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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자료] ]하나님의 방법대로

작성자넓은가슴|작성시간10.11.13|조회수729 목록 댓글 0
하나님의 방법대로

책과 저자에 대하여
본서는 그리스도인들 복음을 올바로 이해하게 될 때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며 실패와 좌절의 삶이 힘있는 삶으로 바뀔 수 있음을 증거 한다. 저자는 하나님의 방법대로 사는 길만이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길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저자 / 찰스 W. 프라이스
찰스 프라이스는 유명한 Capernwrary Missionary Fellowship의 실무 대표자이다. 그는 여름마다 Capernwrary홀에서 열리는 컨퍼런스의 총지휘를 하고 있으며 말씀 사역자로서 전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서 문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권에 대한 성경적 해석을 더욱 확실히 해준다. 또한 이 책에서 우리는 그 분과의 관계를 기초로 해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변화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요구와 만나게 될 것이다.

제1장 영접 후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까지
당신은 물이 가득 찬 욕조 안에서 비누 조각을 잡아보려고 애써 본 적이 있는가? 손에 쥐자마자 그것은 곧 당신의 손아귀를 떠나 미끄러져 버릴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기독교 신앙의 경험이라는 것도 이와 같은 경우가 많다. 우리는 살아 계셔서 우리의 문제에 적절하게 간섭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감격의 경험을 한다.
그러나 손에 쥔 것처럼 느끼자마자 그것은 다시 미끄러져 없어져 버리고 단지 기억만이 남아 우리를 절망시키고 만다.
다른 사람들이 도움을 구하러 앞으로 나아갈 때 이렇게 짧은 기도를 드렸던 것이 생각난다. ‘나의 구주 예수님, 제가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오늘밤 저를 그렇게 만들어 주시옵소서!’ 그날 밤 나는 전엔 알지 못했던 어떤 확신을 갖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이후로 이제까지 그 확신을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의 시작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위해 살고 그를 기쁘시게 하려는 모든 태도의 변화, 소망과 의욕은 바로 나의 실제 삶이 내가 손에 쥐기를 그렇게도 열망하는 그 이상에 얼마나 못 미치고 있는가를 날카롭게 인식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기쁨과 열정은 곧 좌절로 변했다. 비록 이것을 완전히 인정한 것은 아니라고 해도 나의 신앙은 실제로 나를 변화시키지 못했으며, 그러므로 나는 계속 실패하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나도 약한 상태에서 나는 내가 소원하는 것과 나의 행동 양식을 일치시켜 보려고 싸우고 있었다. 옳게 행동하고자 하는 ‘소원’과 그에 따르는 ‘행위’와의 차이가 바로 좌절의 척도였다.
어떤 설교자들은 종종 예수님께 더욱 헌신하라고 촉구함으로써 나의 무력함을 가중시켰다. 나는 참되고 진실 되게 나 자신을 ‘헌신’했다. 이것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느끼며, 새롭게 열심을 다했고, 내 마음에도 새 봄이 찾아와서 이번에는 진정으로 어딘가에 도달할 것 같았다. 그러나 며칠 되지도 않아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고, 그러면 곧 또 나 자신을 다시 한 번 ‘재 헌신’하라는 도전을 받았다. 매번 꽉 잡았다고 생각했지만 욕탕 안의 비누처럼 그것은 결코 내 손안에 있어 주지 않았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당나귀 코 앞에 놓여진 당근처럼 환상적인 약속으로 우리를 놀리시는 것 같다. 우리가 아는 대로 그것은 잡으려고 그것을 향해 움직일 때마다 매번 우리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물러나 있다.
만약 예수님께서 내 안에 계시냐고 물었다면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그 분은 내 안에서 생생하게 역사 하셨던 것이 아니라 다만 ‘잠자는 파트너’(sleeping partner)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죄의 삶으로부터 나를 구하셨고 천국 길로 나를 인도하신다.
헌신 아니면 죽음?
성경속에서 우리는 어떤 인물들의 삶을 통해 슬픈 사건들을 만난다. 그런데 그것이 슬픈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 스스로 일을 하시도록 놔두지 않고 하나님을 위한 일을 한다고 하면서 그 자신을 바쳤다는 데 있다. 때때로 그들의 헌신이 참되면 참될수록 그 이야기는 더욱 슬퍼진다.
아브라함은 칠십오 세의 무르익은 노년이었고 그의 아내 사라가 그보다 십 년 어린 나이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놀랄 만한 약속을 주셨다. 하늘의 별들같이 바닷가의 모래알같이 그의 후손이 창대하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결혼한 지 오래되었지만 자녀들을 얻지 못했으며 이제 그 희망조차 사라져버렸다는 데 있었다.
그들은 비통한 마음으로 실망하고 몹시 당황하였다. 그들이 무엇을 해야만 했을까? 창세기 16장에 이것에 대해 그들이 나눈 대화와 뒤이은 행동 계획이 나타나 있다. 아브라함은 여종 하갈을 통해 자식을 보고자 했다.
아브라함의 동기는 순수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약속하시기 전까지 그는 아이를 갖고자 하는 희망을 포기했었다. 과거 십년 동안 그의 귀를 울렸던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이제 그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그 자신을 헌신했던 것이다. 이스마엘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 행위로 얻은 아이가 아니라 하나님께 동의하는 마음으로 얻은 아이였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그들이 계획한 대로 이스마엘이 태어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으며 바로 이것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헌신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을 인정하지 않으셨다. 이스마엘을 얻은 후에 사라가 스스로 임신하여 이삭을 낳기까지 또 십사 년이라는 세월이 흘렸으며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까지 총 이십사 년의 세월이 지나갔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을 인정치 않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얼마나 신실하게 이루어진 것인가에 상관없이 그를 대신한 우리의 노력을 인정치 않으신다. 그의 일을 대신시키고자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단지 그의 일을 하기위한 통로로써 우리를 부르셨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일이었고, 이삭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다. 이스마엘의 출생은 아브라함이 생각하고 계획하여 일한 것이었다.
모세는 사십 세의 나이에 그의 운명을 깨닫게 되었다. 그의 나이 사십이 되었을 때 자신의 진정한 주체성과 유대 노예들의 증오와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여 그들을 구원하시려는 것”(행7:25)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자 그 자신을 헌신했다. 그의 동기는 잘못된 것이 없었고 신실함 또한 참된 것이었지만 그것을 행동으로 옮겼을 때 그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유대 노예들을 해방시키고자 했던 그의 꿈은 산산이 부서졌지만 그는 여전히 ‘그를 사용하여 그 민족을 구하시려는 하나님’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 이전의 아브라함처럼 모세도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그저 그 자신을 헌신하였다. 이때도 하나님은 길 옆으로 비껴 놓은 채였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삶의 일부를 들어 그와 함께 무엇인가를 하시고자 하셨을 때 그의 나이는 팔십이 다 되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그의 첫마디는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출3:11).
그는 대답하시기를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출3:12)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느냐 안하시느냐 가 문제인 것이다! 그 일을 위해 필요한 힘의 원천은 모세가 누구냐는 물음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누구시냐는 물음에서 찾아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근본 원리이다. 우리는 그가 하신 일을 그저 감사함으로 돌아본다. 사도 바울은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살전5:24)고 하였다. 그는 그를 위하여 우리가 할 수도 있는 그런 일로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일은 그가 하시되 우리는 단지 그 일의 수단이 되는 그런 일을 위해 우리를 부르셨다. 모세는 그 원리를 배웠다. 거듭되는 하나님이 중재를 통해 이스라엘 자녀들의 해방을 위해 나아가며 그들은 드디어 새 가나안 땅으로의 여행길에 올랐다. 오래지 않아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한 육십만 민족의 행렬은 홍해 바닷가에 닿았다.
모세가 그들을 이곳까지 인도해 왔지만 그들은 건널 수가 없었다. 앞에는 건널 수 없는 홍해가 가로막혀 있고, 뒤로는 대항하기 불가능한 정예 부대로 그 민족은 공포에 떨고 있었다. 거기에 어떤 계략이 있었던가? 모세가 애굽인의 편이었단 말인가? 애굽에는 무덤이 없어서 이곳 홍해 바닷가에까지 그들을 데리고 와서 죽인단 말인가? 캠프 안은 공포와 흥분과 절망으로 가득 찼다.
모세의 대답은 어떠하였는가? 이와 같은 상황에서 당신이라면 어떻게 대처할 수 있겠는가?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 지니라”(출14:13-14). 어떻게 모세는 그같이 말할 수 있었을까?
나는 그 때 모세가 이렇게 기도했으리라고 당신에게 말할 수 있다. “하나님, 우리는 큰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우리 앞에는 홍해가 가로놓여 있지만 건널 수가 없고, 뒤에는 애굽 군대가 쫓아오고 있지만 우리는 그들에 대항하여 우리 자신을 방어할 힘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공포에 떨고 있고, 저는 어찌할 줄을 모르겠습니다. 나의 생각으로 이곳에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당신께서 하신 것이지요! 불타는 덤불 숲에서 저를 부르신 것도 당신이셨고 내가 할 수 없다고 했을 때 당신은 나와 함께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곤경에서 어떻게 빠져나갈지 나는 비록 알지 못하나 당신은 아십니다. 우리를 구하시는 것이 당신의 책임입니다. 그리고 저는 당신을 믿습니다. 그러나 믿고 감사드립니다. 아멘!”
그런 후에 군중들에게로 돌아서서 모세는 말할 수 있었으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해 싸우시리니”.......................,
이것이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이 행동과 삶이 본질이 된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12:2).
나는 예수님께서 나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드신 ‘믿음의 주’이신 것은 알았지만, 그가 ‘온전케 하시는 이’라거나 또는 다른 번역본에서 말하듯 우리 믿음의 ‘완성자’이신 것은 알지 못했다. 그에게 시작하는 것은 허용했지만 그것을 끝내는 것은 나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런 성경 구절도 알지 못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1:6) 물론 선한 일을 시작하신 이는 예수 님이시지만 그것을 나는 내가 완성하고자 애썼다.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벧전3:15). 소망에 관한 이유를 알지 못하고 ‘왜’ 그것이 진리인가를 설명할 수 없다 해도 우리는 ‘소망’을 줄 수 있으며 ‘무엇이’ 진리인가를 설명할 수는 있다. 실제 현존하시고 우리의 삶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은 흥분되는 일이기도 하다.그러나 우리가 그것의 진실에 완전히 그리고 지식적으로 들어가려면 우리는 그 분의 현존하심과 일하심이 왜, 그리고 어떻게 가능한가를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제2장 인간적인 무능력과 연약함
그리스도인이 경험하는 것의 실제적인 내용을 토론하기에 앞서 그것의 의미를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들인가’를 물어 보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는가’를 물어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의 진가를 인식하고 또한 그리스도인 됨을 스스로 즐길 수 있을 때 우리는 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는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 질적으로 낮은 경험밖에 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서 정말로 하시고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자 애쓴 적이 없고 따라서 일어날 일에 대해 별로 기대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에는 변함이 없다. 그가 처음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는 오늘 인간을 영원 불멸케 하려는 그것과 여전히 동일하다. 성경에서 우리 인간에 대해 처음 선포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1:26). 간단하게 들리는 이 말씀이 궁극적인 인간의 역할을 보여 준다. 곧 이것으로부터 인간의 존엄성과 그 중요함, 그리고 살아 있어야 할 권리가 이끌어 내어진다.
인간의 성격, 행동 양식, 그의 야심 등은 하나님의 성격, 하나님의 행동 양식, 그리고 하나님의 야심을 표현하도록 디자인된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창조되어진 대로의 역할 안에서 움직이는 당신을 깨닫게 된다.
인간은 하나님을 나타내도록 계획되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가로 나타나지는 것이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바라볼 때 우리는 점점 더 두려움을 갖게 된다. 만약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나는 것이라면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탐욕스럽다고 규정할지도 모른다.
그의 첫 번째 관심은, 항상 그리고 오로지 그 자신뿐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왜, 왜 이런 비뚤어진 그림을 갖게 되었을까? 왜 그의 삶의 스타일과 행동 양식은 이렇게 하나님에 대해 시종일관 그릇된 증인의 역할을 견뎌 내야만 하는가?
만약 인간의 역할이 하나님의 모양을 나타내 보여주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는 길을 분명히 잃어버렸다. 이것이 바로 당신의 진실이며 또한 나의 진실이다.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게 해주는 근본적인 요소들이 우리의 현재 삶 속에서 잃어져 가고 있다.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멀어짐
우리에게 잃어져 가고 있는 요소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과 독립해서 그의 역할을 이행하며 감당하라고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만 존재하도록 우리를 만드셨다. “저희 총명이 어두어지고.......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엡4:18). 그보다 먼저 그는 이제 기독교인의 사람들에게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엡2:12)라고 지적하였다. 비록 육신으로는 살았을지라도 ‘죽었던’이라 말하고 있다. 바로 영적인 생명을 말하며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이기도 하다. 이 영적인 생명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우리를 준비시켜 준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고전15:22)되었다. 모든 인류가 아담 안에서 죽었으며, 그 이후로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서 모든 사람들이 태어났다. 죽은 상태로 남겨지는 것의 유일한 대안은 매우 간단하다. 그것은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바 이것이 바로 복음에의 초대이다. 그것은 죽음을 생명으로 바꿔 주며 우리의 죄는 우리의 의로움으로 변화될 것이다.

