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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관련]]교회를 변화 시키는 찬양사역

작성자넓은가슴|작성시간07.06.11|조회수220 목록 댓글 0

교회를 변화 시키는 찬양사역

I. 서론
1. 찬양 사역에 대한 문제제기
기독교는 하나님을 예배한다. 그러므로 기독교 예배는 "하나님께 최상의 가치를 드리는 것"이다. 그것은 시편 기자의 말에서 보듯이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주님께 드리는 것이다"(시29:2) 따라서 "예배는 생명있는 종교가 가지는 유일하고도 충분한 증거"가 된다. 그러므로 진정한 교회는 의미 있는 예배를 통하여 끊임없는 동력을 얻는다. 신령과 진정으로 찬양하는 사람은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축복이 있음을 본다. 그리고 예배의 가장 아름다운 표현은 찬양으로 나타난다.
찬양을 통해 주님을 만나게 되며 성령의 역사를 체험한다. 찬양은 정화의 작용을 함께 우리의 속 사람을 정결케 한다. 또한 찬양을 드리면 영적인 상처와 육체의 병이 치료되기도 한다. 찬양은 사울 왕의 예를 볼때 우리 속에 깊숙히 숨어있는 사탄을 몰아낸다. 그리고 뜨거운 찬양 중에 내적인 변화와 주님을 위한 헌신을 확인하게 된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명령한다. 신약에서 48번, 구약에서 351번 '찬양하다(praise)'가 기록되어 있고, 그 단어의 목적어는 언제나 여호와임을 알 수 있다.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라는 히브리어의 명령형이 바로 "할렐루야"인 것이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된자 모두와 교회가 행해야할 본분이다.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시던 날 밤, 베들레헴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야외 찬양큰잔치가 벌어졌다. 모든 사람이 잠든 그 밤에 쓸쓸한 들 녁 오직 목자들만이 양떼를 지키며 긴 밤을 지새던 그날에 천사가 나타나 두려워 떠는 그들에게 기쁨의 소식을 전했다.
성경은 이처럼, 주님의 초림에 대해 찬양으로 그 영광을 드러내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이르면 주님의 재림 때도 찬양하는 천사들에게 둘러싸여 영광 중에 임하실 것이라고 이야기하며 그때에 모든 여호와의 종들이 그를 경배하고 찬양할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무론 대소하고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이 찬양소리는 허다한 무리의 음성과도 같고 많은 물소리와 같고 큰 뇌성과도 같은데 이렇게 외치는 음성이 있다.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가 통치하시도다"....
예수 그리스도의 세상에 오실 때나 종말에 다시 오실 때에 그 영광에 앞서 찬양이 서곡으로 울려 퍼진다는 성경의 기록은 오늘날 우리 성도들의 본분이 무엇인지 깨닫게 한다.
그렇지만 오늘날 우리들은 예배를 통해 얼마나 감격스럽게 찬양을 드리고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또한 한국교회전체를 보더라도 일반적인 예배에는 한두 곡의 찬송가와 성가대의 송영과 찬양, 이런 모든 것들이 거의 형식에 지우 친 감이 없지 않다.
1955년 생인 본 연구자는 가난한 달동네의 개척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고, 목사안수를 받은 후 다시 경기도 성남시의 달동네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삶 속에서 사회 복음화 운동을 시작했다. W.C.C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은 N.C.C에서 활동했지만 사회복음운동으로는 결코 가난한 백성들의 삶 속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을 느꼈다. 더욱이 N.C.C관계자들의 변질은 필자의 가슴을 아프게 했으며 주님을 위해서 새로운 진로를 개척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시작한 것이 밀알교회이다. 경기도 성남시 상대동에서 시작한 밀알교회는 올해로 만 16년을 맞이하였다. 1994년 건축하여 현재의 건물에서 예배드리게 되면서 만민감리교회로 교회이름을 변경하였는데 이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나아가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을 찬양케 하자는 뜻이 담겨있다.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사역을 감당해오면서 특히 찬양사역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본 연구자 자신의 특별한 체험에서부터 비롯된다. 그리고 그간 목회와 부흥집회를 인도해 오면서 실제 체험하고 느끼게 되었던 찬양의 능력을 한 권의 책으로 써보고 싶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더욱이 한국교회는 그 동안 많은 숫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예배의 개혁이나 찬양사역의 제고 등과 같은 구체적인 실천신학부분에 연구가 미진하거나 정체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세상문화와 문화매체들은 나날이 변화되는데 교회는 이것을 리드할 힘을 잃어버려 많은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찬양의 가치와 능력에 대한 연구는 시급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중요한 신앙의 틀인 찬양에 대한 제고를 살핌으로서 교회 내에서의 찬양사역을 활성화하고 나아가 예배와 찬양을 통한 영성의 회복과 훈련, 그리고 치유와 교육 선교에까지 이르는 다양한 찬양의 가치를 새롭게 할 것이다.

2. 연구에 대한 범위와 방법
예배학적인 견지에서 볼 때 현재 한국교회의 예배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을 많이 한다. 그래서 다른 방법으로 새로운 예배의 문화와 프로그램을 도입하려는 시도가 많이 있었다. 그 중 최근에는 토론트의 축복이라고 하는 열광적인 예배의 붐이 일더니 최근에는 열린 예배라는 미국식 복합적 예배프로그램이 곳곳에서 도입되어 시행되고 있는 추세이다. 이들 예배의 특징들은 현재까지 기성교회에서 드리는 찬양보다 더 열정적이고 뜨겁게 드린다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가 그러했지만 이러한 유행은 또 얼마가지 않아 또 다른 예배 프로그램으로 대치되지 않을까 염려된다. 그러므로 본 연구자는 아무런 검증이나 비판 없이 개 교회에서 시행되고 있는 열린 예배의 장점을 살리면서 찬양을 강화시키는 목회를 통해 교회의 성장과 갱신의 방안을 찾으려는데 그 연구의 범위와 방법을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성경 속에서 찬양에 관계되는 어휘와 사례들을 살펴 볼 것이다. 특히 구약의 제사제도와 찬양의 관계, 그리고 성전예배에서의 찬양사역문제를 고찰해 볼 것이다. 그리고 신약에서의 찬양의 발전을 알아보기 위해서 회당예배와 초대교회의 예배를 알아볼 것이고 교회사를 통해 변화 발전되어진 예배와 찬양사역을 정리해 볼 것이다.
그런 다음 신학적으로 문헌을 통해 찬양과 찬양사역의 의의목적, 방법을 살펴보아서 현대에 맞는 찬양사역의 근간을 세울 것이다. 그리고 본인이 섬기고 있는 만민감리교회 주변의 교우들을 대상으로 찬양에 대한의식과 찬양드리는 중에 체험했던 사례들을 설문하여 찬양사역을 방향을 설정할 것이다.
그리고 세미나를 통하여 새로운 프로그램을 접목하는 기초를 놓으며 만민교회를 중심으로 한 예배갱신, 찬양갱신을 시도하려고 한다. 만민감리교회의 찬양사역이 활성화된다면 본 교회를 중심으로 찬양 사역자 훈련을 시작해서 보다 많은 교회에 본 연구와 프로그램이 확산되도록 꾀하려고 한다. 아무쪼록 본 주제에 대한 연구에 하나의 징검다리를 놓아 다른 연구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II. 성경을 통하여 살펴 보는 찬양의 영성
하나님은 다른 어떤 제물보다도 찬양을 더 기뻐하시는 분이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은 광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시편 69:30-31)
1.구약성경은 찬양을 어떻게 보는가?
구약시대에 있어서의 히브리인의 예배는 "희생제사"란 말로 표현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성경에 규정된 대로 양 한 마리 혹은 황소 한 마리를 정해진 예물로서 지정된 장소에 가지고 갔다. 그것은 마땅히 흠이 없는 예물이어야 했으며, 그 값이 많으면 많을수록 하나님의 최고의 가치를 인정함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다윗은 어떤 때 그의 부하중 한 사람이 희생의 동물을 무상으로 제공하는 것을 받지 않고 "내가 허비하지 않고 얻은 물건으로 번제 드리기를 원치 아니 하노라"(삼하24:24)고 말하여 거절한 일이 있다. 이와 같이 히브리인의 희생제사는 예배하는 자가 여호와의 가치를 인정하고 가져온 헌물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한편 예언자들에 의해 가르침을 받은 고대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들의 희생제물은 그것 자체가 완전한 것이 되지 못함을 깨닫게 되었다. 곧 그 예물들은 다만 마음과 영혼 속에 있는 내적 태도의 외적이며 가시적인 상징에 불과 함을 깨닫게 되었었다. 그것들은 다만 예배자의 회개와 복종, 그의 기도와 찬양을 표현하는 수단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가치를 인정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유일한 유일의 적당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후대의 몇몇 시편에서 볼 수 있음과 같이 희생제사에 의한 예배와 "영적"인 예배를 함께 놓는다고 하여 모순될 것은 없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전자는 후자의 가시적이며 물질적인 표현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성경에서 사용되는 예배라는 용어들을 살필 때 더욱 드러난다. 먼저 구약에서는 예배에 관한 대표적인 용어를 둘을 들 수가 있다. 그 첫째가 '아바드'(ABADE)라고 하는 히브리어다. 이 단어의 뜻은 "하다" "만들다" "숭배하다", "(하나님)께 복종하다" 인데, 본래 노예나 고용된 종들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 말이 하나님을 섬기는데 사용되면서부터 제물을 드리는 봉사와 레위인들의 회막에서의 봉사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사19:21, 렘 44:3). 두번째 용어는 '샤하아'(SAHA-A)라는 단어인데, "굴복하는 것", "자신을 엎드리는 것", "경배하다"라는 뜻으로서 숭배, 순종, 봉사의 종교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다. 이 개념은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마음과 몸을 가지고 최대한으로 존경을 표하는 것을 의미한다. 구약에서 사용된 이상과 같은 어휘속에 나타나는 뜻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자주성을 버리고 그의 뜻을 따르며 섬겨야 할 존재라는 사실과 경배와 복종의 생활이 예배자들의 주요한 삶의 근본" 이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때도 가장 중요한 예배의 요소는 차냥이었다는 사실이다. 찬양은 하나님의 백성, 우리들의 본분이며 기쁨이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가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다"(에베소서 1:5-6)
찬미는 예수님을 중거하는 입술의 열매임을 히브리서는 말하고 있다.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브리서 13:15).
