자신의 삶의 이유, 의미, 가치, 목적을 모르고 살아간다.
3) 인간은 자신의 삶에 대한 최종적인 방향과 결과를 모르고 살아간다.
4) 위의 세 가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은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한 가지 질문으로도 요약이 될 수 있다.
나는 위의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여러 가지 과정을 통해 관찰해 본 후에 최종적인 결론을 내리려고 한다. 이 주제 자체가 쉬운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인내심을 가지고 고민하며 이 글을 끝까지 읽고 나서 인생이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충분히 찾았는지, 아니면 그렇지 못한지에 대한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나의 과거의 쓰라린 방황을 이야기하고 싶다.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공부에 대한 흥미를 갑자기 잃어버렸다. 그런 상태로 대학에 입학했지만, 삶은 더 이상 흥미롭지도 의미가 있지도 않았다. 매일 술을 마시며 살았는데, 자살에 대한 충동을 강하게 느꼈지만 실행에 옮길만큼 용기가 있기도 않았다. 열심히 공부하던 내가 매일 술을 마시며 방황하는 것을 지켜보던 부모님의 실망과 아픔도 이루다 말로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떻게 하든 이 세상에서 도피하고 싶어서 군대에라도 가고 싶었다. 85년도에 해병대에 두 세 번 지원했지만, 모두 낙방했다. 매일 술을 마시며 대학을 다니는 것도 무의미하게 느껴져서 휴학을 했다. 그리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막노동을 하며 생활했다.
그 동안 얼마나 인생이 허무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졌는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그 때 스스로에게 가장 많이 했던 진지한 질문이 바로 인생에 관한 것이었다. "사람은 어디에서 왔는가? 무엇을 위해,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죽음 이후에는 어디로 가며, 어떻게 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 철학책을 뒤져 보기도 했다. 사람들과 토론도 해 보았다. 오랫 동안 세상에서 인생을 경험한 노인들이라면 어느 정도 인생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줄 수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그들과 대화도 해 보았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인생에 대한 일반적이고도 근본적인 해답을 제공해 주지 못했다.
1. 인간은 어디에서 왔는가?
사람이 부모에게서 태어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이 인간이 어디에서 왔는가에 대한 해답을 충분히 제공해 주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라고 할 때는 전체적이고 통칭적인 개념이다. 인간이 어디에서 왔느냐에 대한 질문은 보다 근본적인 질문으로 전체 인간의 근원과 시작에 대한 질문이다.
부모가 우리를 낳기는 했지만, 그들이 구체적으로 우리를 탄생을 결정한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는 부모가 원치 않았는데도 태어난 사람도 있다. 그리고 부모가 자녀의 출생을 모두 계획하고 자기가 원하는 모양과 형태로 낳을 수도 없다. 이 세상에 내가 원해서 태어난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부모들도 마찬가지이며, 그 이전의 조상들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출생을 결정하지도, 다른 사람의 출생과 인생을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진화론과 과학은 인간의 출생을 더욱 더 많은 불확실의 세계로 인도한다. 이 세상에서 모든 종류의 동물은 출생이라는 과정을 거친다. 각각의 종은 대대로 이어지는 동일한 종의 출생에 의해 이 세상에 존속 가능하다. 진화론은 인간의 근원적인 탄생에 대해서 충분한 설명을 해 주지 못한다. 진화론에는 무수한 모순들이 존재해서 그 수를 다 헤아릴 수도 없다. '잃어버린 연결 고리'만 해도 그렇다. 더군다나 진화론으로는 인간의 존재 가치나 의미를 전혀 설명해 주지 못한다. 진화론으로 보는 인생은 그 자체로 무의미하다. 그렇다면 진화론을 가지고 인생의 의미와 가치, 목적을 토론할 수는 없다. 인간이 원숭이에서 진화된 존재라는 것, 더군다나 최초의 근원이 아메바였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다. 만일에 인간의 근원이 아메바였고, 거기에서 시작되었다면 인간의 가치와 의미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렇다면 인간을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것들과 구별이나 차별, 즉 다른 특별한 점이 있을 수 있는가? 소외 말하는 과학적이라는 진화론, 즉 오늘날 세상에서 가장 설득력이 있다고 주장하고, 또 모든 학교와 매스 미이디어에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모든 세상 학문의 기초로 제시되고 있는 진화론은 인간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질문과 해답을 처음부터 부정해 버린다.
2. 인생의 의미와 가치와 목적은 무엇인가?
인간의 생명이 대단히 소중하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물론 유물론주의자들은 인간의 영혼과 생명까지도 일종의 물질로 보기 때문에, 사람의 생명을 아깝게 생각하지 않고 자기들에게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을 마치 거치장스러운 방해물이나 쓰레기를 치우듯이 탱크로 짓밟아 죽인 일도 있었다. 진화론과 유물론은 결국 동일한 부류이다. 진화론이 인간의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든 하지 않든, 인간의 근원을 원자와 아메바로 찾는 한 인간의 생명에 대한 가치는 제대로 평가될 수 없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아깝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자신의 생명은 아깝게 생각한다.
사람은 이 세상에서 대단히 가치가 있는 존재이다. 인간의 삶은 대단히 의미 있는 그 무엇을 위해 존재한다. 인간의 삶에는 어떤 목적이 존재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가치와 의미와 목적을 찾지 못한 채 살아간다는 것이다. 인간의 절대적인 가치는 돈이나 재산의 정도에 의해 평가되는 것이 아니다. 또 그렇게 되어서도 안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를 소유에서 발견하려고 한다. 많이 소유한 사람은 자신의 생명의 가치가 보다 덜 소유한 사람의 생명보다 더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믿고 살며, 교만하게도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들 위에서 그렇게 표현하며 군림하려고 한다. 그렇다면 가난하고 병들고 어리거나 늙은 사람들의 생명은 부귀와 권세를 누리는 사람들의 생명보다 상대적으로 무가치한 것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각 사람의 생명의 가치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제대로 평가되어질 수 없을 만큼 숭고한 것이다.
문제는 사람들 각자가 자신의 생명과 인생의 의미를 제대로 발견할 수 없다는데 있다. 인간의 삶과 생명은 대단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도, 그 가치와 의미를 어디에서 발견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자신의 존재와 그 존재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지 모르는 것이다. 이 때문에 때때로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을 미워하며 학대하기도 하고, 방치하거나 포기하기도 한다. 인간 사회 내부에서 모든 사람들이 함께 어울리며 살아가는데, 그 중의 한 사람도 스스로 인간의 생명의 가치와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우스꽝스럽고 불행한 것이다. 수 억의 인구가 서로를 마주 대하며, 상호작용하며 살아가지만, 그 많은 인생 한 가운데에서 정작 자신의 인생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방황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나중에 밝혀질 것이다.
3. 인생의 최종적인 방향과 결과는 무엇인가?
불교는 무와 윤회를 동시에 주장한다. 불교는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은 인간의 근본적인 질문들로부터 출발한다. 인간이 겪고 있는 불행과 고통과 저주와 불조리가 다 어디에서 왔는가? 이것은 불교의 질문이면서 모든 인간의 질문이기도 하다. 시초의 불교는 인간의 보다 근본적인 근원에서부터 질문을 시작하지 않았다. 현재적인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삶으로부터 질문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해답도 인간의 최종적인 결과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끝 없는 윤회에 관한 것이다. 이 지구의 동식물에 한정된 윤회사상은 지구가 사라진다면 무의미해질 것이다. 진화론적으로 인생의 최종적인 방향과 결과에 대해 생각해 본다면, 역시 인간의 존재란 죽음이 끝일 수도 있지만, 전체 인류에 대한 것이라면 지구의 종말이 오는 것으로 끝이 날 것이다. 만일 새로운 종류의 생명체가 시작하더라도 그것이 인간이 될 것이라고는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개인의 죽음이 곧 개인의 최종적인 종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죽음과 반대되는 개념의 인간의 탄생은 개인의 근원적인 시작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무수한 조상들의 총합이 있었다. 죽음 또한 그럴 것이라고 생각해야 되지 않은가? 인생의 의미를 생각할 때, 그것은 개인의 구체적이고 특별한 삶의 이유를 묻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일반적인 이유와 가치와 의미와 목적이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일반적인 존재 가치와 목적은 각 개인의 것이기도 되기 때문이다.
