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확신에 대하여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로마서 10:9-10)
과거에 한국에서는 “당신은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라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심지어 어린아이들에게도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한다고 해서 ‘구원의 확신’을 위한 설교나 수련회가 유행하였습니다. 그 당시 “구원의 확신”의 붐을 일으키던 사람들은 우리가 언제, 어디서 구원의 확신을 얻었는지 구체적인 체험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예를 들면, 고등학교 몇 학년 때 수련회에 참석해서 성령을 체험하고 불을 받았다든지, 또는 언제 어떤 부흥회에서 어떤 목사가 설교를 할 때 눈물을 흘리고 회개했다는 식의 체험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을 얻으려면 회심의 시간과 장소를 분명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구원 확신 운동은 그 도가 넘어가서 구원파라는 이단 집단이 출현하기도 했습니다. 구원 받은 시간과 장소를 정확하게 말할 수 없다면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구원의 확신을 어떤 영적 체험이나 뜨거운 감정으로 보려할 때 문제가 많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모태 신앙으로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며 자라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람들은 특별하고 이상한 영적 체험을 가지지 못한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구원을 받지 못한 것입니까? 방탕한 길에 빠졌다가 돌아온 사람은 구원의 확신을 가졌는데, 어렸을적부터 평탄한 신앙생활을 한 사람은 어떤 극적인 구원의 체험이 없다고 해서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뭔가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반면에 로마 카톨릭 교회는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하여 강하게 부인합니다. 아주 특별한 예외, 즉 성프란시스처럼 손에 예수님의 못자국의 흔적을 갖던가 아니면 어떤 지극한 금욕주의 가운데 하늘의 신비 체험을 하던지 하면 모를까, 그렇지 않고는 이 세상에서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웃의 카톨릭 사람들에게 “당신, 지금 죽으면 천국에 갈 자신이 있습니까?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으면 그들은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카톨릭의 교리에 의하면 인간들은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한번 질문해 봅시다.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오늘 죽더라도 나는 천국에 들어간다는 확신이 있습니까? 1517년, 독일에서 시작된 종교개혁은 구원의 확실성에 대한 끝없는 탐구 가운데 발생하게 된 사건입니다. 마틴 루터는 처음에는 선행을 통한 구원의 확신을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수도원에서 열심히 기도하고 금식하며 엄격한 규칙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지만 끊임없는 죄의식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그는 양심을 속일 수 없었습니다. 그의 양심은 계속 외쳤습니다. “마틴, 너는 죄인이다. 너 또 마음 속에 죄 지었구나?” 그는 죄책감과 불만족 가운데 마음의 평안이 없었습니다.
그럴때마다 그는 수도원장에게 찾아가서 자기 죄를 고백하였습니다. “저는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 의심의 죄, 시기의 죄를 지었습니다.” 잠시 후에 루터가 또 찾아왔습니다. “저는 또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 미움의 죄를 지었습니다.” 잠시 후에 또 왔습니다. “또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 음란과 탐욕의 죄를 지었습니다.” 마틴 루터가 너무 자주 찾아오자 그 수도원장이 화를 내면서 외쳤습니다. “이제 제발 그만 찾아오거라. 마틴, 너는 나를 귀찮게 하는 것도 죄라는 것을 모르느냐?”
마틴 루터는 마음 속의 죄성을 제거한다는 것은 아무리 금식하며 자신의 육체를 쳐서 복종시켜도 되어질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따라서 수도승이던 마틴 루터는 자신에게서 죄가 떠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기존의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으로는 구원의 확신을 얻는데 실패하게 됩니다. 그는 인간은 결단코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완전하게 거룩하여질 수 없음을 처절하게 깨닫게 됩니다.