사도 바울은 찬양생활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회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에베소서 5:19),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며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로새서 3:16).
찬양은 모든 구원받은 자들의 기쁨과 감사의 표현이다. 그러기에 찬양은 우리들의 믿음이 결론이다. 모든 신학과 성경공부와 봉사와 헌신의 결과는 감격의 찬양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찬양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여 전도하게 하고 선교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말씀에 의거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신령한 찬양이 절실히 요구되는 갈급한 시대를 바라본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그분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실천하는 아름다운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시편 110:3)이 주께 나아오는 것을 본다.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시편 57:7). 우리들은 하나님을 찬양할 놀라운 이유를 이미 알고 있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고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시편 117:2).
이러한 찬양의 놀라운 능력과 영성에 대하여 구약과 신약성경에서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하겠다.
1) 세상 최초의 노래
인류의 역사는 거슬러 올라가면 갈수록 그에 관한 자료와 기록이 부족하여 그 국가나 사회의 풍습과 문화를 연구하기 어려워진다. 시간예술인 음악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성경에는 많은 부분은 아니지만 이에 대해 매우 중요한 자료가 있다. 성경에 나타난 최초의 음악가와 음악에 관한 기록이 창세기 4장에 기록되어 있다. 21절에, "그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라고 기록된 대로 최초의 음악가는 유발이다. 그는 아담의 7대 손이다. 그 당시에 벌써 수금과 퉁소가 있었고 이에 맞추어 노래를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을 볼 때 사람들은 아담으로부터 지금까지 음악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과 사랑과 아름다움 등을 노래(음악)로 표현하고 위로를 받고 만족을 얻고 있다. 또한 23-24절에 보면 최초의 노래가 기록되어 있다. 원래 성경에는 시로 기록되어 있지만 고대 히브리어의 시는 운율이 있었기 때문에 시들은 모두 노래로 불려졌다.
이 노래의 내용은 라멕이 사람을 죽인 후, 나를 해치면 가인을 죽이는 것보다 벌이 열배나 더하리라는 잔악하고도 교만함을 노래한 내용이다. 인류의 최초의 노래라고 할 수 있는 이 시의 내용이 유감스럽게도 사람을 죽이고 의기양양하여 읊은 내용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 온 인류는 이 죄악의 굴레를 벗어날 길이 없다. 가인으로부터 시작된 살인, 또 그 후예들은 갈수록 그 죄악의 양상이 흉악해지고 더욱더 잔인한 방법을 쓰고 있으며 엄청나게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죽일 수 있는 무기들이 쌓여 있다. 사람들은 역시 하나님 도움 없이는 도저히 이 죄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인류 역사와 우리 조상들의 모습과 또한 나의 모습을 보고서 알 수 있다. 이것을 안 믿음의 선진들은 기독교의 전통적인 예배에서 "하나님이여 우리들은 불쌍히 여겨주옵소서(Kyrie eleision)"로 예배를 시작하였다. 죄인의 모습으로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그냥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하여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내가 죄인임을 아는 것이다. 이것이 없이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다.
2) 세상 최초의 노래와 최후의 노래
출애굽기 15:1-21에는 이스라엘이 애굽을 탈출하여 홍해의 기적을 체험한 후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기쁨으로 찬양하는 모습이 나온다. 신약에서 최초의 찬양모습은 누가복음 1:46-55에 나타난 마리아의 찬양이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온 백성이 기다리던 구세주가 바로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난다는 말을 듣고 세례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 앞에서 부른 찬송이다. 그 내용은 구원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나 같은 비천한 자를 통하여 잉태케 하여 복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한 것이다.
구약과 신약 최초의 노래는 찬송이며 그 찬송은 모두 구원에 관한 것이다. 구약에서는 집단적으로 찬양했고 신약에서는 개인적으로 찬양하는 모습이 담겨져 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집단적으로 구원받은 것을 찬양했으며 신약에서는 구원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잉태함의 소식을 듣고 찬양하였다. 찬양의 동기는 바로 나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어야 한다. 상황을 바뀌어 개인적으로 이것을 적용해보면 죄로 인해 죽었던 나를 위해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사 십자가에 죽게 하셔서 나의 죄를 대신 지시고 돌아가셔 나를 구원하여 주신 그 사랑과 은혜를 찬양하는 것이다.
3) 광야의 노래 소리
창세기에 보면 야곱의 12아들 가운데 네 번 째 아들의 이름은 유다이다. 그 이름의 뜻은 '찬송'이라는 뜻이다. 유다지파의 이름의 뜻이 찬송이라는 것은 중요한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신 것도 유다지파를 통해서였고, 마지막 요한계시록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유다지파의 사자로 찬양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스라엘백성이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으로 갈 때에 그들은 무질서하게 움직이자 않았다. 그들은 질서있게 하나님의 군대와 같이 움직였다.
출애굽기와 민수기 말씀에서 보면 이스라엘 12 지파가 성막을 중심으로 앞 뒤 3지파, 좌우 3 지파로 또 성막을 지고 가는 레위지파로 그들은 하나님의 군대로 질서 있게 나아가는 것임을 알수 있다. 이 하나님의 군대의 맨 앞에 서서 가는 지파는 바로 유다지파였다. 이스라엘백성이 40년 동안 지나는 광야길은 원수가 처처에 도사리고 있는 곳이었다. 또한 사막에는 들짐승이 많이 있어 생명의 위협도 있는 곳이었고, 기온차가 심해서 언제 그들의 환경이 극복하기 어려운 것으로 변할지 모르는 곳이었다. 뿐만 아니라 광야나 사막은 길이 없는 곳이다. 수시로 길이 달라지는 곳이다. 그 당시에 이정표 같은 것이 있어서 몇 킬로미터만 가면 된다는 표시도 있을 리 없었다. 지금부터 4천년 전에 이스라엘백성이 광야를 지나서 어떻게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땅으로 갈 수 있었는가를 한번 생각해 보라. 하나님께서 그 험한 광야 길을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신 것이 사실이다. 이와 더불어 그들이 광야를 지날 수 있었던 또 한가지 비결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앞서 얘기한 유다지파, 즉 '찬송'이 이스라엘지파들을 앞장서 광야를 걸어간 것이다.
이사야 말씀을 보면 "우리의 찬송은 광야 가운데 길을 내게 하겠다" 라는 말씀이 있다. 길이 없는 사막 가운데 길을 내겠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을 지날 때 처음 지나가는 길이 없는 그곳에 우리의 찬송은 하나님으로 하여 길을 열게 하신다는 말씀이다. 이스라엘백성은 그 광야의 길을 찬송의 무리를 앞장세워 길을 열며 나간 것이다. 우리의 앞길이 막혀 있을 때에, 우리가 영적으로든 정서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매어 있을 때에, 답답할 때 그리고 완전히 희망이 없어졌을 때에 길을 열게 하고 매인 것이 풀어지게 하고 승리하게 되고 자유 케 되도록 하는 것은 바로 찬양인 것이다. 찬양은 우리로 영적 전쟁에서, 원수와의 싸움에서 원수의 세력을 멸하고 승리를 가져오게 하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라고 찬양할 때, 어두움과 절망과 매임과 전쟁은 참으로 모든 능력과 영광과 존귀를 가지신 하나님께서 임하심으로 말미암아 승리케 되고 어두움은 사라지게 되며 묶였던 사슬은 풀어지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찬양의 능력을 우리는 성경의 여러 군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막혔고 암담하고 아무 소망이 없었던 자신들의 처지에서 어떻게 찬양했으며,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살펴보자.
찬송을 부를 줄 아는 자의 특권이 나오는 역대하 20:1-23, 24-28에 보면 여호사밧왕 당시 모압과 암몬 자손이 함께 연합하여 유다를 치러오는 상황이다. 원수가 연합해서 공격해오는 혼란하고 어려운 전쟁의 때에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대처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먼저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 나아가 그들에게 닥친 어려움을 말씀드렸다. "이제 저희가 와서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주의 기업에서 우리를 쫓아내고자 하나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저희를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 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20:11-13) 이렇게 하나님께 나가 아뢰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오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항오를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20:15,17).
그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여호사밧 왕과 온 유다 백성이 그 다음에 취한 행동은 전쟁을 하러 군대가 나간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무리가 찬송의 옷을 입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하나님을 찬양한 것이었다. "백성으로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를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20:21)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상황을 넘어 서서 그위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이것이 찬송을 부를 줄 아는 자의 특권이다. 찬양할 때 상황은 작고 보잘 것 없이 보이게 되는 것이다. 찬양을 부르기 시작할 때 하나님께서 행하신 역사를 보라! 하나님께선 이미 그 전쟁터에 하나님의 군대를 숨겨 놓으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복병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을 하달받은 것이다. 원수를 쳐부수는 신호는 유다 백성의 찬송소리라고(20:22) 만약 하나님의 백성이 찬양하는 대신 불평하고 불 신앙의 말을 하였다면 원수의 진은 파하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원수에게 짓밟히게 되었으리라. 그들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그 인자하심을 찬양함으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군대를 동원하셔서 전쟁에 이기게 하셨고 승리의 기를 적진에 꽂기 하는 영광을 당신의 백성에게 주셨다(20:24-28), 찬양은 영적 전쟁에 승리를 가져 오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와 같이 찬송 가운데 계시다(시편22:3).
