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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자료] ]신앙의 기본 / 구제

작성자넓은가슴|작성시간10.12.04|조회수179 목록 댓글 0
신앙의 기본 / 구제

사도행전 10:1-6

오늘은 구제입니다. 우리가 읽은 성경은 사도행전10:1-6입니다. 고넬료라는 로마 정규군 이탈리아 여단 소속 중대장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하필이면 구제라는 설교를 하면서 이에 관한 성경본문이 수없이 많을 터인데 왜 이 부분을 성경본문으로 골랐느냐 라고 묻는다면 구제가 남을 돕는다는 쪽보다 구제가 신앙의 필수요인이라는 것을 여기서 잘 부각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신앙생활을 경건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삶을 경건이라 합니다. 대개 이 삶은 하나님 앞에 기도와 금식과 말씀에 대한 묵상이 주종을 이룹니다. 골자는 하나님을 항상 의식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머리 숙이고 겸손히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을 경건이라 합니다.

본문10:1입니다.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고넬료는 유대지역 로마 주둔군 이달리야 여단 소속 중대장입니다. 월남에 있을 때 한국에 편지 보낼 때 제 주소가 항상 이 방식을 따랐습니다. ‘주월 한국군 맹호사단 1연대 군종부 병장 김신철’ 그런 식으로 ‘주(駐)유대 로마군 이달리야 여단 소속 중대장 고넬료’라 밝히고 있는 겁니다. 2000년 전의 과거나 현재나 군인의 신분은 소속과 직책 관등성명을 밝히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10:2입니다.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고넬료는 경건한 사람이라 합니다. 경건이란 하나님을 의식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의식했습니까. 성경을 계속 읽습니다.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여” 하나님을 어떻게 의식했다구요? 경외했다고 합니다. 경외란 두려워한다 라는 동사의 명사형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우신 분으로 의식했습니다. 잠언 1:8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 합니다. 집안에 시부모를 모시는 사람은 그 시부모를 항상 의식하며 삷니다. 모시고 산다는 것은 그 분을 의식하며 말하고, 그 분을 의식하며 행동하는 것입니다. 고넬료는 하나님을 그렇게 모시고 살았습니다. 항상 두려운 분으로 인식했습니다.

그러나 경건은 항상 하나님 앞에서만 일어나는게 아닙니다. 사도행전10:2를 계속 읽습니다.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고넬료가 거룩하게 산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을 두려운 분으로 인식하며 그렇게 말하고 행동했지만 그러나 거룩하게 산다는 것은 사람 앞에서 구제하는 삶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말은 무엇인가 하면 고넬료의 급료가 유대인들의 보편적 생활비보다 항상 많았다는 겁니다. 30년 전 이야깁니다. 제 여동생이 미국으로 갔습니다. 한국에 나와있는 미군 대위와 결혼을 해서 미국으로 갔습니다. 당시 미군 대위 봉급이, 당시 한국군 대위 봉급과 비교해보면 하늘과 땅 차이였습니다. 한국군 대위 한달 봉급이 호봉에 따라서 달랐지만 대위 3년차 봉급이 10만원 안팎이었습니다. 그래도 그것으로 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 가정생활을 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미군 대위가 한 주에 받아오는 급료가 당시에 400불이었습니다. 월급으로 환산하자면 4.3배를 곱해야 합니다. 1690불에 해당됩니다. 이걸 당시 환율로 환산하여 700:1로 계산하면 118만원입니다. 한국군 대위 봉급의 열 배가 넘었습니다. 그 돈이라면 당시 미국에서는 그런대로 살만한 돈이었겠지요. 그러나 물가가 싼 한국에서는 대단히 호화로운 삶을 살고도 남았던 것입니다.

고넬료는 로마군의 대위입니다. 그는 그 급료를 받아 로마 본토에서도 그런대로 살 수 있는 자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유대나라에서는 대단히 호화로운 생활을 할 수 있는 엄청난 돈에 해당됩니다. 물가 싸지요, 인건비 싸지요… 그래서 고넬료의 집에는 종들이 많았습니다. 그렇게 유족하고 여유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넬료는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사는 자입니다.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살아간다는 게 사람 앞에서는 어떻게 사는 것입니까. 그게 구제라는 형태를 띠고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과시도 아니고 그것은 도와주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하나님을 의식했을 뿐입니다. 그게 구제입니다.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내 식탁은 항상 호화롭고 저 사람의 식탁은 항상 가난하고 초라합니다. 여기 무감각한 자는 하나님을 의식하는 자가 아닙니다. 그것은 거룩한 삶이 아닙니다.