그 후 비참 가운데 있던 마틴 루터는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큰 깨우침을 얻게 됩니다. 그때 그가 읽은 구절은 로마서 1장 17절의 말씀이었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는 중세 교회가 잃었던 복음을 다시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즉, 의(義)는 우리의 행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신 완전한 의를 믿음으로 얻는 것임을 발견한 것입니다. 구원이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가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며 따라서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후 이 진리를 깨달은 루터는 용감하게 일어서서 복음의 진리를 외쳤습니다. 그는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95개 조항을 내걸었습니다. 그리고 4년 후인 1521년에 워름스(Worms)로 소환되어 가게 됩니다. 이때 주위의 친구들이 마틴 루터에게 제안했습니다. “빨리 다른 나라로 도망가시오. 당신이 이번에 워름스로 끌려가면 분명히 종교 재판과 고문을 받고 죽게 될 것이요.” 그러나 루터는 “저 지붕 위의 기왓장들만큼 마귀들이 많이 있다고 해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을 발견한 나를 위하시니 누가 나를 대적하리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처럼 루터는 복음을 발견한 이후 구원의 확실성을 얻었고 따라서 그는 객관적인 구원의 확인을 통해 구원의 확신을 외치게 된 것입니다. 이때 이후로 루터를 중심으로 한 종교개혁자들은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즉,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공로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선물이요 은혜임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문제는 무엇보다 법적인 문제인 것을 확인하면서 “Justification”, 곧 칭의의 진리를 깨달으면서, 사람은 비록 죄와 허물이 많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할 때 그 영혼은 값없이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확신(確信)이란 확실히 믿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구원이 확신”이란 나는 확실히 구원 받았다는 것을 믿는 믿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확신하는 그 확신이 100% 확실성을 갖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확신하지만 틀릴 때가 많은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의 확신이 틀릴 수 있다는데 큰 문제가 있습니다. 자신은 구원 받은 줄로 확신했지만 실제로는 구원을 받지 못한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가령, 어떤 처녀가 어떤 남자랑 사랑에 빠졌는데 그 처녀는 “나는 그 사람이 결혼한 적이 없다고 확신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아이가 셋이나 있는 유부남이었습니다. 이때 그 처녀는 스스로는 확신하였으나, 틀린 사실을 확신한 것입니다.
성경에도 자신들은 구원을 받았다고 확신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를 말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7장 22절, 23절입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또한 이단에 빠진 사람들은 스스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지만, 성경에 의하면 그들은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구원의 확신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구원의 “확신”이라는 나의 생각이나 감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구원을 확인할 수 있는 객관적 증거와 논리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즉, 객관적인 근거에 의해 나의 구원이 확인만 된다면 우리는 저절로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감정이나 체험은 구원의 확신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 (히 6:4-9).
아무리 많은 종교적인 체험을 했어도 그것이 구원의 확신을 붙들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또한 기독교 신앙의 대부분의 내용은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우리는 천지창조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홍해가 갈라지는 출애굽을 다시 체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성육신도 체험할 수 없습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도 체험할 수 없고 부활도 체험할 수 없으며 승천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현재 여기서” 성령으로 말미암는 체험이 있을 뿐입니다. 체험과 감정은 믿음 후에 뒤따르는 것이지, 믿음보다 앞설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의 확신을 얻는 올바른 방법은 ‘믿음’에 의한 방법입니다.
이에 로마서 10장 9절은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주’로 ‘시인’ 즉 ‘고백’하고, 또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즉, ‘고백’과 ‘믿음’에 의해 구원을 얻습니다. 그리고 10절에 보면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얻는 방법은 ‘믿음’에 의한 방법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있는 로마서 10장을 훑어보면 구원의 확신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로마서 10장 1절을 보면, 바울은 유대인들이 구원 받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상태는 하나님을 향한 열심과 열정은 있으나 지식이 없는 열심과 열정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려면 자기 열심을 가지면 되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의 힘으로 소위 율법이라는 것을 지켜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길 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방법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이 아니며 또한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방법이었습니다. 율법을 온전히 지켜서 구원을 이루려는 것은 스스로 저주에 들어가는 길이며 또한 영원토록 구원을 얻는 것이 불가능한 길이었습니다.