시편 8:1-2의 말씀에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원수를 잠잠케 하셨다고 하신다. 찬양은 원수를 잠잠케 하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찬양은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만 가능하다. [행복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결]이라는 책의 '찬양의 구름다리'라는 부분에는 다음과 같이 씌여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권능을 가지고 우리 가운데 임하게 되는 때는 우리가찬양할 때이다."
4) 히브리인들의 음악 이해
히브리 문화는 고대 근동 의 가나안을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하여 전 족장 시대동안은 독자적인 것이었다. 비록 갈대아 바벨론 베니게 수리아 메데 바사 등과 같은 주변 강대국들과 특히 이집트와 앗시라아 같은 고도의 문화 민족들과의 마찰이나 그들의 전쟁들에 대한 성서적 증거 및 전쟁포로 등으로 인한 수 없는 히브리인 유출의 민족사를 볼 때 히브리 문화사가 주변 나라들의 문화적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으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하더라도 히브리 문화의 독자적인 특성들은 그들의 유일신신앙과 함께 오늘날까지 전승되어져 있으며 특히 음악에 있어서는 기악보다는 성악의 탁월함, 정해져 있는 규칙( rule )이나 동기( motif ) 선법( mode )에 따른 응창을 위한 즉흥곡이나 독창의 선호, 신앙(히브리의 민족정신)과 거의 모든 음악과의 합일, 수세기를 이어오는 어떤 노래들, 선률을 장식하는 창법이 중앙 동부의 원형과 유사한 점 등이 오늘날의 음악학에서 증명되고 있다.
히브리 민족은 분명히 음악적 소양이 빼어난 민족이었다. 이것을 확증할 수 있는 외적인 증거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외경인 도마 행전의 언급이다. "내가(도마 사도)인도에 막 상륙하였을 때 나는 다소 향수병에 걸려있었는데 한 피리 부는 소녀가 나를 보고는 오랫동안 나의 머리맡에서 피리를 불었다. 알고 보니 이 소녀는 히브리로부터의 유민이었다." 또 다른 증거는 앗시리아의 한 양각 비문에 히스기야 王에 대한 산헤립 왕의 승리를 찬양하는 내용과 함께 그 후의 배상금과 조공에 관한 기록으로 그조공의 內容이라는 것이 귀금속과 유대의 男. 女 음악가들인 것이다.
시 137편에는 바벨론인들이 히브리 포로들에게 "시온 노래 中의 하나" (137:3) 를 부르도록 요구했다는 기록]이 있거니와 조공으로 음악가들을 요구하고 그들에게 자기들의 노래(히브리인들에게는 성가였겠지만)를 부르게 하는 일은 동서 고금에 드문 일인 것이다.
(1) 히브리 음악의 악기에 대하여
한글 성서는 히브리 악기의 원명을 번역하는 일에 있어서 전혀 일관성이 없거나 원명이 서로 다른 두 세 종류의 악기를 한가지 이름으로 뭉뚱그려 말하고 있지만 히브리 악기의 수효는 한글성서에 소개된 것의훨씬 이상으로 그 수가 많았던 듯 하다.
A. 격악기(percussive Instruments)
a. 쳐서 소리를 얻는 악기(toph, 북, 소고)
둥근테에 방울이 달린 모양의 이 악기는 한 손에 이악기를 들고 다른 한손으로는 악리를 쳐서 연주하였으리라고 생각되고 있으며 오늘날의 탬버린과 유사하였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성경에서는 사 11:34, 5:2에서는 낙에 사용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삼상 10:5에서는 선지자들과 관련되어서 또한 시 68:25, 150:4에서는 예배 자들과 관련되어 쓰인 것으로 言及되어 있다. 한편 한글 성서에는 창세기의 기사에서 "북"으로 표기된 외에는 모두 소고로 번역되어 있다. 이들 두 종류의 생김새나 연주법 등에 관한 상이점은 학적으로도 밝혀져 있지 않으나 대상 15:19(헤만과 아삽과 에단은 놋 제금을 크게 치는 자요.....) 로 미루어 그 재료가 동인것 만은 확실하다. 이들 상이점에 대한 W.S.프렛 ( W.S. partt) 의 견해는 이들 두 종류 중 어느 오늘날의 심벌즈 같은 型이고 다른 하나는 한 쌍의 작은 놋을 손가락에 붙게 해서 서로 맞 치도록 되어 있는 오늘날의 캐스터네츠에 비슷한 형태가 아니었을까하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히브리 성서에서는 삼상 6:5과 시 150:5에서는 으로 표기하고 대상 13:8, 15:16, 19, 28, 16:5, 42, 25:1, 6, 대상 5:12, 13, 29:25, 스 3:10, 느 12:27에서는 표기하여 한글 성서에서의 "제금"에서의 종류가 있음을 명시한다는 것이다.

2)흔들어서 울리게 하는 악기( Pulsatile Instrument )(므나님, 양금)
"므나님"은 "흔들다, 떨다"라는 의미의 동사 므나 에서 온 단어로 한글 성서에는 (삼下 6:5등) 양금 이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실제의 형태는 애급계의 "슈토룸" 과 비슷하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양금은 그리이스 악기였던 의 히브리式 이름이며 페르시아의 비파( santir )와 같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2) 관악기( The Wind Instruments ) 피리, 퉁소, 생황
갈대나 나무를 재료로해서 만들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오늘날의 피리나 오보에형과 비슷한 모양의 악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성경에서는 삼상 10:5, 사 30:29에서 예언자들의 부류에 의해 쓰인 경우와 사 5:12, 렘 48:36, 왕상 1:40에서 사교적 용도로 쓰인 기록되어 있으며 한글성서에는 상기한 삼상 10:5, 사 30:29, 5:12에서는 '로램' 열왕기상 서에서는 피리로 번역되어 있다. 갈대의 길이를 다 다르게 잘라 옆으로 엮어서 부는 풀 피리로 오늘날의 풍금과 그 성격이 비슷하였으리라고 추측되는데 한글성서에서는 창 4:21, 시 150:4에 "퉁소"로 욥 21:12, 30:31에 "피리"로 번역 記錄하고 있다.
한글 성서의 삿 5:16에서 목자들의 피리로 쓰인 전자와 단 3:7에서 신상참배와 관련하여 쓰인 후자는 다 같이 휘파람을 불다 혹은 호각을 불다라는 동사 (mashrokit )에서 파생된 이름들 일 것 인데 아마도 직형의 피리나 호각종류 일 것이다.
이 악기에 대한 문헌적 증거가 많지는 않지만 Lexicon에 의하면 이관피리(double Flute)정도의 설명을 얻을 수 있다. 오보에 비슷한 모양이었을 이 악기는 성서에서는 한 번도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다른 고증들에 의하면 구약 시대에 상당히 널리 이용되고 있었다하니 적당한 해석 명은 없을지라도 히브리 악기의 피리 류에 넣어도 될 것이다.
b. 나팔- 구부러진 나팔
한글 성서에는 수 6:5에서 양각나팔로 대상 25:5과 단 3:5에서 나팔로 표기되어 있는데 몇 번 인용되지는 않았지만 대부분 무슨 신호를 할 때나 주의를 요할 때 사용한 것으로 보이며 프렛은 상당히 소박한 악기였을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실제보다 변형하여 생겼을 것이지만 야생염소나 양혹은 목양의 뿔로 만든 것도 있었겠지만 삼上 6:5(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으로 여호와 앞에.....) 등의 구절로 미루어 나무로 만든 것들도 있었을 것이다. (출 19:13)이 히브리 언어에서는 '수양의 뿔'이라는 뜻인 것으로 미루어 이 악기는 수양의 뿔로 만들었거나 수양의 뿔 모양으로 그 관이 굽어 있거나 할 것이다. 이것이 상기한 나과는 어떻게 달랐다는 고증은 없지만 어떤 제적인 의미는 아닌가 생각할 수 있겠다.
직관나팔(The straight trumpet),
이것은 은이나 금속제악기로 요세프스(Josephus)는 이것을 로마의 군용 트럼펫에 비기고 있다.