만일에 사람들의 삶이 이 세상의 짧은 인생이 전부이고,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면 그 자체로 인생은 무가치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인생을 의미 있고, 소중하게 산다는 것에 아무런 기준이나 이유를 발견할 수 없다. 무엇이 올바른 삶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의미 있는 삶인가? 이것은 우리의 죽음 앞에서 진지하게 해 보아야 하는 것인데, 죽음으로 인생의 모든 것이 끝나버린다면, 이런 질문을 할 필요가 없다. 죽음을 사람의 최후로 보고, 더 이상의 사후 세계에 대한 불신 때문에 세상에는 비관주의와 쾌락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한 번 뿐인 인생 마음껏 즐기다 죽자는 것이다. 거기에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아무런 책임 의식도 없다. 자기 자신의 인생에 대해 아무런 책임 의식이 없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성실하고 진실할 수는 없는 것이다.
4.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인간은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세상의 모든 존재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자기와 다른 사물이나 사람들과 개별적이고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설명할 필요가 없다. 사람은 부모와의 관계에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가장 친밀하고 사랑스러운 관계이어야 하는데, 불행하게도 그렇게 표현되지 못할 때도 많다. 형제자매와의 관계, 크고 작은 사회와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 우주와의 관계, 사물과의 관계 등 그 어떤 것 하나도 땔래야 땔 수 없고,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는 관계 속에 묶여 있다.
이러한 관계에는 일련의 질서와 원칙들이 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질서와 원칙은 서로에 대한 사랑과 신뢰와 의존, 의무와 책임을 바탕으로 한다. 자녀는 부모를 존경하며 사랑해야 하고, 부모는 자녀를 긍휼히 여기며, 책임지고 돌보아 주어야 한다. 인간의 상호의 의존 관계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사물에게까지 확장된다. 그런데 인간 상호 간의 관계는 상호 종속적이다. 거기에는 서로에 대한 신뢰와 사랑과 책임과 의무가 존재한다. 이것이 깨어지면 관계도 깨어진다. 인간과 사물과의 관계는 일방적이다. 왜냐하면 사물은 철저히 인간의 소유물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하면 인간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주인인 셈이다. 다른 사람의 존재 가치가 다른 사람에 의해 평가되지 않고, 각 자의 절대적인 가치를 갖는데 비해, 사물의 존재 가치는 인간에 의해 평가된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물의 존재 가치는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인간에게 해로운 사물은 일반적으로 무가치한 것이다. 인간이 사용하지 않고 버린 것도 무가치한 것이다.
5. 사람은 어디에서 와서, 무엇을 위해 살고, 또 어디로 가는 존재인가?
위에서 짧지만 여러 각도로 인생의 근원과 의미와 최종적인 방향에 대해 관찰해 보았다. 이제 최종적인 답변을 하고자 한다.
세상은 암흑 속에서 사는 것과 같다.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존재의 의미와 가치가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또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사실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약간은 알만한 것들도 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창조주에 대한 믿음 같은 것이 있다. 또 선악과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력과 이성도 있다. 또 사후세계에 대한 희미한 믿음과 영원을 사모하는 강렬한 마음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희미한 것들을 분명하게 볼 수 있는 방법이 인간 내부에서 사라져 버렸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의 존재, 즉 인간의 근원과 존재의 의미와 가치와 목적, 그리고 최종적인 방향에 대한 해답은 창조주 하나님 안에서만 찾을 수 있고, 회복할 수 있고, 온전하게 누릴 수도 있다.
인간의 타락, 즉 아담과 하와의 범죄와 타락으로 인간에게 있었던 지식과 지혜와 거룩하고 선한 성품은 심각하게 파괴되고 오염되으며, 악하게 변질되었다. 죄와 타락의 영향으로 가장 크게 손상을 입은 것은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인간이 자신의 존재와 그 존재 가치와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길은 창조주 하나님께 돌아와 자신의 잘못된 삶을 고침받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길 밖에는 없다.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불신할 때 절대로 발견할 수 없는 인생의 근본적인 질문들은,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와 그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 때 완전하고 충만하게 소유할 수 있게 된다.
내가 예수를 믿기 전 고통스럽게 방황하며 질문했던 것들에 대한 해답은 애당초 사람들을 통해 발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창조주 하나님과의 회복된 관계를 갖지 못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셨는데, 그것은 나 개인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신뢰와 헌신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위에서 살펴본 내용을 아래와 같이 정리해 보려고 한다.
삶의 의미와 가치 -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의 삶의 의미와 가치를 결정짓는 요소)
삶의 의미의 가치 - 하나님의 형상 (인간의 생명의 근원에 대한 해답, 그리고 인간의 가치에 대한 해답)
삶의 목적 - 하나님을 순종하며 기쁘게 해 드리는 삶과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 (인간의 삶의 목적과 삶에 대한 심판의 기준)
1)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
이것은 인간의 삶의 의미와 가치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사물)은 인간을 위해 창조된 것이다. 비록 인간의 타락으로 질서가 파괴되기는 하였지만, 원칙적으로 말할 때, 인간은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주인이다.
창 1:27-29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간이 주인이기 때문에 그것의 절대적인 가치보다도 인간에 의해서 사용되는 방법과 목적에 따라 그 가치가 결정된다. 예를 들어 사람이 만든 크고 작은 모든 것, 자동차, 신발, 비행기, 종이, 옷, 배, 안경, 총, 집 등은 그것들을 만들고 사용하는 방법과 목적에 따라 그 가치와 의미가 결정된다. 그리고 그것들은 인간에게 철저하게 종속되어 있고, 또 인간에 의해 사랑을 받으며 올바로 쓰임을 받을 때 엄청난 의미와 가치를 준다. 그 가치와 의미를 제대로 안다면 그것이 새 것이라고 더 가치 있는 것이 아니고, 헌 것이라고 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새롭고 비싼 것이 더 가치 있다고 평가하고 더 많은 돈을 지불하지만, 실제 가치는 금전적인 가치와 전적으로 다르다.
예를 들어 신발을 예로 들어보자! 새 신발은 헌 신발에 비해 일반적으로 비싸고 소중하게 생각될 것이다. 하지만 인간에게 편리함과 안정됨과 기쁨을 주며, 인간의 발과 마음을 섬기며 영광을 주는 것은 헌 신발이라고 부족한 것이 아니다. 신발을 신는 이유는 맨 발로 다닐 때 겪게 될 아픔과 질병과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함으로써 자신의 행복과 영광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예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종이와 집, 종이와 자동차의 절대적인 가격은 엄청나게 큰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손에 의해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따라서 그 가치와 의미는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다. 종이 한 장의 객관적인 가치와 의미는 참으로 보잘 것 없지만, 그 종이를 매매문서로 사용할 때의 가치, 그 종이를 국가 보안이나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어떤 칙령을 위해 사용할 때의 가치는 대단한 것이다. 반대로 아무리 비싼 비행기라고 하더라도 오랫 동안 주인에 의해 사용되지 않고 방치되어 있다면 그 가치의 의미는 보잘 것 없는 것이다. 극단적인 예로 아주 비싼 차를 사막에 버렸다고 한다면 그 차는 사막의 쓰레기 고철과 같은 것이다.
위와 같은 예를 드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인 그 주인인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만 그 가치와 의미를 제대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제 각지 나름대로의 존재 가치와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정작 사람은 자신의 존재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그렇다면 사람이 자신의 존재 의미와 가치와 목적을 발견하지 못하고 방황하며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를 만들고 생명을 준 창조주 하나님을 모르고 살기 때문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그와 관계를 회복하지 않는 한 인간 자신은 마치 자존하는 존재처럼 착각하며 살게 되어 있다. 그런데 사실상 인간은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가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를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그 관계를 인정하지 않고는 인간의 삶의 진정한 회복이란 기대할 수 없다.
우리 인간이 겸손히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고 피조물인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수 많은 사람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고 자신이 그의 피조물인 것을 인정하는 것보다 지옥의 형벌을 더 기뻐하는 것 같다. 오늘날 세상의 모든 학문과 과학과 문화는 하나님과 그의 창조를 부인하고 그 대신 인간이 스스로 진화한 존재이며, 인간의 모든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해 나갈 수 있다고 장담하는 분위기이다.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욕망은 사탄의 욕망이었으며, 사탄이 인간을 타락시킬 때 사용했던 것으로 인간의 역사만큼 오래된 것이다.