옛날에 우리가 클 때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형제들이 많았습니다. 이들이 다 장성하고 각기 가정을 이루고… 그 형제들이 다 잘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꼭 한 두 명씩은 다른 형제에 비해서 궁색한 삶을 살더라구요. 부모는 그게 항상 마음에 걸리는 겁니다. 그런데 잘 살든 못살든 다 자식이고 보면 잘 사는대로 보모를 의식하게 되고 못사는대로 또 부모를 의식하게 됩니다. 그게 우리네 삶이었습니다. 부모는 잘 사는 아들에게 항상 못사는 아들을 부탁합니다. “얘, 쟤좀 돌봐줘라” 세상에 부모를 의식하고 살아도 더불어 사는 삶은 가능한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 아버지를 두려운 분으로 섬기는 삶이겠습니까. 구제는 그래서 나오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 거기 이어진 공산혁명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저들 신앙인들이 입으로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가난한 형제들의 삶에 아무런 참여를 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때 없는 자가 있는 자를 쫓아내는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이건 러시아에서 일어난 것이지만 이보다 120년 앞서서 불란서에서 일어난 혁명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들 다 신앙생활을 잘한다 했습니다. 그러나 입으로만 신앙생활입니다. 실재로는 아닙니다. 특히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하나님의 뜻을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부자들, 그 비호세력들을 처형하고 그들의 것을 빼앗아 버린 것이 불란서 혁명입니다. 그리고 불란서 문화에서 그리고 그들의 역사에서 인문주의에 의해 신앙의 철저한 도태를 맛보아야 했습니다. 왜? 신앙의 역할을 상실하자 ‘차라리 인간의 보편적 양식이 인간을 이끌어 가게 하자. 신앙이 인간을 지배하게 하지 말자’ 했습니다. 거기 그 인문주의자들이 쓰는 ‘신앙’이라는 용어는 기독교 신앙을 비하하는 뜻으로 쓰고 있습니다.

이때 나온 대표적 작품이 저 유명한 “노트르담의 꼽추”입니다. 이 소설에서 사회를 가진 자와 부랑자, 기득권자와 떠도는 자로 나누고 있습니다. 거기 교회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거룩의 이름으로 인간의 본능을 추잡하게 가린 신부들… 비록 저 노트르담의 종치기로서 성직에 감히 갈 수 없는 흉칙하게 생긴 꼽추이지만 그러나 진실한 성직자보다 더 진실한 인간일 수 있었다는 외침이 그 소설에 담긴 메시지입니다. 노트르담의 종치기 꼽추의 인문정신(Humanism)이 아무런 역할을 못하고 종교적 특권을 누리는 성직자들 보다 백배 인간적이라는 게 이 소설의 골자입니다.

그러나 불란서의 기독교가 이렇게 타락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살아서 움직이는 신앙이요 사회적 양심일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나온 대표적 작품이 “쟝발장” 이란 소설입니다. 도둑질 때문에 18년형을 살고 나온 사람입니다. 사회는 그를 받아주지 않고 배척했습니다. 신부는 그를 교회로 받아들입니다. 한푼의 돈이 아쉽던 이 사람, 자기를 받아들인 교회의 촛대를 훔쳐 달아납니다. 그러나 경찰에 붙잡혀 옵니다. 그래서 촛대를 장물로, 장발장을 현행범으로 묶어서 교회에 피해자 진술을 받으러 경찰이 온 것입니다. 신부는 그 진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 촛대는 내가 준 것입니다. 저 사람이 훔친 것이 아닙니다. 이걸 팔아서 새출발의 자금에 쓰라고 내가 준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짓밟히고 사회에 반감이 그토록 많이 쌓엿던 이 범인. 그는 이 순간, 신앙에 몸 바치기로 마음 먹습니다.

구제는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자가 사람 사람 사이에서도 하나님을 의식하게 되자 나타난 신앙의 현상이었습니다. 고넬료의 구제가 그런 것입니다. 이것은 남을 특히 도와준다는 식으로 나타나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형제를 향한 신앙의 표현이었을 뿐입니다. 형제를 향한 신앙의 표현은 많습니다. 많은 진실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일 수 있습니다. 친교라 합니다. 그리고 서로의 삶을 나누는 것입니다. 돌본다라고 합니다. 서로 사랑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비슷비슷한 처지에 있는 자들끼리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거기서는 신앙의 마음만 있으면 됩니다.