역량과 능력
인간의 문제는 이번에는 그가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멀어졌다는 것이다. 신앙의 역량은 갖고 있는 반면 신앙의 능력은 잃어버린 것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정직하게도 신앙의 역량과 그것을 실현할 능력 가운데 갈등하는 그 자신의 모습을 말해 주고 있다.(롬7:15).
내가 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이 서로 갈등하고 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가로놓여 있는 것이다. 내가 깊이 믿고 있으며 이루고자 갈구하는 선을 위한 역량은 나의 능력에 의해 좌절당하고 마는데 이것이 되풀이해서 나를 침체시킨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으심을 받고 그 지으심의 목적을 위한 잠재력과 가능성, 그리고 그것에 대한 의식이 나의 존재 안에 잠재적으로 유지되고는 있지만 그것을 실현하는데 필요한 능력으로부터는 완전히 멀어진 것처럼 보인다.

만약 죄가 표적에서 빗나간 것이라면 우리는 우리가 맞추려고 정해 놓은 그 표적을 인지할 때만 우리의 죄도 알게 된다. 목표물 없이는 아무것도 맞출 수 없으며 그러므로 빗나갈 것도 없다. 목표물에 대한 인식없이 우리는 죄에 대해 알고 있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게다가 ‘죄’는 단지 막연한 개념이 되고, 한 삶의 의견 대 또 다른 한 사람의 의견이 되고 말 것이다. 성경은 그 목표물을 이렇게 설명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선’과 ‘악’이라고 한정된 것의 기준이 되고, 죄로 인해 우리가 놓쳐 버린 그 목표물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다.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영광’이란 표현은 성경에서 경미하게 조금씩 다른 의미로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품성이다. 그것은 처음 창조된 대로 인간은 하나님의 품성을 보여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생각해 오던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러나 이 창조 목적을 실현하는데 있어서 우리의 거듭되는 실패가 죄를 낳고 있다.
선함이란 하나님의 본성과 일치되어질 때에만 선할 수 있으며 이것을 바꿔 말하면 하나님의 본성과 일치되어질 때에만 선할 수 있으며 이것을 바꿔 말하면 하나님의 본성과 충돌하는 것은 악한 것이다. 죄라고 판단된 것과 반대의 목표물이 ‘하나님의 영광’이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창조 의도대로 살 수 있는가를 발견할 때만 나는 죄를 다룰 수 있게 된다.

완전한 사람
전체 인류의 실패와는 반대로 예수님은 완전한 사람이었다. 계속적으로 끊임없이 목표물을 쳐서 맞추고자 한 것이 바로 그를 이런 완전한 사람으로 만들었다.(요1:14). 요한은 우리들에게는 없는 ‘영광’을 그에게서 보았다. 바로 예수님의 행동 양식에서 하나님의 품성이 보여졌다는 말이다.
그가 한 일들, 그가 말한 것들, 그리고 어떤 식으로 그것들을 말하였는가 하는 것들이 영속적으로 하나님을 보여 주었다. (요1:18). 하나님을 육적으로는 볼 수 없다. 그러나 도덕적인 성품을 가진 하나님을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생애에서 그는 한 인간으로 우리가 ‘이르지 못한’(롬3:23) 바로 그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단지 나쁜 것을 하지 않음으로써가 아니라 더 나아가 지속적으로 옳은 것들을 행함으로써 죄 없는 삶을 사셨다.
만약 우리가 단지 예수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사셨는가에 대해서만 알고 있다면 우리는 그를 깊이 찬미하고 그를 위해 신실하게 헌신하며 그를 흉내내기에 최선을 다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좌절케 할 따름이다. 우리가 그의 완벽한 생애를 음미하고 그와 똑같이 살고자 애쓰면 애쓸수록 우리의 실패를 더욱더 인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왜 그렇게 사셨는가
이제 한 인간으로 예수그리스도께서 왜 그렇게도 아름다운 삶을 사셨는지 좀더 가까이서 바라보려고 한다. 당신은 아마 깜짝 놀라리라. 그리고 우리가 찾아낼 수 있는 것들을 통해 분명히 격려를 받을 것이다.
에수님의 사역으로 특징 지워지는 그 많은 아름다운 일들과 병 고침의 기적과 오천 명을 먹이신 일, 폭풍우를 잠잠케 하신 것과 죽은 사람을 살려 일으키신 일 등 이 모든 것에 대해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 심지어 더 나아가 말씀하시기를 ‘그 아들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고 하셨다.
그 모든 말씀들에 대해 그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고 주장하고 계신다.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말은 참 공허한 말 같다. 그것은 모든 용기를 잃게 하며 우리를 김빠지게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인성을 보여주는 데 있어서 그것은 분명 중요한 말이다. 사도 바울은 그를 일컫기를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2:6-7)라고 하셨다.
한 인간이 되었다는 예수님의 주장은 그가 보잘것없이 연약하고 무능력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아무것도’ 되지 않았고 ‘아무것도’하지 않았다.
당신은 당신이 ‘연약하고 무능력하다’고 느껴 본 적이 있는가?
당신은 고기잡이하던 밤을 보내며 바닷가에 서 계신 예수님을 향해 이렇게 외치던 시몬 베드로와 같이 느껴 본 적이 있는가?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나이다”(눅5:5)
당신이 모든 것을 더욱 더 어렵게 수고하고 애써야 하도록 확정된 사람이라는 그 생각을 깨뜨려 버려야 할 필요가 있음을 당신은 인정해야 한다. 한 인간으로 그는 아무것도 되지 못하셨고 그의 인간적인 힘으로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셨다.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처럼 당신도 능력이 없다는 것을 발견할 때 그것이 당신을 놀라게 하는가?
그러나 이것이 이 이야기의 끝은 아니다! 예수님에 대한 그와 같은 진술이 진실이라면 그가 명백히 놀라울 만큼 많은 일을 이루셨다는 그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는 지금까지 아무도 그렇게 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나라 전체를 뒤흔들어 놓으셨다. 역사 속에 그리고 이 천년이 지난 바로 오늘 세계의 현장에서 그가 끼친 충격은 세계 역사상 살아 있던 그 어느 누가 한 것보다 위대한 것이었다. 그가 많은 일을 이루어 놓으셨다는 사실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역사상 그보다 더 많은 일을 이루어 놓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한 인간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그가 사신대로 그런 삶을 사셨으며, 어떻게 그가 하신 그런 일들을 하실 수 있었을까? 그 기적들은 어떻게 일어났을까? 어떻게 예수님은 그런 권위를 가지고 말씀하실 수 있었을까? 어떻게 그는 그렇게 계속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 보여 주실 수 있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도 그와 같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예수님께서는 당신 스스로는 아무것도 아님을 말씀하신 구절마다 그가 아버지 하나님에 대해 언급하셨음을 당신은 주의 깊게 보았는가?
예수님께서는 한 인간으로서 그의 역할을 완수하셨는데 이것도 참된 인간으로 존재하시며 하나님의 임재와 그의 역사하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 위에 이루어진 것이다.
인간을 만들어진 뜻대로 존재케 하는 능력은 바로 그 안에 하나님의 임재하심이며 그를 통해 흘러나오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이다. 전구가 전기와 상관없이는 그 기능을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도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적으로는 그 기능을 다할 수 없는 것이다.
불가능은 없다.
하나님과 함께 하며 그로 하여금 우리 안에서 또한 우리를 통해 자유로이 일하시게 할 때 불가능한 일은 아무것도 없게 된다.전에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절대 불가능했지만 이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 그러므로 그와의 사귐 안에서 과연 하나님은 어떤 모습인가를 지속적으로 상기하게 된다. 지금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에 너무 부족하지만, 그 ‘영광’의 회복이 바로 구원의 목적이며 또한 참된 그리스도인의 표적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1:27)고 하였다. 일반적인 해석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하늘나라의 소망을 의미하고 있지 않다! ‘영광’은 우리가 죄로 인해 잃어버린 것이며, 우리 안에 예수님께서 다시 사심이며, 목표물을 맞춰 우리의 삶의 목적을 성취하게 됨을 소망하는 것이고 하나‘영광’은 우리가 죄로 인해 잃어버린 것이며, 우리 안에 예수님께서 다시 사심이며, 목표물을 맞춰 우리의 삶의 목적을 성취하게 됨을 소망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본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은 갑작스럽고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서서히 진행되는 과정이다. 이러한 삶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계속적인 성장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장은 우리가 영원히 예수님 안에 거하게 될 때까지 완성되어지지 않을 것이다.(고후3:18).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성장이란 신앙심의 성장이다.

