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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가정

[[부부관계]]아내와 남편에게

작성자넓은가슴|작성시간08.05.01|조회수104 목록 댓글 0

아내와 남편에게

엡5:22-33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주 안에서 부부 된 사람들에게 주신 권면의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결혼식 때마다 수천 번을 읽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결혼이 하나님의 창조질서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보이는 사람이 모여서 한 가정을 이루어 삽니다.
그러나 그 배후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천정배필'이라는 말을 씁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정은 신성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부부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그의 몸인 교회와의 관계로 비유해서 말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아도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그리스도인을 신부로 표현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의미 깊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 보면 아내 되는 사람에게 먼저 권면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남편이 아내의 머리가 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태초에 인간을 만드실 때 그렇게 제정하셨다고 했습니다.
남편이 아내의 머리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은 원리임을 여기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만이 이해 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그리스도가 몸 된 교회의 머리 되신다"고 한 성경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 람들에게는 이러한 특수한 결혼관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믿는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6장 14절에도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멍에를 같이 한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결혼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 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농사할 때 기계로 밭을 가는 요즈음은 '짝지었다'는 말을 이해하기가 어려울지 모릅니다.
그러나 기계를 사용하기 전에는 소에게 멍에를 메워서 밭을 갈았습니다.
저는 어릴 때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이런 봄철이 되면 밭을 가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때 보니까 얕게 갈아도 될 때는 소 한 마리로 밭을 갈게 하지만, 깊이 갈아야 할 때는 소 두 마리에게 멍에를 메워서 밭을 갈았습니다.
그런데 황소와 암소를 같이 멍에를 메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남녀가 짝을 지어 한 가정을 이루어 가는 것은, 말하자면 두 사람이 멍에를 같이 하여 인생의 광야를 개척해서 옥토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결혼이란 법적인 계약만이 아닙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관계로 말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 사도 바울은 오늘 주신 말씀 32절에서 "이 비밀이 크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는 사실 신비입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의 연합, 그리스도와 성도 하나 하나의 연합, 이것은 사실일 뿐더러 신비인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기 는 하지만 그것을 이해하는 데는 시 간이 걸리고 노력이 따라야만 합니 다.
가령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영 접해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신령한 결혼을 하게 되는데 그 기쁨을 무엇 으로 다 표현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 동안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살 아온 것이 후회스러울 정도로 신비 한, 새로운 세계의 환희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주가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찬송가 499장)