성서에 약 50회의 인증이 있는 중 초기 문서에는 대부분 군중 소집을 위해 쓰였지만 후기 문서에는 거의 전부가 성전 예식에 관련하여 기록되어 있다.(대상 16:6, 42, 대하 29:26-28, 겔 3:10). 또한 성서에는 굽은 형인지 수직형인지 불분명하나 나팔 유의 악기임에는 분명한 이름들이 있으니 하기 하는 바와 같다.전 14:8, 15:51, 살전 4:16, 히 12:19, 계 1:10, 4:1, 8:2, 6 9:14),
(3) 현악기( The string Instruments )
고대의 현악기들은 오늘날의 현악기 주법 같은 "활로 켜기"가 없이 모두 손가락으로 현을 뜯거나 플렉트럼( plectrum )을 이용하여 연주하였다. 히브리의 현악기를 악기의 구조형에 따라 대별하면 Harp나 Lure형과 Lute형과 Zither형의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a. Harp 혹은 Lyre형
이들의 모양새를 비교적 사실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므깃도(Megiddo) 에서 찾아진 상아 장식물의 그림 에 의해서 인데 몸용 한 각의 양 끝에 윗 부분이 휘어 있는 막대를 하나씩 세우고 그 위에 황목을 하나 걸어 몸통과 그 황목에 연결 되도록 絃들을 걸어 놓은 모양새이다.
b.kinnor - 현금
히브리 현악기 중 가장 일반적이고 보편적이었던 악기가 이 킨노르였다. 이것을 연주할 때는 양 팔 사이에 세우고 플렉트럼을 사용하여 두손으로 연주했다. 이상의 기록이 성서에 있는 중 세속적인 희락의 때( 욥 21:12, 창 4:21, 31:27)에도 많이 쓰여서 이사야( 5:15 )와 아모스는 신성한 악기를 세속적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 현의 수에 대해서는 7현이라는 설도 있고 10현이라는 說도 있으며 역사적인 사실로 성량을 얻으려 할 경우에는 최소한 9名 以上이 함께 연주하기도 했다.
c. neble, - 비파
70인역 성서( LXX Septuagint )에서는 이 이름을 나 (단 3: ) 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학자들은 찌터(zither)의 변형 Lute인 Psaltery로 추정한다. Psaltery는 그리이스의 ( 3각금 ) 이나 이집트의 Nefer과 그 모양새가 유사하다. 성경에는 사 5:12, 14:11, 암 5:23, 삼상 10:5, 삼하 6:5, 왕상 10:12, 대상 15:16, 대하 5:12, 느 12:27, 시 71:22등 약 25 以上인용되어 있으며 대부분 (금)와 함께 언급되어 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Lyre 와 Lute의 관계처럼 상호 보조의 관계를 암시하는 것일 것이다.
d. nebel asor, 열줄 비파
asor라는 용어가 "10"임을 고려할때 그리스 사람 아리스토틀 ( pseudo Aristotle )은 이 악기의 음이 상당히 고음이라고 증언하고 유브널( Juvenal )은 두 군의 현이 서로 엇갈리게 매어 있어 양손으로 뜯게 되어 있는 Harp 라고 묘사한다. 성서에는 시 33:2과 144:9에 "열줄 비파"로 表記되어 있고 단 3:5, 7,10에서 삼현금과 함께 언급되어 있다.

(4) Lute형
여기서 Lute형 이라고 하는 것은 Guitar나 Violin같이 몸통에 부착된 목에 현들을 연결시켜 그것을 뜯으면 속이 빈 몸통에서 소리가 되울려 나오도록 되어있는 형을 말한다. 성경에는 이 형의 악기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지만 란델스( Landels )는 이것을 헬라의 (아랍어로는 이데 3각형의 악기로 아주 날카로운 소리를 낸다.) 와 같은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5) Zither형
몸통 위에 여러 개의 현들을 뻗쳐 놓은 모양으로 이 현들을 때리거나 뜯어서 연주하는 형을 찌터형이라고 하였다. 10현금이 바로 Zither형의 악기였다.
Ⅱ. 신약성경은 찬양을 어떻게 보는가?
찬양은 예배의 가장 최상위 적 표현 양식이다. 그러므로 먼저 예배에 대한 신약의 이해를 잠시 해야할 필요가 있다. 헬라어로 기록된 신약성서에서는 예배라는 표현이 세 가지 용어로 나타나는데 그 첫째가 '프로스퀴네오'( )이다. 이 단어의 문자 적인 뜻은 "누구의 손에 입 맞추는 것", "존경의 표시로 다른 사람 앞에 자신을 엎드린다" 이다. 유대교에서는 이 단어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나 혹은 거짓 신들에 대한 숭배와 관련되어 사용하기도 했으나 신약성서에서는 신성한 대상에만 관련하여 사용하였다. 둘째, '라트레이아'( )이다. 이 단어는 "보상을 위한 봉사", "신들을 섬김"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신약성서에서 라트레이아 ( )가 사용된 5가지 실례 중에서 3가지는 희생제사 사역을 언급하고 있는데, 즉 롬 9:4, 히 9:1,6이 그러하다. 로마서 12:1에서는 내적인 생활과 외적인 행위의 산 제사를 말하고 있다. 즉, 인간의 이성과도 일치하며 또한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이성도 역사 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말한다. 세 번 째 단어는 '레이투르기아'( )로서, "섬김" 혹은 "봉사"의 뜻인데 예배식 (Liturgy)이란 말이 여기서 유래했다. 이 말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행한 바 특별한 봉사를 나타낼 때에 사용되었는데 그 제사장 적 기능들은 모두가 예배 적인 것들이다 (눅 1:23, 히 9:21). 이 말은 그리스도의 직분 (히 8:6)과 교회의 예배 (행 13:2)를 표시하는데 사도 바울은 더 나아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모은 헌금과 (고후 9:12) 빌립보 교회가 자기를 위해 준 선물에 대해서도 적용하여 사용하고 있다 (빌 2:30). 바울에게 있어서 참된 레이투르기아는 성령의 열매로 나타나는 믿음의 생활 (갈 5:22) 이다.
예배는 영어에 있어서 'Worship'이다. Worship은 본래 앵글로 색슨어의 'weorthscipe'에서 유래 했는데, 가치(worth)라는 말과 신분 (ship)이라는 말의 뜻을 가진 합성어로서 "존경과 존귀를 받을 가치가 있는 자"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을 좀 더 구체화시키면 "하나님께 최상의 가치를 돌리는 것"(to ascribe to Him supreme worth)이란 뜻이 된다. 이러한 표현은 성서의 여러 곳에서 사용되고 있는데, 예를 들면 시편 기자가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시29:2)" 라고 표현한 경우와 계시록에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 하도다(계 5:12)" 라는 표현 등이 모두 이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 적인 관점과 예수님이 수가성의 여인에게 주신 말씀 등을 종합하여 볼 때에 예배란 무엇보다 거듭 난 신자가 거듭 남을 주신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께 대하여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행위이다. 이에는 형식보다는 마음의 신령한과 진정함이 필요한 것이라고 하겠다. 찬양 역시 형식보다는 마음의 신령과 진정이 더 중요하다.
1) 예수님의 찬미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찬송하신 기록이 나와 있다. 마태복음 26:30, 마가복음 14:26에 기록되었는데 이것은 성만찬 후에 제자들과 함께 찬미하며 감람 산으로 가신 기록이다. 그런데 이 장면을 깊이 묵상해 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인간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 께서 가장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을 바로 앞에 둔 그 상황이었다.
"이 잔을 지나가게 하소서 그러나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의 피눈물 나는 겟세마네의 기도 바로 전의 모습이다. 이미 유월절 다락방에서 유다의 배반을 아신 주님, 모든 제자들도 다 버리고 홀로 십자가를 지어야 하는 줄을 미리 아셨던 그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 마음은 얼마나 아프고 감당키 어려웠을까. 그러나 그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자세히 성경을 읽어보면 함께 '찬미'하며 감람 산으로 올라가셨다.
이때에 예수님은 구원 사역에서 이미 승리하신 것이다. 이 노래는 승리의 노래요 순종의 찬송이었다. 신약의 마지막 부분인 요한계시록에서도 흰옷 입은 셀 수 없는 무리들이 세세 무궁토록 부르는 찬양의 주제도 구원의 하나님과 어린양 에게라고(요한계시록 7:9-10)기록되어있다.
계시록(15:3,4)에 기록된 찬양도 사실상 시편과 같은 흐름임을 볼 수 있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 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 시도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 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그리스도의 탄생에 관련된 찬양들도 모두 다 같은 톤으로 구약과 신약을 연결시키고 있다.(누가복음1:44-55, 58-79 참조).
2) 감옥에서 부르는 노래
또 한가지 찬양으로 인한 놀라운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사도행전 16장 말씀이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지방에 가서 복음을 전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그들이 제일 먼저 만나 복음을 전한 루디아의 집에서 빌립보 지방의 교회가 시작되었다. 그러한 때에 바울과 실라가 어느 날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을 만나게되어 그 귀신을 내어쫓게 되었다. 그 결과 그 여종의 주인이 자기들에게 점치는 것으로 인해 들어오던 이일이 끊어진 것을 알고 바울과 실라를 관원에 끌고가 그들을 옥에 갇히게 만들었다. 바울과 실리는 매를 많이 맞고 옥에 갖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옷을 찢기고 매를 많이 맞고 깊은 옥 속에 발에 착고를 채운 채로 갇혀 있는 바울과 실라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아름다운 장면이 나온다.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인들이 듣더라"(16:25)고 기록되어 있다. 밤중이라는 의미는 시기적으로 밤중이란 뜻과 또한 영혼의 밤중이라는 두 가지 뜻이 다 포함되어 있다. 가장 고통스러운 때이고 가장 비참한 지경이고 앞이 깜깜한 때인 것이었다. 어쩌면 이들은 이러한 최악의 상황에 있는 자신을 바라보며 불쌍히 여기거나 우울증에 빠질 수도 있었다. 대부분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은 자기만을 바라보며 환경에 쉽게 지배받고 결국에는 부정적이며 낙심케 되어 그 우울증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는 그러한 참담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볼 줄 알았다. 그들은 하나님이 누구 신지를 알았기에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감정과 상황을 하나님께 드리며 하나님을 크게 찬양하였다. 찬양은 감정이 아닌 것이다. 찬양은 믿음으로 하는 것이고 찬양은 믿음으로 하는 것이고 찬양은 진리를 믿으며 선포하는 것이다. 찬양할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는 불신앙의 고백이다.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이 가장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을 찬양했다. 가장 어두운데 계신 하나님을 찬양했다. 가장 어두운데 있는 사람들이 가장 빛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찬양했다. 그 결과가 26절에 나온다.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 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밤중에 노래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할 때(욥기 35:10)하나님은 그 찬양을 들으시고 감격하시며, 그 예배를 받으시고 그들의 밤중을 걷어주시고 옥문을 열고 매인 것을 푸셨던 것이다. 찬양은 우리 환경을 풀게 하고, 우리 영혼의 매인 것을 풀게한다. 우리 정서의 상한 부분이나 묶인 부분을 풀게 한다. 병든 사람이 하나님을 찬양할 때 그 육체가 치유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하나님이 임하시는 곳에 우울증이나 매임이나 상함이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찬양할 때 긍정적인 사고 방식으로 변하게 된다. 찬양할 때 어두운 마음이 사라지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치유하시고 자유케 하시는 역사를 찬양 가운데서 행하신다. 또한 찬양으로 인한 역사는 거기에 그친 것이 아니었다. 그날 밤에 그 옥을 지켰던 간수와 그의 가족은 구원을 얻게 되었다. (사도행전 16:29-34), 찬양은 죄인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도 하는 것이다.