구제도 거기서 다른 것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의식한 경건의 생활이 사람에게도 적용되었을 뿐입니다. 고넬료는 부자였습니다. 하지만 구제가 신앙을 형제에게 표현한 것이라 했을 때 그것은 부자의 몫만은 아닙니다. 모두의 몫입니다.

옛말에 “십시일반(十匙一飯)”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열 사람이 한 숫가락씩만 모으면 밥 한그릇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열 사람의 작은 도움으로 한 사람의 배고픔이 해결된다는 말입니다. 인문주의란 이처럼 아름다운 말을 만들어냈습니다. 만약 우리 신앙이 이런 인문주의가 만들어낸 언어보다 열등하게 나타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맛을 잃은 소금의 운명이 될 것입니다.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입니다. “노트르담의 꼽추”는 신앙을 인문주의로 마음껏 짓밟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사도행전 10:2를 마져 읽습니다.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거룩하게 산다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운 분으로 의식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 삶이 사람사람 사이에 나타날 때 더불어 사는 삶입니다. 구제는 더불어 사는 삶의 한 방편입니다. 그러나 고넬료는 여기에 기도 하나를 더했습니다. 항상 기도했다 합니다. 또 다시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준비입니다. 기도는 내가 하나님을 두려운 분으로 인식하는 나의 언어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나의 언어입니다. 기도에 가끔 금식이 따를 때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일년에 한 차례씩 금식일이 있습니다. 7월1일 속죄일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 기도와 금식이 함께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은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짓밟히면서부터 입니다. 밥을 먹을 경황이 어디 있습니까. 기도하기에 그만큼 급급했던 것입니다. 그게 바벨론으로 끌려간 자들의 기도요 금식이었습니다.

고넬료의 기도 – 그는 로마사람이지 유대인이 아닙니다. 그는 다만 이 기도에서 거룩하게 살고 싶다는, 거룩하게 사는 능력을 간절히 구했던 것 같습니다. 신앙으로 한 일은 항상 아쉬움으로 끝나게 마련입니다. 그것이 친교였든 사랑이었든 구제였든 마찬가지입니다.

금요 성경공부반에서 거의 2년 반에 걸쳐서 구약의 하나님나라를 해왔습니다. 이제 네 번만 더하면 끝납니다. 두 번은 이미 원고가 완성이 되어 있고 이번주간에는 다니엘서와 씨름 했습니다. 한 주간만 더 씨름하면 다니엘서 원고가 완성될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스라엘 역사가 가는 길” 이라는 결론을 쓰면 금요 성경공부반에서 해온 구약의 하나님 나라가 모두 끝납니다. 지난 주부터 이런 기도를 해봅니다. 하나님 용서하시옵소서. 조금 더 잘 할 수 있었는데…. 조금만 더 최선을 했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라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하나님 이제 이 모든 과정을 용서하시옵소서.

한경직 목사님, 영락교회 은퇴하면서 이런 기도를 했다지요. “아버지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는 달려갈 길을 달리고 나는 믿음을 지킨다 했는데… 왜 지난 날을 돌아보면 아쉬운 자취 뿐입니까.”

고넬료가 그런 것입니다. 신앙은, 나는 최선을 다한다지만, 항상 뒤돌아보면 아쉬움이 남는 겁니다. 그래서 신앙의 경주를 하는 자들은 어쩌면 아쉬움 투성이로 끝날 것입니다. 그만큼 자기의 최선이 그러나 하나님의 완전과 비교되는 것입니다. 내가 아니고 하나님이 다른 분을 보내셨더라면 하나님의 완전에 더 근접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입니다. 그렇게 쓰여졌고 그렇게 일했지만 이것이 최선이었나. 이것이 그의 완전에서 얼마나 동떨어져있을까 하는 아쉬움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가면 예수님이 양과 염소를 갈라서 심판하는 장면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양으로 분류된 자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그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그러자 의인들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린 것을 보았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된 것을 보았고 벗으신 것을 보고 병들고 갇혔을 때에 찾아 뵈었나이까.”

의인들, 이들은 아쉬움이 그들의 수고보다 컸던 것이 아닐까요. 아쉬움이 커서 그들의 수고를 영으로 돌리는 게 아닐까요. 언제 이 아쉬움 없는 구제와 봉사를 이루어 볼 수 있을까 라는 마음을 아직도 지울 수 없는데, 주님이 그들에게 천국에 가라니까, 우린 하나님의 기준에서 우리 한 일이 영일 뿐입니다, 라는 표현이 아닐까요. 거기 비해 염소로 분류되어 지옥으로 보냄을 입는 자들. 언제 우리가 주님께 그런 일 안 했던 적이 있습니까. 라고 묻습니다. 항상 최선을 다했고 항상 만족스러울 만큼 여한 없이 했다는 겁니다. 그들에겐 아쉬움이 없습니다.