그러나 언제나 그런 감격이 계 속되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깊은 고민에 빠질 때도 있 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알 수 없 었던 갈등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천국에 사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죄악 많은 세상에 살 고 있고, 영혼은 구원받았지만 육신 은 아직도 구원받지 못했기 때문에 구원받은 영혼과 구원받지 못한 육 신 사이에서 생기는 모순과 갈등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지 아니할 때는 혼자 사 는 사람과 같아서 육신이 하자는 대 로 하니까 문제될 것이 별로 없습니 다. 그런데 예수를 믿어 우리 심령 이 구원을 받아 빛 가운데 살게 되 면 어두운 데 살던 것들이 밝은 빛 가운데 드러나기 때문에 여기서부터 생기는 문제가 많습니다. 육신이 하 자는 대로 살자니 영혼이 책망합니 다. 영혼이 하자는 대로 살자니 육 신이 따라가기 어려워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 같은 사람도 로마서 7장에서 고민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내 속 곧 내 육신 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 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 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 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 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 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 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18∼24)."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입니 다. 이런 생활을 통해서 육의 소욕 을 죽이고 심령을 따라 나아가는 것 이 신앙생활입니다.
부부생활도 그렇습니다. 서로가 다른 남녀가 모여서 가정을 이루게 될 때 처음에는 모든 것이 신비하고 좋기만 합니다. 그래서 결혼한 후 처음 한 달을 '밀월'이라고 합니다. 꿀처럼 달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세 월이 가는지 오는지 모르고 한 달쯤 지나고 나면, 결혼하신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결혼생활이라는 게 꼭 그렇게 달콤한 것, 신비한 것만 있 는 것은 아니거든요. 씁쓸한 일도 생기고, 미처 몰랐던 것을 알고 나 서 실망하게 되는 일도 있습니다. 서로 살다보면 교제할 때 천사처럼 생각되던 사람이 천사가 아닌 것을 알게 됩니다. 모든 것이 다른 사람 끼리 같이 살려 하니까 서로 맞지 않는 것이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 니다. 그런데 이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다 보니 의견의 차이가 생 겨서 말다툼이 생기고, 성격의 차이 때문에 어려움도 당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개성이 있는데 그것이 서로 잘 맞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상한 것은 모든 부부가 다 그런 것 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부부를 짝지어 주시는 것을 보면, 두 사람의 성격이 대조적입니다.
한 사람이 느긋하면 한 사람은 팔팔합니다. 한 사람이 깔끔하면 한 사람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서 목 욕 안 한다고, 속옷 갈아입지 않는 다고 야단 맞습니다. 한 사람이 더 운 것을 좋아하면 한 사람은 시원한 것을 좋아합니다. 한 사람이 무슨 일이든 철저히 하면 한 사람은 적당 히 합니다. 한 사람이 말이 좀 많으 면 한 사람은 그저 가만히 듣기만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짝지어 주 신 조화입니다.
이렇게 서로가 다른 두 사람이 오랜 세월을 같이 사는 동안에 사랑 이란 매개체를 통해서 서로의 개성 을 양보해서 가까워지고 비슷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랫동안 부부 생활 하신 분들을 보세요. 그저 상 대방을 보기만 해도 분위기가 파악 이 되고 잘 맞추어 나아가는 것입니 다.
저는 제 아내와 결혼한 지 어언 40년이 되어 옵니다. 저는 비교적 직선적인 성격이기 때문에 돌려가면 서 말할 줄을 모릅니다. 그런데 제 아내는 머리가 비상해서 절대로 직 선적으로 말하는 적이 없고 쓱 돌려 가면서 말합니다. 제가 그것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 고생했습니다. 쉬 운 예로 제 아내가
"당신 냉면 생각 없어?"하면, 저는 냉면 생각이 없을 때는
"글쎄, 냉면 생각 없는데"라고 응답하고 맙니다. 그런데 그때는 그 것이 나에게 묻는 것이 아니라, 제 아내가 냉면이 먹고 싶은 것을 간접 적으로 표현한다는 사실을 얼마 전 에야 알았습니다. 그것을 깨닫는 데 36년이 걸렸습니다. 제가 이렇게 둔 합니다. 그러니 제 아내가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그래도 그것을 참고 또 참으면서 인격자가 된 거예요. 사랑으로 참은 거예요.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토닥거리 며 다투다가 결국은 서로 헤어지는 비극을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내들아 자기 남편에게 복종 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 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구주'라는 말은 '보호 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 리를 돌보아 주고 길러 주는 자라는 뜻이 있습?求?. 하나님은 모든 사람 의 보호자이며 특별히 믿는 사람의 보호자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28∼29절을 보 세요.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 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 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 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 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 를 보양함과 같이 한다"고 했습니 다.