제3장 하나님의 방식대로 사는 삶
비록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가 다수의 사람들에게 다수의 것(복합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할지라도 결국에는 하나의 타당한 기독교 신앙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식의 신앙이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방식으로서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다. 그 외의 다른 것들은 우리를 종교적이게 할 수는 있어도 힘있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올바른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 적당히 노래할 수 있고, 좋은 교회에 가서 그들이 쓰는 올바른 어휘들을 사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방식, 즉 하나님에 의해 티켓이 발행되고 올바른 조건들이 충족되어진 그대로 살지 않는다면 그들은 기독교 신앙을 가질 수 있겠지만 그것은 결코 살아서 역사하지는 않을 것이다.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의 방식이란 토론이나 타협에 따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방식대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든지 아니면 전혀 그렇게 살지 않든지 둘 중 하나이다.
우리에게 당면한 문제는 무엇인가? 부자가 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인가?
그것에 대한 대답은 물론 간단히 ‘아니다’이다.
성경은 부를 갖고자 하는 데서 오는 위험들에 대해 더욱더 많이 경고하고 있지만 부를 소유하고 있는 것 그 자체가 잘못이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사람들에게 부를 주신다. 여기서의 문제는 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다. 이 청년의 부는 그것 자체가 잘못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 아니라 좀더 실제적인 문제로 표현되어지고 있다.
마6:24절에 청년과의 대화 중에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의 생활 가운데 그의 소유들이 그의 하나님이 되어 버렸음을 진단하셨다. 그래서 “만약 네가 영생을 얻기 원한다면 그 안에는 새로운 너의 주인, 새 구주를 받아들이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한다.” 영생이란 어떤 생필품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을, 하나님 그 분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를 하나님 되게 하고 하나님으로 일하게 하는 그 위치를 차지하시려고 오셨다.
예수님께서 한 사람 안에 거하시고자 오셨다는 것은 명백한 진실이며, 사실상 그를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 주는 것도 이 진실 때문이다.
부자이며 젊고 권력이 있다는 것!
그는 부자이며 또한 젊었다. 그리고 관원이었다. 이것이 정말로 우리가 그에 대해 아는 것의 전부이며, 그것 때문에 우리는 그를 ‘젊은 부자 관원’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구주 되심에 그 자신을 복종시키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며 죽음에서 부활하신 이 모든 것은 사람과의 관계를 맺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 관계 안에서 인간이 예수님의 통치권에 복종하는 것은 가장 기본이 된다.(롬14:9). 당신은 그 젊은 부자 관원의 근본적인 문제를 알겠는가? 그는 예수님이 그의 주인이 아니라 그의 하인이 되기를 원했다. 그는 예수님이 그의 요구를 해결해 주실 것을 원했지만 그에게 무엇을 하라고 지시하시는 예수님을 원하지는 않았다. 그와 같은 한계 상황에서는 하나님을 결코 경험할 수 없다.

예수님에 대한 이해
예수의 구주 되심을 말할 때 우리는 매우 주관적인 방식으로 그것을 말하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예수를 ‘구주’로 ‘만드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객관적인 조건으로 말해 주고 있다. 예수의 구주 되심을 하나의 객관적인 사실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말이다. 오히려 내가 믿든지, 안 믿든지 또는 그에게 복종을 하든지 안 하든지 그것은 이미 확정되어 있는 진실이다.
(행2:36) 베드로가 말한 대로 우리가 그를 구주로 만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그를 이미 구주가 되게 하셨기 때문에 구주가 되신 것이다. 우리가 그에게 굴복해야만 하는 것도 그가 이미 구주이기 때문인 것이다.
권위에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하자. 그렇다고 해서 그 권위가 가진 법들이 무효가 될 수 있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당신이 어떤 길을 따라 운전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30마일’속도 제한인 길을 지나가고 있지만 당신은 50마일로 달리고 싶다고 결정해 버린다!
그 나라 정부와 그 법령이 강요하는 것은 객관적인 실재이며, 당신이 타협해야만 할 문제는 당신이 그들에게 투표를 했는지 또는 그들과 뜻을 같이하는지의 여부가 아니라 그들의 권위에 당신이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의 여부이다. 이와 유사하게 예수님의 구주 되심도 또한 객관적인 사실로서 이해되어져야만 한다. 그는 우리가 그를 구주라고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구주로 만드셨기 때문에 구주가 되신 것이다. 우리는 복음이 단지 역사 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에 그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의 관심은 그리스도를 하나의 구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구주이신 그에게 ‘복종하는’ 것이다. 우리는 정부의 권위에 복종하기를 거부할 수는 있지만 여전히 그 권위에 종속되어 있다. 그 이유는 그 권위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에 복종하기를 거부할 수는 있어도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모든 인류와 함께 그에게 종속되어 있다.

그를 향한 우리의 자세
그리스도에 대해 반드시 이해되어져야만 하는 사실에 기초하여 우리는 그에 대한 올바른 자세를 결정해야 한다. 이것이 그 젊은 부자 관원이 직면했던 문제였다. 그가 우리 삶의 주인 되신 구주라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그가 구주로서 우리의 삶 속에서 마음대로 일하시도록 그에게 반응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특별한 그의 권한을 인정해야만 하며, 그의 뜻과 계획과 그의 기쁨이 우리의 관심이 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우리 자신을 그에게로 따로 떼어놓아야 한다.
이 모든 것들이 너무 힘들게 들리는가? 내가 예수님께 모든 것을 드린다는 것이 너무 한편으로 치우친 얘기로만 들리는가? 구주로서의 그의 역할이 나에게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은 아마 질문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것에 관해 생각해 보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삶 속에 그의 구주 되심이 주는 그 모든 놀랄 만한 특혜들은 단지 우리가 그 대가로 치루어야 할 것들에 굴복하고 기꺼이 그것을 지불할 때 찾아올 것이다.

제4장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는 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가?
왜 많은 사람들이 삶 가운데 그리스도가 구주되심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 두려움을 가질 때마다 거기엔 항상 동일하면서도 매우 간단한 이유들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충분한 만큼 잘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진리를 아는 것 이상의 것, 즉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경험하는 것들의 실체와 그 깊이는 우리가 얼마나 그를 잘 알고 있는가에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요17:3). 영생이란 물질이 아니며 그것은 곧 사람이다. 어떤 사람을 앎으로서 얻어지는 기쁨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우리가 의뢰하는 자를 아는 가운데 바울은 두 번째 말씀을 하고 있는데,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께 의탁한 것들에 대해 그는 아무런 두려움도 갖고 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능히 지키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계획은 선하시다
하나님의 계획들이 항상 우리를 즐겁게 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들은 얼마나 선한 계획들인가! 그의 계획들이 언제나 기뻐 보이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들은 또한 너무도 완전하다!(롬12:2)
성경 속에서 그의 삶의 많은 부분들이 잘못되어져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물로 우리는 요셉을 찾아볼 수 있다. 그의 인생에는 두 가지 불이익이 있었다. 그는 열두 아들 중 열 한번째 아들이었으며, 아버지의 총애를 받았다. 그의 형제들은 이것 때문에 그를 미워하였는데, 이것이 그의 두 번째 불이익으로서 첫 번째보다 더욱 심한 것이었다. 어느 날 밤, 꿈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장래를 언 뜻 보여 주셨다. 꿈 속에서 그는 형제들과 들에 나가 곡식단을 묶고 있었는데, 갑자기 요셉의 단이 곧추 일어서고, 나머지 단들이 요셉의 단에 엎드려 절을 하는 것이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들은 이 일로 인하여 요셉을 더욱 미워하게 되었으며 그를 없애기로 결정하였다. 그들은 그를 이집트의 노예 시장에서 경매에 붙였던 것이다. (그 다음 과정은 중략).
어떤 사람이 감방 안의 요셉을 찾아가 그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고 말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는 아마도 이상하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가 아는 한 잘 되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인생의 황금기를 다른 사람의 노예로 지냈고 심지어는 그가 저지르지도 않은 죄목으로 인해 오랜 세월을 감옥에서 보냈다! 그동안 그의 아버지는 요셉의 ‘죽음’으로 인해 받은 마음의 아픈 상처로부터 여전히 회복되지 못하고 있었다. “당신은 그 분의 그 고통을 선이라 부릅니까? 요셉은 물었을 것이다. 그 때 그는 자신의 이야기의 전체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후에 그는 그것을 보기 시작하였으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선하다’라고 설명되어지는 것이 반드시 ‘나만을 위해’ 좋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편안함과 유익을 위한 것보다는 더 넓은 캔버스위에서 그의 일하시는 것을 바라보아야 한다.
나는 이제 좀더 현실적이고 싶다. 하나님께 복종한다는 것은 모든 것이 편안해질 것이라는 의미가 절대로 아니다! 그리스도 인이라고 해서 역경들로부터 예외일 수는 없다. 그것이 어떤 것일지라도 그리스도인은 그 역경들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또한 기쁨이 되는 그 무엇인가를 위해 오늘도 일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나는 이것이 특히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흔히 물어 오는 질문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어떤 특별한 뜻은 단지 우리 모든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일반적인 뜻 안에서 찾아낼 수 있다. 우리는 신약을 통해 당신과 나를 위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네 가지 진리를 찾아볼 수 있다. 이 특별한 가르침들에 복종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개개인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찾게 될 것이다.

1. 거룩해짐: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살전4:3-4).
2. 감사하게 됨 :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8). 이 말씀은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환경으로 인하여 감사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주어진 그것이 좋든 나쁘든 간에 그 모든 환경 안에서 감사해야 한다는 말이다.
3. 선하여짐: “인간이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벧전2:13-15). 심지어는 불공평과 어리석음 앞에서도 선행을 행함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릴 수 있다.
4. 고난을 받음: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지어다”(벧전4:19). 모든 고통을 더는 것이 하나님의 뜻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이 우리로 하여금 고통을 당하게 하는 때가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네 가지 설명들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성경이 특별히 말해 주고 있는 부분이다. 이것들은 우리들 모두에게 적용되며, 예외가 있을 수 없다! 우리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어떤 특별한 뜻을 발견하기 위해 우리는 그의 뜻의 일반적인 틀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
솔로몬은(잠3:6)에서 그가 우리 길을 인도하시도록 기도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를 ‘인정하도록 기도하라’고 하였다. 그리하면 그 결과로 ‘그는 우리 길을 인도하실 것이다’.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책임이며, 그것은 우리를 천국으로 이끄시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책임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를 인도하시는 과정에 있어서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하고 계신 일에 대해서 설명할 의무가 그에게는 없다는 사실이다. 요셉이 형들의 곡식단이 그에게 절했던 꿈을 꾸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어떤 생각을 주셨다. 의심할 여지없이 감옥 생활 중에 그는 종종 그것에 대해 생각하였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삶 속에 그가 목적하는 바를 위한 비전을 당신에게 제시하신다면 아마 일이 험악하게 돌아가거나 모든 것이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당신은 여전히 그것을 믿을 것이다. 요셉과는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욥에게는 그 지독한 고난의 세월 그 너머를 바라볼 수 있는 아무런 꿈도 주지 않으셨다.
욥에게 일어났던 일처럼 어떤 비극이 오늘 우리의 삶을 강타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 알고 계신다. 우리의 계획한 것들이 일변하여, 요셉과도 같이 이국의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뜻하시는 바가 따로 있다. 그날 아침 이른 시각에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신 예수님처럼 오늘 바로 당신이 그 로마인의 십자가에 달려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은 이것을 알고 있다. 오늘 당신이 죽는다 해도 당신은 이미 정해진 그 시간에 맞춰 죽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당신이 이모든 것을 -참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될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이것을 위해 그리고 우리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 부르게 하시는 그의 일을 위해서 그가 사용하시도록 우리는 우리의 삶 전부를 예수 그리스도께 기꺼이 드리는 것이다.