고넬료의 기도는 아쉬워서 기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람을 천국시민을 만들기 위해 베드로를 보냅니다. 그게 사도행전10장의 내용입니다.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되신 주 나의 생명이 되신 주 밤낮 불러서 찬송을 드려도 늘 아쉬운 마음 뿐일세

이 찬송시인은 찬송을 늘 했습니다. 밤낮 불러서 찬송을 했습니다. 밤낮 찬송하는 삶이 경건한 삶입니다. 거룩한 삶입니다. 거룩한 삶은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손에 잡는 그날까지 항상 아쉬움만 남습니다. 하나님의 완전하심 손에 잡아야 아쉬움이 없습니다. 그때까지 항상 아쉽습니다.
이게 최후의 심판대에서 주님, 난 아직 천국에 가자면 한참 멀었습니다. 나를 천국에 보내다니요. 하는 해답으로 나타납니다. 그게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양의 편에 분류된 자의 변입니다. 고넬료의 기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조금 더 나은 구제, 조금 더 나은 사랑, 조금 더 나은, 보다 최선의 나눔… 그 안에 들어가면 구제란 구제가 아닙니다. 구제란 신앙의 낮은 단계에서 신앙의 저열한 단계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신앙의 깊은 단계에서 구제란 그저 거룩한 삶의 한 부분일 뿐입니다. 그저 신앙생활일 뿐입니다. 그걸 뭘 어마어마하게 떠들 필요가 있는 말이 아니란 말이지요. 고넬료가 그랬습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러시아 혁명 때, 불란서 혁명 때, 그때 부패 세력으로 분류되어 죽어간 부자들, 그들도 우리 식의 신앙 다 가진 자들입니다. 어쩌면 나보다 신앙이 더 좋았을른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 다 죽어갔습니다. 사형에 처해 죽었습니다. 왜? 그들의 거룩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거룩이었지 그들의 거룩은 사람사람 사이에는 소용 없었습니다. 그들의 죽음이 역사의 심판이요 그들의 죽음이 하나님의 심판이었다면 하나님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 국한 시키는 자의 거룩을 거룩이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거룩을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본다는 이야기입니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에게 왔습니다. “주여, 내가 영생에 들어가려면 무엇을 하여야 하리이까.” 예수님 말했습니다. “성경이 뭐라 하고 너는 그 성경을 어떻게 읽느냐.” 그 청년이 말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속이지 말라 부모를 공경하라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네 말이 옳다. 그대로 하라” 부자 청년은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어려서부터 내가 다 지킨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 했습니다. “한가지 부족한 게 있다. 네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좇으라” 부자청년은 결국 이를 할 수 없어서 쓸쓸히 돌아갑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이런 말씀 하시지요.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

이 부자 청년의 신앙의 수준이 우리의 수준은 아닌지. 영생을 말하고 구원을 말하지만 그건 피상적인 것이고 구체적이지 못했습니다. 러시아 혁명 당시의 부자 신앙인의 이야기요, 불란서 혁명 당시의 부자 신앙인의 사고입니다. 예수님 말씀했습니다.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 보다 어렵다.” 예수님은 거룩을 이 부자처럼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만 보려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거룩을 고넬료처럼 사람 사람 사이에서 달아보았습니다.

부자청년의 재산이 얼마나 많은지 나는 모르겠습니다. 주께서 문제 삼는 것은 그 부가 아닙니다. 그 부자 청년의 사고방식입니다. 저는 고넬료가 이 부자청년보다 얼마나 잘 살았는지 혹 얼마나 못 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주께서 평가하신 것은 고넬료의 사고방식입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한국교회는 전통적으로 구제헌금을 하면 가장 적은 금액의 헌금이 나오기로 유명합니다. 그만큼 인색합니다. 구제합시다 하면 그만 마음이 돌아서 버립니다. 부자청년계열의 신앙인들 집합소처럼 느껴집니다. 러시아 혁명 당시의 러시아 교회보다 더 인색하고 불란서 혁명 당시의 불란서 교회보다 더인색합니다. 도대체 거룩을 하나님과 사람관계에서 달아 보았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달아보지 않았습니다.

우리 교회는 고넬료 계열입니까. 아니면 부자청년 계열입니까. 우린 그 둘 중의 어느 하나에 서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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