창 3:4-5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인간이 자신이 왜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고 되는대로 인생을 허비하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학대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떠나 마음대로 살면 더 행복할 것 같아도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이 없이 인생을 산다는 것은 그 자체로 무의미한 삶을 살겠다는 선택이다. 사실 이것만큼 중요한 인생에 대한 질문이 어디 있는가? 자신의 삶에 대한 의미와 목적을 모르고 어떻게 인생을 살 수가 있는가? 그러면서 어떻게 인생에 대해 회의를 품지 않고 평안하게 살 수 있는가?
주인의 손에서 떠난 사막의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자동차가 되느니, 차라리 주인의 손에 쓰임을 받는 한 장의 종이가 되는 것이 낫지 아니한가? 사람이 자신의 존재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신처럼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면서 사는 독립적인 존재로 살겠다고 하는데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하나님을 부정하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하면서 살면 행복할 것 같은데, 사실상 자신의 존재 가치와 의미와 목적을 모두 잃어버렸다.
사막에 방치된 차가 창조주인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라고 가정하여 생각해 보자!
'차는 갑자가 인간이 싫어졌다. 더 이상 인간을 섬기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 자신을 위해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싶었다. 그래서 인간을 떠났다' 이제 차는 더 이상 인간에게 순종할 필요도 없고, 봉사할 필요도 없으며, 인간에게 기쁨과 영광이 되어줄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차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는가? 인간을 위해서 창조된 차는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만 가치와 의미가 있다. 그것이 인간을 섬기며 인간에게 안전과 편안하고 즐거운 여행을 제공할 때 그 가치는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인간을 떠나 스스로 존재하는 차는 스스로 아무런 가치를 발견할 수 없다.
인간이 하나님께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돌아와 겸손히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기로 다짐하면 자신의 존재의 가치와 의미를 모두 회복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착하고 의로운 삶을 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인간 자신에게 엄청난 의미를 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행복과 영광을 위해 우리 인간들을 창조하셨으며, 우리들에게 선한 계명들을 주셨던 것이다. 누구든지 언제 어느 곳에서 살든지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를 깨닫고, 그 때문에 불행해지고 무의미해진 자신의 삶을 회복하려고 창조주 하나님께 돌아오려는 자들은 하나님은 지금도 애타게 기다리고 계신다.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몫)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다 없이 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서로의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2)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
인간이 자신이 창조되었다고 믿는 것과 아메바에서부터 진화한 존재라고 믿는 것 사이에서 어떤 것이 더 의미가 있는지 충분히 알 것이다. 사람이 원숭이에서 진화되었다고 믿는 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굴욕적인 사실인가? 그런데 그 최초의 근원이 아메바였다고 말하는 것은 더욱 굴욕적인 것이다. 그런데 진화론을 믿는 사람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보다다는 그 굴욕적인 선택을 더 선호한다. 진화론은 이데올로기를 초월하여, 그리고 종교를 초월하여 오늘날 전 세계의 모든 곳에서 과학이라는 이름 하에 맹목적으로 받아들여진다. 반면에 창조에 대한 믿음은 원시적이고 미개한 미신과 같은 것으로 취급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사실 사람은 피조물이지만, 하나님을 닮은 존재이기 때문에 사탄의 유혹처럼 하나님처럼 되려고 할 필요가 없었다. 사람이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유일한 것이 있다면, 바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동물들처럼 단지 생각을 하고, 지각을 사용한다는 것 이상이다. 인간에게 부여하신 하나님의 형상은 거룩함, 신실함, 인자하심, 선하심, 의로움, 자비로움, 충성스러움, 사랑, 지식, 지혜, 창조의 능력 등 하나님과 닮은 많은 성품과 속성들을 의미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은 아담의 범죄와 타락으로 심각하게 오염되었지만,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래서 온전하지는 않지만, 인간에게는 불의 앞에서 울분을 품고, 선한 일을 보면 기뻐하고, 기발한 것들을 창조해 나가는 지혜와 능력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님의 형상은 타락 이후 심각하게 부패하여 사랑을 해도 이기적이고, 다른 사람에게 신실하고 정직하고 의롭고 자비롭게 대하기 보다는 탐욕스럽고 부정직하고 악하다. 사람마다 그 정도가 다르기는 하지만, 인간 사회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보는 것은 처음 창조되었을 때의 하나님의 형상보다는 인간을 타락시켰던 사탄 마귀의 간사함과 악함과 교만과 불의로 가득 차 있는 인간들의 생각과 행동을 접하며 살아간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불행하고 고통스럽게 된 가슴 아프고 슾픈 근본적인 원인이다. 인간은 점점 더 많은 악행으로 서로를 파멸로 몰아가고 있다.
이 주제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의 가치와 의미가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가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이 점에 좀 더 집중하도록 하자!
시 8:3-8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우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신의 형상으로 만드신 것은 영화와 존귀로 면류관을 씌워준 것이다. 거기에다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다스리도록 자치적인 통치권을 주셨다. 이것이 바로 인간보다 힘이 센 야수들이 함부로 인간을 덤비지 않는 이유이다. 물론 처음에 이 질서는 완전했다. 하지만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불순종하고 하나님처럼 되려고 반역을 꾀했을 때, 일반적인 의미에서 세상의 질서도 엄청난 정도까지 파괴되었다.
인간은 흙으로 지음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숨결(생명의 영)과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존재이다.
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살아있는 영)이 된지라"
이 때문에 외적으로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인간과 동물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사람은 본성적으로 알고 있다. 그 차이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지만, 동물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통치하는 주인이지만, 동물들은 그 통치를 받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것만큼 인간의 존재와 가치에 대해 올바른 설명을 해 주는 것은 없다.
사실상 하나님은 인간에게 신적인 것(하나님의 형상)을 나누어 주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을 신이라 부르기도 한다. 따라서 인간은 별도로 하나님처럼 되려고 추구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충분한 영광과 권능이 있었다.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과의 사이에는 오로지 질서와 순종의 의무, 그리고 그로 인한 구분만 있었다. 따라서 창 2:15, 16은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 사이의 질서를 정해주는 최소한의 명령이었다고 이해된다. 에덴 동산에는 금지된 한 가지 선악과 외에는 인간을 속박하는 아무 것도 없었다. 이 명령은 단지 순종하기만 하면 지켜지는 것이었다. 순종하기 어려운 명령도,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도 아니었다. 사실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그 분 안에서 사는 모든 삶이 이와 같다. 하나님의 명령이 지키기 어려운 것 같아도 순종하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도 지키기 어려운 것이 없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케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사람은 위대하게 지음을 받았다. 창조물 중에서 으뜸으로 세움을 받았다. 성경은 비록 인간이 흙으로 지음을 받았지만, 그 존귀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하나님처럼 "신"으로 불릴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시 82:6, 7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너희는 범인 같이 죽으며 방백의 하나 같이 엎더지리로다"
요 10:34, 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늘"
물론 인간이 교만하게 하나님 행세를 하며 하나님을 모독해서는 안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성경의 선언을 통해서 인간이 얼마나 존귀한 존재로 창조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성경이 말하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귀하게 지음을 받은 존재이다. 다른 모든 피조물들보다 뛰어난 존재이다. 이 세상에서는 잠깐 동안 천사들보다 못하지만, 이 고난의 풀무불을 통과하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천사들보다 뛰어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에 사는 수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 같다. 차라리 아메바나 원숭이 처럼 미물과 동물이 되는 것이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시 49:1-20
"만민들아 이를 들으라 세상의 거민들아 귀를 기울이라 귀천빈부를 무론하고 다 들을지어다 내 입은 지혜를 말하겠고 내 마음은 명철을 묵상하리로다 내가 비유에 내 귀를 기울이고 수금으로 나의 오묘한 말을 풀리로다 죄악이 나를 따라 에우는 환난의 날에 내가 어찌 두려워하랴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풍부함으로 자긍하는 자는 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 구속하지 못하며 저를 위하여 하나님께 속전을 바치지도 못할 것은 저희 생명의 구속이 너무 귀하며 영영히 못할 것임이라 저로 영존하여 썩음을 보지 않게 못하리니 저가 보리로다 지혜 있는 자도 죽고 우준하고 무지한 자도 같이 망하고 저희의 재물을 타인에게 끼치는도다 저희의 속 생각에 그 집이 영영히 있고 그 거처가 대대에 미치리라 하여 그 전지를 자기 이름으로 칭하도다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저희의 이 행위는 저희의 우매함이나 후세 사람은 오히려 저희 말을 칭찬하리로다 양 같이 저희를 음부에 두기로 작정되었으니 사망이 저희 목자일 것이라 정직한 자가 아침에 저희를 다스리리니 저희 아름다움이 음부에서 소멸하여 그 거처조차 없어지려니와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구속하시리로다 사람이 치부하여 그 집 영광이 더할 때에 너는 두려워 말지어다 저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 영광이 저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 저가 비록 생시에 자기를 축하하며 스스로 좋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지라도 그 역대의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니 영영히 빛을 보지 못하리로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인간은 참으로 어리석고 미련한 존재이다. 존귀한 존재로 지음을 받았지만 도살되는 짐승처럼 무의미하고 헛된 일에 분주하게 살다가, 의미 있는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죽어 무덤에 묻힌다.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죽은 자를 무덤에 묻지만, 사실상 그러한 행동은 자신들이 믿는 과학과 이율배반적인 것이다. 오늘날은 과학이란 이름 하에 과거의 모든 인류 역사의 신념과 종교적 전통을 부정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진화론을 주장하는 다양한 학문의 학자들조차도 부귀영화에 눈이 멀어 있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 세상의 생명에 대한 애착, 재물에 대한 욕심, 그리고 헛된 죽음은 그들이 진리라고 믿는 과학과 실제적인 인생이 얼마나 거리가 먼 것인지를 보여준다.