제5장 마음의 변화
사람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의식을 갖게 될 때만 그들 자신의 필요에 대해 이해하게 된다. 또한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가운데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때, 우리 자신은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했다’고 하는 가식 없는 통찰과 이해 속에서 비로소 우리 자신의 필요를 보게 되는 것이다. 베드로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벧후1:3)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셨음을 그 자신의 경험 가운데 증명하였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그렇게 절대적이며 매력적인 인물로 만든 것은 예수님의 순수한 선함과 영광, 그리고 그의 신앙심의 표현이었으며 결국 이런 것들로 인하여 베드로도 그에게로 끌려 들어갔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를-그의 생애와 본질, 그리고 또한 그가 하신 일들을-전해야 하는 이유이다. 왜냐하면 오직 사람들이 그를 볼 수 있을 때만 사람들은 참된 빛 안에서 그들 자신을 바라볼 수 있으며, 그들의 필요와 그들의 죄의 본성에 적나라하게 인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의 죄를 이해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들은 또한 그리스도를 전함으로써 그들의 죄를 인식할 수 있게 된다.

돌아서는 것
베드로가 사람들에게 지시한 첫마디는 ‘회개하라’였다. 이것이 우리를 놀라게 해서는 안된다. 신약성경 안에 ‘말씀전파’로 나타난 첫마디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3:1-2)였으며, 이것은 ‘유대 광야에서 말씀을 전파한’ 세례 요한에 의해서였다. 후에 신약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의 입술로부터 흘러나온 대중을 위한 첫마디도 이와 동일한 것이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4:17). 베드로는 이 말씀을 오순절에 사람들에게 전했으며, 바로 그날은 교회가 처음 태어난 날이었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질문이 떠올랐던 것이다. 회개라는 말은 ‘어느 곳에 있든지 모든 사람들에게’ 명령된 것이며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반응에 있어서 가장 핵심되는 말인 것이다. 회개할 필요가 있음을 부인하거나 회개하라는 명령에 타협이 있을 수 없다. 회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찾는 열쇠는 우리의 사고 안에 있다.(롬12:2).
회개는 생각의 변화이다. 그것은 단지 나의 죄에 대해 기분 나쁘게 느끼는 그런 것이 아니라 그 두 가지에 대해 나의 생각을 바꾸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들의 죄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한탄할지라도 여전히 죄에 대한 그들의 마음에 변화가 없다면 그들은 회개한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사람이 비록 눈물을 떨구지는 않더라도 죄에 대해 그들의 마음을 바꾼다면 그는 이미 회개한 것이다.
생각의 변화는 태도의 변화를 이끌어 내야만 한다. 만약 태도의 변화가 없다면 거기에는 생각의 변화가 없었다는 것이 증명된다.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는 진실로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를 보여 준다. 세례 요한이 회개를 선포하러 왔을 때 거기에는 그가 기대하고 요구한 필연적인 것이 있었고 그것은 마음의 변화를 수반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1.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마3:6).
2.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눅3:8). 회개는 그것 안에서 변화된 행동 양식을 보여 주어야 한다. 요한은 이점에 있어서 독특한 인물이었다.
(1) 사회적으로 :“그러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군중들이 물었다.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눅3:10-11).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진정한 태도가 어떠한 가는 사람들을 향한 우리의 태도 속에서 발견된다.
(2) 사업에서:“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정한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 하고”(눅3:12-13). 회개는 우리의 직업적인 생활속에 성실과 정직을 통해서도 표현되어질 것이다.
(3) 돈에 관하여:“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눅3:14). ‘돈을 강포하지 말며.....받는 급료에 만족하라.’ 돈이란 것은 회개하고자 하는 마음에 새로운 배경이 된다. 돈이란 때에 따라 매우 유용한 종(servant)일 수 있으나 또한 악랄한 주인이 될 수도 있다.
이것들은 단지 회개에 합당한 몇몇 열매들이다. 또한 우리의 회개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나타나는 우리의 태도이다. 구주 예수님은 그저 우리가 올바로 믿게 하기 위해서이거나 또는 우리의 교리가 맞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다.
마음의 변화는 행동의 변화를 이끌어 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거짓된 것으로 비난을 받게 될 것이며, 또한 그것은 심판날에 불에 태워질 ‘나무나 풀이나 짚’(고전3:12) 중에 하나가 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제6장 용서와 하나님의 정의
BBC라디오 방송을 통해 스코틀랜드 정신과 협회 회장은 놀라운 관찰을 보고했다. 그는 “만약 내 환자들이 용서를 확신할 수만 있다면, 그들 중 절반은 내일 당장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대부분의 정신 상의 와해는 결코 처리된 적이 없는 죄의식의 결과이다.
우리는 죄의식에 대해 여러 가지를 알 수 있지만 어쨌든 그것이 파괴적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다루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죄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한 두 가지 중요한 방법이 있다. 하나는 개인의 책임감과 실패감을 줄이기 위해 그 죄의식에 대해 재정의를 내리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많은 심리학자들은 의뢰인의 죄의식을 일으키는 것으로 여겨지는 외적인 요인들을 찾아내는 데 그들의 많은 시간을 소모하고 있다. 그들의 성장 배경과 부모, 조부모, 이웃들, 교회, 나라와 정부를 죄의식의 원인으로 확인하면서 그들에게는 아무 책임도 없는 그 원인들을 나무라고 저주함으로써 죄의식으로부터 빠져나올 구멍을 찾는다. 그리고 그들 자신에게 무죄를 선고함으로써 마음이 편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진정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문제를 다른 장소를 옮겨 놓는 것에 불과하다.
또 다른 방법은 죄에 대해 현실로 직면하여 그것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위치에서 그것을 수습하는 것이다.
회개함으로 얻어지는 첫 번째 결과는 바로 이 용서인 것이다.
‘용서’란 우리의 죄가 지워졌음을 의미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 과거에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해 ‘죄 없음’으로 간주되어진다. 자신의 죄의식 때문에 계속해서 곤란을 겪었으며 때때로 똑같은 죄를 놓고 다시, 또다시 반복해서 고백하지만 용서에 대한 확신은 매번 부족했다.

심판이냐 저주냐?
여기 당신의 죄에 관여하여 당신에게 그것에 대해 말해 주는 두 사람이 있다. 한 분은 성령이요, 다른 하나는 악령이다. 성령에 관하여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16:8). 아무런 변명이나 핑계 없이 우리의 죄를 심판하는 것이 성령의 일이다. 그러나 악령은 다른 역할을 수행한다. 그는 ‘우리 형제들을 고발하던 자’(계12:10)로 묘사되어 있으며, 그의 역할은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저주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현존하심 앞에 그가 우리를 고발할 때 확실히 그는 우리를 우리 자신 스스로에게도 고발할 것이다.
성령의 심판과 악령의 저주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저주는 마치 젖은 담요가 우리에게도 덮어씌워져서 그것을 부수고 자유롭게 될 아무런 방도 없이 그 안에 갇혀 버리게 되는 것과도 같이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로 덮어씌우고 만다. 반면에, 심판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죄를 인식시키지만 그와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빠져나갈 길과 또한 용서의 가능성을 알게 해준다. 성령은 우리를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또한 깨끗케 하기 위한 이유로 우리의 죄를 드러낸다.
그 약령은 또한 거짓말쟁이로 불린다. 예수님께서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8:44). 그가 거짓을 말할지 않은 유일한 시간은 우리에게 우리의 죄에 대해 말해 줄 때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우리가 죄를 지었다는 그 사실이 충분히 나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그 거짓말은 우리의 죄를 그것이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하여 이미 처리되었고 깨끗해졌으며 용서되었고 또한 잊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비난할 목적으로 다시금 우리 앞에 드러내 놓는다. 흥미롭게도 악령은 우리가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는 우리를 비난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밖에서 우리의 죄는 자연적으로 비난받고 용서도 없다. 악령은 거짓말의 명수이기 때문에 그러한 상황에서는 우리를 비난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용서의 근거
우리가 용서받은 기쁨을 누리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물의 하나는 그것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 있다. 우리가 거룩하고 의롭다고 이해하고 있는 하나님의 특성 안에서 그로 하여금 우리의 죄를 용서하게 하는 근거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의로우심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이 그의 자비하심 때문에 우리를 용서하셨다면, 아마도 예수님의 십자가는 필요치 않았는지도 모른다.

정의와 자비는 그들 안에서 서로 양립할 수 없다
역사 안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하나의 사건으로 만드신 것이 하나님 안의 우리에 대한 사랑과 자비인 것은 틀림없는 진실이다.(벧전3:18). 그의 법이 요구하는 것이 배상되어짐으로써 하나님에게는 법적으로, 또한 도덕적으로 우리를 용서할 의무가 지워졌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용서를 탄원하고 또 용서받는 근거가 된다. 그것은 나의 죄가 용서받았음을 믿어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완전하심에 근거하여 나의 죄가 이미 용서받았다는 사실이 진실임을 확고히 붙잡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고해성사가 필요 없는 이유이다. 우리에게 어떤 종류든지 참회를 요구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의 그 충분함을 손상시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의로우시기 때문에 우리를 용서하신다. 그러므로 용서하지 않으신다면, 그는 의롭지 않고 도덕적이지도 않게 된다. 하나님의 용서에 의문을 갖는다는 것은 그의 의로우심과 도덕적 고결함에 의문을 갖는 것과 같다. 우리는 결코 그래서는 안되며, 또한 결코 그래야 할 필요도 없다.
물론 용서를 경험하는 데는 조건이 있다는 것을 당신에게 상기시켜도 되리라. 베드로는 말했다. “너희가 회개하여....죄 사함을 얻으라:(행2:38). 성경은 명백히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고 하나님 앞에 그것들을 회개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똑같은 용서를 베풀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우리에게 향한 하나님의 용서를 기대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기를 거부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 한 우리에게는 용서를 기대할 만한 아무런 귄리도 없다. 사실 다른 사람을 기꺼이 용서해 주는 것 자체가 우리의 회개의 일부가 된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삶 속에서 무시무시한 공포로 인해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 그 공포는 그들이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다는 데 있다. 그들은 심판날에 모든 것이 잘못되리라는 공포에 떨고 있다.
용서함을 받는 유일한 길은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는 성령의 일하심에 응하여 우리의 죄에 그리스도의 죽음을 적용해 보는 것이다. 우리에게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은 영이시다. 또한 성령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로부터 빠져나오는 길을 제시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의 일하심을 거역하는 것은 용서받는 길을 차단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용서받지 못할 가능성에 대해 경고하셨을 때 그 서기관들이 범했던 잘못이었다.
용서받지 못할 죄란 그것이 지워질 가능성도 없이 한 순간에 죄를 범하는 그런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용서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며, 성령을 거역하여, 깨끗케 될 다른 어떤 가능성도 없이 용서받지 못한 채로 죄 안에 그대로 남아 있기를 선택하는 바로 이것이 용서받지 못할 죄인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어떻게 다루시는가?
성경에는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어떻게 다루시는가에 대해 생생하게 묘사된 구절들이 있다. 이 말씀들은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도록 우리를 최대한으로 격려한다.