"남편이 제 육체를 양육하여 보 호한다"고 했습니다. 남편은 몸에 대해서 구주로서 행동합니다. 남편 에게는 그의 아내를 돌보고 보호할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에 보면 사도 베 드로는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 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 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 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 하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남편 은 아내를 보호해 줄 의무가 있습니 다. 대신에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 종하듯이,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 에게 복종해야 합니니다. 이것은 성 경의 교훈이요, 하나님의 창조의 질 서입니다.
머리와 몸의 관계는 무엇입니 까?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있어 서 진리는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진리입니다. 아내가 남편 에 대해서 가지는 관계는 몸이 머리 에 대해서 가지는 관계나 교회가 그 리스도에 대해서 가지는 관계와 같 은 것입니다.
우리의 몸을 생각해 보면 이해 가 쉬울 것입니다. 이 몸은 지체들 이 모여서 이루어졌습니다. 손가락 과 발가락이 붙어 있고 팔과 다리가 붙어 있다고 해서 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몸은 유기적이고 자발적 인 연합체입니다. 그것은 하나요 전 체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상적인 가 정의 남편과 아내는 나뉘어 있는 것 이 아닙니다. 둘이 하나입니다. 이것 이 신비입니다.
어떤 사람을 아는 것도 직장이 나 사무실이나 일터나 교회가 아니 고 그의 가정입니다. 가정에서는 그 의 솔직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진정한 모습은 가정에서 알 수 있습니다. 나를 이 세상에서 가장 잘 아는 사 람은 내 아내요, 내 남편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하나입니다. 머 리와 몸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내 마음과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기 를 결정하는 것은 나입니다. 내 몸 은 그것을 표현하는 방편입니다. 만 일에 내 몸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인다면 그것은 일종의 경련을 앓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얼굴 근육이 실룩거리 는 분을 보셨습니까? 머리를 흔드는 분을 보세요. 손이 떨리는 것을 보 세요. 그 분의 마음에서는 그러기를 원치 않는데, 얼굴 근육이 실룩거리 고, 머리를 흔들고, 손이 떨립니다. 이것은 정상이 아니라 병입니다. 이 런 병이 들면 어떤 목적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제멋대로 움 직입니다. 본인은 그렇게 하기를 원 하지 않는데 움직임을 멈출 수가 없 습니다. 이것은 병입니다.
우리 가정의 부부생활이 그렇습 니다. 남편과 아내가 하나가 아니라 따로 따로라면, 이것은 건강한 가정 이 아니라 병든 가정입니다. 만일에 아내가 멋대로 행동하면 그것은 혼 란입니다. 아내는 남편이 원치 않는 일을 해서는 안되고, 남편은 아내가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건강 한 부부입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가 정은 남편이 가정의 머리로 모든 것 을 통제합니다. 아내가 남편과 상의 없이 멋대로 하는 일이 없습니다.
여기 어떤 분이 중풍에 걸렸습 니다. 그는 움직이기를 원하지만 팔 다리가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의 일부 입니다. 이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이 말은 아내가 남편보다 열등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내는 아내로서의 고유한 지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경 의와 존경심이 가득한 자리입니다. 사도 바울이 여기서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내 된 사람은 자기 남편을 기쁘게 하고 남편에게 꼭 필요한 사 람이 되어, 그를 돕고 보전해서 남 편의 기능을 잘 할 수 있도록 하라 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류 역사에 크게 공헌 한 분들을 보세요. 대부분 그 아내 가 훌륭한 경우입니다. 내려오는 말 에
"한 남자가 성공하는 데는 두 여 자의 손을 거쳐야 하는데 하나는 훌 륭한 어머니의 손이요. 다른 하나는 어진 아내의 손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이 세상에 아내의 영향을 입지 않는 남편이 없습니다. 사도 베드로 의 권면을 들어보셨습니까?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 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 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 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고 했 습니다.
남편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겸손 과 온유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베드 로 사도는 계속 권면했습니다.
"너 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 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 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 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서 값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여자 가 화장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 다. 겉모양보다 속사람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 더욱 힘쓰라는 권면입니 다.