사람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대단히 존귀하게 지음을 받았는데, 죽음 앞에서 얼마나 허무하고 무의미한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는 독재와 억압, 폭정, 전쟁을 보라! 제 2차 세계 대전과 같이 참혹한 전쟁을 경험한 많은 사람들은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데, 그 만큼 인간의 삶과 사회 속에는 가공할 만한 죄악들과 불합리한 것들이 만연하고 있다. 한창 꽃다운 젊은이들 대열을 지어 전쟁터에 보내지고,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소중한 생명을 무의미하게 총부리 앞에 빼앗겨 버렸다. 수 많은 정복자들과 파괴자들이 그 소중한 생명을 앗아가고 인간의 삶을 파괴하지만, 그들이 세상에서 영웅으로 추앙을 받고 있다. 이것이 모두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 생명의 가치와 소중함을 부정하는데서 비롯된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불순종하며 서로에게 총칼을 들여대며 세상을 파괴해 놓고, 그 참혹한 결과에 대해서는 하나님을 비방하는 것이다. 이러한 불합리한 세상에서 하나님은 숨어 계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에 대한 개입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눈에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지구가 자전하면서 어마어마한 소리를 내지만 정작 그 지구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지구가 도는 것과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인류 전체의 역사를 이끌어 가시고 있다. 한 순간 한 순간 그 분의 일하심이 세상 사람들 모두에게 감지되고 있지는 않지만, 일년이 가면 지구에는 많은 변화가 있고, 또 결과적으로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한 바퀴 돈 것처럼, 하나님의 역사는 잠깐 이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이 많은 변화를 감지하지는 못할지라도 인류 역사를 연구해 보면 하나도 하나님께서 개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만큼 명백한 것이다.
성경은 한 사람의 생명을 천하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마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묵숨을 바꾸겠느냐"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사람의 생명이다. 잠시 이 세상에서 사는 생명도 천하보다 소중하다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시고자 하시는 영원한 생명은 그 무엇과도 비교하거나 바꿀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부활과 심판, 천국과 지옥이 없다면 이 세상의 만연한 불합리와 불평등은 영원히 미결된 상태로 남을 것이다. 부활과 심판, 천국과 지옥이 없다면 이 세상에서 의미있고 가치 있게 살 이유도 없을 것이다. 천국과 지옥이 없다면 이 세상의 삶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드시 이 세상의 모든 죄악과 불의에 대해 반드시 심판하시고 형벌을 내리실 것이다.
로마서 2:4-5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3)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
우주만물의 창조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선하심과 모든 영광의 표현이다. 그것은 마치 예술가의 마음 속에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 그림으로 그려져서 세상에 표출되어 나타난 것과 같다. 하나님은 스스로 부족한 것이 없이 자족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주만물을 창조하지 않았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에 부족함이 없다. 우리가 우주와 지구, 그리고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면서 그 신비함과 아름다움의 극치에 감탄을 금치 못하듯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을 때의 우주와 이 세상은 무한히 선하고 아름다웠다. 이러한 창조에 대한 자세한 묘사가 창세기 1장에 잘 묘사되어 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사람들은 인간의 타락과 만연하는 죄악들과 저주와 불행을 보면서 "만일 미래의 인류의 불행을 미리 아셨던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지 않았더라면, 혹은 인간을 창조하시지 않았더라면, 혹은 선악과를 두시지 않았더라면" 등등의 아쉬움을 표현한다. 하지만 정확한 의미에서 창조도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과 선하심과 영광의 표현이며, 인간의 창조도 그렇고, 인간의 범죄와 타락도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과 선하심과 영광을 가리울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반역과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실망시키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자비와 공의를 끝까지 보여주심으로써 그러한 하나님의 속성이 더욱 아름답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한 목적이며, 인간이 살며 추구해야 하는 목적이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사람의 삶의 참된 태도이다. 이것은 또한 인간의 삶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해 주는 것이며, 최후의 심판의 기준이 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과 주신 명령은 창세기 1-2장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창조한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정복하고 다스리고 지키라는 것이었다. 사람은 이 세상의 청지기이다. 이것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과의 관계는 분명하게 연결된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에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에 따라 순종하며 살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 세상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과 지혜와 창조의 능력을 계속해서 충만히 채워가야 할 의무가 주어졌는데,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과 기대를 배반해 버린 것이다. 인간이 타락했다고 해서 인간의 삶의 목적이 변경된 것은 아니다. 범죄하고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를 다시 회복하고 계속해서 하나님을 순종하며 기쁘시게 해 드리고,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사람이 만든 모든 것이 항상 사람의 기쁨과 행복과 영광을 위하여 존재하듯이, 사람은 한결같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고 즐거워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도록 지음을 받았다.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의 영광을 위하여 존재하는데, 인간도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 인간은 자신보다 무가치한 돈과 재물을 위해 사는 것은 스스로 자신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보다 크실 뿐만 아니라 영원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섬김다는 것은 인간에게 엄청난 특권이며 영광이다.
사 43:7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하나님은 인생의 의미와 가치도 발견하지 못하고, 목적도 소망도 없이 방황하는 죄인들을 향하여 날마다 자기 손을 내미시는 분이시다.
사 65:1-2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좇아(따라) 불선한 길을 행하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나"
하나님은 한 사람도 멸망치 않기를 원하시며, 인생을 무의미하게 살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행복과 영광을 우리 인간들과 함께 나누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패역함도 치료해 주시기를 원하시고, 우리에게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 풍성하고 영원한 삶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인간이 자신의 소유물을 소중히 여기는 것처럼, 하나님은 비록 범죄하여 불선한 길을 가는 우리들이지만 소중히 여기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억지로 사람들의 복종을 강요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역사와 우리의 삶에 깊이 개입하시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사실상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죄인에게 찾아오시며 화해의 손을 내미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발적인 순종을 더 기뻐하시기 때문에 일단 하나님의 내민 손을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는 자신을 더욱 더 분명하게 나타내시는 분이시다.
단,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단순히 하나의 종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교회에 다니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을 인정하고 종교 의무들을 행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와 보호자로 믿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며 사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형성하기 위해서는 끊임 없이 하나님을 알아가야 한다.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섬김 수는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아가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을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사랑하며 존경하는 것이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사람은 어디서 와서, 무엇을 위해 살고, 어디로 가는 존재인가?
일반적으로 말할 때, 사람들은 위의 세 가지 가장 중요하고도 가장 근본적인 자기 자신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모르고 살아간다. 이에 대한 답을 인간 세상에서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사실상 사람들은 이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고 하지 않고 체념한 채 살아간다.
이 문제에 대해서 적어도 과학과 진화론은 절대적으로 만족할만한 답변을 제공해 주지 못한다. 인간의 근원은 곧 인간의 존재 의미와 목적을 설명해 주는 유일한 단서인데, 진화론에 바탕을 둔 과학은 인간의 근원을 불확실한 가설에서 시작하고 있다. 우주와 지구로부터 생명이 우연히 탄생하여 무한대의 진화 과정을 거쳐 인간이 되었으며, 결국 현재 존재하는 모든 미생물과 생물이 인간의 근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인간의 가치와 의미와 목적을 설명해 주기는 커녕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조차 무의미하게 만든다.