1.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시103;12). 이것은 아름다운 그림이다. 그는 우리 죄과를 ‘북이 남에서’ 먼 것같이 우리에게서 옮기셨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라고 말씀하셨다. 남과 북은 이미 고정되어 있는 정점이지만 동과 서는 그렇지 않다.
동과 서는 존재하지 않는 두 점이며, 이 존재하지 않는 두 점이 서로 떨어져 있는 그만큼 멀리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우리로부터 옮겨 놓으셨다. 얼마나 아름다운 그림인가? 우리와 우리의 죄는 결코 서로 화해할 수 없는 위치로 각기 분리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미 용서받은 한 사람의 죄인으로 당신은 당신의 죄를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으려고 하지 말라. 또한 우리와 우리의 죄를 화해시키려는 어떠한 마귀의 시도에도 단호히 거부하라.

2. 주께서.........나의 모든 죄를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이것은 또 하나의 매우 묘사적인 그림이다! 그 그림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가져가 버린 그 거리의 무한대성을 묘사적으로 너무나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3.“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사43:5). 하나님께서는 독특한 능력을 갖고 계신다. 그는 용서할 뿐만 아니라 잊어버리며, 더욱 정확하게는 더 이상 기억지도 않으신다. 그러나 그 참된 뜻은 그가 그것을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더 이상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그 하나님께서 나에 대해 알고 계신 것들을 다시는 되돌려 회상치 않으시며, 결코 나에게 그것을 책임지라고 하지 않으시고, 나를 향한 총알로 그것을 사용치 않으시며 또한 결코 그것으로 인해 나를 비난치도 않으신다는 말이다.

4.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 이것이 하나님께서 더 이상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시는 범위이다. 이 구절은 그 시제가 현재이다. 오늘, 하나님 안에서는 비난이 없으며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우리에게 반대하시는 것이 없다.

5.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요일4:17). 이것은 놀라운 구절이다. 하나님의 사람이 우리의 삶 속에까지 확장될 때 우리는 심판의 날에 위축되고 무서움과 공포에 떨며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고도 담대하게 그리고 자신에 찬 가운데 실재하시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왜 이렇게 되는 것일까? 우리가 그것을 받을 만해서인가? 물론 아니다. 우리의 역사 속에는 하늘에 검게 변한 한 날이 있었다. 바로 그날, 하늘 아버지께서는 그의 아들로부터 등을 돌려, 순전하며 거룩하고 의로운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이 되게 하셨다.
우리의 죄가 용서받고 깨끗해짐이 좋은 것이라고 해도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체 관점은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기 위한 한 가지 목적만을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다. 죄사함을 받는 것은 우리에게 꼭 필요하고 또 아름다운 일이 된다. 그러나 죄를 씻는 것은 단지 일부분에 불과하다. 죄가 제거됨으로 진정한 용서가 이루어지고 그 후, 우리의 삶의 방향을 바꾸어 나가게 되는 것이다.

제7장 당신 안에 계시는 성령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목적은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확실히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깊은 욕구 중 하나를 채우신다. 그렇지만 사람은 용서를 필요로 할 뿐 아니라 선에 대한 굶주림도 가지고 있다. 한 개인의 죄책감은 선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나오는 것이고, 선을 세우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 사역의 목적이다.
우리의 죄를 용서받는 것은 중요하고 경이롭지만 그것이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며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의 목적을 완성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수단일 뿐이다. 죄사함은 그 용서받은 사람의 삶 속에 성령이 오셔서 그들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살고 그들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 재현되는 일들을 가능케 하는 수단이다.

성령은 누구신가?
그는 누구이신가?
성경을 통해서 성령에 개인적인 이름이 주어지지 않고 오직 그의 사역과 연관되어서만 기술된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는 ‘진리의 영’(요일16:13), ‘보혜사’(요14:26), ‘거룩한 영’과 그외 다른 몇 가지 이름으로 일컬어졌다. 성부는 ‘여호와’, ‘엘로힘’ 성자는 ‘예수’, ‘임마누엘’이라는 개인적인 이름이 주어졌지만 성령은 그의 개인적인 신분에 대해서는 익명으로 되어 있다.
성령은 때로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능력, 힘, 혹은 영향력으로서 생각되어져 왔다. 그러나 이것은 적절하지 않다. 우리를 그를 어떤 것이 아니고 어떤 분으로 보아야 한다. 그는 인격이시다. 인격의 구성, 요소는 생각하고, 느끼고, 결정하는 능력이다. 즉 마음, 감정, 의지를 갖고 있는 것이다.
성령은 생각하신다: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만일 성령이 하나님의 생각을 아시고 우리에게 그것을 나타내고 가르치시는 분이라면 그것은 그 분의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키는 것이다.
성령은 느끼신다: (롬15:30). 성령 자신이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경험하는 그의 징표 중의 하나는 그가 사랑, 기쁨, 화평 같은 긍적적인 감정들을 만들어 내신다는 것이다.
성령은 부정적인 감정도 경험하신다: (엡4:30)
그는 상처받으시고 근심하시고 슬퍼하실 수 있다.
성령은 결정하신다: (고전2:11).
성령이 선택하신 대로 그의 은사를 나눠 주시는 것은 성령의 특권이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성령이 다음과 같이 인격적인 존재에 대해서만 가능한 행위에 관련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성령은 말씀하신다: (행13:2).
여러 번 성령은 말씀하시는 것으로 말하여지고 있다.
성령은 가르치신다: (요14:26)
성령은 중재하신다:(롬8:26-27)
성령은 인도하신다:(요16:13)
성령은 명령하신다:(행16:6-7). 우리는 성령께서 바울과 그의 동료들이 설교하는 것을 금하는 흥미로운 상황을 여기에서 보게 된다.
성령은 지명하신다:(행20:28). 교회란 지도자들이 다수의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행하는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곳이 아니라, 지도자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수행하는 신정을 베푸려는 곳이다.
성령은 욕을 당하실 수 있다.:히브리서는 하나님의 아들을 밟는 사람들의 당연히 받을 벌에 대해,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자’(히10:29)라고 했다. 물건은 더럽힐 수 있지만 인격에 대하여는 오직 모욕할 수 있을 뿐이다. 성령은 욕을 당하실 수 있다. 성령은 속임을 당하실 수 있다.(행5:3-4).
위에 열거한 모든 속성들은 성령이 자유롭고 독자적으로 생각과 행동을 하시며, 기쁨과 고통의 느낌을 가지실 수 있는 한 인격이심을 가르쳐 주고 있다. 더 나아가기 전에 우리는 이것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하나의 중요한 결론을 알아야만 한다. 성령은 한 인격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사용하거나 구사할 수 있는 힘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성령이 한 인격 이시라는 것이 확인되었으면 성령이 하나님이시라는 것도 인식되어야만 한다.

1. 성령은 하나님으로 불려졌다.: (행5:3-4).

2. 성령은 신적인 속성을 가지고 계신다: 성령께서는 하나님께만 속한 품성들을 가지고 계신다.
전능하시다(Omnipotent)(눅1:35-37).
전지하시다(omniscient)(고전2:10-11)
무소부재하시다(omnipresent)(tl139:7-10)
영원하시다: 영원하다는 것은 시작도 끝도 없는 것이다.
성령은 영원하신 존재로 묘사되어진다. (히9:14).

3. 성령은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신다.:
창조하신다: (창1:2).
성부는 ‘하나님의 말씀’(요1:1)으로 일컬어지는 그의 아들 안에서 그의 마음과 목적을 표현하시지만 그것은 성령에 의해서 수행되어 현실화되는 것이다.
재생시키신다:(요3:5)
어떤 설교자도 누구를 개종시킬 수는 없다. 그의 일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를 명확하게 해주는 것이고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 응답할 때에 성령께서 회심시키시고 재싱시키는 일을 하신다.
주권자이시다: (고전12:11)
영적인 은사를 갖고 노는 장난감이 아니고 일하기 위한 도구이다! 영적인 은사는 교회를 위한 것이고 교회의 전체적인 세움을 위한 것이지 개인들이 자신의 처한 구석에서 그것을 행사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은 그가 결정하시는 대로 주시는데 있어서 주권을 행하시는 분이다.
예언의 저자이시다(벧후1:21).
성령은 하나님의 일들을 행하시는데, 실제로 하나님께서 큰 일을 행하실 때마다 성령은 활동적이시다. 그것이 세상의 창조든 예수그리스도의 수태, 죽음이나 부활이든 타락한 죄인의 재생이든 하나님의 능력이신 성령님이 활동하시는 것이다.

4. 성령은 신적 권위에 참여하신다: (마28:19).
삼위일체의 삼위께서는 세상을 복음 화하는 계획 뒤에 계시고 통일성을 가지고 함께 움직이신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과 동등한 지위로 말해지고 있으며 하나님으로 인식되고 있다.
삼위일체의 사실은 우리에게 불가사의를 제공한다. 만일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면 우리는 마땅히 그의 존재와 사역방법의 양상이 우리의 제한된 이해를 넘어설 것이라는 것을 예상함이 마땅하다. 하나님이 우리의 이해력 범주 안에 쉽게 드신다면 그 분은 매우 크신 하나님은 아니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시된 것만 알 수 있고 계시를 넘어 존재하는 것은 당분간은 불가사의한 것이다. (신29:29).
‘계시되어진 것’에 해당하는 것은 성령님의 신성과 성령님이 아버지와 아들과 동등하시다는 사실이다.

성령과 그리스도
성령의 사역과 그리스도의 사역간의 관계는 중요하다. 요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저는 진리의 영이라”(요14:16)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 ‘또 다른’으로 번역된 그리스 단어는 아주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알로스’인데, ‘똑같은 종류의 또 다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의 신분과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것과 같다.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의 사역 사이에는 서로 어긋남이나 갈등이나 어떤 종류의 분쟁도 없다.
성경은 때때로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와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을 이라는 표현을 맞바꿔 쓰고 있다.
우리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사시는 분이 성령이시며 우리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나타내시기를 갈망하는 분이 성령이시다. 성령의 존재와 사역은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중심하고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있다.
성령의 가르침은 그 자신의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진리일 것이다.(요16:13-14). 그의 사역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의식하게 하실 것이고, 성령의 일하심의 증거는 우리가 성령을 의식함보다 그리스도를 의식함에 있어서 더 뚜렷이 나타날 것이다.
삼위일체 안에서 우리를 아버지께로 인도하시는 분은 아들이시다.(요14:6).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아들을 알 수 있도록 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다.(고전12:3). 성령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나타내시고, 바로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우리가 아버지께로 가고 그를 즐거워할 수 있게 된다.