따라서 6절과 7절을 이 사실을 말합니다. 하늘에 올라가야 하고, 죽은 자 가운데 내려 가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이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모든 인간들을 향해 모든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도록 하셨습니다. 즉, 구원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오는 것이지 수고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8절). 그러므로 구원을 얻는 것은 너무나 쉽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음의 핵심을 어린아이같은 믿음으로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8절을 보면, 구원은 복음을 들은 이후 우리의 마음과 입술에 따라 구원의 가부가 결정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의 본문처럼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바울은 이 사실을 성경 전체가 보증하고 있다고 다시 확증합니다.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10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12-13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 어떤 사람이나 구원 받는 방법은 똑 같습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모르는 자들은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리기 위해 복음을 전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이에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롬 14:17).
19절에서 21절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복음을 전하시고 그들을 기다려 오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무리 기다리셔도 그들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복음의 길로 오기를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21절)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구원의 확신을 위해 우리가 믿어야 할 내용이 무엇인지 간단하게 다루어 봅시다.
첫째는,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주로 시인한다는 뜻은 예수님을 여호와 하나님으로 시인한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고백하며 내 자신의 창조주요 구세주로 고백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예수님은 나의 ‘주인’이시며 왕되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사실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이심을 보여주는 객관적인 사건입니다. 그분의 부활 때문에 우리는 주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시며 나의 죄를 위하여 대속하신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 분은 대제사장이십니다. 선지자이십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인류의 구원자이신 메시야로 증거되고 또한 하나님이 아들로 증거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또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우리 마음에 믿으면, 그는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의 부활의 객관성으로 인하여 자신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즉, 구원의 확신은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의 객관성과 역사성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확신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으로서 이 사건은 역사 가운데 숨겨진 사건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만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객관적이지 않다면 우리는 우리의 구원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 예수님의 부활의 확실성은 자기들의 눈으로 직접 본 수백명의 증인들이 있고 또한 객관적인 역사적 자료로 입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확실한 부활 사건에 근거한 우리의 구원의 확신은 흔들릴래야 흔들릴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의 구원의 확신이 무너지는 길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일이 없어야 하는데,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 속에서 가장 확실한 사건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26장 23절과 26절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니이다.” 이 증거는 우리가 믿는 복음의 객관성과 역사성을 증명해 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역사적, 객관적 사건에 근거하여 바울은 담대히 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구원의 확신은 이처럼 확실한 부활의 사건을 근거로 하여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신기하게도 예수님의 부활은 100%의 완벽한 증거와 증인이 있는 객관적 역사적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주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고백 자체는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신비 중의 신비입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로서 구원을 받지 않은 사람은 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시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동시에 이러한 믿음의 결과로 우리에게 나타나는 구원 받은 증거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역사 중에 가장 중요한 역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게 하는 역사입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5). 우리는 성령 곧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며 구원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길을 가다가 아무에게나 ‘아버지’라 부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양자의 영이 있는 구원 받은 자들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 철학자들은 하나님을 ‘신’, ‘절대자’, ‘제일원인’, ‘존재의 근본바탕’이라고는 불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님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하나님을 진정으로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까? 요한복음 1장 12절에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도를 닦고 수양을 닦는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계명을 지키고 수년 동안 잠을 자지 않고 앉아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예수님을 영접하면, 곧 그의 이름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구원은 이렇게 쉽습니다. 구원이 쉬운 이유는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모든 것을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2장 8절은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예루살렘 총회에서 베드로도 이 사실을 확증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5장 11절에서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주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받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보다 감사와 찬양 안에서 주를 기쁘시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불안과 두려움에서 어떤 선행이라는 것을 행합니다. 자신이 구원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 늘 불안합니다. 연옥의 불이 늘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선행을 행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행하는 선행은 ‘감사의 열매’이며 ‘믿음의 열매’입니다. 구원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기쁨으로 보답하는 것이 순종, 곧 선행입니다.