3) 노래하는 자를 찾는 하나님
이제 마지막으로 살펴보는 찬양의 유익은 찬양하는 자의 삶은 하나님을 더 계시 받아 알게 되며, 또한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들어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보다 중요한 찬양의 능력이고 찬송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은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함이다(사도행전 43:21). 우리의 우선권이 먼저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되어야 한다.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나라의 시민이 되고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되었다면 찬양은 가장 마땅하고 중요한 본분이다.
하나님은 일하는 자를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요한복음 4:23-24).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행하신 놀라운 역사와 하나님의 아름다우시며 크신 성품으로 인해, 하나님을 높이고 예배하는 사람, 찬양하는 사람을 지금도 찾고 계신다. 우리가 구원 받았다면 마땅히 찬양할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이 신약의 주제이다.
4)신약시대의 찬양과 영성
순전히 구약과 관련을 끊을 수는 없다 해도 신약시대의 특성에 맞는 찬양은 없었던가? 고린도전서 14장 26절 이하에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발전이 나타난다.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즉 구약시대보다 내용상 영적인 면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바울은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을 찬미하리라"고 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바울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라고 한다. 이 단어들을 정확히 설명하기란 쉽지 않지만 대체로 '시'는 시편을 말하고, '찬미'는 당시에 만든 찬송가요, '신령한 노래'는 영적인 감동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나오는 노래를 의미한 것 같다. 마지막것만 제외하고는 교회사에 계속되었다. '신령의 노래'는 요즘 오순절 계통의 교회에서 방언찬송으로 표현되고 있다. '찬미'의 내용은 신약의 여러 부분에서 볼 수 있다. 가장 분명하게 우리에게 보여지는 귀절의 좋은 예는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에베소서 5:14)이다. 일반적으로 보아 신자들을 불러서 신앙으로 행동하기를 호소하면서 하나님의 약속은 확인시키는 내용이다. 이 찬송은 세례의식을 할 때 주로 사용되었는데 신자가 물에 잠기어 옛 사람이 죽고 다시 일어나 새 생명을 얻는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그 외에 신약의 많은 부분 중에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이 찬송으로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서 빌립보서 2장 6절 이하를 보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 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노래는 계속된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였느니라."
얼마나 완벽한 내용의 찬송가 가사인가? 소절마다 끊어서 쓰면 훌륭한 시가 된다. 이런 종류의 찬양은 신약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찬양은 현대작가들에 의해서 다시 사용된다.
3. 교회역사 속의 찬양과 발전

찬양은 피조물이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경배하면서 하나님의 모든 은혜에 감사하여 드린다. 성경은 찬양과 감사로 가득 채워진 책이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찬양을 받으셨다. 노래로, 악기로, 희생으로, 간증으로, 기도로…인간이 하나님을 알고나서 부터 찬양은 개인적으로 또는 단체적으로 드려졌고, 내면적으로 감정을 통해 또는 외면적으로 소리내어 드려졌다. 살다보면 인간이 찬양을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존경이나 명예나 칭찬, 인기 등을 통해서 받는 찬양이 얼마나 달콤한지! 그래서 사람들은 누구나 찬양 받기를 사모한다. 인간의 선과 강함, 하나님을 닮은 모든 훌륭한 점을 찬양하는 것이 나쁜 것인가? 성경은 하나님만을 찬양하고 그에게만 영광을 돌리라고 하였다, 찬양 받고자 하지 말라. 찬양할 대상을 바로 알고 끊임없이 찬양하는 이는 하나님을 진실로 아는 자요, 그의 찬양하는 내용은 참으로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다. 찬양하지 않는 자는 축복도 없다. 자신에게 이미 주어진 복의 가치와 효력을 안다면 진실로 감사와 찬송을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찬양하지 않거나 지속할 수 없는 것은 복을 모르기 때문이다. 받은 은혜를 알면 알수록 그 만큼 더 찬양하게 되고, 그 찬양으로 받는 것은 더 분명해진다.
초대교회 신자들도 우리처럼 하나님을 찬양했다. 아마도 그들은 자신들의 문화적인 상황에서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표현했을 것이다. 초대교회는 많은 점에서 유대교회의 토대 위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복음의 강력한 힘으로 감사와 찬양 역시 강력할 수밖에 없었다. 같은 하나님이었지만 구원의 방법과 주시는 은혜는 비교할 수 없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유대교인들처럼 시편을 노래해도 전혀 차원이 다른 감동으로 하였다. 그리고 거기에다 기독교적인 경험을 더해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1) 유대교와 찬양
초대교회는 유대인의 전통을 거의 다 물려받았다. 하나님과 성경과 절기, 기타 많은 전통이 그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유대교 이상이었다. 마치 폭탄을 물려받았다면, 그것이 폭발되는 것과 같았다. 또한 계란과 병아리 같았다. 먼저 번이 잠재력이었다면 나중 것은 힘 그 자체였다. 유대인으로부터 그리스도가 왔지만 기독교인들은 구원의 복음을 소유하게 되었다. 유대 적인 것은 기독교적으로 바뀌면서 생명력을 얻는다. 외형상으로 보아 유대인의 성전과 회당에서의 예배는 그대로 기독교의 예배 전통으로 이어졌다. 주께서도 스스로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 부르며, 유대교의 전통대로 희생제물을 드리고 예배에 참석하고 설교하고 병자를 고쳤다. 그는 유대인의 절기들도 그대로 지켜 유월절 음식을 먹었다. 유대인의 예배는 세 가지의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즉 찬양, 기도, 가르침 등이었다.
탈무드에는 "언제나 찬양을 돌리고 그 다음에 기도하라"고 씌여 있는데, 이것이 그대로 초대교회에 전승됐음은 성도들이 모일 때에 '찬송시'가 있었다는 것을 보아 알 수 있다(고린도전서 14:26). 유대교에서는 사회자가 목회자로 하여금 예배를 시작하는 찬양을 하게 하였다. 그것은 "찬양받으실 주여! 주는 찬양을 받으실 분이시니이다" 하는 외침과 "주를 영원히 찬양할지어다"라는 응답으로 이어진다. 예배 자들은 하나님의 위대함과 축복하심을 알도록 초대된다(느헤미야 9:5 참조).
2) 초대교화와 찬양
유대교의 기도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앞부분은 하나님의 창조 주 되심과 하나님의 사랑이 무한하심을 말한다. 즉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는 것과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겠다는 약속을 한다. 그리고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사랑으로 택하신 주여, 찬양을 받으소서!"로 끝마친다. 그리고 즉시 "이스라엘아 들으라!"로 시작되는 신앙고백이 따르고 인도자의 축도가 첨가된다. "그의 나라의 영광스런 이름을 영원히 찬양할 지어다!"
두 번 째 부분의 공중기도가 그 뒤에 이어진다. 하나님의 약속은 확실하고 믿을 만하다는 내용을 회상시킨다. 이 부분에서 목회자는 회중 가운데 한 사람에게 기도를 인도하라고 지적한다. 그 사람은 앞으로 나와 법궤를 향해 서서 기도를 하며 회중은 아멘으로 화답한다. 이 부분을 '열 여덟 축복'이라고 하여 여러 가지 내용 즉 감사, 찬양, 그리고 영적, 육 적인 요청,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위한 간구 등으로 이어진다. 그리고는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과 당신의 나랑 평안을 주소서"로 마친다.
그 다음에 성경을 읽고 설교하는 단계가 나타난다. 먼저 회중 가운데 지적 받은 한 사람이 나와서 율법이나 예언서를 읽는다. 그리고는 목회자가 읽은 부분에 관해서 설교를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부분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당이나 성전을 '가르침의 집'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앞에서 설명한 것은 구약의 찬양은 물론 유대교적인 분위기가 그대로 초대교회에 전수되었으며, 그러한 찬양은 그리스도에게 그대로 적용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신약시대에도 구약의 전통은 대체로 그대로 사용되었다. 계시록의 "장로들이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했다", "모세의 노래를 불렀다"등의 내용이 그것을 증거한다. 요한은 이렇게 하여 하늘의 장면을 우리들에게 묘사해주고 있다. 즉 하늘 보좌에 앉으신 이와 그의 나라는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같다는 말이다.