한편 사람들은 소유나 성취를 통해 삶의 의미를 발견하려고 한다. 다른 사람보다 더 좋은 것을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높은 지위에 올라가는 것을 삶의 목표로 정하고 거기에서 삶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소유와 성취는 사람의 생명만큼이나 매우 일시적인 것이고 유한한 것이며 덧 없이 사라지고마는 것들일 뿐이다. 결국에는 그러한 것들을 소유하고 성취하기 위해 시간과 에너지와 삶의 모든 것을 희생한 만큼 돌아오는 것은 허탈하고 공허한 결과 뿐이다.
1) 인간은 자신의 근원을 모르고 살아간다.
2) 인간은 자신의 삶의 이유, 의미, 가치, 목적을 모르고 살아간다.
3) 인간은 자신의 삶에 대한 최종적인 방향과 결과를 모르고 살아간다.
4) 위의 세 가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은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한 가지 질문으로도 요약이 될 수 있다.
나는 위의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여러 가지 과정을 통해 관찰해 본 후에 최종적인 결론을 내리려고 한다. 이 주제 자체가 쉬운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인내심을 가지고 고민하며 이 글을 끝까지 읽고 나서 인생이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충분히 찾았는지, 아니면 그렇지 못한지에 대한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나의 과거의 쓰라린 방황을 이야기하고 싶다.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공부에 대한 흥미를 갑자기 잃어버렸다. 그런 상태로 대학에 입학했지만, 삶은 더 이상 흥미롭지도 의미가 있지도 않았다. 매일 술을 마시며 살았는데, 자살에 대한 충동을 강하게 느꼈지만 실행에 옮길만큼 용기가 있기도 않았다. 열심히 공부하던 내가 매일 술을 마시며 방황하는 것을 지켜보던 부모님의 실망과 아픔도 이루다 말로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떻게 하든 이 세상에서 도피하고 싶어서 군대에라도 가고 싶었다. 85년도에 해병대에 두 세 번 지원했지만, 모두 낙방했다. 매일 술을 마시며 대학을 다니는 것도 무의미하게 느껴져서 휴학을 했다. 그리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막노동을 하며 생활했다.
그 동안 얼마나 인생이 허무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졌는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그 때 스스로에게 가장 많이 했던 진지한 질문이 바로 인생에 관한 것이었다. "사람은 어디에서 왔는가? 무엇을 위해,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죽음 이후에는 어디로 가며, 어떻게 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 철학책을 뒤져 보기도 했다. 사람들과 토론도 해 보았다. 오랫 동안 세상에서 인생을 경험한 노인들이라면 어느 정도 인생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줄 수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그들과 대화도 해 보았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인생에 대한 일반적이고도 근본적인 해답을 제공해 주지 못했다.
1. 인간은 어디에서 왔는가?
사람이 부모에게서 태어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이 인간이 어디에서 왔는가에 대한 해답을 충분히 제공해 주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라고 할 때는 전체적이고 통칭적인 개념이다. 인간이 어디에서 왔느냐에 대한 질문은 보다 근본적인 질문으로 전체 인간의 근원과 시작에 대한 질문이다.
부모가 우리를 낳기는 했지만, 그들이 구체적으로 우리를 탄생을 결정한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는 부모가 원치 않았는데도 태어난 사람도 있다. 그리고 부모가 자녀의 출생을 모두 계획하고 자기가 원하는 모양과 형태로 낳을 수도 없다. 이 세상에 내가 원해서 태어난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부모들도 마찬가지이며, 그 이전의 조상들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출생을 결정하지도, 다른 사람의 출생과 인생을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진화론과 과학은 인간의 출생을 더욱 더 많은 불확실의 세계로 인도한다. 이 세상에서 모든 종류의 동물은 출생이라는 과정을 거친다. 각각의 종은 대대로 이어지는 동일한 종의 출생에 의해 이 세상에 존속 가능하다. 진화론은 인간의 근원적인 탄생에 대해서 충분한 설명을 해 주지 못한다. 진화론에는 무수한 모순들이 존재해서 그 수를 다 헤아릴 수도 없다. '잃어버린 연결 고리'만 해도 그렇다. 더군다나 진화론으로는 인간의 존재 가치나 의미를 전혀 설명해 주지 못한다. 진화론으로 보는 인생은 그 자체로 무의미하다. 그렇다면 진화론을 가지고 인생의 의미와 가치, 목적을 토론할 수는 없다. 인간이 원숭이에서 진화된 존재라는 것, 더군다나 최초의 근원이 아메바였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다. 만일에 인간의 근원이 아메바였고, 거기에서 시작되었다면 인간의 가치와 의미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렇다면 인간을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것들과 구별이나 차별, 즉 다른 특별한 점이 있을 수 있는가? 소외 말하는 과학적이라는 진화론, 즉 오늘날 세상에서 가장 설득력이 있다고 주장하고, 또 모든 학교와 매스 미이디어에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모든 세상 학문의 기초로 제시되고 있는 진화론은 인간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질문과 해답을 처음부터 부정해 버린다.
2. 인생의 의미와 가치와 목적은 무엇인가?
인간의 생명이 대단히 소중하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물론 유물론주의자들은 인간의 영혼과 생명까지도 일종의 물질로 보기 때문에, 사람의 생명을 아깝게 생각하지 않고 자기들에게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을 마치 거치장스러운 방해물이나 쓰레기를 치우듯이 탱크로 짓밟아 죽인 일도 있었다. 진화론과 유물론은 결국 동일한 부류이다. 진화론이 인간의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든 하지 않든, 인간의 근원을 원자와 아메바로 찾는 한 인간의 생명에 대한 가치는 제대로 평가될 수 없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아깝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자신의 생명은 아깝게 생각한다.
사람은 이 세상에서 대단히 가치가 있는 존재이다. 인간의 삶은 대단히 의미 있는 그 무엇을 위해 존재한다. 인간의 삶에는 어떤 목적이 존재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가치와 의미와 목적을 찾지 못한 채 살아간다는 것이다. 인간의 절대적인 가치는 돈이나 재산의 정도에 의해 평가되는 것이 아니다. 또 그렇게 되어서도 안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를 소유에서 발견하려고 한다. 많이 소유한 사람은 자신의 생명의 가치가 보다 덜 소유한 사람의 생명보다 더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믿고 살며, 교만하게도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들 위에서 그렇게 표현하며 군림하려고 한다. 그렇다면 가난하고 병들고 어리거나 늙은 사람들의 생명은 부귀와 권세를 누리는 사람들의 생명보다 상대적으로 무가치한 것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각 사람의 생명의 가치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제대로 평가되어질 수 없을 만큼 숭고한 것이다.
문제는 사람들 각자가 자신의 생명과 인생의 의미를 제대로 발견할 수 없다는데 있다. 인간의 삶과 생명은 대단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도, 그 가치와 의미를 어디에서 발견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자신의 존재와 그 존재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지 모르는 것이다. 이 때문에 때때로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을 미워하며 학대하기도 하고, 방치하거나 포기하기도 한다. 인간 사회 내부에서 모든 사람들이 함께 어울리며 살아가는데, 그 중의 한 사람도 스스로 인간의 생명의 가치와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우스꽝스럽고 불행한 것이다. 수 억의 인구가 서로를 마주 대하며, 상호작용하며 살아가지만, 그 많은 인생 한 가운데에서 정작 자신의 인생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방황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나중에 밝혀질 것이다.
3. 인생의 최종적인 방향과 결과는 무엇인가?
불교는 무와 윤회를 동시에 주장한다. 불교는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은 인간의 근본적인 질문들로부터 출발한다. 인간이 겪고 있는 불행과 고통과 저주와 불조리가 다 어디에서 왔는가? 이것은 불교의 질문이면서 모든 인간의 질문이기도 하다. 시초의 불교는 인간의 보다 근본적인 근원에서부터 질문을 시작하지 않았다. 현재적인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삶으로부터 질문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해답도 인간의 최종적인 결과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끝 없는 윤회에 관한 것이다. 이 지구의 동식물에 한정된 윤회사상은 지구가 사라진다면 무의미해질 것이다. 진화론적으로 인생의 최종적인 방향과 결과에 대해 생각해 본다면, 역시 인간의 존재란 죽음이 끝일 수도 있지만, 전체 인류에 대한 것이라면 지구의 종말이 오는 것으로 끝이 날 것이다. 만일 새로운 종류의 생명체가 시작하더라도 그것이 인간이 될 것이라고는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개인의 죽음이 곧 개인의 최종적인 종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죽음과 반대되는 개념의 인간의 탄생은 개인의 근원적인 시작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무수한 조상들의 총합이 있었다. 죽음 또한 그럴 것이라고 생각해야 되지 않은가? 인생의 의미를 생각할 때, 그것은 개인의 구체적이고 특별한 삶의 이유를 묻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일반적인 이유와 가치와 의미와 목적이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일반적인 존재 가치와 목적은 각 개인의 것이기도 되기 때문이다.