우리는 불안해하거나 초조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골고다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오늘도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그 역사적 사건은 객관적 사건이요, 영원토록 변함없는 증거입니다. 따라서 십자가에 근거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확신은 조금도 흔들릴 수 없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확증하셨느니라’의 원어는 ‘확증하시느니라’로서 현재입니다. 즉,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주의 사랑을 확증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은 변치 않습니다.
나의 부패하고 변덕스러운 감성에 따라 하나님의 사랑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몸이 찌푸덩하다고 해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으신다든지, 내 기분이 좋다고 해서 하나님이 나를 특별히 더 사랑하신다든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나의 상태와 관계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골고다 언덕에 한번 세워진 십자가는 뽑혔다, 세워졌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번 세워진 그 십자가는 오늘도 변함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변치 않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감정과 느낌과는 관계없이 나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시고서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33-34절에서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38-39절에서 사도 바울은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믿는 자들은 영원토록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수 밖에 없으며 바로 그것이 구원의 확신의 근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구원의 확신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우리의 구원의 확신입니다. 따라서 복음을 믿는 믿음이 우리의 구원의 확신이며, 그 확신은 내 자신을 바라보거나 내 자신의 신앙 체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역사 가운데 있던 객관적 사건에 근거하고 성령의 주관적인 사역에 근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주눅이 들거나 공연히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가 계십니다. 자기 아들 독생자까지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신 사랑의 아버지가 우리에게 계십니다. 이 아버지의 사랑은 변치 않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하늘 아버지의 사랑을 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어려움을 당하여도, 어떠한 환난을 당하여도 실망치 않고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에게 값없이 구원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기쁨과 사랑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순종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신 구원을 확인하였기 때문에 이제는 더욱 선한 일에 힘쓰는 주의 백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선한 일이란 다름 아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 믿으며 그분의 말씀을 따르는 삶을 말합니다. 즉, 가지가 나무에 연결되어야 그 나무로부터 영양분을 얻어 저절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처럼, 우리의 선행이란 주님과 계속 깊은 관계를 누리며 주께 순종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우리 모두가 우리의 삶 가운데 맺어지는 성령의 열매를 보며 찬송하고 감사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로마서 10:9-10)
과거에 한국에서는 “당신은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라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심지어 어린아이들에게도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한다고 해서 ‘구원의 확신’을 위한 설교나 수련회가 유행하였습니다. 그 당시 “구원의 확신”의 붐을 일으키던 사람들은 우리가 언제, 어디서 구원의 확신을 얻었는지 구체적인 체험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예를 들면, 고등학교 몇 학년 때 수련회에 참석해서 성령을 체험하고 불을 받았다든지, 또는 언제 어떤 부흥회에서 어떤 목사가 설교를 할 때 눈물을 흘리고 회개했다는 식의 체험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을 얻으려면 회심의 시간과 장소를 분명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구원 확신 운동은 그 도가 넘어가서 구원파라는 이단 집단이 출현하기도 했습니다. 구원 받은 시간과 장소를 정확하게 말할 수 없다면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구원의 확신을 어떤 영적 체험이나 뜨거운 감정으로 보려할 때 문제가 많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모태 신앙으로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며 자라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람들은 특별하고 이상한 영적 체험을 가지지 못한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구원을 받지 못한 것입니까? 방탕한 길에 빠졌다가 돌아온 사람은 구원의 확신을 가졌는데, 어렸을적부터 평탄한 신앙생활을 한 사람은 어떤 극적인 구원의 체험이 없다고 해서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뭔가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반면에 로마 카톨릭 교회는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하여 강하게 부인합니다. 아주 특별한 예외, 즉 성프란시스처럼 손에 예수님의 못자국의 흔적을 갖던가 아니면 어떤 지극한 금욕주의 가운데 하늘의 신비 체험을 하던지 하면 모를까, 그렇지 않고는 이 세상에서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웃의 카톨릭 사람들에게 “당신, 지금 죽으면 천국에 갈 자신이 있습니까?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으면 그들은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카톨릭의 교리에 의하면 인간들은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한번 질문해 봅시다.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오늘 죽더라도 나는 천국에 들어간다는 확신이 있습니까? 1517년, 독일에서 시작된 종교개혁은 구원의 확실성에 대한 끝없는 탐구 가운데 발생하게 된 사건입니다. 마틴 루터는 처음에는 선행을 통한 구원의 확신을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수도원에서 열심히 기도하고 금식하며 엄격한 규칙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지만 끊임없는 죄의식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그는 양심을 속일 수 없었습니다. 그의 양심은 계속 외쳤습니다. “마틴, 너는 죄인이다. 너 또 마음 속에 죄 지었구나?” 그는 죄책감과 불만족 가운데 마음의 평안이 없었습니다.
