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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관계]]성경적 부부관계

작성자넓은가슴|작성시간11.01.09|조회수155 목록 댓글 0
성경적 부부관계

“부부사랑의 원형과 모상(Matrix)은 주님과 교회와의 관계에서 찾으라”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방식이다.  주님과 교회와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다.  사랑의 기초는 믿음이며 사랑은 그 무엇보다도 우선하여 믿어주는 것이므로 고전 13:7에서 “사랑은 모든 것을 믿으며”라고 말씀한다.  “자식을 믿지 않는 부모는 없다”는 말이 있다.  자식이 아무리 문제가 많고 연약해도 부모는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까닭에 한없이 믿어 준다는 말이다.  주님은 교회를 한없이 믿어주신다.  우리는 늘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주님이 언제나 우리를 먼저 믿어주신다.  우리는 그 주님의 믿음 안에서 주님을 믿을 뿐이다.  그 사랑의 믿음을 깨닫고 느끼는 만큼 우리가 주님을 믿고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있는 믿음을 성경은 주님의 믿음이라고 부른다(막 11:22~23).

주님이 얼마나 우리를 믿어 주셨는가?  우리에게 복음을 부탁하셨고 당신의 교회를 우리에게 맡기셨다.  과연 우리 주님의 전면적인 믿음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를 믿지 않고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 있겠는가?  교회는 영적으로 하나님의 성령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일을 성취해 왔다.  그런가 하면, 인간적인 측면에서 교회는 도무지 주님의 신뢰를 저버릴 수 없었기 때문에 자원하여 하나님 나라의 도구가 되어왔던 것이다.  교회가 하는 일 가운데 사람이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이 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은 하나님이 직접해 주시지만 주님은 언제나 교회와 함께 계시면서 삶을 함께 나누시며 함께 일하시는 것을 기쁨과 보람으로 삼으신다.  주님은 이런 방식으로 교회를 영화롭게 하시고 당신의 면류관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이다.

부부생활에서 제일 중요한 요소는 서로 믿어 주는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때로는 의혹도 생기고 권태도 생기고 환멸도 생긴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실수도 하고 실패도 하고 범죄하기도 한다.  이런 일을 당하면 사람들은 서로 원망하고 의심하고 따지고 경계하고 책임을 전가한다.  모든 사람에게 의심의 눈총을 받고 실패의 낙인을 찍혔을 때에도 마지막 인간적 보루가 있는데 그 사람이 곧 결혼서약 때 “누구보다도 우선하여 그대를 지켜주겠노라”고 서약한 자기 배우자인 것이다.  내 배우자만은 나를 믿어준다고 생각할 때 그 사람은 새로운 용기와 소망을 가지게 된다.  배우자 또는 내조자란 첫째로 믿어주는 사람이다.  논리보다 중요한 것이 인격적 신뢰다.  부부간에 설교가 많으면 피곤해진다.  눈만 보아도, 손만 잡아도, 곁에 있기만 해도 믿음이 전달되는 존재가 참 배우자이다.  “나는 당신을 믿는다. 당신이 나의 신뢰를 받아들일 수 있는 한, 나를 믿을 수 있는 한, 당신은 아직 실패한 사람이 아니다”  그렇게 배우자가 신뢰해 줄 때 아내는 남편에게, 남편은 아내에게서 구원을 보게 되는 것이다.  돕는 배필이란 히브리말은 구원자란 뜻이다.  이렇게 믿음으로 부부는 서로에게 구원을 실현시키는 것이다.

필자는 결혼주례사에서 늘 반복해서 “배우자를 믿어주라. 믿을 수 없는 가운데서도 믿어주라. 최후까지 믿어주는 한 사람이 되라”고 말해 준다.  사랑은 믿음에 자리하기 때문에 끝까지 자기를 믿어주는 사람에게 사랑은 머물기 마련이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는 주님의 말씀은 “내가 너를 믿으니 너는 나를 믿으라”는 의미이다.  주님은 우리를 먼저 믿어주셨다.  우리 같이 죄많고 믿음없는 사람들을 믿어주시되 끝까지 믿어주셨다.  우리는 주님의 믿음 속에서 주님의 사랑을 보았기 때문에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다.  우리를 사랑한 주님의 사랑이 너무도 크고 높고 깊기 때문에 때로는 헷갈리고, 때로는 어리둥절하고, 때로는 영문을 알 수가 없지만 머리로 이해할 수 없고,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어도 우리는 궁극적인 주님의 선한 의지를 믿는다.  주님의 선한 의지는 이성을 넘어서, 논리를 초월하여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므로 우리는 오히려 비논리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역설을 즐긴다.