제8장 성령의 표징
당신 안에 성령이 사시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우리가 그것을 알아야 하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 그가 하나님이시라면, 또 자기 죄를 깨닫고 회개한 자들에게 삶 가운데 오셔서 사시는 분이심을 우리가 주장한다면, 결국 그가 그 삶 중에 계시다는 증거가 있어야만 할 것이다.
성령에 관한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경험 안에 표현될 때에만 가치 있는 것이 될 것이다. 진리는 성경 안에서 걸어나와 경험 안에 들어와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많은 교회 안에서 정통성이 진리를 경험하는 것에 의해서 보다는 그것을 ‘믿는 것’에 의해서 측정되는 것은 슬픈 일이다. 나는 경험에 근거한 기독교를 설파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벗어나서도 안되고 추가해서는 안될 말씀의 객관적 계시에 전적으로, 또 굳건히 서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경험적으로 표현되는 기독교 신앙, 그 안에서 성경이 경험으로 번역되고 삶에서 실제로 통용되는 것이 보여지는 그런 기독교를 필요로 한다.
바울이 세 번째 전도 여행에서 에베소에 왔을 때, 그는 거기서 ‘제자’되었다고 쓰여진 사람들을 향해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행19:2) 이 질문에서 무슨 미묘한 뜻을 찾으려 말라. 이것은 아주 직선적인 질문이다. 그는 “당신들은 그리스도인인가?”하고 묻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그들에게 교리적인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개인적인 경험을 묻고 있는 것이었다. 성령이 오셔서 그들 안에 사신다는 증거가 있는가? 그는 그들이 경험에 근거해서 답을 하리라 기대했다.(요일3:24).
만일 당신에게 성령이 계신다면 당신은 그리스도인임에 틀림없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성령을 가질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당신 안에 있는 성령이 당신이 그리스도인이 될 권리를 가져다 준다.
성령의 임재에 대한 ‘시금석’으로서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가? 나는 세 가지를 제시하려 하며 성령의 사역의 전체 영역이 아들 안에서 발견될 것으로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갈망
성령이 오심의 첫째 징표는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새로운 갈망이다. 우리는 전장에서 이미 성령이 그 자신을 영화롭게 하지 않으시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구하시는 것에 대해 언급하였다. 성령의 일은 그리스도를 나타내시고(고전12:3).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것들을 생각나게 하시며(요14:26).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시고(요15:26)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리시며(요16:14). 그리스도의 것을 가지고 우리에게 알리시는(요16:15)것이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누군가의 삶에서 활동하실 때의 처음 징표들 중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음을 잡아끄는 분으로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는 멀리 계시고 전설적인 분이기를 그만두시고 실제적이 되기 시작하신다. 이런 일을 일으키시는 것은 성령이시다.
사랑하고 있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처음 표징 중 하나는 그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더 잘 알고 싶어하는 강한 욕구를 가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욕망 가운데 하나는 성경에 대한 새로운 흥미이다. 성경의 진수는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이다.
성경을 읽지 않은 날엔 버스에 치이기가 쉽다는 식으로 성경을 부적같이 생각해서가 아니라, 성경이 그리스도를 계시하고 당신 가슴속엔 그를 더 잘 알기 위한 갈망이 있는 까닭에서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갈망
우리는 그리스도를 알려는 갈망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같이 되려는 갈망도 발견하게 된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성령의 열매’가 되어질 것들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열매’라는 단어로써 그는 우리의 삶에 성령이 계실 때 피할 수 없이 일어나는 결과를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갈5:22-23). 당신은 이 목록이 ‘성령의 열매는........’하고 단수로 되어 있고 ‘열매들은.’의 복수형으로 되어 있지 않음을 알아차릴 것이다. 이것들은 어떤 사람의 삶 속에서 몇 가지가 나타나고 또 다른 삶 속에서 다른 몇 가지가 나타날 수 있는 아홉 가지의 서로 다른 열매가 아니다. 아홉 가지의 성질 모두가 함께 우리 삶 속에서 성령이 일하시는 표현인 것이다.
이 변화된 성품은 세 가지로 표출된다

(1) 사람들에 대한 변화된 태도
사랑이란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향해 가지는 느낌 이상의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령의 도움 없이도 그들이 좋아하는 사람들과 그럭저럭 잘 지내지만 한 사람을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그보다 훨씬 더 깊은 것이 될 것이다.
우리 삶에서의 하나님의 사랑이란 우리가 이미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만 더 사랑하게 하여 자연적 분할 상태를 복돋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자연적 장벽들을 부수어 무너뜨리는 사랑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의 성육신이셨다.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당신과 나의 삶 안에서 성령의 목적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가 완전히 그리스도를 본받아 회복되는 이것이 우리의 목표이며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갈망은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고 일하시는 효과인 것이다.
바울이 갈라디아인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준 성령의 열매에 관한 목록에서 우리의 사람들에 대한 태도는 자비, 양선, 충성, 그리고 온유로 표현되어 있다.이것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보살핌의 매우 실제적인 표현들이다.

(2) 환경에 대한 변화된 태도
그리스도인은,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어려움 들로부터 면제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뛰어들어 헤쳐 나갈 수 있게 무장되는 것이다.
‘희락’이란 ‘행복’과는 다른 무엇이다. 희락이란 그보다 훨씬 더 깊은 무엇이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로서 환경 너머를 본다. 바울이 빌립보인들에게 편지할 때 그는 로마에 수감되어 있었다.(빌4:4). 바울은 그의 고통을 즐겼기 때문에가 아니라 그의 시련의 너머를 보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일하심을 기뻐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었다.
‘화평’이란 평온함과는 다른 무엇이다
하나님의 화평은 우리를 어려움에서 옮기시는 것을 뜻하지 않고 어려움 속에서도 가지는 우리의 경험이 되는 것이다. 마치 주 예수께서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을 때”(마8:24)제자들과 함께 탄 배 안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는 것과 같다.
(빌4:6-7)의 이 화평은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강’으로서, 당신이 당신의 문제에 대해 지금 염려하는 것보다 더 염려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설명해 줄 수 없는 것임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문제들로부터 탈출하도록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 속에서도 그의 넉넉하심을 증명하도록 부르시는 것이다.
‘오래 참음’은 화평에 매우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바울은 “환난은 인내를 이룬다”(롬5:3)고 썼다.
우리의 삶 속에 성령이 계심은 환경에 대한 새로운 태도로 표현되며, 우리는 희락, 화평, 인내의 특징을 보이게 될 것이다.

(3) 우리 자신에 대한 변화된 태도
세 번째로 성령의 임재하심의 열매는 ‘자기 통제’에서 나타날 것이다. 성경은 ‘성령의 통제’하에 들어감을 말하고 있지 않고 성령이 우리를 자기 통제하에 놓이도록 인도하실 것이라고 하고 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것을 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우리를 ‘통제’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도록 만드신다.
이 세 가지 태도들은 어느 것도 우리에게 자동적인 아니다. 그것들은 힘써져야 한다. 성령은 욕구를 창조하시고 능력을 주시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성령의 열매가 포괄하는 모든 범위에 걸쳐 훈련되어야 할 필요가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성령이 하시는 일의 한 부분은, 그리스도의 삶을 그렇듯 매력적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으로 만들었던 그 품성들이 점점 더 우리의 삶에서 나타내 보여지도록,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갈증을 창조하는 것이다.
성령은 우리를 통해 흐르시려고 우리에게 오신다. 예수는 성령을 믿는 자의 안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물줄기와 같은 것으로 말씀하였다.
컵은 채우면 가득 해진다. 그러나 파이프에 채워 넣는 모든 것은 흘러 나간다. 그것이 우리 삶의 모습이다. 성령이 임재하시는 징표의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흘러서 다른 사람들의 삶이 축복되고 풍요롭게 되도록 하려는 갈망이다. 우리 자신을 먼저 돌보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과 아무 관계가 없고 성령의 일과도 아무 관계가 없다. 그 약속은 사람들을 자기 자신을 위해 능력 있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 아니었고, 세상 전역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함으로써 하나님을 섬기고 그의 계획을 이루도록 무장시키려는 것이었다.
(행1:8) 여기서 논할 것은 성령의 은사의 내용이 아니라 그 목적이다. 그것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효과적으로 섬기도록 우리를 무장시키는 도구들로써 주어진 것이다.
베드로는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4:10)고 썼다.
이것들은 결코 자기 만족이나 개인적 용도를 위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굳게 세우기 위해 주어지는 것이다.
여기에 비추어 보건대 나는 ‘은사 중심적’이 되는 것은 착오라고 믿는다. 그보다 우리는 ‘섬김 중심적’일 필요가 있다. 누군가에게 “당신의 영적인 은사는 무엇입니까?” 하고 묻는 것은 부적절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해 어떤 일을 하고 있습니까?”라고 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사람들이 내게 자기들의 ‘은사’를 어떻게 발견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 것에 마음이 편치 않다. 그보다는 자신들이 어디에서 어떻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참여할 수 있느냐고 묻는 것을 듣고 싶다.
성령의 일에는 많은 요소들이 포함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그 요소들은 이 세 분야의 궤도에 들게 될 것이다. 모든 가능의 방법을 다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섬겨 일하고자 하는 갈망이 존재할 것이다.