만일에 사람들의 삶이 이 세상의 짧은 인생이 전부이고,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면 그 자체로 인생은 무가치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인생을 의미 있고, 소중하게 산다는 것에 아무런 기준이나 이유를 발견할 수 없다. 무엇이 올바른 삶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의미 있는 삶인가? 이것은 우리의 죽음 앞에서 진지하게 해 보아야 하는 것인데, 죽음으로 인생의 모든 것이 끝나버린다면, 이런 질문을 할 필요가 없다. 죽음을 사람의 최후로 보고, 더 이상의 사후 세계에 대한 불신 때문에 세상에는 비관주의와 쾌락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한 번 뿐인 인생 마음껏 즐기다 죽자는 것이다. 거기에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아무런 책임 의식도 없다. 자기 자신의 인생에 대해 아무런 책임 의식이 없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성실하고 진실할 수는 없는 것이다.
4.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인간은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세상의 모든 존재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자기와 다른 사물이나 사람들과 개별적이고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설명할 필요가 없다. 사람은 부모와의 관계에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가장 친밀하고 사랑스러운 관계이어야 하는데, 불행하게도 그렇게 표현되지 못할 때도 많다. 형제자매와의 관계, 크고 작은 사회와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 우주와의 관계, 사물과의 관계 등 그 어떤 것 하나도 땔래야 땔 수 없고,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는 관계 속에 묶여 있다.
이러한 관계에는 일련의 질서와 원칙들이 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질서와 원칙은 서로에 대한 사랑과 신뢰와 의존, 의무와 책임을 바탕으로 한다. 자녀는 부모를 존경하며 사랑해야 하고, 부모는 자녀를 긍휼히 여기며, 책임지고 돌보아 주어야 한다. 인간의 상호의 의존 관계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사물에게까지 확장된다. 그런데 인간 상호 간의 관계는 상호 종속적이다. 거기에는 서로에 대한 신뢰와 사랑과 책임과 의무가 존재한다. 이것이 깨어지면 관계도 깨어진다. 인간과 사물과의 관계는 일방적이다. 왜냐하면 사물은 철저히 인간의 소유물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하면 인간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주인인 셈이다. 다른 사람의 존재 가치가 다른 사람에 의해 평가되지 않고, 각 자의 절대적인 가치를 갖는데 비해, 사물의 존재 가치는 인간에 의해 평가된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물의 존재 가치는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인간에게 해로운 사물은 일반적으로 무가치한 것이다. 인간이 사용하지 않고 버린 것도 무가치한 것이다.
5. 사람은 어디에서 와서, 무엇을 위해 살고, 또 어디로 가는 존재인가?
위에서 짧지만 여러 각도로 인생의 근원과 의미와 최종적인 방향에 대해 관찰해 보았다. 이제 최종적인 답변을 하고자 한다.
세상은 암흑 속에서 사는 것과 같다.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존재의 의미와 가치가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또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사실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약간은 알만한 것들도 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창조주에 대한 믿음 같은 것이 있다. 또 선악과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력과 이성도 있다. 또 사후세계에 대한 희미한 믿음과 영원을 사모하는 강렬한 마음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희미한 것들을 분명하게 볼 수 있는 방법이 인간 내부에서 사라져 버렸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의 존재, 즉 인간의 근원과 존재의 의미와 가치와 목적, 그리고 최종적인 방향에 대한 해답은 창조주 하나님 안에서만 찾을 수 있고, 회복할 수 있고, 온전하게 누릴 수도 있다.
인간의 타락, 즉 아담과 하와의 범죄와 타락으로 인간에게 있었던 지식과 지혜와 거룩하고 선한 성품은 심각하게 파괴되고 오염되으며, 악하게 변질되었다. 죄와 타락의 영향으로 가장 크게 손상을 입은 것은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인간이 자신의 존재와 그 존재 가치와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길은 창조주 하나님께 돌아와 자신의 잘못된 삶을 고침받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길 밖에는 없다.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불신할 때 절대로 발견할 수 없는 인생의 근본적인 질문들은,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와 그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 때 완전하고 충만하게 소유할 수 있게 된다.
내가 예수를 믿기 전 고통스럽게 방황하며 질문했던 것들에 대한 해답은 애당초 사람들을 통해 발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창조주 하나님과의 회복된 관계를 갖지 못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셨는데, 그것은 나 개인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신뢰와 헌신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위에서 살펴본 내용을 아래와 같이 정리해 보려고 한다.
삶의 의미와 가치 -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의 삶의 의미와 가치를 결정짓는 요소)
삶의 의미의 가치 - 하나님의 형상 (인간의 생명의 근원에 대한 해답, 그리고 인간의 가치에 대한 해답)
삶의 목적 - 하나님을 순종하며 기쁘게 해 드리는 삶과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 (인간의 삶의 목적과 삶에 대한 심판의 기준)
1)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
이것은 인간의 삶의 의미와 가치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사물)은 인간을 위해 창조된 것이다. 비록 인간의 타락으로 질서가 파괴되기는 하였지만, 원칙적으로 말할 때, 인간은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주인이다.
창 1:27-29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간이 주인이기 때문에 그것의 절대적인 가치보다도 인간에 의해서 사용되는 방법과 목적에 따라 그 가치가 결정된다. 예를 들어 사람이 만든 크고 작은 모든 것, 자동차, 신발, 비행기, 종이, 옷, 배, 안경, 총, 집 등은 그것들을 만들고 사용하는 방법과 목적에 따라 그 가치와 의미가 결정된다. 그리고 그것들은 인간에게 철저하게 종속되어 있고, 또 인간에 의해 사랑을 받으며 올바로 쓰임을 받을 때 엄청난 의미와 가치를 준다. 그 가치와 의미를 제대로 안다면 그것이 새 것이라고 더 가치 있는 것이 아니고, 헌 것이라고 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새롭고 비싼 것이 더 가치 있다고 평가하고 더 많은 돈을 지불하지만, 실제 가치는 금전적인 가치와 전적으로 다르다.
예를 들어 신발을 예로 들어보자! 새 신발은 헌 신발에 비해 일반적으로 비싸고 소중하게 생각될 것이다. 하지만 인간에게 편리함과 안정됨과 기쁨을 주며, 인간의 발과 마음을 섬기며 영광을 주는 것은 헌 신발이라고 부족한 것이 아니다. 신발을 신는 이유는 맨 발로 다닐 때 겪게 될 아픔과 질병과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함으로써 자신의 행복과 영광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예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종이와 집, 종이와 자동차의 절대적인 가격은 엄청나게 큰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손에 의해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따라서 그 가치와 의미는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다. 종이 한 장의 객관적인 가치와 의미는 참으로 보잘 것 없지만, 그 종이를 매매문서로 사용할 때의 가치, 그 종이를 국가 보안이나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어떤 칙령을 위해 사용할 때의 가치는 대단한 것이다. 반대로 아무리 비싼 비행기라고 하더라도 오랫 동안 주인에 의해 사용되지 않고 방치되어 있다면 그 가치의 의미는 보잘 것 없는 것이다. 극단적인 예로 아주 비싼 차를 사막에 버렸다고 한다면 그 차는 사막의 쓰레기 고철과 같은 것이다.
위와 같은 예를 드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인 그 주인인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만 그 가치와 의미를 제대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제 각지 나름대로의 존재 가치와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정작 사람은 자신의 존재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그렇다면 사람이 자신의 존재 의미와 가치와 목적을 발견하지 못하고 방황하며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를 만들고 생명을 준 창조주 하나님을 모르고 살기 때문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그와 관계를 회복하지 않는 한 인간 자신은 마치 자존하는 존재처럼 착각하며 살게 되어 있다. 그런데 사실상 인간은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가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를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그 관계를 인정하지 않고는 인간의 삶의 진정한 회복이란 기대할 수 없다.