또한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는 주님의 말씀은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으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배우자를 믿어야 한다.  부부관계에서 친척은 의처증, 의붓증이다.  이런 증상에는 약이 없다.  성경에도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다”(롬 14:23)고 말씀했고,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이루지 못하였다”(요일 4:18)고 말씀한다.  부부는 서로 믿어주는 관계다.  믿음으로 하나되는 관계요, 믿음으로 모든 회의와 번민과 고독을 극복해 가는 관계다.  믿음이 부부관계의 기초인데 이 기초가 튼튼하면 안과 밖에서 불어오는 시험의 바람을 넉넉히 극복해 갈 수 있다.  이 믿음은 인간적 성숙으로, 두터운 교제로 더욱 신장될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믿음은 영적인 것이기 때문에 영적인 능력에 따라 크게 죄우된다.  그러므로 부부는 서로를 위해 기도하되 자기 자신을 위해 더 많이 기도해야 한다.  “배우자를 믿고 사랑할 수 있는 믿음을 주옵소서. 배우자를 받아들이고 붙잡아줄 수 있는 믿음을 주옵소서”  부부는 서로 믿기 위해서 결혼한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배우자 선택의 기본이다.  그것이 결혼의 승리다.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부부 각자가 자기 자신에 대하여 믿음을 가지는 것이다.  인간관계에 있어 자기 자신에 대하여 확신을 갖지 못한 사람처럼 곤란한 사람은 없다.  자기 자신이 일정한 틀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그에게 어떻게 대해야 할지 기준을 설정할 수 없다.  정서가 불안한 사람, 자기 연민에 쉽게 빠져드는 사람, 열등감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이런 부류에 속하는데 이런 사람은 건강한 부부관계를 영위하기가 무척 힘든다.  “자기 발로 서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괴테가 말했듯이 부부는 각자가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남성과 여성으로서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여자가 자기가 여자임을 비관하고 있다면 누가 그를 돕겠는가?  여자이기를 거부하고 있는 아내를 둔 남편은 과연 결혼생활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겠는가?  아내는 여자이기를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다.  여자이기를 기뻐하고 더 좋은 여자가 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남편은 여자와 결혼했지 제2의 남자와 결혼하지 않았다.  남자도 마찬가지다.  자기가 남자임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다.  남자로서의 힘과 관용과 이해를 가지고 더 넓은 가슴, 더 강인한 남성이 되기 위하여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아내는 남성다운 남편을 원하지 여성같은 남자를 원하지 않는다.

성경에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했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라고 했다.  이 말씀은 한편은 복종만 하고, 또 한편은 사랑만 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남편과 아내는 항상 서로 복종하고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특징적으로 말하면 아내는 남편보다 복종적이어야 하고, 남편은 아내보다 사랑이 더 많아야 한다는 말이다.  과연 우리 주님은 교회에 대하여 먼저 사랑하셨고, 또 사랑이 많으셨다.  남편은 아내를 먼저 사랑해야 한다.  예전과 달리 요즘은 대부분의 남편이 아내에게 너무 잘해주는 데 비해서 고맙다는 아내의 표현이 적어서 섭섭함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아내는 남편에게 보다 부드럽고 자상해야 한다.  믿음좋은 교회가 주님에게 부드럽게 자상하듯이 훌륭한 아내는 남편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그 가슴 속에 깃들어 살 줄 알아야 한다.  그럴 때 그 남편의 마음은 아내를 믿을 것이다.