끝으로 히브리서 1장 3절의 내용을 보자,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러한 내용이 초대교회에서 그리스도에게 붙여진 찬양이다. 그는 하나님 자신과 동체이시고 영원 전부터 살아 계신 창조주이시라는 사실에 대한 동의이다. 그리스도의 탄생과 고난, 부활, 승천 및 임재 하심은 초대교회 찬양의 좋은 주제였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초대교회의 찬양은 유대교의 전통 속에서 새롭게 일어난 것이다. 물론 초대교회 찬양 내용의 단순하고 명료함은 후에 많이 바뀐다. 그리고 찬송가 작법도 여러 가지의 변화를 가져온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명쾌한 복음의 내용 속에 담긴 영적인 감동은 우리가 언제까지나 변치 말고 가져야 할 찬양의 원리이다.
3) 중세교회와 찬양
앞에서 본 유대교의 예배는 기독교의 것과 대단히 비슷하다. 물론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거의가 다 유대인이었으므로 예배의 내용이 거의 같을 수밖에 없었다. 여하튼 이러한 형식은 점점 더 다양하게 변해가면서 중세기에는 대단히 복잡해지고 뜻도 달라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종교개혁 시대에 와서 다시 예배의 단순함을 회복하게 되었다. 예배는 복잡한 의식에다 인간들이 이해하도록 의미를 붙이는 것보다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심이 외적으로 표현될 것이어야 한다. 예배는 하는 인간보다 받는 하나님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예배에서 찬양은 찬양 그 자체 뿐아니라 기도와 설교의 내용을 위해서도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바뀌면서 찬양은 폭발적으로 많아지게 되었다. 유대인의 율법이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으로 대치되면서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송이 쏟아져 나오게 된 것이다. 이것은 개인이나 대중이나를 막론하고 그러하였는데, 기독교인들은 모두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노래하고 있었다. 교회는 찬양의 집단이었다.
4) 종교개혁과 찬양
종교개혁은 교회의 교리뿐만 아니라 예배까지도 큰 영향을 주었다. 500-1500년대까지는 주로 성직자들이 인도하던 라틴어로 된 노래 외에는 하나님께 찬양 드리는 노래들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루터가 독일의 전통적인 멜로디에 성경말씀을 붙인 것이 대중 찬송가로 만들어져 불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예배부흥은 18세기 화이트 필드와 웨슬리가 우리들의 신앙생활을 변화시키는 많은 찬송가를 지으면서 일어났다. 1904-1906년 동안 일어난 웨일즈 지방의 영적 부흥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그들에게 뜨거운 찬양의 열기를 불어넣었다. 그 당시 런던 기자인 스티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모임은 시작되었다. 시편말씀을 낭독하고, 모임은 2-3시간 동안 계속해서 기쁨과 성령 충만함으로 인도되어졌다. 그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그 부흥모임의 2/3가량을 경배하며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다."
이 모임은 마치 바울이 기록한 고린도전서 14장에 나와있는 것과 비슷한 상황인 듯하다. 또 다른 예배부흥은 새로운 음악 스타일로 움직여졌다. D.L. 무디는 쌩키와 함께 전도사역을 하였다. 쌩키는 솔로로서 대중과 함께 접할 수 있는 많은 음악을 만들었다.
1865년 구세군은 80여개국에 복음을 들고 나아가면서 음악을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제복을 입고 치주악단(Brass Bands) 과 함께 길거리에서 찬양을 하며 복음을 전하였다. 그러나 물질적인 풍요와 과학 만능주의에 젖어들기 시작하면서 영적 침체와 전통교회에 대한 무기력함으로 교회는 점점 쇠하기 시작하였다.

Ⅲ. 신학적으로 살펴본 찬양
1. 교회와 찬양의 관계

1) 목양과 찬양
기독교 목회란 성서를 근간을 두면서도 "목회"라는 말은 종교개혁이 일어난 다음부터 쓰여졌다. 성서에서 목회의 Motive가 될 수 있는 마태복음 9장 35절에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느니라."고 하신 말씀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이 지상에서 사역을 하실 때 세 가지 주요 활동에 초점을 맞추고 일을 하신 것을 알 수 있다. 즉 가르치셨고(taught), 설교를 하셨고(preached), 병자를 고치셨다(healed), 그러므로 가르치심과 설교와 치유(taughing, preaching, healing)를 예수 그리스도 3대 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예수님의 목회는 치유이시며, 관심이고, 사랑이었다.
(1) 목회의 성서적 근거
목회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목사"의 어원을 살펴보아야 한다. Latin어 'Pastor'는 헬라어 ' ' 을 번역한 것인데 이는 "먹이다, 보호하다"는 의미의 어근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말은 신약성서에서 18회나 사용되었는데 "양을 치는 목자"를 가르키는 뜻으로 8회 사용되었고,예수를 상징한 말로 7회 사용되었다. 한번은 "양의 큰 목자 되신 우리 주 예수"를 가리켜 사용되었고( 히 13:20 ), 또 한번은 그리스도를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이라고 할 때 사용되었다(벧전2:25 ). ' ' 가 7회 사용되었는데 4번은 "다스리다"는 뜻으로 쓰였고, 그런데 신약성서에서는 이 말의 동사형인 ' ' 가 7회 사용되었는데 4번은 "다스리다"는 뜻으로 쓰였고, 한번은 "가축을 치다", "양을 치다"라고 번역되었으며 ( 눅 17:7 ), 계시록 7장 11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양을 치심을 말한다.
목회라는 말은 독일어 "Seelsorge"라는 말에서 그 의미가 잘 나타나는데 "Seele"란 "생명, 정신"을 말하며 "Sorge"란 "돌보아 주다, 보호하다, 관심을 갖다, 보살피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신약에서의 'Minister'란 세개의 다른 Greek어를 번역한 것이다. "인부", "종" 또는 ' ' 가 그것이다. 학자들의 정의를 보면 류형기는 "Pastor는 근원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생활수단이었던 목양술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으며, 에드워드 뚜루나이젠(Edward Thurneysen)은 "목사란 양을 돌보는(Pastoral Care)사람이며, 목회란 슬픔이나 기쁨을 만나 특별한 격려를 필요로 하거나 기대하는 사람들과의 대화를 나누는 일"이라고 하며 "인간의 영혼을 돌보는 일"이다.라고 정의한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목회모범인 치유와 사랑( 마 9:35-36 )에 근거하여, 섬김의 즐거움에 의하여 섬겨야 하고 양들을 보호하고 인도하며 (요10:1) 치유하는 것이 목회라고 본다.
⑵ 목회의 개념 이해
목회의 기능은 역사적으로 각 시대마다 문화적, 심리적, 지적, 종교적 상황에 따라 변화되면서 결정되어 왔으며, 전통적으로 치유( Healing), 지탱(Su-staining ), 인도( Guiding ), 화해( Reconciling )의 네가지로 발전해 왔다.
그러나 전인적 치유사역( Wholistic Healing Ministry )을 목표로 하면서 기독교 역사적인 맥락에서 볼 때 다른 기능도 도외시 하지 아니 하였다.
그래서 이러한 목회기능 들이 무엇인가를 문헌연구의 이론적 입장에서 밝혀 보면서 오늘의 목회상은 어떤 것 이어야 하는 가를 연구하여 본다.
a. 치유의 기능(Healing)
치유란 "온전하게 만든다"는 뜻에서 본래의 조건이 와해되었다가 다시 원상 회복 시켜 주는 것, 즉 육체의 방향이나 그 스케쥴에 있어서 손상을 입었던 것의 기능적인 완전성을 다시 회복 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오성춘 교수는 목회에 있어서의 치유라 함은 회복 ( Restoraion )과 성장 ( Advance )의 두 말로 요약하며, 힐트너( Hiltner )는 치유는 결함·왜곡·침해·결심이 생기기 이전보다 더 발전한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기능으로 본다. 그러므로 이 치유의 가능성은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때 지금까지 그 사람을 속박해 오던 습관이나 걱정에서 해방되며 온갖 노력을 경주하여도 없어지지 아니한 공포·원한·증오심을 깨끗이 털어버리게 된다. 결국은 인간이 온전히 치유를 받을 수 있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길 뿐이다.
b. 지탱의 기능( Sustaining )
힐트너(Seward Hiltner )는 지탱이란 "함께 서서 도와준다"는 것을 강조하는 뜻으로, 회복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유지하도록 지지해 주고 격려하여 주는 것이 지탱목회라고 정의하며, 클레쉽와 제클(Clebsch & Jackle )은 이것은 보조기능인데 온전한 것이 깨어지고 몰락과 훼손을 입어 완전한 회복이 불가능 할 때 또는 당장에는 불가능 할 때 행하는 용기와 격려의 목회기능으로 본다. 이 지탱목회 기능은 네가지 단계가 있다. 첫째는, 보존( Reservation )의 단계로 최소한의 상실만으로 위기를 면하게 하는 방인데 절망중에 서있는 인간을 보존 지탱 할 수 있는 가능성의 단계다.
둘째는, 위로(Consultation)인데 이는 상실 당한 자로 하여금 아직도 희망의 공동체 속에 소속되어 있음을 깨닫게 하여 그의 복잡한 감정적 체험을 경감시키려고 도와주는 차원을 말한다.
셋째는, 결속(Consolidation)의 단계인데 이는 손실 자체를 쳐다보고 서서 그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내게 도와주고 재정비하여 나아가도록 협조하는 것이 결속이다.
네 째로는, 구속(Redemption)으로 이는 지탱목회의 마지막 단계로서 자신의 손실을 받아들이고 회복할 수 없는 상실을 알면서도 역사적인 성취를 다시 한번 이끌어 나가는 단계이다.