그럴때마다 그는 수도원장에게 찾아가서 자기 죄를 고백하였습니다. “저는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 의심의 죄, 시기의 죄를 지었습니다.” 잠시 후에 루터가 또 찾아왔습니다. “저는 또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 미움의 죄를 지었습니다.” 잠시 후에 또 왔습니다. “또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 음란과 탐욕의 죄를 지었습니다.” 마틴 루터가 너무 자주 찾아오자 그 수도원장이 화를 내면서 외쳤습니다. “이제 제발 그만 찾아오거라. 마틴, 너는 나를 귀찮게 하는 것도 죄라는 것을 모르느냐?”
마틴 루터는 마음 속의 죄성을 제거한다는 것은 아무리 금식하며 자신의 육체를 쳐서 복종시켜도 되어질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따라서 수도승이던 마틴 루터는 자신에게서 죄가 떠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기존의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으로는 구원의 확신을 얻는데 실패하게 됩니다. 그는 인간은 결단코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완전하게 거룩하여질 수 없음을 처절하게 깨닫게 됩니다.
그 후 비참 가운데 있던 마틴 루터는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큰 깨우침을 얻게 됩니다. 그때 그가 읽은 구절은 로마서 1장 17절의 말씀이었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는 중세 교회가 잃었던 복음을 다시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즉, 의(義)는 우리의 행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신 완전한 의를 믿음으로 얻는 것임을 발견한 것입니다. 구원이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가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며 따라서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후 이 진리를 깨달은 루터는 용감하게 일어서서 복음의 진리를 외쳤습니다. 그는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95개 조항을 내걸었습니다. 그리고 4년 후인 1521년에 워름스(Worms)로 소환되어 가게 됩니다. 이때 주위의 친구들이 마틴 루터에게 제안했습니다. “빨리 다른 나라로 도망가시오. 당신이 이번에 워름스로 끌려가면 분명히 종교 재판과 고문을 받고 죽게 될 것이요.” 그러나 루터는 “저 지붕 위의 기왓장들만큼 마귀들이 많이 있다고 해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을 발견한 나를 위하시니 누가 나를 대적하리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처럼 루터는 복음을 발견한 이후 구원의 확실성을 얻었고 따라서 그는 객관적인 구원의 확인을 통해 구원의 확신을 외치게 된 것입니다. 이때 이후로 루터를 중심으로 한 종교개혁자들은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즉,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공로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선물이요 은혜임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문제는 무엇보다 법적인 문제인 것을 확인하면서 “Justification”, 곧 칭의의 진리를 깨달으면서, 사람은 비록 죄와 허물이 많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할 때 그 영혼은 값없이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확신(確信)이란 확실히 믿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구원이 확신”이란 나는 확실히 구원 받았다는 것을 믿는 믿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확신하는 그 확신이 100% 확실성을 갖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확신하지만 틀릴 때가 많은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의 확신이 틀릴 수 있다는데 큰 문제가 있습니다. 자신은 구원 받은 줄로 확신했지만 실제로는 구원을 받지 못한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가령, 어떤 처녀가 어떤 남자랑 사랑에 빠졌는데 그 처녀는 “나는 그 사람이 결혼한 적이 없다고 확신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아이가 셋이나 있는 유부남이었습니다. 이때 그 처녀는 스스로는 확신하였으나, 틀린 사실을 확신한 것입니다.