지금까지 아내에 대한 권면을 말씀드렸습니다만, 25절 이하는 남 편에게 주시는 권면입니다.
바울 사도께서 남편에게 주시는 권면은
"남편들아, 너희 아내를 사 랑하라"입니다. 아내에게 대해서 권 면한 것은 남편에 대한 복종이요, 남편에게 주시는 권면은 아내에 대 한 사랑입니다. 이 말씀은 남편만이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 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 그것도 사랑입니다. 이 균형이 언제 나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기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남편은 아내의 머리라고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능력을 주실 뿐만 아니라 사랑과 근 신하는 마음을 주십니다. 남편은 언 제나 사랑으로 아내의 통제를 받아 야만 합니다.

"남편들아, 너희 아내를 사랑하 라."
여기서 말씀하는 사랑은 무엇 입니까? 오늘 주신 말씀에서 바울 사도는 분명히 밝혔습니다.
"남편들 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이 얼 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우리 주님께 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이것이 참사랑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죽기 까지 사랑한다면 이보다 더 큰 사랑 이 있겠습니까?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 할 때는 언제나 '아가파오'(agapao) 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오 늘 주신 말씀에도 같은 단어를 사용 했습니다. 그러니까
"남편들아, 하나 님이 너희를 사랑하신 그 차원에서 너희 아내를 사랑하라"는 말씀입니 다. 이보다 더 높은 차원의 사랑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는 그 차원의 사랑 으로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 십니다. 완전한 사랑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 이하에 보 면 성령의 열매에 대해서 말했는데,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에로틱한 감정이 아니고, 그저 좋아하는 기분 이 아니고,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닮은 사랑입니다. 사랑과 기쁨 그리 고 화평, 바로 그것이 남편이 자기 아내를 향해 가지는 사랑이어야만 한다고 권면합니다. 우리의 성령의 충만함은, 환상과 같은 현상이 아니 라, 집에 있을 때 내 아내에게 하는 행함을 통해 나타납니다. 그것이 바 로 성령의 열매인 사랑입니다.
혹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인은 인간적이어서는 안되고 자연적이어 서도 안된다고 하면서, 성(性)을 악 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 독교적인 교훈이 아닐 뿐 아니라, 잘못된 사상입니다. 그리스도인도 사람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요소를 제거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사람 이지 사람 이하도 사람 이상도 아닙 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을 포함한 이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정적인 요소 그 자체에 아 무 잘못이 없습니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 끌리 고, 사랑을 느끼고, 결혼하게 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 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 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문제 는 서로가 진정으로 사랑해야 합니 다. 육체적인 것만으로 결혼했다면 얼마 가지 못해서 쉽게 바닥이 드러 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 는 이 시대의 심각한 고민 중에 하 나가 바로 이 문제입니다. 결혼의 기초를 육신에만 두는 것입니다. 그 렇기 때문에 얼마 가지 못해서 파탄 을 초래하고야 마는 것입니다.
요사이 서구사회에서 가정 파탄 율이 50퍼센트를 넘어서고 있습니 다. 무서운 일입니다. 왜 그렇게 됩 니까? 그것은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 는 기초가 육신적인 데만 있기 때문 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은 아 무 부담이나 책임성 없이 결혼하고, 아무 부담 없이 헤어집니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서로 눈이 맞아, 다음 정거장에 내려 차 마시면서 사랑을 고백합니다.
"우리 결혼할까?"
"그 래, 하자"
그래서 결혼해 살다보니 이상에 맞지 않습니다.
"우리 이상 이 안 맞으니, 신경 쓸 것 없이 헤 어지자"
"그래, 마음대로 해"
그래 서 헤어집니다. 짐승보다 나은 게 무엇 있습니까? 연습결혼, 계약결혼 이 있다고 합니다. 타락한 세상입니 다. 믿는 사람들은 이런 세상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 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 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고 하셨습 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모든 사 람이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위대 한 사랑을 알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교회에 가지는 관심을 인 식할 때, 모든 예수 믿는 남편들이 자기의 책임을 바로 감당할 수 있을 것임을 믿기 때문에 한 말씀입니다. 그리스?뎬?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 같이"
이 얼마나 웅변적인 표현입니 까?
주님께서는 교회가 보잘 것 없 어도, 부족해도, 마음에 좀 들지 않 아도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도 우리를 사랑하 셨습니다. 교회가 영광스럽고 아름 다워서가 아니라, 영광스럽고 아름 답게 만들기 위해서 교회를 사랑하 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남편이 아내 를 사랑하게 되는 비결입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에 관심이 깊으 십니다. 교회의 가능성을 아십니다. 그는 교회가 완전해지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이것이 주님이 그의 신부 인 우리를 향해 갖고 계신 열망이 요, 사랑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중심적이 고, 자기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참 사랑의 특징은 자기를 생각하지 않 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우리에 게 주셨습니다. 주님은 교회를 위해 서 죽기까지 교회를 사랑하셨습니 다. 희생이 사랑의 특징입니다. 이 사랑은 주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언제나 가지려는 것은 생각지 않고, 다른 이의 유익을 위해서 삽니다.

"남편들아 너희 아내 사랑하기 를 주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같이 모든 것을 주는 사랑을 하라."
구체 적으로 사랑하세요. 이처럼 아내가 남편에게 사랑으로 복종하고, 남편 이 아내에게 사랑으로 모든 것을 줄 때 행복한 가정이 될 것을 믿습니 다. 우리의 모든 가정이 이렇게 주 안에서 서로 사랑해서 행복이 넘치 는 가정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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