제9장 믿음으로 사는 삶
그리스도인들이 사용하는 어휘들 중에 가장 잘못 이해되어지고 있는 단어들의 상위 10위의 목록을 꼽는다면 나는 그 1위의 자리에 ‘믿음’이란 단어를 놓고 싶다.
그 말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심 되는 요소로 우리들을 안내하며, 또한 우리의 경험 속에서 자유와 해방과 능력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단어들과는 달리 그것은 사람들에게 좌절과 낙심, 심지어는 비난을 받고 있는 것 같은 감정들을 불러일으킨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피할 수 없는 한 가지는 믿음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경험 속에 결코 없어서는 안될 부분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았고’, ‘믿음으로 의로와졌으며,’ 또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음’을 성경은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믿음에 대해 여러 가지 다른 방식대로 생각할 수는 있을지라도 믿음이 매우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만은 동의해야 할 것이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먼저 그 말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것이다. 정의되어지지 않은 막연한 말은 더 큰 혼란의 원인이될 수 있다.
믿음에 대해 긍정적으로 정의 내리기 전에 먼저 믿음의 의미로서 보편적으로 알려진 - 그러나 잘못되어진 두 가지의 개념을 언급해야 하겠다.
믿음은 신비적인 능력이 아니다.
믿음은 순전히 신념의 힘에 의해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록 만드는 신비적인 능력이 아닌 것이다.
믿음은 사실들의 대용품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을 단지 어떤 사실들이 다 없어져 버렸을 때 그제서야 그 활동을 시작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사실 진실은 이와 정반대이다! 믿음은 어떤 사실들의 대안이 아니다. 그러나 믿음은 오로지 그것이 사실 안에 있을 때 유효하다! 믿음은 무엇인가의 안에 놓여져 있어야만 한다. 이런 면에서 그것은 사랑과도 유사하다. 사랑은 어떤 물건이나 또는 어떤 사람을 향한 마음의 태도 이외의 그 어떤 식으로도 존재하지 않는다.
믿음도 이와 유사하다. 믿음은 당신이 두 눈을 감고 주먹을 꽉 쥔 채로 무엇인가가 일어나기를 믿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보다 믿음은 무엇인가를 향한 신뢰의 태도이여 그 신뢰의 태도로 말미암아 그 무엇인가는 자기의 역할을 다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만약 내가 내 자동차를 믿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내 차에 대해 신뢰의 태도를 취하고 있음을 의미하며 그 신뢰의 태도로 인해 나는 길 위를 달릴 수 있다는 말이다.
만약 부실한 의자를 너무 믿고 그 위에 앉아보라. 곧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문제는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믿고 있던 대상의 연약함에 있는 것이다.
믿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 그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고자 하는 그 믿음의 대상이다. 왜냐하면 믿음은 그 대상으로 하여금 우리를 위해 일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는 것 가운데 예수님을 예수님 되게 하고, 또한 그가 하시는 일들을 하도록 하는 그에 대한 이러한 신뢰의 태도가 바로 믿음의 훈련이다. 성경이 ‘믿음으로 구원 받았음을’을 말할 때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구하기에는 철저히 무능력하다는 것을 인식하며, 예수님께 의지하여 “구주 예수님, 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당신만이 저를 구원해 주실 수 있습니다. 나는 당신이 그렇게 하시리라고 믿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런 식으로 기능하도록 짜여져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구원을 얻기 위해 그리스도가 필요함을 인식하고 있으며, 믿음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그 일이 그들에게 있어서 기본이 되며 중요한 일이라는 것도 이해하고 있다.
우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우리 자신의 행위와 능력에 기초한 것인가, 아니면 믿음으로 성령을 받은 것인가? 그 대답은 물론 우리가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다는 것이다. (갈3:3) ‘어리석도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너희들은 믿음으로 성령을 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지만 그 것을 받은 후에 너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너희들 자신의 능력으로 살아가려고 하고 있다. 마치 하나님께서 참으로 우리의 삶에 관여하지 않으시고 한쪽 옆에 비켜서서 바라만 보시고 계신 것처럼 말이다.”
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표현이 있으며 이 어떤 특수한 용어가 되어서, 그 말이 하나님을 위해 일하도록 부름 받았으며 고정 수입 없이 재정적이고 물질적인 필요들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적용되고 있는 것이 참으로 애석한 일이라고 믿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환경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부르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오로지 이것만을 ‘믿음으로 산다’라고 일컫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당신에게 그들이 ‘믿음으로 산다’라고 할 때 그들은 그들이 ‘죄 안에서 살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죄’라 함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부터 비롯되지 않은 모든 것을 말한다. 이 문맥에서 우리는 ‘믿음’이라는 용어의 정의를 내려야 할 필요가 있다. ‘믿음’이라는 말이 두 가지 방법으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에게 Loch Ness괴물을 믿는지를 묻고 나서 그 다음 아스피린을 믿는지를 묻는다면 나는 두 가지의 서로 매우 다른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에게 Loch Ness괴물을 믿는지를 질문할 때 나는 당신이 스코틀랜드의 호수에 숨어 있는 목이 길고 혹이 두 개 난 괴물이다. 바로 이 시간에 나타난다고 하는, 그 괴물이 진짜 있다고 믿는지를 알고 싶은 것이다. 당신의 대답은 ‘예’일 수도 있고 ‘아니오’일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의 믿음이란 순전히 머리 속으로만 이루어지는 일이다.
그러나 당신에게 아스피린을 믿는지 안 믿는지를 물어 볼 때 나는 당신이 이미 통증 완화제로서의 아스피린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이란 당신이 존재한다고 알고 있는 것으로 하여금 그의 일을 하게 하도록 당신이 준비됨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신약에서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관계에서 사용되어지고 있는 ‘믿음’의 의미이다. 그것은 그저 그가 존재함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로 하여금 그의 일을 하시도록 하는 그런 종류의 믿음이다. 믿음에 있어서 실패하고 그 분으로 하여금 일하시도록 하는 것에 실패할 때 그것이 바로 죄의 본질이 된다.
하나님께 의존하는 것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것은 어떤 것이든 모두 죄가 된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그를 향한 우리들의 성향이 그 분으로 하여금 우리 안에서 하나님이 되게 하고, 또한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통해서 일하시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히11:6)라고 기록된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 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람들의 마음속에 가장 자주 떠오르는 반응 중의 하나는 그들이 충분한 믿음을 갖고 있지 않다라고 느끼는 것이다. 사람들은 종종 “내게 만약 좀더 믿음이 있다면”이라고 말한다.
누가복음 17:5-6에서 우리는 그 사건을 찾아볼 수 있다. 겨자씨는 그 때에 중동 아시아에서는 가장 작은 씨로 알려져 있었다. 그가 뜻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믿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그 믿음의 대상이라면 사실상 믿음의 크고 작은 양은 이차적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의 양적인 면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그 믿음이 어디에 머물러 있을 것이냐 하는 그 믿음의 대상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하나님을 알아 감으로써 자라난다. 거기에는 그것 외의 어떤 대안도 없다. (롬10:17).
그리스도를 알게 되는 것 외에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이것이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멀리서 그를 그저 영웅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경험 속에서 본래의 그 분이 될 수 있는 자유를 그리스도께 내어 주게 될 것이다.

제10장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신뢰
근본적으로 믿음은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에 의해 표현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믿고 있는 대상이 그 믿음에 응하여 일하는 바로 그것을 믿는 것으로 나타나진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도 그렇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그로 하여금 일하시도록 하나님 안에서 그를 신뢰하는 태도를 갖는 것이다.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하게 하는 두 가지의 매우 중요한 요소
1.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2.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신뢰하는 것.
이 두 가지면은 따로 따로 이해되어져야 하지만 또한 결코 서로 분리되어져서도 안된다. 그의 명령들이 요구하는 힘과 능력에 상응하는 그를 믿는 믿음 없이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단지 좌절과 위선에의 유혹을 이끌어 낼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편의 자발적이고도 적극적인 순종 없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우리를 신비주의 계통으로 인도할 것이다. 이것은 17세기 이후 ‘경건주의’로 알려졌으며 그 이름이 보여 주는 것처럼 조용하고 수동적이며 하나님 안에서 전적으로 주관적인 마음의 휴식을 갖고 무엇을 하도록 성령에 의해 움직여지고 압박당한다고 느껴지는 것들만을 행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포기와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구주 되신 그리스도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사울의 실패
나는 이제 한 사람은 실패자요, 또 한 사람은 성공적인 삶을 살았던 사울과 다윗 두 사람의 경험을 조명해 봄으로써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원리들을 설명해 보려고 한다. 사울이 민족을 다스리도록 임명되었을 때 사무엘을 향한 사울의 최초의 반응은 신실했다. 그는 겸손히 응했다. 시작이 그렇게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후 사울에게는 모든 일들이 매우 나쁜 쪽으로 전개되어 가기 시작했다.
사울에 대한 기록은 아말렉과의 충돌(삼상15장)을 시작으로 잘못되어 가고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분명한 지시를 받았지만 그 지시에 그는 스스로 손질을 가했다. 하나님께 동의하지 않음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하였던 것이다.
그 자신을 통해 역사하고 계신 하나님을 그는 경험하였지만 그 경험이 결국 자족감을 만들어 내고 말았으며, 그는 그 자족감으로 인해 망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 자신의 능력을 신뢰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나님과 떨어져 있을 때 그의 힘이 완전히 고갈되리라는 것을 그는 인식하지 못하였다.
사울이 전적으로 의심 없이 순종하는 그 길 밖으로 나갔을 때 하나님의 힘 또한 그를 떠나갔다. 믿으며 사는 삶의 근본은 순종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보라. 당신은 하나님이 주시는 그 자력으로부터도 벗어나게 될 것이다. 그것들은 쉽게 말라 버리고 만다.

다윗의 성공
사울의 실패와는 선명하게 대조적으로, 그의 훈계자인 다윗에게서 우리는 승리를 본다. 그러나 실패 없이는 승리도 있을 수 없다.
아마도 이것의 가장 좋은 예이며 또한 믿음으로 사는 그 원칙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일 것이다.
상태는 이런 단계에 있었다. 40일 동안 딜레마에 빠져 있는 바로 그 현장에 다윗이 형들에게 줄 음식을 가지고 도착한 것이다. 이 이야기 속에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블레셋으로부터 그들을 자유롭게 해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달라고 그저 단순히 요구하는 그것이 믿음인가? 골리앗의 패배를 위해 기도 모임을 갖는 것이 믿음인가? 하나님께서는 기적을 일으키시어 골리앗을 심장마비나 뇌일혈로 쓰러뜨리실 수도 있다. 그들은 모여서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기적들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하옵소서!” 아니다.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 분이 누구신가를 믿은 그 누군가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순종이 없는 곳에서 일하시려 하지 않으시며, 그들이 순종하기 이전에는 아무것도 보여 주시지 않으신다. 만약 골리앗이 무너진다면, 거기에는 누군가가 조건 없는 믿음으로부터 이끌어 내어지는 전적인 순조의 행위를 감당해야 했을 것이다.
우리가 위험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거의 볼 수 없다. 우리가 외관상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하에서도 오직 한 가지,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라고 말씀하셨고,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 결과를 책임지신다는, 그 사실을 믿고 온전히 순종할 때 겪게 되는 위험을 의미한다.
그것이 가능할까라는 질문은 다윗을 그렇게 오랫동안 잡아놓지 못하였다. 그는 그것에 대해 생각했고 곧 아버지의 양들을 공격했던 사자와 곰과 싸웠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구해 주셨던 것을 기억해 내었다.
다윗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무엇이 옳은 가였다. 만약 그가 옳은 일을 행한다면 그 결과는 하나님께서 책임지실 것이었다.
우리 모두는 허드슨 테일러나, C.T스터드, 죠지 물러, 또는 D.L.무디와 같은 사람들 안에서 그렇게도 힘있게 일하신 하나님은 믿으면서도 바로 우리 뒤에 계신 똑같은 하나님의 그 충만하심은 믿지 않는다!
만약 사울이 입밖에 내어 다윗에게 공포한 사실, 즉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하시리라’는 것을 그 자신이 믿었다면 그는 사십 일 전에 그 스스로 앞으로 나아갔어야 했다.
다윗의 대답은 그의 담대함의 비밀을 보여 준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삼상17:45-47). 이 말과 함께 다윗은 그와 대적하기 위해 달려 갔으며 가방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 개를 꺼내 물매에 넣고는 그 표적을 잘 겨누어 돌을 던져 바로 골리앗의 앞이마를 쳤던 것이다.