성경에도 자신들은 구원을 받았다고 확신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를 말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7장 22절, 23절입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또한 이단에 빠진 사람들은 스스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지만, 성경에 의하면 그들은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구원의 확신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구원의 “확신”이라는 나의 생각이나 감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구원을 확인할 수 있는 객관적 증거와 논리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즉, 객관적인 근거에 의해 나의 구원이 확인만 된다면 우리는 저절로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감정이나 체험은 구원의 확신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 (히 6:4-9).
아무리 많은 종교적인 체험을 했어도 그것이 구원의 확신을 붙들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또한 기독교 신앙의 대부분의 내용은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우리는 천지창조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홍해가 갈라지는 출애굽을 다시 체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성육신도 체험할 수 없습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도 체험할 수 없고 부활도 체험할 수 없으며 승천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현재 여기서” 성령으로 말미암는 체험이 있을 뿐입니다. 체험과 감정은 믿음 후에 뒤따르는 것이지, 믿음보다 앞설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의 확신을 얻는 올바른 방법은 ‘믿음’에 의한 방법입니다.
이에 로마서 10장 9절은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주’로 ‘시인’ 즉 ‘고백’하고, 또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즉, ‘고백’과 ‘믿음’에 의해 구원을 얻습니다. 그리고 10절에 보면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얻는 방법은 ‘믿음’에 의한 방법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있는 로마서 10장을 훑어보면 구원의 확신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로마서 10장 1절을 보면, 바울은 유대인들이 구원 받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상태는 하나님을 향한 열심과 열정은 있으나 지식이 없는 열심과 열정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려면 자기 열심을 가지면 되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의 힘으로 소위 율법이라는 것을 지켜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길 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방법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이 아니며 또한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방법이었습니다. 율법을 온전히 지켜서 구원을 이루려는 것은 스스로 저주에 들어가는 길이며 또한 영원토록 구원을 얻는 것이 불가능한 길이었습니다.
따라서 6절과 7절을 이 사실을 말합니다. 하늘에 올라가야 하고, 죽은 자 가운데 내려 가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이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모든 인간들을 향해 모든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도록 하셨습니다. 즉, 구원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오는 것이지 수고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8절). 그러므로 구원을 얻는 것은 너무나 쉽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음의 핵심을 어린아이같은 믿음으로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8절을 보면, 구원은 복음을 들은 이후 우리의 마음과 입술에 따라 구원의 가부가 결정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의 본문처럼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바울은 이 사실을 성경 전체가 보증하고 있다고 다시 확증합니다.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10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12-13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 어떤 사람이나 구원 받는 방법은 똑 같습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모르는 자들은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리기 위해 복음을 전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이에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롬 14:17).
19절에서 21절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복음을 전하시고 그들을 기다려 오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무리 기다리셔도 그들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복음의 길로 오기를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21절)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구원의 확신을 위해 우리가 믿어야 할 내용이 무엇인지 간단하게 다루어 봅시다.