우리 인간이 겸손히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고 피조물인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수 많은 사람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고 자신이 그의 피조물인 것을 인정하는 것보다 지옥의 형벌을 더 기뻐하는 것 같다. 오늘날 세상의 모든 학문과 과학과 문화는 하나님과 그의 창조를 부인하고 그 대신 인간이 스스로 진화한 존재이며, 인간의 모든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해 나갈 수 있다고 장담하는 분위기이다.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욕망은 사탄의 욕망이었으며, 사탄이 인간을 타락시킬 때 사용했던 것으로 인간의 역사만큼 오래된 것이다.
창 3:4-5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인간이 자신이 왜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고 되는대로 인생을 허비하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학대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떠나 마음대로 살면 더 행복할 것 같아도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이 없이 인생을 산다는 것은 그 자체로 무의미한 삶을 살겠다는 선택이다. 사실 이것만큼 중요한 인생에 대한 질문이 어디 있는가? 자신의 삶에 대한 의미와 목적을 모르고 어떻게 인생을 살 수가 있는가? 그러면서 어떻게 인생에 대해 회의를 품지 않고 평안하게 살 수 있는가?
주인의 손에서 떠난 사막의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자동차가 되느니, 차라리 주인의 손에 쓰임을 받는 한 장의 종이가 되는 것이 낫지 아니한가? 사람이 자신의 존재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신처럼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면서 사는 독립적인 존재로 살겠다고 하는데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하나님을 부정하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하면서 살면 행복할 것 같은데, 사실상 자신의 존재 가치와 의미와 목적을 모두 잃어버렸다.
사막에 방치된 차가 창조주인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라고 가정하여 생각해 보자!
'차는 갑자가 인간이 싫어졌다. 더 이상 인간을 섬기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 자신을 위해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싶었다. 그래서 인간을 떠났다' 이제 차는 더 이상 인간에게 순종할 필요도 없고, 봉사할 필요도 없으며, 인간에게 기쁨과 영광이 되어줄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차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는가? 인간을 위해서 창조된 차는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만 가치와 의미가 있다. 그것이 인간을 섬기며 인간에게 안전과 편안하고 즐거운 여행을 제공할 때 그 가치는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인간을 떠나 스스로 존재하는 차는 스스로 아무런 가치를 발견할 수 없다.
인간이 하나님께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돌아와 겸손히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기로 다짐하면 자신의 존재의 가치와 의미를 모두 회복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착하고 의로운 삶을 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인간 자신에게 엄청난 의미를 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행복과 영광을 위해 우리 인간들을 창조하셨으며, 우리들에게 선한 계명들을 주셨던 것이다. 누구든지 언제 어느 곳에서 살든지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를 깨닫고, 그 때문에 불행해지고 무의미해진 자신의 삶을 회복하려고 창조주 하나님께 돌아오려는 자들은 하나님은 지금도 애타게 기다리고 계신다.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몫)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다 없이 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서로의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2)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
인간이 자신이 창조되었다고 믿는 것과 아메바에서부터 진화한 존재라고 믿는 것 사이에서 어떤 것이 더 의미가 있는지 충분히 알 것이다. 사람이 원숭이에서 진화되었다고 믿는 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굴욕적인 사실인가? 그런데 그 최초의 근원이 아메바였다고 말하는 것은 더욱 굴욕적인 것이다. 그런데 진화론을 믿는 사람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보다다는 그 굴욕적인 선택을 더 선호한다. 진화론은 이데올로기를 초월하여, 그리고 종교를 초월하여 오늘날 전 세계의 모든 곳에서 과학이라는 이름 하에 맹목적으로 받아들여진다. 반면에 창조에 대한 믿음은 원시적이고 미개한 미신과 같은 것으로 취급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사실 사람은 피조물이지만, 하나님을 닮은 존재이기 때문에 사탄의 유혹처럼 하나님처럼 되려고 할 필요가 없었다. 사람이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유일한 것이 있다면, 바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동물들처럼 단지 생각을 하고, 지각을 사용한다는 것 이상이다. 인간에게 부여하신 하나님의 형상은 거룩함, 신실함, 인자하심, 선하심, 의로움, 자비로움, 충성스러움, 사랑, 지식, 지혜, 창조의 능력 등 하나님과 닮은 많은 성품과 속성들을 의미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은 아담의 범죄와 타락으로 심각하게 오염되었지만,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래서 온전하지는 않지만, 인간에게는 불의 앞에서 울분을 품고, 선한 일을 보면 기뻐하고, 기발한 것들을 창조해 나가는 지혜와 능력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님의 형상은 타락 이후 심각하게 부패하여 사랑을 해도 이기적이고, 다른 사람에게 신실하고 정직하고 의롭고 자비롭게 대하기 보다는 탐욕스럽고 부정직하고 악하다. 사람마다 그 정도가 다르기는 하지만, 인간 사회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보는 것은 처음 창조되었을 때의 하나님의 형상보다는 인간을 타락시켰던 사탄 마귀의 간사함과 악함과 교만과 불의로 가득 차 있는 인간들의 생각과 행동을 접하며 살아간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불행하고 고통스럽게 된 가슴 아프고 슾픈 근본적인 원인이다. 인간은 점점 더 많은 악행으로 서로를 파멸로 몰아가고 있다.
이 주제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의 가치와 의미가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가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이 점에 좀 더 집중하도록 하자!
시 8:3-8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우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신의 형상으로 만드신 것은 영화와 존귀로 면류관을 씌워준 것이다. 거기에다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다스리도록 자치적인 통치권을 주셨다. 이것이 바로 인간보다 힘이 센 야수들이 함부로 인간을 덤비지 않는 이유이다. 물론 처음에 이 질서는 완전했다. 하지만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불순종하고 하나님처럼 되려고 반역을 꾀했을 때, 일반적인 의미에서 세상의 질서도 엄청난 정도까지 파괴되었다.
인간은 흙으로 지음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숨결(생명의 영)과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존재이다.
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살아있는 영)이 된지라"
이 때문에 외적으로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인간과 동물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사람은 본성적으로 알고 있다. 그 차이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지만, 동물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통치하는 주인이지만, 동물들은 그 통치를 받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것만큼 인간의 존재와 가치에 대해 올바른 설명을 해 주는 것은 없다.