이처럼 지탱목회 기능은 하려고 하는 일을 고무하여 주고 어려운 문제를 대면 할 수 있는 용기를 심어주는 목회이며 위로의 목회요, 같이 서 있는 동참의 목회인 것이다.
c. 인도의 기능( Guiding )
인도목회 기능은 다양한 가능성 중에서 제일 적절한 행동과 결단을 가지도록 돕는 목회이다. 여러 가지 다양한 행동과 생각들 사이에서 오직 한가지의 행동만을 선택해야 하는 어려움에 봉착하였을 때 그가 무엇을 하여야 하는 지에 관한 지혜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심령치유의 한인 것이다. 이런 면에서 인도목회는 네 종류의 방법으로 효과적인 내용을 이끌어 나갈 수 있게 되는데 충고(Advicd-Giving), 魔術( Devil-craft ), 들음( Listening ), 결단( Decisions )이 그것이다.
첫째로, 충고( Advice-Giving )이다.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권면 혹은 충고는 강제성을 띄고 상담자나 목사의 의도대로만 이끌어 가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정보를 알려주고 분명하게 해주며 이해가 가능하고 기억이 가능하도록 하여 주는 것이다. 또한 이는 사람과의 깊은 관심이라는 동기에서 나온 것이며 피상담자를 선하게 하기 위할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하여 언어적 수단을 통해 충고하는 안내하는 것이다.
둘째로, 魔術( Devil-Craft )인데 이는 14 - 17세기까지는 매우 중요한 목회기능이었으며, 목회에서는 엑소시즘( Exorcism )으로, 지탱목회에서는 천로역정 가운데 악마의 덫과 올무에서 성도를 지탱시키는 사역으로 보았으며, 인도의 기능에서는 악마와 싸우는 중요한 요소로서 성경말씀을 따라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는 것으로 보았다.
세 째로, 들음( Listening )인데 이는 고난 당하는 자로 하여금 다시 한번 자기가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지 반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 그가 그 자신의 혼란 된 생각들을 정리하여 숨겨져 있는 의미를 발견케 하여서 정화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여 주고 압박감을 해소시키는 카타르시스( Catharsis )의 방법인 것이다.
네 째로, 결단( Decisions )인데 결단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스스로 결단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지 미리 준비한 해답을 주어서는 안된다. 이 결단의 가장 큰 장애물은 교만인 것을 또한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즉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여 있는 자를 인도하여 구원의 근원이신 하나님 앞에 서게 함으로서 결단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목회사역이다.
즉, 인도( Guiding )의 목회사역은 외적 문제의 해결을 넘어선 내적, 영적, 정신적인 투쟁을 인도하도록 조명하여 준다. 인도의 성공은 인도자가 인도를 받는 자의 내적 요인과 접촉되거나 혹은 그 위에 세워졌을 때이다.
d. 화해의 기능( Reconciling )
화해의 목회는 소외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더불어 적절하고 새로운 관계를 맺게 하는 기능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Incarnation)의 역사( 役事 )는 죄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가 소원해진 곳에서 교량을 놓기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셨고(롬3:25), 이 직책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고후 5:18-19) 우리의 사역은 반드시 하나님과 인간사이에서 화목하게 하는 자(peace-maker)가 되어야 한다.
화해는 용서와 훈련의 두 양태가 그 내용으로 되어 있으며 이것은 상호의존적이다. 용서(Fo-rgiveness)는 영혼을 치유하는 성직의 한 기능인데 초기에는 화해는 중점적인 촛점이 고백 자체이었다. 그러나 13세기에 와서는 고해와 성만찬 자체가 화해의 능력을 행사한다고 보았다.
오리겐(Origen)과 터툴리안(Tertullian)은 목회 적 화해의 요소를 세 가지로 분류하였다.
(1) 영적 상담을 통한 준비, (2) 공개적인 고백, (3) 공중 앞에서의 참회 및 하나님과 교회와의 화해이다.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의 사역을 책임진 오늘의 교회는 그들의 모든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람을 성육화(Incarnation) 시킴으로서 맡은 사명을 이룰 수가 있다. 전인적 인간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사명을 촉구하고 있다. "모든 인간관계의 전 영역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화해의 복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본 목회의 개념이해에서 치유를 임무로하는 인간실존의 이중적 결함, 본성적 결함, 후천적 결함 등을 치유하는 능력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것이다.
2) 교회활동과 찬양
예배란 기독교인의 체험에 있어 가장 근본적인 것이라고 보편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타종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많은 인류학자들이 주장하기를 인간과 다른 피조물을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점은 시종일관 역사를 지나면서 볼 때 인간은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예배자라는 것이다.
예배에 대해서 교회가 이렇게 강조함으로써 대부분의 개 교회 자체로 예배드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되지만 오늘날의 예배는 기독교 안에서 가장 오해되고 있는 면 중의 하나인 것이다. 교회에서는 예배를 위한 시간을 항상 따로 마련하고 있지만 예배의 의미는 소홀히 여겨지며 진정한 성서적 예배의 모습은 드러나지 않고 있다. 예배 안에서 우리는 따뜻한 마음을 가지거나 믿음을 쌓아 가는 체험을 가진다. 또 생수의 우물로 인도되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함께 축복된 일치를 누리는 것이다. 예배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예배가 그들에게 생명이고 가장 많은 보상을 받는 체험들이다.
대부분의 문제는 예배에 대한 잘못된 개념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예배가 우리 삶에서 중요하고 의미 있는 부분이 되기 전에 예배가 무엇이며 기쁨과 축복이 넘치는 예배에 어떻게 나아 가느냐늘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1) 예배는 외적 행동양식이 아니다
구약과 신약에서 예배는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예배란 당신의 마음이 헌신된 그분 앞에 끊어 엎드리는 것이다. 왕의 보좌에 들어갈 때에 그분의 권위와 위치를 인정하는 표시로서 그리고 당신의 전적인 헌신을 그분에게 보이는 방법으로서 무릎을 꿇고 부복하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께 완전한 태도를 취하고 전적으로 기꺼이 섬기는 것이다. 지상에 있는 왕 앞에 부복하는 것 이상으로 예배는 그분의 의지에 우리 마음을 기쁘게 종속시키는 것이다. 우리 주님께 예배하는 이면의 유일한 참된 동기는 사랑과 헌신에서 나온다.
누가복음 17:11-19에 열 명의 문둥 병자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님께서 열 사람을 다 고쳐주었지만 돌아와서 올바른 반응을 보인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다. 이것은 단지 넘치는 감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예배, 찬양, 감사 사이의 관계에 대한 한 좋은 예이다. 그 행복한 문둥 병자는 그에게 주어진 크나큰 행운을 알아채고는 돌아와서 큰 목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이것이 찬양이다) 예수의 발아래 엎드린 것은 의무나 전통적인 상식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 마음속에 있는 경배의 한 표현인 것이다. 즉 무엇보다 먼저 외부로 드러난 징후는 주님께 마음을 부복한 것이다.
예배는 노래하고 춤추며 무릎을 꿇고 외치며 기도하는 것 등 어떤 외부적인 행동양식이 아니다. 비록 예배에는 많은 표현방식이 있을지라도 내부적인 마음의 자세와 외부적인 표현에는 뚜렸한 차이가 있다. 표현 뒤에 있는 원동력은 마음속에 있는 진지함이다.
모든 예배는 개인적인 예배로 시작한다. 예배는 노래들을 잘 맞추거나 예배인도자의 열정에 의해서 생기는 분위기가 아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개인이 만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어떤 형식이나 예배에 불을 붙이며 부채질하는 요인에 의존한다면 예배를 드릴 수 없을 뿐 아니라 아마 다른 사람들처럼 예배드릴 수 없다는 죄책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마태복음 15:7-9에서 예수는 공허한 전통과 의식을 행하는 바리새인들을 책망할 때 이사야 29:13말씀을 인용하셨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나를 경배함은 다 헛것이라" 만일 예배로 드러나는 우리의 모든 표현들이 의식이나 행위보다 못하다면 우리도 역시 같은 책망을 받을 각오를 해야한다. 예배는 하나님이나 사람을 위해서 의무로 행하는 것이 아니다.
예배에 있어서 또 다르게 고려할 문제는 균형과 불균형의 문제이다. 우리가 늘 하던 것과 다른 표현들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제한할 수 있다. 우리는 또 모든 예배의 표현들이 이미 확립된 예배순서에 영향을 준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성령에 대해 민감하고 기꺼이 우연해지면 예배의 새로운 길을 열 수 있다. 사실 능력 있는 예배의 새로운 길을 열 수 있다. 사실 능력 있는 예배의 표현은 우리 주님 앞에 잠잠히 침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터져 나오는 노래를 기다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쉽게 기대될 수 없다.
우리는 너무 자연스럽거나 독창적이며 혹은 너무 전통적이며 의식적인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우리의 예배방법과 형식만이 훌륭한 것처럼 믿으려는 경향이 있다. 만일 마음 안에 있는 것이 예배라는 사실을 우리가 바르게 알고 있다면 예배 드리는 마음을 반영하는 어떤 다른 방식들도 더 쉽게 수용할 수 있게 된다. 기독교에서 가장 위대한 예배 표현들은 섬김과 복종이다. 예배하는 마음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한 헌신된 마음이며 그분을 대신하여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다. 마음속에 있는 사랑과 하나님께 대한 헌신이 진실로 표현된 접시닦는 일도 대단한 예배의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예배는 우리가 행동하고 말하는 가운데서 날마다 성숙되는 생활 양식이 되어야만 한다.
2) 예배와 찬양은 목회의 일부이다.
모든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완전한 관점에 달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하나님을 알아간다는 것은 삶의 긴 과정들을 거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중의 몇몇은 하나님에 대한 매우 부정적인 인상들을 받아들여서 우리 마음을 요동하게 한다. 우리의 적이 가장 바라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진리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다. 어쨌든 지금은 오직 우리의 잘못들을 없애버리신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똑바로 볼 시점이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명확한 형상을 대면할 때 예배는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다.