하나님은 남자에게서 여자를 창조하셨는가 하면, 남자는 여자에게서 났고, 또 둘이 합해서 한 몸을 이루도록 하셨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에게 고향이고 친화력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러므로 부부는 자기의 성에 대하여 그리고 그 천부적인 역할에 대하여 언제나 수용적이고 적극적이어야 한다.  “모든 자연인은 반드시 한번 종교인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종교인은 다시 한번 자연인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칼 힐티가 말했는데 정말 올바른 말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은 한번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하지만 그 사람은 천사도 아니고 초인도 아니다.  다시 한번 자연인으로 돌아와 하나님의 창조적 원리에 순응하고 기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자신에 대하여, 자기의 성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자랑스러워할 때, 배우자가 원하는 사람이 될 수 있고 자신도 행복스럽게 될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부부관계를 활발하게 이끌어감에 있어 중요한 것은 서로를 잘 불러 주는 것이다.  여기서 불러준다는 말은 단순히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개성과 인격을 인정해 주고, 그 소원과 원망을 알아주고, 그 가능성과 잠재력을 이끌어내 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교회 오후예배 마지막 순서는 서로에게 가장 은혜롭고 덕있는 인사말을 나누는 것이다.  “당신에게 승리가 있기를 원합니다. 당신은 멋진 집사입니다. 당신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형의 사람입니다. 우리는 모두 기도하는 선교사입니다. 당신은 선지자와 의인의 상을 받을 사람입니다”  이렇게 서로를 불러줄 때 얼마나 청신하고 마음에 격려를 받는지 모른다.  사실 우리 자신은 남이 나를 인정해 주는 않는 한,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 줄 모른다.  우리는 본래 사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남이 인정해 주고 존중해 줌으로써 비로소 자신을 발견하고 자기 가치를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부부는 사회의 기본단위로서 이런 점에서 상대방에게 큰 책임을 지고 있다.  부부는 누구에게 보다 강렬하게 서로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있고, 배우자에게서 무시당하면 가장 큰 상처를 입게 되어 있다.  그가 나를 어떻게 인정해 주는가, 불러주는가에 따라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한 인간으로서 삶과 행복의 절반 이상이 영향을 받는다.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은 또한 불러 주어야 하는 믿음이다.  이 믿음의 불러줌이란 교회와 주님과의 관계에서는 신앙고백이겠지만 부부관계에서는 사랑의 고백이요, 사랑의 건축이자 미학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김춘수 시인의 “꽃”이란 시는 퍽이나 인상적이고 감동적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 그에게로 가서 나도 / 그의 꽃이 되고 싶다 /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불러준다는 것은 대단한 기술과 성의가 필요한 일이다.  성경은 사랑의 표현으로 가득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 2:23)는 사랑의 고백으로부터 “주께서 낫게 하시며 성령으로 충만케 하신다”(행 9:17)는 축복의 선언에 이르기까지 사랑과 믿음은 선언과 표현으로 열매맺고 꽃피는 것이다.

어떤 뻐드렁니를 가지고 고민하는 여학생에게 상담자가 충고했다.  “너의 뻐드렁니는 세계에 하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녀는 자기 앞니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 뻐드렁니의 매력에 끌려 훌륭한 총각이 구혼을 해왔다.  불러주는 것, 정의해 주는 것, 배우자에 대해 권위있게 결론지어 주는 것은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당신을 믿소. 당신의 고결한 의지를 사랑하오. 당신의 더없는 순수함은 세상에 유가 없을 것이요”  그 불러줌은 사랑이 있는 한 모두가 진실이고 또 불러준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처럼 반드시 열매가 맺히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게 한다(사 55:10~11).  “아내가 언제 제일 고마우냐”고 남편에게 물어보면 대부분의 남편은 “아내가 나를 믿어 주었을 때”라고 답한다.  수가 성 여인이 믿을 만한 사람을 찾아 방황했다.  그러다가 예수를 만나자 그 방황이 끝났다.  사랑은 믿음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자기 신화에 빠지지 않고 자기만의 범주를 벗어날 줄 알 때 믿음은 더 깊이 자리한다.  부부가 먼저 서로의 마음을 읽어주고 불러주면서도 자기의 한 일을 과시하지 않고 상대방을 탓하지 않으며 작은 보살핌에도 고마워할 줄 알 때 믿음은 행복으로 꽃핀다.  부부 사랑은 서로간의 믿음, 자기에 대한 믿음, 그리고 서로를 아름답게 불러주는 믿음에 자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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