사실상 하나님은 인간에게 신적인 것(하나님의 형상)을 나누어 주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을 신이라 부르기도 한다. 따라서 인간은 별도로 하나님처럼 되려고 추구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충분한 영광과 권능이 있었다.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과의 사이에는 오로지 질서와 순종의 의무, 그리고 그로 인한 구분만 있었다. 따라서 창 2:15, 16은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 사이의 질서를 정해주는 최소한의 명령이었다고 이해된다. 에덴 동산에는 금지된 한 가지 선악과 외에는 인간을 속박하는 아무 것도 없었다. 이 명령은 단지 순종하기만 하면 지켜지는 것이었다. 순종하기 어려운 명령도,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도 아니었다. 사실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그 분 안에서 사는 모든 삶이 이와 같다. 하나님의 명령이 지키기 어려운 것 같아도 순종하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도 지키기 어려운 것이 없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케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사람은 위대하게 지음을 받았다. 창조물 중에서 으뜸으로 세움을 받았다. 성경은 비록 인간이 흙으로 지음을 받았지만, 그 존귀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하나님처럼 "신"으로 불릴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시 82:6, 7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너희는 범인 같이 죽으며 방백의 하나 같이 엎더지리로다"
요 10:34, 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늘"
물론 인간이 교만하게 하나님 행세를 하며 하나님을 모독해서는 안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성경의 선언을 통해서 인간이 얼마나 존귀한 존재로 창조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성경이 말하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귀하게 지음을 받은 존재이다. 다른 모든 피조물들보다 뛰어난 존재이다. 이 세상에서는 잠깐 동안 천사들보다 못하지만, 이 고난의 풀무불을 통과하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천사들보다 뛰어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에 사는 수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 같다. 차라리 아메바나 원숭이 처럼 미물과 동물이 되는 것이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시 49:1-20
"만민들아 이를 들으라 세상의 거민들아 귀를 기울이라 귀천빈부를 무론하고 다 들을지어다 내 입은 지혜를 말하겠고 내 마음은 명철을 묵상하리로다 내가 비유에 내 귀를 기울이고 수금으로 나의 오묘한 말을 풀리로다 죄악이 나를 따라 에우는 환난의 날에 내가 어찌 두려워하랴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풍부함으로 자긍하는 자는 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 구속하지 못하며 저를 위하여 하나님께 속전을 바치지도 못할 것은 저희 생명의 구속이 너무 귀하며 영영히 못할 것임이라 저로 영존하여 썩음을 보지 않게 못하리니 저가 보리로다 지혜 있는 자도 죽고 우준하고 무지한 자도 같이 망하고 저희의 재물을 타인에게 끼치는도다 저희의 속 생각에 그 집이 영영히 있고 그 거처가 대대에 미치리라 하여 그 전지를 자기 이름으로 칭하도다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저희의 이 행위는 저희의 우매함이나 후세 사람은 오히려 저희 말을 칭찬하리로다 양 같이 저희를 음부에 두기로 작정되었으니 사망이 저희 목자일 것이라 정직한 자가 아침에 저희를 다스리리니 저희 아름다움이 음부에서 소멸하여 그 거처조차 없어지려니와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구속하시리로다 사람이 치부하여 그 집 영광이 더할 때에 너는 두려워 말지어다 저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 영광이 저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 저가 비록 생시에 자기를 축하하며 스스로 좋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지라도 그 역대의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니 영영히 빛을 보지 못하리로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인간은 참으로 어리석고 미련한 존재이다. 존귀한 존재로 지음을 받았지만 도살되는 짐승처럼 무의미하고 헛된 일에 분주하게 살다가, 의미 있는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죽어 무덤에 묻힌다.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죽은 자를 무덤에 묻지만, 사실상 그러한 행동은 자신들이 믿는 과학과 이율배반적인 것이다. 오늘날은 과학이란 이름 하에 과거의 모든 인류 역사의 신념과 종교적 전통을 부정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진화론을 주장하는 다양한 학문의 학자들조차도 부귀영화에 눈이 멀어 있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 세상의 생명에 대한 애착, 재물에 대한 욕심, 그리고 헛된 죽음은 그들이 진리라고 믿는 과학과 실제적인 인생이 얼마나 거리가 먼 것인지를 보여준다.
사람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대단히 존귀하게 지음을 받았는데, 죽음 앞에서 얼마나 허무하고 무의미한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는 독재와 억압, 폭정, 전쟁을 보라! 제 2차 세계 대전과 같이 참혹한 전쟁을 경험한 많은 사람들은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데, 그 만큼 인간의 삶과 사회 속에는 가공할 만한 죄악들과 불합리한 것들이 만연하고 있다. 한창 꽃다운 젊은이들 대열을 지어 전쟁터에 보내지고,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소중한 생명을 무의미하게 총부리 앞에 빼앗겨 버렸다. 수 많은 정복자들과 파괴자들이 그 소중한 생명을 앗아가고 인간의 삶을 파괴하지만, 그들이 세상에서 영웅으로 추앙을 받고 있다. 이것이 모두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 생명의 가치와 소중함을 부정하는데서 비롯된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불순종하며 서로에게 총칼을 들여대며 세상을 파괴해 놓고, 그 참혹한 결과에 대해서는 하나님을 비방하는 것이다. 이러한 불합리한 세상에서 하나님은 숨어 계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에 대한 개입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눈에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지구가 자전하면서 어마어마한 소리를 내지만 정작 그 지구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지구가 도는 것과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인류 전체의 역사를 이끌어 가시고 있다. 한 순간 한 순간 그 분의 일하심이 세상 사람들 모두에게 감지되고 있지는 않지만, 일년이 가면 지구에는 많은 변화가 있고, 또 결과적으로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한 바퀴 돈 것처럼, 하나님의 역사는 잠깐 이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이 많은 변화를 감지하지는 못할지라도 인류 역사를 연구해 보면 하나도 하나님께서 개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만큼 명백한 것이다.
성경은 한 사람의 생명을 천하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마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묵숨을 바꾸겠느냐"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사람의 생명이다. 잠시 이 세상에서 사는 생명도 천하보다 소중하다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시고자 하시는 영원한 생명은 그 무엇과도 비교하거나 바꿀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부활과 심판, 천국과 지옥이 없다면 이 세상의 만연한 불합리와 불평등은 영원히 미결된 상태로 남을 것이다. 부활과 심판, 천국과 지옥이 없다면 이 세상에서 의미있고 가치 있게 살 이유도 없을 것이다. 천국과 지옥이 없다면 이 세상의 삶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드시 이 세상의 모든 죄악과 불의에 대해 반드시 심판하시고 형벌을 내리실 것이다.
로마서 2:4-5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3)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
우주만물의 창조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선하심과 모든 영광의 표현이다. 그것은 마치 예술가의 마음 속에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 그림으로 그려져서 세상에 표출되어 나타난 것과 같다. 하나님은 스스로 부족한 것이 없이 자족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주만물을 창조하지 않았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에 부족함이 없다. 우리가 우주와 지구, 그리고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면서 그 신비함과 아름다움의 극치에 감탄을 금치 못하듯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을 때의 우주와 이 세상은 무한히 선하고 아름다웠다. 이러한 창조에 대한 자세한 묘사가 창세기 1장에 잘 묘사되어 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사람들은 인간의 타락과 만연하는 죄악들과 저주와 불행을 보면서 "만일 미래의 인류의 불행을 미리 아셨던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지 않았더라면, 혹은 인간을 창조하시지 않았더라면, 혹은 선악과를 두시지 않았더라면" 등등의 아쉬움을 표현한다. 하지만 정확한 의미에서 창조도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과 선하심과 영광의 표현이며, 인간의 창조도 그렇고, 인간의 범죄와 타락도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과 선하심과 영광을 가리울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반역과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실망시키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자비와 공의를 끝까지 보여주심으로써 그러한 하나님의 속성이 더욱 아름답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한 목적이며, 인간이 살며 추구해야 하는 목적이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사람의 삶의 참된 태도이다. 이것은 또한 인간의 삶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해 주는 것이며, 최후의 심판의 기준이 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과 주신 명령은 창세기 1-2장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창조한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정복하고 다스리고 지키라는 것이었다. 사람은 이 세상의 청지기이다. 이것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과의 관계는 분명하게 연결된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에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에 따라 순종하며 살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 세상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과 지혜와 창조의 능력을 계속해서 충만히 채워가야 할 의무가 주어졌는데,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과 기대를 배반해 버린 것이다. 인간이 타락했다고 해서 인간의 삶의 목적이 변경된 것은 아니다. 범죄하고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를 다시 회복하고 계속해서 하나님을 순종하며 기쁘시게 해 드리고,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사람이 만든 모든 것이 항상 사람의 기쁨과 행복과 영광을 위하여 존재하듯이, 사람은 한결같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고 즐거워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도록 지음을 받았다.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의 영광을 위하여 존재하는데, 인간도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 인간은 자신보다 무가치한 돈과 재물을 위해 사는 것은 스스로 자신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보다 크실 뿐만 아니라 영원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섬김다는 것은 인간에게 엄청난 특권이며 영광이다.
사 43:7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하나님은 인생의 의미와 가치도 발견하지 못하고, 목적도 소망도 없이 방황하는 죄인들을 향하여 날마다 자기 손을 내미시는 분이시다.
사 65:1-2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좇아(따라) 불선한 길을 행하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나"
하나님은 한 사람도 멸망치 않기를 원하시며, 인생을 무의미하게 살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행복과 영광을 우리 인간들과 함께 나누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패역함도 치료해 주시기를 원하시고, 우리에게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 풍성하고 영원한 삶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인간이 자신의 소유물을 소중히 여기는 것처럼, 하나님은 비록 범죄하여 불선한 길을 가는 우리들이지만 소중히 여기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억지로 사람들의 복종을 강요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역사와 우리의 삶에 깊이 개입하시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사실상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죄인에게 찾아오시며 화해의 손을 내미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발적인 순종을 더 기뻐하시기 때문에 일단 하나님의 내민 손을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는 자신을 더욱 더 분명하게 나타내시는 분이시다.
단,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단순히 하나의 종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교회에 다니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을 인정하고 종교 의무들을 행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와 보호자로 믿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며 사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형성하기 위해서는 끊임 없이 하나님을 알아가야 한다.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섬김 수는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아가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을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사랑하며 존경하는 것이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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