신뢰하라 그리고 순종하라
그 이야기 속에서 다윗이 삼았던 삶의 원칙이 바로 당신과 나의 삶을 살아가는 원칙이 되어야 할 것이다. 현실 도피나 환상의 요소들로 덮어 버릴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한 어린아이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갔느냐에 대한 기록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다. 그는 그 상황하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았으며, 앞으로 나아가 인간적으로는 엄청나게 위험해 보이는 것을 받아들였고 그리고 순종하였던 것이다. 다시 되풀이하건대 다윗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이 사건 속에서 하나님이 이 일을 하시기에 얼마나 충분하신 분이신가를 입증하였다. 그가 앞서서 먼저 순종하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그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골리앗이 바닥에 쓰러지자마자 이스라엘 군대는 그들의 장막을 떠나 언덕을 뛰어내리며 가이의 성문까지 도망치는 블레셋 군을 추적하였다. 교회는 다른 사람들의 승리에 편승해서 그것들로부터 얻어지는 은혜를 즐기려 한다. 어떤 사람이 굉장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증거하고 놀랄 만한 일을 하신 하나님을 경험할 때, 우리들은 그것에 대해 듣고, 말하고, 읽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 대가를 지불할 준비는 되어 있지 않다.
무엇보다도 슬픈 일은 사울이 그 자신을 통한 하나님의 승리를 경험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다윗이 와서 그 이야기를 듣고 그렇게 하기로 준비되었을 때 사울 자신이 그를 질투하였다는 사실이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그의 경험 속에서 하나님 되게 하지 않을 때 그는 항상 그렇게 하는 사람들을 싫어하기 시작할 것이다.
사울의 일생의 비극은 그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들이 있었음에도 그가 순종해야만 하는 그 순간에 그 자신이 결정하고 선택하기 시작하였다는 데 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계획에서 벗어난다면 그는 그의 충만하심을 경험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사울의 문제였다. 그는 이제 초기 성공의 역사만큼이나 실패한 역사를 갖게 되었다. 더 나아가 그의 자존심과 불순종, 그리고 하나님의 충만하심을 의심함으로 실패의 원인이 바로 그 자신었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골리앗과 얼굴을 마주하였을 때 그는 해야 할 일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다윗과는 달리 선택적인 순종의 역사만을 갖고 있었기에 그 자신이 하나님께서 얼마나 지속적으로 완전히 신뢰할 만한 분이신가를 배우는 기회를 빼앗기고 말았다.

당신은 믿음으로 살고 있는가?
이러한 경험이 삶 속에서 진짜가 되어지는 실험실은 바로 당신의 엘라 골짜기일 것이다. 그곳에서 도저히 이치에 맞는 승리의 희망이라곤 없는 한 거인과 당신 스스로 만나야 하지만 당신의 뒤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하나님의 생명이 당신 안에 있기 때문에 당신은 앞으로 나아가 영광의 표시와 하나님의 선하심을 즐거워하게 될 것이다.

제11장 그리스도 안에서 행동하는 삶
하나님은 이 세상을 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실 뿐만 아니라 또한 이 세상 안에서 그 계획을 갖고 계신다. 하루하루 새로운 날들은 그의 뜻 아래 일어나는 일들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러나 그것들은 어떻게 성취되어지는가? 놀라운 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이 사람들을 통해, 더욱 놀랍게도 매우 평범한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기꺼이 자신을 하나님이 쓰시도록 드리는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시려고 하신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될 때 그들의 경험 속에는 두 가지 일들이 일어나게 된다. 그들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기 위해 오시고, 그리고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살기 위해 오게 된다.
이 말은 신약성경의 바울 서신에서 독특하게 표현되었고 신자들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 사이의 관계를 말할 때 바울은 이 말을 가장 빈번하게 사용하였다. ‘그리스도 안에서’라고 사실상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바울 서신 이외의 글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그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바울은 후에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설명하였다.(고전12:13).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이것은 바로 교회가 실제로 살아 있는 그의 몸으로 묘사되어지는 것과 같다. 그의 생명과 뜻은 교회를 통해서 표현되고 성취된다. 그들은 죄를 회개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 곳에는 또한 예수의 영이 깃들어 있고 그의 몸과 결합되어진다. 교회는 단체가 아니라 바로 살아있는 유기체이다. 그 구성원들은 내재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의해 서로 연합되어 있다. 우리를 그의 몸의 일부로 만들어 주는 그의 생명을 우리는 함께 나누는 것이다.

육신의 가치!
그리스도의 몸이 되신 교회의 실제를 이해하기 위해 잠깐 당신 자신의 육체적인 몸을 생각해 보는 것도 좋겠다. 당신의 몸이 바로 당신은 아니다. 단지 당신이 살아가고 있는 장소일 뿐이다. 만약 당신이 두 다리와 팔을 모두 잃어 몸의 절반이 없어진다고 해도 당신은 그 전과 똑같은 진짜 당신이다. 그 기능을 전과 같이 잘하지는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신은 완전히 전과 똑같은 바로 그 사람이다.
당신이 일하러 갈 때 당신은 당신의 몸으로 일한다. 당신이 품고 있는 모든 야망도 그것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당신의 몸을 필요로 한다. 몸을 통해서만이 당신의 생각은 말하여지고 계획한 일들이 성취된다. 또한 당신의 몸은 이루어지는 일들을 통해 그 안에 살고 있는 진정한 당신이 표현되어질 수 있는 매개물인 것이다. 육신이 없이는 이것들 중 아무것도 일어날 수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을 위해 위대한 계획을 갖고 계시며, 또한 그 계획들을 이루시기 위하여 매개물을 창조하셨다. 그것이 바로 육신이다!
혼자의 몸으로 이 땅 위의 삶 속에서 그의 사역을 감당하셨던 바로 그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새로운 몸, 즉 교회를 통해 그 이후로도 그의 사역을 계속 펼쳐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교회의 머리이고 교회의 생명이시지만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그의 사역의 물질적인 매개물은 이 목적을 위해 쓰여지도록 준비된 그의 자녀들의 삶과 그들의 육신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의 주제이다.
사도행전이 같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이제는 단지 그 분 혼자의 육신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순절에 그에게 주어진 새 몸, 즉 교회를 통해 계속하여 행하시고 가르치시는 모든 것을 기록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 오순절의 효과이다. 왜냐하면 새롭게 창조된 그의 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특성과 그의 행위, 그리고 그의 목적들이 표현되고 성취되어지는 매개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것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엡1:18-19). ‘우리의 물려받은 기업’안에서 즐거워함은 좋은 것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특성들은 당신의 살과 뼈가 당신의 몸이 되는 것과 같은 특성이다. 그것은 당신의 생명의 거주지가 되며 당신의 머리가 지시하는 대로 작동된다.(엡2:22)그리고 그들은 ‘......하나의 머리 바로 그리스도 아래서’(엡1:10)그 기능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용하신다
하나님께서 그의 뜻과 목적하는 바를 실현시키시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사람들 사이에 일하시는 데 있어서의 근본적인 방법은 교회를 통해서 일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하고 있는 모든 것이 우리의 육신을 통해 이루어지듯이,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들 가운데 하고 계신 모든 것은 그의 몸, 즉 교회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는 그의 일이 이런 식으로 되어지는 것을 선택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밖에서 또는 교회를 떠나서 일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교회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당연한 일로 기대한다.
만약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을 통해서 당신을 만나 주셨다면, 그의 계획은 이제 그가 다른 사람을 만나기 위해 바로 당신을 사용하실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해 온 모든 것을 감안할 때 이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임의로 선택할 수 있는 여분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께로 이끌려 그와 관계를 맺기 위해 필수 불가결한 부분이다. 그의 몸인 교회를 통해 그 자신을 보여 주려는 것이 그의 뜻임을 기억하라. 우리가 그를 섬긴다고 할 때 거기에는 우리 스스로 권위를 세워 드린 그분에 대한 고의적인 불순종이 없어야 한다.
에스겔은 구약에서(겔22:30-33) 하나님께서는 일할 사람을 찾지 못하셨기 때문에 그의 일을 이루지 못하셨고 그리하여 선택의 여지없이 분노를 쏟아놓고 떠나 버리셨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불복종할 때 어떤 계략을 세워 우리를 앞질러 가시지 않는다. 그의 원칙은 사람들을 피해 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사람들을 통해 일하시기를 선택하셨다는 것이다.
사단의 거짓말 중 하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생각 속에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시지는 못할 것’이라는 가정을 만들어 놓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사용하시는 그의 능력은 인정하면서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는 그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단지 성령을 비탄에 잠기에 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확실하고 위대한 모험조차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내가 나 자신과 내가 가진 능력에 대해 무엇을 생각하든 간에 그것과는 상관없이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몸의 일부로 나를 초대하셨으며 그의 일을 하시기 위한 방법의 일부로 나를 부르셨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자신을 단지 그의 ‘일’을 위해 맡길 뿐 아니라 그 몸의 머리에게도 우리 자신을 맡겨야 한다. 그렇게 할 때 그는 그의 계획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의 길을 인도하실 수 있다.
사도 행전에서 볼 때 사도들과 초대 교회의 지도자들은 어떤 하나의 전략에 그들을 맡기지 않았다. 오로지 그리스도께 그들을 전적으로 맡겼다. 구주로부터 나온 전략은 그 어떤 것이라도 좋은 것이다. 그들은 그 자신을 구주께 완전히 위탁하였다. 행8장에서 복음은 특히 빌립의 사역을 통해 사마리아까지 퍼져 나갔던 것이다.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목적이나 대의 명분에 헌신되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쓰시고자 할 때면 언제든지 쓰실 수 있게 준비된 우리를 원하신다! 때로는 어떤 특정한 목적을 위하여 우리의 삶을 드리도록 우리를 부르실지도 모른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우리의 헌신은 그리스도께 드려져야 하며 결과적으로 그가 우리에게 하라고 주신 것이 무엇이든 그것에 우리 자신을 드려야 한다. 매일 새롭게 시작되는 아침에 그날 하루도 우리를 통해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자신을 자유로이 나타내실 것을 기대한다. 또한 그가 이루신 일들을 우리가 확인하고 공감하는가에 상관없이 그가 그의 사역의 어떤 국면들을 성취하실 것이라고 기대한다. 이것은 우리가 가진 특권이며 우리의 책임이기도 하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거하실 때 그는 우리에게 능력을 주신다. 다른 어떤 종류의 능력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능력으로 우리는 보다 효율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요15:5).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그는 우리에게 목적을 주신다.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몸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계획들을 실현하도록 준비되어진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 거하실 때 그는 또한 우리에게 자원을 제공하신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을 아마도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우리의 것으로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그는 우리에게 책임을 주신다. 그의 몸의 일부로서 내가 직면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는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인 것이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거하실 때 그것은 역동적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기에는 요구(demanding)하는 것이 있다. 만약 그 분에게 무엇인가 할 일이 있다면 그 분에게는 그 일을 이루는 수단으로 우리를 사용하실 권리가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삶이다. 이 세상에서 그의 모양과 형상을 나타내지 못하고 우리의 실패를 직시하며 우리는 용서를 위해 십자가 앞으로 나온다. 성령의 내재하심을 입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의 생명과 뜻을 드러내기 위한 매개물이 되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목숨을 걸고라도 이것을 알아야 한다. 당신과 나의 삶 속에서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특성을 볼 때까지 이 세상은 그것들을 믿을 만한 터전을 갖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그것은 또한 처음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가지셨던 그의 뜻이기도 하다. 우리는 오직 이것을 통해서만 궁극적으로 우리의 삶을 이해할 수 있다. 당신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실체를 발견했는가, 아니면 그것을 다른 무엇인가로 대체시켜 버렸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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