첫째는,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주로 시인한다는 뜻은 예수님을 여호와 하나님으로 시인한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고백하며 내 자신의 창조주요 구세주로 고백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예수님은 나의 ‘주인’이시며 왕되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사실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이심을 보여주는 객관적인 사건입니다. 그분의 부활 때문에 우리는 주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시며 나의 죄를 위하여 대속하신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 분은 대제사장이십니다. 선지자이십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인류의 구원자이신 메시야로 증거되고 또한 하나님이 아들로 증거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또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우리 마음에 믿으면, 그는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의 부활의 객관성으로 인하여 자신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즉, 구원의 확신은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의 객관성과 역사성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확신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으로서 이 사건은 역사 가운데 숨겨진 사건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만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객관적이지 않다면 우리는 우리의 구원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 예수님의 부활의 확실성은 자기들의 눈으로 직접 본 수백명의 증인들이 있고 또한 객관적인 역사적 자료로 입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확실한 부활 사건에 근거한 우리의 구원의 확신은 흔들릴래야 흔들릴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의 구원의 확신이 무너지는 길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일이 없어야 하는데,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 속에서 가장 확실한 사건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26장 23절과 26절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니이다.” 이 증거는 우리가 믿는 복음의 객관성과 역사성을 증명해 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역사적, 객관적 사건에 근거하여 바울은 담대히 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구원의 확신은 이처럼 확실한 부활의 사건을 근거로 하여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신기하게도 예수님의 부활은 100%의 완벽한 증거와 증인이 있는 객관적 역사적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주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고백 자체는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신비 중의 신비입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로서 구원을 받지 않은 사람은 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시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동시에 이러한 믿음의 결과로 우리에게 나타나는 구원 받은 증거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역사 중에 가장 중요한 역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게 하는 역사입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5). 우리는 성령 곧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며 구원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길을 가다가 아무에게나 ‘아버지’라 부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양자의 영이 있는 구원 받은 자들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 철학자들은 하나님을 ‘신’, ‘절대자’, ‘제일원인’, ‘존재의 근본바탕’이라고는 불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님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하나님을 진정으로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까? 요한복음 1장 12절에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도를 닦고 수양을 닦는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계명을 지키고 수년 동안 잠을 자지 않고 앉아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예수님을 영접하면, 곧 그의 이름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구원은 이렇게 쉽습니다. 구원이 쉬운 이유는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모든 것을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2장 8절은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예루살렘 총회에서 베드로도 이 사실을 확증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5장 11절에서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주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받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보다 감사와 찬양 안에서 주를 기쁘시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불안과 두려움에서 어떤 선행이라는 것을 행합니다. 자신이 구원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 늘 불안합니다. 연옥의 불이 늘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선행을 행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행하는 선행은 ‘감사의 열매’이며 ‘믿음의 열매’입니다. 구원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기쁨으로 보답하는 것이 순종, 곧 선행입니다.
우리는 불안해하거나 초조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골고다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오늘도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그 역사적 사건은 객관적 사건이요, 영원토록 변함없는 증거입니다. 따라서 십자가에 근거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확신은 조금도 흔들릴 수 없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확증하셨느니라’의 원어는 ‘확증하시느니라’로서 현재입니다. 즉,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주의 사랑을 확증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은 변치 않습니다.
나의 부패하고 변덕스러운 감성에 따라 하나님의 사랑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몸이 찌푸덩하다고 해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으신다든지, 내 기분이 좋다고 해서 하나님이 나를 특별히 더 사랑하신다든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나의 상태와 관계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골고다 언덕에 한번 세워진 십자가는 뽑혔다, 세워졌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번 세워진 그 십자가는 오늘도 변함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변치 않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감정과 느낌과는 관계없이 나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시고서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33-34절에서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38-39절에서 사도 바울은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믿는 자들은 영원토록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수 밖에 없으며 바로 그것이 구원의 확신의 근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구원의 확신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우리의 구원의 확신입니다. 따라서 복음을 믿는 믿음이 우리의 구원의 확신이며, 그 확신은 내 자신을 바라보거나 내 자신의 신앙 체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역사 가운데 있던 객관적 사건에 근거하고 성령의 주관적인 사역에 근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주눅이 들거나 공연히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가 계십니다. 자기 아들 독생자까지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신 사랑의 아버지가 우리에게 계십니다. 이 아버지의 사랑은 변치 않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하늘 아버지의 사랑을 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어려움을 당하여도, 어떠한 환난을 당하여도 실망치 않고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에게 값없이 구원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기쁨과 사랑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순종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신 구원을 확인하였기 때문에 이제는 더욱 선한 일에 힘쓰는 주의 백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선한 일이란 다름 아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 믿으며 그분의 말씀을 따르는 삶을 말합니다. 즉, 가지가 나무에 연결되어야 그 나무로부터 영양분을 얻어 저절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처럼, 우리의 선행이란 주님과 계속 깊은 관계를 누리며 주께 순종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우리 모두가 우리의 삶 가운데 맺어지는 성령의 열매를 보며 찬송하고 감사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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