2. 찬양을 통한 병의 치유
교회 역사를 통해서 보면 모든 영적 부흥운동은 위대한 찬양과 함께 하나님께 경배 드리고자 하는 욕구로 일어났다. 주님의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고 찬양을 할 수 있도록 강한 욕망을 불어넣어 준다. 영적 부흥을 기대하는 교회마다 진지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바로 예배에 관한 것이다. 만일 교회가 영적으로 갱신하며 부흥하길 원한다면 무엇보다도 습관적, 형식적으로 드려지는 예배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야 한다. 경배와 찬양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그 능력을 체험한다면 냉랭하고 닫혔던 마음, 돌덩어리처럼 단단하게 굳었던 차가운 감정들이 녹아짐을 볼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이 단순한 외침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날 것이며 그때 상한 심령이 치유함을 받고 자유함으로 주님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1) 복음과 찬양의 관계
하나님의 복음은 반드시 영적인 열정과 능력이 터져 나오게 한다. 초대교회의 복음은 신학적인 이론이나 심리적인 선동이 아니었다. 복음을 믿음으로 받은 이들은 큰 감동과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 그러기에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가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영적인 열정과 능력은 자연스럽게 찬양의 노래들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 노래들도 처음에는 유대교에서 물려받아진다. 이미 유대교에서는 오래 전부터 번갈아 부르는 찬송들이 있었다. 많은 시편들은 예배 시에 대중이 함께 부르도록 만들어졌다. 성가대들도 조직되어 있었다.(참조 스가랴 3:11, 느헤미야 12:24.31). 한 사람이 노래하면 희중들은 후렴을 따라서 반복하는 찬송도 있었다. 이러한 형식들은 그대로 복음의 공동체에 이어져 내려왔다. 구약의 시편은 그대로 찬양으로 이용되었고 예언서들도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읽혀졌다. 사실상 애매하던 구약의 내용들이 그리스도로 인해서 명백해진 것이다.
예배의 열쇠는 하나님을 아는 데 있다. 요한복음 17:3에서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기독교인의 마음이 주님 앞에 부복하지 못하는 단 한가지 이유가 있다. 우리의 예배가 그렇게 부족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충분하고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알아오지 못했다. 우리 모두는 마음속에 하나님이 주신 꿈과 비젼이 있다. 그런데 이 비젼이 현실과 맞지 않을 때가 자주 있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며 적어도 완전하지 못한 것이다. 만일 이 비젼이 놀라우시고 친절하시고 사랑과 인자, 신실, 온유가 풍성한 하나님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성심껏 예배드리는 데 방해가 될 것이다.
우리들 중 몇몇은 결코 하나님을 만나려는 시간을 갖지도 않고 있으며 하나님에 대해 어린 시절에 받은 인상들에 만족하고 있는 편이다. 예배를 드리려고 '애쓰다' 기독교인은 게으른 기독교인이다. 그는 매일 규칙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하기를 회피하고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가르침과 교훈을 찾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와 참으로 하나님이 누구인가 하는 진리에 대한 고취를 필요로 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진리의 영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요4:24)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려면 신령과 진정으로 해야 한다고 했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에 의해서 우리 마음에 심겨진다. 성령에 의해서 우리 마음에 심겨진다. 성령의 계시를 위해서 그분의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구함으로써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가까워 진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며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예배하는 것이다. 우리가 찬양과 기도와 다른 표현들을 통해서 다같이 예배드릴 때 우리는 하나님을 찬미하게 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그의 음성을 더욱 완전하게 듣게 되도록 서로를 결려하며 서로를 돕게 된다. 예배 안에서 우리는 완전하게 하나님께 집중한다. 우리의 생각들, 우리의 감정들이 모두 그분의 것이 되며 고도로 집중함으로써 우리는 그분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자세를 더욱 더 잘 돌아 볼 수 있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께 초점을 맞출 때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키고자 하는 것들을 더 잘 알 수 있게 된다. 우리가 더욱더 명백하게 하나님을 알 때 우리의 믿음도 자라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들은 더욱 완전히 그분의 것이 된다. 찬양과 감사가 자유롭게 넘치게 된다. 또 서로서로 하나님의 위대함과 축복하심에 대해 선포하는 일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돕는 것이며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비젼을 견고하게 해준다.
2) 건강, 질병, 치유의 개념.
(1) 건강의 개념
건강이란 인간이 전인적 구성 요소들, 사람들, 자연환경, 사회, 경제, 정치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하고 정상적인 상태로 회복되어 평안과 화해를 이루고 생명력과 역동감이 흐르는 상태이다. 이것은 구원받은 사람이 모든 관계에서 그리스도의 충만함(엡4:13)이 넘치는 총체적 건강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사모 하는 영성적 상태이다. 현대의 건강 개념은 단순히 질병이나 허약함, 불구(不具)가 아닌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제는 환자가 자신의 질병과 건강상태에 대해 '아는 권리'까지 포함된다. 따라서 가장 건강한 사람은 모든 질병과 파괴력으로 부터 건전한 상태와 자유를 누리면서 모든 관계와 정상적인 관계를 맺고 성령의 생명력을 가장 풍성하게 향유하여 성장 가능성을 향해 점점 성화구원을 이루어 가는 과정 속에 기쁨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건강은 다시 육체적 건강, 정신적 건강, 영적 건강, 사회적 건강, 자연 환경 적 건강으로 세분화된다. 따라서 건강의 개념은 전인과 전 환경을 통합한 통전 적 건강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2) 질병의 개념
질병은 자신, 이웃, 전환경이 하나님과 질서 관계가 깨어져 온전하지 못한 상태이다. 조직체의 규칙적인 반응에 의해 연합된 사물들의 집합 안에서 어떤 것이 고장난 상태나 조직체의 '부적응', '부조화' 상태가 질병이다. 그것은 상호기관의 작용이 깨어져 균형을 잃어버린 비정상 기능의 상태이다. 그 결과 인간의 전인적 구성요소의 상호관계와 전환경 영역관계가 원활하지 못해서 구속적 치유와 성장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가 질병이다. 질병에는 육체적 질병(Somatic Disease, Somatopathy), 정신적 질병(Psychopathy), 적질병(Spiritopathy), 전환경적 질병(Enviromentopathy), 그외현대에 많이 나타나는 정신과 신체적 질병(Psychosomatic Disorder),영적. 정신적 질병(Spirit Psychotic Disorder)과 영적, 정신적, 신체적 질병(Humanopathy, Anthriopopath) 이 합병증으로 나타나는 질병도 있다. 요즘은 자연환경의 생명력과 생태계가 파괴된 상태도 병리적 징후로 본다.
(3) 치유의 개념
일반적으로 치유 개념을 논 할때, 그것은 구원(Soteria)과 뗄 수 없는 유기적 관계임을 알게된다. 구원(독: Heil)은 건강, 치유의 뜻을 나타내는데, 영적 구원뿐 아니라, 육체적 치유와 구원도 의미한다(마1:21;딤전1:15).
따라서 통전 적 치유 목회학에서 말하는 '치유'개념은 전인적 인간구원은 물론, 인간이 살아가면서 발생된 다양한 영역(정치, 경제, 교육, 사회, 문화, 인간관계, 환경, 생태계, 과학 등)의 사회공동체 구원이라는 거시적 안목으로 고찰한다.
그러므로 치유(Healing)는 단순히 병들기 이전 상태로의 회복만이 아니라, 인간의 전인 요소와 그가 관계하는 전체 환경에서의 삶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과의 생명 관계 속에서 성장 가능성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정상적인 상태로의 회복을 의미한다.
교회의 치유사역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이었던 레슬리 웨더헤드(Leslie D. Weatherhead)목사는 "치유란 인간으로 하여금 그 육체가 물질적인 세계에서, 정신이 참된 이상의 영역에서, 그리고 영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온전하게 작용할 수 없게 된 왜곡된 상태로부터 벗어나 조화로운 삶을 되찾을 수 있도록 해주는 과정"이라고 한다.
결국, 치유란 무질서하고 통합되지 못해 소외되고 타락된 비정상 상태에서 정상 상태로 회복하는 과정이다. 치유는 창조 당시의 전인적인 인간구원과 사회공동체 구원을 위한 총체적 회복과 성장 과정이다. 이것은 이 땅위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사단의 통치가 추방되는 영적 전쟁에서의 그리스도의 승리이다.
3) 질병의 발생과정과 음악의 역활
(1) 질병의 원인
질병의 원인에 대해서는 현대의학이나 한의학 또는 기독교적으로 모두 다른 관점에서 말한다. 그러나 몇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즉 건강을 회복시키려는 질병치유의 목적, 질병원인의 다양성, 질병의 원인끼리의 상호관련성, 질병은 장시간에 걸쳐 발생된다는 점 등이다. 또한 기독인들의 공통점은 질병의 근본 원인을 죄(Sin)로 본다는 점이다. 필자는 건전한 현대의학과 한의학, 자연 치유학, 성경적 치유자들이 말하는 질병의 원인설을 수용하면서 질병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분류하고자 한다.
첫째, 잘못된 생활양식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생활양식 즉, 불순종의 결과이다. 불순종은 즉각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를 깨뜨리고 올바른 인간관계의 균형을 깨뜨린다. 그렇게 되면 다음의 평안이 깨어져 질병의 원인이 된다. 몸의 기능과 생명의 리듬에 역행하여 살아가는 생활양식이나 무절제하고 무질서한 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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